#11
<2> 극야
월동 준비를 마친 숲에서는 눅눅한 낙엽과 향기로운 흙냄새가 났다.
흐릿한 한낮, 바람은 없었으나 기온은 낮았다.
하늘에 떠 있는 단 한 개의 태양이 연약한 햇빛으로 대지를 밝히고 있었다.
이제 곧 저 마지막 태양도 떨어지고 왕국에는 낮 없는 겨울이 찾아올 것이다. 기나긴 극야(極夜).
거친 말발굽 소리가 숲의 정적을 찢었다. 헐떡거리는 사냥개들이 침을 질질 흘리며 땅을 박차고 질주했다. 새들이 날아오르고 숲 전체가 푸드득 뒤흔들렸다.
퍼억! 누군가의 화살이 달아나는 수사슴의 옆구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컹컹컹! 컹컹컹컹컹! 피 냄새에 눈이 돌아간 개들이 달아나는 사슴을 미친 듯이 뒤쫓았다.
대공은 승마를 즐기는 기분으로 설렁설렁 사냥 무리를 쫓아 말을 몰았다. 달아나는 짐승에게 화살을 쏘며 스트레스를 푸는 취미는 없었으므로, 그의 태도는 시종일관 무기력했다.
이 사냥은 첫째 왕자 나일의 초대였다.
그는 스물세 살의 대공보다 여섯 살이 많았고 국왕의 세 번째 자식이자 파살리아의 첫 번째 왕자, 그보다 보편적으로는 비스키우스 대공작으로 불렸다. 그러나 인생의 전반을 도르센에서 보낸 대공과 달리 봉토 비스키우스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제법 다재다능한 사나이로 알려져 있으나 불행히도 연년생 손위 누이 아르바의 기량에 밀려 크게 눈에 띄는 인사는 아니었다.
“왕녀 전하께서 자리를 비운 틈에 자기 세력을 키울 생각일지도 모르지요. 뭐. 제법 성대한 사냥 모임이 아닙니까?”
오스발이 장궁 시위를 만지작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닛사가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이런 사냥 모임에 끌려 나온 것을 대단히 불쾌히 여기고 있었으나 아무튼 대공을 호위하는 그녀 본연의 목적에는 충실했다.
“그럴 만한 위인도 못 된다.”
“글쎄요. 그건 두고 봐야 아는 거 아닙니까?”
오스발이 화살을 시위에 먹여 무성히 자란 나뭇가지 사이를 향해 겨누면서 대꾸했다.
“어떤 놈들은 자기 속내를 기가 막히게 잘 감추지요.”
그가 시위를 놓았다. 피잇! 화살이 쇄도하는 것과 동시에 푸드득 하고 나뭇가지 틈에서 멧비둘기가 날아올랐다. 화살이 가엾은 산새의 눈알을 꿰뚫었다.
닛사가 혀를 찼다.
오스발이 말에 박차를 가해 앞으로 나아갔다. 곧 그가 화살에 꿰인 멧비둘기를 들고 돌아왔다.
“어느 쪽이든. 이번 기회에 알아볼 수 있겠지.”
대공이 그렇게 대답했다.
오스발이 그의 곁으로 말을 몰았다.
“모르는 사람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그래도 손위 형제가 아니십니까?”
그 질문에 대공은 코웃음을 쳤다.
“기억도 안 나.”
“전혀 말입니까?”
“그래. 전혀.”
대공이 어깨를 으쓱하는 것과 동시에 멀찍이서 사냥 대열의 위치를 알려오는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그들은 대열에서 지나치게 뒤처졌다. 대공이 말고삐를 느슨하게 풀며 서서히 속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닛사와 오스발이 그의 곁에서 함께 달렸다.
어차피 이런 것은 그림자 마수를 상대로 하는 도르센의 전쟁에 비하면야 그야말로 간질간질한, 말 그대로 사냥 놀음이었다. 대공을 비롯해 오스발, 닛사 어느 쪽도 이 짓거리에 진지하게 참여할 생각은 없었다.
“하긴. 십일 년 전이던가요. 기억이 안 날 만도 합니다.”
오스발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기억이 난다 하더라도 그때는 비스키우스 대공작도 어렸으니 지금 같은 인물은 아니었겠지.”
“그것도 그렇겠습니다.”
닛사의 점잖은 한마디에 오스발이 한 손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대공은 그의 손위 형제에 대해 정말로 기억나는 바가 없었으므로 그 대화에 끼어드는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누님과 사이가 좋지는 않다 들었다.”
“아직까지는 크게 말이 나오지는 않고 있는 걸로 압니다.”
“누님의 세력이 크고 파살리아의 권력 다툼은 누님과 국왕 사이에 집중되어 있으니 비스키우스 대공작 얘기가 사람들 화제에 오를 일도 없었겠지. 누님과 대놓고 대립할 일도 적었을 거고.”
“그래도 비스키우스는 왕국에서 손꼽히게 풍요로운 땅입니다. 대공작의 외가도 아직 쟁쟁하고요.”
오스발의 말에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살리아의 첫째 왕자.
적일지 아군일지. 그쪽에서 먼저 이렇게 다가온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지.
대공의 긴 눈에 얼핏 여유로운 눈웃음이 흘렀다.
“누님이 돌아오시면 우린 어차피 여길 떠난다. 크게 척을 질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아주 견제를 풀 필요도 없어. 적당히 살펴보며 맞춰 주는 정도면 충분하겠지.”
겨울이 지나면 코르키라에 출정했던 아르바가 돌아온다.
그때가 되면 팽팽하게 당겨진 끈처럼 긴장된 파살리아의 권력 구도도 느슨해질 것이다. 어느 쪽으로 끊어지든 간에 말이다.
닛사가 흐음, 하면서 자신의 장식용 단궁을 한 번 튕겼다. 사냥을 위해서 팔찌를 모두 빼놓은 그녀의 손목에는 두꺼운 가죽 보호대가 둘러져 있었다.
“뭐 저희에겐 그런 것보다는 더 긴요한 다른 화제가 있죠.”
나이든 마법사가 그렇게 말하며 대공을 돌아보았다.
대공이 그녀를 곁눈질했다.
“그자의 치료 말입니다.”
“확실히 효과가 있어.”
대공은 짧게 대답했다.
효과가 있다마다.
그 한 그릇의 물약은 지난 칠 년간 대공이 시도했던 그 어떤 주술, 비약, 마법보다 뛰어났다. 더구나 아무 고통도 수반하지 않는다는 점은 치료의 효용성을 떠나 흡족하기까지 했다.
대공의 입꼬리가 얼핏 느슨해졌다가 곧 다시 팽팽해졌다. 그는 닛사와 오스발을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보면 모르겠나?”
“모르긴요. 아주 티가 납니다. 요즘 들어 아주 목소리에서 펄펄 기운이 나시는 것이….”
오스발이 킬킬거리면서 지껄여 댔다.
“뭔가 특이한 약초라도 쓰는 걸까요? 별다른 걸 넣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말입니다.”
“뭔갈 했다면 주술이겠지.”
닛사가 조용히 대꾸했다. 주술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없는 오스발은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뿐이었다.
대공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그게 정말 정화술일까?”
“뭐라고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정화술의 비전은 신전마다 다르고, 그나마도 오라스테스의 전쟁 이후에 대부분이 소실되었죠.”
“닛사 경은 정화술을 쓰는 사제를 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있지.”
오스발의 질문에 마법사의 검푸른 눈이 과거를 더듬으며 흐릿해졌다.
“뛰어난 사제들은 수백 마리의 그림자 마수를 일순간에 흙으로 돌려보내고 부상자들을 낫게 하며 썩은 우물물을 도로 맑게 했지.”
“그런 대단한 신관들이 어쩌다 다 죽은 겁니까?”
오스발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고, 닛사는 한숨을 쉬었다.
“그건 네가 그 전쟁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그 말에 오스발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몇 미터쯤 이미 앞서 달리고 있는 대공의 등을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들으셨습니까, 전하? 하기야 이 늙은 마법사 앞에서 전하나 저따위는 철없는 애송이로 보이겠지요.”
그리고서 그는 씩 웃었다.
“하지만 그런 애송이도 알아 온 건 있단 말입니다. 그 얼뜨기 말입니다. 조사해 보니 파살리아 출신은 아닙니다. 기껏해야 반년 전에 여기로 흘러들어 왔다더군요. 성벽 밖에서 구걸을 하던 걸 일손이 부족해 축사 총관이 데려와 돼지치기로 일하게 해 줬다덥니다.”
“파살리아 출신이 아니라고?”
“네. 어딘가 시골 촌구석에서 도망쳐 파살리아로 흘러들어 오기라도 한 거겠죠. 파살리아에 그런 부랑민이 한둘도 아니고 말입니다.”
곧 커다란 버드나무 몇 그루가 우거진 하천이 나타났다. 대공이 망설임 없이 말을 몰아 사람 무릎 높이의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차례대로 하천을 건넌 말들이 앞발을 들썩이며 물을 털었다.
애마의 목덜미를 두어 번 토닥여 준 대공이 입을 열었다.
“그놈의 정체가 무엇이든 그 약은 확실히 도움이 돼.”
“전하. 어떤 사술은 오랜 시간에 걸쳐 시행되기도….”
“나도 알아.”
대공이 가볍게 닛사의 말을 가로막았다. 단호한 대공의 말에 닛사가 입을 다물었다.
컹컹컹! 컹컹! 컹컹컹컹! 개들이 미친 듯이 짖어 대는 소리에 뿔피리 고동이 이어졌다. 대공이 느슨히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완만하게 굴곡진 구릉 반대편에서 입에 거품을 문 사냥개들이 사슴을 쫓고 있었다.
화려한 붉은 망토에 모피 목도리를 두른 첫째 왕자 나일이 이쪽을 향해 고함을 치고 주먹을 휘둘러 댔다.
“쏴! 얼른 그걸 쏴 보라고! 우리 아우 실력을 한번 보자!”
대공은 의욕 없는 표정으로 활을 들어 화살을 시위에 매겼다. 그는 사슴을 향해 화살을 이리저리 겨누다가 아무렇게나 손을 놓았다. 화살이 사슴의 머리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 곁의 엘더 나무 기둥에 퍽 하고 박혔다. 화살 깃이 바르르 떨렸다.
“제기랄! 아슬아슬했잖아!”
나일이 웃음을 터트렸다.
왕자와 그 무리가 말을 달려왔다. 나일은 대공의 곁으로 말을 가까이 붙이며 짐짓 호탕한 척 씩 미소를 지었다.
“아까웠어. 안 그래, 동생?”
대공의 긴 눈이 가느스름해지며 눈꼬리가 밑으로 꺾이고 잘 꾸며 낸 양순한 눈웃음이 떠올랐다. 완벽한 양감의 입술이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 때문에 사슴을 놓쳤으니 사죄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사죄는 무슨.”
나일이 킬킬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