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왕국의 막내 왕자가 도르센의 대공 작위와 함께 파살리아에서 추방당한 것은 십일 년 전이었다. 당시 고작 열두 살에 불과했던 섬약한 소년은 혹독한 도르센을 버텨 내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가 열여섯 살 때 전염병이 도르센을 휩쓸었다. 어린 대공이 살아남으리라 생각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살아남았다.
심한 열병을 앓고 깨어난 그는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하였고, 그 이후로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전쟁에 몰두하여 도르센 인근의 그림자 마수들을 몰아내고 왕국의 서쪽 방벽을 다시금 굳건하게 지켜 냈다.
그것이 칠 년 전이다.
이 칠 년이라는 시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 칠 년은 저쪽 시간으로는 대략 6.72개월에 해당하는데, 이는 신성 재판이 끝난 시기와 비슷했다.
아리안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최대한 빠르게 출발했으나 이곳에서는 칠 년이 흐르고 만 것이다.
그 칠 년간 칼릴의 상처는 착실히 그 크기를 벌려 이제는 이 다차원 생물의 절반을 뒤덮는 깊은 블랙홀이 되었다.
아리안은 늦었다. 더 서둘렀어야 했다.
그러나 아직은 돌이킬 수 있었다.
아리안은 망설임 없이 엄지를 물어뜯었다. 피가 흘러 대접 안으로 주르르 떨어졌다. 대접 안의 물에 핏방울이 번지며 둥근 파문을 그렸다. 금빛 광채가 퍼지다가 빛이 새어 나오며 물이 점차 색을 바꾸어 갔다. 곧 그곳에서 달착지근한 향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주 오랫동안 농숙된 포도주의 향기나 무르익어 썩기 직전의 과실향을 닮았다. ‘물을 포도주로….’ 아리안은 속으로 작게 주문을 외웠다.
닛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 아리안이 들고 있는 그릇 안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칼자루에 손을 대고 있던 오스발의 손끝도 움찔거렸다.
두 남녀가 시선을 짧게 교환했다.
아리안은 자신의 등 뒤에서 오가는 시선은 단 1그램도 신경 쓰지 않고 사기대접을 양손으로 받쳐 들고 몸을 돌렸다.
대공이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리안은 대공에게 그릇을 건네기 전, 그것을 들어 올려 한 모금 크게 꿀꺽 삼켰다. 그의 목울대가 꿀렁 흔들렸고, 그 뒤에야 그는 그릇을 대공에게 내밀었다.
“자.”
대공은 몇 초쯤 잔과 아리안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이 아리안의 손을 감싸듯이 그릇을 잡았다. 그릇 하나를 사이에 둔 채 두 손이 겹쳐졌다.
아리안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대공이 그릇의 내용물을 발밑으로 쏟아 버릴까 봐 두려웠다.
“독 같은 건 넣지 않았어. 방금 내가 마시는 걸… 제가 마시는 걸… 봤잖아요.”
그는 황급히 단어를 고쳐 말했다.
대공의 조각 같은 얼굴에 냉소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이 저주를 없애기 위해 했던 짓거리들을 생각하면 고작 물에 피를 섞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단번에 대접 안의 내용물을 들이켰다.
***
늦은 오후, 아리안은 닛사의 초대를 받았다. 물론 강압적인 방식이었다.
축사 일꾼으로 가장한 병사 두 명이 아리안을 등 뒤에서 덮쳤다. 그들은 아리안을 물동이에 넣고 위에서 뚜껑을 닫았다.
아리안이 항아리에서 나왔을 때 앞에 서 있는 건 녹색 로브를 입은 닛사였다. 그녀는 모자를 쓰지 않고 새치가 섞인 반백발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가 아리안을 향해 손을 까닥 흔들어 일어서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리안은 화내려고 했으나 타이밍을 놓쳤다. 그는 대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방이었다. 벽에는 두꺼운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으며 반대편 벽의 벽난로에서는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방 가운데에 긴 탁자가 놓여 있었는데 그 위의 향로에서는 약간 매콤한 향기가 풍겼다. 여러 개의 의자가 무작위적으로 탁자 맞은편과 벽난로 근처에 흩어져 있었다.
아리안이 방을 힐끔힐끔 살피던 때, 닛사가 소매에서 묵직한 자루를 꺼내 탁자에 내려놓았다. 쿵, 하고 제법 커다란 소리가 났다.
“대공 전하의 씀씀이니라.”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자루를 아리안의 손이 닿는 위치까지 밀었다.
아리안은 머리를 약간 기울이면서 그 자루를 바라보았다.
쯧, 닛사가 혀를 찼다. 그녀가 손을 뻗어 자루 주둥이를 벌렸다. 자루를 묶은 끈이 느슨해지면서 안쪽이 드러났다. 번쩍거리는 금화가 굴러떨어졌다. 아리안의 얼굴이 굳어졌다. 직후, 그는 양손으로 자루를 꽉 움켜잡아 도로 닫았다.
“이, 이게, 이게 다 뭐예요?”
닛사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대공 전하의 씀씀이라 이미 말하였다.”
“하지만 이건….”
“오해하지 마라. 이건 뇌물이 아니다. 이건 정당한 대가다.”
그녀가 아리안을 향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으나 이전처럼 적대적이지만도 않았다.
아리안은 금화가 가득 담긴 가죽 주머니에서 손을 떼지도, 그렇다고 그것을 품으로 은근슬쩍 집어넣지도 못한 채 이도 저도 못 하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어요.”
“네가 뭘 바랐든지 상관없이 대공 전하께서 대가를 정하신다.”
아리안은 시무룩하게 시선을 떨어트렸다.
닛사가 팔짱을 꼈다. 그녀의 손목에 걸린 수십 개의 팔찌가 철그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네 치료가 도움이 되었다는 의미다. 조금 더 기뻐하거라.”
“하지만….”
아리안의 눈은 이전보다 더 시무룩해졌다.
닛사는 그런 아리안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침묵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그녀는 충분히 바빴고 아직 본론은 꺼내지도 못했다.
“네 치료.”
그녀가 짧고 차가운 목소리로 운을 뗐다.
아리안이 녹색 눈을 들어 물끄러미 닛사를 응시했다.
닛사는 그 눈이 거짓말을 하는 자의 눈은 아니라고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주군을 닮은 데가 있어 사람을 직감만으로 섣불리 판단하지 않았다.
“저번 한 번으로 끝인 것이냐?”
“아니에요.”
아리안은 화제가 바뀐 것을 깨닫고 약간 침착해졌다.
“오염이 아주 깊어요. 한두 번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거예요.”
“그럼?”
닛사가 약간 안달하듯이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아리안 쪽으로 다가갔다.
“완치되는 게 가능한가?”
“가능해요.”
아리안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닛사의 회색 눈이 짧게 흔들렸다. 그녀는 아리안을 잠시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멈췄던 숨을 토해 냈다.
“얼마나 걸리지?”
“한 계절… 어쩌면 두 계절이 걸릴 수도 있어요.”
아리안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그는 속으로 셈을 하여 날짜를 계산했다.
재심을 청구할 수 있는 기한은 정해져 있다. 누구든 신성 재판의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고자 하는 이는 999일 내로 재심을 청구해야만 했다. 이곳에서의 백 년은 대략 저쪽에서의 8년에 해당하니, 999일은 이쪽 시간으로 약 34년…. 그러나 그 서른네 해가 온전히 그들에게 주어져 있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칠 년이라는 시간을 버렸다.
그리고 재심을 청구하기 위한 세 명의 동의표조차 아직 구하지 못했다. 메데이아가 그의 편을 들기로 했으나 남은 한 명은 대체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어쩌면 남은 한 표를 구하기 위해 999일의 대부분을 써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시간이 촉박한 것은 닛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두 계절….”
그러나 나이 든 마법사는 곧 냉철하게 자신의 감정을 감추었다.
“다음 치료는 언제지?”
“계산을 조금 해 봐야 해요. 태양과 별의 움직임을 봐야 하니까… 적어도 달이 한 번 완전히 이지러졌다가 차오르기 전까지는….”
“더 빠르게는 안 되는가?”
“안 돼요. 그건 극약 처방이에요.”
아리안 목소리는 단호했다.
성인(聖人)의 피는 칼릴과 같은 다차원 생물에게 치명적이다. 그것은 암흑물질을 핵분열시켜 보다 작은 쿼크로 분리하는 정화의 기능을 하지만, 동시에 다차원에 걸쳐 분포한 칼릴과도 같은 생물들에게 극약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아리안은 맑은 우물물로 그의 피를 희석하고 거기에 주술을 걸어 그것이 칼릴에게 미칠 악영향을 최소화했다.
악영향이 최소화된 만큼 효능도 떨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칼릴의 몸이 회복할 수 있도록 시간을 들여, 여러 번에 걸쳐, 아주 신중하게 접근해야만 했다.
닛사는 우격다짐으로 굴지는 않았다.
그녀는 여러 번 거듭 한숨을 쉬고는 약간 구부정하게 굽혔던 허리를 똑바로 폈다.
“그래. 그렇겠지.”
“…나도, 아니, 저도 최대한 빨리… 끝내고 싶어요.”
아리안이 용기를 내어 꺼낸 말에, 닛사는 그를 힐끔 곁눈질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가 몸을 돌렸다.
“일꾼을 한 명 보내마. 준비가 되는 대로 그자에게 말을 전하라.”
축객령이었다. 아리안은 그걸 알아차리고 그녀의 앞에서 물러났다.
방을 나오자 아까 아리안을 이곳으로 데려왔던 병사 둘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번에는 아리안을 항아리가 아니라 지붕이 있고 장막으로 둘러싸인 작은 수레에 태웠다. 수레는 내성을 빠져나와 아리안을 축사 골목 으슥한 곳에 내려 주고 떠났다.
아리안은 떠나가는 수레의 바퀴 소리가 안 들릴 때가 되어서야 금화 자루가 여전히 자신의 손에 들려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금화 자루를 내려다보았다. 치료의 대가.
‘내가 널 돕는 게 대가라고….’
이유 없이 코끝이 시큰거렸다.
아리안은 입 속으로 ‘칼릴’ 하고 오로지 그만이 아는 대공의 이름을 속삭였다. 어쩌면 그는 아리안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분간은 도르센의 대공으로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