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안쪽으로 연결된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발등을 덮는 긴 로브를 입은 여자가 나왔다.
그녀의 양 손목에는 수십 개의 금속 팔찌가 걸려 있어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쩌렁쩌렁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가 바닥에 엎어져 있는 아리안의 앞까지 다가왔다. 성마른 얼굴이 아리안을 내려다본다.
아리안은 그녀를 기억했다.
이전 날 대공의 곁에 서 있던 마법사. 닛사였다.
무표정한 마법사는 팔짱을 끼고 서서 아리안을 가만히 응시했다. 숨 막히는 침묵이 더 이어졌다.
아리안은 견디지 못하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소리가 예상외로 커서 그가 흠칫한 순간, 닛사가 입을 열었다.
“일어나서 따라와라.”
그리고 그녀가 몸을 돌렸다.
아리안은 당혹스럽게 눈을 몇 번 깜빡거리다가 그녀가 들어왔던 문을 다시 열고서야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문 안쪽에는 천장이 몹시 높은 짧은 복도가 나왔다.
복도의 천장은 둥근 돔 형태였고 거기에는 마찬가지로 왕국의 전설과 신화가 가득 새겨져 있었다. 벽에는 황금 촛대가 걸려 있었으며 그것이 앞서 걷는 닛사의 발뒤꿈치에서 일렁거렸다.
아리안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그녀를 따라갔다.
복도 모퉁이를 한 번 꺾자 널찍한 내실이 드러났다.
내실은 긴 직사각형 형태였고 한쪽 벽에 검과 방패가 걸려 있었으며 반대편 벽에는 으르렁거리는 사자 머리가 수놓아진 커다란 깃발이 걸려 있었다. 벽난로에서는 다소 덥게 느껴질 정도로 불이 활활 타오르는 중이었다.
“전하. 그자를 데려왔습니다.”
닛사가 입을 열었다.
아리안은 그제야 그녀가 향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긴 우단 의자에 대공이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높은 베개를 베고 한쪽 발은 바닥에, 반대편 발은 의자 위에 올린 채였다. 그 발치에 구겨진 망토가 처박혀 있었다.
양초가 타는 매캐한 냄새에 섞여 피 냄새가 났다.
의자에서 세 발자국쯤 떨어진 곳에 대공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젊은 기사, 오스발이 검에 한 손을 올린 채 서 있었다. 그의 예리한 시선은 흔들림 없이 아리안에게 꽂혀 있었다.
대공이 흐릿하게 잠긴 눈을 돌려 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아리안은 움찔 어깨를 굳혔다.
“무릎을 꿇어라.”
닛사가 대공 대신 명령했다.
아리안은 우물쭈물 눈치를 살피다가 슬그머니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다행히 바닥에는 두꺼운 융단이 깔려 있어 차갑지도, 딱딱하지도 않았다.
아리안은 입 안이 바작바작 말라 가는 것을 느끼면서 대공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원하는 바를 말해라.”
그때 침묵을 깨고 대공이 말했다.
그 목소리는 끔찍한 고통을 참는 것처럼 갈라져 있었으며 단어 하나하나를 발음할 때마다 악문 턱이 꿈틀거렸다.
아리안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퍼뜩 들었다.
대공과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대공은 고통을 참는 듯했으나 표정은 여전히 딱딱했다.
“네가 날 치료할 수 있다 했지. 그 대가로 바라는 게 무엇이냐?”
“무슨 일이….”
아리안은 약간 넋이 나간 채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없다. 날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한 건 뭔가 바라는 바가 있기 때문이겠지. 정화술이든 알려지지 않은 주술이든 상관없다. 치료할 수만 있다면.”
대공이 아리안의 중얼거림을 단호하게 가로막았다.
아리안의 호흡이 조금씩 빨라졌다. 양 허파가 가파르게 울렁거렸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대가를 바란 게 아닙니다….”
그는 대공의 뒤에 버티어 선 오스발을, 정확히는 오스발의 허리에 매달린 칼을 힐끔힐끔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대가는 없어도 돼요… 나는, 아니 저는.”
“대가를 바란 게 아니라고?”
대공의 목소리는 냉소적이었고 언뜻 비웃는 것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그것이 어찌나 차갑고 섬뜩했는지 아리안은 마치 자신의 심장이 칼에 찔리는 것 같다고 느꼈다.
“전하께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니, 못 하시겠지만….”
아리안은 애써 띄엄띄엄 말을 이어 갔다. 식은땀이 이미 그의 등에 흥건했다.
“대공 전하와 저는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전에, 대공 전하께서 제 목숨을 구해 주신 적이 있어요….”
“내가?”
대공의 반듯한 미간이 설핏 찌푸려졌다. 푸른 눈이 아리안의 푹 수그린 정수리를 낱낱이 살폈다. 그는 기억을 더듬었으나 어디에도 이 얼뜨기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도르센 출신인가?”
“아, 아닙니다.”
아리안이 고개를 내저었다.
“다른 곳에서… 더 옛날에….”
아리안은 머나먼 과거를 어렴풋이 떠올렸다.
살인과 역병, 재앙, 도살과 살육의 별명을 가진 남자. 악수라고 불리는 남자가 아주 작은 호의를 발휘하였던 그 변덕스러운 순간을. 그 수많은 악명이 무색하게 다정히 손을 내밀어 아리안을 구원했던 바로 그 순간을.
아리안은 입술을 꾹 깨물어 눈물을 참았다.
적어도 이 진실만은 그가 알아주기를.
“대공 전하께서 절 구했으니까 그 보답을 하고 싶을 뿐이에요.”
대공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고통이 다시 엄습하는 듯 그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돋고 목울대에 퍼렇게 핏대가 섰다. 그가 이를 악문 채 아리안과 닛사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아리안은 다시 그 내실에서 쫓겨났다.
그는 초조하게 양손을 맞잡고 어두운 방을 왔다 갔다 맴돌았다. 고통으로 얼룩진 대공의 얼굴이 뇌리에서 떨어지지가 않았다. 이를 악물고 관자놀이에 핏대가 선 채로 고통을 참는 표정….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괴로움이 밀려왔다.
아리안은 그 상처를 알았고 원인도 알았다. 치료할 수 있다. 이 연약한 세계에서 오로지 아리안만이 그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었다.
한참이 지나갔다.
사실은 고작 십 분가량이 흘렀을 뿐이었으나 아리안에게는 적어도 반나절은 지난 것처럼 느껴졌다.
내실로 통하는 문이 다시 열리고 닛사가 걸어 나왔다.
마법사가 무표정하게 아리안을 바라보았다.
“정화술을 쓸 수 있다는 네 말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어디 한번 밝혀 보거라.”
그것은 아리안에게 치료를 허락한다는 한마디였다.
아리안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는 두 손을 모아 움켜잡은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요.”
“치료에 필요한 게 있으면 지금 말하라.”
“우물에서 갓 길은 깨끗한 물이면 돼요.”
그 뒤에 아리안은 황급히 덧붙였다.
“금속으로 만든 것이 아닌 그릇도요. 사기그릇이나, 아님 나무로 만든 것도 좋고…. 깊이는 이 정도쯤 되었으면 좋겠고 크기는 이만큼….”
닛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리안이 요청한 것이 모두 준비되었다.
닛사가 다시 문을 열고 아리안을 내실로 데려갔다.
대공은 ‘어디 한번 해 봐라’ 하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의자 뒤에는 여전히 산맥처럼 버티어 선 오스발이 칼자루에 손을 얹은 채였고, 닛사는 날카로운 눈으로 아리안의 행동 하나하나를 살피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바늘처럼 따가웠다. 그러나 아리안에게는 이제 의자에 길게 기대 누운 대공만이 보였다.
그는 무릎 높이의 낮은 탁자에 사기그릇을 내려놓고 장의자에 누운 대공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대공의 입술은 창백했고 관자놀이와 이마에 마른 핏자국이 엉겨 붙어 있었다. 흐릿한 불길이 그의 정수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워 반듯한 콧날과 미간 절반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두 눈은 ‘창백한 푸른 점’처럼 보였다.
아리안은 장의자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제가 상처를 봐도 될까요?”
대공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안은 그의 몸을 덮은 짐승 털가죽을 잡아당겼다. 털가죽이 의자 밑으로 떨어지며 그의 상반신이 드러났다. 셔츠는 진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아리안의 손이 피부에 달라붙은 그 셔츠 자락을 천천히 떼어 냈다.
“흐으으, 후윽….”
대공이 고통을 참는 신음을 흘렸다. 그의 호흡이 거칠어지며 램프 불길이 일렁거렸다.
땀으로 젖은 상체에는 몇 개의 흉터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삼차원적 상처보다 아리안의 시선을 더 끈 것은 따로 있었다.
근육으로 덮인 아름다운 등을 위에서 아래로 가르는 긴 칼 모양의 문신. 그리고 그 양옆으로 펼쳐진 기하학적 도형들.
아리안은 그 미개한 주술의 흔적을 천천히 손끝으로 더듬었다.
“나쁜 주술은 아니지만… 너무 조잡해….”
아리안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닛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버려 둬라. 이 자가 정말 정화술을 쓸 수 있다면 네 주술이 조잡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
대공이 낮게 속삭였고, 닛사는 휙 고개를 돌렸다.
아리안은 그 짧은 교환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그는 대공의 척추를 따라 내리꽂힌 검신을 따라 손을 움직였다. 그 손가락이 마침내 칼날 끝에 닿았다. 칼날이 꿰뚫은 형상의 추악한 흉터. 피부를 찢고 얽힌 육신의 흠집. 그리고 그 흠집은 점점 크기를 키워 그의 전신을 뒤덮어 가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심각한 상처였다.
이것이야말로 칼릴의 신체에 치유될 수 없는 흠집을, 죽음으로 이르는 변형을 남긴 상처였다.
이것이야말로 칼릴에게 성장하는 신체를, 필멸의 육신을 부여한 상처였다.
아리안은 잠시 대공의 눈을 바라보았다.
대공은 조용히 그를 마주 보았다.
“치료할 수 있겠나?”
그가 물었고, 아리안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안은 곧장 몸을 돌려 탁상의 대접을 들어 올렸다. 대공의 충성스러운 가신들이 여전히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시선을 꽂고 있었으나 아리안은 신경 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