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8)화 (8/130)

#08

국왕이 턱을 끄덕끄덕 흔들고는 다시 대공을 내려다보았다.

“이 파살리아는 다행히 궁정 마법사들의 희생과 노고로 안전하게 수호되고 있노라. 그러나 궁정 마법사들조차 신이 아닌 이상 모든 타락의 그림자들을 물리칠 수는 없겠지…. 아니 그러냐?”

“대단히 올바른 말씀이십니다.”

대공이 조용히 대답했고, 국왕은 흡족하게 끌끌끌 하고 웃음을 흘렸다.

“너를 의심하는 건 아니니라. 너는 짐의 아들이자 왕국의 충실한 신하가 아니더냐? 하나 네가 잉태된 태는….”

국왕이 희뿌옇게 백태가 낀 눈을 뱀처럼 가느다랗게 뜨고 대공을 노려보았다.

“안타깝게도 그 태가 부정된 것이었음은… 그건 짐의 죄악이기도 하다. 그런 삿된 여자를 총애하여….”

마법사가 국왕에게 다시 재빨리 무언가를 속삭였다. 아니옵니다… 폐하… 그것은 그 마녀의 죄로… 감히 미모로 폐하의 총기를 흐리고… 저주받은 태에 가장 귀한 씨를 훔쳐 내고야……. 대공은 구역질을 참으며 무대 위 그 한편의 희극을 바라보았다.

“그만. 너의 충정은 알겠노라, 마법사여.”

국왕이 왕홀을 다시 한번 들어 올렸고, 마법사가 허리를 깊게 숙이며 서너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아들아.”

국왕이 재차 왈왈 짖어 대기 시작했다.

“설령 네가 원하지 않더라도 너는 태생적으로 타락에 취약하며 악마의 그림자가 언제나 네 발치에 드리워져 있노라. 하지만 애통해하지 말라. 짐의 마법사가 너를 위한 정화의 묘약을 조제하였으니.”

그것과 함께 옥좌의 뒤편, 천장부터 내려오는 긴 태피스트리 뒤쪽에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또 다른 궁정 마법사가 소리 없이 걸어 들어왔다. 그 마법사는 양손에 금으로 된 쟁반을 공손히 받쳐 들고 있었는데, 쟁반 위에는 보석 박힌 커다란 황금 잔이 놓여 있었다.

대공은 거기서 풍기는 불길한 냄새를 맡았다.

마법사가 쟁반을 들고 옥좌 밑의 계단을 내려와 대공의 앞에 섰다. 쟁반이 대공의 앞으로 들이밀렸다.

“오라스테스의 전쟁 탓에 정화술을 쓸 수 있는 정결한 신관들은 이제 남아 있지 않지… 하지만 짐의 마법사들이 충정으로 밤낮없이 노력한 끝에 정화의 묘약을 이렇게 조제해 낸 것이다!”

다, 다, 다, 다아아…. 국왕의 외침이 긴 메아리를 남기며 알현실 천장에 울려 퍼졌다.

대공은 자신 앞으로 들이밀린 금배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안에서 걸쭉한 녹색 액체가 서서히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거기서는 기이한 냄새가 났다. 타락한 주술의 냄새… 대공은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천천히 두 손을 내밀어 잔을 들어 올렸다.

국왕이 마치 몹시 흥미로운 것을 기대하듯 백태 낀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는 마치 대공이 그것을 마실 수 없다며 내팽개치는 것을 기대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대공은 그러지 않았다.

“폐하께서 아들인 저를 생각하시어 정화의 묘약을 내려 주셨으니 아들 된 도리로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대공은 그 말을 남기고 잔을 기울여 내용물을 단번에 들이켰다.

로브 아래 마법사들의 눈이 번득였다. 그들이 아무도 모르게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잠시 뒤 대공은 천천히 잔을 도로 쟁반에 내려 두었다. 그의 반듯한 얼굴에는 작은 일그러짐도 없었다.

궁정 마법사가 쟁반을 들고 국왕에게로 돌아갔다. 국왕이 앙상한 손가락을 뻗어 한 방울도 남지 않은 그릇 안쪽을 더듬었다. 이윽고 국왕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리로….”국왕이 대공을 향해 손짓했다. 대공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옥좌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이제 그들 사이의 거리는 호흡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국왕이 마치 찬탄 같은 신음을 터트렸다.

“오오….”

거미발 같은 긴 손가락이 대공의 반듯하고 흠결 하나 없는 턱과 뺨을 더듬었다.

“그래, 내 아들아… 태는 삿된 것이었지만 씨는 내 것임이 분명하지… 이 젊음. 총명함….”

흐릿한 눈이 그 젊음을 탐욕스럽게 핥듯이 보았다. 탐나서 견딜 수 없다는 듯 비틀린 손끝이 아름답고 젊은 피부에 달라붙었다.

한참을 헐떡이던 국왕이 간신히 손을 떨어트렸다.

“물러가라.”

대공은 그의 명령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현실을 떠나는 그의 등 뒤에서 국왕의 거친 숨소리가 이어졌다. 마법사들의 기괴한 주문 소리 같은 속삭임도 울려 퍼졌다.

대공은 그의 거처로 돌아오자마자 신경질적으로 망토를 잡아 뜯어 발치에 집어 던졌다. 다급하게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동시에 긴 핏덩어리가 손바닥으로 쏟아졌다. 검은 핏덩어리는 삽시간에 손가락 틈을 벌리고 흘러내려 바닥으로 주르르 떨어졌다.

“전하!”

“대공 전하!”

닛사와 오스발이 희게 질린 채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청동상처럼 단단한 몸이 무너져 내렸다. 오스발이 그의 팔과 어깨를 부축해 장의자에 그를 앉혔다. 닛사가 자신의 소매로 그의 입가를 닦았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녀가 대공의 귓가에 대고 속삭여 물었다.

대공은 이를 악문 채 분노에 찬 목소리로 대꾸했다.

“국왕의 마법사들이 개수작을 벌였다.”

“뭘 드셨습니까?”

그때 대공이 다시 한번 피를 토했다. 검은 피에서는 지독한 냄새가 났다. 참혹한 얼굴을 한 닛사가 자신의 소매로 연신 그의 입술을 닦았다.

“독일까요? 놈들이 전하께 독을 먹였을까요?”

오스발이 고함치듯이 물었다.

“아니. 독은 아닐 거다.”

닛사가 대신 대답했다.

“독살이라면 조금 더 비밀스럽게 했겠지.”

그녀의 말이 옳았다. 국왕이 진정 대공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대공을 불러 독배를 건네는 대신 보다 비밀스러운 방식을 택했을 것이다.

“독이 아니라면 대체 전하께서 왜 이러신단 말입니까?”

오스발이 갑갑하다는 듯이 소리 죽여 외쳤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대공의 코와 입에서 흘러내린 검은 피와 그 호흡의 냄새를 맡았다. 납과 수은, 가시말초와 나팔꽃씨…. 그녀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독이 아니라도 전하를 곤경에 처하게 할 방법이 있지.”

“대체 그게….”

“11년 전 선왕비에게 그들이 한 짓을 잊었느냐?”

오스발이 드디어 입을 다물었다.

오라스테스의 전쟁이 끝난 이후 정화술의 맥이 끊겼다. 이제 저주의 유일한 치료법은 불에 태우는 것뿐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화형대 위에서 산채로 불에 탔다.

영리한 정치가들은 그걸 이용할 방법을 찾아냈다.

마법사들은 돈을 벌기 위해 저주처럼 보이는 검은 반점이나 흉터를 만드는 약을 조제했다. 약은 점점 정교해졌고 결국에는 아무 맛도 향도 없는 한 방울의 물약이 탄생했다.

청산가리와 수은은 덜 세련된 방식이 되었다. 많은 왕들, 공작들, 고위 사제들과 대부호들은 이제 다른 방식을 선호했다.

그건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수법이었으나, 문제는 그 약이 대공의 ‘진짜’ 저주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오스발이 낮은 욕설을 뇌까렸다.

그가 대공의 창백해진 얼굴을 바라보다가 초조하게 물었다.

“어떡할까요? 당장 부르조를 불러올까요?”

“길을 접는 마법을 여러 번 쓸 만한 마법사라고는 나뿐인데 내가 지금 대공 전하의 곁을 떠날 수는 없다.”

닛사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때 대공이 고개를 옆으로 젖히고 한 번 더 울컥 피를 토했다. 검은 핏덩어리가 쏟아졌다. 그의 몸이 고통으로 꿈틀거렸다.

그의 등을 가르고 있는 검은 저주. 그것이 암수를 뻗쳐 대공의 육신을 집어삼키려고 하고 있었다.

“오스발. 아편을 가져와!”

그녀가 새된 목소리로 외쳤고, 오스발이 곁방으로 뛰어들어가 아편즙이 담긴 병을 들고 왔다. 닛사는 대공의 입술에 대롱을 대고 아편즙을 흘려 넣었으나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밤이 지나갔다.

대공은 의식을 되찾았다가 다시 잃기를 밤새도록 반복했다.

“전하.”

새벽녘, 바닥에 무릎을 꿇은 닛사가 양손으로 대공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자를 불러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대공은 단번에 닛사가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정화술을 쓸 수 있다고, 자신이 대공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고 지껄여 대던 그 소년.

대공은 비관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시간도.

***

아리안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았다.

그는 정신없이 잠에 빠져 있다가 눈곱도 제대로 떼지 못한 채 우악스러운 병사들의 손에 잡혀 건초 더미 속에서 끌려 나왔다.

목깃 사이에 낀 지푸라기가 자꾸만 그의 목을 찔렀다.

돼지들을 제외하고서는 그 누구도 아리안이 끌려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병사들은 아리안을 커다란 자루에 넣어 노새에 실었다. 그리고서 기름을 옮기는 짐마차를 가장하여 내성으로 들어갔다.

아리안은 자루째로 어딘가 딱딱한 곳에 내동댕이쳤다. 섬세함이라고는 단 1그램도 찾아볼 수 없는 손길이 자루를 헤치고 그를 끄집어냈을 때에서야, 아리안은 자신이 어둡고 건조한 곳에 내던져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어두운 방은 한쪽 구석에 긴 촛대가 하나 세워져 있는 것을 제외하면 텅 비어 있었다. 일렁이는 촛불이 검은 벽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한쪽 벽에는 바닥까지 끌리는 긴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는데 거기에는 온갖 성인과 영웅들의 서사가 섬세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끼이이익! 그때 무거운 문짝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공기를 찢었다.

넋을 놓고 태피스트리의 아름다운 자수를 쳐다보던 아리안의 시선이 흠칫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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