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7)화 (7/130)

#07

“전하.”

그때 오스발이 대공을 재촉했다. 그는 여전히 주군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공은 오스발에게 얼뜨기의 목을 날려 버리라고 명령하는 대신 소리 없이 웃었다.

“내 저주라.”

그 혼잣말에 닛사와 오스발의 몸이 긴장으로 딱딱해졌다.

그 저주.

대공의 몸을 뒤덮은 저주는 칠 년 전 열병을 앓고 난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그 어떤 징조도 없었고 원인도 몰랐다. 그것은 처음에는 아주 작은 점이나 얼룩처럼 보였으나 그의 육신이 성장하는 것과 함께 성장하여 전신을 뒤덮었다.

신체를 잠식하는 불결함의 흔적. 그것은 그림자 마수의 하수인이라는 증거이자 저주의 피해자라는 증거였다. 둘을 구별하는 방법은 없다. 치료법은 하나뿐이다. 화형. 사악함에 침범당한 육신을 불로 태워 영혼을 정화하는 방법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게 저주의 피해자를 구원하는 방법이라 여겨졌다. 11년 전, 선왕비가 산채로 불에 던져졌던 것처럼.

물론 넋 놓고 화형당하는 것은 결단코 대공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대공은 저주를 풀기 위해 돈과 권력을 동원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했다. 까마귀 가면을 쓴 의사들은 그의 피부를 불로 지졌다. 사제들은 그를 앞에 두고 밤새도록 통성 기도를 하며 그에게 스스로를 채찍질하도록 시켰다. 수정 호수의 마녀들은 그의 몸에 냄새나는 진흙을 두껍게 바르고 독약을 마시게 했다.

효과가 있는 것은 적었다.

절망에 빠져 있던 그를 도운 것은 한 늙은 산지기의 조언이었다.

주술사들이 먹과 피를 섞어 그의 피부 위에 주술 문양을 새겼다. 문신은 저주가 펼쳐진 피부를 덮어 저주의 진행을 늦추었으나 완전히 멈추지는 못했으며 고통을 줄여 주지도 못했다. 그러나 대공에게는 그것만이 지금의 최선이었다.

최소한 저주의 흔적을 남들의 눈에서 감출 수라도 있지 않겠는가.

이제 그 저주에 대해 아는 자는 대공 본인을 제외한다면 그의 가장 충성스러운 가신들뿐이었다.

그리고 마치 거짓말처럼 이 소년이 나타났다.

저주를 고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소년은 첨예한 칼날 아래에서도 눈을 똑바로 뜨고 대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는 지나치게 반짝거려서 화창한 날 빛을 반사하는 호수 표면이나 수천 개의 면으로 섬세하게 세공된 에메랄드 덩어리 같았다.

그가 새처럼 지껄여 댔다.

“정화술이요. 전 정화술을 쓸 수 있어요.”

그 순간 검을 쥔 오스발의 손등에 힘줄이 돋았다. 닛사가 황급히 몸을 돌려 문가로 다가갔다. 그녀는 문밖을 한번 살핀 뒤 쿵 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문을 도로 닫았다. 그녀가 사나운 눈으로 소년을 노려다 보았다.

“정화술을 쓸 수 있는 사제는 오라스테스의 전쟁에서 거의 다 죽었다.”

“전부 다 죽지는 않았겠죠.”

그 당돌한 발언에 셋은 일제히 시선을 교환했다.

대답한 것은 다시 닛사였다.

“설령 네가 진짜 정화술을 쓸 수 있다 할지라도 주군께서 뭘 믿고 네놈에게 몸을 맡기신단 말이냐?”

“지금 급한 건 내가 아니라 그쪽….”

“죽고 싶으냐. 입조심해.”

오스발이 칼을 더 디밀며 으르렁거렸다.

칼끝이 소년의 목을 파고들었다. 얇은 피부가 약간 찢기며 핏방울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그것이 목덜미를 타고 젖혀진 목깃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그 단 한 방울에서 말도 안 되게 강렬한 향기가 솟구쳤다.

대공은 입 안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인내와 절제는 그의 인생 전반에 걸쳐 그가 체득해야만 했던 가장 귀중한 덕목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않은 허상처럼 느껴졌다.

결국 그는 소년 앞에서 몸을 돌렸다.

오스발이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대공은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알았으나 무시했다.

“쫓아내. 머저리의 허풍에 쏟은 시간이 아깝군.”

“허풍이 아니…!”

그 외침이 끝나는 것보다 오스발이 더 빨랐다.

오스발은 그대로 소년의 뒷덜미를 낚아채 방 밖으로 끌어냈다. 꽥꽥거리는 고함이 이어지다가 문이 닫히며 잠잠해졌다.

닛사가 대공에게 다가왔다.

“머리가 좀 이상한 녀석일 뿐입니다.  제정신 아닌 광인이 아무렇게나 던진 말일 테니 신경 쓰시지 마십시오.”

대공은 대답하지 않고 검지와 엄지로 자신의 턱을 어루만졌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정화술을 쓴다는 게 진짜일까?”

“거짓말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전하… 아시다시피 정화술 비전은 오라스테스의 전쟁 이후 끊어졌습니다.”

“만일 진짜라면?”

“그럴 가능성은 낮습니다. 정화술을 쓸 수 있는 자가 남아 있었다면 신전이 지금처럼 쇠락할 일도 없었겠지요. 설령 진짜라 할지라도 어떤 속셈을 감추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노릇 아닙니까? 만일 국왕의 끄나풀이라면….”

닛사의 건조한 음성이 대공이 지그시 눈을 감는 것과 동시에 끊어졌다. 그녀의 미간이 깊게 패었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잠시 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어 말을 끝마쳤다.

“눈을 붙여 알아보겠습니다.”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저주를 풀기 위해 시도했던 수많은 방법 중에 정화술은 없었다. 정화술을 쓰는 사제들은 오라스테스의 전쟁 이전에도 드물었고 전쟁 이후에는 모두 사라졌다.

주술 문신으로 덮어 낸 저주가 다시 고개를 들려고 꿈틀거렸다.

칠 년을 함께해 온 익숙한 고통이 그를 덮쳤다.

대공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단단한 턱이 고통을 참느라 꿈틀거렸다. 그것을 알아차린 닛사가 고개를 깊게 숙였다.

“약을 가져오겠습니다, 전하.”

“그래.”

대공은 대답과 함께 망토를 벗어 내팽개치고는 부츠 차림으로 침대에 올라가 몸을 던졌다.

그가 베개에 얼굴을 묻고 고통에 몸부림칠 때, 닛사가 와서 그의 입술에 대롱을 대고 마약을 흘려 넣었다. 아편이 곧 그의 두뇌에서 고통을 지웠다.

***

며칠이 아무 일 없이 흘렀다.

둘째 왕녀가 기사 백이십 명과 병사 삼천 명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다. 출정은 조촐했다. 왕녀와 그녀의 군대는 새벽을 틈타 고요히 파살리아를 빠져나갔다.

왕녀가 떠나자 파살리아의 분위기는 일변했다.

국왕의 미친 짓이 또 시작된 것이다.

그의 개수작은 수년간 꾸준히 반복되어 온 것이었으나 다행히 둘째 왕녀가 그것을 잘 조절하고 있었다. 그런 왕녀가 파살리아를 떠났으니 국왕만 살판이 났다.

국왕은 아마 자신의 막내아들을 떠보거나 또는 자신의 편으로 회유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겁을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굳이 한밤중에 대공을 부른 이유는 그것이 아니고서야 다른 이유를 생각하기 힘들었다.

국왕의 알현실은 넓고 어두웠으며 어딘지 음산한 습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공기는 무거웠다. 방의 한구석에서 벽난로가 타오르고 있었으며 모든 창문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혀로 핥는 듯한 습기가 피부에 촘촘하게 달라붙었다.

국왕은 이 불유쾌한 알현실 한가운데의 옥좌에 앉아 있었다.

그는 두꺼운 모피 망토를 걸치고 한 손엔 왕홀을 들고 있었다. 둘 다 백 살은 먹은 듯한 이 노인에게는 지나치게 무거워 보였다.

대공은 침착한 얼굴로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들이 부자 관계라는 사실은 놀라운 기적처럼 보였다.

왕과 대공은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었다. 대공은 키가 크고 건장했으며 젊고 아름다웠다. 램프의 불빛을 받은 금발 덕분에 왕관이 없이도 마치 빛나는 관을 쓴 것처럼 보였다. 그에게서는 강인함과 생명력이 흘러넘쳤다.

그에 비해 국왕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죽음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국왕은 대공의 아버지라기에는 지나치게 나이를 먹은 것처럼 보였다.

옥좌의 옆에는 마치 검은 그림자 같은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사가 서 있었다. 그는 마치 입 안의 혀처럼 살갑게 국왕의 곁에서 알랑거리고 있었다.

대공은 그를 처음 보았으나 단번에 그자가 아르바가 말하던 궁정 마법사 중 한 명임을 알아차렸다.

아무튼 대공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양순하게 국왕의 발치에 머리를 조아렸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오, 그래. 왔느냐.”

국왕이 살가운 척 대공을 반겼다.

“널 부른 건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서다.”

대공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들어 국왕을 올려다보았다. 국왕의 처진 양 눈가 밑에는 시든 고목처럼 주름이 자글자글했기 때문에 그 표정을 읽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요한 이야기라 하심은?”

“너 또한 우리 왕국의 권능이 사그라들며 그림자 마수들의 위협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니라. 뭐니 뭐니 해도 너는 왕국의 서쪽 방벽을 수호하는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지 않으냐? 왕국에 그림자가 불운처럼 드리워졌으니 군주로서 어찌 걱정하지 않을까!”

국왕이 지껄여 대는 개소리의 요점을 파악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대공은 대답하는 대신 얌전히 고개만 조아렸다.

다행히 국왕 또한 그에게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시든 고목 같은 노인이 왕홀을 든 팔을 약간 움직였다.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열 걸음 밖에 무릎 꿇고 앉은 대공에게까지 선명히 보였다. 마법사가 재빨리 옥좌 곁으로 다가가 국왕의 귓가에 대고 무어라고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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