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6)화 (6/130)

#06

아르바는 말을 빙빙 돌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 본인은 정치가라기보다는 군인에 가까웠다.

“조만간 출병할 생각이다.”

“겨울이 멀지 않았는데요.”

“그래. 겨울 전에.”

대공이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상체를 앞으로 숙여 둘 사이의 탁자에 손을 가져다 댔다. 검을 쥐는 커다란 손이 탁자 가운데를 짚었다. 아르바가 응대하듯이 몸을 길게 앞으로 뻗어 대공에게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대공은 그녀의 얼굴에 가까이 입술을 붙이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누님. 이 시기에 파살리아를 비우셔서는 안 됩니다. 국왕의 마법사들이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이번에 떠나시면 다시 돌아오는 것은 쉽지 않을 겁니다.”

“안다.”

아르바가 낮게 응답했다.

“그래서 내가 널 부른 것 아니겠느냐.”

“제가 온다고 뭘 어쩌겠습니까?”

“너만 한 실력자는 없지.”

그 말에 대공은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저더러 아부한다 하시더니 누님께서도 상당하시군요.”

“쓸데없는 소릴. 네 실력은 내가 잘 알아. 도르센의 상황도 십년 전 같지는 않고.”

그렇게 말하는 왕녀의 눈이 가느스름했다. 대공은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약간의 긴장, 경계, 친애의 감정에 뒤섞인 모호한 질시. 왕녀는 오랜 동맹이었으나 그것이 영원한 우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잠시 뒤 아르바가 다시 입을 열었다.

“궁정 마법사들이 국왕의 귀에 허튼소리를 흘려 넣고 있다.”

“하루 이틀 일은 아니죠.”

“물론 그렇지. 하지만 근래에는 도저히 두 눈을 뜨고 보아 넘기기 힘들 정도야. 특히 그놈이 나타난 이후부터는….”

왕녀의 얼굴에 냉소가 서렸다.

“놈이 왼손을 들라면 왼손을 들고 오른손을 들라면 오른손을 드는 꼴이란.”

“그놈?”

“그래. 궁정 마법사들의 장을 자처하는 놈.”

이건 새로운 정보였다.

대공의 눈썹 사이가 가볍게 좁아졌다.

“그 마법사는 어디서 온 자입니까?”

“아무도 모른다.”

아르바가 실소했다.

“어느 순간부터 국왕의 곁에 있었지. 일 년쯤 되었다. 국왕의 곁에는 원체 이전부터 주술사니 마법사니 하는 것들이 들락거렸으니까 처음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 국왕도 아직까지는 어느 정도 제정신을 차리고 있기는 한 것 같다만 만일 내가 파살리아를 비운다면….”

아르바는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응시했다. 벽난로의 불길이 돌벽에 일렁거리는 것을 잠시 응시하던 그녀가 다시 대공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만.”

“도르센을 오래 비워 둘 순 없습니다.”

“그 또한 알고 있다. 내가 거길 안 가 본 것도 아니고. 네가 내 허리의 반절 정도밖에 오지 않았을 때부터 너 대신 거길 방어한 것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과거의 도움을 꼬집는 발언에 대공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에게는 마치 꿈처럼 현실감 없이 흐릿하게만 느껴지는 과거였으나 아르바가 도르센을 도왔던 것만은 진짜였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야 누님이시죠.”

대답과 함께 그는 등을 안락의자의 등받이에 깊게 묻었다.

“봄까지는 기다리겠습니다.”

대공이 중재안을 던졌다.

“그 이상은 안 됩니다. 봄이 끝나기 전에는 돌아갈 겁니다.”

“그전에는 내가 돌아올 거다.”

“누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어찌 어긋남이 있겠습니까. 제가 칠백 명의 병사를 데려왔으니 절반을 코르키라에 가실 때 데려가십시오.”

거기서 두 오누이 간의 회담은 끝났다.

아르바가 먼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큰소리로 몸종을 외쳐 불렀고, 두 명의 시녀가 방으로 들어왔다.

“드레스가 준비되었습니다, 전하.”

“목욕하시면서 보석을 고르실 수 있게 준비해 두었습니다, 전하.”

두 시녀가 번갈아서 공손히 말했고, 대공은 이제야말로 자신이 떠날 때라는 것을 알았다.

“물러나겠습니다.”

그는 아르바를 향해 짧게 두 손을 모아 인사한 뒤 물러났다.

방을 나온 그는 자신을 기다리던 닛사와 오스발을 이끌고 왕녀의 거처를 떠났다.

왕녀의 거처는 왕성의 좌익에, 그리고 대공 본인이 머무는 곳은 우익에 있었으므로 제법 거리가 되었다.

사실 이는 이상한 일이었다.

파살리아 궁정은 중앙 성채를 가운데에 두고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왕실 가족들은 좌익에, 그리고 궁정 귀족들은 우익에 머물렀다. 도르센의 대공작이자 동시에 파살리아의 막내 왕자인 그가 궁정의 오른쪽 날개인 뱀의 탑에서 지낼 이유가 전혀 없었다.

대공 본인은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으나 부하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 쭈그렁바가지가 전하를 견제하는 겁니다.”

오스발이 지껄여 댔다.

“글쎄. 그게 완전히 국왕만의 생각이었는지는 모르는 일이지.”

닛사가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대공은 왕녀의 눈빛에서 읽었던 흐릿한 경계심을 그들에게 말하는 대신, 그저 걸음을 재촉했다.

파살리아 궁정 귀족들의 우습지도 않은 예법도, 하찮은 왕좌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가족 싸움도, 그에게는 아무 의미 없었다. 어차피 겨울이 지나면 그들은 파살리아를 떠날 것이다. 그리고 아마, 거의 분명히, 두 번 다시 파살리아에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수백 개의 무늬 없는 석주가 동일한 간격으로 줄지어 선 회랑을 걷는 내내, 대공은 어떠한 시선을 느꼈다. 그것은 마법사들의 끈적끈적한 시선이나 추적자들의 은밀한 감시의 눈길과는 달랐다. 그 시선은 아주 허술하고, 빈틈투성이에, 뺨이 따끔거릴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오스발이 목 뒤를 주물렀다. 그는 멋쩍게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슬쩍 걸음을 빨리하여 대공의 바로 옆까지 다가갔다.

“전하. 어쩔까요?”

그가 물었다.

“암살자는 아닌 것 같긴 한데… 잡아 올까요?”

그 질문에 대공은 코웃음 쳤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이 산뜻할 정도로 노골적이고 허술한 시선의 주인이 누구인지 절반쯤은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기다려 봐.”

대공이 그렇게 대답했고, 그와 도르센에서 유년기를 함께 보낸 호위 기사는 그 명령의 의미를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따라서, 그들이 뱀의 탑에서 서너 발짝 정도 떨어진 곳에 도달하자마자(이는 더 이상 국왕의 마법사들이 그들을 지켜볼 수 없는 안전 구역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번개같이 뛰쳐나가서는 그들을 따라오며 호시탐탐 힐끔거리던 덜떨어진 염탐꾼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오스발은 땍땍거리며 저항하는 염탐꾼의 팔을 뒤로 꺾어 붙잡고 입을 막았다. 그의 허리에 매달린 검을 발견했는지 염탐꾼은 곧 조용해졌다. 오스발이 놈을 대공의 응접실까지 데려가 대공의 발치 아래에 꿇려 놓을 때까지도 조용했다.

오스발이 놈의 두건을 벗겼다. 안쪽에서 건초 조각이 우수수 떨어지며 산발한 머리가 드러났다. 끔찍한 꼴이었다. 들어올 때부터 발을 절룩거렸는데 발에 맞지 않는 신발 때문인지 아니면 맨발로 돌계단을 달음박질쳐 달아난 것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제대로 말리지 않은 누더기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고 얼굴에는 상처인지 흉터인지 그도 아니면 검댕인지 알 수 없는 자국이 가득했다. 얼굴 위 녹색 눈동자만이 유다르게 반짝거려서 그 점만이 성을 돌아다니는 잡일꾼들과 다르게 눈에 띄었다.

대공은 자신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눈치를 살피는 염탐꾼을 내려다보았다.

역시나, 이틀에 걸쳐 그를 습격했던 간 큰 멍청이였다.

“목숨 귀한 줄 모르는군.”

대공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대공은 이미 그를 두 번이나 살려 보냈다. 세 번째도 그래야 할까?

“나, 나는….”

얼뜨기가 그렇게 입을 뗐다가 주변을 힐끔거렸다.

대공의 등 뒤로 석상처럼 버티고 선 닛사와 오스발의 눈치라도 살피는지 눈동자가 몇 번을 데굴데굴 굴렀다.

우스운 일이었다. 놈이 지금 가장 눈치를 봐야 할 대상이 있다면 그건 대공 자신이었다. 그의 가신들이 아니라.

“저는….”

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존댓말을 할 줄 알긴 아는 모양이었다. 제법 흥미로운 사실이었다.

“저, 저는, 저는 대공 전하를 도울 수 있습니다!”

바로 다음 순간 놈이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냅다 외쳤다.

“대공 전하의 저주요! 제가 고칠 수 있어요!”

그 순간 닛사의 눈이 샐쭉하게 찢어지고 오스발의 손이 검집에 닿았다. 검이 뽑혀 나오는 것은 삽시간이었다. 잘 벼려진 칼날이 놈의 목젖 아래를 눌렀다. 몇 초가 지난 뒤에야 놈에게서 히익, 하고 바람 빠지는 듯한 허약한 비명이 새어 나왔다.

오스발이 대공에게 눈짓을 보냈다.

‘처리할까요?’

그 눈빛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대공은 표정 없는 얼굴로 놈을 내려다보았다.

이 멍청이는 걸어 다니는 허수아비처럼 너덜너덜했고 한 손에 움켜잡힌 울새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오스발의 칼끝이 그 목젖을 섬세한 힘으로 찔러 누르고 있었다. 오스발이 아주 작은 힘이라도 더한다면 예리한 칼날은 즉시 저 연약한 피부를 찢고 덜렁거리는 머리통을 몸에서 분리해 낼 것이다.

그리고 피.

대공의 시선이 그 커다란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서서히 움직여 허름한 누더기 아래의 몸을 더듬었다.

그는 지난번 놈이 숨어 있던 나무통을 칼로 꿰뚫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의 칼날이 저 얼뜨기의 귓전을 스치며 피가 한 방울 튀었다. 단 한 방울. 기이한 일이었다. 대공은 그 희미한 피 냄새를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그것은 살육의 냄새, 또는 정사의 냄새를 닮았으며, 전장의 피와는 또 다른 방향에서 그를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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