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일반적으로 아리안과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 차원을 건너다닐 때 아바타를 사용하는 것과 달리 아리안은 자신의 신체를 가지고 여기에 있었다. 즉, 이곳에서의 죽음은 아리안에게 진짜 죽음을 의미했다.
차원의 미래나 세계의 종말보다 사사로운 죽음이 더 가까웠다.
아리안은 떨리는 눈으로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저주가 거짓말이라면 당신은 왜 문신을 새겼지? 저주를 숨기려고 새긴 거잖아.”
“이제는 협박인가?”
대공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되물었다.
아리안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고, 그리고 말을 더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후자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혀, 혀, 협박이 아니야. 나, 난 당신을 돕고, 돕, 돕고 싶어.”
이쪽 차원의 신격을 가장하는 것이 상황을 타개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면 그럴 수밖에.
“난… 정화술을 쓸 수 있으니까.”
대공이 아리안의 머리채를 잡은 손을 놓았다.
“재미있는 거짓말이야.”
그 손이 대신 아리안의 작은 턱을 난폭하게 움켜잡았다. 손가락이 아리안의 볼을 눌렀고 입술이 억지로 벌어졌다. 대공이 아리안의 입 안을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물론 오라스테스의 전쟁 이후 그 거짓말을 하던 자들은 모두 혀가 뽑혔지.”
“거, 거짓말이 아니야!”
물론 거짓말이었지만. 아무튼 그 정화술이라는 것도 아리안이 할 줄 아는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테니 절반쯤은 진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대공은 아리안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혀가 뽑히고 싶나 보군.”
좌절감을 넘어선 분노가 아리안을 덮쳤다. 그는 있는 힘껏 대공을 밀쳤다. 휘두른 손끝에 대공의 뺨이 스쳤다. 대공이 그를 밀치듯 놓았다. 몸이 뒤로 데굴데굴 굴렀다. 아픔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곧장 몸을 벌떡 일으켜 대공을 노려보았다.
“내가 예언 하나 할까? 당신은 내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될 거야! 나한테 와서 엎드려 울면서 도와 달라고 빌게 될 거라고!”
물론 그 뒤에는 대공의 표정 따위는 살피지도 않고 쏜살같이 바깥으로 내빼 버렸다. 계단을 구르듯 달음박질 쳐 내려오는 동안 등 뒤는 고요했다. 대공은 그를 쫓지 않았다.
***
대공이 파살리아에 귀환한 것은 대략 십일 년 만이었다.
그러나 기실 대공 본인에게 파살리아의 기억은 희미했다.
어렴풋한 유년기의 기억이라고는 마치 책으로 읽는 것처럼 현실감 없는 노쇠한 국왕의 기침 소리, 섬약한 왕비의 흐느끼는 울음소리, 열병으로 지새던 기나긴 겨울밤 따위뿐이었다.
대공에게 그 유년기는 마치 타인의 것인 양 멀게만 느껴졌다.
사실은 모든 것이 그랬다. 칠 년 전 지독한 열병에서 기적적으로 회생한 이래, 그 이전과 이후는 마치 선명한 선으로 갈라놓은 것처럼 분리되었다.
대공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가 멈추자 그의 곁을 따라 걷던 부하들이 함께 걸음을 멈췄다. 모두의 시선이 대공을 따라갔다. 대공의 눈길은 어둡고 적막한 회랑 한구석을 향하고 있었다. 대공의 오른팔인 닛사가 나섰다.
“처리할까요?”
그녀가 조용한 어조로 주군의 의향을 물었다.
대공은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저었다.
“내버려 둬. 여긴 파살리아다.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국왕의 마법사들하고 싸움이 붙어서 좋을 건 없겠지.”
닛사는 석주와 석주 사이의 천장 구석에 붙은 마법사들의 눈을 물끄러미 노려본 뒤 고개를 도로 떨어트렸다. 그녀의 검푸른 눈동자 또한 잠시 번득거리다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제게도 느껴질 정도인 걸 보면 필시 어마어마한 양일 텐데요.”
이번에는 오스발이 말했다. 그가 한 손으로 자신의 굵은 목을 주무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 일거수일투족을 죄다 감시하려나 봅니다.”
“전부 한 눈이다.”
닛사가 나직하게 대꾸했다.
“국왕의 눈이야.”
“휘유.”
오스발이 휘파람을 불었다.
“저 많은 시선이 전부 한 눈이라. 파살리아 마법사들이 실력 자랑을 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그가 호전적으로 말했다.
“닛사 경. 파살리아 마법사들에게 실력 좀 보여 주시죠?”
닛사가 쯧, 하고 혀를 찬 것과 동시에 대공이 대신 대답했다.
“가만히 있어, 오스발.”
대공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정면을 바라보며 그대로 말을 이었다.
“해도 내가 하니까.”
그들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대공이 다시 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닛사와 오스발이 그 뒤를 재빠르게 따라갔다.
긴 회랑 끝에 거대한 아치 형태의 석문이 있었다. 그 앞에 갑주 차림의 여자가 한 무리의 기사들을 거느린 채 서 있었다. 대공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대공은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귀환을 환영드립니다, 누님.”
파살리아의 둘째 왕녀가 그의 어깨에 양손을 얹어 그를 일으켰다.
“우습구나. 파살리아에서 널 반겨야 할 내가 도리어 네 환영을 받고 있으니.”
“제가 누님을 반기는 데 그런 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대공은 약간 허리를 숙여 그녀의 뺨에 키스했다.
둘째 왕녀 아르바는 여자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 머리 한두 개 정도는 튀어 올라올 만큼 키가 컸으므로, 장신인 대공조차 그다지 허리를 깊게 숙일 필요가 없었다.
“또 키가 자랐구나.”
“누님께선 여전하십니다. 나이를 먹지 않으시는 것 같군요.”
“아부하긴.”
아르바가 먼저 걸음을 옮겼고 대공은 그 바로 곁에 섰다. 다른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그들의 뒤를 공손히 따랐다.
“코르키라는 어떠셨습니까?”
“글쎄다.”
그녀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림자 마수들의 수가 심상치 않아. 아직 본격적으로 겨울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아르바의 붉은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못마땅한 기색이 왕녀의 안색에 수심을 드리웠다.
“지방 영주들이 아우성을 쳐 댄다. 지원 병력을 꾸려야 할 것 같아.”
“도르센에서 약간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올해에는 순무가 풍작이었거든요.”
대공이 짐짓 양순한 척 가슴팍에 손을 올리고 제안했다. 아르바가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금방 지워졌다. 무표정으로 돌아간 그녀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쉽지 않은 겨울이 되겠구나.”
왕국의 한 해는 항상 일정하다. 봄여름에는 농사를 짓고 가을에는 추수를 한다. 그리고 겨울은 전쟁의 계절이다.
매해 겨울, 왕국의 방벽 바깥에서 침입해 들어오는 그림자 마수들과의 전쟁은 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물려 내려온 왕국의 유산이었다.
대공과 왕녀는 계단을 올라가 왕녀의 거처인 고래의 탑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넓은 응접실로 들어가자 몸종이 뒤에서 문을 닫았다. 쿠웅, 나직한 소리와 함께 무거운 나무 문이 닫히고 적막이 응접실에 내려앉았다.
왕녀가 자신의 양손에서 긴 가죽 장갑을 난폭하게 벗겨내 바닥에 집어던졌다.
“도르센은 어떠하냐?”
“도르센이야 변할 게 있겠습니까. 파살리아는 어떻습니까?”
아르바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마찬가지다. 국왕은 만났느냐?”
“만났습니다. 뵙지 못하는 사이에 술이 느신 것 같더군요. 저뿐만 아니라 제 부하들까지도 술을 한 동이씩 마셔야 했습니다.”
“네가 술에 취해 말에서 나동그라지는 요행이라도 바란 거겠지.”
“그야말로 요행이로군요.”
“하! 그렇지. 요행! 그 늙은이가 바라는 요행이 그뿐만인 줄 아느냐?”
그녀는 빠르게 뇌까리며 자신의 망토와 부츠를 차례대로 벗어 던졌다. 그리고 허리띠에서 검을 풀어 한 손으로 움켜쥔 채 그대로 안락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검을 쥐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는 대공을 향해 손짓해 자신의 맞은편을 가리켜 보였다. 대공은 거절하지 않고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폐하를 뵈러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코르키라 시찰에 대해 궁금해하실 텐데요.”
“하아.”
아르바가 손등에 턱을 괴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야지. 하지만 그 전에.”
대공은 잠자코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애초에 그가 십일 년 만에 파살리아까지 그의 부하들을 이끌고 단걸음에 달려온 이유가 바로 이 왕녀의 부름이 아니었던가.
11년 전 대공의 모친이 왕비 자리에서 쫓겨나 화형에 처해진 것과 동시에 대공은 왕자로서의 지위를 잃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국왕의 아들이었으며 왕녀는 그의 이복 누나였다. 물론 그들 사이의 우정에 가까운 친애적인 감정이 단순히 혈연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최소 다섯 명의 배다른 형제자매가 더 있으니 말이다.) 모든 형제자매들 중 둘째 왕녀와 대공 사이에는 유다른 유대감이 있었다. 이는 전장에서 등을 맞대고 싸운 전우 사이에나 있을 법한 유대감이었고, 기실 그것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도르센은 왕국의 서쪽 방벽이자 최전선으로, 항시 그림자 마수와의 크고 작은 전투가 끊이지 않는 지방이다.
고작 열두 살에 그 험지로 쫓겨난 막내 왕자에게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 도움을 준 것이 이 둘째 왕녀였다.
물론 왕녀 나름의 정치적 판단으로 인한 선택이었으나 아무튼 그 결과는 지금의 동맹으로 돌아왔다. 열두 살 섬약하던 막냇동생이 마치 탈피한 것처럼 장성하여 그녀의 가장 커다란 우방이 되지 않았는가.
자신의 검집을 가볍게 두드리던 아르바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내가 널 부른 것은 국왕 때문이다.”
“그러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코르키라의 상황이 심상치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