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아리안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도 깨닫지 못했다. 그의 오른쪽 귀를 스칠 정도로 가까이에 내리꽂힌 칼날이 쑥 뽑혀 나가는 순간에서야 깜짝 놀라 아악, 하고 비명을 내질렀을 뿐이었다.
그가 비명을 지른 찰나, 위에서 나무 덮개가 벌컥 열리더니 우악스러운 손이 그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아리안은 그대로 물에서 끌려 나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나무통이 엎어지고 뜨거운 물이 그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철그렁!
철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요란스러운 금속성이 허공을 찢었다. 아리안은 흥건히 물이 고인 대리석 바닥 위를 질질 끌려갔다.
“이런 게 파살리아 암살자들의 방식인가?”
상황과 정반대로 차분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아리안은 정신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얼굴을 덮은 젖은 머리카락과 사방을 꽉 메운 뜨거운 수증기 탓에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손을 뻗어 앞을 더듬거렸다.
뜨거운 나무통 속에서 데워졌던 몸이 삽시간에 차갑게 식었다. 앞니가 위아래로 딱딱 부딪치고 몸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아니면 파살리아 창부들의 방식이던가.”
빈정거림과 동시에 난폭한 손이 바닥에 엎어진 아리안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목이 꺾이며 머리가 들렸다. 아리안의 시선이 저절로 허공을 헤맸다. 동시에 그는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의 눈앞에 나신의 남자가 있었다.
남자의 몸은 물에 젖어 번들거렸고 그가 숨을 쉴 때마다 부풀어 오른 흉곽이 느릿하게 오르내렸다.
그러나 아리안이 숨을 멈춘 이유는 남자가 알몸이어서가 아니라 그의 헐벗은 상반신을 뒤덮은 검은 그림자 때문이었다.
꿈틀거리는 그림자처럼 보이는 오탁이 남자의 상체를 뒤덮고 있었다. 그것은 조금 다른 식으로 말해 보자면 초고밀도 암흑물질(중력을 통해 우주에 존재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지만, 전자기파를 비롯한 다른 수단으로는 전혀 관측되지 않는 수수께끼의 물질들)이었고, 또 다른 언어로는 사탄, 재앙, 또는 역병신이었다.
그것을 인식하자마자 지독한 한기가 아리안의 척추를 타고 올랐다. 온몸에 소름이 쭈뼛 돋고 뒷덜미의 솜털이 거꾸로 곤두섰다. 그들을 둘러싼 공기의 질량이 묵직해지며 등과 어깨를 누군가가 지긋이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아리안의 시선이 뚫어지게 자신의 가슴팍을 바라보는 것을 눈치챘는지 남자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네 포주가 손님 몸을 보고 그딴 표정을 지으면 안 된다는 교육은 시키지 않았나 보군.”
그러더니 그가 갑작스레 아리안의 손목을 움켜잡아 자신의 가슴팍으로 짓눌렀다. 젖은 손가락 다섯 개가 하나씩 하나씩 단단한 흉곽에 닿아 근육이 부드럽게 눌렸다. 그러나 아리안이 느낀 것은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오탁의 온도뿐이었다.
아리안은 자신의 손목을 움켜쥔 손아귀를 떨쳐 내려고 발작적으로 손을 마구 잡아당겼으나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뒷머리를 움켜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그것은 아리안을 고통스럽게 했다. 눈물이 찔끔 고였으나 다행히도 그의 얼굴이 이미 흠뻑 젖어 있었기에 티는 나지 않았다.
“어젯밤의 만회를 하러 왔나?”
“나, 나는, 대화를….”
아리안은 입술을 부들부들 떨면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가 지나치게 떨었던 탓에 목소리가 뚝 뚝 끊겼다.
“파살리아인들은 창부에게도 대화를 요구하나 보지?”
남자가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삽시간에 아리안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달아올랐다. “나는 창부가 아니,” 그렇게 항변하려던 입술이 굳어졌다. 그의 시선이 남자의 상반신에 꽂혔다. 일그러진 화상 위에 억지로 덮어씌우듯 오탁을 누르고 촘촘히 새겨진 검은 문신.
이쪽 차원의 조잡한 지혜와 기술로 이루어진 봉인 주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아리안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어째서 칼릴이 아리안이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는지, 어째서 ‘진짜 도르센 대공’처럼 말하고 행동했는지….
갑작스레 그가 아리안의 손목을 탁 놓았다.
있는 대로 팔에 힘을 주고 있던 터였던지라 아리안의 몸이 스스로의 기세를 못 이기고 뒤로 발라당 나동그라졌다.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섰다. 그리고 몸을 돌려 높은 탁자에 놓인 고블릿 잔을 집어 들었다. 근육으로 덮인 아름다운 등이 드러났다.
아리안은 넋을 잃고 그 등을 올려다보았다.
척추 한가운데에 마치 무언가에 강하게 찔린 것처럼 울퉁불퉁한 흉터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금 간 신체.
아리안은 칼릴을 추격하던 신전 기사단을 기억한다. 유피테르의 번갯불처럼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롱기누스의 창. 신전 기사들의 창이 그의 척추를 꿰뚫었을 때 그 충격이 그의 정신을 찢었고, 이쪽 차원까지 수억 광년을 추락하는 과정에서 찢겨진 육체와 정신의 틈으로 암흑물질이 침투해 들어온 것이다. 그 암흑물질은 이 초고밀도 고위 생물체의 두뇌를 주물러 그가 자신을 진짜 이쪽 차원에 속한 지성체라고 굳건히 믿어 버리게 만들고 말았다.
따라서 남자는 진짜 도르센 대공이었다.
왜냐하면 칼릴 스스로가 그렇게 믿고, 행동하고 있었으므로.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아리안의 시선이 멍하니 그의 등을 더듬었다.
깊은 협곡처럼 우묵하게 패인 척추를 따라 날렵한 칼날 모양의 문신이 그의 등을 상하로 관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기하학적인 문양이 견갑골 위 검은 날개처럼 펼쳐졌다. 바깥쪽으로 갈수록 새것인 듯, 보다 뚜렷하고 명확한 형태와 농도를 갖고 있었다.
오탁을 감추고 억누르기 위해 문신을 새겼고, 오탁이 퍼질 때마다 문신을 계속해서 확장해 나갔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봉인 주술은 불완전하다. 강대한 신체에 새겨진 깊은 흠집을 메꾸기에는 한없이 부족하다.
아리안의 호흡이 점점 가빠지기 시작했다.
금이 간 신체가 저대로 계속해서 초고밀도 암흑물질을 흡수한다면 그 끝은 어떻게 되겠는가?
신체의 밀도가 끊임없이 상승해 결국 그의 내핵, 즉 영혼의 질량이 태양의 1.44배를 넘어서는 때가 오고야 말 것이다. 그 죽음의 순간, 그의 영혼을 구성하는 양성자가 전자 포획을 일으켜 그의 육신을 중성자화시킨다. 그리하여 이 아름답고 희귀한 지성체는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초신성이 되어 사방 8천 광년 내의 모든 은하와 생명체를 집어삼키는 어마어마한 감마선 폭발과 함께 이 차원 전체를 날려 버린 뒤 그저 성운의 자취만으로 남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 성운에 이쪽 차원의 이름을 딴 ‘도르센 성운’ 따위의 이름이 붙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희미한 무의식만을 남긴 채 질량이 있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잡아먹는 블랙홀이 되어 버릴 수도 있고.
아리안은 후들거리는 팔꿈치를 독려하여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대공은 여전히 그에게 등을 보이며 서 있었다.
아리안은 두려움과 고통을 애써 눌러 참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내가… 내가 도와줄 수 있어.”
대공이 비스듬히 몸을 돌렸다.
방의 반대편에서 쏟아져 나온 어슴푸레한 빛줄기가 그의 뒷덜미와 어깨에 부딪혀 청동상 같은 구릿빛 나신에 일렁이는 광채를 드리웠다. 서늘한 눈이 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아리안은 그 시선에서 달아나지 않기 위해 애쓰며 말을 이었다.
“당신 몸의 그… 저주.”
대공의 한쪽 눈썹이 스윽 꿈틀거렸다.
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흰 앞니가 드러나며 조소를 닮은 미소가 입가에 떠올랐다.
“네 포주는 널 더 교육시켜야겠어. 그가 힘들다면 내가 대신 도와줄 수도 있고. 손님의 몸을 손가락질하며 저주라고 운운하는 창부를 교육시키는 데에는 도르센식 만한 게 없거든.”
그 말과 함께 대공이 아리안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리안은 혼비백산하여 허우적허우적 뒤로 달아났다. 그러나 바닥이 미끄러운 탓에 물로 흥건한 대리석 바닥 위에서 금붕어처럼 퍼덕거렸을 뿐이었다.
대공이 다시 그의 머리채를 잡아 들어 올렸다. 억지로 고개가 꺾인 아리안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대공이 허리를 구부려 자신의 얼굴을 아리안에게로 가까이 붙였다. 긴 눈은 진지했으며 웃음기라고는 없었다.
“도르센의 포주들은 불필요한 채찍 따위는 들지 않아. 더 효율적인 방법을 알거든. 교육이 필요한 창부를 발가벗기고 젖은 밧줄로 목과 팔다리를 묶어 허공에 매달아 놓는 거야. 젖어 느슨해진 밧줄이 마르면서 목과 팔다리를 조이면 제아무리 콧대 높은 것들도 돼지처럼 컥컥대면서 빌기 마련이지. 도르센의 창관 거리를 지나다 보면 그런 것들이 하루에 서넛 정도는 매달려 있는 꼴을 보게 되는데, 제법 볼만한….”
“아니야!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난 창부도 아니고… 손가락질하지도 않았어!”
정육점의 돼지고기처럼 피둥피둥 희멀건 살을 내보인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 아리안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네 포주가 누구지?”
“나는 창부가 아니….”
아리안은 자신이 창부가 아니라고 다시 한번 주장하려 했다. 그러나 대공의 말이 더 빨랐다.
“국왕? 일왕자? 아니면 신전?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나.”
마지막은 거의 혼잣말이었다.
그때 아리안은 그의 눈에서 조용한 살인 예고를 읽었다.
아리안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바닥을 나뒹구는 검 쪽으로 향했다. 그 시선을 알아차린 대공이 소리 없이 조소했다. 짧은 비웃음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아리안은 그가 자신을 죽이는 데에 굳이 무기가 필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