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3)화 (3/130)

#03

순식간에 아침이 찾아왔다. 하늘이 희뿌연 우윳빛으로 물들었다. 칙칙한 구름 사이로 언뜻 푸른 하늘이 드러났다가 곧 사라졌다. 성은 금세 분주해졌다.

임시직 돼지치기라도 할 일은 많았다. 돼지죽을 쑤고 돼지우리를 청소하니 정오가 되었다. 하늘은 여전히 어슴푸레했다. 한바탕 진눈깨비라도 쏟아질 것처럼 공기가 눅눅했다. 하녀 둘이 음식 광주리를 들고 돌아다니며 축사 일꾼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고 있었다. 아리안은 그 틈에 끼는 대신 반대편으로 향했다. 아무도 넝마를 뒤집어쓴 돼지치기에게 관심이 없었으므로 그는 누구의 시선도 끌지 않고 손쉽게 돼지우리를 빠져나왔다.

높은 성벽을 따라 골목길을 걷다 보면 작은 성문이 나왔다. 내성(內城)으로 들어가는 세 개의 출입문 중 가장 작고, 가장 많이 사용되는 문이었다. 이용자 대부분은 성의 일꾼들이나 상인들, 병사들과 고용인들이었다. 연회가 있는 날이면 주방의 하녀가 이 문을 통해 축사로 나와서 새끼 양이나 암탉, 송아지 따위를 새끼줄에 묶어 끌고 가곤 했다.

성문 앞에는 작은 시장 골목이 형성되어 있었고 호객하는 상인들이 돌아다녔다. 성의 시녀로 보이는 좋은 옷차림의 여자들이 방물장수 앞에서 흥정을 하고 있었다. 털실과 융단을 짊어진 짐꾼, 생선 항아리가 실린 수레, 무두장이가 길 한가운데 뒤섞여 분주히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죽음 같은 도시에서 이곳만이 그나마 활력이 돌았다.

아리안은 사람들을 헤치고 성문으로 다가갔다.

성문 앞에 병사 세 명이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내성 문지기라는 것을 알리는 사슬 갑옷과 긴 튜닉을 입고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아리안을 먼저 알아보았다. 그가 아리안에게 손짓했고, 아리안은 그에게 다가갔다.

“마침 잘 왔어. 내가 어제 연회에서 근사한 술을 슬쩍 빼돌려 놨거든.”

그 뒤에 문지기는 주위를 둘러보며 괜히 뒷덜미를 주물렀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한층 더 낮추었다.

“저번에 네가 가져다줬던 그 담배… 그걸 피우면서 마시면 더 기가 막힐 텐데 말이야. 어떻게 조금 더 구해 올 수 없나?”

아리안이 눈알을 굴리자 그가 서둘러 덧붙였다.

“물론 너도 끼워 줄게. 내일 밤 어때? 몇 명이 모이기로 했거든. 겸사겸사 카드도 치고, 술도 마시고. 통금령 때문이라면 종이 치기 전에 미리 이쪽에 와 있어. 문 안쪽에 들어가 있으면 대장도 모를 거야.”

가을밤은 길고 무료하다. 야간 통행금지령 탓에 쥐새끼 하나 돌아다니지 않는 한밤중의 성문을 지키는 일은 더더욱 그럴 것이다.

끌리지 않는 제안은 아니었으나 아리안에게는 다른 할 일이 있었다.

“담배는 가져다줄게. 근데 난 안 낄래. 카드를 못 쳐.”

문지기가 어깨를 으쓱했다.

“끼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

“응. 근데….”

아리안은 슬쩍 문지기의 눈치를 살폈다.

“연회는 이제 끝난 건가?”

“술과 음식이 남았으니 내일 밤까진 계속될걸.”

“도르센… 대공은?”

문지기가 귀를 긁었다.

“글쎄다. 둘째 왕녀가 그를 불렀으니 쉽사리는 안 돌아가겠지. 술에 취해 말에서 굴러떨어지거나… 창녀를 얼싸안고 뒹굴다가 칼이라도 맞지 않는 한은 말이야.”

문지기의 표정은 진지했고 목소리는 나지막해서 거의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아리안은 마른침을 삼켰다.

파살리아의 둘째 왕녀와 대공의 돈독한 사이는 이미 온 왕국에 유명한 일이었다. 물론 부적절한 관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이복 남매였고 동시에 군사적 동맹 관계이기도 했다. 물론 대공이 진짜 대공이라면 말이지…. 그렇다면 둘째 왕녀는 진짜 둘째 왕녀인가?

아리안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그럼 대공은 당분간은 파살리아에 있는 거야?”

“아마도.”

그 뒤에 문지기가 아리안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조심해. 성의 분위기가 영 좋지만은 않아. 이렇게 여기저기 캐묻고 다니는 것도 자제하란 말이야. 알겠지?”

“고마워….”

“참. 주방에 가 봐. 연회 음식이 좀 남았을걸.”

“그것도 고마워.”

아리안이 감사 인사를 하자 문지기가 다시 한 번 귀를 긁었다.

아리안은 그를 지나쳐 성안으로 들어갔다.

내성의 분위기는 성벽 밖과 또 달랐다. 사람들은 모두 무채색 옷을 입고 고개를 숙인 채 빠르게 걸어 다녔다. 말을 하는 사람들은 적었고 그나마도 목소리를 한껏 낮춰 소곤거릴 뿐이었다.

왕성에서는 쇠락한 신전과는 또 다른 불길함이 감돌았다. 성의 구석구석에서는 종말을 앞둔 세계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났다.

음울한 구름을 찌르며 솟구친 수십 개의 첨탑들은 음침한 괴기 영화 속 흑백 오프닝을 연상시켰다.

아리안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첨탑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그 첨탑들이 황금과 상아로 씌워져 있던 영광스러운 고대를 어슴푸레하게 더듬었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저어 그 환상을 떨쳐 냈다.

다행히 대공의 행적을 좇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대공은 현재 파살리아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표적이었다.

아리안은 빨래방에서 팔이 빠지도록 빨랫방망이를 대신 휘둘러 준 대가로 대공이 아직 성안에 있다는 정보를 획득했다. 그다음으로는 주방에서 강낭콩 껍질을 벗기며 대공이 어젯밤과 같은 방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훔쳐 들었다.

목적지는 어제와 같았다. 문제는 다른 것이었다.

칼릴의 거처로 어떻게 다시 숨어들어야 할 것인가?

지난밤에는 연회의 혼잡함을 틈타 기름을 나르는 일꾼인 척 대공의 침실에 잠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일한 수법은 이제 통하지 않을 것이다.

이쪽 차원으로 건너올 때, 아리안은 로마 공회의 눈을 피하기 위해 권능의 대부분을 놓고 와야만 했다. 따라서 아리안이 할 수 있는 것은 보통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더 무능할지도 모르고….

아리안은 하염없이 빨래방과 우물 사이를 맴돌았다. 겨울 초입의 낮은 짧았다. 금세 서쪽 성벽이 어슴푸레하게 붉어지기 시작했다.

아리안의 기다림이 끝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일꾼 서너 명이 제각각 어깨에 물동이를 짊어지고 나타났다. 아리안은 재빨리 석주 뒤에 몸을 숨겼다. 아리안을 발견하지 못한 그들은 시끄럽게 떠들어 대며 우물에서 물을 길었다. 잠시 뒤 아리안은 그들의 대화에서 몇 가지 단서를 찾아 냈다. 북서쪽, 뱀의 탑, 막내 왕자, 연회, 대공. 저들은 대공에게 가져갈 목욕물을 긷는 중이었다.

곧 일꾼들이 물동이를 이고 우물가를 떠났다.

아리안은 기둥과 벽 사이에 몸을 숨겨 가며 그들을 미행하기 시작했다.

일꾼들은 주방 반대편의 대형 화덕으로 향했다. 화덕 위에는 거대한 솥이 걸려 있었고 일꾼들이 거기에 물을 쏟았다. 얼굴에 거뭇하게 검댕을 묻힌 소년이 쉴 새 없이 화덕에 관솔과 장작을 집어넣고 있었다.

번뜩, 근사한 착상이 떠올랐다.

아리안은 젊은 여인의 상반신이 조각된 대리석 기둥과 시든 가문비나무 사이에 숨어서 기회를 엿보았다.

기회는 금방 찾아왔다.

일꾼들이 돌아와 큰 나무통에 끓는 물을 붓고 물이 식지 않도록 뚜껑을 덮었다.

“사람이 더 필요하겠는데.”

“가서 누굴 좀 데려올게.”

한 명이 남고 다른 둘이 주방 쪽으로 나갔다. 화덕 앞에는 이제 하품 하는 일꾼 하나와 재투성이 소년뿐이었다.

아리안은 화덕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저녁 연회 준비로 혼잡한 주방에서 쉼 없이 무언가를 던지거나 깨트리는 소리, 성난 고함이 들려와 아리안의 발소리를 지웠다. 거기다 때마침 늙은 여자가 화덕 앞의 소년을 향해 뭐라고 크게 소리쳤다. 소년이 맞서 대꾸했고, 둘의 언성이 높아지자 일꾼이 그들을 힐끔거렸다.

그 틈을 타서 아리안은 재빨리 신발을 벗어 양손에 쥐고 나무통 안으로 들어갔다. 뚜껑을 머리 위로 덮으니 바깥의 소리가 차단되며 조용해졌다.

나무통 안은 어둡고 축축했으며 몹시 더웠다. 이것은 오래전 핀란드에서 경험했던 습식 사우나를 상기시켰다. 아무튼 지금은 인내해야 할 때였다. 아리안은 그저 자신이 완전히 삶아지기 전에 일꾼들이 이 물통을 대공의 거처까지 옮겨 놓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다행히 아리안이 아직 살아 있을 때 일꾼들이 돌아왔다. 나무통이 들려 올라가는 느낌이 났고 물이 출렁거리며 수증기가 그의 뺨을 뜨겁게 적셨다. 아리안은 눈을 감고 숫자를 세기로 했다.

일꾼들이 훅훅 숨을 몰아쉬는 소리와 투덜거리는 소리, 그리고 발걸음 소리가 통 바깥에서 뒤섞여 들려왔다.

숫자를 백 정도 셌을 때 나무통이 비스듬히 기울었다. 계단을 오르는 것 같았다. 아리안의 몸도 따라서 기울었다. 계단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단지 아리안이 더위와 열기를 이기지 못한 탓에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었다.

기나긴 인내 끝에 움직임이 멈췄다. 일꾼들이 나무통을 내려놓았다. 아리안은 그들이 혹시나 뚜껑을 열어 안을 확인할까 싶어서 머리끝까지 긴장했으나 천만다행히도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일꾼들이 떠나가는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아리안은 속으로 백을 더 셌다. 그러고도 혹시 몰라 조금 더 기다렸다. 주위는 여전히 고요했다. 어딘가 아주 먼 곳에서부터 차르륵, 차르륵, 하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대공은 홀로 목욕 중인 모양이었다. 마침 잘된 일이었다.

더 이상은 이 고문실 같은 사우나 통 안에 갇혀 있기 힘들기도 했다.

그가 슬그머니 신발을 쥔 손을 머리 위로 올려 나무 덮개를 밀어 올리려는 그 순간이었다.

푹, 하는 소리와 함께 번뜩이는 무언가가 위에서부터 꽂혀 내렸다. 그것이 귓전을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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