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1)화 (1/130)

#01

<1> 도르센의 대공

  

그가 어떻게 대공의 침실까지 몰래 숨어들어 올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려면 석 달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물론 이는 이쪽 시간으로 석 달을 이야기한다.(저쪽 시간, 즉 그레고리력으로는 약 이틀하고도 반나절에 해당한다.)

아무튼 아리안은 램프 기름을 나르는 몸종인 척 마침내 대공의 내실까지 들어왔다. 진짜 몸종은 지금쯤 지독한 위스키에 취해 성안 어딘가의 복도 한구석에 곯아떨어져 있을 것이다.

아리안의 심장은 쉴새 없이 두방망이질 쳤다. 긴장감 탓은 아니었고 그저 최후의 순간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다는 흥분 때문이었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그가 지난 석 달간 겪어야 했던 고난의 행보를 생각한다면 결코 과민 반응은 아니다.

내실은 고요했다.

어둠 속에 우뚝 선 검은 기둥과 높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가 바닥과 벽에 흔들림 없는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리안은 재빠르게 내실 한구석에 묵직한 기름 동이를 내려놓았다. 그러고서는 떨어져 나갈 듯한 손목을 주무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실내는 어둡고 따스했다. 달콤한 꽃향기가 사방에 그윽했다. 바닥에는 두꺼운 카펫이 깔려 있었고 벽에는 빈틈없이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어 바람 한 줄기 새어 들어오지 않았다.

아리안은 벽난로 앞으로 걸어가 차디찬 복도와 북풍에 뒤흔들리는 회랑을 빠져나오느라 얼어붙은 몸을 녹였다.

그는 언제 돌아올까.

아리안은 하얗게 곱아든 손을 바삐 문지르며 그것을 궁금해했다.

지금쯤 연회가 한창일 테니 그 한복판에서 국왕에게 잡혀 있겠지. 아마도.

온기가 아리안의 몸을 느슨히 녹였고 그것은 수마를 동반했다.

지난 석 달간 그는 바람이 숭숭 새어 들어오는 차가운 방에서 모포 한 장에만 의지해 잠을 청해야 했다. 이쪽 차원에 익숙하지 못한 아리안에게는 제법 가혹한 일이었다. 아무튼 그는 석유나 천연가스, 또는 전기 따위를 이용한 최첨단 난방 시설에 익숙해져 있는 종류의 인간이었으니까.

기다림이 조금 더 길어졌더라면 깜빡 잠이 들고 말았을 것이다.

다행히 그런 사태가 오기 전, 아리안이 애타게 기다려 마지않았던 순간이 왔다.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부산스러운 말소리도 함께였다.

아리안은 일단 높은 장식장과 석주 사이의 어두운 틈에 몸을 숨겼다. 중요한 순간에 이쪽 차원의 인간과 조우하여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그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끼익, 덜컹, 덜컹! 거칠게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소리와 청동 경첩이 마찰하는 소리가 울렸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이봐, 물을 가져와!”

“그 쭈그렁탱이 놈이 아주 그럴싸한 방을 준비해 놨잖아?”

남자 서넛의 목소리와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번갈아 들려왔다.

끼익, 무언가가 바닥에 끌리고, 묵직한 문짝이 쿵쾅대며 흔들리고, 철그렁, 철그렁, 가죽 혁대에 철검이 부딪치는 소리.

고요하던 내실이 삽시간에 소음으로 가득 찼다.

그 소음에 아리안 자신을 숨길 수 있게 되었으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아리안은 숨을 죽이고 그들이 조용히 물러나기를, 정확히는 이 방의 주인을 남겨 두고 떠나가기를 기다렸다.

그 순간은 금방 왔다.

한 무리의 기사들은 독한 알코올 냄새와 쿵쾅거리는 발소리, 왁자지껄한 웃음소리를 남기고는 방을 떠나갔다.

쿵! 문이 우악스럽게 닫히는 소리와 함께 소음이 끊어졌다.

후우욱, 후우욱.

거칠고 나직한 숨소리가 이어졌다.

스윽, 텅, 스윽, 텅, 발을 끄는 듯한 걸음 소리가 뒤이었다.

아리안이 숨어 있는 장식장과 돌기둥 사이에서는 그자의 뒷모습만 보였다. 한껏 부풀어 오른 그림자처럼 육중하게 솟구친 어깨와 등. 남자는 숨을 느리게 몰아쉬며 천천히 발을 끌어 방 한가운데의 탁자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탁자 위의 길쭉한 주전자를 들어 올려 주둥이에 입을 대고 물을 들이켰다.

단번에 벌컥벌컥 물을 들이켠 남자가 구리 주전자를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퍽, 데구루루, 빈 주전자가 카펫 위를 굴렀다. 남자가 탁자에 한 손을 짚고 몸을 비스듬히 돌렸다. 높은 천장 위 샹들리에에 꽂힌 수많은 양초 불빛이 그의 얼굴 절반을 비추었다.

우묵한 눈두덩이와 날렵하게 치솟은 콧대 너머로 어슴푸레한 촛불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어둑한 그림자 속, 푸른 눈동자가 선명하게 번들거렸다.

아리안은 그 눈을 바라보았다.

반듯한 이마와 미간, 곧은 눈썹 뼈, 뚜렷한 광대에서 턱으로 이어지는 강직한 뼈마디의 선.

그였다.

아리안은 곧장 비좁은 틈에서 튀어 나갔다.

“칼릴!”

그는 단번에 탁자를 짚고 선 남자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남자에게서는 지독한 술 냄새가 났으나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나도 알아. 내가 너무 늦었지? 당신이 화났을 수도 있다는 건 알아. 그러니까, 처음부터, 이렇게 오래 걸릴 예정은 아니었거든. 나도 말야.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어. 공회 몰래 여기까지 오려고 내가 누굴 설득해야 했는지 알아?”

아리안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물론 아주 나쁜 짓을 한 건 아니야. 조금. 아주 약간. 그치만 로마 공회도 딱히 할 말이 있지는 않을걸. 애초에 묵시록에서 말하는 재앙을 핑계로 이따위 판결을 내린 게 공회잖아? 내 말은… 당연히 공회 자체를 전부 부정하는 건 아니고… 무슨 말인지 알지?”

그는 동시에 고개를 들어 눈앞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대답을 기대한 시선이었으나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아리안을 응시할 뿐이었다.

아리안은 그 시선을 피하면서 짧게 헛기침을 두 번 했다.

“설마 화난 건 아니지? 그러니까. 내가 오겠다고 하긴 했는데, 얼마나 걸릴 거라고는 말을 안 하긴 했지…. 오래 기다렸어? 여기 시간으로는… 꽤 지난 거 같은데….”

뒤이어 그는 칼릴을 슬쩍 훔쳐보았다. 나빠 보이지는 않는데, 그는 그렇게 중얼중얼거리면서 칼릴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아무튼 우리는, 내 말은, 당신은, 재심을 청구해야 돼. 불공정한 판결이었어. 배심원들도… 아니, 재판 그 자체가! 이게 마이너리티 리포트도 아니고! 차라리 프리크라임이 묵시록보다는 더 적중률이 높을걸?”

그 말대로였다.

재판은 시작부터 불공정했다.

그들은 칼릴의 태생을 구실 삼아 그를 고발했다. 태어나는 순간 그가 받았던 예언, 재앙의 왼쪽 어깨. 그것이 문제였다. 검사는 그가 머지않은 미래에 다가올 재앙의 기수가 되리라고 주장했다.

물론 아리안은 그 주장을 믿지 않았다. 그건 프리크라임도 울고 갈 터무니없는 예언이었다. 재판은 더했다. 칼릴이 재판 결과에 불복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전부터 그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신전 기사단이 집행관을 자청했다.

아리안은 다시 그의 소매를 당겼다.

남자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아리안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 해? 얼른 움직여야 돼. 여기까지 들어오는데 힘들었어. 내가 그 위스키 한 병을 훔치려고 어떤 고생을 했는지를 들으면 놀랄 거야. 어쨌든, 빠져나가는 건 들어오는 것보단 조금 더 쉽겠지. 당신이 있으니까….”

그때 남자가 반대로 손을 뻗어 아리안의 팔목을 움켜잡았다. 커다란 손. 그리고 뜨거운 손바닥. 아리안이 갑작스러운 접촉에 숨을 멈춘 순간 그가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늙은이가 준비해 둔 게 멍청한 신관만은 아니었나 보군.”

아리안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거렸다.

이해할 기회는 바로 다음 주어졌다.

“하지만 창부치고는 말이 많아.”

“뭐…어?”

아리안은 그가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눈빛을 살폈다. 그러나 오래 관찰할 시간은 없었다. 그가 아리안의 어깨를 다소 강압적으로 끌어안고 걸음을 옮겼다. 아리안은 비틀거리며 끌려갔다. 몇 걸음 뒤에 기둥으로 가려진 침상이 있었다. 남자가 천장에서 떨어지는 휘장을 한 팔로 걷어 헤치고는 그 틈으로 아리안을 밀었다. 아리안은 침상으로 나동그라졌다.

“여기 파살리아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 도르센에서 창부의 미덕은 수다가 아니거든.”

남자가 위에서 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목소리만큼 눈빛도 건조했다.

“자, 잠깐만.”

아리안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침상이 지나치게 푹신한 나머지 그럴 수 없었다. 아마 짚을 지나치게 많이 채워 넣은 모양이었다.

“도르센의 창부들은. 입을 딱 다물고. 얌전히 누워 있지. 아무것도 모르는 처녀들처럼 말이야.”

남자가 한마디씩 내뱉으며 피복을 하나씩 벗어 던졌다. 넓적한 비단 허리띠와 은 단추가 달린 긴 가운이 차례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홀가분한 차림이 된 그가 침상으로 한쪽 무릎을 올렸다.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아, 아니야. 지금 오해가….”

“넌 얌전히 기다려. 내가 벗겨 줄 때까지.”

남자가 아리안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리안은 그가 자신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았고 또 들을 생각도 없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아차렸다.

‘술에 취해서 날 못 알아보나?’

그 의문은 한 발짝 늦었다. 지금은 물러서야 할 때라는 판단이 늦은 것처럼. 남자가 손을 뻗어 왔다.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었다. 그 손이 아리안의 엉덩이를 비틀어 쥐었다.

“악!”

비명이 먼저 나왔다. 잠자리의 흥을 돋우는 소리는 명백히 아니었다. 남자의 짙은 눈썹이 꿈틀댔다.

“연기가 형편없군.”

“나, 날 누구하고 착각하는 거야! 난 창부가 아니야! 난 당신을 도우려고 여기에… 히익!”

그가 팔꿈치로 아리안의 어깨를 짓누르며 빠르게 몸 위로 올라왔다. 다리가 얽히며 사타구니가 짓눌렸다. 방직 상태가 그다지 훌륭하지 못한 천 너머로 남자의 날 선 근육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아리안은 그야말로 생선처럼 펄떡였다. 남자가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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