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이게 뭐지?”
채언은 방금 받은 택배 상자를 들여다보았다. 보내는 사람, 권 충북. 대동에서 온 것이었다.
꽃병의 물을 갈아 식탁 위에 내려놓던 영웅은 지이익- 테이프를 뜯는 소리에 채언을 돌아보았다.
“뭐가 왔어요?”
“충북 아저씨가 보내주신 건데, 뭔지 모르겠어요. 뭘 보내주신다는 말씀 없으셨거든요.”
채언은 상자에 붙어 있던 테이프를 마저 떼어내며 소파에 앉았다. 상자 날개를 열어 손을 집어넣자 비닐로 포장된 폭신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이게 뭐지?”
“음식이 아니에요?”
옆자리에 앉은 영웅이 채언의 허리를 감싸며 물었다.
“네. 다른 거예요.”
바스락, 비닐 소리와 함께 채언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은 투명한 포장지에 싸인 연갈색 털장갑이었다.
“장갑이네요?”
“한 개 더 있어요.”
채언은 다른 손을 상자에 넣어 같은 색의 장갑 한 켤레를 더 꺼냈다. 두 켤레의 장갑과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두 사람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잠깐! 상자 안에 편지 같은 게 있는데요?”
영웅의 말에 채언은 장갑을 옆에 내려놓고 상자 속에서 편지를 꺼내 들었다.
“쪽파 뽑을 때 준 장갑은 요긴하게 쓰고 있다. 채언아. 겨울 따듯하게 보내라고 장갑을 보낸다. 서프라이즈 선물. 앤드류랑 한 짝씩 나눠 끼고 따듯한 겨울 보내라. 장갑은 아저씨가 골랐는데 아줌마가 싸우지 말라고, 색깔은 똑같은 걸로 하라고 하더라. 미국 여행 가기 전에 와서 밥 한번 먹고 가. 건영이가 형 언제 오냐고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어. 전화 안 하고 그냥 와도 돼. 감기 걸리지 말고. 이만 줄인다. 충북. 피에스, 형 빨리 와! 건영이.”
충북의 편지를 읽은 채언은 눈을 휘며 웃었다.
“우리 싸우지 말고 나눠 가지라고 같은 걸로 보내주셨대요.”
영웅은 보조개가 팬 채언의 뺨에 자신의 볼을 꾸욱 눌렀다.
“나중에 눈 내리면 이거 끼고 눈사람 만들어도 되겠어요.”
“그러게요.”
채언은 비닐을 뜯어 장갑을 꺼냈다. 한쪽 손에 끼고 잼잼 손을 쥐었다 펴는데, 편지를 계속 들여다보고 있던 영웅이 채언의 볼을 손가락으로 꾹 찔렀다.
“채언 씨.”
“네?”
“수업 같이 들었던 그 친구는 잘 있어요?”
갑자기 영진의 이야기를 꺼낸 영웅을 돌아본 채언이 눈을 끔뻑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영진이 형이요? 네. 어제도 영진이 형이랑 연락했는데. 지난번에 명함 받은 거, 카메라 테스트받은 거 어떻게 됐냐고.”
“채언 씨.”
“네?”
“채언 씨 동생도 채언 씨한테 형이라고 하고, 채언 씨는 수업 같이 들은 그 사람한테 형이라고 하잖아요.”
“네.”
“나도 형이라고 불러줘요.”
“…네? 형이요?”
영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왜…요?”
채언은 털실로 짜인 장갑을 주무르며 도르륵 눈을 굴렸다.
“다른 사람들은 다 그렇게 부르잖아요. 나랑은 그러면 안 돼요? 나도 채언 씨한테 형 맞잖아요.”
서운함이 비치는 영웅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채언은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잠깐만요. 생각해 보니까 이걸 물어본 적이 없는데요.”
“응?”
“라이언, 몇 살이에요? 정말 저보다 형이에요?”
“그건 당연한….”
멀뚱히 눈을 끔뻑이던 영웅은 채언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하하 웃고 말았다.
“그러게, 정말 나이를 말해준 적이 없네.”
채언의 허리를 끌어안고 소파에 누운 그는 채언에게 자신의 나이를 말해주었다. 숫자를 듣고 입을 동그랗게 벌린 채언은 또다시 무언가 생각하다가 영웅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잠깐만요. 그게 미국 나이예요? 아니면 한국 나이?”
“음, 미국.”
채언의 머릿속에서 숫자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미국 나이라면 만 나이일 테니 단순 연도로 따지는 한국 나이보다 한두 살 어릴 터였다. 그런데 영웅의 올해 생일은 지났으니까….
“그런데 그게 상관있어요?”
“…아뇨. 그냥 지금까지는 생각해 본 적 없던 문제라.”
계산을 끝낸 채언이 입술을 삐죽였다. 어쩌면 그가 자신보다 동생일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떠올렸는데. 자신과 그의 만 나이, 연도로 따진 나이를 이리저리 대고 따져보아도 정말 아니었다.
미국 배우들을 보면 20대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사실은 10대이고 그러니까. 그도 미국 사람이고. 채언은 제 생각이 아예 말도 안 되는 건 아니었다고 자기 합리화를 했다.
“그럼, 이제 앞으로 쭈욱 나를 형이라고 불러줄 수 있는 건가?”
채언은 장갑 낀 손을 꼼지락거리며 영웅의 얼굴을 흘끔거렸다.
“그렇, 죠.”
“불러줘요.”
앞으로 쭉 형이라고 불러달라니. 채언은 그를 형이라고 부르는 게 별로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사범님보다는 형이 더 나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한 번 정도는 그를 형이라고 불러줄 의향이 생겼다.
“형!”
호기롭게 말을 내뱉은 채언의 눈꼬리가 점차 시무룩이 처졌다.
“…형.”
역시 그를 형이라고 부르는 건 별로였다.
“어, 왜 그러지?”
채언의 표정을 확인한 영웅이 순한 눈꼬리를 손으로 쓸어주며 물었다.
“나한테 형이라고 불러주기 싫어요?”
말없이 그의 허리를 안고 있던 채언은 잠시 후, 네, 하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요? 왜 싫은데?”
“하나도 안 특별하잖아요. 형은. 다른 사람한테도 하는 말인데.”
채언의 사랑스러운 대답에 영웅은 가슴이 지끈거렸다. 이런 이유라면 자신이 고집 피울 이유가 없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알았어. 이건 없던 일로 해요. 앞으로는 채언 씨만 계속 나를 라이언이라고 불러주는 거예요.”
눈가를 쓸어주던 손에 뺨을 기댄 채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에….”
“그런데?”
포도 농장 사장님과 브런치 가게 사장님이 충북이나 영진을 다정한 호칭으로 부르는 것을 내심 부러워해 왔던 채언은 그동안 부끄러워서 하지 못했던 말을 이번 기회에 하기로 했다.
“저도 다르게 불러 주세요. 제 이름은 다른 사람도 다 부르는 거니까.”
“뭐라고 불러 줄까요? 허니? 초콜릿? 달링?”
영웅의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져 나온 달콤하고 간지러운 단어에 채언은 파드득 그의 품 안으로 얼굴을 숨겼다. 듣기는 좋았지만 제대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들은 것이 아니라 너무 부끄럽고 민망했다.
“생각해 볼게요! 일단은. 나중에 골라 볼게요.”
영웅은 웃으며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혼자서 특별한 이름으로 불러 주고 싶다고 말해놓고 이런 걸 가지고 부끄러워하다니. 채언은 정말 이상한 구석에서 대담하고 소심했다.
“그리고 또 물어볼 게 있는데요.”
채언은 여전히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귓가를 붉히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니 정말로 궁금해서 못 참을 문제인 게 분명했다.
“뭔데요?”
“라이언은 우리 첫 데이트가 언제라고 생각해요? 우리… 언제부터 사귄 거예요?”
가만가만 채언의 머리카락을 만져주던 영웅은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당연히 그건, 채언 씨가 나한테 고백한 날부터죠.”
“고백? 우리 커플링 한 날이요?”
채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얼굴을 들었다. 채언의 어리둥절한 표정에 덩달아 어리둥절해진 영웅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것보다 한참 전이잖아요.”
“그 전에 제가 고백을 했어요?”
채언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눈을 굴렸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에게 사귀자고 고백한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언젠데요? 뭐지? 언제 그랬지? 언제지?”
충격받은 것은 영웅이었다. 어떻게 그날을 잊을 수가 있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채언이.
“나만 그걸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 설마….”
채언은 힐끔힐끔 영웅을 쳐다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그가 언제를 말하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우리 첫 키스 한 날. 날 지켜주겠다고 했잖아요.”
“네? 그날이요? 우리 그날부터 사귄 거라고요?”
채언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허전해진 품 안에 헛헛해진 기분으로 영웅도 뒤따라 몸을 세웠다.
“지금까지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채언 씨가 나를 남자친구로 인정한 건 더 나중이고?”
채언이 말없이 입을 꾸욱 다물자 거실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하지만 영웅도 이번만큼은 서운함을 숨길 수 없었다. 그날이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날인데. 채언에게는 그만큼 의미를 지닌 날이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럼 채언 씨는 언제부터라고 생각했는데요?”
눈썹을 매만지던 영웅이 소파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몰라요.”
무언가 꾸욱 눌러 삼키는 목소리에 영웅은 눈을 들었다.
“채언.”
“누굴 사귀는 건 라이언이 처음이라, 몰랐단 말이에요. 제가 한 말이 고백이 된 건지. 그런데, 으…, 그날부터인 거면 우리 기념일이 다 지났잖아요. 이미 백 일도 지났고. 저는, 읏, 몰랐단 말이에요….”
겨우겨우 입을 뗀 채언은 할 말을 다 한 뒤 입술을 꼭 깨물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이런저런 기념일을 영웅과 전부 챙겨보고 싶었는데 제일 중요한 백 일도 이미 지나갔다니. 바보처럼 혼자 아무것도 몰랐다니. 너무 속상했다.
“기념, 기념일? 어, 잠깐 채언 씨.”
손을 들어 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닦던 채언은 자신이 한쪽 손에 장갑을 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하필 이걸 지금 껴봤을까. 눈사람을 만들 때 끼려던 장갑을 눈물 닦는 데 사용하다니 더 속상했다.
“으읏, 흐으….”
채언은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왜 울어요. 울지 마요. 이제 안 울기로 했잖아요. 응?”
“눈물이, 눈물이 나는데, 으… 어, 흐으…, 어떻게 안, 안 울어요.”
영웅은 후다닥 채언의 머리를 안아 어깨에 기대주었다. 이미 서운함 따위 싹 날아간 지 오래였다. 그날을 잊은 게 아니라 모든 게 다 처음이라 몰랐던 거라니. 오히려 채언에게 미안해 죽을 지경이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은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고백도 채언이 먼저, 반지도 채언이 먼저. 채언에게 모든 걸 다 떠넘겨 놓고 사귄 날짜를 두고 서운해했다니. 정말 자신이 다 잘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라이언은 왜 계속 저 채언 씨라고 불러요? 채언이라고, 흑…, 불러 주기로, 했, 흐으으….”
“내가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영웅은 그 뒤로 한참이나 채언을 달래주어야 했다.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아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눈 뒤 협의했다. 커플링을 나눠 낀 날부터 새로 디데이를 세는 것으로.
라운지 한편에 마련된 음식을 가지러 간 영웅은 방울 달린 털모자를 쓴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채언을 돌아보았다. 연갈색 장갑을 낀 손으로 여권을 접었다 펼치기를 반복하는 모습에서 첫 해외여행에 들뜬 기운이 물씬 풍겼다.
간식 몇 가지를 챙겨 채언에게 돌아온 영웅은 테이블 위에 컵과 접시를 내려놓았다.
“뜨거워요. 조심.”
“저는 장갑 껴서 괜찮아요.”
양손으로 차가 든 컵을 쥔 채언은 영웅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그가 자신의 옆에 앉자 채언은 한 손으로 컵을 잡고 다른 손으로 무릎 위에 잠시 올려두었던 여권을 잡았다.
후우, 차에 입바람을 불자 뜨거운 김이 올라왔다.
“조금 이따 마셔야겠어요. 너무 뜨거워서.”
“데우지 않은 물 좀 가져다줄까요? 안에 조금 섞어서 차가 식게.”
“아니에요. 그럼 흘릴 것 같아요. 잠깐 있으면 식겠죠.”
차가 든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채언은 빳빳한 여권을 만지작거렸다. 새로 산 캐리어에 짐을 챙기고 공항에 올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심장이 떨리지는 않았는데. 조금 있으면 정말 비행기를 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콩닥거렸다.
“우리 다녀오는 동안 마늘 안 얼고 잘 있겠죠?”
채언의 물음에 영웅은 피식 웃었다. 채언은 마늘을 심는 날부터 마늘을 걱정했다. 10월 중순에는 심어야 하는 것을, 뭘 심을까 고민하다가 때를 놓쳐 마지노선인 11월 초에 겨우 심었기 때문이다.
포도 농장 식구들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고 둘이 열심히 심어 보았는데, 그래서 새 밭은 쪽파와 상추를 심었을 때보다 더 엉성했다.
“잘 있을 거예요. 꽁꽁 얼면 언 걸 먹으면 되죠.”
“얼면 못 먹어요. 냉장고에 얼리는 게 아니잖아요. 돌아왔을 때 마늘이 정말 다 얼어버렸으면 이번 겨울은 그냥 쉬고, 내년에 땅이 녹았을 때 얼른 다 갈아버릴 거예요.”
“오, 정말요? 우리 둘이 열심히 심은 마늘한테 너무 매정하네.”
능글거리는 영웅의 말투에 채언은 그를 살짝 흘겨본 뒤 다시 컵을 들어 후후 바람을 불었다.
채언이 적당히 식은 차를 반쯤 마셨을 때쯤 영웅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이제 슬슬 갈 준비하면 될 것 같은데요?”
“네.”
그 말에 채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일어선 영웅을 따라 몸을 일으키려던 채언은 다리에 힘을 주다 말고 의자 등받이에 다시 등을 기댔다.
“라이언.”
“응?”
“우리 비행기를 타면 바다 위를 날겠죠?”
그 말에 영웅은 채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며 미소 지은 그는 채언이 하얀 스웨터 위에 걸친 겉옷을 여며준 뒤 물었다.
“많이 긴장돼요?”
“사실은, 조금 무서워요. 그런데….”
채언은 초록 눈동자 속에 담긴 자신을 보았다. 꼭 에메랄드빛 바다에 풍덩 빠진 것 같았다. 바다를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날이 있었는데. 영웅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가다 보면 살면서 꼭 한 번쯤 눈에 담아보고 싶었던 그 바다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계속 같이 있을 거예요. 그렇죠?”
언젠가 겨울을 떠올리면 깨진 유리 조각, 부서진 아스팔트 길, 넘어갈 수 없는 금, 트럭이 지나가는 길과 작동하지 않는 신호등, 차갑고 무서운 것들과 땅 밑으로 꺼져버릴 것만 같은 두려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젠 그렇지 않았다. 이미 겨울은 시작되었고, 더 춥고 시린 날이 온대도 무섭지 않았다. 두려움보다 설렘과 기대가 더 컸다. 겨울 바다 위에도 하얀 눈이 펑펑 내릴 테니까.
하얀 눈이 내리면 그와 함께 눈사람을 만들고 따듯한 음료를 마셔야지.
“예스, 달링.”
채언은 보조개가 폭 패도록 웃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겨울 여행을 떠나는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