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팡이 핀 딸기 외전: Painkiller 3권 (완결)
7.
쪽파가 삐죽삐죽 튀어나온 쇼핑백을 안은 채언이 서 있는 곳은 한국 대학교 정문 앞이었다.
볼일이 있어 오긴 했는데 막상 안으로 들어가려니 정말 들어가도 되나 눈치가 보였다. 누가 붙잡고 무안을 준 것도 아닌데 괜히 몸이 움츠러들었다.
채언을 학교로 부른 것은 송병규 교수였다. 연휴가 지나고 곧바로 시작된 반찬 만들기 수업에서 두 사람은 오래간만에 얼굴을 보았다. 이미 영진에게 쪽파를 선물한 채언은 송 교수에게도 선물을 하고 싶었다. 추석 때 농장에 가서 키우던 작물을 수확했다고 넌지시 알리자 그가 관심을 보여 왔다.
‘필요하시면… 조금 가져가실래요?’
꼭 나눠주고 싶다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무덤덤한 말투로 말한 채언에게 좋다며 송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다음 수업 시간에 가져다드릴게요!’
‘채언 학생. 그런데 말이야. 그건 조금….’
송 교수는 음식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반찬 만들기 수업에서 둘만 그런 것을 나누면 다른 수강생들에게 조금 눈치가 보이지 않을까 걱정했다.
새로 듣는 반찬 만들기 수업에는 낯익은 얼굴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이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채언은 다른 사람들만 원한다면 상추를 뜯어와 나눠줄 생각이 있었다. 어차피 밭에는 아직 상추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럼 제가 다른 분들 것도 가지고 올게요.’
‘아니야. 채언 학생, 우리 아무래도 다른 곳에서 만나는 게 좋겠어.’
‘다른 곳이요?’
요즘 일이 바빠 도저히 시간이 안 난다며 송 교수는 자신이 원하는 시각에 자신이 말하는 곳으로 채언이 와주기를 바랐다. 대신 저녁을 사주겠다는 그의 부탁에 채언은 그러지 않으셔도 된다고 손을 저었지만 송 교수는 그저 어깨를 두드려줄 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쪽파를 들고 오게 된 곳이 한국 대학교였다. 정확한 약속 장소는 송병규 교수의 연구실이었다.
쉽사리 발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채언은 핸드폰 액정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늦지 않게 미리 나온 터라 약속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지만 계속 이곳에 서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넓은 캠퍼스 안에서 송 교수의 연구실이 어디인지도 찾아봐야 했다.
“후우….”
채언은 쇼핑백을 안고 심호흡을 했다. 교수님의 부탁으로 온 것이니 주눅들 것 없었다. 외부인이기는 했지만, 침입자는 아니니 눈치 볼 것도 없었다. 다부진 표정으로 입술 끝에 힘을 준 채언은 한 걸음씩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한 발, 두 발, 세 발. 몇 걸음 걸었다고 해서 세상은 뒤집어지지 않았다. 크게 달라진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채언은 캠퍼스 안에 들어와 있었다.
“후우!”
움츠러들던 조금 전과 달리 채언은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상기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자 조금 전 보던 곳과 같은 풍경이 전혀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까는 여기저기 보이는 건물들이 전부 삭막해 보였는데 이제는 각기 다르게 생긴 건물들이 꽤 멋있게 디자인되어 있다는 게 눈에 들어왔다.
기대와 달리 돌아다니는 학생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는데 부지가 넓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 같았다.
대학교 안에 들어와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처음이 그 유명한 한국 대학교라니. 꼭 드라마 세트장에 방문한 느낌이었다.
채언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대학교 안에 들어온 것이 누군가에게 자랑할 일은 아닌데 영웅에게든 건영에게든 뭐라도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헛웃음을 터트린 채언은 시간만 다시 확인한 후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학교 건물 위치를 표시해놓은 안내판 같은 것이 있으면 좋을 텐데. 이렇게 캠퍼스가 넓으니 정문 근처에 그런 것이 하나쯤은 있을 것 같았다.
채언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예상대로 멀지 않은 곳에 지도가 그려진 안내판이 하나 서 있었다.
지도 근처로 걸어간 채언은 간략하게 그려진 캠퍼스 안내를 보며 교수 연구동을 찾았다. 현재 위치가 표시된 지도와 실제 장소를 비교해보니 대략적인 위치를 알 수 있었다. 교수 연구동은 건물 몇 개만 지나면 나오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건물 두 개 지나서, 오른쪽….”
채언은 방금 본 지도를 입으로 외우며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내판 앞을 벗어난 지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채언은 캠퍼스 안에서 길을 잃었다.
학교 안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다리가 이어져 있는 곳도 있었고, 둥그런 광장 같은 것을 끼고 늘어져 이게 한 건물인지 두 건물인지 모호한 곳도 있었다.
입으로만 외우지 말고 지도 사진을 찍어둘걸. 후회하며 채언은 당황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학교는 고등학교와 전혀 달랐다. 안에는 편의점도 있고, 식당도 있었다. 마치 작은 마을처럼 느껴졌다. 그러니 낯선 동네에서 길을 잃은 것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진짜 마을과 달리 캠퍼스 내에서는 택시를 잡아탈 수가 없는 게 문제였다. 아까까지는 많지 않아도 듬성듬성 돌아다니던 학생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약속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같은 곳을 뱅뱅 돌고 있으려니 마음이 급했다. 쪽파가 든 쇼핑백이 구겨지지 않게 다시 추슬러 안은 채언은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 바로 앞에 교수 연구동을 두고 눈으로 찾지 못하는 바보짓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길을 물어볼 만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조금 전에 본 편의점에 가서라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할 찰나였다. 가까이에 있는 문에서 남학생 한 명이 나오고 있었다. 채언은 서둘러 그쪽으로 달려갔다.
“저기, 죄송한데요.”
채언의 부름에 학생이 뒤를 돌아보았다.
“예?”
“제가 교수님, 그러니까, 철학과 교수님을 좀 뵈려고 왔는데요. 교수 연구동이 어딘지 아시나요?”
혹시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까 봐 채언은 자신의 용건을 한 번에 토해냈다. 다다다 쏟아진 말에 당황한 듯 눈을 끔뻑거리고 있던 남학생은 채언과 멀리 어딘가를 번갈아 보더니 목덜미를 쓸어 만졌다.
“여기서 바로 보이는 곳인데요. 음, 저쪽 보시면 하얀 기둥 있는 건물이요.”
남학생이 팔을 뻗어 건물을 가리켰다.
“하얀 기둥이요? 어…, 저거 둘 중에 어떤 건가요?”
하얀 기둥이 서 있는 건물은 두 개 있었는데, 그 중간을 다리가 잇고 있었다. 아까 지나온 곳이었다.
“크흠, 그냥.”
“네?”
“제가 데려다드릴게요. 안쪽 복도가 미로 같아서 문 잘못 찾아 들어가면 빙 돌아가야 하거든요.”
직진하면 바로 갈 수 있는 곳이라 굳이 함께 갈 필요는 없어 보였는데 문 하나를 잘못 들어가면 복잡해진다니, 채언은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웃으며 인사하는 채언의 얼굴을 흘끔 쳐다본 남학생은 말없이 반걸음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건물 앞까지 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가까운 곳을 눈앞에 두고 다른 곳을 뱅뱅 돌고 있었다니. 채언은 핸드폰 시계를 확인했다. 집에서는 여유 있게 나왔는데 어느새 약속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이 문으로 들어가시면 돼요. 오른쪽 복도 말고 왼쪽 복도로 가세요. 거울 붙어 있는 벽에 보면 몇 층에 무슨 과 교수님 연구실 있는지 쓰여 있을 거예요.”
“바쁘셨을 텐데,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볍게 몸을 숙여 인사한 채언이 건물 안으로 들어서려 계단에 올라섰다.
“저기요.”
“네?”
“어느 과세요?”
한 계단 위에 서서 남학생을 내려다보던 채언은 잠시 고민했다.
보통 캠퍼스 내에서 처음 보는 사람과 인사할 때는 무슨 과인지 물어보는 건가? 그렇다면 학생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혹시 무슨 과 교수님을 찾아왔냐고 물어본 걸까? 아까 철학과 교수님을 만나러 왔다고는 했지만, 그가 까먹었을 수도 있었다.
“저는….”
“그냥, 궁금해서요. 어느 교수님 찾아오신 건지 궁금해서.”
자신은 학생이 아니라고 대답하려고 했는데, 잠시간의 침묵이 답답했는지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쓰고 있던 볼 캡을 들어 머리를 쓸어 넘긴 뒤 다시 모자를 눌러썼다.
“철학과 송병규 교수님이요.”
“…철학과. 이미지랑 되게 잘 어울리세요. 철학 전공이신, 잠깐, 송병규 교수님이요? 철학과 송병규 교수님?”
“네.”
“아, 아… 대학원 준비하시는구나….”
“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멀뚱히 남학생을 바라보던 채언은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길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예. 오른쪽 말고 왼쪽으로 가세요. 복도.”
끝까지 친절한 그의 말에 채언은 웃음으로 화답하고는 몸을 돌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오른쪽으로 긴 복도가 늘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가 왼쪽으로 가라고 했으니 채언은 긴 복도를 신경 쓰지 않고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로비에 있는 안내판을 보고 계단을 오르던 채언은 자신이 꼭 시청이나 병원 같은 곳을 걷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와 달리 다 큰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라 그런가. 어쩐지 삭막하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원하던 층에 도착한 채언은 줄줄이 늘어선 문마다 붙어 있는 팻말을 확인했다. 문마다 어느 교수의 연구실인지 팻말이 붙어 있었다.
“찾았다.”
얼굴이 밝아진 채언은 송 교수의 연구실 앞으로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채언은 조심히 문고리를 돌렸다.
책상에 앉아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던 송병규 교수가 고개를 들다 채언을 보고는 활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채언 학생! 딱 맞춰 왔네. 오는데 힘들지는 않았고?”
“네. 안녕하세요. 교수님.”
대학교수의 연구실은 뉴스 인터뷰 화면으로 보아온 것이 다라, 채언은 이곳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사실 커다란 연구소 같은 곳을 상상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는 작은 방이었다. 책장에는 책이 빼곡히 꽂혀 있었고, 책상에는 낱장으로 된 종이와 파일 같은 것이 쌓여 있었다.
연구실이라기에 막연히 실험 도구 같은 게 있지 않을까 했던 자신이 조금 바보같이 느껴져 채언은 피식 웃었다.
“여기 앉아.”
작은 소파를 가리킨 송 교수는 자신도 소파 한쪽에 앉으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교수님, 이거 받으세요. 제가 키운 쪽파예요.”
채언은 내내 안고 있던 분홍 종이백을 내밀었다.
“잘 먹을게. 채언 학생. 내가 참 귀한 선물을 받았네. 요즘에는 이렇게 뭘 직접 키운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야.”
“아니에요. 선물이라고 드리기도 뭐한걸요.”
채언은 손등으로 볼을 문질렀다.
“제가 먹어봤는데요. 많이 맵지 않고 연하니까, 음, 아무렇게나 해서 드셔도 괜찮을 거예요.”
송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백을 소파 위에 올려두었다. 연구실에 걸린 작은 시계를 쳐다본 그는 채언에게 물었다.
“혹시 이후에 많이 바쁜가?”
“아뇨.”
“여기에는 둥굴레차 같은 것밖에 없어서, 옆에 있는 카페에 가서 차 한잔 마시는 게 어때, 채언 학생. 사실 이 근처 카페로 약속 장소를 잡으면 어딘지 오는 데 불편할까 봐 잠깐 여기로 부른 거거든.”
“네.”
“그럼 지금 바로 이동하지. 이건 내가 이따 집에 갈 때 꼭 챙겨갈게.”
송 교수가 종이백을 잡고 살살 흔들어 보였다.
“네. 꼭 챙겨 가셔야 해요.”
채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마시자고 채언을 데리고 나온 송 교수가 향한 곳은 교수 연구동 내의 레스토랑이었다.
학생회관이나 기숙사 등등에 있는 보통의 학생 식당보다는 가격대가 있어 언제 와도 붐비지 않는 곳으로, 교직원들이 외부 손님을 데리고 학교 밖으로 나가기 애매하거나 가볍게 식사를 대접할 때 이용하는 곳이었다.
차만 마셔도 되는 곳이었지만 막상 자리에 앉자 송병규 교수는 채언에게 식사를 제안했다.
“혹시 지금 식사를 하기에는 좀 부담스러운가? 애매한 시간이라?”
확실히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긴 했다. 하지만 점심보다는 저녁에 가까웠고, 밥을 먹기 부담스러울 만큼 배가 부른 상태도 아니었기 때문에 채언은 송 교수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대학생들은 고등학생처럼 미리 짜인 시간표에 따라 수업을 듣는 게 아니고 스스로 시간표를 짜서 강의를 듣는다고 했다. 전에 들은 건영의 말로는 식사 시간 없이 하루 종일 수업을 들어야 하는 때도 있다고 했다. 혹시 송 교수도 오늘 일정이 그런 것은 아닐까 싶었다.
“밥 먹는 것도 저는 괜찮아요. 아까 점심을 많이 먹지 않아서요.”
원래는 저녁을 먹고 들어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영웅에게도 송 교수에게 쪽파를 전해주고 올 것이라고만 말해놓은 터였다. 채언은 이따 영웅이 저녁을 먹을 때 옆에 앉아 가볍게 간식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잘됐네. 그럼 오늘은 여기서 간단히 식사하고 선물해준 답례로 나중에 학교 밖에서 맛있는 걸 사줄게.”
“네? 아뇨. 오늘 저녁 사주시는 걸로도 충분한걸요.”
“아니야, 아니야. 내가 채언 학생 자주 보고 싶어서 그래.”
그렇다면 거절할 수가 없었다.
“네에.”
얌전히 대답한 채언은 테이블 아래에서 손을 꼼지락거렸다.
“자, 먹고 싶은 메뉴로 골라봐.”
“네.”
메뉴판을 받아든 채언은 딱딱한 판을 펼쳐 글자를 읽기 시작했다.
부채살 로제, 매콤 토마토 뚝배기 아라비아따, 명란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 메뉴에 적힌 설명을 살펴봐도 영웅이 해주던 것과 비슷한 파스타가 없었다. 채언은 메뉴를 다음 장으로 넘겨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채언이 메뉴판을 내려놓자 직원이 다가왔다. 송 교수가 먼저 시키라는 듯 손짓을 해와 채언은 정해둔 메뉴를 말했다.
“저는 게살 크림 리조또 주세요.”
“음료도 한 잔씩 시키지.”
“음료요? 저는…, 오렌지 주스 부탁드립니다.”
주문을 마친 채언에 이어 송 교수도 자신이 먹을 메뉴를 말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직원이 서빙한 것은 채언이 시킨 게살 크림 리조또와 오렌지 주스, 송병규 교수가 시킨 불고기 파니니와 사이다였다.
“맛있게 먹어, 채언 학생. 가끔 와서 먹는데 여기 음식 맛이 나쁘지 않아.”
“네…, 잘 먹겠습니다.”
테이블을 내려다보는 채언의 머릿속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송 교수와 자신의 메뉴가 바뀐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빵도 식사가 될 수 있긴 하지만 송 교수가 시킨 파니니는 식사라고 하기에는 그다지 든든해 보이는 양이 아니었다.
송 교수가 파니니를 한입 크기로 썰어 먹는 것을 보며 채언도 리조또를 떠먹었다. 부드럽게 뭉개지는 밥알의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입 안에 든 것을 꿀꺽 삼킨 채언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원래 저녁을 가볍게 드시나요?”
사이다를 빨아 마신 송병규 교수가 안경을 추켜올렸다.
“가끔은 이렇게 먹어보고 싶은 날이 있으니까 말이야. 집에서는 이렇게 먹으면 딸아이가 잔소리해서 잘 못 먹거든.”
“아, 그러셨구나. 혹시 배 안 고프신데 저 때문에 시키신 줄 알았어요.”
채언은 작게 미소 지었다. 송 교수에게 잔소리를 한다는 사람은 영웅이 가끔 회사 얘기를 해줄 때 나오는 앨리스 님일 것이었다. 자신도 전에 한 번 본 적 있었다.
채언은 문득 궁금해졌다. 교수 부모님 아래서 자랐다면 학창 시절이 어땠을까.
리조또를 한입 떠먹은 채언은 송 교수를 흘끔 쳐다보았다. 그는 분명 고졸인 자신보다 훨씬 똑똑할 테고,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니 대학생보다도 똑똑할 것이었다. 대학원생보다도 더.
중고등학생 때, 선생님의 문제 풀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짝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애들을 몇 번 본 적 있었다. 그도 수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이해하지 못할까? 자식의 교육 문제로 고민해본 적 있을까?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딸과 싸워 봤을까? 채언은 보편적인 가정의 교육 방식이 궁금해졌다. 정말 단순한 궁금증이었다.
드라마를 보면 돈을 많이 버는 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특정한 직업을 강요받기도 하던데, 보편적인 가정에서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아이의 미래에 간섭을 할까? 생각에 생각이 이어졌다. 하지만 굳이 송 교수에게 그런 문제로 질문을 하지는 않기로 했다.
두 사람은 일상 이야기를 하며 접시를 비워 나갔다. 채언이 부지런히 리조또를 떠먹을 때마다
송병규 교수는 손목에 걸린 시계를 보며 시간을 체크했다. 여섯 시부터 외부인을 대상으로 한 수업이 시작되는데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채언이 마지막 한입을 입에 넣었다. 오물오물 씹은 뒤 곧 냅킨으로 입을 닦자 송 교수가 자연스럽게 물었다.
“채언 학생. 후식은 뭐로 하겠어? 커피?”
“후식이요?”
후식까지 내어주는 곳인 줄 몰랐던 채언은 잠시 고민하다 아직 오렌지 주스가 반 남아 있는 컵을 끌어왔다.
“저는 이 오렌지 주스 마저 마실게요. 커피를 잘 못 마셔서요.”
가끔 영웅이 마시는 커피를 한두 모금 얻어 마시거나 진한 커피에 물을 많이 타 아주 연하게 마셔보곤 했지만 그건 보리차 수준의 커피였다. 의사도 커피는 좋지 않다고 했기 때문에 채언은 굳이 제대로 된 한 잔의 커피를 마셔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커피를 못 마시는구나. 그럼 녹차나 아이스크림도 있는데 골라보지. 혹시 후식 먹을 시간까지는 없는 건가?”
아쉬움이 가득한 송 교수의 표정에 채언은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시간 많이 있어요. 그럼 저는 아이스크림 먹을게요. 아, 제가 달라고 할게요. 교수님은 뭐 드시겠어요?”
“그러면 아이스크림 두 개로 하지.”
채언이 손을 들어 직원에게 신호를 주자 주방 근처에 서 있던 직원이 다가왔다.
“저희 아이스크림 두 개 주시겠어요?”
“어떤 맛으로 드릴까요?”
“어떤 맛이 있는데요?”
“초코랑 바닐라 맛 두 가지요.”
“교수님 어떤 맛으로 하시겠어요?”
“나는 바닐라.”
“바닐라 맛으로 두 개 부탁드릴게요.”
곧 나온 아이스크림 컵 안에는 냉동 과일과 견과류, 생크림까지 뿌려져 있었다. 후식 퀄리티가 좋다고 생각할 찰나 직원은 새로운 빌지를 가지고 와 먼저 있던 것과 바꿔 끼워놓고 돌아갔다. 채언은 그제야 눈앞의 아이스크림이 서비스가 아니라 정식 메뉴였음을 깨달았다.
송 교수는 작은 숟가락으로 이미 아이스크림을 떠먹고 있었다. 아마 그는 오늘 강의 스케줄이 매우 고되었던 듯했다. 힘든 날에는 단 게 당기는 법이니까. 채언도 아이스크림을 한입 떠먹었다. 차가운 단맛이 입 안에서 사르륵 녹았다.
창밖을 보니 해가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밥시간도 이렇게 애매하고, 교수는 정말 힘든 직업이구나. 뭐든 안 힘든 일은 없겠지만. 채언은 작은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 표면을 문지르다 입을 열었다.
“교수님.”
“응?”
“교수님은 어릴 때부터 꿈이 누군가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는 거였나요?”
송 교수는 입 안에 있던 호두를 오도독오도독 씹어 삼켰다.
“아니, 지금 하는 일이 적성에는 맞지만 어릴 때 꿈은 다른 거였어.”
“어떤 거였는데요?”
“의사.”
“우와, 의사….”
채언은 한 번도 꿈꿔본 적 없는 직업이었다. 누군가의 병을 고쳐주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고, 그 누군가에는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의사는 막연히 공부 잘하는 애들이 되고 싶어 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했었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의사가 꿈이었고, 그래서 의대에 진학하기도 했었지. 그런데 금방 그만뒀어.”
“네? 의대에 들어가셨는데 그만두셨다고요?”
채언의 손에서 떨어진 숟가락이 아이스크림 컵에 부딪혀 차그랑 소리가 났다. 의대 진학에 실패한 것도 아니고 의대에 들어갔는데 도중에 그만뒀다니.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히 큰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채언은 방금 너무 놀란 티를 낸 것 같아 급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정말 무슨 일이 있어 다른 길로 전향한 거라면 이렇게 반응한 것이 너무 실례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반응이 그랬죠….”
송 교수는 괜찮다는 듯 웃으며 테이블을 톡톡 쳤다.
“당시에 내 주변 사람 모두가 놀랐어. 이미 익숙한 반응이지. 그런데 어쩔 수 없이 그만둔 게 아니라서 아픈 이야기는 아니야.”
채언은 송 교수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럼 왜 그만두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음, 심오하고도 간단한 이유지. 막상 제대로 공부를 해보니까 그 길은 내 길이 아니었던 거야.”
간단한 이유라는 말답게 딱 한 문장으로 끝난 깔끔한 설명이었다. 채언은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어요. 그런데…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예의가 아닌 것 같지만, 교수님 용기가 대단하셨네요. 다른 길을 택하신 거요.”
“용기라. 그래. 그때 다른 길을 택한 건 내 의지였으니까. 그런데 여러모로 운이 좋기도 했지.”
“운이요?”
“채언 학생이라면 자식이 잘 다니던 의대를 그만둔다고 할 때 찬성하겠어?”
“으음.”
채언은 아이스크림 숟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진짜 자식은 없지만, 만약 그런 상황에서 부모의 입장이라면 흔쾌히 그만두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글쎄요….”
“우리 부모님은 다행히 내 의견을 받아들여 주셨거든.”
송 교수는 예전 생각을 하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는 녹기 시작한 아이스크림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나 때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는 것보다 바로 일을 시작하는 경우가 더 많았어. 그런데 자식 놈 의대까지 보내놨더니 철학을 배우고 싶다고 그야말로 폭탄선언을 해버린 거지. 부모님은 조용히 두 분이서 고민하시다가 허락해주셨어. 그래도 내가 그동안 해온 게 있으니까 믿어주겠다면서.”
채언은 입 안에 남은 호두를 씹는 송 교수를 보다가 자신도 아이스크림을 떠먹었다.
“진학 문제로 싸우는 집이 많던데 교수님은 따님이랑 한 번도 안 싸우셨을 것 같아요. 전에 그런 일을 직접 경험해 보셨으니까요.”
“으응? 그렇진 않아.”
녹아서 말랑해진 라즈베리를 씹던 채언이 고개를 갸웃했다.
“싸우셨어요?”
송 교수는 차가운 걸 먹어 머리가 아픈 사람처럼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눈을 질끈 감은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우리 지영이는 공부를 잘 안 했어. 안 해도 너무 안 했어. 그런데도 고삼 때 얼마나 예민했다고. 매일 아빠 미워! 하고 문 닫고 방에 들어가기 일쑤였지. 그때 생각하면 차암…. 나는 지영이가 공부를 안 해도 공부하라고 애를 쪼지는 않았거든. 다른 게 하고 싶으면 다른 걸 열심히 하라고 했지.”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줄인 송 교수는 아이스크림을 떠먹었다. 그 모습을 보던 채언은 참지 못하고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지금 되게 좋은 회사 다니시잖아요. 라이, 저랑 같이 사는 분하고 같은 회사 다니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고등학교 다니는 내내 공부는 안 하고 이리저리 놀러 다닐 궁리만 해서 한참 걱정했는데, 공부 말고 다른 쪽으로 머리를 잘 쓰더라고. 이래저래 잘 풀렸으니 다행이지. 자기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정말 잘된 일이네요.”
채언은 숟가락으로 반쯤 녹은 아이스크림을 휘휘 저었다. 하얀 생크림이 노란 아이스크림에 부드럽게 섞여들었다. 송 교수는 그런 채언의 모습을 보다 물었다.
“그런데 채언 학생. 이렇게 웃는 얼굴을 보는 것도 처음이고, 이렇게 길게 말하는 것도 처음이네? 혹시….”
우리 딸한테 관심이 있나? 뒷말이 튀어나오기 전에 송 교수는 아이스크림을 한입 떠 입에 넣었다. 만약 채언이 그렇다면 딸에게 지난번 호프집에서 본 잘생긴 학생을 기억하느냐고 물어볼 의향이 있었다. 하지만 송 교수의 머릿속에 잠깐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조금 전 채언이 언급한 ‘같이 사는 분’에 대한 것이었다.
“음, 아니야, 아니야.”
갑작스레 말을 줄인 송 교수를 보던 채언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문질렀다.
“티가 나나요?”
아무래도 요즘 고민하는 문제가 있다는 걸 송 교수가 알아챈 것 같았다.
“응?”
“교수님. 혹시 대학생들도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 찾아가서 상담하듯이 그런 걸 하나요?”
“하지. 나도 선생님이니까. 내 연구실로 진로 상담도 받으러 오고 그래.”
채언은 숟가락으로 괜히 아이스크림을 짓누르다가 멋쩍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는 교수님께서 가르치는 학생은 아니지만. 저한테도 조언을 해주시면 안 될까요?”
송 교수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고민이 있나 보지?”
채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목덜미를 매만지며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야 채언은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사실 요즘, 앞으로 뭘 하면서 살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불안해요. 교수님께서 아시다시피 저는 고졸이거든요. 고졸이어도 좋은 직업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 알긴 하지만,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로 제대로 된 직업을 가져볼 생각을 못 했어요. 뒤늦게 생각해보는 중이긴 한데, 하고 싶은 게 뭔지도 잘 모르겠고요. 꿈이 없는데…, 이게 정상적이지는 않은 거죠?”
가만히 채언의 말을 들은 송 교수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어떤 직업을 가지고 싶은지 결정하지 못했다고 해서 비정상인 건 아니지. 그건 모를 수 있어. 어쩌면 죽을 때까지.”
“하지만 교수님도 그렇고 따님도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으셨잖아요.”
“채언 학생. 내가 아까 운이 좋았다고 말했지?”
“네.”
“나는 내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싶은지 적절한 시기에 알게 된 거에도 운이 따라준 거라고 생각해. 운 좋게 한국, 운 좋게 나를 이해해주는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고, 운 좋게 아플 때는 병원에 가면서 의사라는 직업을 보고 자랐지. 그런데 만약 내가 다른 세상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해봐. 의사라는 직업이 없는 곳.”
팔짱을 낀 송 교수는 상체를 숙여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렸다.
“그럼 나는 그곳에서는 어떤 직업을 가지고 싶은지 알지 못했을 거야. 직업이라는 건 그런 거지. 접해 보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어쩌면 운 좋게 알게 되는 것. 그런데 사람들이 이걸 잘 몰라. 학창 시절 때도 그렇고, 지금 교수 생활하면서 만나는 학생들도 그렇고, 살아가면서 뭘 해야 할지 몰라 고민인 사람들을 꽤 많이 만났거든.”
채언은 차가운 아이스크림 컵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그중에는 그걸 몰라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많지. 채언 학생이 말한 것처럼 뭘 하고 싶은지 모르는 내가 비정상인 건 아닐까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고. 하지만 사람이 꼭 예술가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어. 그런 걸 꿈꾼다고 해서 야광 완장이라도 찬 듯 무작정 빛나는 사람도 아니고. 하고 싶은 일이 없을 때는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돼.”
채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입술을 문질렀다.
조금 더 나은 방을 마련하기 위해 살았을 때나 무작정 죽기 위해 돈을 모으던 때는 어떤 일이든 했었다. 호프집 아르바이트든 택배 상하차 알바든 무작정. 그때는 그런 일들은 잠시 하고 말 것들이라 생각했다. 얼마간의 돈을 모을 때까지만 할 일.
그러는 동안 가져보지 못한 자리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며 살았다. 남들은 다 하는 걸 자신만 못 해봤다고 슬퍼하면서.
잘 살아 봐야지 결심하게 된 뒤로는 이미 많이 늦었으니 어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아야 한다고 조급해졌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살면 안 되는데, 하는 불안이 잇따랐다. 번듯한 직업을 가진 영웅의 옆에 제대로 두 발을 딛고 일어선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해 봐도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떠오르지 않아 조급했고, 스스로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은 뭘 전공하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대학생들을 부러워했던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채언은 꼭 예술가가 되지 않아도 된다는 송 교수의 말에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그의 말대로 하고 싶은 일이 없다고 해서 한심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었다.
이 레스토랑 안에서 서빙을 하는 직원은 한심하지 않았다. 길을 걷다 마주치는 회사원도 한심하지 않았다. 동네 카페 직원도 한심하지 않았고, 아무도 한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교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알겠어요.”
“교수인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재수 없는 사람이라고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직업이 없다면 그냥 자기가 먹고 싶은 거 사 먹을 수 있을 만큼만 벌면서 살면 돼. 다만 여기서 만족하면서 살기보다는 사색을 해봐야지.”
“사색이요?”
“그래, 사색. 자기만의 신념도 가져보고, 논리의 충돌도 겪어보고, 또 그걸 내가 정립한 어떤 삶의 기준과도 엮어보면서.”
사색을 하며 살아야 한다니. 이번 말은 조금 어렵게 느껴졌다. 어느 종교를 따르듯 어떤 철학자의 사상 하나쯤은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 한다는 것일까.
하지만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지 송 교수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솔직히 털어놓기로 했다.
“조금 어려운데요. 조금만 더 풀어서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송 교수가 테이블을 탁 치며 웃었다.
“야하! 그렇게 솔직히 말하는 건 정말 좋은 태도야. 채언 학생. 그래, 쉽게 말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누가 생각해 보라고 해서 억지로 하는 생각 말고 진짜로 고민해보고 싶은 문제는 무엇인지. 사람은 살면서 이런 것들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어. 아주 깊이, 몇 년이 걸려서라도. 이건 어떤 직업을 가지느냐와는 다른 문제야.”
송 교수의 말을 곱씹어보던 채언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는 괴로울 정도로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해 모든 걸 그만두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와 뒤돌아보면 그 괴로움 속에서 몸부림칠 때 했던 생각들의 종착지는 고독이었다. 앞으로 살아가는 데 전혀 도움 되지 않는 효과 없는 쓰기만 한 약.
이제는 그런 것들과 다른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었다.
“네, 교수님.”
채언은 목덜미를 쓸어내리던 손으로 어깻죽지를 꾹꾹 눌러 만졌다.
“어깨가 아파?”
송 교수의 물음에 채언의 입술 사이로 한숨 같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뇨. 단 걸 먹으니까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 들어서요.”
“가끔은 이렇게 단 게 좋지. 나는 집에서 이런 걸 못 먹거든. 일할 때 몰래 먹어줘야 해.”
“집에서는 왜요?”
“당 조심하라고 딸이 못 먹게 하거든.”
송 교수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따님하고 사이가 정말 좋으신 것 같아요. 매번 말씀하실 때마다 그게 느껴져요.”
“그래? 방금 그 말 우리 딸 앞에서도 한번 해주면 좋겠는데.”
진심이 담긴 송 교수의 말에 채언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송병규 교수는 채언의 눈 밑 양쪽 볼에 보조개가 쏙쏙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나중에 저렇게 보조개가 있는 손주가 생기면 어떨까 상상해보았다. 그것참, 엄청 귀여울 것 같은데.
하지만 결혼을 하고 말고, 아이를 가지고 말고는 딸이 선택할 문제이니 막연히 바라본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채언에게도 ‘같이 사는 분’이 있지 않은가. 그는 아쉽게 쩝 입맛을 다셨다.
“그나저나, 채언 학생. 아이스크림 다 먹고 나서는 집에 갈 건가?”
“네, 그래야죠.”
송 교수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슬쩍 확인했다. 시간이 아주 딱이었다.
“안 바쁘면 수업을 하나 듣고 가는 건 어때.”
“수업이요? 무슨….”
“여섯 시부터 외부인을 대상으로 수업을 하는 게 하나 있거든.”
송 교수의 말을 이제 그만 자리를 파하자는 뜻으로 알아들은 채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쁘시면 얼른 가보셔도 돼요. 저 때문에 여기 계속 앉아 계셨던 거죠?”
“그게 아니고, 정말 수업을 듣고 가는 게 어떤가 해서 물어본 거야.”
“제가 들어도 되는 건가요? 다른 분들은 수업료를 내고 참석하신 걸 텐데요.”
“아니야. 무료 강의인 데다, 전공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것과는 결이 달라서 혹시 어려울까 하는 부담 가지지 않아도 돼.”
“저 오늘 아무것도 안 가지고 왔는데요. 공책이나 볼펜도 없고요.”
채언은 맨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거라고는 지갑과 핸드폰이 다였다.
“그런 건 걱정할 필요 없지, 강의실에 다 준비되어 있거든. 도우미 학생들이 페이퍼랑 필기도구를 같이 나눠 줄 거야.”
채언은 손톱을 매만지며 잠시 고민했다. 송 교수는 그동안 몇 번이나 수업을 들어볼 것을 권해 왔는데 자신은 그때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계속 거절했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 피치 못 할 사정 때문이었고, 한 번쯤은 철학 수업을 들어보고 싶었다.
채언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지금 기회가 왔는데 뭘 망설이고 있는 거지?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도 아닌데.
주먹을 쥔 채언이 고개를 들었다.
“네, 교수님. 그럼 저도 오늘 수업 들어보고 싶어요.”
[Chocolate♥: 쪽파만 드리고 오려고 했는데 교수님이 저녁을 먹자고 하셔서요 여기에 조금 더 있다가 갈게요 라이언 퇴근 시간 전에는 집에 도착 할 것 같아요]
[알겠어요 저녁 맛있게 먹고 집에서 봐요^!^]
[Chocolate♥: 저녁만 먹고 집에 가려고 했는데 조금 늦을 것 같아요 교수님이 여섯시에 수업을 하나 핫닌느네 들어보는게 어떠냐고하셔서 듣고가기로 했거든요 갑자기 결정하게 된거라 미리 말 못해서 죄송해요 저녁 꼭드세요]
[잘됐네요! 교수님 수업 들어보고 싶어 했잖아요 난 괜찮아요 (샌드위치)(감자)(엄지)]
[Chocolate♥: 감자칩샌드위치 말고 제대로된걸료요! 그런데 이따갈때 아이스크림 사갈까요?]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요? 무슨 맛? 내가 사놓을게요]
[Chocolate♥: 저 먹었어요! 교수님이 아이스크림도 사주셨거든요 그런데 라이언도 아이스크림좋아하잖아요]
[아이스크림 이야기 하니까 지금 먹고 싶어졌는데^3^ 내가 집에 오는 길에 사먹고 저녁도 먹을게요]
[Chocolate♥: 네 그럼 수업 끝나고 연락할게요]
[그런데 몇 시에 끝나요? 데리러 갈게요]
[Chocolate♥: 아니엥오안데리러와도돼요! 지하철 타고 금방이라 아무튼 끝나고연락할게요]
거실 TV가 틀어져 있었지만, 영웅은 TV는 보지 않고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기 전에 잠시 소파에 앉아 채언과 나눈 메시지를 읽는 중이었다.
메시지를 보낼 때 옆에 송 교수가 있었는지 급하게 보낸 것 같았다. 다다다! 친 게 분명한 오타와 띄어쓰기에 채언의 상황이 눈에 그려졌다.
채언이 마지막 메시지를 보내고 시간이 꽤 흘렀으니 슬슬 수업도 마무리 중이지 않을까 싶었다. 정확히 언제 끝나는지 모르니 미리 한국 대학교 근처에 가서 기다릴 예정이었다. 채언이 오지 말라고는 했지만 아무튼.
만약 송 교수와 함께 집 쪽으로 온다고 하면 자신은 계속 집에 있었던 척하면 될 것이었다.
“앨리.”
영웅은 소파에서 일어서며 AI 스피커를 불렀다.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다.
“앨리.”
네에-
“TV 꺼줘.”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영웅은 황당한 표정으로 스피커를 쳐다보았다. 스피커는 종종 그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업데이트가 된 건지, 아니면 어떤 대화 패턴에 자신이 걸려든 건지 모르겠지만 앨리는 가끔 반말을 했다.
“앨리.”
네에-
“TV. 꺼줘.”
TV를 끕니다.
차분한 말투와 함께 TV 화면이 꺼졌다. 영웅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조금 더 또박또박 발음에 신경 쓴 것만 빼면 조금 전과 똑같이 말했는데 이번에는 얌전히 TV가 꺼졌다. 아무래도 스피커에게 농락을 당한 것 같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직 채언도 자신에게 반말을 안 하는데 스피커가 먼저 말을 놓다니. 영웅은 머리를 흩트리며 거실을 나섰다.
막 신발을 갈아 신으려는데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Chocolate♥: 저 수업 끝났어요! 데리러 오지 마세요!]
메시지를 본 영웅이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미리 가 있으려고 했는데 이미 수업이 끝났다니. 당장 차에 시동을 건다고 해도 그 전에 채언이 지하철에 타는 게 더 빠를지 몰랐다. 삼십 분만 더 일찍 출발할걸.
영웅이 미간을 찌푸리는데 멀리서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잘못 들은 건가 싶었는데 탓탓 발소리까지 들려왔다. 천천히 고개를 드는 영웅의 눈에 중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채언 씨?”
“짠!”
생글생글 웃으며 문 안으로 들어온 채언은 곧바로 영웅의 허리를 안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방금 나한테 메시지 보냈잖아요? 진짜 방금 왔는데. 핸드폰에….”
한쪽 팔로 채언의 어깨를 감싼 영웅은 자신의 핸드폰과 채언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메시지 보낸 것보다 일찍 끝났어요. 놀래켜 주려고 집에 다 와서 보낸 거예요.”
채언은 기대고 있던 머리를 들며 말했다.
“데리러 오려고 하셨죠?”
“음, 아닌데.”
영웅은 들고 있던 키를 핸드폰과 손바닥 사이에 숨겼다. 채언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신발을 벗었다.
“거짓말. 그럼 어디 가려고 했는데요?”
슬리퍼로 갈아 신은 채언이 다시 영웅의 허리를 껴안으며 말했다.
“잠깐 산책, 아이스크림 사러.”
“어, 정말요? 아이스크림 사러?”
눈을 깜빡이던 채언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실렸다.
“아이스크림 저한테 사다 달라고 했으면 사 왔을 텐데. 저녁은요? 밥은 먹었어요?”
배에 손을 올린 영웅은 입꼬리를 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밥도 안 먹었어요? 왜요? 혹시 방금 집에 온 거예요? 왜 갑자기 늦게 끝났어요?”
“그게… 사실은.”
영웅의 힘 빠진 목소리에 채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집중했다.
쪽.
“앗.”
갑작스러운 뽀뽀에 채언이 손을 들어 이마를 가렸다. 오랜만에 보는 깜짝 놀란 채언의 얼굴에 활짝 웃은 영웅이 채언의 손을 잡아 내려주었다.
“저녁 먹었어요. 아이스크림도 냉장고에 넣어놨고.”
“걱정했잖아요.”
“나는 채언 씨가 걱정할 만한 일 안 할 건데요. 내가 데리러 가려고 한 건 알면서 이건 왜 몰랐지?”
채언의 어깨를 감싸 안고 복도를 걸으며 영웅은 까만 머리카락에 뺨을 대고 문질렀다.
“그런데 송 교수님 수업은 잘 들었어요? 어땠어요?”
“전공 수업이 아니라서 어렵지 않을 거라고 하셨는데, 정말 안 어려웠어요. 아니다, 어려웠나? 아무튼 오늘 어디 센터에서 다 같이 오신 거였는데, 자리 채운 사람 중 절반이 노인 분들이었어요.”
“그래요? 어떤 걸 배웠는데요?”
“음….”
전공생들이 듣는 수업과 같은 것은 아니라고 했던 송 교수의 말대로 수업은 어렵지 않았다. 복잡한 이름의 외국 철학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을까 싶었는데, 수업 주제는 예상 밖에도 채언에게 낯설지 않았다.
나는 누구인가요? 도우미 학생이 나눠준 프린트 제일 위쪽에 적혀 있던 그 질문이 한 시간 반짜리 강의의 주제였다. 교복 입은 학생 때,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과목 수업 중에 한 번쯤 들어본 것 같은 질문이었다.
송 교수는 이름과 나이, 사는 곳을 제외한 뒤 그 질문에 대답해 보라고 했다. 어렵지 않은 질문이었지만 쉽게 펜을 드는 사람이 없었다. 채언도 펜을 손에 쥔 채 한참 빈칸을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나중에 자기소개서 쓸 때 도움이 될 만한 거요.”
채언은 강의 중 송 교수가 했던 농담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래도 막상 빈칸을 채우다 보니 다음 질문이 적힌 칸을 넘길 정도로 많은 글자를 적어 넣었다. 강의가 끝난 후 채언은 프린트를 두고 가는 사람들 속에 자신의 것을 섞어 놓고 왔다.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저녁은 뭐 드셨어요? 정말 먹은 거 맞죠?”
“응, 피자 먹었어요.”
영웅이 손가락으로 피자 박스가 놓인 식탁을 가리켰다.
“아이스크림은요?”
“냉장고에 있는데. 먹을래요?”
채언은 고개를 저었다.
“아까 먹어서 괜찮아요.”
“무슨 아이스크림 먹었어요?”
“바닐라 맛 아이스크림을 시켰는데 위에 캬라멜 시럽이 뿌려져서 나왔어요. 그래서 캬라멜맛이 진하게 났거든요? 이걸 바닐라 맛 아이스크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채언의 말에 과장된 표정으로 고민하는 척을 하던 영웅은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그렇게 말하니까 모르겠는데요? 내가 직접 맛본다면 모를까.”
“그래요?”
채언이 위를 올려다보자 영웅이 붕어처럼 입술을 내밀었다.
“으음,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다음에 제가 아이스크림이랑 캬라멜 시럽을 사 와서 만들어 드릴 테니까 그때 다시 생각해보세요.”
영웅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표정 변화를 본 채언은 눈을 굴리며 도망칠 타이밍을 쟀다. 하나, 두울… 셋!
“어딜!”
영웅은 다른 방으로 도망가려던 채언의 허리를 낚아채 단단히 끌어안았다. 막무가내로 퍼부어지는 뽀뽀 공격에 채언은 그의 팔을 껴안고 버둥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수어 수업 마지막 날이었다. 채언은 막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영진에게 손을 흔들었다.
자리에 앉아 책상 위에 가방을 올려놓은 영진은 교재를 꺼내려다가 팔꿈치로 채언을 툭 쳤다.
“네가 준 쪽파 잘 먹었어. 고마워.”
그 말에 기분이 좋아진 채언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영진에게 물었다.
“뭐 해 먹었어?”
“베이글이랑 파스타.”
“어?”
채언은 눈을 끔뻑였다. 영진에게 준 것은 바질 같은 것이 아니라 쪽파였다. 파전이나 무침 반찬 같은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베이글과 파스타라는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내가 준 쪽파로?”
“응.”
교재를 꺼낸 그는 가방을 옆에 걸고 채언을 돌아보았다.
“쪽파 크림 만들어서 해 먹었어.”
“쪽파 크림?”
채언이 고개를 갸웃했다. 쪽파와 크림이라니 머릿속에서 두 가지를 합쳐보려 해도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너 표정이 이상하다? 왜? 조합이 상상이 안 돼?”
“응.”
“이상한 거 아니고, 맛있는 거야. 왜, 바질 같은 거로도 파스타 해 먹잖아.”
“그건 바질이잖아. 향 좋은 거.”
“쪽파도 향 좋아.”
그 말에 채언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진짠데. 아직 네가 준 쪽파 좀 남아 있는데 내가 나중에 만들어줄까? 아니면 언제 한번 가게 놀러 올래?”
“가게? 형 여자친구분이 하는 브런치 가게 말하는 거야?”
“어, 쪽파 크림도 거기서 만들어 먹었거든. 널린 게 양식 재료라. 직원 식사용으로 만들어 먹었어.”
눈을 굴리던 채언은 조심스럽게 영진에게 물었다.
“나 정말 가도 돼?”
“응, 안 그래도 여자친구가 언제 너 한번 데리고 올 수 있음, 밥 먹으러 오라더라.”
“나를? 왜?”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그 말에 채언이 벌어져 있던 입을 꾹 다물자 영진이 피식 웃었다.
“쪽파 네가 준 거잖아. 그거 고맙다고. 그리고….”
말을 할까 말까 잠시 고민한 영진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졸업하고 나서 원래 알던 애들이랑 별로 교류가 없었거든. 나도 걔네 별로 다시 보고 싶지는 않고. 내 여자친구도 체대 애들 별로 안 좋아했어. 근데 최근에 친하게 지내는 애가 쪽파까지 키우는 그런…, 그러언 새로운 유형의 애인 걸 알게 되니까 궁금한가 봐.”
“새로운 유형?”
“성격 괜찮고, 식물 키우는 거 좋아하고, 잘생겼다고 했거든.”
“그게 뭐야.”
영진의 말을 들은 채언이 손에 턱을 괴는 척하며 얼굴을 가렸다. 부끄럽기는 했지만, 기분이 좋았다. 슬쩍 손바닥에 볼을 문지르는데 갑자기 영진이 상체를 숙이며 훅 다가와 채언의 얼굴을 살폈다.
“너 부끄럼 타냐? 개 웃겨.”
“안, 아니야.”
“아무튼 언제 한번 올래? 오, 이연 씨랑 같이 와.”
그 말에 채언이 누구? 하고 물어보려다 급히 턱을 괴는 척 다시 손으로 표정을 가렸다. 영진은 영웅을 나이연이라는 여자로 알고 있었다. 좋은 곳이라면 영웅과 함께 가고 싶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조금 곤란했다.
채언이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그를 오해한 영진이 아차! 했다.
“왜, 요즘 연애가 잘 안 돼? 혹시 고백했는데 차였어?”
“아니야, 그런 거. 고백도 아직 안 했어. 반지 사이즈 안 지 얼마 안 됐거든.”
“그래? 그러면 이번에는 너 혼자 오고 나중에 고백 성공하면 둘이 같이 와.”
“알겠어.”
채언은 천천히 팔을 내리며 영진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언제?”
“내일 와도 되고. 미리 말만 해주면 아무 때나. 아, 그런데 손님 몰려서 너무 바쁜 시간 말고.”
채언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는 거다?”
“응. 갈게.”
마지막 수업이 시작되고 마치는 시간이 거의 다 돼, 수강생들끼리 그동안 수고했다며 서로에게 인사했다.
채언은 짧은 만남과 헤어짐이 아쉽기는 해도 슬프지는 않았다. 무기력해지지도 않았고, 우울하지도 않았다. 파도가 밀려왔다 모래사장을 쓸고 지나가도 예쁜 조개껍데기 한두 개는 모래 위에 남는 것처럼 산뜻하고 좋은 기억이 남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쩌면 계속 이어 나갈 수 있는 인연도.
강사는 언제든 농인 행사에 봉사자로 참석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연락 달라며 화이트보드에 핸드폰 번호를 적었다. 채언은 강사의 번호를 핸드폰에 저장했다.
액정이 깨진 핸드폰 화면처럼 미래를 생각하면 머릿속이 새까맣게 어두워질 때가 있었는데 나중을 위해 새로운 번호를 저장하고 있자니 채언은 이상하게 마음이 아릿했다. 새로운 번호를 저장하는 것이 처음도 아닌데 그랬다.
채언은 이 아릿함을 상처에 새살이 돋을 때 느끼는 간지러움 같은 것으로 여기기로 했다.
전에 상담을 위해 병원에 갔을 때 의사가 그랬다. 우울한 상태가 지속되면 좋지 않은 것처럼 약을 먹고 계속해서 기분 좋은 상태만 이어지면 그것도 좋은 게 아니라고. 그래서 그 중간 지점을 찾기 위해 약을 조절하던 시기에 아침에 울며 잠에서 깨기도 했다.
그때는 왜 나는 기분이 좋아도 안 되는 거냐고 서러워 영웅의 품에 안긴 채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는데, 지금 이렇게 기쁨과 동시에 아릿한 마음을 느껴보니 의사의 처방이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은 복합적인 것이었다.
약을 먹고 기분이 나아지면 언제나 약 덕분이라고 여겼는데 이제는 일직선의 마음 위를 걸으면서 직접 구불구불 길을 만들어 내는 것 같았다. 넘어져 파인 길을 돌아보면 아프지만 앞으로 갈 길이 바쁘니 즐겁게 무릎을 털어내고 다시 걷는 느낌이었다.
강의실을 나와 버스 정류장 앞까지 걸어가던 도중 채언이 영진에게 물었다.
“형, 상추 좋아해?”
“상추? 웬 상추?”
채언은 어깨에 멘 가방끈을 매만지며 민망함을 감췄다. 자신이 너무 뜬금없이 이야기를 꺼낸 것 같기는 했다.
“상추가 좋아하는 음식 목록에 들어가는 건 아닌데 잘 먹긴 하지.”
“나 농장에 상추 따러 갈 건데 좀 가져다줄까?”
쭈뼛거리는 채언의 말투에 영진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너 또 거기 가냐?”
“응, 이따가. 늦기 전에 얼른 상추 따야 해서.”
“사실대로 말해봐. 너 농장에서 채소 키워서 어디 납품하지?”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취미야.”
채언은 목덜미를 매만지다 손에 걸리는 손수건의 느낌에 영진을 흘끔거렸다. 목에 남은 자국은 이제 거의 옅어졌지만 혹시 몰라 요즘 계속 손수건을 목에 두르고 있었다.
“너는 몸도 으슬으슬하다면서 너무 열심히 돌아다니는 거 아니야?”
영진에게는 몸이 좋지 않다는 변명을 해둔 터라 당장 풀기에는 뭐하기도 했다.
“많이 나아졌어. 목 간지러운 것도 사라져서 감기까지는 안 걸릴 것 같아. 가만히 있는 것보다 움직이는 게 몸에 더 좋을 것 같기도 하고.”
“그래그래, 알겠어. 누가 가지 말라고 말렸냐? 성실한 자식.”
영진은 채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럼, 내일 가져다줄까? 상추.”
“내일? 흠, 내일부터는 수어 수업도 없고, 우리 집은 여기서 좀 멀거든.”
“난 시간 많아서 괜찮아. 아, 그런데 상추 별로 안 좋아하는 거면….”
채언의 눈꼬리가 시무룩하게 아래로 내려갔다. 그걸 보지 못하고 무언가 고민하던 영진은 턱을 긁다 말했다.
“혹시 너 거기 누구랑 같이 다녀?”
“농장에?”
“응.”
“아니, 나 혼자. 많이 큰 곳은 아니라서.”
“그럼 너 오늘 가지 말고 내일 나랑 같이 가면 안 돼?”
“형이랑 같이?”
“수어 수업 끝나서 나도 내일 이 시간에 할 거 없거든. 가게나 일찍 나가서 도우려고 했는데, 너도 내일부터 할 거 없으면 조금 일찍 농장 가서 나랑 상추 따자. 얻어먹는 건데 혼자 고생시키는 건 좀 미안하잖아.”
“그렇게 힘든 거 아니라서 미안할 일은 아닌데.”
돌려 거절하는 듯한 채언의 말에 영진이 머리를 긁었다.
“거기 주인 아니면 못 들어가는 곳이야? 같이 가는 건 좀 그런가?”
“아니, 아냐! 같이 가도 되는데. 거리도 좀 있고….”
손톱을 매만지던 채언은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그럼 내일 같이 가자. 담아올 봉지 같은 건 우리 집에 많으니까 내가 가져갈게. 장갑도 집에 많아.”
“뭐야, 나 몸만 가면 돼?”
“응, 그런데 옷에 흙 묻을지 모르니까 편한 거 입고 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 영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어.”
멀리서 버스가 한 대 달려오고 있었다. 목을 빼 버스 번호를 확인한 영진이 채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럼 자세한 건 이따 정하자. 필요한 물건 있으면 그것도.”
“응.”
“간다, 전화해. 잘 가!”
버스에 올라탄 영진에게 손을 흔들어준 채언은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자꾸만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역시 이런 이야기로 영웅을 귀찮게 하는 것은 다 큰 성인답지 못하니 평소처럼 수업이 끝났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 참아야 했다.
상추 옆에 자라난 잡초를 뽑은 채언은 어디 더 정리할 곳이 없나 둘러본 뒤 만족스러운 얼굴로 일어섰다. 어깨를 돌리고 양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찌뿌둥함을 털어내자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내일 영진과 상추를 뽑기로 했으니 오늘은 집에서 쉬었어도 됐지만 아무래도 가만히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잡초라도 정리할 생각으로 느긋하게 농장에 온 것이었다.
잡초 뽑기를 끝냈으니 남은 일은 하나뿐이었다. 채언은 밭에 꽂혀 있는 이름표 팻말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굽혀 앉았다. 후드 주머니에서 네임펜을 꺼내 곧바로 사자 얼굴에 귀를 그려 넣으려다가 손을 멈칫했다.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핸드폰을 꺼낸 채언은 영웅과 나눈 메시지 목록을 열어 사자 얼굴 이모지를 확인했다.
화면에 눈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이모지를 살펴보니 전에는 너무 작아서 보지 못한 디테일이 눈에 들어왔다. 사자는 눈동자 주변과 귀가 노랬고, 입 주변에는 수염을 표현한 듯한 점 같은 것도 찍혀 있었다.
채언은 자신이 이름표에 그린 밋밋한 사자와 핸드폰 속 사자를 번갈아 보다가 다부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뽁. 펜 뚜껑을 연 채언은 집중한 채 사자 얼굴 위에 귀를 덧그리기 시작했다. 양쪽 귀를 그리자 확실히 동물 같아진 그림이 꽤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걸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노란 펜은 없지만 검은 눈동자 주위에 흰자처럼 동그라미를 그리고 입 주변에 수염을 추가하기로 했다.
채언은 성공적이었던 귀처럼 그림이 잘 그려지기를 바라며 다시 한번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후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채언은 가뿐한 숨을 내쉬었다.
펜 뚜껑을 닫고 몸을 물려 그림을 확인하자 만족스러운 미소가 얼굴에 퍼져나갔다. 디테일을 살리니 그림도 꽉 차 보이고 이름표와의 조화도 더 좋아진 것 같았다.
그림을 그리는 데 얼마나 집중했는지 이마 옆에 땀이 흐르는 느낌이라 채언은 괜히 손으로 이마도 한번 쓰윽 훔쳐냈다.
상추를 모두 따고 나면 빈 땅을 갈아 다른 작물을 심을 예정이었다. 그때 영웅과 함께 와서 새로 그린 그림을 보여주면 그때는 그도 분명 사자를 알아볼 것이었다.
“아윤아, 뛰지 마! 이리 와!”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릴 찰나, 찰팍! 등 뒤에 무언가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익숙한 느낌에 채언은 미소 지으며 등 뒤를 보았다. 머리카락을 땋아 양쪽에 만두처럼 올려놓은 아이가 등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는 조금 낯을 가리던 아이는 몇 번 농장에서 마주치자 먼저 말도 걸어오고 이렇게 안겨 오기도 했다.
“아윤아, 안녕.”
채언이 알은척을 하자 아이가 고개를 들더니 배시시 웃었다. 업어달라는 듯 목에 팔을 뻗어 와서 채언은 몸을 조금 더 낮춰주었다. 아이를 업고 일어서자 뒤늦게 달려온 고구마밭 부부가 미안한 표정으로 팔을 뻗었다.
“정아윤, 얼른 내려와. 이리 와.”
“엄마가 부르시는데?”
채언이 몸을 돌려 아이의 얼굴을 부모 쪽으로 보여주자 작은 머리가 반대로 홱 돌아갔다.
“너 고구마 안 캘 거야?”
그 말에 채언의 옷을 꼭 잡은 작은 손가락이 꼬물거렸다.
“오늘 고구마 캐시려고요?”
“네. 늦게 캔다고 알이 더 커지는 건 아니라더라고요. 오늘은 상추 뜯어가려고 오셨어요?”
“상추는 내일 친구랑 와서 뜯고, 오늘은 잠깐 잡초 정리만 하려고 왔어요. 이제 집에 가려고요. 혹시 상추 좋아하시면 좀 나눠 드릴까요?”
“그럼 감사하죠. 우리도 고구마 캐서 여기다 좀 둘 테니까 내일 와서 가져가실래요?”
채언이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등 뒤에서 불쑥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삼촌도 나랑 고구마 캐고 가!”
“너 삼촌 귀찮게 하지 말고 얼른 이리 와. 오늘 네가 고구마 캐고 싶다고 해서 온 거잖아.”
아이는 고개를 저은 뒤 채언의 목을 더 꼭 껴안았다.
귓가에 작은 목소리가 속닥이는 것이 들려 채언은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응? 뭐라고?”
“삼촌도 고구마 캐고 가. 내가 어떻게 하는 건지 알려줄게. 지난번에 소풍 가서 내가 고구마 제일 많이 가져왔어.”
아이는 아마 유치원에서 고구마 캐기 체험을 해본 듯했다. 채언은 웃음을 꾹 참은 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 삼촌은 고구마 캐본 적 없는데. 대단하다.”
“왕고구마도 엄청 많았어. 내가 알려 줄 테니까 같이 고구마 캐고 가야 돼.”
“알겠어. 삼촌한테 고구마 캐는 방법 알려 줘.”
신나서 다리를 달랑거리던 아이가 채언의 등을 툭툭 쳤다.
“나 이제 내려줘.”
채언이 다리를 굽히자 등에서 내려온 아이가 부모에게 달려가 방금 나눈 대화를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남의 밭 고구마를 마음대로 캘 수는 없으니 채언은 아이가 알려주는 것만 옆에서 잠시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래? 알겠어.”
아이의 말을 듣고 눈빛을 교환한 부부는 각자 찢어져 할 일을 하기로 했다.
“아윤아. 그럼 엄마랑 화장실 한번 다녀오자.”
“응.”
부인과 아이가 건물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본 남자는 채언에게 다가와 은밀하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저기, 바쁘지 않으면 우리 애 데리고 잠깐만 상추 구경 좀 시켜줄 수 있을까요? 우리 애기 모르게 고구마 캐기 쉽게 주변 땅을 좀 미리 파놔야 할 것 같아서요. 우리 애기가 얼마 전에 유치원에서 놀러 가서 고구마를 캐 왔는데 그 뒤로 아주 자신감이 넘친단 말이에요.”
남자는 다시 슬쩍 건물 쪽을 살핀 뒤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데 그건 그쪽에서 미리 다 손을 써서 애들이 고구마 캐기 쉽게 해놓은 거거든요.”
그런 비밀이 있는 줄 몰랐던 채언은 동그랗게 입을 벌리고 소풍 관계자들의 재치에 감탄했다.
“네, 그럼 제가 아윤이랑 같이 상추 따고 있을게요. 상추는 따기 쉬워서 제가 미리 뭘 해놓지 않아도 되거든요.”
“진짜 고마워요. 진짜 진짜! 그런데 많이 바쁘진 않으시죠? 스케줄이 있다거나. 집에 가시려던 것 같은데.”
“네, 괜찮아요.”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채언에게 고마움을 표한 남자는 서둘러 고구마밭으로 들어가 호미질을 하기 시작했다. 땅을 캐다 고구마가 나오면 이미 파헤쳐 부드러운 흙 안에 얕게 고구마를 심어놓기를 반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딸과 부인이 건물 밖으로 나오자 채언은 남자를 가리듯 밭 앞에 서서 아이를 불렀다.
“아윤아, 고구마 캐는 거 알려주기 전에 삼촌 밭에서 상추 따는 것 좀 도와주면 안 될까?”
“그래! 엄마, 먼저 고구마 캐고 있어. 엄마랑 아빠는 내가 이따가 도와줄게!”
고구마밭에 앉아 있는 남편과 눈을 마주친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이의 앞에 앉아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아윤, 삼촌 괴롭히면 안 돼?”
“내가 왜 괴롭혀! 엄마는 얼른 저쪽으로 가!”
“엄마 얼른 저리 가? 서운해, 엄마 삐졌어.”
“왜 또 삐지고 그래. 삐지지 마.”
아이는 토라진 척 고개를 돌린 엄마의 뺨에 뽀뽀를 한 뒤 목을 한 번 끌어안아 주고는 떨어졌다.
“이제 됐지?”
여자는 딸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 웃음을 참다가 양손으로 아이의 뺨을 쓸어주었다.
“내 딸이지만 진짜 웃기다, 너. 그럼 엄마 저기 있을 테니까 삼촌 도와주고 와.”
“응, 걱정하지 말고 가 있어.”
모녀의 모습을 보고 있던 채언은 작은 손이 자신의 손을 잡아 오는 느낌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작고 말랑한 손가락이 자신의 손가락 끄트머리를 잡고 있었다.
“잠시만 부탁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네, 얼른 가보세요. 고구마밭은 제가 못 보게 할게요.”
위에서 어른들이 조용히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표정이 삐뚜름해진 아이가 채언의 손을 잡아당겼다.
“나 뭐 도와주면 돼? 나 뭐 도와줘?”
채언이 몸을 굽혀 앉자 아이도 옆에 쭈그려 앉아 채언을 바라보았다.
“자아, 우리 이제부터 상추 딸 건데 여기 봐봐.”
부부가 고구마를 캐고 재빨리 다시 심는 동안 채언은 아이와 상추를 땄다. 상추를 따는 동안 채언은 아이의 유치원 친구들 이야기와 작년 여섯 살 때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이가 간혹 노인들이 쓸 법한 말을 하는 바람에 몇 번이나 웃음을 참아야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정말 너무 감사해요. 힘드시죠.”
“아뇨, 저도 재미있었어요.”
상추를 따며 시간을 끈 뒤 아이와 함께 고구마밭으로 넘어간 채언은 그 집 가족이 된 것처럼 함께 고구마를 캤다. 고구마 캐기보다는 거의 아이와 놀아주는 데 힘을 쏟은지라 작은 공간에서 별걸 하지 않았는데도 엄청난 운동을 한 것처럼 기력이 달렸다.
지친 어른들이 서로의 밭에서 난 작물을 나눠 든 채 인사를 나누는 동안에도 아빠 손을 잡은 아이만 기력이 쌩쌩했다.
“고구마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저희도 상추 감사해요.”
“아윤아, 다음에 보자. 먼저 가서 미안.”
시간이 늦기 전에 먼저 농장을 떠나야 하는 채언이 아이의 앞에 쭈그려 앉아 다시 인사를 건넸다.
“내일 또 놀아.”
입술을 삐죽이며 아쉬운 표정을 지은 아이는 작은 손을 흔들었다. 마주 손을 흔들어준 채언은 몸을 일으키며 인사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네, 들어가세요.”
고구마가 든 봉지를 품에 안고 돌아서던 채언은 무언가를 보고 잠시 멈춰 섰다.
“저 잠깐만 아윤이한테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다시 돌아온 채언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아이가 눈을 빛내며 팔짝 뛰었다.
채언이 뭐 좀 물어보겠다며 아윤을 데리고 간 곳은 ‘채언이네’ 이름표 팻말 앞이었다.
“아윤아, 이거 삼촌이 그린 그림인데. 이게 뭔지 알겠어?”
채언이 사자 그림을 가리켰다. 작은 얼굴을 팻말 앞으로 가져간 아이는 큰 눈을 깜빡이며 그림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이거 뭔지 알아. 놀이공원 갔을 때 봤어.”
“그래? 이게 뭐 같은데?”
채언이 기대하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판다!”
“어? 판다?”
“판다는 눈이 까매. 판다 본 적 있어? 나 저번에 가서 봤는데 털이 꼬질꼬질하고 눈이 진짜 까맣다?”
아이의 말을 듣던 채언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자신이 그린 것을 사자로 인정받기는 그른 것 같았다. 하지만 해님과 별에서 동물로 진화하긴 했으니 다행이었다.
“그런데 이건 불꽃 판다야.”
“불꽃 판다?”
작은 손가락이 사자 얼굴에 있는 갈기를 가리켰다.
“여기 판다 얼굴에 불꽃이 있잖아. 이런 애 멜로디 체인지에도 나와.”
어느새 얼굴에서 허탈함을 지운 채언은 좋아하는 만화영화 이야기를 늘어놓는 아이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나서야 농장을 빠져나왔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영웅은 슬리퍼를 갈아 신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복도 끝에 보이는 거실에는 평소처럼 불이 환히 켜져 있었지만 들려오는 소리가 없었다. 혹시 채언이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을까 봐 조용히 걸어온 영웅은 복도 끝에 다다라 벽 옆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채언 씨, 나 왔…어요.”
영웅의 목소리가 급히 줄어들었다. 목욕 후에 입는 가운을 걸친 채언은 거실 소파에 옆으로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발소리를 죽여 소파 가까이 다가간 영웅은 옆에 개어놓은 담요를 펼쳐 채언의 몸 위에 덮어준 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애정 담긴 눈동자가 곤히 잠든 연인의 표정을 살폈다.
무슨 꿈을 꾸는 건지 채언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뒤이어 아주 작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다. 동그래진 영웅의 눈이 이내 부드럽게 휘었다. 아까 농장에 가서 옆집과 함께 고구마를 캤다더니 그게 꽤나 고되었던 모양이다.
침대에 누워 자면 될 텐데 왜 소파에 누워 잠들었을까. 드라마를 보려다 피곤해 잠든 걸까?
평온하게 풀어진 채언의 모습에 그가 처음 이 거실에 누워 잠들어 있던 날이 떠올랐다.
함께 살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조용한 남자는 자신과 마주치면 피하기 바빴다. 퇴근 시간이 되면 방 안에 콕 박혀 나오지도 않았다. 그런 사람이 무방비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게 참 신기해 보였는데.
그때는 단순히 채언이 자신을 조금만 더 편하게 생각해주었으면, 친구가 되었으면 했다. 그랬었는데, 이렇게 마음이 깊어질 줄 누가 알았을까.
채언의 모든 행동이 사랑스러웠다. 담담한 중음의 목소리가 좋았다. 그림자마저도 소중한 사람이었다.
영웅은 결국 참지 못하고 채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지만 그가 입술을 뗀 순간 감겨 있던 채언의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깊은숨을 내쉬는 소리와 함께 얌전히 내리깔려 있던 검은 속눈썹이 점차 위로 올라갔다.
가늘게 뜨인 눈꺼풀에는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는 쌍꺼풀이 선이 보였다. 채언이 졸린 눈을 끔뻑거릴 때나 막 잠에서 깨어날 때만 선명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졸음이 뚝뚝 떨어지는 눈은 평소보다 더 순해 보였다.
영웅은 채언의 뺨과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씻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건지 아직 머리카락이 촉촉했다.
“으음.”
잠이 다 깨기도 전에 그의 손에 뺨을 기댄 채언은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까만 눈동자가 점차 멍한 빛을 버리고 선명해졌다.
“잘 잤어요. 스노우 화이트?”
영웅의 목소리를 듣고 채언이 배시시 웃음 지었다.
“언제 오셨어요?”
오늘 수어 수업이 끝났다고 했는데, 슬프고 우울한 기색이 엿보이지 않는 평온한 얼굴에 영웅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방금요. 왜 거실에서 자고 있었어요? 그것도 가운만 입은 채로.”
채언은 뺨을 쓸어주는 영웅의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작게 하품한 뒤 몸을 일으켰다. 어깨에 덮여 있던 담요가 스르륵 흘러내리자 영웅이 다시 담요를 제대로 둘러주었다.
“아까 고구마 캐고 와서 피곤했나 봐요. 씻고 잠깐 앉아 있는다는 게 잠들었어요.”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나와 보니 영진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내일 갑자기 일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같이 상추를 따러 가는 것을 월요일로 미룬 뒤 소파에 누운 채로 잡담을 조금 더 나누었는데, 개운하게 씻은 상태로 누워 있다 보니 꾸벅꾸벅 졸음이 몰려와 그 상태로 잠든 것이었다.
“맞다. 아까 고구마 캤다고 그랬죠. 그런데 혹시 그 고구마 머리카락에 숨겨뒀어요?”
“네?”
채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끔뻑이자 영웅이 웃으며 까만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겨주었다.
“머리카락이 완전히, 붕붕.”
그의 말뜻을 알아차린 채언이 머쓱한 표정으로 옆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보지 않아도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뻗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머리를 덜 말린 채로 누워서 그래요. 머리카락에 고구마를 어떻게 숨겨요.”
“예전에 채언 씨가 이런 걸 보고 뭐라고 했었는데. 음…, 집, 집, 맞다! 까치집!”
전에 스치듯 말했던 것 같은데 기억하고 있는 영웅이 신기했다. 채언은 몸을 숙여 소파 아래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맞아요.”
“정답이라고 상 주는 거예요?”
“네.”
바디워시 향기를 풍기는 목에 코를 박은 영웅은 웃으며 채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고구마 받아 온 거 보실래요? 저쪽에 놔뒀는데.”
영웅이 고개를 끄덕이자 채언은 소파에서 내려와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겨울에는 양파나 시금치를 키워볼까 해요. 아니다. 마늘인가? 아무튼 겨울 동안에는 그런 게 잘 자란대요.”
“그것도 씨앗이 필요해요? 이번 주말에 같이 사러 갈까요?”
“아니에요. 조금 더 있다가요. 아직 밭 정리도 해야 하고, 겨울에 키울 것들 공부도 좀 더 해야 하거든요.”
“다른 거 키울 때는 나도 구경해도 돼요?”
부엌 발코니 문을 열던 채언은 영웅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같이 심어도 되고, 아니면 자라는 거 핸드폰으로 봐도 돼요.”
“이제 나 그 카메라 봐도 되는 거예요?”
“네! 앞으로는 저 농장에 가 있을 때 가끔 카메라 보고 손 흔들게요. 라이언이 보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채언이 해사하게 웃으며 발코니 안으로 들어갔다.
모듈 선반 위에 올려둔 봉지 매듭을 푼 채언은 영웅에게 자신이 캐 온 고구마를 보여주었다.
“엄청 많죠. 둘이 먹기엔 충분해요.”
“우와.”
“라이언은 어떻게 먹는 게 좋아요? 물에 삶아서? 쪄서? 구워서? 아니면 튀겨볼까요?”
“음….”
허리에 손을 짚은 영웅은 해가 진 창밖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구워 먹는 거 어때요? 글램핑 가서.”
“글램핑이요?”
흙 묻은 고구마를 손에 쥐고 굴리던 채언이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지난번에 못 갔잖아요. 곧 단풍이 드니까 산이나 숲이 있는 곳으로. 어때요?”
응? 다시 묻는 영웅의 얼굴을 보며 채언은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좋아요.”
전에는 바다나 호수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했던 그였다. 계절이 바뀌어 그는 가을 단풍이 보고 싶어진 것일지 모르지만, 아마 이번에 갈 글램핑장 근처에는 깊은 물이 없을 것 같았다. 아직 장소를 정하지 않았지만, 미리 짐작할 수 있었다.
“단풍이 들기 전까지 시간이 좀 있으니까 이번에는 여유롭게 계획을 짜보자고요.”
방방 뜬 검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겨준 영웅은 채언이 고개를 끄덕이자 양쪽 뺨을 잡고 말랑한 입술에 입을 맞췄다.
채언은 뺨에 닿는 영웅의 손가락에 곧 반지가 끼워질 모습을 상상했다.
예쁘게 단풍이 진 나무 아래서 고백해야지. 반지를 나눠 낀 다음에는 그가 먹고 싶어 했던 구운 마시멜로를 함께 먹어야지.
“네. 이번에는 제대로 계획을 세우는 게 좋겠어요.”
수줍음이 감도는 채언의 얼굴에 보조개가 폭 패었다.
주말이 지나고, 영진이 말해준 주소로 찾아간 채언은 긴가민가하는 얼굴로 간판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를 보고 나서야 채언은 이곳에 와본 적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전에 영웅이 맛있는 브런치를 먹으러 가자며 데리고 와준 곳이었다.
“어서 오세요.”
웃는 얼굴로 손님을 반기려던 영진이 채언을 보고 오, 입술을 동그랗게 말았다.
“왔어? 잠깐만.”
영진은 오픈되어 있는 주방 안으로 들어가더니 요리를 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뭐라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내 세 사람의 시선이 가게 문 쪽으로 쏠렸다.
“안녕하세요.”
채언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인사하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주방에서는 이쪽이 잘 보이지 않는지 그들은 반가운 듯 아닌 듯 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곧 그들이 웃으며 묵례를 해오자, 채언은 그제야 긴장이 풀어진 얼굴로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영진의 안내를 받아 앉은 창가 자리는 폴딩 도어가 열려 있어 시원하게 바람이 불어왔다. 지난번에는 안쪽 자리에 앉았었는데. 영웅과 앉아 점심을 먹었던 기억을 떠올리자 채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오는 데 어렵진 않았어?”
“응, 형이 준 주소, 지도에 찍고 그대로 왔거든.”
“잘했어. 여기서 먹고 싶은 거 골라봐.”
영진이 메뉴판을 펼쳐 건넸다. 채언은 작은 사진과 함께 설명이 쓰인 메뉴를 살펴보았다. 몇 년 전이었다면 그림과 사진을 보고도 무슨 맛일지 상상하지 못했을 메뉴들이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 식당에 가서 어떤 메뉴를 보든 어렵지 않았다.
영웅 덕분이었다. 가보지 못한 곳들에 데려가 주고, 볼 수 없던 것들을 보게 해주고, 먹어본 적 없는 것들을 맛보게 해주는 사람.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것도 어쩌면 그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영웅을 생각하던 채언은 고민하는 척 볼을 쓸어내린 뒤 손가락으로 사진을 하나 가리켰다.
“그거 잘나가는 메뉴인데 선택 좋다? 마지막 주문은 포장이라 지금 계신 손님들만 가시면 브레이크 타임이야. 조금만 기다려줘. 음료수부터 가져다줄게. 뭐 마실래? 아이스커피?”
“아니, 괜찮아. 나 커피 잘 못 마셔서.”
“그럼 주스 가져다줄까? 그건 괜찮지?”
“응.”
영진이 주스를 가지러 가기 위해 테이블을 떠나자 채언은 가게 내부를 둘러보았다. 딱 한 번 와봤던 곳이지만 인테리어가 예뻐 기억에 남았던 곳이었다.
테이블과 의자는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밤색에 벽은 화이트 톤이었다. 노란빛이 섞인 조명 덕에 가게 안은 너무 밝거나 어두운 느낌이 들지도 않았다. 테이블마다 영어가 적혀 있는 양념 통이 놓여 있었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익숙하지 않은 외국 가수의 것이었다. 모르는 노래였지만 듣기 좋았다.
채언은 이곳이 꼭 미국 영화에 나오는 장소 같다고 생각했다. 주인공들이 혼자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가 나중에 연인이 될 사람을 만나게 되는 그런 곳.
영웅이 우연히 이 근처를 지나가다가 자신을 발견해 들어온다면 어떨까? 상상하던 채언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왜 혼자 웃고 있어?”
감자튀김과 음료가 담긴 트레이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영진은 채언의 맞은편 의자를 빼 앉았다.
“형, 일부러 모른 척한 건 아닌데, 나 여기 와본 적 있다?”
“와봤다고? 언제?”
“좀 됐어. 그때는 다른 사람 차 타고 온 거라, 어제 형이 보내준 지도 보고서는 몰랐거든? 근데 안에 들어와서 보니까 기억나더라고.”
“뭐야, 진짜? 그럼 그때 네가 나 봤을까? 웃기다.”
“그러게. 근데 누가 일하고 있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
채언에게 주스 컵을 내민 영진은 자신 몫의 커피를 가지고 가 빨대를 쪼옥 빨아 마셨다. 개운한 표정을 지은 그는 감자튀김 그릇을 채언에게 밀어주었다.
“배고프지? 먼저 먹고 있어.”
“응.”
감자튀김을 집어 먹은 채언은 달콤한 사과 주스도 한 모금 빨아 마셨다.
영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무심코 가게 바깥을 쳐다본 채언은 계단 아래 앉아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했다. 털이 깨끗하고 통통하게 살찐 녀석이었다.
“뭐 봐?”
“형, 저기에, 고양이.”
“어? 오늘은 일찍 왔네? 노랑아, 이리 와.”
영진이 손짓하자 단차를 훌쩍 뛰어 올라온 고양이는 영진의 손바닥에 머리를 비비기 시작했다.
“여기서 키우는 고양이야?”
“키우는 건 아닌데, 자주 밥 먹으러 와. 이 아래 밥그릇이랑 물그릇 있는데 못 봤지?”
영진은 고양이 등을 몇 번 쓰다듬어주더니 잠깐만,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양이와 둘만 남겨질 위기에 처한 채언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형, 형! 어디 가?”
“고양이 밥 가지러. 저 위에 있는 캔.”
중앙 테이블 사이 가림막 위에 캔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장식품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장식들 중간에 장식처럼 놓인 고양이 밥이었다.
“고양이 무서워해? 괜찮아. 이리 와, 안 하면 안 오니까 걱정하지 마. 얘 똑똑해서 이 안쪽으로는 절대 안 넘어온다?”
걱정하지 말라며 웃어 보인 영진이 캔을 가지러 떠나자 채언은 옆에 얌전히 앉아 있는 고양이를 흘끔거렸다.
고양이가 갑자기 움직일까 봐 숨을 죽인 채언은 눈도 느릿하게 깜빡여야 했다.
깜빡.
그때 가만히 앉아 있던 고양이도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마치 자신을 따라 하는 듯한 모습에 채언이 입을 벌렸다. 설마….
채언은 다시 한번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그러자 고양이도 다시 눈을 느릿하게 끔뻑였다. 동그랗게 눈을 뜬 채언과 가늘게 눈을 뜬 고양이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노란 털을 가진 고양이는 자세히 보니 밝은 초록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영웅의 것보다 더 밝은 초록색이었다.
채언은 침을 꼴깍 삼킨 뒤 몸을 조금 숙여보았다. 영웅을 닮았다면 사나울 리 없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그리고 믿음대로 고양이는 조금 전보다 자신과 거리가 가까워졌음에도 얌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뭐야? 무서워하는 거 아니었어?”
캔을 가지러 갔다 오는 짧은 사이 고양이와 친해진 듯 보이는 채언의 모습에 영진은 가지고 온 것을 등 뒤로 숨기며 의자에 앉았다.
“아까 내가 한 것처럼 쓰다듬어줘 봐. 좋아해.”
의자 팔걸이에 몸을 기대고 있던 채언은 조심스레 고양이에게 손을 뻗었다.
“노랑아, 이리 와.”
이름을 듣고 강아지처럼 귀를 움직인 고양이는 천천히 채언에게 다가와 손에 머리를 가져다 댔다. 채언은 동그란 이마를 만져주다가 자기도 모르게 목과 등까지 쓸어주었다. 그러자 고양이는 벌러덩 누워 본격적으로 손길을 받기 시작했다.
“귀여워….”
“그치. 완전 애교쟁이야. 다리 살짝 내밀고 있으면 그 사이로 몸 쓸고 지나간다? 자기 예뻐해달라고.”
고양이 털은 밀빛인 영웅의 머리카락 색보다 훨씬 노랬고, 그의 것보다 조금 뻣뻣하고 눅눅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따끈따끈한 체온에 마음이 녹아버리는 기분이었다. 그가 고양이가 된다면 꼭 이렇게 생겼을 것 같았다.
채언이 고양이를 한참 예뻐해 준 다음에야 캔을 깐 영진은 가게 밖으로 내려가더니 밥그릇에 내용물을 부어주었다.
“자아, 밥 먹어라.”
“먉.”
가는 목소리로 짧게 운 고양이는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더니 가게 아래로 훌쩍 뛰어 내려갔다.
“지금 대답한 거야? 너 목소리도 되게 귀엽다.”
밥 먹는 고양이에게서는 햡햡 소리가 났다. 채언과 영진은 의자 팔걸이에 매달려 계속 고양이를 구경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가게를 나서는 손님들이 구경하다가 떠나갔다.
“자기야, 아까 캔 가져가던데 노랑이 왔었어?”
“응, 아까 다 먹고 자고 있어.”
“그럼 우리도 밥 먹자. 와서 음식 좀 가져가.”
배부르게 먹고 바닥에 늘어져 잠든 고양이를 보던 채언은 뒤에서 들리는 대화에 고개를 돌렸다. 의자에서 일어서는 영진이 보였다. 채언이 따라 일어나려 몸을 들썩이자 그가 채언의 어깨를 눌러 앉혀주었다.
“앉아 있어. 너 손님이잖아.”
주방으로 걸어간 영진은 서진이 밀어주는 트레이를 받으며 말했다.
“누나, 채언이 여기 와본 적 있대.”
그 말에 서진은 속으로, 역시! 라고 생각하며 겉으로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래? 언제?”
아까 영진이 오늘 초대한 동생이 왔다며 채언을 가리킨 순간 서진은 전에 가게에 왔던 한 커플을 기억해냈다.
다른 커플처럼 맞은편을 놔두고 옆자리에 나란히 앉거나, 대놓고 스킨십을 하지는 않았지만, 둘은 보자마자 분명히 사귀는 사이라는 느낌이 왔다. 누구든 그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을 봤다면 곧바로 둘이 사귀네 하며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수어 수업 전이니까 좀 됐겠지? 그때는 다른 사람 차 타고 온 거라 내가 보내준 주소 보고는 와본 곳인지 몰랐대.”
“그렇구나.”
하지만 그 두 사람이 서로를 얼마나 달콤한 눈으로 쳐다보았는지는 영진에게 구구절절 설명할 일이 아니었다.
짧은 대화를 마무리 짓고 트레이를 나눠 든 두 사람은 채언이 바르게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아까는 바빠서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네요. 김서진이에요.”
서진의 인사에 채언은 몸을 일으킨 뒤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심채언입니다.”
“어서 앉으세요. 방금 영진이한테 들었는데 여기 오신 적 있다면서요?”
“네, 전에 한 번요.”
“서로 얼굴 본 적 있다고 생각하니까 신기하네요.”
“저도요.”
채언이 수줍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누나, 지현 씨는?”
“김치찌개 먹고 싶다고 카드 들고 나갔어. 그런데 자기야, 창문 좀 닫고 와.”
채언은 테이블 아래로 내린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는 주방에 두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 테이블에 앉아 있는 건 서진뿐이었다.
영진이 시간 선택지를 줬을 때 점심시간에 오겠다고 할 걸, 괜히 브레이크 타임에 오겠다고 했나. 채언은 눈치를 살피다 서진에게 물었다.
“혹시 그분은 저 때문에 불편해서 다른 데서 점심 드시는 건가요?”
서진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가게에서 못 해 먹는 음식 먹고 싶으면 저도 나갔다 오고 그래요. 걱정하지 마세요.”
“네.”
그제야 걱정을 거둔 채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폴딩 도어를 닫고 온 영진이 서진의 옆자리 의자를 빼 앉았다.
“얼른 먹자.”
“저희가 초대해놓고 너무 기다리시게 했죠. 배고프실 텐데 어서 드세요.”
“아니에요. 제가 이때 오겠다고 한 걸요.”
다 같이 포크와 숟가락을 들었다. 테이블 위에 차려진 3인분보다 더 많은 음식은 모두 채언의 입에 잘 맞았다. 중간에서 이야기를 이어주는 영진 덕분에 세 사람의 대화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맞다. 이 크림, 지난번에 주신 쪽파 넣어서 만든 거예요.”
서진이 크림을 찍은 크래커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여기에요?”
채언은 테이블 가운데 놓인 크림치즈와 크래커를 내려다보았다. 하얀 크림치즈에 초록 식물이 포인트로 들어가 보기에도 좋아 보인다 했는데, 그게 자신이 키운 쪽파였다니. 반갑고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지난번에는 파스타 소스로도 만들어 먹었는데. 잘 먹었어요. 고마워요.”
“맛있게 드셨다니까 저도 감사해요.”
쑥스러운 듯 미소 지은 채언은 양파 수프 속 치즈를 휘저었다. 고소한 크래커를 씹으며 채언을 보던 서진은 남은 크래커에 다시 크림을 듬뿍 발랐다.
“그런데 분위기가, 진짜 차분하시네요. 원래 영진이 주변에 꽥꽥거리는 애들밖에 없었거든요.”
“누나아, 내가 오리도 아니고 꽥꽥이 뭐야.”
포크에 파스타를 말고 있던 영진이 서진에게 몸을 치대며 말했다.
“너 말고.”
영진의 애교가 익숙하다는 듯 서진은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서로에게 편안하고 익숙해 보이는 모습에 채언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서진은 계속 요리를 해야 해서 그런지 손에 반지를 끼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옷깃 사이로 언뜻언뜻 금색 체인이 보였다. 아마 커플링은 목걸이에 걸려 있을지 몰랐다.
채언은 타인 앞에서 저렇게 연인 티를 낼 수 있는 두 사람에게 부러움을 느끼면서, 어서 빨리 영웅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요즘 틈만 나면 영웅의 크고 멋있는 손에 어울릴 반지를 찾아보고 있었다. 후보도 몇 개 뽑아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커플링을 알아보는 건 처음인 데다 농장 이름표에 그린 그림이 자꾸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취급되다 보니 자신의 안목에 믿음이 가질 않아 고민이었다.
“저어, 지난번에 제가 영진이 형 통해서 질문드렸던 거요. 조언해 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조언을 했어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기억을 되짚어 보던 서진은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거 말씀하시는 거구나.”
사실 조언이랄 것도 없었다. 여자 입장에서는 고백 없이 만나는 경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길래 자신은 그런 게 싫다고 대답해줬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고백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기 싫다고 했던 것은 채언의 얼굴을 보기 전이라 한 말이었다.
그동안 영진이 잘생겼다고 말한 사람들은 눈만 부리부리한 더운 인상에 부담스러운,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자 1일 뿐이었다. 멋진 형님이나 아끼는 동생들이란 놈들은 성격이 죄다 쓰레기 같았다. 졸업 후에는 그런 놈들과 연을 싹 끊었지만, 자신을 뺀 대부분의 사람과 교류가 끊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최근 들어 좀 친하게 지내는 동생이 생겼다길래, 또 예전 친구들과 비슷한 부류일까 걱정이 좀 됐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봤더니 유들유들하고, 맨날 밭에 풀 뽑으러 다니고, 꼭 배우처럼 잘생겼다는 것이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더니 영진은 쪽파를 선물로 받아와 증거로 내밀었다. 사실 쪽파를 받고도 그 친구가 성격만 유들유들한 부리부리남일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로 이렇게 청순한 사람이라니 놀라웠다.
그때 그 질문을 한 게 채언인 줄 알았다면 다른 대답을 해줬을 것이다.
테이블 위에 팔을 올린 서진은 냅킨으로 입가를 닦는 척 올라간 입꼬리를 숨겼다. 자신보다 열 살은 어려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연애 고민을 한다는데 흥미가 생기지 않을 리 없었다. 그것도 고백을 하고 말고의 아주 귀여운 고민을.
서진은 양손을 깍지 끼며 표정 관리를 했다.
“그래서 어떻게, 진전은 잘 됐어요?”
그러자 영진이 허벅지를 톡톡 두드려왔다. 잘 되지 않았다는 신호인 듯해 서진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백했는데 저 얼굴로 거절을 당한 걸까? 이런 사람이 가게에서 서빙을 한다면 매출도 올라갈 것 같은데. 설마 성격에 문제가 있나?
그런데 잠깐. 영진이 고백 어쩌고 하면서 말을 전해 온 것은 수어 수업 이후의 일이었다. 채언이 머리카락 색이 밝은 미남과 함께 가게에 왔던 것은 수어 수업 훨씬 전의 일이고.
그때 분명 두 사람은 사귀는 사이로 보였는데. 단순한 친구 사이였던 걸까? 하지만 어떤 친구가 프렌치토스트를 먹다 졸려 하는 사람을 그렇게 꿀 떨어지는 눈으로 쳐다보며 귀여워한단 말인가.
서진은 혼란스러웠다. 서로를 그런 눈으로 바라봐주는 게 친구라면 사전에 쓰이는 친구라는 단어의 의미를 재정립해야 했다.
“반지 고르는 중이에요.”
채언의 말에 서진의 복잡하던 머릿속이 싹 정리됐다.
“와아, 잘 풀렸나 보다.”
이제 보니 그때는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였고, 최근에 사귀게 된 듯했다. 사귀자마자 반지를 맞추려는 걸 보니 진짜 서로 좋아하나 보다고 생각하며 서진은 미소 지었다. 있지도 않은 늦둥이 동생이 다 자라 연애하는 것을 보는 느낌이었다.
“고백할 때 주려고요.”
서진이 또다시 혼란스러워졌다. 막 사귀어 커플링을 맞추는 것도 아니고 고백용 반지?
“사귀자고 말하면서 반지를 줄 거라고요?”
“네. 지난번에 영진이 형이 그런 것도 괜찮을 거라고 말해줬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하려고요. 제가 연애를 많이 안 해봐서 이런 부분은 잘 모르거든요.”
그 말에 서진은 싸늘한 표정으로 자신의 연하 남자친구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급격히 표정이 어두워진 영진이 ‘나 왜? 뭐 잘못했어?’ 입 모양으로 말하며 눈을 끔뻑거렸다.
눈을 내리깐 채 붉어진 볼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던 채언은 손을 내려 핸드폰을 쥐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순식간에 손님을 보듯 친절한 미소를 얼굴에 띤 서진이 채언을 돌아보았다.
“제가 고른 반지 괜찮은지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예뻐 보이는 걸로 고르긴 했는데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해서요.”
“그건 어렵지 않은데요….”
서진은 머릿속의 혼란을 지워버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 있어요?”
“네!”
채언은 브랜드별 반지 사진만 모아둔 앨범을 열어 화면에 띄웠다. 하얀 손가락이 사진을 넘기기 시작하자 머리를 맞댄 채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던 두 사람의 입술이 점차 벌어졌다.
채언은 조용해진 두 사람의 모습에 긴장하며 다시 역순으로 사진을 넘겼다.
“어떤…가요?”
영진은 입가에 손을 댄 채 말을 잃은 상태였다. 자신이 순진한 애한테 너무 큰 바람을 불어 넣은 것 같았다.
옆에서 그와 똑같이 입술을 다물고 있던 서진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채언은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춘 채 말간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흐음, 있잖아요. 채언 씨.”
“네.”
서진은 기도하듯 양 손끝을 겹친 뒤 윗입술에 가져다 댔다.
“고백용 반지라고 했죠? 고백한 후에 나눠 낄 반지.”
“네.”
“그럼 심플한 게 좋을 것 같거든요. 사람 취향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요.”
“네에.”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린 채언은 자신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그런데 지금 보여준 건 전부….”
“네, 전부?”
“결혼반지 같은데요.”
채언의 입술이 활짝 벌어졌다.
“앤드류, 저기 가본 적 있어요? 알렉스가 맛있다던데.”
같은 팀 데이빗과 걷고 있던 영웅은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길 건너편 브런치 가게 간판을 본 영웅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채언과 함께 들렀던 곳이었다.
“프렌치토스트가 맛있는 곳이에요.”
“우와, 가봤어요? 벌써 두 사람이나 맛있다고 하니까 믿음이 가네요. 저도 나중에 여자친구랑 한번 가봐야겠어요.”
시선을 돌리려던 영웅은 창문 안쪽, 하늘색 맨투맨을 입은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눈썹을 올렸다. 스치듯 본 것이었지만 분명 입고 있는 옷과 동그란 뒤통수가 채언과 똑 닮아 있었다.
눈을 깜빡이던 영웅은 곧바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채언은 어딘가 가야 할 일이 생기거나 누굴 만나야 하는 약속이 잡히면, 자신이 묻지 않아도 미리 알려주는 사람이었다. 행동반경도 넓지 않아 보통 돌아다니는 곳도 집에서 멀지 않았다. 그런데 이곳은 집이 아니라 회사 근처였다.
핸드폰 화면을 켜보았지만 아까 집에 있다는 채언과 대화를 주고받은 이후 새로 온 연락은 없었다. 영웅은 자신이 사람을 잘못 본 건가 싶어 다시 길 건너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폴딩 도어가 완벽히 닫히지 않고 조금 열려 있었다. 하필이면 창문이 접히는 곳에 빛이 반사되어 가게 안쪽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때 창문 아래 엎드려 있던 노란 고양이가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켰다. 안쪽에서 유니폼을 입은 젊은 남자가 나와 고양이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온 이는 채언과 닮은 점이 하나도 없었다.
“앤드류. 신호 바뀌었는데요?”
“네. 가죠.”
옆에서 부르는 소리에 영웅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발걸음을 뗐다. 채언과 함께 방문했던 곳을 지나다 보니 그런 걸까. 채언이 보고 싶은 마음에 자신이 착각한 듯했다.
“어서 오세요.”
곧 데이빗과 함께 네일숍에 도착한 영웅은 채언에게 보고 싶다고 메시지를 보낸 뒤 액정을 위로한 채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평소보다 일찍 퇴근해 네일숍에 온 이유는 손 관리를 받기 위해서였다. 지난번 채언의 얼굴에 상처가 난 뒤로 자꾸만 손톱이 신경 쓰였다. 매번 흰 부분이 보이지 않게 짧게 깎고 있었지만, 손톱깎이에 잘린 단면이 날카롭다면 또다시 채언에게 상처를 낼 수 있었다.
그날 상처를 낸 범인이 자신의 손인지 채언의 손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요즘 손을 들여다보며 걱정을 좀 했더니,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는지 데이빗이 회사 주변에 괜찮은 네일숍이 있다며 말을 꺼내왔다. 자신도 다니는 곳이라며 같은 시간에 예약을 대신 잡아주기까지 했다. 평소에는 말을 잘 하지 않던 사람인데 먼저 이렇게 도움을 주다니 참 고마웠다.
옆을 보니 데이빗은 정말 이곳이 익숙한지 직원과 친밀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영웅은 채언이 자신의 손을 더 좋아하게 될 것을 기대하며 얌전히 직원에게 손을 맡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웅의 핸드폰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Chocolate♥: XOXO]
화면을 본 영웅은 시원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대동에서 보낸 주꾸미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채언은, 주꾸미를 손질하다가 옷이 더러워질 것을 염려하여 실내복으로 갈아입었다. 평소 기름 튀는 요리를 할 때가 아니면 잘 걸치지 않는 앞치마까지 걸친 뒤 비장하게 아이스박스를 열었다.
지난번 혜옥에게 들은 대로 밀가루와 소금을 뿌려 손질하려던 채언은 재빨리 냉장고 앞으로 달려가 주꾸미 손질법을 적어놓은 메모지를 확인했다.
“주꾸미에 밀가루와 소금을 뿌린 뒤 손으로 박박…, 다 못 먹으면 손질 한 채로 냉동실에….”
무의식적으로 메모지에 적힌 글을 입으로 소리 내 읽고 있던 채언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요즘 글씨를 쓸 때 말을 하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입을 다물었더니, 이제는 글을 읽을 때 입으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것도 조심해야지. 입술 안쪽 점막을 잘근거린 채언은 다시 싱크대 앞으로 걸어가 아이스박스 안으로 손을 뻗었다. 기억하고 있는 손질법이 맞다는 것을 체크했으니 이제는 실전이었다.
채언은 열심히 주꾸미를 문질렀다. 처음에는 좀 징그러웠는데, 막상 만져보니 오징어와 느낌이 다르지 않아 금방 아무렇지 않아졌다.
한창 손질에 여념이 없는데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싱크대 쪽으로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 채언은 얼른 세제를 짜서 손을 씻고는 현관 복도로 달려갔다.
“오셨어요!”
막 슬리퍼로 갈아 신고 집 안 복도로 들어서던 영웅은 복도 끝에서 나타난 채언을 보곤 헤벌쭉 웃으며 팔을 벌렸다. 그러자 채언이 단번에 그의 품에 안겨 왔다.
“보고 싶었어요.”
“저도요.”
두 사람은 서로를 안은 팔을 놓지 않고 뒤뚱거리며 거실까지 느릿하게 걸었다.
“뭐 하고 있었어요?”
소파에 앉아 채언을 끌어안은 채 한참 물고 빨던 영웅은 뒤늦게 채언의 손에 물기가 묻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주꾸미 손질 중이었어요. 대동에서 보내주신 게 왔거든요.”
“그랬어요? 그런데 손에서 향기가 나는데?”
“세제로 손 닦았거든요. 아, 라이언 옷 다 젖었겠다.”
채언은 자신이 걸치고 있던 앞치마에 손을 문질러 닦았다. 이미 영웅의 옷에 물이 많이 흡수되어 앞치마에 닦아 봤자였지만 그의 옷이 더 젖지 않도록 손등까지 꼼꼼히 닦아 말렸다.
오랜만에 스트라이프 무늬 앞치마를 걸친 채언을 보던 영웅의 머릿속에 문득 아까 본 하늘색 옷을 입은 남자가 떠올랐다. 초록빛 시선이 검은 티셔츠에 감싸인 채언의 팔을 스쳤다. 정말 아니었네.
“옷이 젖는 건 상관없는데, 왜 세제로 손을 닦았어요?”
영웅은 앞치마를 만지작거리는 채언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 쥐었다.
“손에 소금이랑 밀가루가….”
영웅이 입술을 삐죽이자 채언은 옅게 웃었다.
“숟가락도 씻는 건데, 손 한 번 씻었다고 해서 몸에 나쁘진 않을 거예요. 라이언 말대로 향기도 나고요.”
그 말에 영웅이 채언의 손을 코로 가져와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같은 세제로 닦아도 접시에서는 향기가 안 나잖아요? 좀 신기하지 않아요?”
영웅의 입술 끝이 올라가며 채언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왜 웃어요?”
“그냥요. 하루 종일 보고 싶었는데, 보니까 좋아서.”
부드럽게 휜 영웅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채언은 웃으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는 영웅에게 잡혀 있던 손을 반대로 돌려 그의 길쭉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영웅의 초록색 눈동자를 보니 아까 본 고양이가 생각났다. 연달아 가게에서 들은 말까지.
‘결혼반지 같은데요.’
사자 그림은 판다 소리를 들었지만, 자신이 반지는 제대로 고른 모양이었다.
채언은 영웅의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 연한 살과 굵은 마디, 손등뼈부터 반질반질한 손톱까지 전부 천천히 어루만졌다.
영웅은 평소보다 더 진하게 손을 만지작거리는 채언의 모습에 오늘 네일숍에 들렀다 온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럼 지금 당장은 마음만 뿌듯하면 될 것을 자꾸만 아랫도리가 빠듯해져 문제였다.
“손이 되게… 예뻐요.”
멍하니 중얼거린 채언은 영웅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는 상상을 하며 그의 약지를 손가락으로 잡고 주욱 훑어 내렸다. 그대로 채언의 엄지가 조금 더 아래로 내려와 영웅의 손바닥을 긁자 단단한 팔이 채언의 허리를 힘 있게 감싸 안았다.
두 사람의 하반신이 바짝 맞닿았다. 영웅의 손을 바라보고 있던 채언이 고개를 들었다. 짙은 초록색 눈동자와 마주치자 왠지 모르게 숨이 차는 느낌이었다.
채언에게 잡혀 있던 영웅의 손이 하얀 얼굴 근처로 다가왔다. 그의 손을 어루만지던 하얀 손가락이 단단한 손등뼈와 손목, 팔목을 차례로 스치며 아래로 툭 떨어졌다.
영웅의 엄지가 채언의 말랑한 아랫입술을 천천히 문질렀다.
“내 손이 예뻐요?”
나직한 목소리가 은밀하게 들려왔다. 채언이 입술을 달싹이자 그는, 응? 하고 대답을 보채며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입술을 매만지던 손가락이 매끈한 점막을 문지르며 들어가 아랫니에까지 닿았다.
“…네.”
대답하기 위해 움직인 말랑하고 촉촉한 혀가 영웅의 손가락을 핥고 사라졌다. 뒤이어 달뜬 숨이 그의 손가락을 스쳤다.
채언은 고개를 살짝 틀어 자신의 뺨을 쓸어주던 네 손가락 중 하나를 입에 물었다. 손끝을 깨물고 혀로 핥아본 뒤 침을 꼴깍 삼켰다.
용기를 내 영웅의 손목을 잡은 채언은 다시 입술을 벌린 뒤 손가락 두 개를 입에 물었다. 입술 사이로 쑤욱 빨려 들어간 손가락은 말랑한 혀를 누르며 뿌리 끝까지 들어갔다가 두 번째, 첫 번째 마디를 보이기를 반복했다.
영웅의 손가락을 입술에 걸친 채 색색 숨을 쉬던 채언이 조용히 시선을 들었다. 짙은 욕망이 선명하게 떠오른 눈과 마주했다. 채언은 그의 손가락 끝에 입을 맞춘 뒤 천천히 고개를 뒤로 물렸다. 촉촉하게 젖은 손가락과 붉은 혀 사이를 잇던 투명한 실이 끊어지기 무섭게 두 사람의 입술이 맞붙었다.
혀와 혀가 문질러지는 끈적하고 질척한 소리와 소파 가죽에 옷자락이 쓸리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두 사람은 사막에서 표류하다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채언은 소파에 누운 채로 영웅의 목에 팔을 감았다. 깊게 혀를 섞고 입술을 빨아보아도 갈증이 나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영웅 또한 마찬가지인지 허겁지겁 타액을 삼킨 그의 목울대가 꿀꺽 위아래로 움직였다. 달리기를 하고 온 사람처럼 가슴팍이 오르내렸다.
촉, 잠시 입술이 떨어졌다. 몸을 세운 영웅은 커다란 손으로 채언의 바지 버클을 푼 뒤 속옷과 바지를 함께 끌어 내렸다. 허리 뒤에서 끈이 묶인 앞치마 자락이 채언의 하얀 허벅지 사이를 겨우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얇은 천 위로 발기한 성기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왜 누드 에이프런에 대한 로망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스테이크를 굽고 있던 자신의 앞치마를 벗겼던 채언도 이런 심정이었을까. 영웅은 본의 아니게 유혹적인 자태로 누워 숨을 헐떡이는 채언을 보며 자신의 바지 버클을 풀어 내렸다.
“이런. 콘돔이 안에 있는데.”
커다란 손이 하얀 허벅지 위로 미끄러졌다. 다시 채언의 위로 몸을 겹친 영웅은 콧날로 보드라운 목과 턱 사이를 그으며 숨을 마셨다. 지난번에 남긴 자국은 거의 흐려진 상태였다. 다시 한번 진하게 남기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으니 대신 진득하게 입술만 누른 뒤 고개를 들었다.
“침실로 들어갈까요?”
목에서 느껴지는 간지러운 감각에 채언은 입술을 깨문 뒤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이대로….”
그에게 팔을 뻗은 채언은 영웅의 손을 겹쳐 잡은 뒤 자신의 입술로 가지고 왔다.
“괜찮은데.”
붉은 혀가 그의 손가락을 할짝 핥았다.
“흐으.”
무릎을 세운 채언의 하얀 허벅지가 긴장으로 파들거렸다. 이미 안에 입고 있던 옷은 전부 벗겨진 상태였다.
영웅은 목 끈이 풀린 앞치마 덕에 훤히 드러난 채언의 가슴을 잘근거렸다. 이미 젖어서 번들거리는 유두를 깨물다가 녹아가는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듯 입술을 벌려 붉은 유륜 전체를 부드럽게 입술로 애무했다.
“…응!”
채언은 보드라운 머리카락에 턱을 문지르며 신음을 참았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은근한 쾌감에 몸이 풀어질 때마다 구멍 안에서 꿈틀거리는 손가락이 다시 근육에 힘이 들어가게 만들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입에 물고 있던 그 손가락이었다.
타액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는지 오일이나 젤을 사용할 때보다 영웅의 움직임이 느리고 집요했다. 그의 손가락은 천천히 안쪽으로 진입한 뒤에 쫀쫀하게 달라붙는 내벽을 긁듯이 누르며 빠져나오기를 반복했다.
채언은 허리를 잘게 비틀며 숨을 삼켰다. 조금만 더 안쪽에 닿았으면 좋겠는데. 굵은 성기가 들어와 긁고 지나가는 곳까지 조금만 더. 자꾸만 안타까운 쾌감이 등을 타고 올라 애가 탔다. “이제…, 이제 괜찮아요.”
채언이 영웅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아 시선을 맞추자 그가 윗입술을 핥으며 위를 올려다봤다.
“아직 몸이 굳어 있어요.”
“저는 괜찮, 으응….”
갑작스레 엉덩이를 잡아 벌리며 더 안쪽을 파고드는 손가락 탓에 채언은 이를 물며 신음을 참았다.
“아, …흑!”
하지만 좀 전의 느린 움직임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빠른 삽입에 결국 소리를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몸 안쪽을 푹푹 찔러오는 손가락이 미끄러운 점막을 긁고 빠져나올 때마다 영웅의 얼굴을 감싸 쥔 채언의 손가락은 자꾸만 곱아들었다. 그의 얼굴을 긁을까 봐 결국 단단한 어깨 위로 손을 옮겨야 했다.
영웅은 헐떡이는 채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혀를 내밀었다. 부어오른 젖꼭지를 핥은 뒤 입술을 오므려 가슴을 빨자 채언에게서 우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래쪽에서는 오일을 사용한 것처럼 찔꺽이는 소리가 들렸다.
간지러운 몸 안쪽이 긁히는 느낌에 채언의 턱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목 끈이 풀어져 허리 뒤로만 느슨하게 묶인 앞치마가 잔뜩 발기한 성기 끝에 닿아 들어 올려졌다. 선단에 닿은 천이 동그랗게 젖어 들기 시작했다.
“그만, 그만, 하….”
그래도 영웅은 계속해서 손가락을 채언의 몸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보동보동한 엉덩이를 잡아 쥔 손에도 더욱 힘이 들어갔다. 빠르게 추삽질이 이어졌다.
“아으으, 라이, 으응. 그만.”
채언은 한 손으로 앞치마 자락을 쥔 채 바르작거렸다. 그 바람에 팽팽하게 잡아당겨진 천이 선단을 쓸며 자극했다.
“그, 그만!”
구멍이 꽈악 조여오자 영웅은 젖은 손가락을 일부러 구부린 채 채언의 몸 밖으로 빼내었다.
“아…!”
얇은 천을 적신 정액이 성기를 타고 아래로 뚝뚝 흘러내렸다. 영웅은 자신의 품 안으로 무너진 채언의 허리를 어루만지며 말랑한 귓불에 입을 맞췄다.
“지금 앞은 만지지도 않고 뒤로만 간 거 알아요?”
얕은 숨을 헐떡이던 채언이 눈가를 붉혔다.
“내 손이 그렇게 좋아요?”
등을 은근히 쓸어내리는 손길에 방금 사정을 마쳐 예민한 몸이 움찔거렸다.
혼자만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뾰로통해진 얼굴을 영웅의 품에 숨긴 채언은 말없이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속옷 밖으로 끄집어낸 성기를 느리게 훑어 올리는 손길에 영웅이 낮게 신음했다. 이미 잔뜩 발기해 있던 성기는 채언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더 단단해지고 있었다.
“몸 안에 넣는 건….”
몽글몽글 새어 나온 쿠퍼액이 문질러져 채언의 손바닥이 금세 끈적해졌다.
“손가락보다 다른 게, 더… 좋아요.”
숨을 몰아쉰 채언은 한 손으로 영웅의 어깨를 잡고 일어나 무릎을 조금 세웠다. 다른 손으로 말간 액이 새어 나오는 성기를 잡고 선단을 엉덩이 사이에 맞추자 허리께에 있던 영웅의 손이 스르륵 살결을 문지르며 허벅지 뒤쪽으로 내려왔다.
“그래요? 나도 그런데.”
그의 엄지가 하얀 허벅지를 살살 쓸었다. 채언은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몸을 내렸다. 손가락을 넣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살이 벌어지는 느낌이 났다. 침대에 누워 그를 받을 때보다 더 큰 압박감이 배 속을 조여오는 것 같았다.
“흣.”
굵은 성기가 좁은 구멍 안을 비집고 들어가려다 미끄러졌다. 가쁜 숨을 쉰 채언이 아랫입술을 깨물자 영웅의 손이 채언의 허벅지를 꽉 쥐어 잡았다.
다시 한번 구멍에 성기를 대고 천천히 몸을 내려 앉히자 옴쭉거리는 구멍 안으로 굵은 성기가 불쑥 머리를 들이밀며 들어갔다.
“아, 으음.”
몸이 내려갈수록 다리가 점차 더 벌어졌다. 채언의 목구멍이 자꾸만 올각였다. 귀두만 조금 들어온 접합부를 만져보다가 아직 한참 남아 있는 기둥을 즈윽 훑어 내리자 가슴에 얼굴을 기댄 영웅이 뜨거운 숨을 뱉는 것이 느껴졌다.
열기가 넘실거리는 눈으로 채언을 올려다본 그는 말랑한 허벅지 살을 세게 주무르다가 한 손을 조금 더 위로 올렸다.
“흐….”
엉덩잇살을 잡고 벌려오는 손길에 굵은 성기가 몸 안으로 길을 내며 들어왔다. 무릎에 눌린 소파 가죽이 뿌득거렸다. 절반 넘게 그를 품은 뒤에야 채언은 영웅의 목에 팔을 둘렀다.
“으… 응.”
천천히 끝까지 몸을 내려 앉은 채언은 땀이 배어 나온 이마를 영웅의 어깨에 기대 마구 문질렀다. 커다란 손이 낭창한 허리를 감싸 안았다.
입을 벌린 채 가쁜 숨을 쉬던 채언은 영웅의 팔을 쓸어내리며 그의 목에 촉, 촉, 입술을 눌러 가볍게 키스를 남겼다. 간지러운지 그의 손가락이 움찔거리자 채언은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아.”
힘이 들어간 영웅의 턱이 단단해졌다. 그의 잇새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옆으로 돌아간 채언의 앞치마는 완전히 구겨진 채 왼쪽 허벅지를 겨우 가릴 뿐이었다. 얇은 천 옆으로 삐져나온 성기가 몸과 몸 사이에 눌린 채 선액을 뱉어냈다.
영웅은 말간 액체가 자신의 셔츠를 더럽히는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채언의 몸을 더 꽉 끌어안으며 얕게 허리를 쳐올렸다.
“으응.”
혼자 움직일 때보다 더 깊게 성기가 삽입되자 양말을 신은 채언의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꽉 찬 배 속이 아프고 간지러웠다.
영웅의 목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문지르며 허리를 움직이던 채언은 자신을 원하는 욕망에 달뜬 눈을 확인하고 싶었다.
꼭 쥐고 있던 셔츠를 놓은 채언은 땀에 젖은 손으로 영웅의 뺨을 감쌌다. 풀린 눈으로 겨우 고개를 들자 짙은 초록색 눈동자가 보였다. 멍하니 그 안에 담긴 자신을 바라보던 채언은 다급히 입술을 벌려 영웅에게 키스했다.
쭈웁, 춥, 츱. 서로의 입술을 빨고 길게 혀를 내어 서로의 입 안쪽 여린 점막까지 게걸스럽게 탐하는 동안 채언은 계속해서 허리를 움직였다. 질척하고 야한 소리가 위아래에서 들렸다.
“흐응… 읏, 응.”
입술이 가로막힌 채언이 비음을 흘렸다. 귓바퀴를 만져오는 손길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영웅이 거세게 허리를 쳐올렸다.
“하윽!”
채언의 몸이 튀어 올랐다. 오일을 사용하지 않아 평소보다 더 찐득하게 달라붙어 오는 내벽의 느낌에 아랫입술을 핥은 영웅은 채언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집어넣은 뒤 어깨를 눌러 잡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세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으, 라이언, 하윽, 읏.”
소파 가죽과 몸에 걸친 천, 맨살이 비벼지며 나는 소리가 거실을 울렸지만 두 사람의 귀에는 서로의 숨소리와 맞닿은 가슴에서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만이 와 닿았다.
좁은 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오는 굵은 살 기둥이 체액으로 번들거렸다. 채언의 허리에 매인 얇은 매듭이 힘없이 나풀거렸다.
“아윽, 읏, 아! 흐응, 읏.”
옴짝달싹할 수 없게 단단한 팔과 손에 몸이 잡힌 채언은 입도 다물지 못한 채 내장을 짓찧는 성기를 받아들였다. 무게를 전부 실어 앉은 채로 계속 안쪽 깊은 곳을 눌리니 평소보다 쾌감이 짙게 타고 올랐다.
“하앗! 아, 으으응!”
벌어진 입술 사이로 신음과 함께 삼키지 못한 침이 흘러나왔다.
“하아.”
사정감이 차오른 영웅의 허벅지가 돌처럼 단단해졌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채언의 몸을 소파에 눕힌 채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삽입했던 성기를 뒤로 뺄 때마다 내벽이 딸려 나갈 듯 쓸렸다.
“윽! 흐, 하읏.”
철썩이며 살 부딪힐 때마다 젖은 몸에 가죽이 붙어 뿌득거리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채언의 허벅지를 쥔 큰 손에 핏줄이 돋았다.
“라이언….”
울 것 같은 얼굴로 눈을 찌푸린 채언은 영웅의 어깨를 끌어당겨 그의 입술을 찾아 물었다.
“으응!”
급히 혀를 섞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채언은 하얀 셔츠 깃을 꽉 쥔 채 사정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봐주지 않고 굵은 귀두가 내벽을 긁었다.
“흐윽. 읏.”
채언이 우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긁어오자 영웅의 미간에 깊게 골이 패었다. 퍼억, 세게 허리를 쳐올린 그가 가슴을 크게 부풀리며 숨을 들이마셨다. 땀 한 방울이 영웅의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의 성기를 문 채언의 구멍은 옴쭉거리며 하얀 정액을 받아먹었다.
“하아, 하….”
잘게 허리를 움직이며 여러 차례에 걸쳐 사정을 마친 영웅이 천천히 상체를 들자 채언의 양팔이 소파 위로 스륵 떨어져 내렸다.
그는 채언의 몸 안에서 느리게 자신의 성기를 빼내었다. 툭, 그의 성기가 엉덩이 사이를 빠져나오자 벌어진 구멍이 뻐끔거리며 덩어리 진 정액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영웅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밑에 누운 채언을 내려다보았다. 지친 듯 가늘게 뜬 눈을 깜빡이는 채언은 다리 사이와 배가 하얀 정액과 체액으로 더럽혀진 채, 엉망으로 구겨진 앞치마를 허리에 두르고 있었다. 영웅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손을 들어 채언의 붉어진 뺨을 만져주자 얌전히 눈꺼풀이 감겼다. 영웅은 채언의 몸 위로 자신의 몸을 겹쳐 누웠다. 땀이 배어 나온 몸은 촉촉하고 따끈했다.
“저녁, 요리는 못 하겠어요.”
소파 위로 팔을 늘어트리고 있던 채언이 영웅의 어깨를 껴안으며 말했다.
“내가 할게요. 뭐가 먹고 싶어요?”
“…주꾸미요. 손질하던 거…, 아직 싱크대에 있는데.”
입꼬리를 올려 웃은 영웅은 자신의 입술에 닿는 채언의 모든 곳에 입을 맞췄다. 마지막으로 검은 눈썹 사이 미간에 입술을 눌렀다 뗀 그가 말했다.
“그런데 말이에요. 이왕 소파가 더러워진 김에.”
뺨을 쓸어주며 다정하게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에 채언은 감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네?”
“여기서 한 번 더 하는 건 어때요?”
영웅의 손가락이 채언의 허리에 묶인 매듭을 풀어냈다.
결국 요리를 하기에는 시간이 늦어져 손질한 주꾸미는 내일 먹을 것만 빼고 전부 냉동실로 들어가야 했다.
배달시킨 피자로 늦은 저녁을 먹은 두 사람은 거실 카펫 위에 엎드린 채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글램핑 장소를 추리는 중이었다.
산 중턱까지 차를 타고 올라가야 나오는 프라이빗한 곳과 호텔 부지에 따로 글램핑장이 마련되어 있는 곳 등등. 호수나 바다 근처가 아니더라도 괜찮아 보이는 곳이 꽤 많았다.
한참 사진을 넘겨 보며 대화를 나누는데 채언이 쇼핑몰 추천 광고 창에 뜬 사진을 손으로 가리켰다.
“어? 여기요.”
영웅이 광고를 클릭하자 길 가운데 손을 잡고 걷는 연인의 사진이 떴다. 그들의 양옆으로 나무가 빼곡히 심겨 있었다.
“저 여기 TV에서 본 적 있어요. 오래전에 드라마 엔딩 장소로 나온 곳인데 길가에 있는 나무 덕분에 어떤 계절에 가도 예쁘다고 했어요.”
“그래요?”
“네. 그 드라마 시청률은 잘 안 나왔는데, 저기서 찍은 마지막 화 키스 신은 엄청 유명해요. 장면이 예쁘다고요. 그거 보면서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잊고 있었어요. 나중에 건영이한테 같이 가보자고 하면 걔가 저랑 같이 가줄까요?”
“나랑 먼저 가요.”
새살거리던 채언은 영웅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그를 보며 눈을 끔뻑였다.
“나는 같이 갈 건데.”
말을 덧붙인 영웅은 뒤늦게 민망한 듯 이마를 긁었다.
질투할 일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질투가 났다. 지난번 채언이 건영의 반찬을 챙겨주는 것을 볼 때도 비슷한 마음이었다.
자신은 누나의 그릇에 샐러드도 담아준 적이 없었다.
차라리 채언의 젓가락이 자신의 그릇을 거쳤다가 건영에게로 간다거나, 자신이 건영의 그릇에 반찬을 놓아주는 것이 더 나을 듯했다. 채언은 건영을 챙겨주고 싶은 마음을 충족하고, 건영은 맛있는 반찬을 먹고, 자신은 채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함과 동시에 건영에게도 잘 보일 수 있을 테니까.
채언이 건영을 아끼는 것을 아니까, 자신도 그에게 잘 보이고 싶고, 잘해주고 싶은데. 동기가 불순했다. 하지만 영웅은 자신의 질투가 타당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변호했다.
좋은 날이었고, 처음으로 다 함께 밥을 먹는 자리에서 채언에게 불순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어 그날은 어른스럽게 참았지만,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생긴다면 손이 제멋대로 움직일지도 몰랐다.
아무튼 여행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자신과 가본 뒤 좋으면 가족들을 챙기는 편이 서로에게 더 좋지 않을까. 그럼 모두가 행복해지니까.
“여기는 글램핑장이 아닌데요?”
채언이 영웅의 어깨에 자신의 어깨를 붙이며 말했다.
“유명한 곳이니까, 주변에 분명히 캠핑할 수 있는 장소가 있을 거예요.”
“그럼 우리 저기 가요?”
“가죠.”
그게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이라면. 영웅이 말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채언은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풉 터진 웃음을 막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자꾸 웃음이 나와서 엎드려 팔에 얼굴을 묻어야 했다.
“왜 웃어요?”
영웅의 물음에 채언이 빼꼼 눈만 들어 보였다. 그래 봤자 웃음기가 가득한 눈은 이미 반달 모양으로 접혀 있었다.
“응? 왜 웃는데요.”
표정을 이미 다 들켜 버린 채언은 팔에 볼을 기대 자신의 얼굴을 그에게 훤히 드러냈다.
“좋아서요.”
“뭐가?”
“저기.”
채언의 손가락이 노트북 화면을 가리켰다.
“좋아하는 사람이랑 가보고 싶었거든요.”
영웅의 입술이 물결쳤다. 그는 웃음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입술에 힘을 주며 노력하다가 결국 주먹으로 입가를 가려버렸다.
“그럼, 저기 가는 거예요. 우리 둘이. 좋아하는 사람끼리.”
하지만 주먹 뒤에 숨겨진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채언의 어깨에 이마를 문지르며 실실거리던 영웅은 가운을 걸친 채언의 몸을 끌어안았다.
“우리 내일은 뭐 할까요? 뭐 하고 싶어요, 나랑? 우리 둘이 뭐 할까요?”
“음….”
영웅의 팔에 머리를 기대고 누운 채, 흐트러진 그의 머리를 매만져주던 채언은 아! 하며 입술을 벌렸다.
“지난번에 못 간 영화관에 갈까요? 가서 아무거나 봐요. 무서운 건 빼고요. 시간 제일 빠른 걸로.”
“좋죠. 나 그런 거 정말 해보고 싶었는데. 아무거나 보는 거.”
“거짓말.”
“정말인데?”
“그럼 다른 것도 말해 봐요. 라이언은 또 뭐가 하고 싶은데요?”
“또 하고 싶은 거?”
채언의 얼굴을 보며 말한 영웅은 점차 시선을 내려 가운이 벌어져 훤히 드러난 채언의 하얀 가슴과 아직 부어 있는 젖꼭지를 바라보았다.
“또 하고 싶긴 한데.”
가운 끈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의 의미를 알아차린 채언 그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채언 씨는요?”
우물쭈물 대답을 미루던 채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저도 하고 싶은 거 있어요.”
“뭔데요?”
“그, 그거 버려요. 우리.”
버리다니. 뭘? 뜬금없는 채언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영웅이 눈썹을 올리며 검은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뭘요?”
“그거, 하늘색… 링. 이제 필요 없어요.”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눈을 끔뻑이던 영웅은 표정을 바꿔 뭔가를 고민하는 척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그렇게 하죠.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주말 오후.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채언은 입을 벌린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이 진짜 많아요.”
점심시간이면 다들 점심을 먹으러 가 영화관이 빌 줄 알았는데. 대기 의자와 매점 앞, 옆에 딸린 게임장 안까지 사람이 바글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느긋하게 걸어올 시간에 미리 예매하거나, 이른 점심을 먹지 말고 조금 더 빨리 와서 분위기를 살필 걸 그랬다.
“영화가 다 매진되지는 않았겠죠?”
달콤한 냄새의 근원지인 매점 쪽을 바라보고 있던 영웅은 옆에서 들리는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오늘 상영하는 영화 엄청 많은데요? 그중에 우리 자리 두 개는 있을 거예요.”
영웅은 오늘 상영하는 영화 스케줄이 떠 있는 화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영화 한 개가 되게 많이 하네요? 다른 것도 그런가?”
영웅의 말에 채언도 화면을 올려다보았다. 딱 봐도 압도적으로 상영 회차가 많은 영화 제목이 떠 있었다. 시리즈가 너무 많아 처음부터 보지 않은 사람은 무슨 편이 먼저 나온 건지 순서를 구분하기도 어려운 미국 히어로 영화였다.
그러고 보니 관내에는 히어로 영화를 주제로 한 패널이 서 있고, 매점에서는 MD 상품까지 팔고 있었다.
“개봉한 지 얼마 안 돼서 사람들이 다 저거 보러 왔나 봐요. 라이언도 미국에서 저 시리즈 본 적 있어요?”
영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다는 아니고 몇 편만요.”
“재미있어요? 저는 한 편도 안 봤어요. TV에서 해줄 때 몇 분씩 잠깐 보고 말고.”
“팬들은 좋아할 텐데, 나는 모두 찾아볼 만큼 팬은 아니었어요.”
“그럼 우리 저 영화는 피해서 다른 거 봐요. 상영 회차가 많긴 한데, 사람들이 다 저기 몰렸을 게 뻔한 데다가 팬들이 이미 좋은 자리를 다 예매했을 거예요.”
“그럴까요? 그럼 지금 시간에서 저거 말고 제일 빠른 게….”
눈을 가늘게 뜬 두 사람은 화면 속 상영 시간을 살폈다.
“어! 저거. 제목이, 오늘…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영화 제목이 살벌한데요?”
두 사람은 나란히 선 채로 눈을 끔뻑였다.
“공포 영화는 아니겠죠? 스릴러인가? 처음 들어보는 제목이라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네.”
상영 시작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영화는 한 개가 더 있었지만 그건 미성년자 관람 불가 딱지가 붙은 진짜 공포 영화였다.
“오늘 네가, 그 영화. 포스터 한번 찾아볼까요?”
“그게 좋겠어요.”
채언은 영웅의 소매를 잡아당겨 포스터 함 앞으로 다가갔다. 열심히 눈동자를 굴리며 조금 전 본 영화 제목을 찾는데, 서정적인 느낌의 포스터 한 장이 눈에 띄었다.
“이건가 봐요.”
채언은 영웅에게 자신이 찾은 포스터를 내밀어 보여주었다. 초록 숲을 배경으로 서로를 마주 보고 선 주인공들 사이로 영화 제목이 강물 흐르듯 쓰여 있었다.
“무서운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럼 이거 지금 바로 예매할까요?”
영웅은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칠 분 조금 더 남았어요.”
“네. 그럼 우리 이거 봐요.”
팝콘이 잔뜩 든 통을 안은 채언은 불빛이 켜진 열 표시를 살피며 예매한 좌석을 찾아 계단을 한 칸씩 올라갔다. 스크린에서는 한창 광고가 나오는 중이었다.
“여기가 D열이에요.”
영웅에게 속닥인 채언은 의자 사이로 들어가 중앙 좌석을 찾아 앉았다.
“그런데 왜 그렇게 조용히 말해요?”
채언의 뒤를 따라 앉은 영웅이 속닥였다.
“여기 우리밖에 없잖아요. 들어오면서 살펴보니까 다른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요.”
덧붙이는 그의 말에 채언은 도리질을 했다.
“영화관이니까 조용히 해야죠. 그리고 아까 예매할 때 다른 좌석 하나가 예매되어 있었잖아요. 사람이 언제 들어올지 몰라요.”
“아하.”
영웅은 채언의 말에 조용히 동의하며 컵 홀더에 음료를 꽂아 넣었다. 팔 받침대에 손을 올린 그는 의자 여기저기를 구경하다 버튼을 발견했다. 그걸 누르자 지이잉, 소리를 내며 의자 각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오! 채언 씨 이걸 누르니까 의자가 조절되는데요?”
그의 말에 바른 자세로 앉아 있던 채언도 자신의 팔 받침대 쪽을 살펴보았다. 버튼을 찾아 누르자 지이잉 거리며 등받이가 뒤로 눕기 시작했다.
“우와!”
팝콘 통을 꼭 껴안은 채언은 조금 전 영웅이 그랬던 것처럼 신기해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잠깐만. 그런데 집에 있는 소파도 각도 조절되잖아요. 똑같은 건데, 우리 이거 왜 신기해하고 있는 거예요?”
“오, 그러게요.”
서로를 보며 헤실헤실 웃은 두 사람은 각자 버튼을 눌러 몸에 맞는 각도를 찾아 앉았다.
“라이언, 오늘은 긴장 안 돼요?”
옆으로 몸을 튼 영웅이 채언에게 손을 내밀었다. 채언이 손을 잡아 오자 영웅은 그의 손등을 자신의 왼쪽 가슴 위에 대어 쿵쿵 뛰는 심장을 확인시켜주었다.
“오늘도 심장이 쿵쾅거리는데요. 혹시 어두운 건 괜찮아요? 자동차에 있을 때보다 훨씬 깜깜한 것 같은데. 중간에 나가고 싶으면 말해요. 우리 바로 나가요.”
“채언 씨는? 괜찮아요? 답답하지는 않고?”
“네, 저는 괜찮아요. 그리고 소리는 어때요? 광고 소리 너무 커요? 듣기 괜찮아요?”
“조금 크긴 한데 걱정할 정도는 아니에요.”
“사실 저 이거 가져왔어요.”
팝콘 통을 팔걸이에 올려놓은 채언은 주머니를 뒤적여 작은 통을 꺼냈다. 예전에 영웅이 사용하던 귀마개였다.
“협탁 안에 여분이 몇 개 있길래요. 우리 처음 영화 보러 갔을 때 조금 힘들었잖아요. 영화 보다가 너무 시끄러우면 이거 끼고 나가요. 나가는 동안에도 소리가 계속 들리잖아요.”
영웅은 채언의 손바닥 안에 자리한 귀마개가 낯설게 느껴졌다. 오랫동안 사용한 것이었는데 이렇게 낯선 기분이라니.
채언과 함께 살게 된 뒤로 큰소리에 두려움을 느끼던 트라우마 증상이 빠르게 완화되었다. 약을 먹고 심리치료를 받아도 쉽사리 해결되지 않던 것이었는데, 영웅 스스로도 자신의 변화가 놀라울 정도였다. 잘 때 귀마개를 끼지 않는 건 물론, 이제는 토스트를 구울 때마다 조마조마하지도 않았다.
“고마워요.”
귀마개를 건네받은 영웅은 잡고 있던 채언의 손에 입술을 눌렀다.
“여기 아무도 없으니까 괜찮죠?”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빛에 검은 눈동자가 일렁였다. 채언은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는 권태기를 맞아 헤어진 연인의 모습으로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평범한 사랑 영화처럼 명랑하게 흘러가던 장면들은 그것이 곧 연인의 죽음으로 인해 정신 착란을 겪게 된 주인공의 비틀린 회상이었던 것으로 밝혀지며 분위기를 달리했다.
채언은 주인공이 겪는 우울 증상을 보며 지난날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는 그게 병인지도 몰랐는데 정말 심각했구나. 영화가 해피엔딩이면 좋을 텐데, 생각하면서.
큰소리도 나오지 않고 캐릭터들이 싸우는 장면도 폭력적이지 않았다. 그래도 채언은 틈틈이 영웅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는 영화 내용만큼이나 진지한 얼굴로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고 보고 있었다. 잘 보고 있으니 다행이었다.
영화는 어느덧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연인이 죽었다는 걸 인정하고 나서도 주인공은 이별 여행이라는 명목의 환상 세계에 빠져 있었다.
안타까움에 코를 훌쩍인 채언은 바삭바삭한 팝콘을 집어 먹었다. 따듯한 캐러멜 팝콘은 지하철역에서 파는 만주처럼 냄새만 좋고 맛이 없는 게 아니라 코끝을 자극하는 냄새만큼이나 맛있었다.
팝콘을 사 먹자고 매점 앞으로 자신을 끌고 간 것은 영웅인데 그는 자동차 극장이나 집에서처럼 막상 간식을 먹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한 번도 팝콘 통에 손을 뻗어오지 않았다.
팝콘을 씹던 채언은 다시 통 안에 손을 집어넣다가 고개를 내려 자신의 양쪽 손을 보았다. 빈손과 팔걸이 위에 걸쳐진 영웅의 손과 맞잡은 손. 혹시 손을 잡고 있어서 못 먹나?
“라이언, 팝콘….”
팝콘을 좀 먹겠냐고 물어보기 위해 고개를 돌린 채언의 눈이 멍해졌다. 그가 울고 있었다.
영웅이 우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병원에서도 집에서도. 어느 곳에서든 그는 우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슬픈 장면들 때문일까? 자신도 코를 훌쩍였으니까. 그런데 영화 때문이라고 해도 눈물이 번진 그의 얼굴을 보니 가슴이 지끈거렸다.
“영화가 너무 슬프죠.”
채언은 맞잡은 그의 손을 엄지로 살살 쓸어주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영웅은 왼손으로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그래도 슬픔이 가시지 않았는지 스크린 불빛에 비쳐 드러난 뺨의 눈물길 위로 다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팝콘 통을 팔걸이에 올려놓은 채언은 옷소매를 내려 잡고는 영웅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손수건을 가져왔다면 그걸로 눈물을 닦아줬을 텐데 왜 하필 오늘은 손수건을 목에 두르지 않았을까. 휴지라도 좀 챙겨 올걸. 겨우 옷소매로 그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자니 채언은 속이 상했다.
훌쩍이는 소리라도 들렸으면 얼굴이 이렇게 눈물범벅이 되기 전에 닦아줬을 텐데. 계속 그의 상태를 살폈어야 하는데 영화가 끝나간다고 방심해서는 안 됐다.
영화관 의자는 팔걸이가 왜 이렇게 넓을까. 꼭 차의 콘솔박스 같았다. 팔걸이가 없었으면 단번에 안아줬을 텐데.
몸을 쭉 빼 영웅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 채언은 얌전히 자신의 손에 얼굴을 맡긴 영웅의 얼굴을 조심조심 닦아주었다. 자신은 울고 나면 피부가 염분 때문에 더 예민해지는 느낌이 들곤 했다. 그도 그럴지 몰랐다. 예민해진 피부를 거친 옷감으로 문지르면 쓰라릴지 모르니 더욱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울지 마요.”
채언은 손가락으로 그의 젖은 속눈썹을 쓸어주었다. 영웅은 축축해진 손가락에 얼굴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은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갈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영화가 끝나고, 꺼져 있던 불이 다시 켜질 때까지 상영관 안에 다른 관객은 들어오지 않았다.
채언은 영화관을 나와서도 영웅의 얼굴을 살피며 걸었다.
이미 울음기는 다 정리했는데. 그 다정한 행동에 영웅은 약간의 머쓱함을 느꼈다. 혼자 눈물을 펑펑 흘린 것이 조금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 운 자신을 채언이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는 듯해 다행이었다.
“라이언.”
“응?”
그런 생각을 알아차린 듯 곧바로 이름을 불러오는 목소리에 놀란 영웅이 어깨를 튕겼다. 그의 모습에 채언이 입술을 잘근거렸다.
“우리 이제 영화 볼 때는 다시 자동차 극장에 갈까요?”
“왜요? 오늘 와본 영화관이 별로였어요?”
채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동차 시트보다 편한 좌석이라든가 스크린을 깨끗하고 넓게 볼 수 있는 것, 집에서 가까운 것 모두 좋았지만, 영화관은 별로였다. 영웅을 편하게 안아줄 수 없다는 게 단 한 가지 불만이었는데, 그 불만 하나로 장점을 모두 눌러버릴 수 있었다.
“어떤 게 별로였어요?”
영웅은 부은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그는 영화관이 꽤 마음에 든 편이었다. 보려는 영화 상영관에 사람이 많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시설이 쾌적했고, 오락거리나 못 먹어본 간식거리도 많아서 나중에 채언과 영화 시작 시간보다 미리 와서 즐겨볼까 생각해둔 상태였다.
그런데 정작 함께 오고 싶었던 채언의 마음에는 차지 않는다니, 어떤 점이 별로인지 들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나중에 데이트할 때 그런 부분을 고려할 수 있었다. 언제라도 채언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뒷좌석에 앉을 수가 없잖아요.”
채언은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나를 안아줄 수가 없어서?”
채언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영웅의 부은 눈가를 바라보았다. 아까 눈물을 많이 흘려서 눈동자 옆이 조금 충혈되어 있었다.
영웅이 눈물을 흘릴 때, 지난날 그가 자신을 위로해주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은 자주 울었다. 항상 울지 말라고 다독여주는 손길에 기대기만 했었는데, 그럴 때마다 그가 무슨 마음이었을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까 영웅이 우는 것을 볼 때, 너무 속상했다. 슬픈 감정을 모두 옮겨 받아 대신 울어주고 싶었다. 아마 자신이 울 때마다 그도 그러지 않았을까.
“네. 팔걸이가 너무 두꺼워서 안아줄 수가 없잖아요.”
영화관이 마음에 들지 않는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이유 때문에 영웅은 얼굴을 찡그리며 웃었다.
“으음, 나는 채언 씨가 지금 안아줘도 좋은데.”
반쯤 장난을 담아 말한 것이었다.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가였고 채언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스킨십에 소극적인 사람이었다.
“라이언은 괜찮아요?”
우뚝 멈춰 선 채언이 물었다.
“뭐가요?”
영웅도 그 자리에 서서 채언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저랑 손잡거나 그러는 거요. 정말로 괜찮아요? 그러고 싶어요?”
걱정을 덜어주려 꺼낸 말이었는데 채언은 어쩐지 조금 전보다 더 진지해진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본 영웅은 다시 채언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에게 채언은 부끄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동안 만나온 이들과 성별이 달라 지인들이 보면 놀랄 수는 있으나 그 때문에 불쾌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바운더리 안에 들어올 수 없었다.
하지만 채언에게 자신과 같을 것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조심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채언 씨가 싫다면, 나는.”
채언이 몸을 껴안아 오는 바람에 영웅은 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벌어져 있던 입술이 천천히 다물렸다.
밝은 낮이었다. 그것도 사람이 많이 돌아다니는 대로변. 영웅은 채언의 몸을 마주 안아줄 생각도 하지 못하고 크게 뜬 눈만 끔뻑거렸다.
주변 사람들이 두 사람을 흘끔거리며 지나갔다. 영화 촬영을 하는 건가? 멀리 카메라를 숨겨두었을 만한 건물을 살피며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안 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안 좋은 일 때문이 아니라 영화가 슬퍼서 운 거 알아요. 그래도 우는 걸 보니까 속상했어요. 라이언은 제 앞에서 한 번도 운 적 없는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눈물 닦아주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나도 이젠 울지 말아야지. 내가 울면 그걸 보는 사람도 힘들 테니까”
채언은 그렇게 말한 뒤 천천히 영웅을 안은 팔을 풀어냈다.
“그걸 이제 알아서 미안해요.”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요. 눈물이 나올 것 같잖아요.”
영웅은 정말 울 것 같은지 입술을 삐죽이고 있었다. 채언은 그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안 돼요. 울지 말라니까요? 아니다. 울고 싶을 때는 울어야 마음이 나아지긴 하는데…, 그래도 울지 마요. 대신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까요?”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말투였지만 영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요.”
말하는 목소리가 조금 떨리기는 했지만, 영웅은 목 위로 울컥 올라오는 것을 꿀꺽 삼켜냈다. 채언의 반대쪽 옷소매까지 축축해지게 만들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로 아이스크림 가게를 찾아 걷기 시작했다.
“오늘 같은 날 손수건을 가지고 나왔어야 했는데. 왜 하필 오늘 안 가지고 왔을까요.”
“손수건 필요해요? 나 있는데.”
영웅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채언에게 내밀었다. 손수건이 들린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보는 채언의 표정이 다채롭게 변했다.
“아까는 왜 이거 안 썼어요? 영화관에서요.”
“눈물 났을 때요? 그때는 채언 씨가 손으로 닦아줬으니까.”
“그렇긴 한데….”
채언은 뭐라 할 말이 없어 말끝을 얼버무리다가 그냥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툭 말해버렸다.
“라이언은 조금 특이한 것 같아요.”
멋대로 채언의 말을 자신이 특별하다는 뜻으로 해석한 영웅은 수줍은 표정으로 채언의 손을 주물렀다.
“채언 씨도요.”
“아, 저도요?”
목덜미를 긁으며 대답한 채언은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아무튼 라이언은 영화관이 괜찮았다고 하니까, 앞으로 여기 올 때는 슬픈 영화 말고 재미있는 영화만 보기로 해요.”
“그럼 슬픈 영화는 자동차 극장에서 보고요?”
채언은 자신과 발을 맞춰 걷고 있는 영웅을 올려다보았다.
“슬픈 영화 또 보고 싶어요?”
“난 그냥 채언 씨랑 좋은 영화를 많이 보고 싶어요.”
그의 말에 빙그레 웃은 채언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본 영화, 슬프긴 했지만 좋았어요.”
“나도요.”
아이스크림 가게까지 걷는 동안 채언은 주변에서 흘끔거리는 시선을 느꼈다. 하지만 영웅의 손을 놓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봤자 지나가는 사람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자신이 진정으로 신경 써야 할 대상은 영웅이었고.
그동안은 밖에서 영웅의 손을 잡거나 안고 싶어도 혹시 그에게 곤란한 일이 생길까 봐 일부러 밀어내곤 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괜찮다고 했으니까. 좋다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정말로 괜찮은 일이야. 채언은 영웅의 손을 더 꼬옥 붙잡았다.
“라이언, 우리 아이스크림 먹고 뭐 할까요?”
“캠핑 도구 보러 가는 거 어때요?”
“캠핑 도구요? 지난번에 라이언이 글램핑 하러 갈 때는 음식 재료만 챙기면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우리 뭐 사야 하는데요?”
“아직 장소를 안 정해서 뭐가 필요할지는 모르니까, 오늘은 그냥 구경하러 가요. 괜찮은 물건을 발견하면 캠핑도 가고 싶어질지 모르잖아요.”
그는 분명 구경으로 끝내지 않고 뭐라도 꼭 살 것이 분명했다. 채언이 생각하기에 영웅은 과소비하는 경향이 있었다. 자신이 손수건을 목에 두르고 다닌 며칠을 위해 그는 퇴근길에 백화점에 들러 브랜드별로 손수건을 몇 개씩 사 온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중에는 아기용품 브랜드의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피부에 닿는 것이니 면이 순해야 할 것 같다는 게 이유였다. 자신은 아기처럼 피부가 여리지도 않고, 패션쇼를 하는 모델도 아니니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다고 말해 보았지만, 그는 개중 하나도 환불하지 않았다.
아기 손수건이라도 환불하라고 했지만, 영웅은 직원이 입가가 짓무르는 아기 침 닦이 용도로 정말 좋다고 추천해준 거라며 끝끝내 손수건을 쥐고 포기하지 않았다.
그 정도 쇼핑은 그의 통장에 아무런 탈이 되지 않는 듯했다. 그래도 과소비는 과소비였다.
“그러면….”
하지만 채언은 캠핑 도구를 보러 가자는 영웅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우리 나중에 캠핑도 가요?”
그와 함께 캠핑도 가보고 싶었으니까.
글램핑장에서는 직접 뭘 두드려 만들 필요가 없다던데, 캠핑에 간다면 뭘 하게 될까 궁금하고 설렜다. 그와 함께 나뭇가지를 주워다 불을 피우고, 침낭에 들어가 하늘 위에 뜬 별을 보고 그럴까?
채언의 얼굴에 비치는 기대감에 영웅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캠핑도 가요, 우리.”
맞잡은 손이 팔랑, 앞뒤로 흔들렸다. 채언이 움직인 것이었다.
“맞다. 저 월요일에 밭에 남아 있는 상추 전부 딸 거예요. 영진이 형이랑 같이 가서 따기로 했어요. 많을 테니까 그것도 주변에 좀 나눠드리려고요, 글램핑 갈 때나 캠핑 갈 때 맞춰서 딸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고기 구워 먹을 때 같이 먹게요. 그런데 더 늦게 따면 너무 커지고 맛없어질 수도 있거든요. 아쉽지만 우리 이번에 여행 갈 때는 마트에서 사 가야 돼요.”
영웅은 새살거리는 채언이 자신을 흔드는 대로 흔들려 주며 그와 발을 맞춰 걸었다. 아이스크림은 아직 먹지도 않았는데 입에 꿀을 머금은 듯 세상이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