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토요일 낮. 느지막이 일어나 점심을 먹은 두 사람이 가기로 한 곳은 수영장이었다.
피트니스 센터 카드가 각자의 지갑으로 돌아간 지는 오래였지만, 자주 운동을 하러 가는 영웅과 달리 채언은 한동안 그곳에 발걸음 한 적이 없었다.
요즘엔 주말농장에 다니고 있었고, 영웅과 자주 저녁 산책을 다니는 데다 수업을 들으러 걸어 다니기 때문에 충분히 몸을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햇볕도 많이 쬐고 다녀서 그런지 요즈음 기분도 괜찮았다.
손바닥 위에 약을 올려놓은 채언은 물컵을 쥔 채 알약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요즘 기분이 괜찮은데 오늘부터 약을 줄여보면 어떨까 싶었다.
특히 오늘 아침에는 정말 기분 좋게 눈을 떴고, 점심을 먹을 때도 우울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약을 먹기 시작한 지 벌써 두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아침, 저녁 중에 한 번 정도는 약을 걸러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감기가 거의 나아질 때쯤에는 약을 먹지 않아도 괜찮은 것처럼, 오늘부터 약을 줄여가다 보면 몸도 점점 약을 먹지 않고도 기분 좋은 상태에 적응할지 몰랐다.
“채언 씨, 약 먹었어요?”
“네? 네, 먹었어요!”
갑자기 들려온 영웅의 목소리에 놀란 채언은 급히 컵에 입을 대고 물을 마셨다. 그래도 일단은 영웅에게 약을 먹지 않아도 괜찮을지 물어보고 결정하려고 했는데, 왜 갑자기 손에 쥐고 있던 약을 잠옷 주머니 안에 쑤셔 넣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방금 약을 먹었다고 해놓고 주머니 속에서 약을 꺼내기 멋쩍어 채언은 물만 몇 모금 더 삼킨 뒤 식탁 위에 컵을 내려놓았다. 옆에 놓여 있던 찢어진 약봉지가 채언의 손날에 스쳤다.
“이따 잠깐 마트에 갈까요?”
냉장고 문을 닫은 영웅은 채언에게로 다가갔다.
“뭐가 없어요?”
돌아보는 채언의 입가에 물이 묻어 있었다. 촉촉한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어준 영웅은 채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베이컨도 얼마 없고, 메이플 시럽도 새로 사야겠어요. 내일 먹으면 없을 것 같은데?”
“알겠어요. 그럼 우리 수영하고 바로 갈까요? 어차피 영화 시작할 때까지 시간이 좀 뜨잖아요. 장 본 것들 집에 두고 출발하면 시간 딱 맞을 것 같은데.”
“바로? 음, 그러다 늦어서 베이컨을 들고 영화관에 가게 되면 어떡하지?”
“그럴 리가 없잖아요. 걸어서 가도 될 정도로 엄청 가까운데.”
그 말에 영웅은 눈을 가늘게 뜨며 채언의 몸을 훑어보았다.
“쇼핑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새로운 잠옷이라든가….”
“그러니까 쇼핑하느라 시간만 안 까먹으면 된다고요. 신발도 그렇고 옷도 그렇고 한 번도 안 입고 정리만 해둔 게 너무 많아요.”
채언은 한쪽 손을 들어 영웅의 머리카락을 만져주었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 보들보들한 머리카락이 손가락을 스치는 느낌이 좋았다.
그는 요즘 전처럼 자주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지 않았다. 영웅은 머리카락을 넘기면 영화배우처럼 멋있었지만 자연스럽게 두면 하이틴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처럼 귀여워서 뭘 어떻게 하든 좋았다. 하지만 만지기에 좋은 쪽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놔둔 경우였다.
“그런데 혹시 라이언 필요한 게 있으면 쇼핑하고요. 어차피 영화관도 같은 건물에 있으니까 영화 보고 나서 마트에 가요.”
“난 필요한 거 없는데.”
“그럼 됐어요. 저 옷 갈아입고 수영복 좀 챙길게요.”
“그래요.”
채언의 허리에서 내려온 커다란 손이 허벅지 안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보이는 곳에 크게 흔적 남은 것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요.”
“변태….”
조금 더 안쪽으로 파고드는 손을 잡아뗀 채언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침에 침대에 누워 이야기를 나누다가 수영장 얘기가 나오자 잠옷부터 거의 벗기듯 들춰본 영웅이었다. 흔적 남은 곳이 없나 확인해보자던 그는 막상 말간 몸을 보자 흔적이 남지 않을 정도로만 살짝 빨아보겠다며 여기저기를 물어댔다.
그러다 또 침대 위에서 뒹굴었고. 그것이 오늘 점심에 가까운 아침을 먹게 된 이유였다.
“뭐라고요? 변태?”
눈을 가늘게 뜬 영웅은 채언에게 잡힌 손을 내려 품 안의 몸을 조여 안았다. 그런 뒤 곧바로 하얀 목 위에 입술을 대고 푸르르 소리가 나도록 바람을 불자 채언이 웃으며 몸을 비틀었다.
“으으. 간지러워요! 그만해요!”
“나도 욕하는 건 다 알아듣거든요.”
“윽, 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내가 다 들었거든요?”
다시 푸르르 소리가 나게 채언의 목에 입바람을 분 영웅은 가슴을 들썩이며 웃는 채언을 보다가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그는 빠르게 하얀 목과 턱, 보조개가 팬 볼에 입을 맞춘 뒤 안고 있던 몸을 놓아주었다. 그러자 후우, 후우 숨을 쉬던 채언이 웃음기 남은 얼굴로 시선을 마주쳐 오며 스스로 안겨 왔다.
두 사람은 서로의 허리를 안고 마주 본 채로 잠시 뒤뚱거렸다.
“옷 갈아입고 와요.”
“네, 옷 갈아입고 나올게요.”
그러고 나서도 한참 후에야 서로를 안고 있던 팔에 힘이 풀렸다.
채언이 침실 쪽으로 발을 옮기고, 식탁 위에 있던 컵은 영웅의 손에 들려 싱크대 안으로 사라졌다.
집 욕실 타일을 밟는 것과 수영장 타일을 밟는 느낌은 달랐다. 공간이 더 넓은데도 동굴에 들어온 듯 소리가 웅웅 울리는 것도, 온몸으로 습도가 느껴지는 것도 집과는 달랐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수영장 분위기에 채언은 낯선 곳에 온 듯 팔을 쓸었다.
“여기는 오늘도 사람이 별로 없네요.”
채언의 말에 영웅은 넓은 수영장 내부를 둘러보았다. 레인 안에서 풍덩거리며 수영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의자에 누워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번잡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저쪽이 더 인기가 좋은가 봐요.”
영웅은 고개를 까딱이며 어딘가를 가리키는 동작을 취했다. 채언의 시선이 그의 고갯짓을 따라갔다. 샤워실로 가는 길이 보였는데 영웅은 아마 헬스장을 말하는 듯했다.
“저도 나중에 한번 가볼까요?”
“저쪽에?”
“네. 쓸 줄 아는 기구는 없지만요.”
의자에 수건을 내려놓은 영웅은 허리에 손을 올리며 웃었다.
“같이 창밖을 보면서 트레드밀을 달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그러면 우리 새로운 산책 방법이 생기는 건가?”
채언은 그의 손 아래 문신을 보다가 영웅의 목소리를 듣고는 피식 웃었다.
“그게 무슨 산책이에요.”
시답잖은 농담을 나누며 두 사람은 물 가까이 다가갔다.
찰박.
영웅을 올려다보며 대화를 나누던 채언은 자신이 밟아 낸 물소리를 듣고 젖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고개를 돌려 물이 가득 찬 수영장 안쪽을 쳐다보았다. 출렁. 맑은 물이 커다란 젤리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뭐지? 갑자기 멀미를 하는 것처럼….
채언은 출렁이는 물을 따라 울렁거리는 속 때문에 미간을 좁혔다.
수영장 가장자리에서 한 걸음씩 물 가까이 다가갈수록 찰박찰박, 발걸음 소리가 축축해졌다.
물속으로 들어가는 계단 입구에 서서 심장 부근을 문지르던 채언은 반대 손으로 영웅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자 영웅이 살짝 몸을 숙여왔다.
“물이 차갑지는 않겠죠?”
“어떤지 내가 먼저 들어가 볼게요.”
말을 마친 영웅은 손잡이를 잡고 물속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갔다.
“조금 차갑기는 한데 춥지는 않아요.”
그의 가슴 아래에서 물이 찰랑거렸다. 채언은 이상하게 입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방금 영웅이 잡고 내려간 손잡이를 잡자 손에 물기가 묻었다. 여러 사람이 만지고 간 것이라 이미 물이 잔뜩 묻어 있는 것이었다. 다들 아무렇지 않게 이용하는 곳이라는 걸 머릿속에 새긴 채언은 두어 번 심호흡을 했다.
몇 달 전에는 여길 자주 드나들었는데, 물 안에 들어가면 몸이 뜬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갑자기 긴장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채언은 천천히 물속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낮은 온도 때문에 발목에서부터 목 끝까지 빠르게 소름이 돋았다.
“천천히 들어와요. 미끄러지지 않게.”
“네, 천천히.”
영웅의 말을 되새기듯 천천히를 중얼거리며 채언은 점점 더 깊게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계단을 완전히 내려가 바닥에 발을 디디자 곧바로 영웅의 팔이 허리를 안아왔다. 몸을 지탱해주는 느낌에 채언은 손잡이를 놓기 무섭게 그의 팔을 꼭 붙잡았다.
“추워요?”
미세하게 굳은 채언의 표정을 알아챈 영웅이 고개를 숙이며 물어왔다.
“아니, 아뇨. 괜찮아요. 너무 차가울까 봐 괜히 긴장했어요.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가 봐요.”
채언은 애써 웃으며 젖은 손으로 목덜미를 주물렀다. 어깨를 움츠리고 있던 탓에 목 근처가 뻣뻣했다.
“밖에서 몸에 물이라도 묻히고 들어올 걸 그랬어요. 근데, 라이언 말대로 춥지는 않아요.”
채언의 안색을 살핀 영웅은 채언의 어깨 위를 꾹꾹 눌러주며 긴장한 몸이 풀어지도록 도와주었다.
옆 레인에서는 첨벙거리며 수영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첨벙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동안 채언은 잠시 눈을 감고 몸에 닿는 영웅의 체온에 집중했다.
심호흡을 한 채언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저 이제 괜찮아요.”
물 밖에서 그랬던 것처럼 심장 위를 손으로 누르듯 문질러보자 평소보다 조금 빨리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빠른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이 정도면 괜찮았다.
“정말 괜찮아요?”
다시 한번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쉰 채언은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첨벙거리는 소리가 다시 가까워지고 있었다.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수면이 출렁거렸다. 얕게 흔들리던 물은 가만히 서 있는 몸을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는 영웅의 손을 잡아 내린 채언은 천천히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채언 씨.”
심호흡을 하느라 느릿했던 숨이 하아, 하아, 하, 빨라지기 시작했다. 눈꺼풀이 감겼다 뜨이는 속도가 호흡과 엇박자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영웅은 채언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곧바로 그의 허리를 끌어당겨 단단히 안았다.
“우리 나가는 게 좋겠어요.”
“아니, 하아, 저는… 으….”
“나가자, 채언아.”
첨벙거리는 물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림과 동시에 두 사람의 등 뒤로 물이 잔뜩 튀어 올랐다.
순간, 검은 파도가 온몸을 덮쳐오던 장마철 어느 날의 기억이 채언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흰 덩어리 같은 얼굴들이 주변을 빙빙 도는 듯했다. 높은 파도가 치는 것도 아닌데 채언은 똑바로 서 있기가 어려웠다.
“흐…!”
채언은 손을 떨며 자신의 허리에 둘린 영웅의 팔을 붙잡았다. 정상적인 호흡 속도를 되찾으려 노력해 보았지만 그럴수록 숨소리가 거칠게 터져 나왔다.
물 밖으로 빠져나와 채언을 의자에 앉힌 영웅은 커다란 수건을 펼쳐 떨고 있는 몸 위에 덮어준 뒤 그 앞에 다리를 접고 앉았다. 영웅과 눈이 마주친 채언은 죄를 지은 사람처럼 파드득 고개를 숙였다.
“채언 씨.”
부름에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영웅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들었다.
잠깐 수영장 안에 들어갔다 나왔을 뿐인데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짙은 눈썹 사이에 골이 패다 사라졌다.
영웅은 지금 채언이 느끼고 있을 복잡한 감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바다뿐만 아니라 어디가 됐든 깊은 물가를 조심해야 했는데 채언이 먼저 수영장 이야기를 꺼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 문제였다.
“응? 채언아.”
불안하게 움직이던 채언의 검은 눈동자가 영웅의 얼굴을 향했다.
“우리 밖으로 나갈까? 물소리 안 들리는 곳으로?”
미약하게 움직이는 고개를 따라 젖은 머리카락이 천천히 흔들렸다.
대충 몸에 묻은 물만 닦아 낸 뒤 옷을 걸치고 나온 두 사람은 단지 내 산책로 의자에 앉았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어 한적한 공간이었다.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은 채언은 앞으로 몸을 숙이며 한숨을 쉬었다. 고작 수영장일 뿐인데. 진짜 바다도, 넓은 호수도 아닌 고작 수영장. 이제는 혼자 죽어버릴 거라는 생각 따위 안 하는데, 왜… 왜 이렇게 나약하게 도망쳐 나온 걸까.
양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채언은 아랫입술을 물며 잠시 숨을 골랐다. 영웅을 돌아보는 것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은 자신이었다. 나쁜 생각을 해서 그를 상처 준 것 또한 자신인데 혼자 저지른 과거가 두려워 이렇게 벌벌 떨고 있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바보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꼴로 마냥 처져 있을 수는 없었다. 분명 영웅 또한 많이 놀랐을 것이었다. 숨을 제대로 쉬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를 먼저 안심시켰어야 했는데, 바보처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여기까지 끌고 오다니. 검은 실이 엉켜 머릿속을 꽉 채운 것 같았다.
채언은 마른침을 삼키며 심호흡을 했다. 영웅은 여전히 옆에 앉아 자신을 기다려주고 있었다.
“저…, 이제 나쁜 생각 안 해요.”
얼굴을 덮고 있던 손 하나를 아래로 떨어트린 채언은 다리 위에 얹힌 팔꿈치를 보다가 다시 깊게 숨을 마셨다.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는 거 알아요.”
천천히 숙이고 있던 몸을 편 채언은 나머지 손도 얼굴에서 떼어냈다. 많이 놀랐을 영웅을 안심시켜주어야 했다. 그게 먼저였다. 다시는 그런 멍청한 짓 따위 하지 않을 거라고, 아까는 물이 너무 차가워서 몸이 굳어버린 거라고.
“그러니까, 정말, 다시는….”
옆으로 돌아가던 채언의 고개가 제자리에서 멈췄다. 옆에 앉아 있는 영웅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돌아보기가 두려웠다. 그의 볼에 긁힌 상처가 남아 있으면 어떡하지. 바닷가에서처럼 피가 배어 나오면. 다 잊고 잘 살아가는 사람에게 또 상처 줬어. 정말 멍청하게.
눈앞이 새까매졌다. 쩌적 쩌적 갈라지는 검은 땅 위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이대로 바닥이 갈라져 떨어진다면 또다시 깊고 깊은 구렁텅이 속으로….
그때 영웅이 채언의 두 손목을 잡아 힘 있게 당겼다.
“나 봐요.”
손목이 잡혀 순간적으로 그를 돌아본 채언은 곧바로 고개를 숙여 영웅의 눈을 피했다.
“나 봐줘요. 응?”
다시 한번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언제나 재촉하지 않았다. 언제나, 언제나…. 단지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단단히 쥐고 있을 뿐이었다.
채언은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투둑, 눈물방울이 떨어진 뒤에야 앞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물기 어린 눈에는 갈라진 검은 땅이 아니라 영웅과 자주 걷는 산책로의 갈색 의자가 보였다.
죄인처럼 고개 숙이고 있던 채언은 느리게 얼굴을 들었다. 하지만 곧바로 영웅을 바라보지 못하고 산책로 여기저기에 시선을 던졌다. 벽돌로 된 길. 들꽃과 나무. 그런 것들을 보자 조금 진정이 되는 기분이었다.
채언은 영웅에게 잡힌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러자 단단히 손목을 쥐고 있던 영웅의 손에서도 천천히 힘이 빠져나갔다. 스르륵 피부를 쓸며 내려온 커다란 손이 채언의 손을 맞잡았다. 영웅의 손을 보고 있던 채언은 손가락에 힘을 주어 마찬가지로 그를 붙잡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초록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채언이 완전히 고개를 들고 숨을 토해냈을 때 영웅은 잘했다는 듯 웃어주었다.
“지금 당장 차에 가야 한다면 갈 수 있는데.”
조용히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은 채언은 잠시 그를 바라보고 나서야 겨우 굳은 표정을 풀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 영웅과 눈을 마주치며 마음을 달래는데 그가 한쪽 팔을 등받이 위에 올리더니 기대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채언은 망설임 없이 그의 팔에 머리를 기대었다.
가을바람은 아직 차갑지 않았고, 해는 뜨거울 정도로 내리쬐고 있었다. 채언은 눈을 찡그리는 대신 영웅의 팔에 볼과 눈가를 문질렀다. 그렇게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동안 누군가 옆을 지나가는 발소리가 들렸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등지지 않고 그렇게 앉아 있었다.
목 끝에 닿는 머리카락이 거의 말랐을 때쯤, 영웅을 바라보고 있던 채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깊은 물을 보니까 속이 안 좋았어요.”
영웅은 채언과 맞잡은 한쪽 손을 놓지 않고 보드라운 손등 위를 손가락으로 쓸어주었다.
“그래도 괜찮을 줄 알았어요. 집에서 욕조도 사용하니까. 그런데 막상, 물속에 들어가니까….”
느릿하게 말을 잇던 채언의 말이 멈췄다. 달싹이던 입술이 꼭 다물리고 검은 눈동자가 눈꺼풀 아래로 사라졌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보던 영웅은 채언이 기댄 팔을 접어 작은 머리를 안아 주었다.
“무서웠어요. 너무, 무서웠어요.”
손을 꼬옥 잡아 오는 힘에, 영웅은 굽힌 팔을 더 끌어당겨 채언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여전히 채언의 몸이 긴장으로 굳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죄송해요.”
“왜 나한테 사과하는 거예요?”
“매번, 이렇게… 혼자…, 이래서요.”
띄엄띄엄 끊어질 듯 말을 잇는 채언의 목소리가 안타까워서 영웅은 말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지난여름 환자복을 입은 채언은 병실 침대에 앉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에게 사과했었다.
‘무작정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매번 모든 걸 망쳐버리니까. 옆에 있는 게 너무 좋은데, 그런데…. 그래서 또 망쳐버릴까 봐. 곁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불행해졌는데, 당신은 그러지 않았으면 했어요, 제발. 같이 보낸 시간이 너무 행복해서, 그러면 안 되는데… 나는 웃으면 안 되는데. 무서웠어요. 구질구질하게 달라붙고 말 텐데, 짐 덩어리처럼 붙어 있으면 안 되는데. 함께 불행해지면 안 되는데. 난 계속 이럴 테니까. 차라리 나를, 날…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거둬준 은혜도 모르고 도망친 나쁜 사람으로 기억해서 찾지 않았으면 했어요. 그렇게밖에 생각을 못 했어요. 내가 힘든 것밖에 몰라서 놓아버리려고 했어요. 너무 무거워서. 너무 힘들어서. 매일 지겹도록 생각에 잠겨 있는 게 싫었어요. 매번 무섭고, 버겁고. 생각을 그만하려면 이런 방법밖에 떠오르지 않아서… 무서워서 그랬어요. 죄송해요. 상처 주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것밖에 방법을 몰랐어요.’
두서없는 문장 속에서 몇 가지 말이 가슴에 아프도록 꽂혔다. 아마도 자신이 영원히 알아내지 못할 죽은 친구의 마음이 채언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나는 웃으면 안 되는데. 난 계속 이럴 테니까.
벗어날 수 없는 우울과 죄책감 속에서 채언은 혼자 얼마나 고통받았을까. 생각을 그만하고 싶었다는 그 말이 너무 아팠다. 채언처럼 환자복을 입고 생활하던 지난날 자신이 바라던 것과 같았으니까.
몸은 무기력했지만, 매일 매일 끊임없이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그만 생각하고 싶은 것들이 온몸에 달라붙어서 자신을 꼼짝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제발 단 하루라도 생각을 그만하게 해달라고 울면서 바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아마 채언도 그때의 자신과 똑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곁에 가족과 의사가 함께했던 것과 달리 채언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을 테고. 이미 너무 많이 지쳐버린 뒤 자신을 만났으니 제대로 마음을 털어놓는 법도 모르고 계속해서 병들어 갔을 것이었다.
“나한테 사과하지 말아요.”
영웅은 채언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그건 이미 충분히 했잖아.”
혼자 떠나려 했던 채언의 행동에 상처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결국 자신을 붙잡아준 것 또한 채언이었다.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무력감에 잠식되어 있던 자신을 구해준 것이 바로 그였다. 비 오던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힘없이 떨면서도 옷자락을 붙잡아 오던 손은 늦은 밤 빗길을 달려와 홀로 있던 자신을 안고 달래주던 손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이렇게 한가롭게 벤치에 앉아서 햇볕을 쬐고 있고.”
긴 손가락이 채언의 귓바퀴를 쓸어주었다.
“그러니까, 이제 혼자 복잡하게 생각하는 건 그만둬요. 응?”
검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 채언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영웅의 얼굴을 보았다.
“라이언.”
“응.”
“문신을 새겼을 때, 아팠어요?”
영웅은 잠시 말없이 채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팠어요. 살 위를 그어 만든 상처니까.”
보드라운 귓바퀴를 쓸어주는 손길에 채언이 목을 움츠렸다.
“그런데 이제는 괜찮아. 아무리 느려도 상처는 낫게 되어 있잖아요.”
검은 눈동자 속에 들어차 있던 흐린 기운이 사라지는 것이 보여 영웅은 미소 지었다. 채언이 또다시 생각에 붙들리기 전에 다른 관심거리를 쥐여 줄 차례였다.
“농장에 갈까?”
영웅은 자신의 팔에 머리를 기댄 채 가만히 숨을 쉬고 있는 채언에게 말했다.
“채언아, 우리 농장에 갈까?”
농장이라는 말에 채언이 눈을 깜빡였다. 역시나 농장 이야기를 하니 반응이 있었다. 영웅은 살짝 눈을 접어 웃었다.
“농장에요?”
그의 초록색 눈동자를 보면서 채언은 상추와 쪽파를 떠올렸다. 둘 다 쑥쑥 크고 있었다. 정말로 눈 한 번만 깜빡 감았다 뜨면 자라는 것 같았다. 오늘은 또 얼마나 자랐을까? 그 생각을 하니 축 늘어져 있던 몸에 힘이 돌기 시작했다.
“갈까?”
채언은 재차 물어오는 영웅의 목소리에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녀오면 영화 시간에 늦을 거예요.”
“우리 오늘 영화는 취소하고 다음에 보는 거 어때요?”
“취소요?”
“아무래도 오늘은 좁고 어두운 곳에 들어가는 건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하지만, 영화관… 엄청 가고 싶어 했잖아요.”
후기도 엄청 열심히 찾아봤으면서. 채언이 미안한 듯 중얼거렸다. 자동차 극장에 가기 전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영웅 또한 이번에 보기로 했던 영화를 무척 기대했었다.
“나중에, 사람들이 더 많이 보고 나서 가면 우리가 손잡고 있기 더 편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난 그쪽이 더 좋은데.”
“정말 오늘 영화관 안 가도 괜찮아요?”
영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트할 시간이 하루뿐인 것도 아니고 날은 다시 잡으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영화관은 자주 들르는 백화점 건물에 있으니 거리가 먼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영화는 다음에 보고 우리 농장에 갈까요?”
“음….”
채언은 같이 농장에 가자는 영웅의 말을 되새기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상추와 쪽파를 파종한 뒤로 그와 함께 농장에 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번 토마토처럼 중간에 실패하는 것들이 생기더라도, 그래서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끝까지 잘 키워낸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파종한 뒤로는 그가 농장에 함께 가자고 할 때마다 고개를 저었고, 농장 돌봄 카메라도 보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대신 평일에만 농장에 다녀오기로 했고, 쪽파와 상추를 수확하면 제일 먼저 보여주기로 약속한 상황이었다.
채언은 영웅의 팔에 의미 없는 그림을 그리면서 잠시간 생각을 더 하다가 몸을 세워 앉았다.
“혼자 다녀와도 될까요?”
“혼자?”
영웅은 의자 등받이 위에 올리고 있던 팔을 굽혀 자신의 머리를 기댔다. 살짝 올라간 그의 눈썹을 보던 채언은 영웅의 옷자락을 잡았다.
“주말에는 같이 시간 보내기로 했는데…, 죄송해요.”
영웅은 자신의 옷자락을 잡고 있는 채언의 손을 잡았다. 물기가 다 마른 손등을 엄지로 쓸어주자 채언도 영웅의 손을 꼭 잡아 왔다.
“쪽파가 정말 많이 자랐어요. 상추도요! 다음 주쯤에는 많이 자라서 먹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지난번에는 상추가 이만했는데 며칠 전에 보니 거기서 더 커 있었다며, 채언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설명했다.
엄지로 약지의 마디마디를 짚으며 기준점으로 삼아 열심히 말하는 모습에 영웅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 수영장에서 있었던 일은 더 이상 채언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정말 잘 자라고 있거든요.”
토마토 새싹이 새끼손톱만 했을 때도 매일 사진을 보내왔던 채언이었다. 지금 기르고 있는 것들도 엄청나게 보여주고 싶을 게 분명했다. 농장에 다니게 된 뒤로 하루 일과를 보고하듯이 상추와 쪽파의 상태를 말해주었으니까.
그런데 아직까지 사진 한 장 보여주지 않는 이유는 잘 키워낸 완성작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영웅은 채언의 의욕이 살짝 걱정되면서도 안심이 되었다.
“흐음. 혼자….”
그리고 오늘은 절대로 채언을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았다.
“안 돼요?”
“싫어요.”
영웅의 입술이 불퉁하게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채언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왜, 왜요?”
“오늘은 나랑 같이 시간 보내기로 했으니까요.”
이제 장마는 끝났고, 상추와 쪽파는 어지간하면 잘 자라는 식물이라고 했으니까, 갑자기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작은 땅에 심어둔 것들이 망가지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튼튼하게 잘 자랄 풀에 밀려 데이트할 시간을 통째로 날려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채언의 상태가 괜찮아졌다고 해도 조금 더 지켜보는 것이 좋았다.
“그러니까 오늘은 나랑 같이 갈 거 아니면 농장에 가지 마요.”
영웅은 장난스레 투정했다. 단호하게 무언가 싫다고 말하는 영웅은 처음이라 당황했던 채언의 가슴속에 간지러운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혼자서는 가면 안 된다고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지 못하는 것이 싫다고 말하는 그에게 고마웠다.
아마 이건 의도한 배려가 아니겠지만, 그래서 더 다정하게 느껴지는 친절한 거절이었다.
“알겠어요. 혼자 농장에 안 갈게요.”
잠시 시간을 두고 나온 유순한 대답에 영웅은 갑자기 목 뒤에 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농장 얘기를 먼저 꺼내놓고, 너무 빨리 말을 바꿔버려서 혹시 어이없어하면 어떡하지? 잠깐 떨어지는 것 가지고 싫은 티를 낸다고 쪼잔한 남자라고 생각한다면? 그럼 안 되는데.
영웅은 재빨리 눈을 굴려 채언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 꼭 붙잡은 손을 내려다보는 채언의 얼굴에는 서운한 기색 따위 보이지 않았다. 평소처럼 아주 덤덤해 보이는 꼭 다물린 입술과 순한 눈망울….
마침 고개를 든 채언과 시선이 딱 마주친 영웅은 입술을 깨물었다. 열렬한 감정이 담뿍 담긴 눈이 꼭 엘리의 것처럼 투명했다. 농장에 가지 말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귀여운 얼굴로 기뻐하고 있는 걸까.
“라이언, 그럼 집에 가고 싶어요? 들어갈까요?”
“농장에 혼자 안 갔으면 했던 거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집에 가자는 뜻은 아니었어요.”
“그렇구나. 농장이나 집이 아니면 어디에 가고 싶어요?”
어찌 됐든 채언의 기분이 나아졌다면 다행이었고,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좋았다. 밀폐되지 않고 사람이 적당히 있으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자주 가는 카페 말고 또 다른 곳.
“일단은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생각할까요? 베이컨이랑 메이플 시럽 고르면서.”
“네. 좋아요.”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웃은 뒤 의자에서 일어섰다. 가을 햇볕을 따끈하게 뒤집어쓴 상태였다.
“기분은 괜찮아졌어요?”
“네, 좋아요.”
채언은 영웅을 올려다보다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콩 박듯이 기댔다. 영웅이 입고 있는 진회색 가디건에서는 그가 베고 자는 베개에서 나는 것만큼 좋은 향기가 났다.
“여기 주차 비용이 너무 비싼 것 같아요. 원래 주차장 요금이 다 이렇게 해요?”
“나도 잘 몰라요.”
주차 요금표가 적힌 패널을 보고 있던 채언은 영웅의 대답을 듣곤 그에게로 휙 고개를 돌렸다.
자신은 차가 없기 때문에 유료 주차장에 주차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보통 주차 비용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기준점이 없었다. 그런데도 저기 영웅의 차가 세워진 유료 주차장의 패널에 적힌 금액은 딱 봐도 비싸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라이언, 이런 거 잘 알아보고 다녀야 해요.”
“왜요?”
“안 그러면 다른 데서도 바가지를 쓸 거예요.”
“그게 뭔데요?”
“음….”
영웅은 채언이 고민하는 틈을 타 채언의 손에 들려 있던 마트 종이봉투를 가지고 와 손에 들었다. 햇볕을 받은 차 안이 뜨거워져 베이컨이 상할까 봐 걱정된다며 들고 내린 것이었다.
“그게 뭐냐면… 덤탱이? 아니, 사기? 다른 데서 싸게 살 수 있는 걸 비싸게 살 수도 있다고요. 여긴 분명히 다른 곳보다 주차 비용이 비쌀 거예요.”
“아하.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봉투를 어깨에 걸치듯 올린 영웅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왜요? 주말이라 다른 곳에 자리가 없을까 봐 그래요?”
그의 곁에 나란히 서서 걸으며 채언이 물었다.
“아아니.”
말을 늘여 대답한 영웅은 슬쩍 채언의 얼굴을 보다가 정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럼 왜요?”
“여기 기억 안 나요?”
“주차장이요?”
“주차장부터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길.”
채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하지 않은 장소였다. 예전에 반찬 만들기 수업이 끝나고 회식 때문에 이 근처에 딱 한 번 와봤을 뿐이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여기 자주 와보셨어요?”
“아아뇨?”
어깨를 으쓱이는 영웅의 모습에 채언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어깨 위에서 마트 종이봉투가 부스럭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다.
아까 장을 보던 중에 영웅이 가고 싶은 곳이 생각났다고 해서 곧바로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어디에 가든 그가 함께 가자고 하면 언제든 따라나설 생각이었기 때문에 목적지가 어딘지는 몰랐다.
이 주변에 농장 같은 게 있을 리는 없겠지만 아무튼 좋은 곳에 가는 것일 터였다. 영웅과 함께 가는 곳이 자신에게 해가 될 리 없었다.
“우리 먼저 이 근처 좀 구경하죠.”
영웅의 제안에 채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날씨 좋은 주말 오후라 그런지 식당과 술집이 늘어선 길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채언은 저마다 즐거운 이야기를 하며 길을 걷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영웅의 손에 이끌려 이쪽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채언 씨, 저것 봐요.”
“어떤 거요?”
“저기 가게에 걸려 있는 인형. 우리 전에 여행 가서 본 인형이랑 좀 닮은 것 같은데.”
영웅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팬시점 유리창 안에는 커다란 인형이 꾸깃꾸깃하게 눌린 채로 진열되어 있었다.
“어! 맞아요. 같은 공장에서 가져왔나 봐요.”
인형은 못 타고 아무도 목에 걸지 않을 만한 디자인의 조개 목걸이와 사탕을 상품으로 타냈던 여행을 떠올리며 채언은 활짝 웃었다. 바닷가 옆을 걷다 확인해 보았을 때는 그 조개 목걸이마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그때 정말로 조개 목걸이 어디다 버리고 온 거 아니죠?”
“아, 정말 아쉽다. 채언 씨가 선물해준 셔츠에 그 목걸이를 했으면 잘 어울렸을 텐데.”
“그런 건 아쉬워하지 마세요.”
장난스럽게 투덜대면서도 채언은 연두색 셔츠에 조개 목걸이를 한 영웅이 여름 바닷가 모래사장에 서 있는 것을 떠올렸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그림이었다. 햇볕을 받아 알알이 빛나는 모래사장 뒤로 끝도 없이 새파란 바다와 하얗게 밀려드는 포말….
순간 심장이 조여오는 느낌에 채언은 서둘러 영웅 쪽으로 손을 뻗었다. 마트 봉투 손잡이 부분에 손가락을 집어넣자 좁은 구멍 안에서 두 사람의 손가락이 빠듯하게 스쳤다.
“이거 저 주세요.”
“무겁지 않은데. 내가 들게요.”
여전히 두 사람의 손은 맞붙어 있었다. 손등뼈에 스치는 온기에 채언은 조금 전 머릿속에 포말과 함께 밀려온 불안을 밀어낼 수 있었다. 난 여기 있어. 이 사람과 함께 지금 여기에. 빠르게 마음이 안정되어 갔다.
“손잡고 싶은데 여기서는 그럴 수 없으니까, 이렇게 번갈아서 들어요.”
채언은 봉투 손잡이를 잡는 척 영웅의 손가락 끝을 매만졌다. 슬며시 눈을 들어보자 꼭 다문 그의 입술 양 끝이 위로 올라간 것이 보였다.
“어쩔 수 없네요. 이번에는 양보할게요.”
영웅이 손잡이를 쥐고 있던 손에서 천천히 힘을 빼자 베이컨과 메이플 시럽의 무게가 채언의 손가락 위에 걸쳐졌다.
“감사합니다. 잘 들게요.”
“하지만 얼마 안 가서 다시 내가 들게 될 거예요.”
“네, 그땐 다시 돌려드릴게요.”
영웅이 팬시점에 있는 인형을 사주겠다고 했지만 됐다며 거절한 채언은 손에 든 종이봉투를 흔들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채언은 무거워진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차에서 내릴 때는 종이봉투 하나만 들고 있었는데 이제 서로의 손목에는 쇼핑백이 몇 개씩 걸려 있었다.
사람이 엄청나게 많은 카페에 앉아 음료도 마셨고, 디저트를 전문으로 파는 곳에서 초콜릿도 몇 개 샀다. 영웅이 삼 층짜리 스파 브랜드 건물을 가리키며 양말을 사고 싶다고 하길래 들렀더니 뜬금없이 자신에게 계절에 맞지 않는 방울 달린 털모자가 생기기까지 했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꽤 걸은 것 같은데 그중에 영웅이 콕 집어 이곳이라고 말하는 목적지가 없었다.
“라이언, 혹시 어디 가려고 했는지 까먹었어요? 아까 마트에서 그랬잖아요. 가고 싶은 곳이 있다고.”
야자수가 그려진 정체를 알 수 없는 가게 근처로 다가가려는 영웅의 손목을 잡은 채언이 물었다.
“우리 지금 여기 돌아다니고 있잖아요.”
“여기?”
눈을 끔뻑인 채언은 손으로 몸 주변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여기가 목적지였어요?”
“채언 씨랑 여기 다시 와보고 싶었거든요. 둘이서만. 그때 채언 씨 회식한 날 내가 말했었는데 기억 안 나죠?”
“…네, 기억이 안 나요. 그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으으, 소리를 낸 채언이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짚고 눈을 감았다. 금방 눈을 떴지만, 눈썹 사이에 골이 패어 있었다.
“라이언한테 무슨 말을 들었는지도 생각이 안 나고,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정말 기억이 안 나요.”
영웅이 손을 들어 채언의 미간을 살살 문질렀다. 눈썹 사이에 힘이 빠지자 그의 손가락도 거두어졌다. 초콜릿이 든 쇼핑백이 흔들거렸다.
“엄청 취한 채언 씨를 업고 이 근처 술집에서 아까 그 주차장으로 갔었어요.”
채언은 방금 영웅의 손이 닿았던 곳에 자신의 손가락을 대고 문질러보았다.
“그때 여길 걸으면서 내가 나중에 다시 오자고 했고요. 채언 씨는 응, 그랬는데. 나도 까먹고 있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그 주차장에 차를 댔구나. 예전 생각을 하면서. 아무리 떠올려보려 노력해도 그날 일이 기억나지 않아서 조금 아쉽지만, 지금 우리는 나름 둘만의 추억을 곱씹는 건가? 채언의 입꼬리가 풀어질 찰나였다.
“잠깐, 그럼 이 주변에서 놀면 되는 거긴 한데요. 꼭 그 주차장에 차를 댈 필요는 없었잖아요. 주차장에 깊은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좀 비싼 추억을 되살려보는 거라고 하죠.”
“그게 뭐예요.”
채언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자 영웅도 따라 웃었다.
보조개가 쏙 들어간 볼을 보던 영웅은 손을 뻗어 채언이 들고 있는 종이봉투 손잡이 사이를 파고들었다. 벌써 몇 번이나 서로의 손을 오간 것이었다.
영웅에게 봉투를 넘겨준 채언은 빈 손가락 끝을 매만졌다.
“이러다 봉투가 다 찢어질 것 같아요. 그거 벌써 손잡이 주변이 다 구겨졌어요.”
영웅은 손에 쥔 봉투를 들어 손잡이 주변을 확인했다. 갈색 종이봉투 겉면에는 종이접기 후에 남는 실선 같은 것이 자잘하게 나 있었다.
“찢어지면 안에 든 거 하나씩 안고 가죠. 뭐.”
“그래요. 이런 번화가에서 베이컨을 안고 다니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겠지만요.”
“잘 찾아보면 한두 명 더 있을지도 몰라요.”
종이봉투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채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베이컨 든 사람을 찾는 거예요?”
영웅의 물음에 채언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또 어디에 들어가 볼까 보고 있었어요. 우리 저녁도 여기서 먹고 갈까요? 외관이 깔끔한 곳은 딱히 없어 보이지만요.”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
고개를 끄덕이는 영웅을 보며 채언은 마주 고개를 움직였다.
크리스마스 시즌 백화점 주변처럼 거리가 멋있게 꾸며져 있는 것도 아니고, 엄청나게 비싸고 맛있는 고급 음식점들이 늘어서 있는 곳도 아니었지만 채언은 복잡한 거리가 마음에 들었다.
꼭 서울이 아닌 어떤 지역에라도 곳곳에 있을 평범한 번화가였다. 이런 거리를 오가며 지나다닌 적은 있지만 이렇게 아무거나 구경하며 노는 것을 목적으로 와 본 적은 몇 번 없었다.
제일 최근이 술에 취해 기억도 나지 않는 회식 날이었고, 그 전이라 함은 건영과 함께 살았던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보통은 혼자 터벅터벅 걷기만 했던 그런 평범한 거리였다.
친구와 논다고 하면 이런 곳에서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거겠지. 영웅과 한강 근처를 걸었던 때를 떠올린 채언은 스스로가 어이없다는 듯 작게 웃었다.
“왜 자꾸 웃어요? 아까부터 자꾸 혼자 웃네?”
영웅이 채언 가까이 몸을 숙여오며 물었다.
“재밌어서요. 저 지금 여기 정말 좋아요.”
채언의 입에서 곧바로 튀어나온 대답에 영웅은 하하, 웃었다.
“나도요. 나도 좋아요.”
“우리 다른 데 또 가볼까요?”
아까 학생들이 몰려 있는 츄러스 가게를 지날 때 보니 옆에 커다란 게임장이 있었다. 셀프로 사진을 찍는 곳도 있었고, 작은 꽃다발을 파는 꽃집도 있었다. 어디든 들어가 보고 싶었다.
“그러면 다음은 저기 어때요?”
“네!”
영웅이 가리키는 곳을 보지도 않고 대답한 채언은 뒤늦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틀어 그의 손가락을 따라가 보았다.
“좋아, 요.”
쭉 뻗은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채언은 눈을 가늘게 뜨고 간판을 살펴보다가 작게 입을 벌렸다. 지난번 회식 때 2차로 간 호프집이었다.
“라이언, 저 술은….”
약을 먹는 동안 술은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고 의사에게 들었던 터라 채언은 퇴원한 후로 술은 단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은 상태였다. 영웅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곤란한 표정을 짓던 채언은 간단한 해결책 하나를 떠올리고는 영웅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는 음료수 마실게요. 술 드실래요?”
그러자 영웅은 고개를 저었다. 채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호프집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다른 가게에 가고 싶은 걸까?
“우리 오늘 차 가지고 왔잖아요. 나도 음료수 마실게요.”
“저기는 식당이 아니라 호프집이라서 아마 술을 한 병이라도 시켜야 할 거예요.”
“시키면 되죠. 마시지는 않겠지만.”
작은 감탄사와 함께 채언의 입이 벌어졌다. 역시 그는 무슨 문제든 가볍게 해결하는 재주가 있었다.
“어서 오세요. 편하신 자리에 앉으시면 돼요.”
몇 개월 만에 다시 방문한 호프집의 분위기는 채언의 기억에 흐릿하게 남아 있는 것과 비슷했다. 너무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오지도 않았고, 적당히 어두우며, 학생보다는 직장인 나이대의 사람들이 테이블을 채우고 있었다.
“채언 씨, 우리 저기 앉아요.”
영웅이 가리킨 자리는 길쭉한 소파형 좌석으로, 높은 등받이가 칸막이와 가림막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폐쇄된 공간은 아니었지만, 일행끼리 이야기를 나누기 좋아 보였다.
두 사람이 빈 테이블로 가서 앉자 직원은 테이블 옆에 꽂힌 메뉴판을 건네고는 금방 자리를 비켜주었다. 직원에게 받은 메뉴판을 펼친 채언은 영웅에게 음식 사진이 제대로 보이도록 돌린 뒤 내밀었다.
“채언 씨 먹고 싶은….”
“지난번에 못 먹은 회 같은 것 말고 각자 하나씩 먹고 싶은 걸로 시켜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영웅은 고개를 숙여 메뉴판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메뉴를 훑던 영웅의 얼굴에 고민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정말 잘 먹을 수 있는 걸로 시키려고 했는데 대부분 안주가 빨간빛을 띠고 있었다.
직원이 다가와 테이블 위에 기본 안주와 물병을 두고 가는 동안에도 영웅은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공부라도 하는 듯 진지한 그의 모습에 채언은 옅게 웃다가 핸드폰을 꺼냈다.
“사진 찍어도 돼요?”
“사진?”
메뉴판을 신문처럼 펼쳐 들고 있던 영웅이 눈을 들었다. 핸드폰을 손에 쥔 채언을 본 그는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정말로 신문을 보는 사람처럼 포즈를 잡았다. 소리 없이 웃은 채언은 영웅의 사진을 두어 장 찍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안주는 골랐어요?”
“골랐어요. 난 이거요.”
테이블 위에 메뉴판을 내려놓은 영웅은 어묵탕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러 종류의 어묵꼬치가 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럼 이걸로 주문할게요. 맞다, 음료수는요?”
영웅은 다시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오렌지 에이드에는 알코올이 안 들어가겠죠?”
함께 음료수 목록을 보던 채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거 마셔야겠어요.”
곧바로 직원 호출 벨을 누르는 채언을 보며 영웅이 고개를 갸웃했다.
“채언 씨는 다른 메뉴 안 골라요?”
“골랐어요.”
멀리서부터 네에- 말하며 다가온 직원이 주문표와 볼펜을 꺼내 들었다.
“어묵탕에 우동 사리 넣어주세요. 그리고 오렌지에이드 두 잔이랑 소주 한 병 주시겠어요?”
“더 필요한 건 없으시고요?”
“네. 그렇게만 가져다주세요. 감사합니다.”
메뉴를 체크한 직원이 카운터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본 영웅은 채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우동이 채언 씨가 고른 거예요?”
“사실 저도 어묵탕 먹고 싶었거든요.”
“지난번에는 여기 와서 뭐 먹었어요?”
“지난번에는… 음, 그것도 잘 기억이 안 나요. 다른 사람들이 이것저것 시키긴 했던 것 같은데.”
“궁금했거든요. 여기서 채언 씨가 어떤 걸 먹고 그렇게 취했는지.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술을 많이 마셨던 걸까? 하고요.”
영웅의 말에 채언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볼을 문질렀다.
“안주보다는 그냥 술만 많이 마셨던 것 같아요. 왜 그렇게 많이 마셨는지 모르겠어요.”
“술도 맛있는 날이 있긴 하죠.”
어깨를 으쓱 올려 보인 영웅은 벽 같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런데 사실 그날 채언 씨한테 회식 가지 말라고 할 걸, 후회했어요.”
그의 말에 채언은 눈을 깜빡였다. 분명 자신은 혼자 저녁을 먹어도 괜찮으니 회식에 다녀올 것을 적극 권장했던 영웅이었다.
“왜요?”
혹시 술 취한 사람을 집까지 데려오는 게 너무 힘들었기 때문일까? 한참 지난 일이 미안해진 채언은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려 손톱을 매만졌다.
“내가 도착하기 전에 누가 채언 씨를 데려갈까 봐 걱정됐거든요.”
“저를 데려가요? 누가요?”
“누구든지. 왜냐면 채언 씨는 너무 귀엽고, 잘생겼으니까. 게다가 그날은 술에 취해서 눈이 평소보다 더, 하아….”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는 영웅의 모습에 채언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도 저 안 데려가요. 옆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는데.”
“오렌지에이드 두 잔하고 소주 먼저 나왔습니다. 어묵탕 금방 가져다드릴게요.”
“앗, 네. 감사합니다.”
타이밍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때마침 음료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직원에게 허둥지둥 대답한 채언은 에이드 잔 하나를 앞으로 가져와 빨대로 액체를 휘저었다.
혹시 조금 전의 대화를 들었으면 어떡하지? 슬쩍 눈을 들어 직원의 눈치를 보았는데, 가지고 온 것만 내려놓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자리를 떠나는 것을 보니 다행히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헛기침을 한 채언은 빨대로 에이드를 휘휘 저은 뒤 음료를 쪼옥 빨아들였다. 금세 입 안에 시원한 액체가 가득 찼다. 새콤한 맛은 거의 나지 않고 달기만 했지만 생오렌지 즙을 짜주는 카페의 것처럼 맛이 좋게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입 안의 달큰한 액체를 꿀꺽 삼킨 채언은 빨대에서 입을 떼고 영웅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언뜻 새침한 표정을 지어 보인 그는 뚜껑을 까지 않은 차가운 소주병을 손에 쥐고 있었다.
“채언 씨가 나 없을 때도 즐거웠으면 하지만, 내 옆에 있을 때 더 즐겁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채언은 테이블 아래로 내린 손을 주먹 쥐며 꽈악 힘을 주었다. 입술을 달싹이는 찰나 카트를 끌고 온 직원이 가까워졌다.
“어묵탕이랑 우동 사리 나왔습니다. 다 익혀서 나온 거라 잠깐만 더 끓인 다음에 바로 드셔도 돼요. 우동은 어묵탕 드시다가 넣고 싶을 때 직접 넣으시면 되고요.”
“네…, 감사합니다.”
타다다닥. 버너에 불을 올리고 직원이 멀어졌다.
이제 주문한 게 모두 나왔으니 이 옆을 지나다닐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눈을 굴려 주위를 살핀 채언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너무 시끄럽지 않지만 적당한 크기의 음악과 소음이 들려왔다.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집중하지 않는 한 그들이 어떤 말을 나누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채언은 시선을 옮겨 소주병을 내려놓는 영웅을 보았다.
“사실은 저도 그날.”
초록색 눈동자가 채언을 향했다.
“회식 가기 싫었어요.”
“왜요?”
“그때도 둘이 저녁 시간 보내는 게 더 좋았으니까요. 지금처럼.”
여전히 입 안에 남은 단맛을 꿀꺽 삼킨 채언은 손바닥을 바지 위에 문질렀다.
“그럼 왜 그날 가기 싫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영웅은 한쪽 손으로 입가를 가리듯 문지르며 말했다.
“그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몰랐거든요.”
채언은 영웅을 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어두운 조명 탓에 그림자 지며 늘어졌다.
“저도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요?”
“저는 누굴 웃겨주는 재주는 없어서, 그렇게 재미있는 사람도 아니고요.”
긴장한 티가 역력한 목소리로 채언은 말을 덧붙였다.
“저 스스로도 그걸 알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래서… 궁금했어요.”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는데 채언의 입에서는 더듬더듬 말이 나왔다. 몸을 뒤척이자 옆에 올려둔 쇼핑백이 부스럭거렸다.
“저는 같이 있을 때면 너무 좋은데. 라이언은, 저랑 있을 때 즐거운지…가요.”
보글보글 냄비 속의 국물이 끓는 소리가 들렸다. 입가를 가린 영웅에게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럼, 좋을 텐데.”
채언은 자꾸만 목이 타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마른 입술을 핥던 채언은 눈앞의 빨대를 몇 번 휘젓다 오렌지에이드를 마셨다. 그래도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달콤한 걸 삼킬수록 더 목이 타고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듯했다.
영웅에게 선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계속 함께 있고 싶었다. 그게 당연한 일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저는 라이언하고 같이 있는 게 좋아요.”
분명 조금 전과 다를 것 없는 노랫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가 실내를 울리고 있는데 점점 더 그 소리가 커지는 기분이었다.
“채언 씨.”
복잡하게 귓가를 울리던 소리가 한순간 음소거 된 것 같았다. 나직한 영웅의 부름만이 선명히 들렸다.
채언은 테이블 아래로 내린 손을 꼼지락거리며 눈을 들었다. 지금 자신의 손이 축축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차가운 에이드 잔을 만졌기 때문인지 긴장으로 인해 땀이 배어 나온 탓인지 알 수 없었다.
“네.”
“나 지금….”
영웅은 말을 잇지 못하고 손으로 눈썹을 문지르다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앙다문 입술 끝에 잔뜩 힘이 들어간 것이 보였다. 그렇게 힘을 주고 있는 입술이 자꾸만 움찔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결국 그는 두 손바닥에 얼굴을 포옥 묻고 말았다.
“엄청, 엄청나게 부끄러워요. 아니다. 말이 잘못 나왔어요. 나 지금 엄청나게 즐거워요.”
영웅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바닥을 내렸다. 드러난 입매가 자꾸만 활짝 벌어지는 것을 막고 싶은지 그는 밝게 웃다가도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영웅이 테이블 위로 한쪽 손을 올려 내밀길래 채언도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맞잡았다. 긴장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채언 씨랑 있을 때는 항상 즐거워요. 나는 회사 일이 꽤 잘 맞는 사람인데. 채언 씨한테 전화가 오거나 메시지가 오면 당장 그만두고 집에 가고 싶어질 정도라고요.”
그 말에 채언은 눈을 접으며 웃었다.
“쉽게 말하는 것 같지만 작년 겨울 전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어요. 한국에 온 뒤로 뭐가 즐거운지도 모르고 그냥 살고 있었거든요. 알잖아요. 내가 스피커랑 대화하면서 살았던 거.”
두 사람의 얽힌 손가락이 보글보글 소리와 함께 움직였다.
“난 정말, 정말, 채언 씨를….”
영웅은 채언의 손을 꽈악 잡으며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참아내듯 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정말, 정말로.”
목 끝까지 어떤 말을 뱉고 싶은 욕구가 차올랐지만, 영웅은 다음번에 제대로 말할 것을 다짐하며 자꾸만 터져 나오려는 마음을 눌러 참았다.
조금 더 조용한 곳에서, 이렇게 들뜬 얼굴이 아니라 진중함이 전달될 정도로 완벽한 상태일 때 말하고 싶었다.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그 말이 채언에게도 완벽하게 기억될 수 있도록 준비한 다음 말해주고 싶었다.
“정말로, 채언 씨 옆에 있는 게 좋아요.”
크게 숨을 내뱉은 영웅은 시원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지금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이 표정을 유지할 수 있을걸요? 왜냐면 난 지금 정말 기분이 좋으니까. 술 냄새만 맡고 취한 기분이에요.”
“아직 소주 뚜껑도 안 땄잖아요.”
채언은 킁킁 냄새 맡는 척을 하더니 어묵탕 냄새밖에 안 난다며 보글보글 끓고 있는 냄비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알코올이 떠다닐지 몰라요. 여긴 술을 파는 곳이니까.”
그의 말대로 채언은 조금 취한 듯한 기분이었다. 적당히 술을 마신 것처럼 기분이 좋았고 마음이 들떴다. 진짜 술을 마실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영웅은 아쉽지도 않은지 맞은편에서 헤헤 웃고 있었다.
괜히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금주해야 하는 자신을 따라 영웅 또한 술을 입에 대지 않는 기간이 꽤 되었기 때문이다. 꼭 그러지 않아도 괜찮은데.
채언은 병뚜껑을 따지 않은 소주병을 보다가 두 손으로 영웅의 손가락을 잡고 괜히 여기저기를 만지기 시작했다.
“술 정말 마셔도 괜찮은데. 안 드실 거예요?”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요. 채언 씨, 나 지금 술 마시고 싶은 걸 힘들게 참고 있는 거 아니에요.”
채언은 영웅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마시면 잘 마시기는 하지만, 찾아다닐 정도로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알잖아요. 나도 전에 술을 금지당한 기간이 있었다는 거. 그때도 참는 건 힘들지 않았어요. 난 알코홀릭이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우리 술은 나중에 같이 마시는 걸로 해요.”
어깨를 으쓱 올려 보이는 영웅의 모습에 채언은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함께 좋은 일로 샴페인을 터뜨릴 날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또한 힘든 시기를 이겨냈으니 자신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담도 받고 있고 약도 잘 먹고 있으니까 오래가지 않아 꼭 함께….
약. 순간 아차 싶었다. 오늘 약을 먹지 않았다.
오늘 약을 먹지 않고 잠옷 바지에 숨겼다는 사실을 떠올린 채언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까 수영장에서 패닉 상태가 된 것은 멋대로 약을 먹지 않았기 때문일지 몰랐다.
상담받기 시작한 것도, 약을 먹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으면서, 너무 안일한 행동이었다. 이래놓고 금방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니.
“라이언, 지금 기분 좋다고 했죠.”
영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제가 망칠지도 몰라요.”
“음?”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채언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머쓱해 보여서 영웅은 채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저….”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아서 채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영웅이 자신을 혼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오늘은 혼이 날지도 몰랐다. 아까 낮에는 왜 그렇게 행동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이런 게 문제였다. 잠깐 기분이 좋을 때면 평소보다 의욕이 솟는 경우가 있었다. 곧바로 잠옷 주머니에 손을 넣어 버릴 만큼 얼마 유지되지 않는 그런 하찮은 의욕이.
영웅은 맞잡은 손을 흔들흔들 움직여 채언의 시선을 끌었다. 채언은 갑자기 또 생각할 거리가 많아진 모양이었다. 그 생각 안에는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것도 포함되어 있는 듯했고.
“말하기 어려운 일이 있어요? 내 기분하고 상관있는 일?”
“그게….”
갑자기 손에 땀이 나는 것이 느껴져 채언은 영웅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 했다. 그런데 순간 얽혀 있던 그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와 조금 전보다 더 꽉 잡아 오는 것이 느껴졌다.
“말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 그런데 손은 안 놓을래요.”
영웅의 얼굴을 바라본 채언은 입을 꾹 다문 채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작게 속닥였다.
“너무 오래 잡고 있으면 이상하게 볼지 몰라요.”
그렇게 말한 채언의 눈꼬리가 아래로 처졌다. 영웅은 그러면서도 자신의 손가락을 문질러오는 손길에 작게 웃었다.
“자아, 이러면 어때요?”
그는 커다란 오렌지에이드 잔 두 개를 맞잡고 있는 손 옆으로 옮겨 허술한 가림막을 만들었다.
“쇼핑백도 하나 올릴까요?”
노란 오렌지 시럽이 가라앉은 잔 두 개와 영웅의 초록색 눈동자를 번갈아 보던 채언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 뒤로 입술을 달싹이다 멈추기를 반복하던 채언은 결국 느릿하게 낮의 일을 실토했다.
“저 오늘 약을 안 먹었어요.”
채언의 말에 영웅은 눈을 깜빡였다. 그는 약을 먹었냐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대답한 채언의 목소리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닌데에. 채언 씨 오늘 약 먹었어요. 아까 우리가 집 나오기 전에.”
정신과 약을 먹으면 안 좋은 생각을 하는 대신 멍하게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경우가 있었다. 너무 심하지 않은 수준에서 물건을 깜빡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한 번 더 체크해주는 것이었다.
“먹은 척했어요.”
영웅의 고개가 까딱 옆으로 기울었다.
“음?”
“거짓말…했어요.”
고개를 숙인 채언은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주눅 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영웅은 채언의 손톱 위를 문지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에?”
“…속여서 죄송해요.”
“아니, 그거 말고요.”
자신 없는 채언의 시선이 영웅의 얼굴을 향했다가 금방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영웅은 채언의 손을 놓지 않고 물었다.
“왜 그랬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입술을 깨물었다 놓은 채언은 겨우 입을 뗐다.
“괜찮을 줄 알았어요.”
말해놓고 스스로 부끄러워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영웅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볼을 문지른 채언은 천천히 눈을 들어 영웅을 보았다. 그는 아까처럼 활짝 웃고 있진 않았지만 다정함이 담뿍한 눈빛은 그대로였다.
영웅과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채언은 다시 느릿하게 말을 잇기 시작했다.
“요즘엔 기분이 계속 좋았으니까, 한 번쯤 약을 먹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어요. 오늘 약을 먹지 않고도 괜찮으면 일주일 후에, 또 사흘 후에, 모레, 내일. 감기가 다 나아갈 때 그러는 것처럼 약을 줄여도 되지 않을까… 해서.”
말을 이어갈수록 채언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니었어요. 저는 아직이에요.”
채언은 눈을 질끈 감았다. 감긴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다가 천천히 뜨였다.
“아까 수영장에서 얼굴들이 생각나서…. 무서웠어요.”
“어떤, 얼굴?”
“제가 상처 준 사람들이요.”
채언은 영웅의 눈 밑 볼을 보다 시선을 들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맑은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눈동자는 거울이 아니었지만 채언은 선명한 얼굴의 자신과 마주했다. 입 안이 썼다.
“그중에는 라이언 얼굴도 있었고, 저도… 있었어요.”
채언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로 지난 삶에서 느껴본 적 없는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래서 행복한 와중에도 때때로 불안을 느꼈다. 충동적인 자신이 두려운 탓이었다.
알약을 잠옷 주머니에 숨겨버린 것처럼 헛된 의욕이 또 한 번 잘못된 방향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채언은 수영장 물속에서 파도의 포말과 창백한 자신의 얼굴을 함께 보았다. 또다시 충동에 못 이겨 자살을 시도하는 날이 온다면 어떡하지? 버리지 못한 단 한 가지 두려움의 정체였다.
“얼른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더 이상 걱정하지 않게.”
이제는 죽고 싶지 않았다. 진심이었기 때문에 다짐하듯 영웅에게 말을 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저 이제 나쁜 생각 안 해요….”
채언은 흔들림 없이 자신을 봐주는 영웅의 얼굴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그는 언제나 단단했다. 이런 말을 통해 안심하려 했던 것은 자신일지도 몰랐다. 난 이제 더 이상 나쁜 생각 따위 하지 않아. 그러니 괜찮아질 거야. 난 괜찮아.
빨리 정상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약을 먹지 않고, 상담을 받지 않아도 나쁜 생각 따위 하지 않는 정상인.
채언의 미간에 골이 패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자신이 불안정하다는 증거였다.
“채언 씨.”
말간 눈에 물기가 어리는 것을 본 영웅은 망설이지 않고 채언의 이름을 불렀다. 귓가가 먹먹해지던 채언은 숨을 토해내며 눈을 깜빡였다. 눈 앞을 가리고 있던 물기가 눈꼬리를 적시며 사라졌다.
“나도 예전에 그랬어요.”
“뭘요?”
“이만하면 약을 먹지 않아도 되겠다, 생각해서 멋대로 그만둔 적이 있다고요.”
머리를 쓸어 올린 영웅은 한쪽 눈을 가늘게 접어 웃으며 일부러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채언을 안심시켜주기 위해 그런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사실은 조금 속상했다.
“채언 씨랑 똑같았어요.”
지금 채언의 모습이 과거의 자신과 너무나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다음 날부터 다시… 흠, 가짜로 된 사람들을 봤어요. 그래서 다시 약을 먹어야 했죠. 그다음부터는 마음대로 그만두지 않았어요.”
영웅은 과거 자기 모습을 떠올리면서 피식 웃었다.
“그러다 나아져서 한국에 왔고. 이렇게 우리가 만나게 된 거죠. 타다!”
영웅이 맞잡고 있는 손을 작게 흔들었다. 그 손을 바라보던 채언은 고개를 들어 영웅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러니까 내가 알아요. 지금 얼마나 힘든지.”
애틋함이 담긴 까만 눈동자를 보던 영웅은 한숨 같은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지금 채언 씨는 그때의 나보다 더 힘들겠죠, 아마. 난 나를 옆에서 계속 돌봐준 가족도 있었고, 그 일이 터진 후로 꾸준히 치료를 받았는데. 채언 씨는 그게 아니었잖아요.”
영웅은 채언이 보여주었던 영정 사진 속 얼굴을 떠올렸다. 어색한 입술의 호와 전혀 웃고 있지 않던 텅 빈 눈. 그랬던 눈 속에 이젠 애틋함이 담겨 있었다. 채언은 그런 눈으로 자신을 봐주는 것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안심되는 일인지 알지 못하는 듯했다.
“내가 도와주게 해줘요. 미안해하지 말고요.”
밤에 잠들 때, 아침에 눈뜰 때. 채언이 편안한 얼굴로 그저 졸음이 담긴 눈을 감고 부스스 웃어 주는 것이 좋았다.
“채언 씨는 나에게 이미 사과했어요. 그리고 나도 알아요. 다른 사람들을 전부 버리려고 했던 게 아니라 혼자 다 가지고 가려고 했다는 걸. 그러니까, 이제는 더 마음 편하게 내려놔요. 괜찮지 않으면 괜찮지 않다고 솔직히 말해줘요. 날 더 믿어주는 게 최고의 사과일 테니까. 이미 충분히 사과했지만요. 다시는 그런 생각 안 할 거라고 했잖아요. 그렇죠?”
채언은 코를 한 번 훌쩍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끄덕 천천히 움직이던 머리는 몇 번이나 세차게 움직이고 나서야 멈췄다.
약을 먹지도 않고 거짓말을 했으니 그가 혼을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화도 내지 않고 자신을 이해해주니 고맙고 든든했다. 미안함과 사랑스러움이 뒤섞여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지만, 감정의 색깔이 어두운 검정에 가까운 것은 아니었다.
채언은 살 것 같다는 듯 깊은숨을 토해냈다.
영웅은 지금 당장 채언을 옆에 끼고 안아주고 싶었다. 힘 빠진 어깨를 안고 토닥여주고 싶었다. 주차를 조금 더 가까운 곳에 할 걸 그랬다. 그럼 당장 자신에게 기대게 할 수 있었을 텐데. 채언이 어깨 위에 볼을 기대어 왔을 텐데.
영화를 볼 때 무서운 척을 하면 채언은 곧바로 자신을 안아주고는 했다. 그게 가장 빠르게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것은 즉, 그만큼 채언이 안기는 것을 좋아하고, 안정감을 느끼는 방법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통해 채언의 마음을 달래줄 수밖에 없었다.
“초콜릿 먹을래요?”
“초콜릿이요?”
“우리 아까 산 거요.”
채언은 아까 거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디저트 전문점에 들어갔다는 것을 떠올렸다. 여러 가지 맛이 담긴 초콜릿 상자를 샀었다.
“네. 먹을래요. 한 개만.”
오렌지에이드 잔 옆에서 그를 꼭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자 영웅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거두어 갔다. 온기가 남은 손이 뜨끈하게 느껴졌다.
의자에 내려둔 쇼핑백 중 하나를 뒤적인 영웅은 초콜릿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어떤 모양의 초콜릿에서 어떤 맛이 나는지 설명이 적힌 종이가 보였다. 채언은 그 위를 손으로 가렸다.
“이거 안 보고 아무거나 하나 골라볼게요.”
“그럴래요?”
영웅이 종이를 치우자 동그랗고 네모난 모양의 초콜릿이 반질거리는 게 보였다.
채언은 종이 위를 가렸던 손으로 눈을 가리고는 손을 뻗었다. 화이트 초콜릿과 갈색 밀크 초콜릿이 섞여 있었는데 밀크 초콜릿이 손에 잡히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글동글 마일드 초콜릿과 비슷한 맛이 나는 것을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손에 집은 초콜릿의 느낌이 동그래서 채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밀크 초콜릿일까? 기대를 가지고 눈을 가린 손을 치운 채언은 동그란 초콜릿을 든 손을 쳐다보았다.
“어….”
기대했던 것과 달리 화이트초콜릿이 들려 있었다.
채언의 심심한 반응을 지켜본 영웅은 초콜릿 상자를 다시 내밀었다.
“다른 거 먹을래요?”
“아니에요. 이거 골랐으니까 이거 먹을래요.”
“정말로?”
“어차피 남은 초콜릿도 집에 가져가서 다 먹을 거니까. 똑같아요.”
고개를 끄덕인 영웅이 초콜릿 상자의 뚜껑을 덮었다.
“라이언은 안 먹어요?”
“난 집에 가서요.”
채언은 오렌지에이드 잔 하나를 가져가서 빨대로 안을 휘젓는 그를 보다가 손에 든 화이트초콜릿을 보았다. 안에 뭐가 들어 있을까? 더 고민하지 않고 먹어보기로 했다.
입을 벌려 동그란 초콜릿을 콰직 깨물었다. 초콜릿을 파고든 이 사이에 쫀득한 무언가가 걸리는 느낌이 났다. 턱에 힘을 줘 가운데 든 것을 마저 끊어낸 채언은 입을 우물거리며 초콜릿의 단면을 보았다.
채언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달콤함 사이로 새콤한 맛이 선명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거 보세요.”
오렌지에이드를 쪽 빨아 마시던 영웅은 눈을 들어 채언이 내민 것을 보았다.
“딸기가 들어 있어요!”
하얀 초콜릿 안에 분홍색으로 잘 마른 딸기가 들어 있었다.
꿀꺽, 신맛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달콤한 오렌지에이드를 삼킨 영웅은 초콜릿을 들고 환히 웃는 채언의 얼굴을 보며 따라 웃었다.
아까부터 자꾸 어디선가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 채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호프집 안의 사람들은 저마다 함께 온 일행과 술을 마시며 떠들고 있을 뿐이었다.
고개를 갸웃한 채언은 테이블 위 접시에 놓인 산더미 같은 튀김 중 하나를 포크로 찍었다. 어묵탕 맛이 꽤 괜찮았다. 그래서 저녁을 또 먹으러 가는 대신 안주를 하나 더 시켜 먹기로 하고 추가로 시킨 모둠 튀김이었다.
웃는 얼굴 모양의 감자튀김을 쳐다보던 채언은 이게 먹어달라고 쳐다본 건가? 생각하며 포크를 요리조리 돌려보았다.
“왜 그래요? 거기 먼지가 붙어 있어요?”
“아니에요. 그냥 생긴 게 귀여워서 봤어요.”
그 말에 앵두 과자를 먹고 있던 영웅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웃는 영웅을 보던 채언은 감자튀김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둘이 조금 닮은 것 같아요.”
“그거랑 내가요?”
“네.”
채언은 포크를 들지 않은 손 검지를 입꼬리에 대고 끝을 올려 보였다.
“지금 이렇게 웃고 있잖아요. 과자가 맛있어서 웃는 거예요?”
채언의 물음에 영웅은 볼에 물고 있던 앵두 과자를 씹었다. 과자가 맛있어서 웃을 나이는 한참 지났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이기로 했다. 동그란 과자가 맛있는 건 사실이기도 했다.
“그거 나중에 제가 한 봉지 사 올까요?”
“그 정도는 아닌데.”
대답한 영웅은 앵두 과자를 한 개 더 입에 넣었다. 아삭아삭 씹히는 소리를 듣던 그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턱을 움직이던 것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채언 씨. 전에 있던 마카로니는 다 먹은 거예요? 생각해보니까 안 보이네요.”
“눅눅해져서 못 먹고 버렸어요.”
음식을 버렸다는 것이 기쁜 일은 아니었지만, 영웅은 속으로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카로니가 먹어볼 만한 간식이었던 것은 맞지만 채언이 밥 대신 계속 만만한 과자를 먹었다고 하면 조금 속상할 뻔했다.
“혹시 그거 더 작게 포장한 것도 팔아요?”
“네. 큰 것만 팔지는 않아요.”
“잘됐다. 그럼 나중에 마카로니가 또 먹고 싶으면 나한테 말해요. 작은 거 사다 줄게요.”
포크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던 채언은 손가락 움직임을 멈췄다. 마카로니보다 비쌀 게 분명한 선물을 턱턱 사주는 영웅이었다. 그런데 마카로니는 왜 큰 게 아니라 작은 것일까.
“네….”
대답을 하고 나서도 입술을 달싹이던 채언은 결국 영웅에게 묻고 말았다.
“그런데 왜 작은 거예요?”
“그건 과자잖아요.”
영웅이 앵두 과자 하나를 집어 내밀었다.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먹은 채언이 아삭거리는 과자를 씹으며 눈을 깜빡였다.
“과자는 조금씩 먹어야죠. 안 그러면 배가 안 고프잖아요. 나랑 밥 먹어야 하는데.”
그런 이유라면 납득이 갔다. 채언은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서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감자튀김이 찍혀 있는 포크를 영웅에게 내밀자 그는 왼손을 들어 채언의 손을 잡고 감자튀김을 받아먹었다.
채언은 자신의 손등에 겹쳐진 영웅의 손가락을 보면서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저 손가락에는 가는 반지가 어울릴까? 굵은 반지가 어울릴까? 생각하다가, 문득 지금 자신이 공공장소에서 영웅에게 음식을 먹여주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서둘러 뒤로 몸을 물렸다.
너무 자연스럽게 집에서처럼 행동했다. 채언은 손바닥으로 볼을 문질렀다. 혹시 누가 이 모습을 보지는 않았을까 걱정되어 의자 칸막이 밖을 둘러보려다가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이번에는 마카로니 말고 앵두 과자를 사는 게 좋겠어요.”
감자튀김을 우물거리던 영웅은 갑자기 나온 과자 이름에 고개를 갸웃했다.
“앵두 과자?”
“이거요. 라이언이 먹은 동그란 과자.”
“이 과자 이름이 앵두예요?”
“네.”
“그렇구나, 알겠어요. 마카로니 말고 이거, 앵두로. 그런데 채언 씨, 수어 수업 기간이 이제 얼마 안 남았네요. 그것도 끝나면 이런 곳에서 회식할 것 같아요?”
“잘 모르겠어요. 수어 수업은 반찬 만들기 수업보다 인원도 많고.”
포크로 튀김을 하나 찍어 베어 문 채언은 입에 든 것을 꿀꺽 삼킨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 안 할 것 같아요. 영진이 형이랑은 꽤 친해졌지만 다른 분들하고는 그렇게 이야기를 많이 한 편이 아니거든요. 그때랑은 분위기가 조금 달라요.”
“그래요? 그래도 이번 수업 재미있게 다니고 있지 않았어요? 그런 줄 알았는데.”
“재미있어요, 배우는 것도 좋고. 그런데 학교처럼 짝하고만 옆에 앉아서 강사님을 보고 있으니까요.”
“으흠,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영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라이언도 영진이 형이랑 만나보면 좋을 텐데.”
“송 교수님 같은 분이라서요?”
채언은 영웅의 입가를 보다가 살포시 웃었다.
“그렇기도 하고요. 라이언하고 조금 비슷한 면이 있어요.”
“나랑요?”
“네.”
“어떤 점이?”
“라이언 웃을 때 입술이 활짝 벌어져서 예쁘잖아요. 형도 웃을 때 입꼬리가 올라가더라고요.”
채언이 양손 검지로 입술 끝을 찍어 위로 올렸다. 그 모습에 덩달아 영웅의 입꼬리가 흐뭇하게 끌려 올라갔다.
“지금 그렇게요! 그리고 형은 전에 유도를 했대요. 부상 때문에 선수 생활을 계속하기 힘든 데다 선후배 간에 서열이 엄격하게 잡혀 있는 게 싫어서 그쪽 길로 계속 가는 건 그만뒀다고 했어요. 라이언도 폭력적인 거 싫어하잖아요.”
“오래 해왔던 걸 그만두기 쉽지 않았을 텐데. 다른 길을 찾으려는 것도 대단하네요.”
“맞아요. 그런데 형은 지금이 좋대요.”
영웅은 중년 남성이 자신의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중후한 미소를 짓는 모습을 상상했다. 지나온 길을 후회하지 않는다면 성공한 삶이었다. 영웅은 새로운 길을 선택해 걸어간 얼굴 모를 남자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쳐주었다.
직접 만나본 적 있는 송 교수와 달리 영진이 형이라는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어서 채언에게 조금씩 물어 정보를 알아낼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영진이 형이 송 교수처럼 채언에게 여전히 좋은 사람인 듯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라이언은 전에 태권도를 했었잖아요.”
“어? 아…, 그렇죠. 했었지.”
“그때 술에 취해서 들었던 거라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사범 자격증을 따고 싶었다고 했었죠?”
영웅은 헛기침을 하며 손가락으로 눈썹을 문질렀다. 혹시 노란 띠 얘기가 나올까 봐 조금 민망했다.
“지금은 아니에요. 그때 이것까지 말했나? 난 그게 꿈이 아니라 누나를 따라잡고 싶어서 그랬던 거거든요.”
“아, 카일라 님.”
수영을 가르쳐달라고 했더니 영웅의 머리를 물속에 눌러버렸다고 했었나. 채언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사람을 떠올리며 괜히 공손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잘 지내시죠?”
“연락을 안 해서 모르겠는데. 하지만 잘 지내겠죠?”
달그락, 에이드 잔 속의 얼음이 천천히 녹아들었다.
두 사람이 호프집을 나온 것은 해가 다 진 후였다. 그러나 거리는 주변 간판 불빛이 모두 켜져 환했고, 낮과 같은 활기가 여전했다.
“저 너무 배불러요.”
한 손을 배 위에 올린 채언이 영웅을 올려다보았다.
“나도요. 그런데 춥진 않아요?”
영웅의 물음에 채언은 고개를 저었다.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지만 얼큰하게 취한 듯 몸이 따끈따끈했다.
“안 추워요. 지금 딱 좋은데, 라이언은 추워요?”
“아니. 나도 지금이 딱 좋아요.”
서로 마주 보며 속닥거리는데 호프집 문이 벌컥 열렸다.
문 열리는 소리에 영웅의 뒤쪽을 바라본 채언은 아이보리색 정장을 입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급히 나왔는지 숨을 훅 들이마신 상태로 고개를 돌리던 여자는 채언을 발견하자 미간을 찌푸리며 하아, 짧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갈까요?”
영웅의 목소리에 채언은 그를 올려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저희 여기서 어느 쪽으로 가야 주차장이.”
“저기요, 잠시만요.”
곧바로 여자가 다가와 채언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갑작스러운 인사에 얼떨결에 답인사를 한 채언은 동그랗게 뜬 눈을 끔뻑거렸다.
당황한 채언의 표정을 본 영웅도 정장을 입은 여자를 쳐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여자가 영웅에게 묵례를 하자 영웅도 따라서 묵례를 했다.
곧바로 채언 가까이 몸을 붙인 그가 물었다.
“채언 씨랑 아는 분인가요?”
“아뇨, 모르는 사이입니다.”
채언이 뭐라고 입을 떼기도 전에 대신 대답한 여자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갑자기 인사드려서 많이 놀라셨죠? 죄송합니다. 먼저 사과드릴게요.”
능숙한 동작으로 명함 지갑을 꺼낸 여자는 채언에게 명함을 한 장 내밀었다. 작은 종이 위로 영웅의 눈길이 따라갔다.
“IN·W 엔터 박윤정입니다. 혹시 연예인에 관심 없어요?”
“네? 저는, 그게….”
얼떨결에 명함을 받은 채언은 말끝을 흐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생각 없어요.”
명함을 돌려주려 손을 내미는 채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윤정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디 연습생이에요? 회사에서 그렇게 대답하라고 그래요? 혹시 두 분, 같은 소속사?”
“아뇨, 그런 거 없는데요. 그냥 제가 그쪽으로는 생각이 없어서요.”
“정말 계약한 곳 없어요?”
“네.”
채언은 영웅의 얼굴을 흘끔거렸다. 지난번 백화점에서 건영과 마주쳤을 때 손을 끌어준 것처럼 이번에도 도와주었으면 하는데 영웅은 옆에 가만히 서서 지켜볼 뿐이었다.
채언은 예전에도 몇 번 연예기획사의 오디션 제의를 받아본 적 있었다. 그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끈질기기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 또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이 사람과 여기서 몇 번이나 마주쳐야 했을 것이었다.
“그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뇨. 명함 돌려드릴게요.”
“그냥 가지고만 있다가 천천히 생각해 보고 연락 주세요.”
“연락드릴 일 없을 거예요.”
“그럼 제 명함 돌려받을 테니까 전화번호 좀 알려주실래요?”
“아뇨, 그건 좀….”
윤정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럼 가지고 계세요.”
채언은 하는 수 없이 명함을 들고 있는 손을 물렸다.
“가지고만 있을게요. 안녕히 가세요.”
꾸벅 고개를 숙인 채언은 서둘러 영웅의 팔을 잡아끌었다. 목석처럼 가만히 서 있던 그가 쉽게 발을 떼어 움직였다.
“네, 연락하세요. 채언 씨.”
갑자기 불린 이름에 영웅의 한쪽 눈썹 삐죽 솟았다 제자리를 찾았다.
“제 이름을 어떻게….”
돌아보며 대꾸하려던 채언은 말을 마치지 않고 입을 다문 뒤 영웅의 몸을 밀며 걸음을 서둘렀다.
“이쪽 아닌데.”
호프집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졌을 즈음 영웅이 꼭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네? 이쪽 아니에요?”
채언이 걸음을 멈췄다. 따라 멈춘 영웅은 채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완벽하게 반대로 왔어요.”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벌써 한참이나 걸어온 상태였다. 이쪽이 주차장과 반대 방향이라면 잘못 걸어온 만큼 다시 걸어가야 했다.
“채언 씨가 이쪽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요.”
“그런, 아닌데요.”
불퉁하게 입술을 내민 채언이 잡고 있던 영웅의 팔을 놓았다.
“아까 왜 가만히 있었어요?”
“언제요?”
“제가 명함 받을 때요.”
영웅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끼어들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채언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까만 눈을 바라보며 영웅은 말을 이었다.
“아까 그 사람이 다른 의도로 다가왔다면 상황이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그 명함에 관해서는 채언 씨가 생각해 볼 일이잖아요. 내가 아니라.”
영웅의 말을 들은 채언은 입을 다물었다. 그가 방관한 게 아니라 배려해준 것이었다는 걸 알아챘지만 가슴속에는 묘하게 서운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저는 이런 데 관심 없어요.”
아무 데나 버리기 뭐해 여태 손에 쥐고 있던 명함을 들여다본 채언은 그것을 한쪽 손목에 걸린 쇼핑백 안에 집어넣었다. 연예인이라니, 정말로 생각해 본 적 없는 직업이었다.
“알겠어요. 그럼 이제 뒤돌아서 가볼까요?”
채언은 자신이 걸음을 떼기를 기다리는 영웅과 조금 전 걸어온 길을 번갈아 보다가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잡았다.
“왜요?”
영웅은 자신의 손목만 잡고는 걸음을 떼지도, 어떤 말을 하지도 않는 채언을 보며 물었다. 잠시간 그의 손목을 매만지던 채언이 입을 열었다.
“제 일에 아무렇게나 참견해주세요.”
채언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영웅은 눈을 깜빡이며 방금 들은 말을 곱씹어 보았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부드럽게 호를 그렸다.
“저는 그런 게 좋아요.”
“흐음.”
명백히 웃는 얼굴로 눈가를 좁힌 영웅은 과장스럽게 고민된다는 듯한 소리를 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채언 씨가 그런 걸 좋아한다면.”
“네, 정말 좋아해요.”
채언은 그대로 영웅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언뜻 보이는 귀가 노란 가로등 불빛 아래서도 붉었다. 따끈해지는 어깨와 손목의 느낌에 영웅은 작게 웃었다.
“나도요.”
영웅은 채언이 주차장 반대편으로 걷는 걸 막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여기가 주차장이었다면, 그래서 지금 자신의 어깨에 기댄 채언을 차에 태울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곳은 주차장에서 너무 멀었다.
영웅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그의 손목을 만지작거리던 채언은 혼자 골똘히 무언가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라이언, 취했죠?”
“나요?”
뜬금없는 채언의 말에 영웅은 눈을 끔뻑였다.
“나 취했냐고요?”
어깨에 기대고 있던 탓에 앞머리가 부스스해진 채언 쪽이 더 취한 사람 같아 보였다.
“나 술 안 마셨는데? 채언 씨 몰래 마시지도 않았.”
“술 냄새를 너무 많이 맡아서 취했죠?”
“으음?”
영웅은 미간을 좁혔다. 아까처럼 채언의 말을 곱씹어 보았지만 채언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의도를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제가 부축할게요.”
영웅이 혼란해하는 틈을 타서 채언은 그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둘렀다.
“취했으니까. 이렇게 하고 걸어가요, 우리. 넘어질까 봐 걱정돼요.”
쇼핑백을 든 채언의 손이 영웅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나머지 손은 어깨에 둘린 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어지러우면 제 어깨에 머리 기대세요.”
“와우! 맞아요. 난 엄청나게 취했죠. 맞아, 취했다.”
푸우, 숨을 내쉰 영웅은 채언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고는 취한 사람처럼 눈을 감았다.
“나 술 마셨으니까, 아니, 취했으니까 꽉 잡아줘요. 안 넘어지게.”
그는 정말 취한 사람처럼 푸흐흐 소리를 내며 웃었다.
“네. 꽉 잡아줄게요.”
사람 없는 골목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정말 취한 사람처럼 채언에게 완전히 기대면 너무 무거울까 봐 영웅은 옆으로 기운 자기 몸에 힘을 주었는데, 그럴 때마다 걸음이 곧아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상체만 옆으로 기울었지, 반듯한 영웅의 걸음을 보면서 채언은 그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조금만 더 취한 사람처럼 걸어주면 안 돼요?”
조용한 부탁이 너무 간지러워서 영웅은 연기를 하지 않고 채언의 어깨 위로 무너져내렸다.
“읏!”
어깨에 짊어진 사람이 너무 무거운지 작게 신음하면서도 두 다리와 팔에 힘을 주고 걷는 채언이 귀여워서 취한 사람처럼 흐흐, 웃는 것 또한 어렵지 않았다.
두 사람의 손목에 걸린 쇼핑백이 비틀거리는 걸음에 맞춰 부스럭거리며 흔들렸다.
“후아!”
주차장에 다다라 채언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눈을 감은 채 채언의 머리에 볼을 비비고 있던 영웅은 그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자리가 절반도 차지 않은 주차장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벌써 다 왔어요?”
“벌써라고 하기에는, 하아, 좀 많이 걸은 것 같아요.”
혹시 아까 술을 마신 호프집 옆을 지나가다가 또 붙잡힐지 몰라 그 건물을 빙 돌아 걷기까지 했다. 완전히 영웅의 몸무게를 지탱하고 걸어온 것도 아닌데 채언은 뜨끈하게 열이 오를 정도로 더웠다. 만약 그가 정말로 취한 상태였다면 땀을 비 오듯 쏟아내며 걸었을 것 같았다.
지난번 회식 때 자신은 완전히 취했었는데, 그때 영웅이 정말 고생하며 자신을 주차장까지 데려왔을 것을 생각하니 미안하기도 했다.
“난 정말 눈만 몇 번 감았다 떴는데.”
채언은 아쉬운 표정으로 팔을 풀어내려는 영웅의 손목을 잡아 쥐었다.
“아직 차 앞은 아니잖아요.”
그 말에 초록색 눈동자가 곧바로 눈꺼풀에 가려졌다. 푸우, 소리와 함께 옅은 색의 머리카락이 채언의 목덜미를 간질였다. 보드라운 느낌에 채언은 소리 내지 않고 웃었다.
“저 예전 일이 하나 기억났어요.”
“어떤?”
채언의 말에 영웅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두 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면접 봤을 때요. 그때 카일라 님이 조건을 하나….”
그런데 이게 제대로 된 조건이 맞나? 작게 중얼거린 채언은 다시 말을 이었다.
“카일라 님이 조건을 하나 걸었거든요.”
“누나가 어떤 조건을 걸었는데요?”
지난번 회식 때 날아가 버린 기억이 조금 돌아왔나 했는데 면접 때의 일이라니, 호기심이 생긴 영웅은 몸을 세워 채언을 돌아보았다.
영웅은 채언이 입주 도우미로 들어왔을 당시의 상황을 잘 알지 못했다. 입주 도우미가 들어왔다는 자체를 한동안 모르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쌀 포대를 제가 직접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와야 했어요. 아, 그 전에 장을 봐서 왔거든요.”
“쌀 포대?”
영웅은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언의 손등을 만지작거리며 되물었다.
“쌀이 들어 있는 큰 주머니요. 봉투 같은 거.”
주차장 안에 들어와서 차 앞까지 걸어가는 것은 금방이었다.
“제 생각에는….”
우스운 농담을 하듯 예전 일을 떠올려 말하려던 것이었는데 생각해보니 그의 과거가 얽혀 있는 일이라 채언은 잠시 말하기를 멈췄다. 하지만 하지 못할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금방 다시 입을 열었다.
“카일라 님이 라이언을 걱정한 것 같아요. 혹시 라이언이 쓰러지면 제가 부축할 수 있나 보려고 한 것 같거든요. 확실한 건 아니지만.”
운전석 문에 몸을 기댄 채언은 영웅의 허리에 두 팔을 감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쌀 포대, 그거 많이 무거운 거예요?”
“음. 몇 키로였지? 무겁긴 했는데 어쨌든 들고 오긴 했어요. 마트에서부터 들고 온 건 아니었거든요. 그때 기사님이 차 태워주셔서.”
“그래요?”
영웅은 주차장 여기저기를 둘러본 다음 채언의 눈을 보곤 씨익 웃었다.
“이것보다 가벼웠죠?”
덥석 무게를 실어 안겨 오는 영웅의 몸에 눌린 채언은 그를 밀어내지 않고 꼭 껴안았다.
“아마도요.”
따끈한 채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영웅은 웃으며 자세를 추슬렀다.
“누나는 내가 6피트도 안 되는 줄 알걸요? 몸무게도 대충 짐작했을 거예요. 100파운드는 넘겼으려나 모르겠네.”
채언은 영웅의 등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6피트와 100파운드가 몇 센티미터와 몇 킬로그램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자신에게 안겨 있는 덩치에는 한참 못 미치는 단위일 것 같았다.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내가 누나에게 관심을 원하는 건 아니고요.”
“제 생각에는 그게 맞는 것 같은데요?”
채언이 능청스럽게 말을 받아쳤다. 그러자 영웅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난 지금 이렇게 날 안아주고 있는 사람의 관심이면 충분하거든요.”
“그런데 저도 카일라 님처럼 라이언 키랑 몸무게가 몇인지 몰라요.”
“그것만 말해주면 완벽한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거예요? 내일 당장 피트니스 센터에 가서 정확한 숫자를 알아 올게요.”
웃긴 농담도 아닌 말에 채언은 소리 내 웃었다. 영웅은 따끈한 목덜미에 얼굴을 기대고 있느라 채언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맑은 웃음소리와 함께 하얀 볼에 보조개가 폭 패었을 것이라 짐작했다.
언제 들어도 듣기 좋은 웃음소리였다. 그렇게 미소 짓던 영웅의 머릿속에 우는 채언을 달래주던 새벽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 주차장이었다.
“앞으로 채언 씨 일에 아무렇게나 참견해달라고 했죠?”
“네.”
“그럼 채언 씨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도 나한테 전부 말해줘요.”
“아무것도 아닌 일요?”
“채언 씨한테 아무것도 아닌 일이 나한테도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거든요.”
선선한 가을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를 흩트리고 지나갔다. 채언은 손을 들어 영웅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네. 그럴게요.”
“그럼 지금 당장 참견 하나 해도 돼요?”
“네.”
“내가 마법사는 아니지만,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게 하나 있어요.”
예언가를 말하고 싶은 건가? 채언은 그의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뭔데요?”
“우리는 다시 바다에 가게 될 거예요.”
옅은 색의 머리카락이 하얀 손가락 사이로 흩어졌다. 손목에 걸린 쇼핑백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채언은 잠시 눈을 감았다. 소라 껍데기를 귀에 대고 파도 소리를 듣는 상상을 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은 아닌데요. 저도 지금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
반짝 눈을 뜬 채언의 입에서 느릿하게 말이 흘러나왔다.
“뭔데요?”
조금 전 자신이 되물을 때 사용한 말을 똑같이 따라 하는 영웅의 목소리에 채언은 입꼬리를 올렸다. 살짝 긴장한 탓에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입이 마르는 게 느껴졌지만 조금 전 상상한 파도 소리 때문은 아니었다.
“오늘 데이트는 완벽했어요.”
“내 생각도 그래요.”
쪽, 가벼운 입맞춤 소리와 함께 영웅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의 눈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은 채언은 다시는 그를 먼저 놓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영웅의 넓은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완벽하게 기분 좋은 주말 저녁이었다.
2권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