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16/22)

3.

채언은 거실 카펫에 앉아 리모컨을 두드렸다. TV 화면에 잠시 로딩이 걸리더니 곧 드라마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주인공 제나와 친구 테일러가 전편에서 했던 말을 반복하며 복도를 걷고 있었다.

채언이 요즘 보고 있는 것은 미국 하이틴 드라마로, 미국에서는 이미 TV로 시즌 4까지 방영된 것이었다. 어플 메인 화면에 걸려 있던 포스터만 보고 영화인 줄 알았던 것이 드라마였다. 우연히 1편을 틀었다가 재미를 느껴 수어 수업에 가기 전에 두세 편 정도를 꼭 보고 있었다.

‘이번 프롬은 데니랑 같이 갈 거야.’

제나가 복도 끝에서 친구들과 대화하는 남자 주인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채언은 그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전편에 제나가 데니와 키스를 했으니 두 사람은 당연히 커플이 된 것이었다.

‘아마도.’

‘아마도? 왜 아마도라는 말이 붙는 건데?’

‘아무것도 아니야. 신경 쓰지 마. 우리는 거의 사귀는 사이거든.’

‘거의 사귀는 사이? 그게 무슨 말이야, 잠깐, 너 설마….’

테일러가 제나의 어깨를 돌려세웠다.

채언은 테일러처럼 눈을 깜빡거리며 품에 안은 쿠션을 꼭 쥐었다. 왜 ‘아마도’일까? 두 사람은 분명 사귀는 사이일 텐데?

‘아직 관계 정립 안 한 거야?’

‘음… 아직. 그런데 곧 할 거야! 아마도….’

화면 속 테일러가 어이없다는 듯 눈과 입을 크게 벌렸다. 그리고는 곧바로 미국인 특유의 커다란 제스처와 함께 고개를 젓더니 제나의 손을 끌고 캐비닛 옆으로 갔다.

‘그러니까 그게 왜 아직도야?’

‘우리 키스한 지도 얼마 안 됐잖아. 일주일 조금 넘었는데.’

‘일주일 조금? 세상에, 일주일이나! 그게 지금 무슨 말인지 알아?’

채언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안 좋은 상황인 게 분명했다. 제나의 시선이 바닥을 향하자 카메라 앵글도 바닥으로 뚝 떨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너희 두 사람은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는 거!’

테일러의 말에 채언은 눈썹을 찌푸렸다. 왜? 두 사람은 키스도 했는데!

‘우리 키스도 했어!’

제나의 반박에 채언이 말 잘했다는 듯 쿠션을 쥐었다.

‘키스는 아무하고나 할 수 있는 거야. 볼래?’

어떻게 키스를 아무하고나 하지? 채언이 의문을 가질 찰나 테일러는 복도를 지나가던 엑스트라의 가방끈을 잡아당기더니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엑스트라를 보며.

‘이제 됐어, 저리 가.’

하고는 등을 밀어버리는 것이었다.

‘봤지? 그러니까 너희 둘도 지금 아무 사이 아닌 거라고. 키스하고 나서 관계 정립을 하면 연인이 되지만, 그게 아니면 그냥 아무나 붙잡고 키스만 한 게 되지.’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채언은 아무도 없는 집 안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미국 사람들이 한국 사람보다 개방적이라지만, 그리고 지금 드라마에서 과장하는 면이 없지 않아 있겠지만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었다.

채언은 리모컨을 들어 TV를 꺼버렸다. 한참 까맣게 죽은 화면을 보고 있던 채언은 안고 있던 쿠션을 던져버리고 몸을 일으켰다. 심각한 표정으로 부엌으로 들어가 물을 한 잔 따라 마신 뒤에는 거실로 돌아와 카펫에 앉았다.

“설마….”

다시 쿠션을 안은 채언은 소파 다리에 등을 기대며 무릎을 세웠다. 까만 눈동자가 테이블 위에 올려둔 핸드폰을 향했다. 결국 손을 뻗어 핸드폰을 쥔 채언은 메시지 함에 들어갔다.

“지금, 전화 걸어도 돼요?”

토독 토독 화면을 두드려 영웅에게 메시지를 보내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여보세요.”

-나예요.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다정함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에 채언은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보통 하루의 첫 전화는 점심시간쯤 했는데 갑자기 이른 시간에 이러니 걱정을 한 듯했다.

“그냥 보고 싶어서요.”

-그랬어요? 마침 나도 보고 싶었는데.

“드라마 보는데… 앤디라는 사람이 나왔거든요. 그래서 생각이 나서요.”

수화기 너머에서 영웅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채언은 핸드폰을 꼭 붙잡고 그와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또 보고 싶으면 말해요.

“그럼 전화를 끊으면 안 되는데요?”

영웅은 잠시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다가 채언과 몇 마디를 더 주고받았다.

쪽, 통화의 끝인사는 영웅이 수화기 너머에서 보내는 뽀뽀 소리였다. 전화를 끊은 채언은 정말로 그의 입술이 닿은 것처럼 간지러운 귀를 매만졌다.

몇 번 영웅이 가족과 통화하는 것을 본 적 있는데 그가 가족들에게 끝인사로 키스를 날리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은 그와 매번 이렇게 달콤한 통화를 하는 데다 키스보다 더한 스킨십을 한 지 오래였다. 게다가 매일 같은 침대에서 잠들고 함께 일어나는 사이였다. 첫 데이트를 한 지가 벌써….

“어?”

그러니까 영웅과 한 첫 데이트는 분명….

채언은 눈을 깜빡거렸다. 잠시 잊고 있던 의문이었다. 그와의 첫 데이트는 언제로 생각해야 할까. 처음으로 함께 외식했던 날? 아니면 연분홍색 운동화를 사러 간 날? 그것도 아니면 함께 여행을 간 날? 언제라고 딱 말하기가 어려웠다.

자동차 극장에 처음 간 날에도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벌써 초가을이었다. 그동안 딱히 이런 문제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영웅과 잘 지내고 있었다. 사실 지금도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드라마에 나온 대사가 자꾸만 머릿속에 뱅뱅 맴돌았다.

‘봤지? 그러니까 너희 둘도 지금 아무 사이 아닌 거라고. 키스하고 나서 관계 정립을 하면 연인이 되지만, 그게 아니면 그냥 아무나 붙잡고 키스만 한 게 되지.’

“…아닌데.”

조용히 목소리를 내보았지만 동의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기억을 뒤적여보아도 영웅과 관계 정립을 한 순간을 찾을 수 없었다.

카펫에 앉아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채언은 쿠션을 안고 풀썩 옆으로 몸을 뉘었다. 자세를 바꿔도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정확한 말로 고백을 주고받은 게 아니면 정말 사귀는 사이가 아닌 걸까? 채언은 하루에 몇 번이나 자신의 몸 이곳저곳에 입을 맞춰주는 영웅의 모습을 떠올렸다. 가끔은 볼에 뽀뽀를 해주다 아예 볼을 빨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입 안에 담아버리는 그였다. 채언은 손을 들어 볼을 슥슥 문질렀다.

누군가에게 미움받으면 본능적으로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과의 자리가 불편해지듯이, 누군가에게 넘치는 사랑을 받으면 그 또한 자연스레 느끼게 된다는 것을 영웅을 통해서 새삼 느끼고 있었다. 언제나 애정이 담뿍한 눈으로 바라봐주는 그가 자신을 아무 관계도 아닌 사람으로 생각할 리 없었다. 물질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증거는 없었지만, 아무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또한 이렇게 확신하고 있을까? 채언의 생각이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영웅이 해주는 만큼 자신 또한 그에게 잘해주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 채언의 입꼬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쿠션 가죽을 트득, 트득 긁는 손가락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이런 생각 안 하고 싶어.”

미간을 좁힌 채언은 일부러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 머릿속이 부옇게 흐려지는 듯해 눈을 꽉 감았다 떴다.

불안함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고개를 든 채언은 거친 숨을 쉬며 천천히 거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같이 찍은 사진이 담긴 액자가 여기저기 놓여 있었고, 잘 자라고 있는 화초들과 여전히 거실 한쪽에 서 있는 트리가 보였다. 트리에는 전과 달리 여름 느낌이 나는 장식들이 걸려 있었다. 영웅이 호주에서 주문한 장식품들이었다.

크리스마스 리스처럼 장식된 튜브 모형과 서핑 보드를 탄 산타 모형 등을 보던 채언은 점차 안정적인 호흡을 되찾았다.

몸을 일으킨 채언은 핸드폰을 들고 침실로 걸어 들어갔다.

침대 위에 누운 채언은 영웅의 베개를 껴안은 뒤 폭신한 솜에 코를 묻고 눈을 감았다. 포근한 촉감에 좋아하는 향기가 더해지자 하향 곡선을 그리던 기분이 점차 나아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기분이 괜찮아진 채언은 뒹굴 몸을 뒤집어 천장을 바라보다가 옆에 놓아둔 핸드폰을 들었다. 농장 카메라와 연결된 어플을 켠 뒤 ‘채언이네’ 구역을 화면에 띄웠다. 쪽파와 상추의 모습을 확인하자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어제 보고 온 상태와 별다를 바 없었지만 그래서 안심이었다.

“부지런하시네.”

살짝 보이는 오른쪽 옆 라인에서는 한 남자가 목장갑을 낀 채 고구마 줄기를 살피고 있었다. 농장에서 가끔 마주치는 사람이었는데 오다가다 얼굴이 눈에 익었는지 먼저 인사를 해주어 몇 마디 나눠본 적 있었다.

그는 쉬는 날이 많은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근무 시간이 고정적인 사람들보다 유동적으로 농장에 들렀다 가곤 한다고 했다. 언젠가는 부인과 아이를 데리고 농장에 온 적도 있었다.

영웅의 베개를 옆에 낀 채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가며 핸드폰을 만지던 채언의 눈꺼풀이 슬슬 내려오기 시작했다. 작게 하품한 채언은 고개를 돌려 시계를 확인했다. 수어 수업에 가기 전까지 잠깐 눈을 붙여도 될 것 같았다. 평소 두세 편씩 보던 드라마를 한 편도 채 보지 않았으니 그만큼 시간이 남은 것이었다.

그냥 일어나서 몸을 움직일까 싶었지만, 혹시 몰랐다. 충분히 자두지 않고 수업에 가면 꾸벅꾸벅 졸게 될지도. 고민을 마친 채언은 오 분 간격으로 알람 두 개를 맞춰둔 뒤 영웅의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띵-.

푹 잠들어있던 채언은 옆에서 들린 소리에 천천히 정신이 들었다.

“으음.”

눈에 꿀이라도 바른 듯 잘 떠지지 않았다. 방금 들린 소리는 뭘까? 아, 아까 알람을 맞춰뒀는데 그건가? 5분 뒤에 한 번 더 울릴 테니까 5분만 더 눈 감고 있어야겠다. 비몽사몽 생각을 마친 채언은 눈 뜨기를 포기하고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띵-.

첫 번째 알람이 울린 지 1초도 안 지난 것 같은데 두 번째 알람이 울렸다. 채언은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생각해보니 알람 소리가 이상했다. ‘뚜루루루’ 자명종 소리가 아니라 ‘띵’이었다.

띵은 메시지 알림 소리인데? 그 순간 채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서둘러 핸드폰을 손에 쥐고 액정을 켜보았다. 메시지가 몇 개 와 있었는데, 지금은 메시지 내용을 확인하는 것보다 시간을 확인하는 것이 먼저였다.

“열시, 열 시 반…. 열 시 반? 왜 열 시 반이지?”

아홉 시 오십오 분과 열 시에 각각 알람을 맞춰 놨는데 핸드폰에 찍혀 있는 시간은 열 시 반이었다. 반쯤 멍한 상태로 혼란스러워하던 채언은 알람 어플에 들어가 보았다.

“아!”

오전이 아니라 오후에 알람이 설정되어 있었다. 채언은 허둥지둥 침대에서 내려와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오늘따라 먼 층에 멈춰 있던 엘리베이터 때문에 채언은 발을 동동 굴렀다. 하필 중간에 네 번이나 다른 층에 멈추기까지 했다.

1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빠져나온 채언은 핸드폰 시간을 몇 번이나 확인하며 뛰기 시작했다. 걸어서 십오 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뛰면 시간 절반은 절약할 수 있을 터였다.

울상으로 아파트 입구를 빠져나온 채언은 바로 옆 도로를 스쳐 지나가는 택시를 보고 멈칫했다. 이 정도 거리도 택시가 가주나? 이렇게 가까운 거리를 갈 때 택시를 타본 적이 없었다. 어떡하지. 주먹을 쥐었다 편 채언은 서둘러 아파트 입구 근처 택시 정류장으로 향했다.

택시 두 대가 서 있었다. 그중 앞에 있는 택시 조수석 문손잡이를 잡은 채언은 긴장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심호흡을 하곤 문을 열었다.

시트에 앉자 택시 기사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채언은 쭈뼛거리며 안전벨트를 맸다.

“어디로 갈까요?”

“…문화센터로 가주세요.”

“예에.”

곧바로 미터기를 누른 택시 기사는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몸이 뒤로 쏠리는 감각에 채언은 시트에 완전히 등을 기댔다. 거리가 너무 짧아 거절당하진 않을까 했는데 아무런 핀잔도 듣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그럴 일이 아니었나? 채언은 두 손을 마주 잡고 손가락을 주물렀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몸이 슬슬 풀리고 있었다.

차 안에 틀어진 라디오에서는 광고가 흘러나왔다. 채언은 요즘 한 건물 건너 하나씩 생기고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의 광고를 들으며 가쁜 숨을 정리했다.

‘네! 광고 듣고 오셨습니다. 2부도 힘차게 시작해볼까요? 2부 코너는 우리 청취자분들의 사연으로 이루어진….’

“여기 입구에 세워주면 되죠?”

“네?”

눈을 끔뻑인 채언은 차창 밖을 살펴보았다. 어느새 문화센터 정문 앞이었다.

“네. 여기서 내릴게요.”

카드를 꺼낸 채언은 요금을 계산한 뒤 안전벨트를 풀었다.

“감사합니다.”

“예에, 안녕히 가세요.”

택시는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코앞에서 다른 손님을 태우고 멀리 사라졌다. 채언은 택시가 사라진 도로를 바라보다가 어깨에 멘 가방끈을 쥐고 문화센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강의실 앞에서 잠시 발을 멈춘 채언은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켰다. 아까 온 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알림 소리를 두 번 들어 메시지도 두 개가 왔을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세 개나 와 있었다.

[라이언: 채언 씨 수업 잘 가고 있어요?]

[라이언: 아침에만 나 보고 싶었어요?ㅠㅠ 지금은?]

[라이언: 그럼 점심에는 내가 전화 할 거예요.]

연달아 온 메시지를 보며 채언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는 자신이 알려준 이모티콘을 항상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채언은 톡톡 액정 위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의도치 않게 영웅의 메시지를 무시한 것이 미안했다.

“저… 이제 수업 들어가요. 지각해서 택시 탔어요,”

글자를 치는 와중에도 강의실 안쪽에서 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이 다니지 않아 조용한 복도에서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또다시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놓은 채언은 핸드폰 화면을 보며 마저 글자를 눌렀다.

“보고 싶은데, 쉬는 시간에 또 메시지 보낼게요.”

영웅에게 메시지를 보낸 채언은 핸드폰을 무음 상태로 바꾸었다. 만약 이번에 늦었다고 혼나면 쉬는 시간에 그에게 메시지가 아닌 전화를 걸 생각이었다.

“후우, 후우.”

심호흡을 한 채언은 천천히 강의실 가까이 다가가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달칵, 문이 열리자 모두의 시선이 채언에게 집중됐다. 쏟아진 시선에 얼어붙은 채언은 죄송하다는 마음을 가득 담아 강사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강사는 채언 쪽으로 까딱 고개를 움직여 인사한 뒤 아무렇지 않게 강의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앉아 있는 사람들 또한 금방 교재와 강사의 손을 번갈아 보며 집중을 되찾았다.

조용히 문을 닫은 채언은 매번 앉는 자리로 시선을 옮겼다. 입꼬리를 올린 영진이 낮게 손을 들어 흔들고 있었다. 그의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가방끈을 매만진 채언은 최대한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영진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늦었네, 늦잠?”

가방을 책상 위에 내려놓자 영진이 속닥거렸다.

“응.”

채언은 이제는 꽤 자연스러워진 반말로 대답한 뒤 교재를 꺼냈다. 영진이 조용히 자신의 교재 페이지를 가리켜 진도 나간 부분을 알려주었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채언의 표정은 수업을 듣는 동안 서서히 풀렸다.

혼날 일이 아니었구나. 큰 잘못이 아니었어. 괜히 긴장했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뒤늦게 놓친 단어 몇 개를 다시 질문해야 했다.

“아침에, 드라마 보다가… 늦게 나왔어요.”

“응? 드라마?”

영웅에게 보낼 메시지를 쓰고 있던 채언은 옆에서 들린 영진의 목소리에 그를 돌아보았다.

“어?”

“방금 나한테 말한 거 아니야?”

“나 아무 말도 안 했는, 아, 메시지 보내느라.”

채언은 손에 쥔 핸드폰을 살짝 들어 보인 뒤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또 혼잣말을 한 모양이었다.

손글씨를 쓸 때든 핸드폰 키보드를 누를 때든 글을 쓸 때마다 어릴 적 버릇이 나왔다. 의식하지 못하고 혼잣말을 하는지라 가끔 이렇게 누군가가 말해 줘야 뒤늦게 자신이 또 그랬구나, 알아채곤 했다.

입술을 꼭 깨문 채언은 쓰고 있던 메시지를 마무리 지은 뒤 영진을 불렀다.

“형.”

“응?”

“혹시 나 수업 들을 때도 그래?”

“뭐가?”

“필기할 때 좀 시끄러운가 해서.”

“아니, 그렇진 않은데? 그냥 열심히 하는구나, 허허. 이런 생각이 드는 정도?”

“그렇구나.”

덤덤하게 대꾸하는 목소리와 달리 채언의 입꼬리는 조금 아래로 내려갔다. 한두 번이 아니라 필기할 때마다 매번 중얼거린 모양이었다.

“진짜 안 시끄러운데. 괜찮아. 근데 그건 여자친구?”

“응?”

시무룩하게 생각에 빠지던 채언은 영진의 턱짓에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빛이 들어온 화면에는 새로 온 메시지가 떠 있었다.

[라이언: 그 드라마 엄청 재미있나 보네요. 나중에 나도 봐야겠다 :^^]

오타가 난 건지 웃는 얼굴 옆에 쌍점이 붙어 있었다. 시무룩했던 채언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뭐든 그와 같이 보면 더 재미있을 게 분명했다.

함께 영화를 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영웅은 갑자기 집에 무언가를 사 들고 왔다. 빔프로젝터였다. 서재에 있던 침대를 치우고 리클라이너 소파를 들여놓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거실에 떡하니 커다란 TV가 있는데 빔프로젝터가 왜 필요한 걸까 생각했는데, TV로 영화를 보는 것과 빔으로 쏴서 보는 것은 느낌이 정말 달랐다.

이제 그 방에 주로 들어가는 것은 자신이었지만 가끔 영웅과 꼭 붙어 앉아 오래된 영화를 틀어놓고 보기도 했다.

“여자친구 맞구나?”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 영진이 의자를 흔들거리며 웃었다.

“으음.”

수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채언의 머릿속에 아침에 본 드라마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키스하고 나서 관계 정립을 하면 연인이 되지만, 그게 아니면 그냥 아무나 붙잡고 키스만 한 게 되지.’

미간을 좁힌 채언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책상 위를 톡톡 두드렸다.

“형.”

“어어?”

핸드폰을 보고 있던 영진이 눈을 들었다. 그의 왼쪽 손 네 번째 손가락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거 커플링 맞지?”

“어, 죽이지. 예쁘지?”

영진은 왼손을 내밀어 펼쳐 보였다.

“응, 예쁘다.”

“근데 반지는 갑자기 왜? 커플링 맞추게?”

“어?”

커플링 자체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다는 영진에게 애인이 있다면 상담 같은 걸 받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물어본 것이었다.

“사귄 지 얼마나 됐는데? 이제 반지 맞추는 거면 한 삼 개월 정도 됐나 보다?”

하지만 채언은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 입을 닫았다. 그러자 영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하, 혹시 썸이야?”

“썸?”

멍하니 되묻는 채언의 목소리를 들은 영진은 입꼬리를 올려 시원하게 웃었다.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어! 그때쯤엔 벌써 결혼하고 애 낳고 잘 사는 상상까지 하고 그러는 거지!”

“형, 나 물어볼 게 있는데.”

“어, 뭔데. 고백하는 방법? 아니면 뭐, 다음 약속 잡는 방법? 다 물어봐봐.”

“그게….”

침을 꿀꺽 삼킨 채언은 교재를 앞으로 가져와 펜을 들었다. 이런 걸 물어봐도 되려나. 잠시 고민하다가 주변 눈치를 본 다음 글자를 적을 준비를 했다. 쉬는 시간이라 다들 옆 사람과 대화를 하거나 할 일을 하고 있다지만, 자신의 질문은 이런 곳에서 공개적으로 말하기엔 민망한 것이었다.

“뭔데 이렇게 비밀스러워?”

가까이 와달라는 채언의 손짓에 영진은 허리를 숙여 책상 가까이 다가갔다. 마른 입술을 핥은 채언은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키스…했는데, 사귀자는 말 안 했으면 아직 안.”

데구루루, 탁!

책상 아래로 펜이 굴러떨어졌다. 손으로 입을 가린 채언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어, 우리 벌써 십 분 지났네요? 수업 다시 시작할게요.”

때마침 교탁 앞에 앉아 있던 강사가 시계를 보며 일어섰다. 여기저기서 교재를 끌어다 펼치는 소리가 들렸다. 채언은 자신의 교재 위에 적힌 찌그러진 ‘키스했는데’를 보다가 영진에게 물었다.

“나 또 소리 내서 말했지.”

“어? 어. 그런데 별로 안 컸어, 목소리가. 나만 들었을걸?”

그러면서 주변을 둘러본 영진이 크흠, 헛기침을 하곤 작게 말했다.

“근데 이거 우리 끝나고 다시 이야기하자.”

손바닥으로 볼을 문지르던 채언은 작게 한숨을 쉰 후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펜!”

“고마워, 형.”

영진이 주워준 펜을 받아든 채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아무래도 글을 쓸 때 말하는 버릇은 꼭 고쳐야 할 것 같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수고하셨습니다.”

시간을 꽉 채운 수업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분주히 짐 챙기는 소리가 들렸다. 채언도 말없이 교재를 가방에 챙겨 넣었다.

“가자.”

“응.”

나름대로 친해진 사람들끼리 문을 빠져나가며 강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채언도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 뒤 강의실을 나왔다. 어쩐지 오늘따라 수고했어요, 하고 답인사를 해주는 강사의 목소리가 자신만을 향해 들린 것 같았다.

“채언아.”

“응?”

영진은 턱짓으로 복도 끝에 있는 비상계단을 가리켰다.

“그래서 아까 하려던 이야기가 뭐야?”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가는 두 사람의 발소리가 통로를 울렸다. 제대로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채언의 볼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아까 강의실 안에서 실수한 것이 떠올라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입술을 핥은 채언은 후우, 심호흡한 뒤 입을 열었다.

“이런 거 물어볼 사람이 주변에 없어서. 형은 여자친구분이랑 오래 사귄 것 같고….”

그러자 영진의 입에서 하하, 쾌활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 맞아 맞아. 그리고 빙빙 돌리지 말고 그냥 말해도 돼.”

“그게.”

“응.”

“…스 했는데, 사귀자는 말이 없었으면 아무 사이도 아닌 거야?”

채언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영진은 아까 강의실에서 분명히 들었던 키스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앞말을 끼워 맞췄다.

“이런 고민을 하는 거 보면 넌 그 사람을 엄청나게 좋아하는데. 그렇지?”

“응. 엄청 좋아해.”

채언은 입고 있는 가디건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근데 왜 넌 사귀자는 말을 안 한 건데? 키스까지 해놓고.”

“나? 나는….”

터벅터벅 눈앞의 계단을 보고 내려가며 채언은 잠시 할 말을 골랐다.

“잘 몰랐어. 드라마 보면 고백하고 사귀는 사람들이 있고, 그냥 만나다가 자연스럽게 결혼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영진은 눈썹 사이를 좁히며 잠시 발을 멈췄다.

“드라마?”

아까도 드라마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혹시 연애를 드라마로 배웠나? 보통 드라마로 연애를 배우는 남자들은 외모가 좀 그렇다거나,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다거나, 하여튼 하자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옆에 서 있는 채언은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하자가 없었다. 자신과 키도 비슷했고, 녹색 가디건을 걸친 어깨도 넓은 편이었다.

“왜?”

돌아보는 얼굴은 지적할 곳이 하나도 없었다. 딱 봐도 잘생긴 얼굴이었다. 특히 눈이. 까만 눈동자가 렌즈를 낀 것처럼 크고 맑은 데다, 끝이 촉촉해 보이는 눈꼬리는 너무 처지지 않아 단정한 인상을 주었다. 아마 자신이 저 얼굴이었으면 체대가 아니라 예대 연기과를 갔을 것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대답한 영진은 혹시 채언이 외모가 아니라 성격에 문제가 있나 했다. 하지만 수어 수업을 들으면서 지내본 바로는 채언은 성격도 모나지 않고 나긋하니 괜찮았다. 오랜 시간을 알고 지낸 것은 아니었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들보다 인성이 훨씬 바른 것은 알 수 있었다.

“너 혹시 누구한테 고백해 본 적 없어?”

“응.”

“그래?”

영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백을 받아보기만 했대도 이상하지 않을 얼굴이니 오케이였다.

“고백받아서 사귄 건 몇 번인데?”

“없는데.”

“뭐?”

탕-. 영진의 운동화 밑창이 계단과 부딪히며 큰 소리가 났다.

“너, 네가 고백을 받은 적이 없어?”

“아니, 그건 아닌데.”

“잠깐만! 잠깐만!”

영진이 손을 들어 워워 소리를 내더니 채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정리해 보자. 그럼 고백은 받아봤는데, 그다음에 그걸 받아줘서 사귄 적이 없다고?”

“응.”

“한 번도?”

“응.”

“왜지?”

이마를 긁적인 영진은 채언을 위아래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혹시 문제가… 여기? 잠시 하반신 어딘가에 그의 시선이 머물렀다.

“나 옷 이상해? 아까 급하게 나오느라 막 걸치긴 했는데.”

애매한 위치에 머무는 시선을 알아챈 채언이 고개를 숙여 바지와 가디건을 더듬었다.

“그런데 이거 내가 좋아하는 옷인데.”

가디건 밑단을 만지던 채언의 눈꼬리가 내려갔다. 가을바람이 금방 쌀쌀해질 거라며 영웅이 선물해준 옷이었다. 같이 매장에 가서 골랐는데 보자마자 색깔이 예뻐서 마음에 쏙 들었다.

혹시 가디건과 함께 걸친 바지나 신발이 안 어울리는 건가? 그런데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전부 영웅이 사준 데다, 다 마음에 쏙 들어서 잘 입고 다니는 것들이었다. 급하게 입고 나오긴 했지만 익숙한 옷들로 금방 골라 입은 거라 평소 입는 것과 스타일이 다르지도 않았다.

“아냐, 옷 예뻐. 색깔, 뭐… 핏, 다 굿.”

엄지를 내민 영진은 이내 채언의 어깨 위로 팔을 둘렀다. 어깨동무를 한 두 사람은 다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냥 이상해서 그러지. 너 같은 애가 왜 연애를 안 했을까?”

너 같은 애. 어감이 좋지는 않았으나 채언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영진이 나쁜 의도로 그런 말을 한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터벅터벅 걸음 소리가 이어졌다.

“그동안 좀 바빠서 여유가 없었어.”

“왜? 너도 나처럼 시험 준비 같은 거 했어? 난 아직 시험 친 건 아니지만.”

“그건 아닌데. 집안 사정 같은 거라고 해야 하나.”

“으음. 그래, 그래. 연애 안 해본 게 죄도 아니고. 잠깐만, 근데 우리 이 얘기가 왜 나왔지?”

영진의 입에서 맹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백을 안 하면 아무 사이도 아닌 건지, 내가 물어봐서.”

“맞다, 그거구나! 그렇지 보통은 우리 만나보자, 사귀자, 말하고 나서 제대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지.”

영진의 눈동자가 옆으로 향했다. 손에 잡힌 채언의 어깨가 아래로 축 처지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 경우에는 말이야아. 보통 내 경우에는 그랬다고.”

비상계단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천천히 로비를 걸었다.

“매일 메시지하고, 매일 전화하고, 매일 얼굴 본다고?”

채언이 고개를 끄덕이자 영진은 손으로 코밑을 긁었다.

“그럼 내 생각에도 거의 사귀는 거 맞는데? 그렇게 연락한 게 하루 이틀이 아니라며.”

“그럼 이대로 괜찮을까?”

“흐음. 그거 내가 이따 여자친구 만나서 한번 물어봐 줄까? 여자 마음은 또 그게 아닐지도 모르잖아.”

“정말? 그래도 돼?”

영웅이 여자는 아니었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의견을 더해준다면 나쁠 것 없었다.

“응, 뭐 어려운 거라고. 그리고 나 오늘도 가게로 가거든.”

매일 수업이 끝나면 바쁘게 버스를 타고 사라지던 그는 브런치 가게를 운영하는 여자친구를 도와주러 가는 것이라고 했다. 얼마 전에 알바생 한 명이 그만둬 이 시간쯤이면 꽤 바쁘다고 했다.

그런데 너는 매일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냐는 영진의 물음에 채언은 점심을 먹고 농장에 가야 한다고 했다. 상추와 쪽파는 매일 돌봐줘야 하는 까다로운 종은 아니었지만 자주 가서 둘러보고 있었다.

“고마워, 형. 실례가 아니면 부탁할게.”

“그럼 이따가, 맞다, 네 번호 좀 알려줘.”

“번호? 핸드폰 번호?”

“어. 너 또 지각하거나 못 나올 일 있으면 미리 말해줄래? 혼자 앉으면 쓸쓸하단 말이야. 나 거기서 친한 사람 너밖에 없잖아. 흑흑, 너 못 나온다고 하는 날엔 마음의 준비 해놓고 있을게.”

영진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채언은 운동화 안쪽 발가락에 힘을 주었다. 영웅이 아닌 다른 사람의 핸드폰을 만져보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몰랐다.

“심채언, 공일공….”

채언은 톡톡 액정을 두드려 자신의 번호를 적은 다음 그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지금 전화 누를 테니까 내 번호 저장하고.”

채언은 자신의 핸드폰을 들어 무음 모드를 해제했다. 그러자 곧바로 벨 소리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가 뜬 화면을 영진에게 보여주자 그가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장해. 그럼 내일 보자. 아, 이따 물어보고 연락 줄게.”

영진이 채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잘 가.”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 영진의 뒷모습을 보던 채언은 가방끈을 매만지다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건영의 새 핸드폰 번호를 저장한 뒤로 오랜만에 새로운 번호를 전화번호부에 추가하는 것이었다. 기분이 좋았다.

카페 야외 벤치에 앉은 영웅은 샌드위치와 오렌지 주스를 테이블 위에 올려둔 뒤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Chocolate♥’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채언 씨.”

-라이언!

채언의 목소리에 들뜬 기운이 섞여 있었다. 이름만 불렸을 뿐인데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영웅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무슨 좋은 일 있었어요? 목소리가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아무 일도 없는데. 저 집에 가는 중이에요.

“집에 가는 게 좋은 거 아니에요?”

-맞아요, 집에 가는 거 좋아요.

하하. 영웅의 입에서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점심은 뭐 먹을 거예요?”

-점심은… 으음, 샌드위치요. 엄청나게 연한 커피랑 먹어보려고요.

테이블에 팔을 올린 뒤 손에 턱을 괸 영웅은 오렌지 주스 옆, 비닐에 싸인 샌드위치를 만지작거렸다.

채언은 요즘 자신이 커피를 마실 때면 몇 모금씩 맛을 보고는 했다. 진한 커피를 입에 머금을 때마다 미간을 좁히면서도 점점 적응이 된 모양이었다. 큰 컵에 방금 내린 커피를 조금 따라주면 거기에 물을 많이 따라서 조금 마시기도 했다. 약을 먹을 때 커피를 마시는 것은 좋지 않았지만 걱정될 정도로 많은 양을 섭취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렌지 주스와 샌드위치. 원래 취향대로라면 이 테이블에 채언이 앉아 있어야 할 터였다. 자신은 오렌지 주스를 아침에 가끔 따라 마시는 정도였지만, 집 근처 카페에 갈 때마다 채언이 오렌지 주스를 마시는 것을 보다 보니 이렇게 당기는 날이 있었다.

“우리 오늘 똑같네요. 나도 점심 샌드위치인데.”

-혹시 감자 칩 넣은 건 아니죠?

장난기가 묻어나는 목소리에 영웅은 입술을 활짝 벌리며 웃었다.

지난번 샌드위치를 만들기로 했던 날, 마트에 가서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사실 자신이 만드는 샌드위치는 아주 허술하다고. 무슨 재료를 넣어 먹느냐는 물음에 옆에 있던 소금 맛 감자 칩을 매대에서 꺼내 흔들자 장난치지 말라는 듯 눈을 깜빡거리던 채언의 얼굴이 생생했다.

결국 그날은 채언의 주도로 이것저것 재료를 사서 손가락 세 마디가 넘는 두께의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다.

“감자 칩을 몇 개 넣었어도 맛있을 텐데, 아쉽게도 아니에요. 이건 햄이랑 풀로 속이 가득해요.”

-그럼 감자 칩은 제가 넣어 먹을게요.

“엇, 안 돼! 그런 거 먹지 말아요.”

당황한 영웅이 몸을 움직이자 테이블이 덜컹거렸다.

-네. 그럼 안 먹을게요.

덤덤한 대답이었지만 영웅은 채언의 목소리에 실린 명백한 장난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한쪽 눈썹을 올린 그는 의자 등받이에 편히 몸을 기댔다. 컵 안의 오렌지 주스가 흔들흔들 움직이고 있었다.

“내 샌드위치 사진 찍어서 보내줄 테니까, 채언 씨도 이따 사진 보내줘요.”

-네. 그런데 까먹을 수도 있어요.

조곤조곤한 대답에 영웅은 눈을 꽉 감고 아랫입술을 물었다.

채언은 요즘 이렇게 귀엽게 행동하는 일이 늘었다. 조금 더 솔직해졌고, 묘하게 적극적이면서, 이상한 방식으로 사람을 애타게 했다.

선물을 해주면 부끄러워하면서도 전처럼 무작정 거절하지는 않았다. 가끔 같이 쇼핑을 하러 가면 먼저 물건을 고르기도 했는데, 빤히 눈을 마주쳐오다가 초록색 계열의 것을 잡으면 인상이 써질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채언 본인은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듯했지만 그래서 더 가슴이 지끈거렸다.

영웅은 입꼬리가 올라간 채로 빨대를 물었다. 새콤달콤한 오렌지 주스가 입 안 가득 머금어졌다.

채언은 영웅이 들고 있는 핸드폰 화면 속 영화 포스터 중 하나를 가리켰다.

“이거 TV에서 광고 나오는 거 봤어요.”

소파에 앉은 두 사람은 주말에 볼 영화를 검색하는 중이었다. 이번에는 자동차 극장이 아니라 일반 영화관에 가보기로 했다.

“러빙러빙? 재미있을 것 같아요?”

“개봉한 지 얼마 안 됐는데 관객 수가 엄청 많다고 하더라고요. 사람들이 많이 보는 거니까 재미있지 않을까요?”

“사람이 많으면 지금처럼 서로 꼭 껴안고 있을 수는 없겠지만, 손 정도는 잡을 수 있겠죠? 내 손잡아 줄 거죠?”

채언은 허리를 세게 안아 오는 영웅을 보며 웃었다.

“당연하죠. 그럼 이거랑 이거 후기 좀 더 찾아보고 나서 예매할까요?”

“그래요. 우리.”

그때 채언이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누구지? 생각하던 채언은 영웅에게 기대고 있던 몸을 세운 뒤 서둘러 핸드폰 액정을 확인해보았다. 아까 점심을 먹고 나서부터 내내 영진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사장님 전화예요. 잠시만요.”

그런데 전화를 걸어온 것은 영진이 아니었다.

자신은 신경 쓰지 말고 전화 통화를 하라며 고개를 끄덕인 영웅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TV 리모컨을 손에 쥐었다. 반대 손은 여전히 채언의 허리를 둘러 안은 채였다.

“여보세요. 사장님.”

영웅은 채언의 통화에 방해가 되지 않게 TV 소리를 두 칸 줄인 뒤 채널을 돌려보기 시작했다.

-채언아, 바빠?

“아뇨. 지금 괜찮아요. 잘 지내셨죠? 별일 없으세요?”

-응, 그렇지. 여긴 별일 없어. 저녁은 먹었어?

“네, 저는 먹었어요. 사장님도 저녁 드셨어요?”

-나도 아까 먹었지. 지금 배불러서 잠깐 마당 좀 걷고 있는데 채언이 생각나서. 상추는 어때? 잘 자라?

채언은 오늘 가보지 못한 농장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자라고 있어요.”

혹시라도 잡초를 뽑다 벨 소리를 놓칠까 봐 집에 있기로 했던 것이었다. 어제 상추와 쪽파에 별문제가 없었으니 오늘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리고 영진에게 어떤 말을 들을지 몰라 기분을 예측할 수 없으니 집에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영웅과 관련된 일에는 도저히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갈 때마다 자라 있는 게 보여서 좀 신기해요.”

가을이면 상추와 파를 심기에 좋다고 추천해준 것이 혜옥이었다. 작은 땅에 모종을 심는 날에는 직접 농장에 와서 도와주기까지 했다. 채언은 모종 심던 날을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그날 아침 채언은 영웅의 차를 타고 농장에 가서, 그 길로 출근한 영웅 대신 혜옥의 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예약해둔 곳에서 점심을 먹고 영웅이 찾아준 디저트 전문점에도 다녀왔는데, 그날 너무너무 재밌고 좋았다는 혜옥의 말에 채언은 퇴근하고 돌아온 영웅의 허리에 매달려 하루 종일 있었던 일을 조잘거렸었다. 그 뒤로도 며칠 동안이나 기분이 좋았다.

-쪽파도 잘 자라고?

“네. 금방 수확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마트에서 파는 것처럼 빽빽하게 자라는 건 아니지만, 나름 괜찮거든요.”

-그러면 추석쯤에는 상추랑 쪽파 다 자라서 뽑아먹을 수 있겠네?

혜옥의 말에 채언은 머릿속에 달력을 만들어 날짜를 세어보았다.

“네. 그때쯤이면 진짜 많이 자라 있을 거예요. 사장님 말씀대로 빠르면 그때, 아니면 그다음 주쯤에는 정말로 수확할 수 있을지 몰라요. 날이 계속 좋으면 그전에도요.”

채언은 자신의 허리를 안은 영웅의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소파 아래 발을 까딱거렸다.

-건영이 말로는 요즘에 무슨 수업 듣는다던데. 그건 잘 듣고 있어?

건영은 여전히 혜옥과 충북 부부의 집에서 지내는 중이었다. 여름 때처럼 대동에 자주 가지는 못해도 채언은 건영과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영웅과 메시지나 전화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듯 건영과도 별 뜻 없는 장난 메시지를 나누었다. 요즘 수어 수업을 듣고 있다고 말했었는데 그걸 혜옥에게 전달해준 모양이었다.

“네. 재미있어요. 건영이는 일 열심히 하고 있죠?”

-그럼, 요즘에는 잠깐씩 가게를 맡겨두고 있는데, 얘가 손님들을 어떻게 구워삶아 가지고 만 원어치 팔 거를 이삼만 원씩 팔아치운다니까? 아주 웃겨. 그래서 아줌마도 마음 놓고 조금 놀다 오고 그래.

수화기 너머에서 혜옥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채언도 따라 웃었다. 가끔 건영이 포도가 아닌 다른 과일 옆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왔는데 이제는 아예 가게에서 장사를 돕고 있는 모양이었다.

-채언아, 그런데 그 수업은 빨간 날에도 듣니?

“아뇨, 평일에만 가고 공휴일에는 수업도 쉬어요.”

-그래? 그럼 추석 있는 주에 잠깐 대동 내려올 수 있어?

“그때 무슨 일 있으세요?”

-추석 연휴가 대목이라 우리도 많이 바쁘잖아. 건영이가 있어서 숨 좀 돌릴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한 명 더 와서 도와주면 좋을 것 같아서. 당일에는 우리도 쉴 거야. 전날 하루 와서 도와주고 자고 가면 어때? 아줌마가 알바비도 챙겨주고, 송편도 만들어줄게.

“아….”

핸드폰을 귀에 댄 채언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입술을 잘근거렸다.

자신과 건영이 없어도 아마 생글 과일가게는 명절 대목을 능숙하게 보낼 것이다. 지난 시간 동안 부부는 그렇게 지내왔을 테니까. 혜옥은 추석을 혼자 보낼 자신이 걱정되어 이렇게 전화를 걸어 온 것 같았다. 혹여 민망해할까 봐 일을 도와달라는 다정한 핑계를 대고서.

-응? 그때 와서 도와주면 아줌마가 나중에 상추 따는 것도 도와줄게. 어때? 그때 올 수 있어?

채언은 옆에 앉아 조용히 TV를 보고 있는 영웅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혹시 그도 가족들과 함께 추석을 챙기려나? 하지만 미국에 갈 거라는 말은 없었는데.

만약 자신이 대동에 간다면 영웅은 이 집에 혼자 남아 있어야 할 것이었다. 그가 자신 때문에 포도 농장에 자주 가기는 했지만, 상사라고 얼버무려 소개해둔 사람과 명절까지 함께하는 건 조금 애매했다.

시선을 느낀 영웅이 채언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무슨 일이냐고 묻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채언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전날 도와드리러 갈 수 있을 것 같긴 한데요. 자고 오는 건… 물어봐야 할 사람이 있어서요.”

-그때 약속 있어? 쉬는 날이라 친구랑 놀기로 했구나.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언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게, 사장님도 아는 사람이요. 저 대동에 있을 때 매번 데리러 오던….”

작은 목소리를 들었는지 영웅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나? 나요? 하고 입 모양으로 말을 걸어왔다. 채언은 살짝 눈을 접어 웃으며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영웅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TV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 아아. 채언이 애이이, 아니, 같이 일한다고 했던 그 사람? 앤드류?

“네. 기억하시죠?”

-기억하지. 그러고 보니 채언이 애, 아니 앤드류는 외국인이라 그날 어디 안 가나? 부모님 중에 한 분이 한국 분이라 그러지 않았어?

“잘 모르겠어요. 이따가 한번 물어보려고요.”

-그래? 지금 옆에 없어?

“있어요. 옆에서 TV 보는 중이에요.”

영웅의 고개가 채언 쪽으로 휙 돌아갔다. 그와 눈이 마주친 채언은 서둘러 다른 쪽으로 시선을 피했다.

-잘됐네. 그럼 한번 물어봐, 채언아. 앤드류도 추석 때 어디 안 가고 심심하면 송편 만들러 놀러 오라고.

“같이요? 그래도 돼요?”

-당연하지! 그래, 채언아, 앤드류 술은 좀 하니?

갑작스러운 질문에 채언은 맥주 캔을 비우던 영웅의 모습을 떠올렸다.

“못 마시지는 않는 것 같아요.”

-잘됐네. 둘이 같이 오면 아줌마가 특별히 인삼주랑 송이주도 오픈한다! 어쨌든 물어보고 알려줘. 알겠지?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해줄 테니까. 응? 채언아.

“네. 그럼 제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네, 네 들어가세요. 같은 말을 몇 번 반복하던 채언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뒤 괜히 귓바퀴를 손가락으로 몇 번 문질렀다.

“포도 사장님이랑 내 얘기 했어요?”

영웅이 채언에게 몸을 붙여오며 물었다.

“네.”

“갑자기 왜요? 무슨 일 있어요?”

핸드폰을 소파 위에 내려놓은 채언은 몸을 틀어 영웅의 볼을 두 손으로 감싸 잡았다.

“혹시 추석 때 어디 갈 거예요? 추석이 뭔지 알죠?”

영웅이 고개를 주억이며 물었다.

“그런데 그게 언젠데요?”

“올해는 10월이요. 9월 마지막 주말에서 첫째 주로 넘어갈 때.”

영웅은 잠시 자신에게 어떤 일정이 있나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채언에게 미리 말하지 않은 일정이 있을 리 없었다.

“나 그때 아무 데도 안 가는데요.”

“미국에 있는 가족들한테 인사하러 안 가도 돼요?”

영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지 않아 가족들에게 연락이 오긴 했었다. 하지만 그사이 진원이 무슨 조치를 취해둔 것인지 누나의 염려와 달리 부모님은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겨울에 미국에 가야 할 일도 있으니 나중에 들르겠다고 말해둔 터였다.

하지만 그 일정도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만약 채언이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면 자신도 올해는 계속 한국에 있을 예정이었다.

“안 가도 돼요. 왜요?”

“사장님이 추석 때 심심하면 같이 놀러 오라고 하셨어요.”

“나도 같이?”

손바닥으로 영웅의 볼을 문질러준 채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그런데에? 뭐가 마음에 걸려요?”

영웅의 팔이 채언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손을 내려 그의 목에 팔을 감은 채언은 단단한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여름에도 저 때문에 고생하셨는데, 이번에도 놀러 오라고는 하셨지만, 괜히 두 분께 신경 쓸 거리만 늘리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명절이라고 음식도 더 많이 하실 것 같고.”

채언의 말을 들은 영웅은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그럼 그때는 채언 씨가 대동에 가지 말고 두 분을 여기로 초대하는 건 어때요? 동생도 함께.”

“초대요?”

채언은 고개를 들어 영웅과 눈을 마주했다.

“여기, 집에요? 아니면 서울에?”

“우리 집에.”

“그래도 돼요?”

“왜 안 돼요?”

멀뚱멀뚱 눈을 끔뻑인 영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여기로 손님을 불러도 불편하지 않겠어요?”

“예전에 말했던 것 같은데, 난 채언 씨가 집에 친구를 데려와도 환영이에요. 채언 씨한테 소중한 분들이라면 더더욱. 음, 그런데 오히려 그분들이 여기 오는 게 불편하시다면 호텔을 잡아드리고 저녁 식사만 함께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그렇게 말해준다면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어,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그때는 연휴라서 호텔에 방이 없을 거예요.”

그 말에 영웅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연휴에는 평소보다 비싸지는 호텔 방에도 사람들은 기꺼이 돈을 지불하곤 했다. 하지만 원래 비싼 방이 더더욱 비싸진다면 어쩔 수 없이 고민하기 마련이었다. 운 좋게도 자신에게 그 정도는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까 남은 방이 있을 거예요.”

채언의 눈에는 영웅의 모습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복잡하게 생각하는 문제에 간단히 해답을 던져주는 사람이었다.

“그럼 그때 서울에 오시는 건 어떤지 한번 여쭤볼게요.”

영웅에게 기대고 있던 몸을 세운 채언은 핸드폰을 들었다.

“사장님… 추석 때, 서울에….”

그때였다. 글자를 치고 있던 메시지 창이 사라지고, 벨 소리와 함께 ‘영진이 형’의 핸드폰 번호가 액정에 나타났다.

맞다! 이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핸드폰을 손에 쥔 채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영웅의 옆에서 연애 관련 조언을 듣는 것은 조금 그랬다.

전화가 끊어질까 봐 마음이 급해진 채언은 망설이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영웅의 시선이 채언을 향했다.

“이번에도 사장님이에요?”

“그게, 이건.”

계속해서 벨 소리가 울리는 핸드폰을 등 뒤로 숨긴 채언은 다급히 말을 꺼냈다.

“저는 저쪽에 가서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자꾸 TV 보는 데 방해가 되잖아요.”

“방해 아닌데. 어차피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보고 있.”

“전화 받고 올게요! TV 보세요.”

발코니로 뛰어가는 채언의 뒷모습에 영웅의 한쪽 눈썹이 삐죽 위로 올라갔다.

“여보세요! 형!”

-여보세요?

“응!”

-나는 너 지금 전화 못 받는 줄 알고 막 끊으려고 했는데. 통화 괜찮아?

“응. 괜찮아! 벨 소리가 작아서 핸드폰을 늦게 찾았어. 옆에 던져뒀다가.”

-그래? 나는 지금까지 가게가 바빠서 물어보는 게 좀 늦었어. 기다렸지? 미안.

“아냐, 그런데 이 시간까지 가게 일 도와주는 거야?”

이미 어둑해진 시각이었다. 브런치 가게에서 저녁에 파는 메뉴는 뭐라고 부를까? 디너? 채언은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며 창밖을 보았다.

-응, 우리 같이 퇴근하거든. 거의 마무리돼서 잠깐 밖에 나왔어.

“그렇구나. 그래서… 형, 그분은 어떻게 생각하신대?”

채언은 핸드폰을 두 손으로 감싸 쥔 뒤 닫힌 발코니 문을 돌아보았다. 꼭 닫혀 있으니 큰 목소리로 통화하지 않으면 영웅이 있는 거실까지는 잘 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도 목소리를 낮출 필요가 있었다.

-엄청 단호하더라고.

긴장한 채언의 목울대가 꼴깍 움직였다. 얼굴도, 나이도, 이름도 모르는 영진의 여자친구가 해준 대답이 영웅의 생각이 되는 것도 아닌데 잔뜩 긴장이 되었다.

-확실히 고백받고 사귀는 거 아니면 싫대. 그럼 상대가 다른 사람이랑 바람피워도, 우리 사귀자는 말 없었잖아, 하면 끝이라고.

채언의 입술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당황한 얼굴에는 충격이 어려 있었다.

-그래서 내가 막 얘기해봤지. 우리가 만약 몇 년 동안 알고 지내다가….

수화기 너머에서 영진이 뭐라 뭐라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채언은 그의 목소리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생각이 급격히 널을 뛰었다. 만약 영웅이 다른 사람을 만난다면? 그의 다정한 시선이 다른 사람을 향한다면? 언제나 따듯하게 안아주는 품과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다른 사람의 것이 된다면…. 채언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법적으로 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도 없고, 언제까지나 당신은 내 것이라고 구두 계약을 진행한 것도 아니니 만약 다른 사람이 나타난다면 영웅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또 생각해 보니까 다 맞는 말이잖아? 나도 내 여친한테 고백해서 사귀고 있는 거고. 보통 썸 타다 멀어지는 건 헤어졌다고 치지도 않으니까. 그냥 그러다 마는 거지.

채언은 멍하니 눈을 끔뻑이며 영진의 말을 읊조렸다. 그냥 그러다 마는 거….

-여보세요? 뭐라고?

“아, 응. 아냐, 그냥 듣고 있었어.”

말하는 채언의 입꼬리는 잔뜩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어차피 너네 거의 사귀는 분위기라며, 서로 좋아하는 거 빼박이면 그냥 고백해. 커플링 준비해서 딱! 사귀자마자 반지 끼는 건 조금 이르긴 하지만, 확실하잖아? 누가 옆에서 치근덕거릴 때 당당하게 손에 낀 반지 내밀면 그걸로 상황 종료거든.

“나는 라이언 반지 사이즈도 모르는걸….”

시무룩하게 대답한 채언은 자신의 왼쪽 손을 펼쳐 보았다. 그의 반지 사이즈는 물론 자신의 반지 사이즈도 알지 못했다.

-나이연? 오… 그게 너랑 썸 타는 분 이름이야?

“어? 으응.”

-반지 사이즈 한번 슬쩍 물어봐. 아니다. 실 같은 걸 준비해서 살짝 둘러보게 해봐. 아, 아니다. 이런 건 몰래 해야 하는 건데. 그냥 주변 사람한테 말해서 반지 사이즈 좀 떠보라고 해봐. 사이 겹치는 지인 있으면.

채언은 슬리퍼 신은 발끝으로 바닥을 긁었다. 워낙 인간관계가 좁은지라 영웅의 반지 사이즈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해볼 사람이 없었다. 송 교수에게 부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물어봐 줘서 고마워. 형.”

-야, 너 목소리가 왜 그래? 벌써부터 상심하지 말고 고백 계획 제대로 세워봐. 알겠지? 계획 세우다가 막히면 나한테 물어봐. 내가 이벤트깨나 해봐서 이런 거 또 잘 알거든.

“…아… 진짜?”

-어. 내가 말이야, 작년 11월 11일에….

영진은 그동안 여자친구에게 어떤 이벤트를 해주었는지 줄줄 말하다가 20대 초반과 중후반에 어울리는 가격대의 반지 브랜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브랜드 이름값을 못 하는 곳도 꽤 있다며 금은방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아… 정말?”

-야 채언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네가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은반지는 아니다, 진짜.

이미 관계 정립에 대한 복잡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찬 채언은 영진의 말에 간간이 대답해주며 창밖을 보고 서 있었다.

-내 말 알았지?

“어?”

마침표를 찍는 듯한 영진의 목소리에 초점이 흐려졌던 채언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뭘 알겠냐고 한 건지 모르겠으나 일단 대답하기로 했다.

“응. 일단 생각해볼게.”

-그래, 그럼 수업 때 보자.

“고마워, 형. 그리고 여자친구분께도 조언 감사하다고 말씀드려줘. 안녕.”

핸드폰을 쥔 손을 내린 채언은 창밖을 보며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단 영웅과 제대로 관계 정립을 해야 할 듯했다. 그러려면 멋진 고백 계획을 세우는 게 우선이고. 누군가 그에게 특별한 호감을 느끼고 다가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싫으니 고백과 함께 예쁜 반지도 끼워줘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영진은 제 나이 정도면 100만 원 안쪽으로 커플링을 맞추는 게 적당하다고 말해주었지만 채언이 생각하기에 100만 원은 너무 적은 것 같았다. 어차피 나눠 낄 반지니 한 개, 한 개 나눠 보면 50만 원밖에 안 되는데 그 정도면 영웅의 구두 한 켤레 가격 정도밖에 안 될 것이었다. 어쩌면 구두 가격보다 더 적을지도 몰랐다.

지금 통장에 돈이 얼마나 있지? 채언은 핸드폰을 들어 은행 어플을 켰다. 이제는 다달이 월급을 받고 있지도 않으니 오랜만에 통장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화면에 뜬 금액은 3천만 원보다 2천만 원에 더 가까웠다. 여름에 스위스행 비행기 티켓을 끊는 데 이미 돈을 사용해 버렸기 때문이다.

채언은 소파에 앉아 있을 때보다 체온이 식은 손가락으로 목덜미를 매만졌다. 비싼 값에 예매한 비행기 티켓을 날렸지만 아깝지 않았다. 지금 영웅의 곁에 있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때는 그와 함께 가는 모든 길을 선택지에서 지워버렸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극단적이었을까 싶었다. 우울증 약을 먹는다고 해서 마음속에 남은 어두운 찌꺼기가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이 아플 때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다.

전에는 마음속에 기분이 한도 끝도 없이 아래로 미끄러지는 구불구불한 미끄럼틀이 있었다면 이제는 그 중간을 뚝 잘라 막아버린 느낌이었다. 여전히 기분을 조절하는 것은 힘들었지만, 기분이 바닥으로 떨어져도 손을 뻗으면 다시 위로 올라올 정도의 깊이였다. 가끔 더 깊게 떨어지려 할 때면 어떻게 알았는지 곧바로 영웅이 손을 잡아끌어 올려 주었다.

손바닥으로 싸한 가슴 위를 문지른 채언은 미련 없이 뒤돌아 자신의 발로 발코니를 걸어 나왔다. 집 안의 훈기가 온몸을 감싸왔다.

거실 소파에는 영웅이 멀뚱멀뚱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한쪽 다리를 접어 소파 위에 올리고 팔걸이에 팔꿈치를 기대 턱을 괸 그는 TV 프로그램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채언은 일부러 슥슥 슬리퍼 소리를 내며 걸었다. 발소리를 들었는지 초록빛 시선이 채언에게 향했다.

“통화를 꽤 길게 했네요.”

소파 위에 올렸던 다리를 내린 영웅은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채언을 올려다보았다.

“TV에서 재미있는 거 안 했어요?”

“응, 별로.”

영웅의 다리 사이에 앉은 채언은 슬리퍼를 벗고 소파 위에 두 다리를 올렸다. 단단한 품에 몸을 기대자 영웅의 팔이 자연스럽게 채언을 감싸 안았다.

“밖에 추웠어요?”

밤이 되면 쌀쌀했지만, 아직은 발코니에 나가도 춥지 않았다. 하지만 채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요.”

영웅의 채언의 팔을 슥슥 쓸어주며 물었다.

“누구랑 전화했어요?”

눈을 굴린 채언은 이내 순순히 털어놓았다.

“영진이 형이요.”

영웅은 그 말에 이상하게 안심을 했다. 전에 채언이 말해준 적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수어 수업에서 송 교수 같은 사람을 알게 됐다고 했다. 송 교수 같은 사람이지만 교수는 아니고 잠시 쉬면서 다른 일을 준비 중이라고 했는데, 그 사람의 직업이 뭐든, 덕분에 채언은 수업 가는 것에 더 재미를 붙인 듯했다.

“아, 그 사람.”

영웅은 송 교수와 비슷한 나이대의 남성을 상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채언이 그를 형이라고 부르길래 왜인지 모르게 탐탁잖은 마음이 들었는데, 그는 지금 일을 쉬는 중이라고 했으니 교수님처럼 직업으로 부르기 적절하지 않아 나름의 적당한 호칭을 사용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게다가 채언이 직접 영진이 형은 송 교수님 같은 사람이라고 했으니까.

채언은 농장에서도 옆 라인에 밭을 일구는 젊은 부부와 가끔 말을 나눈다고 했다. 좁았던 채언의 인간관계가 조금씩 넓어져 가는 것은 나쁜 현상이 아니었다. 천천히 사람들과 관계를 이룬다는 것은 삶을 놓으려 했던 채언이 앞으로의 길을 스스로 엮어 만들어가기로 했다는 것과 같았으니까.

“무슨 일로 전화 걸었대요?”

“어…, 제가 모르는 게 있어서 물어봤어요. 그거 알려준다고 해서요.”

채언은 영웅의 옷을 만지작거렸다. 모르는 걸 물어본 건 맞으니까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요? 정말 열심히 하네.”

영웅은 채언의 머리에 턱을 대고 살살 문질렀다. 평소에는 어떤 연락이 와도 옆에서 전화를 받고 답장을 보내던 사람이 곁을 피해 의아했는데, 연달아 통화를 하게 되니 정말로 TV를 보는 데 방해가 될까 봐 자리를 비켜준 듯했다.

가끔 자신도 채언이 드라마를 보거나 책을 읽고 있을 때 집중한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발코니로 가서 통화를 했으니까. 다시 생각해보니 의아해할 일이 아니었다.

다정한 배려에 영웅이 흡족한 미소를 지을 때였다. 또다시 채언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오늘 핸드폰이 바쁘네요?”

“그러게요. 또 누구지.”

혹시나 영진이 다시 전화를 걸었을까 봐 채언은 조심히 핸드폰을 들어 액정을 확인했다.

“이번에는 건영이네요.”

이름을 확인한 채언은 영웅에게 핸드폰 화면을 보여준 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건영아.”

채언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손을 뗀 영웅은 잠시 멈칫했다. 채언이 또다시 발코니로 간다면 어깨에 담요를 둘러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채언은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고 그대로 제 품 안에 눌러앉아 있었다.

어쨌든 채언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그 무엇에도 방해되지는 않으니 영웅은 다시 조금 전처럼 품 안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응, 아까 그거 사장님이랑 이야기했어. 그래서 내가 다시 물어볼 게 있었는데 마침 잘 됐다.”

-왜? 뭐 물어보려고?

“추석 때 내가 대동 내려가는 거 말고 혹시 서울 올라올 생각은 없나 해서.”

-나? 나 서울 가라고?

“사장님이랑 너랑 충북 아저씨, 셋 다. 이따 전화 끊고 나서 한번 여쭤 봐줘.”

-셋 다? 뭐야, 형 무슨 일 있어?

“아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채언이 고개를 젓자 영웅의 목에 검은 머리카락이 슥슥 문질러졌다.

“그날 같이 저녁 먹고, 여기 집이나….”

영웅은 채언의 귓가에 우리 집, 하고 작게 속삭였다. 귓가가 간지러워진 채언은 어깨를 움츠리며 웃은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집이나, 불편하시면 호텔 잡아드릴 테니까 서울에서 하루 주무시는 건 어떨까 해서.”

-집? 거기에 형 혼자 사는 거 아니잖아. 그 사람이 괜찮대?

“응, 앤드류가 먼저 다들 우리 집에 초대하는 건 어떻겠냐고 그랬어.”

영웅은 채언의 머리에 볼을 기댔다. 채언은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때면 라이언이 아닌 앤드류로 호칭을 구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라이언은 정말로 애칭 같은 것이었다. 이제는 한 명밖에 불러주지 않는 특별한 호명이기도 했다.

지난여름, 채언이 물어본 적 있었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지. 겨우내 채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앤드류라고 불러 달라고 했으니 호칭에 대해 제대로 의사를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한 듯했다.

원하는 대로 불러달라고 말하니 채언은 라이언을 선택했다. 그래서 별다른 대꾸 없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는 원래의 것보다 더 흔하고 어울리지 않는 이름 뒤에 숨고 싶었는데 이제는 지워버리려 했던 과거를 아프지 않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니 라이언은 자신이 직접 선택한 이름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네가 사장님이랑 아저씨한테 한번 여쭤봐 줄래?”

통화를 이어가던 채언은 무의식중에 영웅의 옷이나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영웅은 TV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가도 채언의 손길이 느껴지면 조용히 웃으며 품 안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그건 신경 안 써도 돼. 응.”

자신이 쳐다보는 것도 모르고 열심히 들려오는 말에 대답하는 채언의 모습에 영웅은 장난기가 들었다. 손을 뒤집어 채언의 손에 깍지를 껴 보았지만, 통화에 집중했는지 별다른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야, 뭐 많이 준비하실 필요 없다고 말씀드려줘.”

마침 TV에서 들려오는 광고 음악을 들으며 영웅은 채언과 깍지 낀 손을 위로 쭉 뻗어 들었다. 마치 춤이라도 추는 듯한 포즈로 천천히 몸을 흔들자 그제야 반응이 돌아왔다. 고개를 들어 영웅을 쳐다본 채언은 이게 뭔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떠 보이다가 이내 살짝 웃으며 몸이 움직이는 방향대로 머리를 까딱거리기 시작했다.

순간 영웅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멈칫했다. 장난스럽게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뻣뻣해지더니 천천히 입술이 다물렸다.

이미 푹 빠져버린 남자에게 새삼스레 반하는 순간이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오곤 했다. 가슴의 지끈한 통증과 함께 몸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영웅이 위로 뻗고 있던 팔을 접어 내리자 채언은 어리둥절해졌다. 깍지 낀 손과 영웅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채언은 무언가 알아차렸다는 듯 동그랗게 입을 벌렸다.

“건영아, 그럼 그건 그렇게 하고 나중에 나한테 다시 연락 줄래? 이제 나 전화 끊어야 할 것 같아.”

-왜, 갑자기 바빠?

“나 뉴스 봐야 해.”

-뭐라는 거야.

핸드폰 너머에서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언은 초조함을 들키지 않으려 건영을 따라 작게 웃었다.

-알겠어. 그럼 아저씨랑 아줌마한테 여쭤보고 다시 연락할게. 뉴스 잘 봐라, 형.

“응, 나중에 봐. 끊을게.”

서둘러 전화를 끊은 채언은 핸드폰을 소파에 내려놓고 영웅의 품 안에서 자세를 추슬렀다. 여전히 깍지를 끼고 있으나 힘 빠진 영웅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쓸어주며 나머지 손을 그의 볼에 가져다 댔다.

“제가 너무 오래 통화했죠?”

“어, 어? 아니에요.”

“우리 아까 골라둔 영화 후기 찾아볼까요?”

“그으럴까요?”

잠깐 시선이 돌아왔지만 이내 도르륵 옆으로 다시 굴러가 버리는 초록 눈동자였다. 채언은 심장이 덜컥했다. 왜 갑자기 눈을 피하지? 한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다른 사람과 통화를 하는 바람에 기분이 상한 걸까?

입술을 잘근거리던 채언은 영웅의 볼을 쓰다듬으며 옆으로 돌아간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돌려놓았다. 그런데도 시선이 마주치지 않았다. 채언은 자꾸만 내려가려는 입꼬리에 힘을 주며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을 해보았다. 다른 사람과 오래 통화를 해서 섭섭해하는 거라면 적어도 갑자기 자신이 꼴 보기 싫어져서 외면하는 건 아닐 것이었다.

하지만 영웅이 이런 식으로 섭섭해하는 틈을 타서 다른 사람이 다가온다면 어떻게 될까. 채언은 횡단보도를 가운데 두고 영웅과 멀리 떨어져 있는 상상을 했다. 초록 불이 켜져서 달려가는 자신을 두고 영웅이 고개를 휙 돌려버린다면. 그대로 그가 다른 사람과 팔짱을 끼고 걸어간다면….

형태도 없는 상대에게 위기감을 느낀 채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런 채언의 마음도 모르고 혼자 벅차오른 마음을 가라앉힌 영웅은 평온하게 숨을 가다듬었다. 채언이 주말 계획을 짜며 즐거워하고 있는데 또 무턱대고 침실로 데려갈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자제력을 키울 필요가 있었다.

“라이언.”

지난번에도 그러지 않았는가. 데이트 중에 갑자기 채언을 집으로 데려와서는 멋대로 행동하다가 울리기까지 했다.

“라이언….”

하마터면 각방을 쓸 뻔했던 날을 떠올리며 영웅은 미간을 좁혔다.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됐다.

“라이언!”

“응? 뭐라고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린 영웅은 바로 코앞에서 얼굴을 대고 있는 채언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제 깍지 낀 손이 풀어졌는지 자신은 채언의 양손에 볼이 붙잡혀 있었다.

영웅은 꿀꺽 침을 삼켰다. 포즈도 그렇고, 가까이 붙은 거리도 그렇고. 딱 키스하기 좋은 상황이었다. 그동안 수도 없이 입을 맞췄는데 매번 목이 타는 듯한 감정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영화, 맞다. 영화! 마저 고를까요? 채언 씨, 후기 찾아보고 싶다고 했죠? 나도 그러고 싶었는데!”

자신을 바라보는 말간 초록색 눈동자를 보며 채언은 살짝 벌어져 있던 입술을 다물었다. 뽀뽀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용기를 내서 먼저 키스해보려고 했는데 영웅은 아무래도 지금은 스킨십에 대한 생각이 없는 듯했다.

역시 그는 주말에 볼 영화를 좀 더 제대로 찾아보고 싶었나 보다. 그런데 그 옆에서 자신이 자꾸 맥을 끊었고.

앞으로는 영웅의 앞에서 다른 사람과의 통화는 자제할 것을 다짐하며 채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리 주말에 볼 영화 좀 더 알아봐요.”

영웅의 볼을 만지는 손가락 끝에 아쉬움이 묻어났지만 채언은 그에게서 손을 떼고 영화 후기나 찾아보는 것으로 마음을 돌렸다.

두 사람은 각자 애매하게 타오르다 만 열기를 꺼트리기 위해 노력하며 작은 핸드폰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가끔 손가락이 부딪히면 서로를 보며 웃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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