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팡이 핀 딸기 외전: Painkiller 1권
1.
진원과 통화를 마치고 발코니에서 나온 영웅은 채언을 부르려다 입을 다물었다.
“네, 그런데 초급은 오전 수업밖에 없어서요. 네.”
거실 카펫 위에 앉아 있는 채언은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는데 노트북을 들여다보는 얼굴엔 고민이 가득해 보였다. 마우스 패드 위에 놓인 손가락도 꽤나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뇨, 저는 두 개 들어도 괜찮아요.”
채언의 곁으로 다가가 앉은 영웅은 채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네, 그럼 그렇게 할게요.”
통화 상대와 합의점을 찾은 모양인지 채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게 웃기도 하는 모습에 영웅은 채언을 따라 웃다가 포근한 향이 나는 목에 얼굴을 묻었다.
잠시간 더 전화를 이어가던 채언은 두 손으로 공손히 핸드폰을 잡더니.
“들어가세요. 교수님.”
하고는 통화를 끊었다.
“송 교수님이에요?”
“네.”
“그런데 뭐가 잘 안됐어요? 통화를 꽤 오래 하던데.”
“아뇨. 그건 아니고요. 교수님이 오전에는 시간을 못 내서 아쉬워하시더라고요.”
그 말에 영웅은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았다. 지난번 채언이 반찬 만들기 수업을 들었던 주민센터 외에도 여러 곳의 홈페이지 창이 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어떤 수업을 들을까 고민하더니 어제저녁에 드디어 몇 가지 후보를 추렸다고 했다.
“교수님도 나랑 똑같네요.”
“그래도 두 가지 중의 하나는 같이 신청하기로 했어요. 둘 다 인원 안에 들어야 하긴 하지만요. 몰랐는데 반찬 만들기 수업이 꽤 인기 있는 거더라고요. 교수님은 그나마 금요일이 끼어있어서 경쟁률이 조금 낮아질 것 같다고 하셨는데, 아무튼 성공했으면 좋겠어요.”
영웅도 시간이 맞으면 채언과 뭐라도 같이 해보고 싶었지만 채언이 고민하는 강의 중에는 자신의 퇴근 시간에 맞춰 들을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주말에는 어차피 둘이 함께 있을 테고, 평일이면 집에서 오랜 시간을 혼자 보내는 채언이 걱정되었던 터라, 그는 채언 혼자 프로그램을 골라 온 것이 아쉽지 않았다.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영웅은 채언을 돌아보았다.
“수강 신청 기간마다 학생들이 교수님한테 메일을 보낸대요.”
“왜요?”
“교수님 수업을 듣게 해달라고요. 수강 가능한 인원은 정해져 있는데 매번 자리가 모자라서 수강 신청에 실패한 학생들이 메일을 보낸다고 하더라고요.”
영웅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언은 이어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학교 등록금이 꽤 비싸다고 알고 있거든요. 학기당 몇백만 원씩 한다는데, 그럼 듣고 싶은 수업도 다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서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영웅은 채언의 말에 간간이 대꾸해 주면서 자신이 다녔던 미국 대학교를 떠올렸다. 학교 기념품샵에서 후드를 팔았었는데 채언에게 입히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건영이도 예전에 시간표 욕을 했었어요. 우주… 뭐였지? 시간이 엄청나게 떴다고 그랬었는데.”
영웅에게 몸을 기댄 채 우주, 우주, 같은 말을 반복하던 채언은 노트북 화면을 보고는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우리 이제 나갈 시간이에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요?”
자신의 손목시계를 들여다본 영웅은 몸을 일으킨 뒤 채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은 채언은 노트북 뚜껑을 덮으며 일어섰다.
매점에서 간식을 한 아름 사 가지고 온 두 사람은 주차해둔 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채언 씨 말대로 빨리 오길 잘했네요.”
영웅의 말에 채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 시작까지 시간이 한참 남아 있었지만, 저 멀리 보이는 입구는 차들로 꽉 막혀 있었다. 출퇴근길 도로 위 상황과 비슷해 보였다. 자동차 극장에 도착하기 전부터 근처 길이 꽤 막혔는데 더 늦게 왔다면 영화 시간이 지나서야 안으로 진입했을 것이었다.
영화를 보러오기 며칠 전부터 채언은 열심히 자동차 극장 후기를 검색했다. 일반 극장보다 일찍 도착하는 게 좋다는 팁도 검색을 통해 안 것이었다.
몇 시간이나 차 안에 있어도 괜찮겠냐는 채언의 물음에 영웅은 반대로 채언을 걱정했다. 서로가 서로를 걱정하면서도 일반 영화관이 아닌 자동차 극장을 선택한 이유는 그곳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 다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었다.
콘솔박스 위에 간식을 내려놓은 영웅은 라디오를 켠 뒤 주파수를 맞추기 시작했다.
‘가족과 함께라면 올여름 마지막 휴가는 고래 워터 파크! 파워….’
‘상큼! 상큼! 과즙과 달콤한 화이트 초….’
‘밑에 금화가 묻혀 있대. 우린 그걸 찾으러 갈 거야.’
“잠깐만요, 여기!”
채언의 목소리에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던 영웅의 손가락이 멈췄다.
‘정말로? 바보야! 거길 찾아가겠다고?’
라디오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던 채언은 눈을 들어 영웅을 바라보았다.
“이거 다른 곳에서 하고 있는 영화인 것 같아요. 저번에 찾아봤는데 주파수만 맞으면 스크린은 안 보여도 상영 중인 영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했거든요.”
더빙된 성우의 목소리를 듣던 채언은 TV에서 영화 홍보 장면으로 나오던 대사를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진짜로 이렇게 소리가 들리니까 뭔가 신기해요.”
“그럼 우리 영화 시작하기 전까지 이대로 잠깐 틀어놓을까요?”
채언은 시트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저었다. 품에 안은 팝콘 통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나중에 이것도 보러 갈 수 있잖아요. 미리 내용을 알기는 싫어요.”
그 말에 영웅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다시 주파수를 돌리자 광고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저 엄청 긴장돼요.”
“나도요.”
영웅이 오른쪽 손을 내밀자 채언은 왼쪽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맞잡았다.
“진짜네.”
평소보다 더 따끈하게 느껴지는 손의 온도에 채언은 영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데 손에서도 맥박이 뛰는 걸까요? 손바닥 안이 웅웅거리는 느낌이에요.”
채언의 말에 영웅은 자신의 왼쪽 손을 펼쳐 들여다보았다.
“눈에는 잘 안 보이는데.”
조수석 쪽으로 몸을 숙인 그는 자신의 가슴에 채언의 손등을 가져다 댔다. 채언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손등에 닿는 느낌에 집중했다. 두근두근. 빠르게 뛰는 영웅의 심장 박동이 그대로 느껴졌다.
“이러다 영화 시작하면 심장이 터지는 거 아니에요? 우리 이거 보지 말까요?”
금방 걱정하는 기색이 실린 채언의 얼굴에 영웅은 고개를 저었다. 어제까지도 함께 보는 첫 영화의 장르를 잔잔한 로맨스로 바꾸자고 했던 채언이었다. 그런 채언에게 자신의 상태가 이제는 정말로 괜찮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채언이 포도 농장에서 지내고 있을 때 며칠이나 비가 내렸다. 하지만 영웅은 혼자 있는 집에서 천둥소리를 듣고도 서재에 자신을 가두지 않았다. 예민한 귀에 들리는 천둥소리가 거슬리기는 했지만, 이상하게도 두려운 마음은 들지 않았던 것이다. 예전만큼 그 소리가 크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채언 씨가 포도 농장에 가 있을 때 비가 왔잖아요.”
두근두근. 손등으로 전달되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채언은 물끄러미 영웅을 바라보았다.
포도 농장에서 지냈을 때 서울에 혼자 있는 그가 걱정될 정도로 비가 심하게 내렸다. 너무 불안해서 밤중에 택시를 타고 서울로 올라갈까 대문 앞을 서성이던 것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영웅과 전화를 할 때마다 달래주는 쪽은 오히려 그였다. 괜찮다고 말하는 목소리에는 거짓이 섞여 있지 않아서 한참 마당을 걷던 채언은 건영이 잠들어 있는 방으로 돌아가 평온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때… 어떻게 지냈어요? 잠은 잘 잤어요?”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고 난 다음 날. 풀잎에 이슬 맺힌 아침에 찾아온 영웅의 얼굴에는 정말로 애틋한 반가움만이 비칠 뿐이었다. 그는 혼자서 비 오는 시간을 어떻게 버텼는지 이야기해준 적이 없었다.
“기분 좋은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어요. 그래서 잠도 잘 잤고.”
채언은 영웅의 귓가를 쓸어주고 싶다는 마음을 누르며 물었다.
“어떤 생각 했는데요?”
“채언 씨가 나한테 달려와 줬던 거.”
말하는 영웅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호를 그리고 있었다.
“날 지켜주겠다고 했잖아요.”
그날. 비에 젖은 채언의 몸을 끌어안았던 날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었다. 그렇게 열렬하고 로맨틱한 고백은 처음이었으니까.
“그 뒤로 비 오는 날이 싫지만은 않아요.”
비가 내리는 밤에 몰래 대동에 찾아간 적도 있었다. 채언이 머무는 집 앞에서 토독 토독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때맞춰 걸려온 전화를 받았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던 불안정하고 다정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영웅은 채언과 맞잡고 있는 손에 꽉 힘을 주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내 손 잡아줘요.”
나직한 청원에 채언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그는 비 오는 밤을 힘들게 버텨낸 것이 아니었다.
“이걸로 정말 괜찮으세요? 손잡는 걸로?”
영웅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도 심장이 쿵쿵 뛰는데요?”
“너무 오랜만에 영화를 보러 나와서 그런가. 나 지금 무서운 건 아니고 좀 신난 것 같은데.”
영웅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가슴께를 쳐다보고는 다시 시선을 올렸다.
채언은 물끄러미 영웅과 눈을 마주치다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심장이 쿵쿵 뛰는 것도 그와 비슷한 이유였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하나 더 있었다.
“이젠 손잡는 거로도 괜찮다면…, 으음.”
말끝을 흐리는 채언의 태도에 영웅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이제 손만 잡고 있으면 다 괜찮다는 거죠? 알겠어요.”
영웅의 짙은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채언은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검은 눈동자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이리 와요! 내가 한국말이 서툴러서 말을 잘못했어.”
영웅이 팔꿈치로 콘솔박스를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채언의 얼굴과 머리카락 근처로 뽀뽀 세례가 쏟아졌다. 아하하, 웃는 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채언은 열심히 도리질 쳐보았지만 좁은 차 안에서 여기저기 내려앉는 입술을 피할 수 없었다.
“그만! 그만! 제가 잘못했어요.”
안고 있는 팝콘 상자가 눌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채언은 먼저 백기를 들고 말았다.
“팝콘이.”
쪽.
“팝콘이, 다 떨어질 것 같.”
쪽.
“단 말이에요!”
겨우 말을 끝맺은 채언이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하지만 다시 한번 쪽!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 때문에 또다시 눈을 꽉 감아야 했다.
잠시 후 채언이 겨우 눈을 떴을 때 영웅은 삐딱하게 고개를 튼 채였다.
“잘못했어요.”
색색 숨을 몰아쉰 채언이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사과하자 영웅은 거들먹거리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봐줄게요. 대신 내 볼에 키스해주면.”
뺨 한쪽을 내미는 그를 빤히 바라보던 채언은 영웅과 맞잡은 손에 꼬옥 힘을 주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때를 놓치지 않은 영웅이 휙! 고개를 돌리자 입술과 입술이 닿았다가 촉, 가벼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놀라 동그래진 채언의 눈을 본 영웅은 푸스스 웃으며 채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 문질렀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채언의 얼굴은 붉어진 채였다. 잠깐씩 눈이 마주치면 검은 눈동자는 도르륵 굴러 차 안 여기저기를 살피기 바빴다.
“어디 봐요? 차 안에 구경할 게 있나? 거울 보는 거예요?”
“놀리지 마세요. 팝콘이 다 쏟아졌다구요….”
상자 속에서 튀어나온 팝콘 몇 알이 채언의 허벅지와 조수석 위를 굴러다니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것도 아닌데, 내가 먹죠. 뭐. 아-.”
영웅은 먹여달라는 듯 입을 벌렸다.
“아아.”
보채는 목소리에 채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와 눈을 마주쳤다.
“알겠어요.”
한쪽 손은 여전히 영웅과 맞잡은 채였기 때문에 채언은 그에게 팝콘을 먹여주기 위해 안고 있던 팝콘 상자에서 손을 떼야 했다.
“어!”
그런데 손을 떼기 무섭게 허벅지 위에 놓인 팝콘 상자가 옆으로 기울며 팝콘 몇 알이 데구루루 굴러 나오는 것이었다. 다급히 상자를 세운 채언은 이것 좀 보라는 듯 영웅에게 잡힌 손을 흔들었다.
“이렇게 잡고 있으면 팝콘을 영영 못 먹겠는데요?”
눈을 가늘게 뜨고 고민하는 척하던 영웅은 채언의 손등에 쪽 소리 나게 뽀뽀한 뒤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먹을 때는 잠깐 놔줄게요.”
간지러운 감촉이 남은 손등을 다른 손으로 슥슥 문지른 채언은 상자 속에서 버터 향이 나는 팝콘을 하나 집어 영웅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아- 하고 벌어져 있던 입은 팝콘이 들어가기 전에 딱 다물렸다.
“으응, 그거 말고요.”
의아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던 채언은 영웅의 눈짓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채언은 들고 있던 팝콘을 상자 속에 도로 넣어둔 뒤 자신의 허벅지 위에 떨어진 팝콘을 집어 그에게 내밀었다. 정답이라는 듯 얌전히 입술이 벌어졌다.
하얀 팝콘이 영웅의 입술 사이로 사라지는 것을 본 채언은 자신도 개중에 하나를 집어 먹었다. 두 사람의 입 안에서 바삭바삭한 소리가 났다.
여름의 끝물이기는 했지만 해는 여전히 길었다. 아직 영화가 나오지 않는 스크린을 앞에 둔 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채언은 가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가슴 사이나 어깨 쪽을 매만졌는데, 그럴 때마다 손에 안전벨트가 잡히지 않아 어색하게 손을 내려야 했다.
“그럼 겨울에?”
“네. 교수님께서 매년 여름, 겨울마다 외부 강의를 했다고 하셨거든요.”
지금 대학교는 여름방학 기간이었다. 채언이 포도 농장에서 지내던 때 외부 강의를 시작한 송 교수는 채언에게 자신의 강의를 들어볼 것을 제안했다. 지금 다른 지역에 있어 강의를 들을 수 없다는 정중한 거절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겨울 강의를 미리 넌지시 알려놓은 상태였다.
“나중에 반찬 만들기 수업 때 만나 뵙고 더 얘기해 보기로 했어요.”
말을 마친 채언은 또다시 옷자락을 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팝콘 통을 들지 않은 빈손에 안전벨트 대신 옷을 쥔 것이 벌써 네 번째였다.
안전벨트를 매지 않고 차 안에 이렇게 오래 앉아 있어 본 것이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동차 극장에 온 것도 처음, 영웅과 영화를 보러 온 것도 처음이었다. 설레는 마음에 어색함이 섞이니, 마치 첫 데이트를 하러 나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간지러워진 기분에 채언은 팝콘을 하나 집어 먹었다. 팝콘 하나는 입 안에서 금방 사라졌다. 아기처럼 이가 나는 것도 아닌데 뭔가를 더 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입 안이 꽉 찰 정도로 팝콘을 한 주먹 쥐어 넣고 씹는데 영웅이 가만히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잘만 마주 보던 눈이었는데 채언은 괜히 부끄러워져서 팝콘 통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진짜 첫 데이트는 언제로 쳐야 하는 걸까? 문득 의문이 들었다.
“여기.”
갑자기 얼굴에 닿아온 손길에 채언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다정한 미소를 띤 영웅과 눈이 마주쳤다.
“묻은 것도 모르고 먹네?”
영웅이 채언의 입가를 살살 털어주자 입술에 붙어 있던 옥수수 껍질 하나가 떨어졌다.
“팝콘을 이렇게 좋아하는 줄 몰랐는데. 더 사 올까요?”
채언은 입 안에 든 것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팝콘이 좋은 게 아니라 당신하고 같이 있는 게 좋은 건데요? 라고 말하기가 뭐해서 다 씹은 팝콘만 꿀꺽 삼켜야 했다.
“여기 다른 간식도 많잖아요.”
채언이 주스 쪽으로 손을 뻗자 영웅이 먼저 병을 들어 뚜껑을 열어주었다. 팝콘 통을 내려놓은 채언은 주스 병을 넘겨받았다. 꿀꺽 삼킨 오렌지 주스의 끝 맛이 다디달았다.
‘아빠! 지금 그쪽에 있는 거 맞아요?’
‘아빠! 아빠!’
치직-직, 치직-
‘저는 지금 동생하고 같이, 이런!’
쿵! 쿠궁!
갈색 머리 소녀가 어린 동생을 안아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아웃 포커싱된 화면에서는 건물이 계속해서 무너지고 있었다.
콰앙-!
맞잡은 손이 움찔거리는 느낌에 채언은 차창 밖 스크린을 보던 고개를 돌려 운전석에 앉은 영웅을 보았다. 그는 스크린을 보고 있었지만, 고개를 거의 조수석 쪽으로 돌린 채 눈가를 찡그리고 있었다.
15세 관람가의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는 잔인하지 않았지만, 신나는 음악과 함께 건물과 차를 때려 부수는 장면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영화 개봉 첫날 채언이 찾아본 리뷰들에서는 그런 액션 장면이 포인트라고 했다. 스케일이 커서 속 시원하다는 평이 주된 의견이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의견이 영웅과는 일치하지 않는 듯했다.
처음 액션 장면이 시작되었을 때 혹시 몰라 곧바로 라디오 소리를 줄였는데 이쪽에서만 소리를 줄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양옆, 앞뒤로 늘어선 차들이 소리를 빵빵하게 키우고 있으니 차 문을 닫고 있어도 바깥에서 영화 소리가 들려왔다.
영웅의 상태를 확인할 때마다 그는 괜찮다며 웃어 보였지만 채언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손등을 토닥여주자 장난스럽게 휴! 하고 한숨을 쉬는 그의 모습이 오히려 채언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의 간격이 넓어 그를 계속 안아주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라이언.”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영웅은 채언을 보았다. 채언이 운전석 쪽으로 몸을 숙이며 다가왔다.
“우리 뒷자리로 가요.”
“뒷자리요?”
뒷자리로 가려는 이유를 말해주면 그는 괜찮다고 대답할게 분명했다. 그래서 채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갔다. 동그래진 영웅의 눈이 창밖의 채언을 따라 움직였다. 곧바로 뒷좌석 문이 열리고 채언이 들어와 앉았다.
“이쪽으로 오세요.”
옆자리 시트를 톡톡 두드리는 손을 보던 영웅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운전석 문을 열었다.
영웅이 뒷좌석 문을 열고 들어와 앉자마자 채언은 그의 목을 끌어당겨 안았다.
“엇!”
몸이 쏠리는 감각에 서둘러 시트를 짚은 영웅은 채언의 품 안에서 입을 활짝 벌리며 웃었다.
“이래서 뒷자리로 오라고 한 거였어요?”
단순히 짙은 스킨십을 위해 채언이 자신을 뒷자리로 부른 것이 아님을 알았지만, 그는 채언의 배려에 사과로 답하고 싶지 않았다.
“앞자리는 간격이 너무 넓잖아요.”
“여기서는 스크린이 잘 안 보일 텐데 괜찮아요?”
영웅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채언은 고개를 살짝 들어 앞을 보았다.
“여기서도 화면은 잘 보여요.”
앞자리 시트와 백미러 때문에 스크린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서로 딱 붙어 앉아 가운데 틈으로 보고 있자니 그럭저럭 시야가 괜찮았다. 적당히 보였고, 적당히 보이지 않았다.
“팝콘도 앞에 있는데?”
“영화 시작 전에 거의 다 먹었잖아요. 그리고….”
한쪽 팔을 앞자리 사이로 쑥 내민 채언은 과자 봉지를 하나 가져왔다.
“이젠 이거 먹을래요.”
과자 봉지를 뜯자 초콜릿 냄새가 확 올라왔다. 초콜릿이 코팅된 별 모양 과자를 하나 꺼낸 채언은 그것을 영웅에게 내밀었다. 과자를 받아먹은 영웅은 입 안에 든 것을 씹기 전에 채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쪽, 소리 뒤로 바삭바삭한 소리가 따라붙었다.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아 TV를 볼 때처럼 서로의 몸에 팔을 두른 채 영화를 보았다.
과자 씹는 소리 때문에 대사가 잘 들리지 않았고, 여기저기 가려 스크린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지만 채언은 자동차 극장에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가끔 어깨에 기대오는 영웅을 안아줄 때마다 다른 사람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채언은 조마조마하게 스크린을 바라보다가 배우들이 싸우는 장면이 나오면 손바닥으로 초록색 눈동자 앞을 가려주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영웅의 상태를 확인해 보면 손바닥 아래 드러난 입꼬리가 위로 살짝 올라가 있어 다행이었다.
“아직도 싸우고 있어요?”
액션 신이 길어지면 채언은 영웅의 머리를 감싸 안아주었는데, 그러면 영웅이 안긴 채로 가끔 질문을 해왔다.
“네. 도로가 막 부서지는데요.”
말재주가 좋지 않아 화면 설명을 짧게 할 수밖에 없는 채언은 조금 멋쩍었지만, 영웅은 별다른 불만 없이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는 해가 지고 있었다. 앞자리로 돌아온 두 사람은 길고 긴 엔딩 크레딧이 끝까지 올라가는 것을 본 뒤에야 자동차 극장을 떠날 준비를 했다.
“엄청… 재미있었어요!”
직원의 안내에 따라 출구를 향해 갈 때 채언은 안전벨트를 쥐는 대신 대시보드에 놓여 있던 양 인형을 끌어안고 있었다. 살짝 흥분한 듯한 목소리에 영웅은 입꼬리에 힘을 주며 웃음을 참았다.
아까 자신을 끌어안고 스크린을 바라보던 채언의 심장이 쿵쿵 힘차게 뛰던 것이 생각났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던 손길도 극의 긴장이 더해지는 순간에는 격해졌었다. 그러니 채언이 재미있었다고 말하지 않았어도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다음 편은 내년에 나오겠죠? 아니면 이 년 정도 기다려야 할까요?”
차가 천천히 도로로 나아가는 동안 채언은 복슬복슬한 인형 털을 매만지며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재잘거렸다.
“장편 영화를 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 텀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어요.”
“비슷한 영화들이 몇 년 동안 나왔는지 찾아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네요!”
핸드폰을 꺼낸 채언은 이름만 들어본 판타지 영화 제목들을 인터넷에 검색해 보기 시작했다. 영화 정보를 확인하며 액정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점차 멈추고 눈썹 사이에 골이 패었다.
앞을 보며 운전하던 영웅은 흘끔 채언을 돌아보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어떤 영화는 4편짜리인데 첫 편부터 마지막 편 상영까지 10년이 걸렸대요. 오늘 본 것도 원작 분량이 이거랑 비슷하거든요.”
“오! 그러면 우리 앞으로 적어도 10년 동안은 볼만한 영화가 있네요.”
영웅의 말에 채언은 도르륵 눈을 굴려 양 인형을 보았다. 까만 구슬 눈이 반질반질했다.
“으음, 그렇죠? 그동안 다른 영화들도 개봉할 거고.”
보드라운 하얀 털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던 채언은 영웅을 흘끔거리며 말했다.
오늘 영웅은 상영 시간의 절반 정도를 스크린에서 고개를 돌리고 있어야 했지만, 앞으로 몇 편의 영화를 더 같이 보다 보면 10년 후에는 따로 앉아 영화를 보아도 스크린에서 눈을 피하지 않게 될지 몰랐다.
“그러면….”
영웅은 말꼬리를 늘이는 채언을 돌아보며 눈썹을 올려보았다. 말을 듣고 있다는 그의 표현에 채언은 괜히 만지고 있던 양 인형을 대시보드에 내려놓았다.
“다음 편도 같이 봐주실 거예요?”
“당연한 말을! 그런데 그때도 손잡아주면요.”
영웅이 한쪽 손을 내밀자 채언은 망설임 없이 커다란 손을 맞잡았다.
“채언 씨, 다음 주에는 그거 보러 갈까요?”
“어떤 거요?”
“아까 다른 라디오에서 나오던 영화.”
다른 주파수에서 흘러나오던 영화를 말하는 듯했다. 영웅의 손가락 마디를 매만지던 채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거 애니메이션이에요.”
“애니메이션에는 흥미 없어요?”
“저는 괜찮은데. 대표, 아니, 라이언도 괜찮은가 해서요.”
영웅과 잡고 있던 손을 푼 채언은 목덜미를 매만졌다. 영웅을 라이언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한 건 아니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입에 붙은 대표님이라는 호칭이 종종 튀어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건 영웅도 마찬가지인지 자신을 채언아, 하고 부르다가도, 자주 채언 씨, 라고 부르곤 했다.
그런데 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불렀던 대표님이라는 호칭이 이제는 너무 간지럽게 느껴졌다. 꼭 소꿉장난을 하면서 지내 온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난 좋아요.”
“그럼 저도 좋아요.”
채언은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영웅과 같은 집에 살고, 매일 얼굴을 보지만, 매번 이렇게 약속을 잡아가고 있었다. 내일은 뭐 할래요? 주말에는? 다음 주에는 뭐 할까요? 그런 말은 들을 때마다 설렜다. 항상 곁에 있는 영웅이었지만 그와 데이트를 한다고 생각하면 손바닥 안이 간지러웠다.
그런데 정말 그와의 첫 데이트는 언제로 치는 게 맞는 걸까? 아까 했던 생각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빨간불에 차가 멈췄다.
“뭔데요?”
“영화에 나온 대사 때문에요.”
영웅은 핸들을 톡톡 두드렸다. 한참이나 영화 이야기를 해놓고 또다시 영화 이야기를 꺼낸 채언이 귀여웠다. 영화가 정말 재미있었던 듯했다.
자신은 상영 시간의 절반쯤을 보드라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느라 제대로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채언을 통해 띄엄띄엄 보고 들은 내용이 정말 재미있긴 했다. 아니, 사실 채언이 무슨 말을 하든 그것에 흥미가 있을 테니 다 재미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사는 달랐는데, 자막에는 한국말로 똑같이 표시되어 있었거든요.”
영웅은 채언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어떤 거였는데요?”
“대디.”
채언이 순진한 목소리로 내뱉은 단어에 영웅의 몸이 순간 굳었다.
“어, 어?”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눈을 끔뻑이는데 채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거랑 대드요. 둘 다 자막에는 아빠라고 나왔는데, 생각해 보니까 저도 그거 둘 다 아빠라고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왜 발음을 다르게 하지? 두 개가 무슨 차이인지 갑자기 궁금하더라고요. 무슨 차이….”
말을 하던 중간에 차창을 흘끔 바라본 채언의 입술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초록 불인데요?”
그래도 차는 출발하지 않았다. 운전석으로 고개를 돌린 채언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영웅의 어깨를 흔들었다.
“초록 불이에요. 우리 출발해야 돼요.”
뒤에 선 차가 클랙슨을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 아! 가야죠! 그렇죠.”
그제야 정신을 차린 영웅은 앞을 보고 급히 차를 출발시켰다. 무서울 정도로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관성 탓에 세우고 있던 등이 시트에 닿자, 채언은 반사적으로 안전벨트를 움켜쥐었다.
“죄송해요. 운전 중에 제가 너무 말을 걸었죠.”
옆에서 들려오는 소심한 목소리에 영웅은 재빨리 도리질을 했다.
“안, 아니, 아니 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 내가 잠깐 다른 생각을 해서 신호를 못 봤어요. 이러면 안 되는데 조심할게요.”
영웅은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그런 쪽으로는 취미가 없는데 잠깐이지만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싶었다.
“무슨 생각이요?”
“채언 씨, 저녁, 우리 저녁은 뭐 먹고 싶어요?”
“아, 저녁. 저는 아까 간식을 많이 먹어서 아직 배고프지는 않은데. 라이언은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영화를 보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식당은 예약해놓지 않은 상태였다. 채언은 밖에서 더 놀고 싶은 마음 반, 집에 가고 싶은 마음 반이었다. 그러니 영웅이 하자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반면에 영웅은 이대로 집에 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건전하게 사람들이 많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었다.
“그래요. 그럼 가면서 좀 둘러볼까요? 외관이 괜찮은 곳으로.”
“네. 그런데 이 근처에도 호텔이 있어요? 사실 겉에서 보면 호텔도 다 그냥 빌딩 같아서 저는 잘 모르겠던데.”
영웅은 핸들을 꽉 쥐었다.
“호텔? 호텔이 왜, 갑자기 왜?”
창밖을 살펴보던 채언은 말을 더듬는 영웅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네? 외관이 괜찮은 곳이면 호텔 말씀하신 거 아니에요? 지난번에 그러셔서….”
크흠, 헛기침을 한 영웅은 한쪽 손을 들어 눈썹을 문질렀다.
“맞아요, 호텔. 레스토랑!”
“그렇죠?”
웃음기가 따라붙는 목소리로 대꾸한 채언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운전 중인 영웅을 대신해서 열심히 주위를 살피기로 했다.
어느새 어두워진 창밖을 보면서 채언은 조금 흐릿하던 스크린을 떠올렸다. 지금처럼 어두웠으면 스크린이 더 선명하게 보였을 텐데. 오늘 영화를 보는 동안 영웅의 상태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으니 다음 주에 애니메이션을 보러 갈 때는 시간대를 지금보다 늦춰도 괜찮을 것 같았다. 시트 헤드에 머리를 기댄 채언은 혼자 미소 지었다.
영웅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고민하는 중이었다. 이대로 직진하면 저 멀리 보이는 호텔에 도착할 테고, 오른쪽으로 꺾으면 집까지 금방이었다. 호텔 레스토랑에 간다면 맛있는 저녁을 먹으면서 오늘 데이트를 완벽히 마무리 짓겠지만 지금 당장 채언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이 마음속에 득실거렸다.
“흠흠, 으흠흠.”
옆에서 들려온 콧노래 소리에 영웅은 핸들을 꽉 쥐었다. 설마…. 초록 눈동자가 재빨리 옆을 향했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런, 정말로 채언은 창밖을 보면서 아까 본 영화 OST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함께 지내는 동안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여준 적 없는 사람인데 아까 본 영화가 너무 재미있었던 탓에 자기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오는 듯했다.
후우우. 열기 섞인 숨을 배출하던 영웅은 어금니를 꽉 문 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호텔 레스토랑에 가서 맛있는 저녁. 집. 호텔로 가서 멋진 저녁. 집. 그래, 호텔로 가서….
“흐흐흠, 으흠, 흠.”
집!
“아직 배 안 고프다고 했죠. 잠깐 집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올까요?”
그렇게 묻는 영웅은 이미 오른쪽으로 차 방향을 튼 상태였다. 저 멀리 호텔 비슷한 건물을 보고 있던 채언은 눈을 깜빡이다가 영웅을 돌아보았다.
“피곤하세요? 저는 집에 가는 것도 괜찮은데, 다시 밖에 나가지 않아도 돼요.”
이제 보니 영웅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채언의 얼굴에 금방 걱정이 어렸다.
“그럼 잠깐 집으로 갈게요.”
“네.”
고개를 끄덕인 채언은 지금 차가 달리고 있는 도로 위치를 살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저 멀리 작게 보이는 호텔 비슷한 건물보다 집이 훨씬 가까웠다.
지하 주차장의 자리가 꽤 비어 있었던 덕분에 주차가 빨랐고, 엘리베이터는 중간에 멈추지 않고 22층까지 곧바로 올라갔다.
차에서 내리기 전까지 영웅에게 괜찮냐고 묻던 채언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본넷 앞에서 영웅에게 붙잡힌 손목이 금방 뜨끈하게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몸이 직접 닿지 않은 곳에서도 그의 체온이 느껴질 정도였다. 갑자기 몸 상태가 안 좋아져 열이 나나 싶었는데 영웅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몸 상태가 지나치게 좋아서 열이 오른 듯했다.
먼저 눈을 피한 것은 채언이었다. 뭘 한 것도 아닌데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민망했다. 왜 갑자기? 도대체 뭐 때문에? 얌전히 영웅에게 손깍지를 당한 채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지금까지 채언의 머릿속에 의문이 뱅뱅 돌고 있었다.
띵-. 문이 열립니다.
친절한 안내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성큼성큼 걷는 발걸음 소리와 그 뒤를 따라 운동화 밑창이 바닥에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현관문까지 거리가 너무 짧게 느껴져서 채언은 침을 꼴깍 삼켰다.
“대표님, 아니… 라이언. 왜, 갑자기 그….”
문이 열리고 영웅을 따라 안으로 들어선 채언이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들었다. 노골적인 욕망이 느껴지는 시선과 마주친 채언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지만, 다시금 초록색 눈동자와 마주치고 말았다. 영웅의 커다란 손이 채언의 양 볼을 잡아 올린 탓이었다.
“으응….”
곧바로 입술 사이를 파고드는 뜨겁고 보드라운 감촉에 채언은 눈을 감았다. 발뒤꿈치를 들며 그의 목에 팔을 감자 단단한 팔이 허리를 받쳐주었다. 벽에 닿는 등이 시원했다. 숨이 섞이는 입술, 불규칙하게 맞닿는 가슴이 너무 뜨겁게 느껴지는 탓이었다.
허리를 받쳐주던 영웅의 팔이 아래쪽으로 스륵 내려가는 바람에 채언의 몸이 비틀거렸다. 바로 서려 발에 힘을 주자 바닥과 운동화 밑창이 타탓, 마찰했다.
분명 현관문 안쪽으로 들어왔는데 집 밖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신발을 벗으려면 아직 문 하나를 더 통과해야 했다. 추웁, 춥. 끈적하게 문질러지는 뜨거운 혀를 피해 보려 고개를 꺾었지만 입맞춤은 더욱더 깊어질 뿐이었다.
서툴게 숨을 쉬던 채언의 손이 영웅의 탄탄한 가슴으로 주륵 미끄러졌다. 손가락에 힘이 풀리며 들고 있던 발뒤꿈치가 아래로 내려왔다. 채언의 몸이 무너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다시 허리를 잡아챈 영웅은 품에 딱 맞게 안기는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쪼옥, 끈적한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하아….”
입술을 작게 벌리고 숨을 몰아쉬던 채언은 영웅을 내려다보며 그의 볼을 붙잡았다.
“안으로, 들어갈래요. 여기는 너무 밖에 있는 것 같아서…, 이상해요.”
영웅은 고개를 틀며 다시 말랑한 입술을 찾아 물었다. 제대로 앞을 보지 않고도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와 정신없이 입을 맞추는 와중에 채언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으응, 응…?”
영웅에게 딱 달라붙어 안긴 채 입술을 빨리던 채언은 눈썹 사이를 좁혔다. 자신의 요구에 집 안으로 들어온 것은 좋았으나, 거실을 지나고 침실 문이 열리는 동안에도 뚜벅뚜벅 발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천천히 몸이 침대 위에 눕혀지는 순간,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뜬 채언은 영웅의 가슴을 손으로 밀어냈다.
“안 돼요!”
다급한 채언의 목소리에 영웅은 한쪽 눈썹을 올렸다. 침대에 누운 채로 헐떡이는 채언은 여전히 자신의 가슴을 힘주어 밀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밀어내는 손과 달리 다리는 자신의 허리에 감긴 상태였다.
채언의 허벅지 아래 손을 집어넣으며 다리를 더 위로 밀어 올린 영웅은 촉촉하게 젖은 입술을 보다가 까만 눈동자로 시선을 올렸다.
“으읏.”
다분히 의도적으로 오금을 자극해오는 손짓에 채언이 눈가를 찌푸렸다.
“으… 안, 돼요.”
“뭐가요? 키스?”
“신발!”
영웅은 채언의 다리를 잡은 손을 주욱 미끄러트렸다. 동그란 복숭아뼈를 만지작거리다가 발에 신겨진 운동화를 잡아 벗기자 침실 바닥에 툭! 운동화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채언의 얼굴이 굳어졌다. 나머지 한쪽 발도 시원해지는 느낌과 동시에 또다시 툭! 소리가 들려오자 채언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눈가를 좁혔다.
“어어, 뭐지? 이 눈빛은?”
영웅이 침대에 무릎을 대고 몸을 숙이자 채언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그의 입술을 피했다. 방향이 빗나가 의도치 않게 채언의 볼에 입을 맞춘 영웅은 다시 고개를 틀어 입술에 키스를 시도했지만 채언의 얼굴이 또 반대쪽으로 휙 돌아가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
“뭐가요? 응?”
채언의 목에 코를 묻은 영웅이 보드라운 살결을 아프지 않게 씹었다. 가슴 아래 깔린 몸이 움츠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무릎을 세워 허리에 기대게 한 뒤 발목의 도드라진 뼈를 만져주자 양말 신은 발끝에도 힘이 들어갔다.
“흐, 신발은 침실에 신고 들어오면, 안, 된다고요!”
“내가 청소할게요. 깨끗하게.”
“그런 문제가 아니라…!”
채언은 뭐라고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이내 꾹 다물었다. 함께 쓰고 있는 침실이었지만 어쨌든 집주인은 영웅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뭐라고 할 자격이 있나 아리송했다.
보드라운 목을 타고 오르던 입술이 채언의 턱 끝에 닿았다. 작은 턱을 가볍게 문 영웅은 눈을 들어 대꾸 없는 채언을 보았다. 불만이 서려 있던 조금 전의 표정과 또 달라진 얼굴이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다른 생각에 빠져든 모양이었다.
침대에 무릎을 대고 조금 더 위로 올라온 영웅은 채언의 얼굴에 마구 뽀뽀를 해대기 시작했다. 쪽, 쪽. 얼굴 여기저기 닿아오는 입술에 채언은 빗물이라도 맞은 듯 눈을 감았다 떴다. 오른쪽 눈 가까이에 입술이 닿아와 오른쪽 눈을 감으면 곧바로 왼쪽 뺨에 입술이 내려앉았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입맞춤에 간지러움을 참지 못한 채언이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살짝 팬 보조개 위에 쪽, 뽀뽀를 한 영웅은 때를 놓치지 않고 채언의 티셔츠를 위로 잡아 올렸다.
벗겨진 티셔츠가 저 멀리 날아가는 것을 보며 채언은 침대를 밟고 더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그런데 따라서 몸을 붙여오는 영웅의 다리가 보였다.
“이건 정말 안 돼요. 침대 위에 올라올 때 신발을 신는 건 정말….”
채언은 다시 손을 들어 영웅의 넓은 어깨를 꾹 눌렀다.
“운동화, 신발장에 두고 올게요. 대표님도 어서 벗.”
“채언아.”
하지만 영웅의 몸은 밀리지 않고 오히려 채언의 몸을 눌러오기 시작했다.
“네?”
채언은 가까이 다가오는 영웅의 눈을 보고 있다가 어깨를 움츠렸다. 버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표님 아니고, 라이언.”
채언아. 이름을 불러주는 것도 좋은데 귓가에 속삭여지는 낮은 목소리에는 완전히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의 넓은 등을 끌어안은 채언은 영웅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웅얼거렸다.
“라이언도… 신발은 신발장에 두고 와요.”
“내가 침대 위에 안 올라가면 돼요?”
“네? 그럼 어떻게….”
채언은 허리를 쓸어오는 손길에 살짝 몸을 띄웠다. 바지가 골반 밑으로 쉽게 내려가고, 천과 천이 쓸리는 소리와 함께 영웅의 몸도 점점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린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커다란 손은 채언의 배 위를 살짝 누르고 있었다.
스윽- 탁. 소리와 함께 채언의 발끝에서 바지가 떨어졌다. 뒤이어 얇은 속옷까지 끌어 내린 영웅은 움츠러드는 채언의 다리를 잡아 끌어당긴 뒤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렸다.
하얀 허벅지 사이로 몸을 밀어 넣은 그는 입을 벌려 보드라운 살을 아프지 않게 물었다.
“아, 저….”
몸을 일으키려는 채언의 배를 눌러 제지한 영웅은 하얀 허벅지 안쪽으로 입술을 미끄러트렸다.
간지러움이 몸을 타고 오르는 느낌에 채언의 허리가 움찔 떨렸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말캉하고 따듯한 입술이 점점 더 다리 안쪽에 와 닿는 것을 느끼며 채언은 고개를 틀었다. 볼에 닿는 베개에 얼굴을 문지르며 등 밑에 깔린 이불을 움켜잡고 끌어당기자 무겁게 천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배를 누르고 있던 손이 부드럽게 살을 쓸어주고 있었다. 숨소리를 따라 오르내리는 몸에 닿는 체온이 따듯했다.
“왜 갑, 갑자기 이렇게 됐는지, 읏!”
허벅지 안쪽을 세게 빨아들이는 느낌에 채언은 허리에 힘을 주었다. 몸이 옆으로 비틀린 탓에 맨가슴이 부드러운 이불에 쓸렸다.
“모르겠어요….”
“뭘?”
채언의 허벅지에 붉은 흔적을 남긴 영웅은 자신의 눈에 그것을 담았다. 바닐라 아이스크림 위에 체리 시럽을 뿌린 듯 색이 예뻤다. 참지 못하고 혀로 흔적 위를 핥아보자 혀뿌리까지 온통 달다 못해 아린 느낌이 들었다.
“우리, 저녁 먹으러 가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배가 안 고프다면서요?”
반쯤 일어난 채언의 성기를 손에 쥔 영웅은 기둥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으… 그, 그렇, 긴 한데.”
눈가를 찡그린 채언은 오른쪽 무릎을 굽히려 했다. 하지만 다리가 영웅의 어깨 위에 얹혀 있던 탓에 하얀 양말을 신은 발이 탄탄한 등 위를 주욱 타고 미끄러졌다. 영웅의 손은 계속해서 위아래로 움직였다.
“몸이 안, 하…, 안 좋아진 줄 알고 걱정, 읏,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데 왜 자신이 지금 침대에 눕게 되었는지 설명해달라는 것이었다. 어깨를 으쓱인 영웅은 대답 없이 손에 쥔 성기를 주욱 훑어 올렸다.
“…아!”
선단에서 몽글몽글 액체가 솟아올랐다.
“이건 다 채언 씨 때문이거든요.”
까만 눈동자에 억울함이 실렸다.
“제가 뭘요.”
갑자기 침실에 끌려 들어왔는데 누구는 양말만 빼고 전부 탈의한 상태였고, 누구는 티셔츠에 바지, 게다가 신발까지 챙겨 신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된 게 전부 제 탓이라니. 지르문 채언의 입술 사이로 서러운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게 꼭 삐진 강아지가 내는 소리와 닮아 있어서 영웅은 작게 웃고 말았다.
“나한테 이상한 걸 물어봐서 그래요.”
“제가, 뭘 물어봤는데요?”
아래쪽에서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영웅은 반대쪽 허벅지 안쪽에도 흔적을 남기느라 입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으응.”
손가락 끝에 걸린 이불을 매만지던 채언은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쾌감에 몸을 비틀면서도 아까 자신이 그에게 어떤 질문을 했는지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뭐가 먹고 싶냐고 물었었나? 외관이 괜찮은 곳을 찾는다기에 호텔 이야기를 했었는데, 혹시 그때부터 잘못된 걸까? 호텔 레스토랑을 이야기한 것이었는데 그는 이런 신호로 알아들은 게 아닐까? 그렇다면 저녁 식사를 하러 가던 길에 침실로 방향을 틀게 된 것은 자신의 잘못이 맞는 것 같았다. 볼이 붉게 달아오른 채언은 아까 전 일을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쪼옥, 소리와 함께 채언의 허벅지 안쪽에서 얼굴을 떼어낸 영웅은 자신의 입술로 만들어낸 붉은 자국을 보면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저는 라이언한테 하나밖에 안 물어봤어요.”
하얀 허벅지에서 눈을 뗀 영웅은 까만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빠.”
채언의 성기를 쥔 영웅의 손이 움칫했다.
“대디…, 아!”
얼떨결에 아래쪽에 자극을 받은 채언의 가슴이 위로 튀었다.
“저는, 흣… 그거밖에 안 물어봤다고요.”
“그러니까, 그게.”
양말 신은 발이 자신을 밀어내는 느낌에 영웅은 채언의 무릎을 힘주어 눌렀다.
“채언 씨의 잘못이라는 거죠.”
“읏… 응!”
반쯤 서 있던 채언의 성기가 영웅의 입 안으로 쑤욱 밀려 들어갔다. 미끈거리는 혀에 성기가 문질러지는 적나라한 감각에 채언은 어깨를 비틀며 이불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도대체 영웅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무 쉬운 질문을 했다는 뜻일까?
“제가 잘못, 잘못했어요?”
영웅은 대답 없이 고개를 더 아래로 숙였다. 목 안에서 쿨쩍 점막이 꿈틀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흣….”
채언은 옅은 색의 머리카락이 흐린 눈앞에서 흔들리는 것을 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거운 입 안의 축축하고 여린 살이 성기에 빈틈없이 달라붙어 쾌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매번 침대 위에서 여기저기를 만져주는 영웅의 손길을 기억하고 있지만, 몇 번을 느껴 봐도 적응되지 않는 낯선 감각이었다.
“읏, 아!”
이불에 닿아 있던 채언의 허리가 위로 떠오르려 할 때마다 영웅의 커다란 손이 마른 배를 눌러왔다. 채언은 쥐고 있던 이불을 놓고 영웅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겹쳐진 두 사람의 손이 같이 움직였다. 배꼽 바로 아래서 움직임을 멈춘 영웅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채언은 다리를 움츠렸다. 링 없이 하고 싶다고 잘못된 선택을 한 날, 뱃가죽 아래쪽이 불룩 솟아오르던 감각이 선명했다. 영웅의 손바닥이 놓인 부분이 딱 그곳이었다.
채언은 고개를 틀어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영웅도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까만 눈과 마주치자 일부러 입을 더 벌려 혀로 기둥을 길게 핥아 올렸다. 손바닥에 닿은 채언의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쭈웁 빨아올리던 성기를 입 밖으로 꺼낸 영웅은 선단부터 뿌리 아래쪽까지 기둥 옆을 입술로 누르듯 쓸며 내려왔다.
“아, 흐, 으응….”
완전히 발기한 성기는 채언의 배에 바짝 올라붙어 있었다. 영웅은 어깨 위에 올려놓았던 채언의 다리를 내려놓은 뒤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손등을 잡고 있는 채언의 손을 반대로 잡아채며 침대 위로 꾹 눌렀다.
눈 밑이 붉어진 채언이 아래서 헐떡이고 있었다. 영웅은 침대 위에 한쪽 무릎을 올린 뒤 채언을 내려다보면서 자신의 벌어진 바지 지퍼 사이 속옷을 잡아 눌렀다. 갑갑한 옷감에 감춰져 있던 굵직한 성기가 그의 손에 딸려 나왔다. 완전히 발기하지 않은 것임에도 묵직했다.
채언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던 영웅은 자신의 성기를 쥔 손을 천천히 움직이면서 시선을 내렸다. 오뚝한 코를 지나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에 눈길이 닿았을 때 영웅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하. 그거 알아요?”
두어 번 더 성기를 훑어 올린 영웅은 핏줄이 펄떡이는 기둥을 놓고, 채언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집어넣어 안아 올렸다. 채언이 안정감 있게 목 뒤로 팔을 두르자 영웅은 침대 위에 대고 있던 무릎을 떼며 완전히 일어섰다. 조금 전 침실에 들어올 때와 비슷한 자세로 채언을 안고 선 영웅은 고개를 틀어 작은 귀 앞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전에 채언 씨가 여기서 날 내버려 두고 혼자 잠든 날. 방금처럼 나 혼자 했어요. 잠든 사람을 보면서.”
나직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듣고 있던 채언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언, 언제 그런.”
“오늘은 잠들면 안 돼요.”
“…잠들지 않아요.”
협탁 위를 손으로 쓸어 물건을 떨어트린 영웅은 채언을 그 위에 앉혔다. 그런 뒤 보드라운 목에 얼굴을 묻고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반듯한 콧날과 코끝이 채언의 목을 간질이며 볼에 닿았다. 깨끗한 목에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애쓰며 영웅은 턱에 힘을 주었다. 후우. 잇새로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은 몇 개?”
“오늘은….”
영웅이 서랍 손잡이에 손을 대자 채언이 양옆으로 다리를 벌렸다. 채언의 귓불을 입술 사이에 끼고 살짝 누른 영웅은 손에 잡힌 콘돔을 찢어 자신의 것에 씌운 뒤 젤과 링을 몇 개 꺼냈다.
“응? 오늘은?”
다시 한번 대답을 재촉했다.
“네 개….”
“하!”
말도 안 되는 숫자를 말하는 채언의 목소리에 영웅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채언의 허리를 끌어당긴 뒤 바짝 붙은 두 개의 성기 위에 젤을 잔뜩 뿌렸다. 젤 통을 바닥에 던져버린 뒤엔 투명하고 찐득한 액체로 번들거리는 채언의 성기를 손에 쥐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쿨쩍이는 소리가 침실을 울리기 시작했다.
“아, 흐읏, 으….”
단단한 어깨를 쥔 손가락이 티셔츠를 잡아 늘일 때쯤 영웅은 채언의 성기에서 손을 뗐다. 투명한 실이 즈윽 늘어졌다.
축축하고 뜨거운 그의 손이 채언의 다리 아래로 들어가 오금을 잡아 들었다. 무릎이 세워지며 자연스레 몸이 뒤로 밀린 채언은 벽에 등을 기댄 뒤 영웅의 목에 두르고 있던 팔에서 힘을 풀었다. 크게 숨을 몰아쉬느라 가슴이 들썩였다.
“하읍, 으응.”
미끈거리는 영웅의 혀가 채언의 입술을 가르고 들어갈 때, 마디가 굵은 손가락도 채언의 다리 사이를 함께 파고들었다. 이미 축축했던 손가락과 성기에서 흘러내린 젤이 회음부를 타고 그 아래 구멍을 적시고 있었다.
채언은 단단한 벽과 커다란 영웅의 몸 사이에 끼어 이도 저도 못 한 채 비음을 내고 있었다. 추웁, 춥 혀와 혀가 문질러지는 소리와 찔꺽이며 좁은 아래쪽을 파고드는 소리가 섞여 들렸다. 그 소리 때문에 온몸이 끈적해지는 기분이었다.
“읏. 아, 잠깐, 흐윽.”
두 번째 손가락이 한 마디쯤 밀고 들어왔을 때 갑자기 세 번째 손가락이 비좁은 구멍을 벌리며 들어왔다. 잠시 떨어졌던 입술 사이로 당황한 목소리가 내뱉어졌지만 금방 다시 말캉한 혀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미간을 좁히며 목 뒤로 타액을 삼키던 채언은 영웅이 아랫입술을 물어올 때 홱 고개를 돌려버렸다.
“으, 으… 그, 그만. 여기서는 그, 만할래요.”
“여기서 싫으면 다시 문밖으로 나갈까?”
“장, 난치지 마세요.”
주먹 쥔 손으로 단단한 어깨를 밀어보았지만, 영웅의 손가락은 몸 밖으로 빠져나오지 않았다. 뒤로 살짝 빠져나가려나 싶으면 쿨쩍이는 소리와 함께 더 깊숙이 안으로 파고들어 왔다.
“흐윽! 그만해요. 으….”
겨우 그의 상체를 조금 밀어낸 뒤 아래를 내려다본 채언은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물었다. 몸에서 흘러내린 체액과 다 녹은 젤로 협탁이 흥건했다. 부끄러운 광경에 참지 못하고 눈을 감은 채언은 애원하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손가락 말고, 이제 그냥… 그냥, 넣어주세요.”
지저분해진 협탁 위에 앉아 있는 것보다 침대 위에 눕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채언의 말을 들은 영웅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으읏!”
그의 손가락이 채언의 몸 안쪽을 쿨쩍 긁어내며 빠져나갔다. 목에 닿아오는 숨결을 느끼며 영웅은 두 팔을 채언의 무릎 아래 넣고 힘주어 들어 올렸다. 갑자기 들리는 몸에 채언은 영웅의 목 뒤로 팔을 단단히 감아 안았다.
“어? 어디….”
바로 옆에 있는 침대에 눕혀질 거라 생각했는데 영웅은 침대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여전히 신발을 신고 있는 영웅 때문에 터벅터벅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우리 나갈까?”
“어디, 어디에…! 장난치지 말라니까요?”
정말 다시 밖으로 나갈 생각인 건가? 다급해진 채언은 영웅의 품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버둥거리며 몸을 비틀었다. 그때 덜컹, 등에 벽이 닿았다. 등에 닿은 벽이 침실 문이라는 것을 확인한 채언은 눈을 굴려 영웅을 보았다.
“침대는 저쪽인데요.”
“내가 신발을 신어서 누울 수가 없잖아.”
살살 허리를 움직이는 영웅 탓에 구멍 주위에 뜨거운 성기가 문질러지고 있었다.
“네에?”
긴장하며 그를 바라보고 있던 찰나 채언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 흑…!”
갑자기 아래를 푸욱 찔러 들어오는 감각에 채언은 숨도 쉬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금방 물기가 어린 눈동자를 보며 영웅은 미약한 죄책감 비슷한 것을 느꼈지만 이제는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 한 번에 깊게 삽입된 성기를 즈윽 뒤로 물린 그는 다시 곧바로 허리를 쳐올렸다.
“으읏! …흑, 흐으….”
덜컹 문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더 깊숙이 삽입된 성기 탓에 채언은 밭은 숨을 쉬었다.
“이건, 이건, 네 개가 아니잖아요.”
아래를 직접 확인하고 싶은데 고개를 숙이다가는 자세가 비틀어져 영웅의 팔에서 다리가 빠질까 봐 무서웠다. 바들거리는 채언의 목소리에 영웅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네 개 다 끼지 말라는 거 아니었어요?”
“네?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퍼억, 또다시 아래를 올려 쳐오는 허리 짓에 채언은 짧은 소리와 함께 숨을 헉 들이마셨다.
“사기꾼. 진짜 거짓말, 읏, 아…! 흐윽.”
덜컹덜컹 계속해서 등이 문과 부딪히며 큰 소리를 냈다. 채언은 더 이상 그에게 뭐라고 따지지도 못하고 단단한 어깨를 감싸 안았다. 꿈틀거리며 아래에서 위로 파고드는 성기가 뜨거웠다.
“아! 라이언, 아! 아으.”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쾌감과 내벽이 밀리는 고통이 동시에 느껴졌다. 철썩거리며 살과 살이 부딪힐 때마다 젤과 체액이 섞여 끈적해진 액체가 거미줄처럼 늘어지기를 반복했다. 푸욱, 푹 구멍 안을 빠르게 찔렀다 나가는 성기 주변으로 자잘한 거품이 일었다.
“하윽! 앗.”
덜컹덜컹, 무릎 아래를 단단히 받친 팔 때문에 채언은 활짝 벌어진 다리를 오므릴 수가 없었다. 배 속 여기저기를 찔러 들어온 성기가 느끼는 곳을 누르고 빠져나갈 때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듯 심장까지 철렁했다.
“하지 마, 하지, 으읏, 흐… 라이언.”
짧은 손톱을 세워 영웅의 등을 긁어내리던 채언은 그를 멈추기 위해 울먹이며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하지 말라는 말과 반대로 영웅의 티셔츠에 철썩이며 부딪히는 채언의 성기는 꼿꼿하게 선 채 선액을 줄줄 뱉고 있었다.
윗입술을 핥은 영웅은 허리 짓을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 세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아, 히윽!”
아랫배를 조인 채언은 영웅을 더 꽉 끌어안으며 단단한 몸에 자신의 볼이나 이마를 마구 문질렀다. 정확하지 못한 발음으로 두서없는 말을 흘렸다. 쾅쾅거리는 문소리가 시끄럽다느니 배 속이 뜨겁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채언이 불분명한 발음으로 조각난 단어를 내뱉었지만, 영웅은 그 말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한쪽 입꼬리를 올린 그는 채언의 목을 물었다. 포근한 살 내음과 뜨겁게 꿈틀거리는 내벽이 성기를 꽉 물어오는 느낌에 이미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으읏, 흐… 으! 아, 거기.”
덜컹. 자국을 남기지 않으려고 턱에 힘을 주지 않은 상태였는데, 채언의 목소리를 들은 영웅은 자기도 모르게 하얀 목을 정말로 꽉 물어버리고 말았다.
“아, 아파, 흐윽.”
울먹이는 채언의 몸 더 깊숙이 들어가고 싶었다. 천천히 뒤로 몸을 물려 즈윽 성기를 반쯤 빼낸 영웅은 꿀꺽 목울대를 움직이며 숨을 몰아쉬다가 채언의 입에 급히 입술을 붙였다. 게걸스러운 키스에 혀와 입술이 춥춥 소리를 내며 붙었다 떨어졌다. 고개의 각도가 자꾸만 바뀌었고 빨아 당기는 혀가 누구의 것인지, 삼켜진 혀는 누구의 입술 안쪽에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읏, 흑…!”
불식간에 영웅이 허리를 쳐올리자 채언의 눈이 크게 뜨였다. 퍼억, 퍽, 퍽. 아까보다 더 거세진 허리 짓에 채언은 눈앞이 핑핑 돌았다. 몸에 힘을 주며 다리를 비틀어 보았지만, 영웅의 성기를 문 구멍을 꽉 조이며 스스로 허리를 들썩이는 꼴이 됐다. 허공에 뜬 발가락에 꽈악 힘이 들어갔다.
“아읏, 아, 그, 그만.”
채언은 자꾸만 몸이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아서, 영웅의 목 뒤에 두른 손을 겨우 움직여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쪽 손목을 잡았다.
철썩이는 소리와 함께 영웅의 골반과 닿았다 떨어지는 채언의 엉덩이는 붉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덩달아 살이 쓸려 붉어진 회음부와 몸이 흔들릴 때마다 배 위에 철썩, 문질러지는 성기 끝도 붉었다. 요도구에서 맑은 선액이 흘러내렸다. 녹은 젤이 튀어 아래쪽이 온통 엉망이었다. 뜨겁고 미끈거리는 구멍 안을 드나드는 영웅의 성기는 이미 오래전부터 번들거리고 있었다. 구멍 바깥으로 젤이 꾸역꾸역 밀려나며 흘러내렸다.
가벼운 몸을 들어 안고 있는 팔을 일부러 아래로 내릴 때마다 채언의 배 안쪽 더 깊숙이 길을 낼 수 있었다. 좁은 내벽 안에서 더 쫀쫀하게 좁아 드는 부분까지 파고들어 간 영웅은 퍼억, 한 번 더 허리를 세게 쳐올렸다.
“히윽!”
손에 땀이 나 잡고 있던 손목을 놓친 채언의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쾅! 소리와 함께 땀에 젖은 채언의 등이 문에 눌렸다. 꾸욱 뱃가죽을 뚫을 듯 눌러오는 감각에 채언은 헉하고 숨을 멈췄다. 하지만 철썩이며 살 부딪히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아랫배에 꽈악 힘을 주어봤지만 뜨거운 성기는 자꾸만 몸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열기에 달아오른 두 사람의 얼굴이 붉었다.
“안, 돼. 안 돼요.”
“뭐가? 채언아, 응? 하아….”
채언은 두 손으로 영웅의 어깨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위아래로 흔들리는 몸이 떨어질까 무서웠지만, 배 속을 파고드는 성기에 몸 안쪽이 망가질까 봐 더 무서웠다. 그런 와중에도 등을 타고 오르는 쾌감에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흐, 읏… 아파, 무서워요.”
“아프기만 해?”
영웅은 찡그린 채언의 눈가와 붉어진 볼을 집요하게 바라보며 계속해서 허리를 움직였다. 조금만 더, 더 안쪽으로. 미간을 좁히며 퍼억 소리 나게 살을 부딪쳤다. 땀에 젖은 채언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안 돼, 안 돼…”
이러다간 정말 큰일이 나고 말 것 같았다. 채언은 영웅을 밀어내는 팔에 더 힘을 주며 겨우 그의 몸을 뒤로 밀어냈다. 밭은 숨을 쉬며 문에 머리를 기대자 영웅이 거친 숨소리를 내며 마른 입술을 핥았다.
“여기, 여기까지 들어와서….”
영웅의 어깨를 밀어내던 채언의 손 중 하나가 마른 배 위로 툭 떨어졌다. 잘게 떨리는 손을 움직인 채언은 자신의 배꼽 아래를 문지르며 울먹였다.
“더하면, 정말, 안, 안 돼요.”
채언의 손과 순한 눈꼬리를 번갈아 보던 영웅은 꿀꺽 목울대를 움직였다. 안타깝게도 자신을 멈춰 보려는 채언의 말과 행동은 씨알도 먹히지 않고, 오히려 음심을 자극하고 말았다. 아까부터 채언이 내뱉는 모든 말이 그랬다.
“그러니까, 그만해야, 흐, 끅!”
쾅 소리와 함께 영웅의 성기가 채언의 몸 안 깊숙한 곳을 뚫고 들어갔다.
“흣.”
점점 좁아지는 내벽을 밀고 들어가자 빠듯할 정도로 아래가 조여 왔다. 아까보다 더 납작하게 문과 영웅의 몸 사이에 끼인 채언은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그의 성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손바닥에는 불룩 뱃가죽을 뚫을 듯 밀고 들어오는 영웅의 성기가 그대로 느껴졌고 손등에는 그의 몸에 눌린 자신의 성기가 닿아 문질러지고 있었다.
깊게 숨을 내쉬지 못하고 내뱉는 채언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턱 아래로 흘러내렸다. 크게 들썩이는 영웅의 가슴이 채언의 맨가슴에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옷감에 스치는 채언의 붉은 젖꼭지가 빳빳하게 서 있었다.
“아, 아! 읏, 으.”
채언은 허공에서 다리를 흔들며 신음했다. 턱을 타고 흐르는 타액을 닦지도 못하고 겨우 목구멍을 올각거렸다. 허공에 뜬 발가락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눈앞이 흐려질 정도로 고통스러운 쾌감이었다. 영웅에게 안긴 채로 침실에 들어온 것은 여러 번 있었으나 이런 자세로 들어 올려져 박히는 것은 처음이었다.
“흣, 흐으….”
채언은 영웅의 어깨에 겨우 이마를 기댔다. 몸이 아래로 떨어질 때마다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깊게 그의 성기가 내벽을 밀고 들어왔다. 꿰뚫리는 듯한 쾌감이 무서워 영웅의 목을 단단히 잡고 몸을 추켜올려 보아도 커다란 성기를 몸 밖으로 빼낼 수가 없었다.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다시 한번 엉덩이를 들어 올리려 애쓰던 순간 채언은 팔을 삐끗하고 말았다.
“아윽!”
조금 올라갔던 몸이 아래로 쑤욱 꺼지며 내장이 밀려날 듯 깊숙이 성기를 받았다.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채언의 몸이 뒤로 휘며 부들거렸다. 쿵! 머리를 문에 기댄 채언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하아.”
작은 구멍이 성기를 꽈악 물어오는 느낌에 영웅은 미간을 찌푸리며 만족스러운 숨을 뱉어냈다. 더 이상 안쪽을 파고들 수도 없을 만큼 아래쪽이 꽈악 맞물린 느낌이었다. 뿌리 끝을 끊어낼 듯 조이는 구멍 때문에 뇌가 녹아내릴 듯 황홀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움직임을 멈춘 영웅은 거친 숨을 쉬며 채언의 상태를 살폈다. 팔에 닿는 하얀 허벅지 안쪽이 잘게 경련하고 있었다. 조금 전 아래를 꽉 조여오던 느낌이나 조용히 기대오는 반응을 보자니 사정한 것 같았는데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나 채언의 몸 어디에도 하얗게 분출된 정액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채언의 성기는 여전히 꼿꼿이 서 있는 상태였다.
파들거리는 손이 목덜미를 간질이는 느낌에 영웅은 채언의 얼굴에 입술을 가져다 댄 뒤 말랑한 볼을 살짝 물었다.
“라이, 라이….”
자신을 불러오는 작은 목소리에 응? 하고 대답한 영웅은 물고 있던 볼을 놓아주며 다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금방 흡, 하고 숨을 참는 소리가 들려왔다.
코끝으로 하얀 목을 간질이듯 긋자 채언이 몸을 비틀며 우는 소리를 냈다. 사정한 것과 같은 쾌감이 온몸을 훑고 지나간 것이 바로 조금 전이었다. 살짝 맞닿는 살결이 온통 예민했다.
“아, 싫어. 움직이면 안… 돼.”
채언의 턱 끝을 잘근거린 영웅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조금만 더, 응?”
“아니, 읏!”
채언의 등에 닿은 문이 덜컹거렸다. 뭉근하게 허리를 움직이던 영웅이 다시 무자비하게 채언의 몸 안쪽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아윽, 으으….”
채언은 몸 사이에 끼어 있던 손을 겨우 꺼내 영웅의 어깨를 붙잡았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의 느낌에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뜨거운 성기가 배 속을 헤집듯 들어올 때마다 목 근처가 서늘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각이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붉어진 눈가를 찌푸린 채언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겨우 입을 열었다.
“화장, 실. 흐으, 가야 하, 아!”
구멍 사이를 꾸역꾸역 비집고 들어오는 굵은 성기의 느낌에 채언은 발가락에 힘을 주며 몸을 비틀었다.
“응? 하아… 뭐라고?”
“느낌이, 이상, 이상해.”
조금 전까지 경련하던 허벅지에 힘을 준 채언은 영웅이 자신에게 하던 것처럼 맥박이 펄떡이는 그의 목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힘없이 입을 벌려 영웅의 목덜미를 잘근거려보았다. 아까 그에게 목을 물렸을 때 아팠으니, 이만큼 아팠다는 걸 돌려 표현하면 몸을 놔주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였다.
하지만 채언이 선택한 방법은 또 틀리고 말았다. 어린 동물이 이갈이하듯 힘 빠진 턱으로 물어오는 것은 서툰 애무에 더 가까웠다.
“조금 더 세게 씹어줘요.”
“읍….”
추웁 쭙, 정신없이 혀와 입술이 얽혀들었다. 채언의 입 안은 뜨겁고, 건조했다. 그 사이로 뜨겁고 축축한 혀가 들어와 온통 헤집고 있었지만 채언은 어떤 반항도 할 수 없었다. 빳빳이 선 채로 사정하지 못해 아픈 성기가 또다시 몸 사이에 눌려 비벼지고 있었고, 영웅의 성기는 몸 안쪽 성감대를 긁어대며 배 속을 쳐대고 있었다.
“으응, 읏.”
배뇨감이 들어 구멍과 다리 안쪽에 힘을 주면 줄수록 엉덩이 사이에서 철썩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간격이 짧아졌다.
“흐으…!”
입술이 꽉 막혀버린 탓에 뭐라고 소리칠 수도 없게 된 채언은 손에 쥔 영웅의 티셔츠 목덜미를 꽈악 잡아당겼다. 까만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쯔걱 쯔걱. 핏줄이 펄떡이는 검붉은 성기가 빠르게 구멍 안을 드나들었다. 성기의 가장 굵은 부분이 내벽을 긁을 때마다 채언은 손에 잡히는 영웅의 티셔츠를 잡아당겼다. 안 돼, 안 돼, 안 돼. 속으로 말을 삼키고 있었지만,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쿵쿵. 지금 들리는 것이 문이 흔들리는 소리인지 심장이 뛰는 소리인지 채언은 구별할 수가 없었다.
격렬한 움직임에 구멍 밖으로 다 밀려 나온 젤은 두 사람의 몸 이곳저곳에 흘러내린 것도 모자라 침실 바닥에 점점이 떨어진 상태였다.
사정감이 밀려든 영웅은 채언의 목구멍 깊숙이 혀를 밀어 넣으며 문 쪽으로 몸을 더 밀착했다. 꾸욱 허리를 누르자 헉 숨을 마신 채언이 마구 도리질 치다가 영웅의 입술을 깨물며 옆으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동시에 씹는 듯 아래를 물어오는 감각에 영웅은 눈가를 찌푸리며 가슴을 크게 들썩였다.
“하아…, 하.”
그는 사출하는 순간 채언의 목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마셨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운 향기에 몸 구석구석이 따끈해지는 느낌이었다.
보드라운 목에 입을 맞춘 영웅은 잘게 떨리는 채언의 어깨에 얼굴을 문지르며 사정의 여운을 즐겼다.
“…내려, 주세요.”
영웅의 티셔츠를 잡고 있던 채언의 손이 그의 어깨를 꾸욱 누르며 밀어내기 시작했다. 조금 전과 달리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제야 자신이 조금 과했나 싶어 양심에 찔린 영웅은 채언의 볼에 쪽, 쪽 입을 맞추며 달래듯 말했다.
“우리 조금 쉬었다가 다시 나가서….”
“내려주세요.”
단호한 요구에는 싸늘함이 섞여 있었다. 눈을 끔뻑거리던 영웅은 몸을 낮춰 채언의 다리를 한쪽씩 내려주었다. 딱 달라붙어 있던 하반신이 떨어지자 작게 차륵, 하고 액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읏.”
여전히 삽입되어 있던 성기가 즈윽- 툭, 채언의 몸 안에서 빠져나왔다. 힘 풀린 다리 때문에 비틀거리는 채언의 허리를 잡아챈 영웅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자신이 입고 있는 티셔츠나 바지가 이상할 정도로 축축했기 때문이다. 고개를 숙여 몸을 내려다본 영웅은 옷을 적시고도 모자라 바닥까지 흐른 액체를 보고 눈을 끔뻑였다.
“채언….”
“제가, 그래서….”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쥔 채언은 충격받은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이 나이를 먹고서 어떻게, 그것도 이런 상황에서,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이런 실례를 해버리다니. 뭐라고 말을 하지도 못하고 입술을 달싹거리던 채언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제가, 그래서, 제가… 화장실 가고 싶다고….”
젖은 티셔츠를 만져보던 영웅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훌쩍이는 채언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음, 채언 씨, 그러니까 이건.”
말없이 훌쩍이던 채언은 자신의 허리를 감싸오는 영웅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요. 아니, 미안해요. 많이 무서웠어요? 채언 씨 우리….”
채언은 아무런 대꾸 없이 영웅을 데리고 욕실 앞으로 걸어갔다. 가끔 비틀거릴 때는 어김없이 영웅의 팔에 몸을 기대어야 했다.
욕실 문을 연 채언은 영웅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래요. 우리 같이 씻고 조금 쉬었다가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요?”
일부러 목소리 톤을 높이며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간 영웅은 채언에게 손을 뻗으려 했다.
“채.”
타악. 눈앞에서 닫힌 문에 깜짝 놀란 영웅은 한쪽 손을 든 채로 멈춰 있다가 서둘러 문손잡이를 잡았다. 분명 침실 문도, 발코니 문도 닫혀 있었지만, 아무튼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문이 닫힌 듯했다. 자신이 문을 쾅 닫은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영웅은 급히 문고리를 돌렸다. 그런데 문고리에 뭐가 걸린 듯 덜컥였다.
“채언 씨, 문 이거 내가 닫은 거 아니에요! 바람 때문에 이게 닫혔어요!”
“나오지 마세요.”
“뭐라고요?”
“나오지 말라고요.”
“그게 무슨, 채언 씨가 손잡이 잡고 있는 거예요?”
당황한 영웅이 욕실 안에서 문을 쿵쿵 두드렸다. 채언은 훌쩍이며 문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제가, 흐… 제가 치우는 동안 씻으세요.”
“아니 채언 씨, 밖은 내가 치울 테니까 우리 같이 씻으면 안 될까요?”
덜걱거리는 문손잡이가 돌아가지 않게 꽉 쥔 채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지금 나오면 앞으로 흑, 저는 이 침실에, 절대 안 들어올 거예요.”
덜그럭거리던 소리가 멈췄다. 대신 애절한 목소리가 욕실 안쪽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니이.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내가 너무 심했죠? 앞으로는 우리 침대에서만 해요. 응?”
얼른 씻고 나갈 테니 쉬고 있어라. 흙 발자국과 또 다른 흔적은 자신이 치우겠다. 영웅이 끊임없이 내뱉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채언은 서럽게 코를 훌쩍이다가.
“씻고 나오세요.”
한마디를 한 뒤 발걸음을 옮겼다. 젖은 양말이 축축해 울컥 서러움이 올라오는 바람에 턱에 힘을 주어야 했다.
채언은 자꾸만 내려가는 입꼬리에 힘을 주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복도 끝방 욕실을 사용한 것도, 이곳 침대에 누워본 것도 오랜만이었다. 한동안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방이었다. 덕분에 침구는 새것처럼 깨끗했지만 그래서 채언은 잠이 오지 않았다.
얼굴을 묻고 있는 베개에서는 아무런 향기가 나지 않았다. 언제나 허리에 팔을 둘러 껴안아 주던 영웅도 옆자리에 없었다.
오랜만에 재미있는 영화를 봐서 기분이 좋았는데, 조금 전 자신이 침실에서 저지른 일만 생각하면 손가락이 안쪽으로 곱아들었다. 그래놓고 여기로 도망 오다니. 채언은 침대를 팡팡 치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곤했다.
채언은 베개를 꽉 끌어안으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곧바로 잠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눈꺼풀이 무거웠지만, 옆에서 체온을 데워 주는 사람이 없으니 오늘 밤은 잠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방문 밖에서 채언아! 채언 씨! 하고 부르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영웅은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옆방에 들어간 듯했다.
검색을 해봤다며 스쿼팅에 대해 말을 늘어놓던 그였다. 그런 것에도 따로 명칭이 붙어 있는지 몰랐던 채언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영웅의 설명을 듣다가 제발 그만 말하라고 소리쳐야 했다.
그러자 애절하게 함께 침실로 돌아갈 것을 청하던 영웅은 돌연 엄한 목소리로 저녁 약을 먹어야 하니 방문을 열 것을 요구해 오다가, 안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아서 먹고 들어왔다고 대답하니 잘했다며 다시 다정한 목소리로 맛있는 것을 먹으러 나가자고 회유해 왔다.
하지만 정말로 그의 옷에 실례한 게 아니라 하더라도 채언은 창피한 마음이 드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침실의 젖은 바닥을 대충 닦아낸 뒤 가운 한 장만 훌렁 들고 도망쳐온 꼴도 볼품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끝내 오늘 하루는 떨어져 자는 게 낫겠다고 선언하자 영웅은 그럼 제일 가까운 옆방 문을 열어두고 있을 테니 언제든지 몰래 들어오라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그게 문밖에서 마지막으로 들려온 목소리였다.
그때로부터 시간이 꽤 지난 듯했다. 자신이 피곤한 만큼 그도 피곤할 테니까 지금쯤 잠들지 않았을까? 채언은 손가락으로 시트를 긁으며 확신 없는 생각을 했다. 조용히 침실에 들어가서 영웅이 항상 베고 자는 베개만 몰래 가져올까 싶었다. 그의 향기가 나는 베개라도 안고 있으면 잠이 올 것 같았다.
채언은 그렇게 몇 분 더 고민하다가 몸에 덮고 있던 이불을 내렸다. 침대 아래로 발을 뻗자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에서 둔통이 느껴져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이제 다리가 풀려 넘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문에 귀를 대고 바깥 소리를 들어보던 채언은 고요한 복도를 예상하며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문틈 사이로 살펴보니 옆방의 불은 켜져 있지 않았다. 걸치고 있는 가운을 추스른 채언은 심호흡을 하며 끝방을 나섰다.
슬리퍼도 신지 않은 맨발로 복도를 조심조심 걸었다. 발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니 안 그래도 뻐근한 몸이 후들거리는 것 같았다. 잠시 복도에 몸을 기대 쉬려다가 가운과 벽지가 스치는 소리가 들려 숨을 흐읍, 참아야 했다.
중간 방을 지나가기 전에는 열린 문 안쪽을 슬쩍 훔쳐보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영웅은 창가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잠든 듯했다. 자신이 옆에 없는데도 잠이 잘 오나 싶어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방 안에 들어가 그의 등을 껴안고 누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입술이 불퉁하게 나오려는 것을 꾹 눌러 참고 손가락으로 벽을 긁던 채언에게서 결국 서러운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뒤로도 얼마간 애타게 돌아누운 등을 바라보고 있던 채언은 겨우겨우 무거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휴우.”
침실 문을 닫고 등을 기댄 채언은 눈을 감고 숨을 내쉬었다. 다시 끝방으로 돌아갈 때도 영웅에게 들키지 않기를 바라며 천천히 눈꺼풀을 올렸다. 문 옆에 있는 버튼을 눌러 조명을 켜자 은은하게 불이 들어왔다.
불을 켜자마자 보이는 것에 채언의 몸이 움찔 떨렸다. 등 뒤의 문이 덜컹거리자 황급히 문에서 몸을 뗀 채언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침대 근처에 자신의 운동화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아까 영웅이 자신을 안고 문 쪽으로 올 때 발에 챈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 문 앞에서….
도리도리 고개를 저은 채언은 운동화를 줍기 위해 걸었다. 한번 달아오른 얼굴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분명 아까 바닥을 닦았는데 찰싹찰싹 부딪히는 발소리가 찰박거리는 듯해 더 부끄러웠다.
‘아프기만 해?’
나지막한 영웅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물론 아프기만 한 건 아니었지만….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언은 운동화를 줍는 대신 침대 옆으로 다가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영웅의 베개를 가져와 끌어안은 뒤 손바닥 대신 폭신한 베개에 볼을 기댔다. 바디워시와 샴푸 향, 그리고 영웅의 체향이 섞여 좋은 향기가 났다.
침실로 돌아가자고 한 번만 더 말했으면 못 이긴 척 문을 열고 나갔을 텐데. 딱 한 번만 더 말해 보지. 그랬으면 지금쯤 같은 침대에 누워 끌어안고 있었을 텐데. 서러움에 눈꼬리가 처진 채언은 무거운 눈꺼풀을 감고 베개에 코를 박았다.
“흐음.”
누운 채로 슬쩍슬쩍 방문을 돌아보던 영웅은 다시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미간을 좁혔다. 아까 분명 채언이 문가에서 기웃거리는 게 느껴졌는데. 삐진 강아지 소리가 들렸는데. 들어와라, 들어와라, 제발 한 걸음만! 바라며 한참을 기다려보아도 방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물을 마시고 오려는 건 아닐까 생각해보았지만, 복도를 걸어간 채언은 다시 복도 끝으로 돌아오지도 않았다.
소파나 식탁에 앉아 있는 건가? 밖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머리를 굴리던 영웅은 결국 참지 못하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채언은 혼자 TV를 틀어놓고 드라마를 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채언이 방심했을 때 얼른 낚아채 와야 할 것 같았다.
침대를 내려와 성큼성큼 방을 걸어 나간 영웅은 복도 끝에 보이는 거실 불이 꺼져 있어 당황했다. 그래도 거실까지 걸어가 카펫과 소파, 트리 뒤쪽과 부엌 식탁까지 확인해 보았는데 채언은 온데간데없었다.
혹시 자신이 모르는 사이 정말 살금살금 걸어 끝방으로 돌아간 건가 싶어 황급히 왔던 길을 되돌아가 끝방 문손잡이를 돌려 보았지만 그 안에도 채언은 없었다. 눈가를 좁힌 영웅은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아직 찾아볼 곳이 한 군데 더 남아 있었다.
바삐 걸어 침실 앞에 선 영웅은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약한 불빛이 방문 아래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문고리를 잡은 영웅은 가련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채언 씨이, 여기 있어요?”
예상대로 채언은 침실 안에 있었다. 그런데 침대 위가 아니라 바닥에 앉은 채로 침대 모서리에 둔 베개를 껴안고 있었다. 분명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을 텐데, 채언은 그 상태로 잠이 든 것처럼 미동이 없었다.
“왜 거기 앉아 있어요?”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토라진 기색도 느껴지지 않았다. 발소리를 죽이며 침대 옆으로 다가간 영웅은 채언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일정한 속도로 오르내리는 등과 숨소리를 듣자 하니 정말로 잠이 든 것 같았다.
“채언 씨.”
조용히 불러보았지만, 여전히 채언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영웅은 고개를 들어 침대 위에 하나 남아 있는 베개의 위치를 살폈다. 채언이 베고 자는 베개는 얌전히 제 위치에 놓여 있었다. 영웅은 입술 앞에 주먹을 가져다 대며 웃음을 참았다.
베개 두 개는 커버도 솜도 똑같은 것이었는데 채언은 항상 자신의 베개를 탐내고는 했다.
아침에 먼저 일어날 일이 생겨 허리를 안고 있는 팔을 풀면 잠결에도 금방 몸을 뒤척이는 채언이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이 베고 있던 베개를 안겨주면 조용해졌다. 그리고 꼭 끌어안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알아서 다시 잠드는 것이었다.
조금 늦게 잠자리에 들 경우에도 그랬다. 보통은 자신이 옆자리에 누울 때까지 기다렸다 잠드는 채언이었지만 피곤한 날은 먼저 잠들기도 했는데, 본인 베개는 멀리 두고 옆에 놓아둔 자신의 베개 끄트머리에 누워 있곤 했다.
혹시 다른 베개를 베고 자는 것이 불편하냐고 물어보았는데 그건 아니라고 했다. 베개 두 개의 위치를 바꿔줄까 했더니 또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것이었다.
아마도 채언이 자신의 베개를 탐내는 이유는 자신이 종종 채언을 끌어안고 목에 코를 박는 이유와 비슷한 듯했다.
“채언아, 자?”
영웅은 상체를 숙여 채언의 동그란 뒤통수 가까이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그래도 대답 없는 뒷모습을 보면서 작게 미소 지은 그는 검은 머리카락에 살짝 입을 맞춘 뒤 조심히 팔을 뻗었다. 침대 모서리에 기대어져 있던 베개가 투욱, 바닥으로 떨어졌다.
채언을 안아 침대 위에 내려놓은 영웅은 살며시 팔을 빼내려다 몸을 굳혔다. 잠결에 따듯한 체온을 따라 옆으로 돌아누운 채언이 팔 안쪽에 이마를 기대었기 때문이다.
영웅은 바닥에 떨어진 베개를 줍는 것을 포기하고 채언의 옆에 누워 이불을 끌어 올렸다. 잠옷도 입지 못한 채 가운 한 장만 걸치고 끝방으로 도망갔을 채언의 모습이 떠올라 미간에 꾸욱 힘이 들어갔다. 미안한데 귀엽고, 짠하고, 사랑스러웠다. 영웅은 앞으로는 절대 채언을 무섭게 채근하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그런데 자신 또한 가운 한 장만 걸친 것은 마찬가지였다. 급히 몸을 씻고 욕실을 나와 보니 채언이 없어서 젖은 발로 복도를 뛰어가 잠긴 방문을 두드렸었다. 오늘은 얼떨결에 커플 가운이 커플 잠옷이 된 셈이었다.
가끔 입술을 작게 우물거리는 게 유일한 잠버릇인 채언의 얼굴을 바라보던 영웅은 조용히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아무튼 도망간 채언을 낚아채는 데 성공했으니 자신도 곤히 잘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을 뻗으면 조명 불빛을 끌 수 있었지만 움직이면 채언의 단잠을 방해하게 될 것 같았다. 영웅은 고민 없이 채언의 머리를 품에 꼭 안아 불빛을 가려주었다.
이른 새벽. 잠이 깬 채언은 자연스럽게 눈을 떴다. 허리에 둘린 익숙한 무게감과 코끝에 닿아오는 향기에 기분이 좋았다.
눈앞에 보이는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더 깊숙이 안기던 채언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몸에 닿는 감촉 때문이었다. 평소처럼 보들보들한 잠옷의 느낌이 아니었다. 물론 잠옷을 입지 못하고 잠드는 날도 자주 있긴 했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멍하니 영웅의 발등에 자신의 발을 얹고 꼼지락거리던 채언이 순간 동그랗게 눈을 떴다.
어제 분명히 각자 다른 침대에 누워 자기로 했는데 왜 자신은 지금 영웅의 품에 안겨 있는 걸까.
“…으음, 일어났어요?”
그때 영웅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품 안의 채언을 꽉 끌어안은 그는 가늘게 뜬 눈으로 시계를 확인한 후, 더 자라며 채언의 등을 토닥였다.
“우리 왜 여기 누워 있어요?”
하지만 채언은 영웅의 다정한 손길에 방심하지 않고 물었다.
“…응, 자자.”
잠시 말이 없던 영웅은 동문서답을 하며 결 좋은 까만 머리카락에 턱을 문질렀다.
곰곰이 무언가 생각하던 채언은 팔을 들어 영웅의 몸을 끌어안았다. 자신은 어젯밤 베개를 가지러 왔다가 그만 침실의 익숙함과 포근함에 취해 잠든 게 분명했다. 그런데 분명 어제 다른 방에서 등을 돌린 채 자고 있던 영웅은 언제 침실로 온 것일까.
그나저나 어젯밤에는 너무 정신이 없었고, 영웅의 얼굴을 어떻게 다시 볼까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는데, 이렇게 보통날과 다름없이 서로 껴안고 누워 있으니 그를 마주하는 것이 부끄럽기보다 좋기만 했다.
사실 보통 연인들은 종종 그렇게 격렬한 관계를 가지는 거 아닐까? 자신은 어젯밤을 비교군으로 삼을 경험이나 배경지식이 없어 과하게 부끄러워한 것일지 몰랐다. 스쿼팅도 이미 ‘스쿼팅’이라는 단어로 쓰이고 있었으니까. 문어나 오징어는 생긴 게 이상하지만 어쨌든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먹어 와서 흔히 먹는 것이 된 것처럼 이 모든 게 이상하긴 해도 아주 평범한 일일지 몰랐다.
어젯밤 문밖에서 스쿼팅 뭐라 뭐라 설명하던 영웅의 목소리를 떠올린 채언은 앞으로 둘만 있는 침실 안에서 벌어지는 일 가지고는 그를 피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분명 어제 한 섹스가 좋지 않았던 건 아니니까. 앞으로는 조금 더 과감해질 것을 마음먹은 채언의 얼굴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영웅의 넓은 가슴에 이마를 기대고 있던 채언은 그가 자신처럼 가운 한 장만 걸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항상 잠옷을 챙겨 입고 자는 사람이 왜 가운을 입고 있을까 생각하던 채언은 어젯밤 창문 쪽을 바라보고 누워 있던 영웅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라이언, 혹시….”
대꾸 대신 자는 척을 하는 게 분명한 숨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어제 제가 없어서 잠이 안 왔어요?”
씻고 나오랬다고 급히 샤워를 한 뒤 가운 한 장만 걸치고 달려왔을 영웅을 생각하니 채언의 입꼬리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나오면 앞으로 완전히 침실을 옮겨버리겠다고 했더니 욕실에서 물을 틀어놓고 자기는 지금 정말로 샤워하는 중이라며 틈틈이 본인의 상태를 알려왔던 그였다.
채언이 자신의 볼을 문지르기 위해 영웅을 안고 있던 팔을 풀어내던 찰나, 커다란 손이 손목을 잡아 왔다. 채언의 손을 다시 자신의 등으로 원위치시켜놓은 영웅은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힘없이 말했다.
“어젯밤엔 유령처럼 혼자 이 집 안을 돌아다녔어요.”
영웅의 가운을 꽈악 잡은 채언은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
“저….”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나와 채언은 괜히 헛기침을 한 번 해야 했다.
“저,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서만 잘게요.”
“당연한 얘기를.”
괜히 몸이 간지러워진 채언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영웅의 다리에 얽혀 있는 자신의 다리를 슥슥 움직였다.
영화 데이트의 끝이 좋지 않아 시무룩했었는데 어제 한 데이트의 진짜 끝은 지금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하루는 24시간이니까 어제 영화를 보러 나간 시각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합치면 하루가 지났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채언은 이번 데이트는 망치지 않고 잘 끝낸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영화 되게 재미있었어요.”
채언의 말에 영웅은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다음 주에 보기로 한 애니메이션도 어제 간 자동차 극장에 가서 볼까요?”
“애니메이션이라고 해도 내용이 조금… 무서울 수 있으니까 자동차 극장에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알겠어요. 그럼 다음 주에 또 거기 가는 걸로 해요.”
다음번 데이트 약속이 잡힌 것에 만족하며 눈을 감은 채언은 어제 본 영화 생각을 했다. 다음 편을 오래 기다려야 하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기다리는 동안 또 볼 수 있는 영화가 잔뜩 개봉할 거라는 기대감에 기분이 좋았다.
방금 겨우 웃음을 참아 냈던 영웅은 이번에는 미간을 좁히며 얼굴을 찡그렸다. 채언이 어제 차 안에서 그랬던 것처럼 어제 본 영화 OST를 작게 흥얼거렸기 때문이다.
“맞다, 그런데 있잖아요.”
채언이 고개를 들어 영웅을 마주 보려 했다.
“응?”
하지만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채언에게 보여줄 수 없는 영웅은 안고 있는 작은 머리를 놓아주지 않고 대답했다.
별다른 반항을 하지 않고 가운이 벌어져 드러난 영웅의 맨가슴에 이마를 기댄 채언은 눈을 깜빡이다가 머릿속에 남아 있는 의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제가 어제 물어본 거요.”
“어떤 거?”
“…요.”
채언은 목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입술을 뻐끔거렸다.
“응? 뭐라고요?”
영웅은 채언을 안고 있던 팔에서 살짝 힘을 풀어냈다. 스윽, 고개를 든 채언은 영웅의 초록색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손으로 침대를 밀고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는 손나팔을 만들어 영웅의 귓가에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아빠. 그러는 거요.”
손나팔을 치우고 영웅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언은 그의 가운을 손가락으로 살살 긁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그게, 욕… 비슷한 건가요? 영화에서 은어로 사용한 건가 해서요.”
어제 이것에 대해 물어봤을 때 난감한 기색을 보이며 끝내 대답해 주지 않았던 영웅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곧바로 나오는 대답이 없었다.
말없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는 영웅을 보면서 채언이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 눈부셔요?”
막 잠에서 깬 사람에게 침실 조명이 너무 밝은가 해서 채언은 영웅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덮어주었다.
“아빠 맞아요.”
“네? 뭐가요?”
“영화에서 그냥 아빠, 그 의미로 쓰인 게 맞다고요. 어린애들이 대디라고 해요. 조금 크면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고.”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인 채언은 옆으로 손을 뻗었다. 곧 완전히 해가 뜰 테니 아예 불을 끄거나 더 어둡게 불빛을 조절하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 저처럼 다 큰 사람들은 안 쓰는 말이라는 거죠? 그래서 둘이 하는 말이 달랐구나.”
주인공과 주인공 동생이 각각 다른 단어를 사용하던 장면을 떠올리며 채언은 리모컨을 잡았다.
“그러면 그걸 잘 모르고 저 같은 사람이 대디라고 말하면 좀 부끄러운 걸까요? 그래서 저한테 잘못했다고 한 거예요? 그런데 저는 어릴 때 학교에서, 앗!”
갑자기 허리를 끌어당기는 팔 힘에 몸이 무너질 뻔한 채언이 침대 헤드를 짚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부끄러운 단어 맞으니까 그만 말하는 게 좋겠어요.”
“네? 영어 잘 모르는 외국인은 모르고 쓸 수 있는 거 아닌가….”
갑자기 영어 선생님에게 혼나는 듯한 기분이 든 채언은 머쓱하게 말끝을 흐렸다.
“채언 씨, 난 진짜 이상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채언은 대답 없이 영웅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난 진짜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 알아둬요.”
“그런 사람?”
활짝 벌어진 채언의 가운 양쪽을 두 손으로 잡고 천천히 잡아당긴 영웅은 채언의 상체가 앞으로 숙여지자 입을 벌려 지난밤의 여파로 아직 부어 있는 젖꼭지를 물었다.
“아, 저기.”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당황한 채언의 두 손이 침대 헤드를 타고 주욱 미끄러졌다.
“갑자기 무슨!”
당황한 채언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영웅은 가운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채언의 허리를 한쪽 팔로 끌어안았다.
쭈웁 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가슴에서 느껴지는 간지러운 감각에 채언은 손에 쥐고 있던 리모컨을 놓치고 말았다.
커튼을 치지 않은 방 안은 점점 더 밝아지고 있었다. 한 손으로 침대를 밀며 일어나 비스듬히 몸을 세운 영웅은 어느새 단단히 선 채언의 젖꼭지를 혀로 핥은 뒤 고개를 들었다. 영웅이 헤드에 기대며 바로 앉자 그의 배 위에 앉아 있던 채언의 몸이 단단한 복근을 타고 아래로 미끄러졌다. 둘 다 가운이 거의 풀어진 상태였다.
채언의 까만 눈동자에 당혹스러움이 서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어느 시점에서 그가 흥분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엉덩이에 닿는 영웅의 성기가 발기한 것이 느껴졌다. 아침이라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갔다기엔 과할 정도였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상한 사람이 맞는, 것 같기도 해요.”
그 말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영웅은 채언의 몸을 꽉 끌어안으며 말랑한 볼에 쪽 뽀뽀했다. 그리고 볼 바로 옆 보들보들한 귓불을 입술 사이에 물고 늘여 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채언에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어요. 채언 씨가 나한테 이상한 말을 했으니까. 대디라니….”
“저 이해가 안 되는데요. 그게 왜 부끄러운 말이에요? 어제 본 영화도 이상한 거 아니었잖아요.”
“왜냐면.”
작은 머리를 한 손으로 감싼 영웅은 다시 채언의 귓가에 속삭였다. 잠자코 그의 말을 듣던 채언의 얼굴이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네? 저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닌데요!”
계속해서 은밀한 목소리가 채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으, 그만, 그만 말해요. 안 들을래요.”
민망함에 눈을 굴리던 채언은 영웅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툭 쳐대며 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러나 영웅은 끝까지 말을 마치고서야 채언의 머리를 놓아주었다. 채언은 곧바로 자신의 두 귀를 손으로 막고 문질렀다.
“그래서 어제 그렇게….”
말끝을 흐린 채언은 귀를 막고 있던 손을 내리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영웅에게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면서요! 그런 말 좋아하지도 않고!”
자신은 이런 식의 더티 토크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며 조금 전 예시 문장을 몇 가지 속삭이던 영웅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를 간질이는 기분이었다.
“그렇죠.”
“그럼 이건 뭔데요.”
채언은 차마 엉덩이 사이에 닿는 것을 만지지 못하고 시선만 잠시 내렸다 올렸다. 영웅은 뻔뻔할 정도로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가요? 이건 그런 말들이랑 전혀 상관없는 반응일 뿐인데.”
은근히 허리를 움직이며 하는 말에 채언은 미간을 좁혔다.
“상관없는 반응이라고요?”
영웅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댄 채언은 침을 꼴깍 삼킨 뒤 조금 전 영웅이 자신의 귓가에 속삭였던 말 몇 가지를 응용해 만든 문장을 속삭였다. 그러자 허리에 둘린 단단한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래쪽에 맞닿는 영웅의 하반신 또한 더욱 뜨겁게 밀착되었다.
작은 실험을 끝낸 채언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거 봐요. 상관없다고 했으면서 지금, 이건….”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의 눈빛이 그렇게 강렬할 수가 없었다. 어젯밤에 이어 오늘 아침까지 영웅의 짙은 초록색 눈동자가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것에 부담스러워진 채언은 슬쩍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는 배고파서 먼저 일어나야겠어요.”
계속 이렇게 맨살이 닿는 건 아무래도 위험할 듯했다. 채언은 침대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 영웅의 가슴을 손으로 밀며 무릎을 세웠다.
“채언아.”
“네?”
영웅의 팔이 채언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우리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네, 그게 좋겠어요. 저는 배고파서, 지금 나갈까요? 이제 해도 떴으니까요.”
발코니 쪽을 힐끔거리는 채언을 바라보며 영웅은 몸에 대충 걸치고 있던 가운을 훌렁 벗어버렸다.
“그래, 나가자. 조금만 더 여기 있다가 브런치 먹으러.”
“아니, 아니, 저는 지금!”
말랑한 혀가 가슴을 핥아오는 느낌에 흠칫 굳은 채언의 턱이 커다란 손에 붙잡혔다. 밝은 빛이 들어오는 발코니를 바라보고 있던 채언은 질끈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한참 만에 침실에서 나온 두 사람은 여전히 한 몸처럼 딱 달라붙어 있었다. 새 가운을 걸친 채언은 나른한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영웅의 맨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있었다.
“우리 뭐 먹을까요?”
잠옷 바지만 입은 영웅은 가뿐한 얼굴로 웃으며 채언을 얼렀다.
“졸려요…, 안 먹을래요.”
자꾸만 감기는 눈꺼풀을 떠보려는 노력을 내다 버리기로 한 채언은 느릿하게 말한 뒤 완전히 눈을 감아버렸다.
“우리 어제 저녁도 안 먹었으니까 아침은 제대로 먹어야죠.”
약도 먹어야 하고. 영웅은 채언의 머리에 두 번 입을 맞춘 뒤 안고 있던 몸을 소파에 내려주었다.
“집에서 아주 간단히 먹고, 맛있는 브런치 먹으러 갈까요?”
채언은 고개를 끄덕인 뒤 스르륵 소파에 몸을 뉘었다.
“그런데 진짜 조금만 더 잘래요.”
“오 분?”
영웅이 손가락 다섯 개를 펼쳐 보였다. 채언은 그를 따라 손가락을 펼치고는 하이 파이브 하듯 영웅의 손바닥에 손을 가져다 댔다.
“십 분.”
“그럼 칠 분.”
영웅이 손깍지를 끼며 딜 하자 채언은 눈을 감았다.
“…팔 분. 딱 계란 익을 때까지요.”
채언은 자연스럽게 아침 메뉴로 반숙 계란을 요청했다.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준 영웅은 채언의 감긴 눈꺼풀에 입을 맞춘 뒤 다리를 펴고 일어섰다.
“으흠흠.”
슬며시 눈을 뜬 채언은 어제 본 영화 OST를 흥얼거리며 걸어가는 영웅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다음 주에 볼 애니메이션은 질문이 생기지 않게 꼭 더빙판으로 예매할 것을 다짐했다.
늦여름 아침 햇살이 채언의 몸 위로 길게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