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따듯한 햇살이 내리쬐는 한낮이었다. 오랜만에 비가 그친 하늘은 맑았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채언은 습관적으로 옆자리의 온기를 찾아 고개를 틀었다. 그런데 몸에 와닿는 감각이 낯설었다. 영웅은 일찍 출근한 걸까. 채언의 눈꺼풀이 움찔했다. 뻑뻑한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눈을 비비려고 손을 들려는데, 무거운 손목에 추가 달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채언 씨.”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채언은 잘 떠지지 않는 눈에 힘을 주었다. 가늘게 벌어지는 눈꺼풀 사이로 환한 빛이 들어왔다. 빛을 머금은 영웅의 머리카락이 금색에 가깝게 빛났다. 영웅은 기도하듯 붙잡고 있던 채언의 손에 입술을 눌렀다.
“잘 잤어요?”
따듯한 숨결이 닿는 손이 간지러웠다. 느리게 눈을 끔뻑이던 채언은 영웅을 부르려 입술을 달싹였다.
“…읏.”
하지만 목이 아파서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부은 눈가가 찌푸려졌다.
“괜찮아요. 막 잠에서 깨서 목이 아픈가 봐요.”
영웅은 채언의 볼을 만져주며 달랬다.
채언은 이틀 만에 깨어난 것이었다. 중간에 잠깐 눈을 뜨기는 했지만, 금방 까무룩 잠에 빠져버렸다.
의사는 환자의 폐에 염증이 생기지 않게 주의할 필요는 있으나, 생명이 위중한 상태는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왜 채언이 눈을 뜨지 않느냐고 영웅이 묻자, 환자 스스로가 눈을 뜨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면, 지친 몸이 자기방어를 위해 깊은 수면 상태에 들어가기도 한다고 했다. 쉽게 말해 피로가 풀리면 눈을 뜰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영웅은 그 말을 기억하고, 자신의 검사를 마친 뒤부터 내내 채언의 곁을 지켰다. 채언이 스스로 눈 뜨는 것을 거부하는 게 아니었으면 하고 바랐다.
채언은 숨을 새액 새액, 내쉬며 영웅을 보았다. 눈을 떴을 때 영웅이 보여 집인 줄 알았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 것 하나 익숙한 게 없었다. 침구가 바스락거리는 것이 호텔과 비슷했다. 여행하던 중에 잠에서 깬 것인가. 채언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잠들기 전에 뭘 했지. 채언은 영웅의 손에 볼을 기댄 채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인지 모르게 저 눈동자를 오랜만에 보는 느낌이었다.
영웅의 얼굴을 살피던 채언의 시선에 익숙한 밴드가 걸렸다. 영웅이 볼에 붙이고 있는 저것은, 전에 식물원에서 넘어져 다쳤을 때 자신이 붙이고 있던 것과 비슷했다.
“…왜.”
왜 다쳤느냐고 묻고 싶었다. 손을 들어 그의 볼을 만지려던 채언은 자신의 팔에 꽂혀있는 링거줄을 발견했다.
“…저… 왜. 콜록.”
순간, 바닷가에서 있었던 일이 채언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술을 마신 것처럼 드문드문 끊긴 기억이었다. 채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채언 씨.”
잘게 떨리는 몸을 알아챈 영웅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채언을 불렀다.
충격받은 채언의 목에서 잔뜩 긁힌 쇳소리가 났다. 꿈이 아니었다. 검은 파도와 짜고 쓴 바닷물의 맛. 무슨 짓을 한 거지. 두려움이 목을 죄어오는 느낌에 채언이 팔을 허우적거리자, 영웅은 허공을 젓는 손을 잡고 깍지를 끼었다. 그리고 검은 눈동자를 곧게 바라보았다.
“이거, 아무것도 아니에요. 금방 낫는 거, 채언 씨도 알죠? 응?”
다정한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채언의 입꼬리가 잔뜩 아래로 내려갔다. 울먹이며 떨리는 턱과 입술을 바라보던 영웅은 한 손을 들어 축축해지려는 채언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안심해요.”
몸을 낮춰 채언을 꼭 안아주었다.
곧 의사가 와서 채언의 상태를 확인하고 갔다. 다시 병실 문이 닫혔지만, 반쯤 세운 침대에 몸을 기댄 채언은 조금 전과 달리 영웅을 바라보지 못하고 아랫입술만 잘근거렸다.
침대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있던 영웅은 한참을 기다려도 채언이 자신과 눈을 마주쳐주지 않자, 먼저 입을 열기로 했다. 지금 채언이 얼마나 힘들지는 자신이 더 잘 알았다.
“채언 씨.”
“…네.”
그의 부름에도 채언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침대에 몸을 기댄 채로 애꿎은 이불만 손톱으로 긁고 있었다.
채언은 영웅을 볼 낯이 없었다. 그가 미국에 가는 틈을 타서 도망친 것이었으니까. 너무나도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이불을 긁던 손가락이 손바닥 안쪽을 꾹 눌렀다.
부들부들 떨리는 채언의 손을 내려다보던 영웅은 하얗게 질린 손을 잡아챘다. 잘못하면 피가 역류할지도 몰랐다.
“채언 씨. 나 봐요.”
들려 올라간 손을 따라 채언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나도 똑같았어요.”
채언의 눈이 힘없이 깜빡였다.
“내가 얘기해줬죠. 미국에서 겪었던 일. 그리고 내 문신에 대해서.”
작게 끄덕이는 고개를 따라 검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말 안 해준 게 있어요.”
영웅은 말을 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내 문신. 그냥 수술 흉터 때문에 새긴 게 아니에요. 내 손으로 낸 상처 때문에 새긴 거예요.”
천천히 채언의 손목을 놓아준 영웅은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나도 나를 학대했어요.”
다물렸던 입술은 금방 다시 열렸다.
“채언 씨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죽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것뿐이고.”
영웅은 말을 하는 자신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다. 예전 이야기를 하는데 마음이 아프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웅의 상태를 모르는 채언은 더욱더 죄스러워졌다. 그가 아픈 이야기를 반복해서 하게 만든 것이 미안했다. 영웅은 자신과 같지 않았다.
채언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대표님과 달라요.”
“어떤 점이 다른데요?”
영웅은 부드럽게 물었다. 채언의 표정이 괴로워 보였지만, 어차피 한 번은 서로 털어놓아야 할 이야기였다. 바닷가에서 채언은 자신이 동생과 부모님을 죽였다고 했다. 예전에 일어난 사고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확인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때 정신이 없어서 되는대로 아무 말이나 했던 것인지, 정말로 자신이 누군가를 죽였다고 생각하는지.
건영의 말에 따르면 채언은 동생이 없었다. 채언이 죽였다고 말한 동생은 누구인지, 그것도 천천히 물어볼 생각이었다.
“이야기해 줄 수 있어요?”
“저는….”
다시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려 했다. 영웅은 채언의 손바닥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그것을 막았다. 길고 예쁜 손가락에 잔뜩 상처가 난 것도 속상한데 또 다른 상처가 생기게 놔둘 수 없었다.
채언의 까만 눈동자가 영웅의 손을 보다가, 더 위를 향했다. 단단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봐주는 영웅의 눈과 마주쳤다.
이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채언은 마른 입술을 핥으며 영웅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말하기가 무서웠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털어놓는다면 영웅이 자신을 미워할 것 같았다. 이미 그는 정이 다 떨어져 버렸을지도 몰랐다.
아직 어떠한 이야기도 털어놓지 않았는데 또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채언은 입을 꾹 다물고 코를 훌쩍거려야 했다.
영웅은 채언이 마음을 털어놓을 준비를 할 때까지 차분히 기다려주었다.
“제가… 동생을.”
눈물이 차올라 반질거리는 눈동자가 영웅을 향했다.
채언은 한참이나 울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말에 두서가 없었지만, 영웅은 채언이 헐떡이며 하는 말을 끊지 않고 들어주었다. 하지만 어느 지점에서 영웅은 미간을 좁혔다.
“채언 씨. 잠깐만요. 건영이? 장건영 말하는 거예요? 채언 씨 동생.”
영웅의 물음에 채언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건영, 이가… 저… 흑… 저 때문에.”
눈을 가늘게 뜬 영웅은 병실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밖에 앉아 울던 건영을 떠올렸다.
그는 채언이 자신 때문에 죽고 싶어 했다며 손을 벌벌 떨며 울었었다. 채언이 잠들어있는 동안 먹지도 못하고, 울기만 하는 것을 충북이 끌고 다니며 챙겨주고 있었다.
“아니에요. 채언 씨. 아니에요. 동생, 여기 있어요.”
우느라 정신이 없는 채언은 영웅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고 훌쩍거렸다. 영웅은 도리질을 하는 작은 얼굴을 붙잡아 엄지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장건영. 여기 있다고요.”
영웅의 손등 위로 채언의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채언이 막 깨어나기 전에 포도 농장 부부가 점심을 먹이러 데리고 갔으니, 곧 올 것이었다.
병실에 걸려있는 시계를 쳐다보던 영웅의 귀에 여러 명의 발걸음 소리가 닿았다. 한 무리가 1인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건영아. 너 또 여기 앉어 있을 거여?”
“아휴. 엉덩이 차가워, 진짜. 속상해.”
가까이서 들리는 말소리에 영웅의 시선이 닫혀있는 문을 향했다.
“여보. 내가 방석 좀 가져올게.”
똑똑.
“들어갈게요.”
드르륵. 병실 문이 열렸다. 속상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혜옥이 침대에 몸을 기댄 채언을 발견했다.
“어우… 어우, 어우, 어우!”
알 수 없는 소리를 낸 혜옥이 눈을 크게 뜨고 달려오다가. 박수를 짝! 쳤다.
“여보, 건영아! 채언이 일어났어!”
갑작스레 들려온 혜옥에 목소리에 채언의 시선이 문가를 향했다. 눈두덩이 퉁퉁 부은 건영과 채언의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의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건영, 거… 건영아.”
“채언 씨. 안 돼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채언을 영웅이 붙잡았다. 채언은 영웅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갑작스레 몸을 움직여 어지럼증을 느낀 탓이었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들었다.
“건영아.”
가느다랗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건영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턱을 떨었다. 퉁퉁 부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내 통곡하는 소리가 온 병실을 울렸다.
아까부터 1인실 소파 한쪽에 가만히 앉아있던 진원은 천천히 일어나 바깥에 선 사람들을 안쪽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다시 소파에 앉은 진원은, 너 왜 내 연락 안 받았어, 형이 찾아오지 말라고 그랬잖아, 라며 서럽게 울며 서로를 감싸 안는 두 사람을 보다가 채언의 옆에 서서 휴지를 챙겨주는 영웅의 얼굴을 살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진원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긴장 상태였다. 영웅의 트라우마가 언제 자극받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지난겨울. 독감에 걸린 채언과 통화를 할 때 스산하게 들려오던 영웅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기억났다.
그런데 이번 일로 영웅을 지켜본 결과, 그때와 지금, 그의 상태는 너무나도 다르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채언이 병원으로 옮겨진 후, 영웅도 곧바로 검사를 받았다. 상황이 조금 안정된 후 심리 상담도 진행되었는데, 진원은 영웅의 상담 결과를 들을 수는 없었다. 그가 위험한 상태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아까 문신에 대해 털어놓던 말도 뜻밖이었다. 진원은 이따 보고할 내용을 차분히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그동안 어디 있었어? 어디서 지냈어?”
채언은 본인도 훌쩍이는 와중에 건영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눈물을 닦아준 다음에는 덜덜 떠는 건영의 손을 잡아주었다.
“나… 대동에. 흐윽.”
“핸드폰은… 신발은, 왜 거기다 버렸어.”
“나도, 끅… 몰라.”
“내가… 흐… 얼마나, 연락했는데.”
건영은 고개를 숙인 채 계속 울었다. 채언이 죽으려고 갔던 바닷가에 자신도 죽으러 갔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충북에게도 그날 일이 잘 기억나지 않는 척 연기하는 중이었다. 결국 자신은 스스로 그 바다에서 걸어 나왔으니까. 정말로 그다음부터는 채언에게 연락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미련을 가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채언에게 받은 신발을 거기 버려둔 것이었다. 잃어버린 핸드폰도 찾지 않고 해지했다.
그렇게 모든 미련을 버리려고 했으면서, 채언과 연이 닿아있는 충북의 포도 농장에 간 것은 모순이었다.
하지만 그러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엉망진창이 된 상황이었지만 이렇게라도 형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마음속의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서 건영은 줄줄 눈물만 흘렸다.
“미안해, 건영아. 내가 그때 말이 심했어.”
“…흑, 내가… 내가, 더.”
침대 앞에 주저앉은 건영은 채언의 허벅지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아휴. 낑낑거리는 게 강아지 두 마리 보는 것 같네.”
옆에서 둘을 지켜보던 충북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다. 혜옥은 남편에게 휴지를 뜯어 건넨 뒤 가슴을 쓸어내렸다. 채언의 소식을 듣고 대동에서 급히 서울로 내려온 혜옥이었다. 빨리 병원으로 오라는 말에 얼마나 식겁했는지 모른다.
그동안 채언이 말하지 않아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었으나, 채언이 잠들어있는 동안 건영이 들려준 이야기를 듣고 대충 짐작을 했다. 오해가 쌓이고 쌓여 마음이 곪은 모양이었다. 일단 애가 눈을 떴으니 다행이었지만, 퇴원 후가 중요했다.
가만히 서서 팔뚝을 만지던 혜옥은 채언을 살뜰히 챙기고 있는 영웅을 바라보았다.
채언이 신세 지고 있는 직장 상사라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이상했다. 직장 상사라기에는 너무 가까워 보였다. 채언과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충북과 자신도 채언을 나름 아들처럼 생각했으니, 저 사람도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딱 봐도 젊어 보이는 남자가 채언을 아들처럼 생각하는 것은 좀 이상했다.
친한 직장 상사라기에도 그랬다. 어떤 직장 상사가 저렇게 후배의 눈물 콧물을 닦아주며 곁을 지키고 서 있는다는 말인가. 채언이 자연스럽게 그의 손에 얼굴을 맡기는 것도 그랬다. 게다가 저 남자가 채언의 병원비까지 전부 대고 있었다. 정말로 보호자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혜옥은 땀에 젖은 채언의 머리를 넘겨주는 영웅의 모습을 보면서 조용히 어떤 결론을 내렸다.
며칠 후. 채언이 퇴원하는 날. 영웅은 기사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채언과 함께 앉았다. 트렁크에는 채언의 캐리어와 등에 메는 가방이 들어있었는데, 목적지는 대동이었다.
채언이 잠시 충북의 집에서 지내며 포도 농장 일을 도와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혜옥이 제안한 것이었는데, 포도 농장 일을 도와달라는 부탁 속에는 사실 다른 뜻이 숨겨져 있었다.
채언에게 부탁하기 전, 혜옥은 영웅을 따로 불러 말을 걸었다.
‘피로 맺어진 가족은 아니지만, 남편하고 내가 채언이를 꽤 각별하게 생각했어요. 중간에 연락이 끊기긴 했는데 이런 이유일 줄 몰랐고. 아휴, 몰라준 게 많이 미안하네요. 진짜… 속상해, 속상해. 아직 건영이랑 둘이 풀어야 할 이야기도 많이 남은 것 같은데, 우리는 포도 농장 때문에 빨리 올라가 봐야 하고… 그런데 채언이만 두고 가기가 좀 그래서요. 무슨 말인지 알죠? 보니까… 남편하고 내가 채언이 생각하는 것만큼 아끼는 것 같던데요. 맞죠? 같이 사신다고 했으니까. 이거는 나중에 채언이한테 물어봐서 결정해야 되는 문제이긴 하지만. 여기한테도 말은 해놔야 할 것 같아서요. 못해도 일주일 정도 대동에 와서 지내게 하는 건 어때요?’
충북의 통장에 그런 말을 남기고 갔던 채언이 바닷가에서 발견된 것이 그들에게도 적잖이 충격을 남긴 모양이었다.
영웅이 보기에는 그들이 채언의 가족 같았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채언을 내내 옆에 끼고 있고 싶었지만, 그건 자신의 욕심이기도 했다.
영웅은 한동안 멍했던 채언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이 회사에 가 있는 동안 채언은 또 무기력해질지 몰랐다. 곁에 안심할만한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이 나았다.
‘포도 농장이라고 하셨죠?’
‘맞아요.’
‘열매가 열렸겠네요.’
‘그래서 요즘 한창 바빠요. 지금은 사람을 불러놓고 왔는데. 얼른 우리가 가봐야 해서.’
영웅은 토마토 열매를 보고 싶어 했던 채언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혜옥이 자신에게 허락받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물어봐 준 것이 고마웠다.
차창을 바라보던 영웅은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채언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채언 씨. 배 안 고파요? 휴게소 들러서 뭐 좀 먹을래요?”
휴게소라는 말에 채언은 눈을 끔뻑거렸다. 혼자 버스에서 내렸던 것이 생각났다. 심장이 조여오는 느낌에 채언은 얼른 영웅의 손을 잡고, 티 나지 않게 숨을 골랐다.
“호두과자, 먹고 싶어요.”
“알겠어요.”
영웅은 채언이 멋대로 손을 가지고 놀게 놔두었다.
“기사님. 휴게소 나오면 잠깐 세워주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휴게소에 멈췄다. 잠깐 간식만 사서 바로 돌아올까 했던 영웅은 운전기사에게도 잠시 쉴 것을 제안했다. 세 사람은 함께 차에서 내렸다.
“채언 씨. 호두과자는 이따 갈 때 사 가고, 우리 저쪽 카페에 잠깐 갈까요?”
“네.”
지난번 여행을 가던 길에 이곳에 들렀을 때는 가보지 않은 카페였다.
채언은 영웅과 두 번째 여행을 떠나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장소는 고작 휴게소였지만, 어디든 그와 함께라면 좋았다.
채언이 자리를 맡고 앉아있는 동안 영웅이 주문을 했다. 잠시 후 진동벨이 울렸을 때, 그가 가지고 온 것은 음료 두 잔과 초코케이크 한 조각이었다.
“과일이 들어간 케이크는 없다고 해서요.”
채언은 초코케이크를 보다 옅은 미소를 지었다.
둘만 남은 병실에서 영웅이 물었었다. 서울을 떠나기 전에 호텔 레스토랑에서 무얼 먹었냐고. 영웅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겠다고 말한 뒤였다.
채언은 게살 볶음밥과 멜론 케이크를 한 조각 먹었다고 했다. 함께 있을 때 먹었던 딸기 케이크처럼 멜론도 싱싱했는데, 입에서는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날 밤에는 서로 한참 얼굴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었다.
채언은 많은 상처를 입었을 영웅에게 사과했고, 영웅은 그런 채언을 가만히 안아주었다. 채언의 사과가 쉽게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오래도록 안아주었다.
영웅은 채언에게 포크를 내밀었다. 그를 바라보던 채언은 포크를 받아 초코케이크를 한입 떠먹었다. 달콤했다.
둘은 가끔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음료를 쥔 채, 손등이나 손가락을 맞대고 있었다.
“저 이제 핸드폰 있으니까, 언제든 연락하시면 받을 수 있어요.”
채언의 말에 영웅은 손에 턱을 괴며 미소 지었다. 충북과 어떻게 연락을 주고받았냐고 묻는 채언에게 수리한 핸드폰을 내밀었었다.
“그러니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주세요.”
“알겠어요.”
“무서운 일 있어도 전화해주시고요.”
“그럴게요.”
“제가 보고 싶으면… 꼭, 말씀해주세요.”
“보고 싶어요. 이렇게 보고 있어도.”
곧바로 대답해오는 영웅 때문에 채언은 귓바퀴가 붉어졌다.
“지금 말고요.”
영웅은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커피 대신 채언의 아이스티 빨대를 입에 물었다. 한 모금 빨아 마신 뒤 채언의 입 쪽으로 빨대를 놓아주었다. 채언은 아무 말 없이 빨대를 입에 물고 달콤한 음료를 입에 머금었다.
“기분은 어때요?”
얼마 전부터 채언은 정신과 약을 먹고 있었다. 차에 타기 전에도 약을 먹었다. 영웅의 물음에 채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섣불리 괜찮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괜찮다는 말이 없어도 영웅은 불안하지 않았다. 채언의 볼에 보조개가 패어있었기 때문이다.
짧은 휴게소 데이트를 마치고, 차는 다시 출발했다.
생글 포도 농장에 도착했을 때. 채언은 자신을 마중 나온 세 사람에게 선물용 호두과자 상자를 내밀었다.
영웅은 곧바로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잠시 채언과 포도밭을 거닐었다. 다른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틈을 타서 짧은 키스를 나누기도 했다.
햇볕이 잘 드는 곳이었고, 채언이 원하는 만큼 열매를 수확할 수 있는 곳이었다. 영웅은 까만 포도알 같은 채언의 눈을 보다가 볼 위에 쪽, 뽀뽀를 해주었다. 짧은 기간 헤어지더라도 불안하지 않았다.
트렁크에서 짐가방은 하나만 내렸다. 여름옷이 들어있는 가방이었다. 조금 더 도톰한 옷이 들어있는 캐리어는 나중에 채언이 집으로 돌아오면 그때 내리기로 했다.
영웅이 혼자 서울로 돌아간 날 밤. 채언은 건영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채언이 충북의 집에서 지내는 동안, 영웅은 매일 점심시간에 채언에게 전화를 걸었다. 둘은 메시지도 나누었다. 그래서 그들의 낮 시간은 한집에 살 때와 별 다를 바 없었다.
날 밝을 때 포도 농장 일을 돕는 채언은 뜬금없이 영웅에게 청포도 사진을 보내고는 했다. 따로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서, 영웅은 그것이 토마토 새싹을 자랑하던 것과 같은 의미인 줄 알았다. 사실 채언은 청포도를 볼 때마다 영웅의 눈 색깔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매번 제일 싱싱한 청포도를 찾아 사진을 찍어 보낸 것이었다.
다들 잠드는 밤이 되면 채언은 조금 울적해졌는데, 베개를 베고 자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채언은 대부분 밤에 영웅에게 전화를 걸었다. 특별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아니었지만, 잠들기 전까지 서로의 목소리를 들었다.
말은 주로 영웅이 했다. 채언은 충북의 집에 들어올 때 함께 들어온 건영과 같은 방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끔 채언이 늦은 시각까지 말을 할 때면, 이미 잠든 건영은.
‘형… 너무, 시끄러워.’
하고 잠꼬대로 말했다. 그러면 채언은 건영의 등을 토닥여주며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 영웅에게도 굿나잇 인사를 건넸다. 손에 닿는 건영의 체온과 귀에 들리는 영웅의 목소리 덕에 울적한 기분은 물러간 다음이었기 때문에, 아쉬워도 어렵지 않게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가물가물 눈이 감길 때면 채언은 자주 이런 생각을 했다. 자신이 아주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아주 평범한 집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일을 하고, 평범하게 연애를 하는 중이라고.
어떤 사람들은 태어나자마자 받는 사랑을, 왜 자신은 받지 못했을까. 뜬눈으로 지새우던 날이 많았었다. 예전 일이었다.
밤마다 채언은 억지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자는 잠이 아니라, 정말 졸려서 눈이 감기는 잠을 잤다.
며칠 동안 비가 내렸다.
영웅은 주말에 대동에 올라와 한참이나 채언을 안고 있다가 집에 돌아갔다. 영웅의 볼에 붙어있던 밴드는 사라진 후였다.
채언은 캐리어 손잡이를 쥐고 있었고, 영웅은 포도 박스를 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손을 잡지 못하는 대신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1층에서 아파트 주민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지만, 두 사람은 서로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22층에 도착하자 띵- 소리가 울렸다.
2주가 넘어서야 돌아온 집이었다. 채언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 전에 심호흡을 했다. 고개를 들어 영웅을 보았다. 그는 말없이 다정히 웃어줄 뿐이었다.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울렸다.
채언은 캐리어 손잡이를 놓고, 손을 뻗어 현관문을 열었다. 햇볕에 조금 그을린 채언은 병원에 입원했을 때보다 훨씬 건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따듯하게 느껴지던 집 안은 이제 조금 후덥지근했다. 에어컨을 켜야 할 날씨였다.
거실 카펫 위에 앉은 두 사람 사이에는 캐리어가 눕혀져 있었다. 함께 짐을 풀기로 했기 때문이다. 채언은 그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었다.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채언은 천천히 캐리어의 지퍼를 열었다. 사과가 쪼개지듯 딱딱한 가방이 반으로 갈라졌다. 안에는 액자가 있었다.
영웅은 옆에 앉은 채언의 허리에 팔을 둘러 안았다.
“슬펐어요?”
나직하게 물어오는 목소리에 채언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내 넓은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외로웠어요.”
채언은 몸을 틀어 영웅의 몸에 팔을 둘렀다.
“지금이랑은 달라요… 지금은.”
“응.”
“마음이 꽉 찼으니까.”
영웅의 어깨에 볼을 비비던 채언은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오는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영웅의 눈을 바라보던 채언이 살포시 웃었다.
“청포도.”
“포도 먹고 싶어요?”
채언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대표님 눈이 청포도를 닮았어요. 색깔이 비슷해요.”
눈을 깜빡이던 영웅은 그동안 채언이 보내주었던 사진을 떠올렸다. 하. 어이없다는 듯 웃음이 터져 나왔다.
“채언 씨 눈은, 까만 포도 닮았어요.”
“그럼 저도 포도 할래요.”
장난스레 서로를 바라보던 시선이 짙어졌다. 천천히 채언의 눈꺼풀이 감겼다. 보드라운 입술끼리 겹쳐졌다. 에어컨 바람에 거실 온도는 낮아지고 있었지만, 서로를 안고 있는 손과 맞닿은 입술은 어느 때보다 열렬했다.
잠시 후. 조금 질척한 소리를 내며 입술이 떨어졌다. 천천히 눈을 뜬 채언은 영웅을 보며 웃었다.
“저, 졸업사진도 있어요.”
“보여줄 거예요?”
“네.”
액자 하나를 치운 채언은 다른 액자를 들어 보였다.
“이쪽이 그 동생?”
“네.”
영웅은 채언이 가족사진 이야기를 했던 것을 떠올렸다.
“둘 다, 지금보다 많이 어려 보이네요.”
영웅은 앳된 얼굴의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채언은 지금보다 머리가 살짝 짧았고, 엄청나게 커다란 꽃다발을 안고 있었다. 귀여운 모습에 영웅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그러고 보니 채언에게 꽃다발을 선물해준 적이 없었다. 영웅은 내일 집에 올 때, 이것보다 더 큰 꽃다발을 준비해 올 것을 다짐했다.
“아, 이거 말고 졸업 앨범이 따로 있거든요.”
액자를 내려놓은 채언은 다시 캐리어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때,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채언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겨울옷을 전부 버리는 와중에도 꿋꿋이 가지고 있던 하얀 스웨터였다. 계절이 맞지 않아 입지 못하는데도,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언제 겨울이 올까요?”
갑자기 나온 겨울 이야기에 영웅은 고개를 갸웃했다. 채언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자신이 선물해준 하얀 스웨터가 놓여있었다. 그걸 보던 영웅은 채언의 이마에 기습적으로 뽀뽀했다.
“앗.”
손을 들어 이마를 가린 채언은 눈을 깜빡거렸다.
“이제는 겨울이 기다려져요?”
이마를 가리던 손을 내린 채언은 고개를 들어 영웅의 볼에 쪽, 뽀뽀했다.
“어어?”
“네. 스웨터가 입고 싶어서요.”
“지금 입어도 되는데.”
영웅의 말에 채언은 거실 유리창 밖을 보았다. 여름 해가 쨍쨍했다.
그때 삐- 삐- 에어컨에서 들리는 소리에 채언은 고개를 돌렸다.
“대표님. 뭐 하세요?”
삐- 삐- 영웅이 온도를 계속 낮추고 있었다. 바람 소리가 더 세지기 시작했다. 이미 시원했던 거실에 찬 바람이 불었다. 얇은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던 채언은 금방 팔에 소름이 돋았다.
“입고 싶으면 지금 입어요. 채언 씨.”
영웅은 일어서서 소파 쪽으로 가 앉더니, 그 위에 놓여있던 담요를 몸에 둘렀다. 채언이 거실 카펫에 처음 누워 잠들었을 때, 영웅이 덮어준 담요였다.
“아. 따뜻하다.”
영웅은 채언을 보며 캐리어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담요를 두른 영웅을 보던 채언은 스웨터를 꺼내 손에 쥐었다. 잠시 눈을 감고,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하얀 털실로 짜인 옷은 아주 포근했다. 추운 거실에서 입기에 딱 맞았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 채언은 하얀 스웨터를 펼쳐 목을 끼워 넣었다. 양쪽 팔도 소매에 쏙쏙 집어넣은 뒤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채언은 일어서서 영웅을 바라보았다.
“저 어울려요?”
“흐음.”
눈을 가늘게 뜬 영웅은 손에 턱을 쥔 뒤,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아주 잘 어울려요.”
그러면서 두르고 있던 담요를 활짝 벌렸다. 채언은 영웅의 품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채언의 몸 위로도 담요가 둘렸다.
채언은 조용한 집 안이 싫지 않았다. 포근하고 따듯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채언의 머리에 입을 맞춘 영웅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런데 채언 씨.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뭔데요?”
“언제까지 나를 대표님이라고 부를 거예요?”
영웅의 말에 채언은 눈을 끔뻑거렸다.
“대표님도.”
채언은 빨간 자수가 놓인 소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머뭇거렸다.
“저를….”
까만 눈동자가 도르륵 굴렀다. 영웅은 채언이 무슨 말을 할지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저를 채언 씨라고만 부르잖아요.”
영웅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커다란 손이 채언의 볼을 쓸었다.
손바닥에 얼굴을 기대오는 작은 얼굴을 보며 영웅은 애틋함을 느꼈다. 채언은 바닷가에서 자신이 부르던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영웅은 그것이 섭섭하지 않았다. 좋은 기억을 새로 만들어 줄 수 있을 테니까.
“채언아.”
영웅의 낮은 목소리에 채언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렇게 부르면 돼?”
눈이 동그래진 채언의 허리를 영웅이 끌어당겨 안았다. 그래도 채언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서, 영웅은 품 안의 몸을 흔들며 조르기 시작했다.
“응? 이러면 돼? 계속 이렇게 부를까?”
영웅이 채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문질렀다.
“난 좋아. 채언아.”
채언은 소파 아래 내려놓았던 다리를 들었다. 천천히 몸을 틀어 옆으로 앉은 뒤 영웅의 등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자신의 목에 얼굴을 묻고 있는 영웅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처음 들어본 단어도 아니고, 고작 이름일 뿐인데.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온몸이 따듯하게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그가 영어로 말하는 목소리보다 더 좋았다.
어두운 바닷가에서 그대로 생을 마감했다면 느끼지 못했을 다디단 포근함. 채언은 조금 거친 숨을 쉬며 목 안을 조였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주어진 것이 이름인데. 그 이름을 자신에게 붙여준 부모님의 목소리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서러웠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자신의 등을 꽉 끌어안아 오는 채언의 손길을 느낀 영웅이 작게 웃었다. 과연 채언은 어떤 애칭으로 자신을 불러줄까. 기대가 되었다. 이 작은 머릿속에서 엄청나게 고민하고 있겠지 싶었다.
사실 채언이 말하는 모든 것이 좋았다. 예전에 소파에 앉아 서로 요리 재료를 말했던 것처럼, 채언이 자신을 토마토나 브로콜리라고 불러준다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제가 좋아하는 입술 사이에서 나오는 말일 테니까.
영웅은 고개를 틀어 채언의 머리카락과 목 사이에 코를 묻었다. 좋은 향기를 들이마시며, 입술에 닿는 보드라운 살결에 조용히 키스했다.
“라이언.”
귓가에 와 닿는 조용한 목소리에 영웅은 숨을 멈췄다.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너무나도 오랜만에 들어보는 자신의 이름이었다. 영웅은 조용히 미간을 좁혔다.
“구해줘서, 고마워요.”
채언은 손에 쥔 영웅의 옷자락을 놓지 않고 말했다.
“고마워요. 라이언. 저를 구해줘서.”
그가 아니었다면, 평생 사랑받는 기분을 느껴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을 것이었다. 서늘한 자신의 삶에 햇볕을 쬐어준 다정한 사람.
“숨 쉬는 법을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자신을 안아주는 남자가 너무 좋았다. 그의 목소리도, 다정한 눈도, 뺨을 한 번에 쓸어주는 큰 손도. 모두 좋았다.
“그래서 돌아올 수 있었어요.”
채언은 영웅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흘러넘치는 애정을 어찌할 수 없어서, 옷자락을 쥐고 있던 손을 들어 그의 양 볼을 붙잡았다. 초록빛 눈을 바라보았다.
영웅과 해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가을에는 함께 단풍을 구경하고, 겨울에는 같이 눈사람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봄이 돌아오면 따듯한 거리를 산책하고, 또다시 여름이 오면.
아니, 당장 지금부터.
“저번에 TV에서 봤는데요. 곧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 시리즈의 첫 번째 편이 개봉한댔어요.”
이미 끝난 것들의 이야기만 찾아보던 날들이었다. 하지만 끝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방법을 안 지금은,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다시 마음 아픈 일이 생길지 몰랐지만,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거, 같이 보러 가고 싶어요.”
채언의 손가락이 영웅의 한쪽 볼에 남은 희미한 자국을 쓸었다.
“물론, 라이언이 준비된다면요.”
영웅의 입술 사이로 오랜 시간 참았던 마음이 흘러나왔다. 깊은 숨이기도 했고, 그동안 심장을 옥죄던 낡은 사슬이기도 했다.
구해줘서 고마워요. 채언의 말 한마디에 영웅은 구원받은 기분이었다.
더 이상 귀마개를 끼지 않았다. 채언과 떨어져 있는 동안 한 번도 가위에 눌리지 않았다. 다시 돌아올 것을 완벽히 믿고 있었으니까. 비 오는 날 천둥소리가 두렵지 않았고, 이제는 소중한 사람을 놓치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영웅의 눈가가 살짝 접혔다. 초록빛 도는 눈동자가 반질거렸다. 채언의 손가락이 그의 눈꼬리에 닿았다. 항상 눈물을 닦아주던 것은 영웅이었다. 이제는 자신이 그를 통해 보고 배운 것들을 행할 차례였다.
“언제든.”
영웅은 날짜가 정해지지 않은 데이트 신청에 응했다. 그의 입꼬리가 시원하게 올라가는 것을 본 채언의 입술이 활짝 벌어졌다.
오랜만에 채언의 보조개를 본 영웅은 가슴이 아릿했다. 마음이 아픈 것은 아니었다.
“채언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채언은 다정한 눈으로 영웅을 바라보았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주먹 쥔 손은 채언의 앞에서 펼쳐졌다. 날개 달린 천사 장식품이었다. 채언이 가지고 나갔던 것이었다.
장식품을 바라보던 채언은 시선을 올려 다시 영웅을 보았다. 두 손을 들어 그의 손바닥 위를 덮었다.
“이거, 트리에 장식하고 싶어요.”
영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파에서 일어난 두 사람은 함께 트리 앞으로 갔다.
날개 달린 천사는 원래 있던 자리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걸렸다. 같은 곳을 바라보던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오직 서로만을 담으며 미소 지었다.
담요를 두르고, 스웨터를 입고 있는 여름 한낮이 너무나도 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