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혼자 엘리베이터를 탄 채언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1층에서 문이 열리고 다른 사람이 들어오자 연분홍색 운동화에 감싸인 발뒤꿈치는 모서리 쪽으로 몰렸다. 고개는 더 아래를 향했다. 훌쩍이는 소리에 몇몇 주민이 뒤를 돌아보았지만, 채언은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운동화 천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마침내 22층에 도착했을 때, 채언은 자신의 손을 잡아주던 영웅과 영영 헤어지게 되었음을 실감했다. 혼자 집 안으로 들어간 채언은 복도 끝방으로 향했다.
조금씩 짐을 싸두던 캐리어를 펼치자 액자 두 개가 보였다. 영정사진을 내려다보던 채언의 마음은 고요해져 갔다. 더 이상 차오르는 눈물은 없었다. 볼 위에 남은 눈물 자국을 문질러 닦은 채언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눅눅한 마카로니가 든 봉지는 없었다. 세 번째 사과를 다 먹은 날 봉지째로 버렸기 때문이다.
영웅과 필담을 나누었던 메모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바르게 쓰인 그의 글자가 자꾸만 보고 싶어서 어느 날엔 책갈피로, 어느 날엔 그와 함께 먹을 음식 재료를 적는 메모지로 다시 재활용하고는 했던 것이었다.
채언은 초콜릿 상자에서 데굴데굴 초콜릿이 굴러 나오는 것처럼 제 손안에서 구겨져 쓰레기통 안으로 후두둑 떨어지던 메모지들을 생각했다.
이제 복도 끝방에는 남은 짐이 없었다.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채언은 몸을 일으켜 복도를 걸어 나갔다.
집 안은 조용했다. 거실에 선 채언은 아침에 영웅과 함께 앉아있던 식탁을 돌아보다가 선인장 화분이 놓인 거실 유리창 앞을 보았다. 흐린 날이었다. 요즘 햇빛을 받지 못한 선인장이 걱정되었지만, 비 내리는 사막에서도 버틸 수 있는 식물이니 영웅이 돌아오는 날까지는 괜찮을 것이었다.
영웅은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창문에 팔꿈치를 기대고 있었다.
‘같이, 같이 가고 싶어요.’
‘괜찮으시죠?’
자꾸 채언의 모습이 떠올랐다. 애써 지워보려 해도 자꾸만 귓가에 목소리가 맴돌았다.
여행을 준비하면서부터 채언은 기운을 차렸다. 밥도 잘 먹고, 잘 움직이고. 막 발목을 다쳤을 때와는 확실히 달랐다. 어젯밤까지도 그랬다. 영웅은 마른 입술을 핥으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하루도 떨어져 본 적이 없어서, 정말로 자신이 무언가 빠트렸을까 봐 손을 잡아 왔던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짙은 눈썹을 문질렀다. 뭔가 놓친 것 같았다.
채언은 침대 위에 누워 영웅이 베고 자는 베개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한 손에는 날개 달린 천사 장식품을 쥔 채였다. 침대 옆에는 낡은 캐리어와 등에 메는 가방이 놓여있었다. 모든 짐이 그 안에 들어있었다.
영웅의 향기가 나는 베개에 코를 묻고 눈을 끔뻑이던 채언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폐 끝까지 공기를 채운 채로 잠시 멈춰 있다가 천천히 숨을 뱉었다.
오늘 아침까지 영웅과 함께 누워 있던 게 꿈처럼 느껴졌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데다 조금 전 한참 울어버린 탓에 눈이 뻑뻑했다. 피곤했다. 잠을 좀 푹 자고 싶었다. 그래서 채언은 천천히 지친 몸을 일으켰다. 끌어안고 있던 베개를 내려놓고 커버를 쓸어내렸다. 곁에 없는 영웅 대신 베개 위에 입을 맞춘 뒤 침대에서 내려와 짐을 챙겼다.
채언은 낡은 바퀴에 바닥이 긁히지 않게 캐리어 손잡이를 짧게 잡아 들고 침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천사의 날개 끝을 매만지는 손가락이 붉었다.
영웅은 노트북 커버를 열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채언은 늦게까지 낮잠을 잘 것이라고 했지만, 아무래도 얼굴이 보고 싶었다. 봐야 할 것 같았다.
“기사님. 공항까지 얼마나 남았죠?”
“도로가 막히지 않아서 앞으로 15분 정도만 더 가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생각해보니 채언에게 쥐여준 자신의 핸드폰은 벨 소리나 진동이 작게 설정되어 있었다. 혹시 벌써 깊게 잠들었다면 영상통화를 받지 못할 수도 있었다.
영웅은 노트북 마우스패드 위에 손가락을 올려 커서를 조정한 뒤 영상통화 아이콘을 눌렀다. 영웅의 미간이 좁아졌다. 인터넷 연결이 되어있지 않다는 안내가 떴기 때문이다. 영웅은 답답한 숨을 내쉬며 목덜미를 만졌다. 공항에 도착하면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있을 테지만, 앞으로 15분을 더 가야 한다고 했다. 잠시 고민하던 영웅은 운전석을 보았다.
“기사님.”
“네.”
백미러를 통해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죄송하지만. 핫스팟 좀 켜주실 수 있나요?”
“네.”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원활한 근무환경을 위해 통신비를 지급받고 있었다.
“그런데 제가 운전 중이라. 여기, 핸드폰 드릴게요.”
기사는 양복 재킷 주머니에서 꺼낸 핸드폰을 뒤로 넘겨주었다.
“죄송하지만 직접 켜서 사용해주시겠어요? 잠금은 제트 모양으로 푸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영웅은 손쉽게 잠금을 풀고 핫스팟을 켰다. 노트북을 네트워크에 연결한 뒤 통화를 다시 시도했다. 뚜루루루. 신호는 가는데 응답이 없었다.
한참을 더 기다려보아도 채언과 연결되지 않았다. 초조하게 입가를 문지르던 영웅은 영상통화를 걸어놓은 창을 아래로 내렸다. 연결을 기다리는 동안 미국에서 사용할 핸드폰을 준비해달라고 가족들에게 메일을 보낼 생각이었다.
인터넷 창을 켠 영웅은 익숙하지 않은 화면과 맞닥뜨렸다. 채언이 사용하던 사이트로 홈 화면이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자동 로그인된 사이트 한쪽에 알림이 잔뜩 쌓여있는 것이 보였다. 메일이 오면 곧바로 확인하던 버릇 때문에 영웅은 무의식적으로 알림 버튼을 눌렀다.
새로 뜬 창을 확인하던 눈이 크게 뜨였다.
화면 안에는 오래전부터 채언이 인터넷에 올린 질문 글이 가득했다. 알림이 뜬 이유는 질문 글에 댓글이 달렸기 때문이었다. 영웅은 눈을 끔뻑였다. 머릿속이 멍했다. 현실감각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글자를 읽을 수 있고, 해석도 할 수 있는데 무슨 글을 읽은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고독사한 시체는 누가 치우게 되는지, 물에 빠져 죽은 시체의 신원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지, 자살한 사람의 장기도 기증할 수 있는지, 스위스에 외국인 안락사를 진행하는 병원은 어느 지역에 있는지 등등. 채언이 올린 질문 글의 대부분이 돌려 말하고 있었으나, 목적은 확실해 보였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불안을 파악했다. 스크롤을 내리는 손가락이 떨리기 시작했다. 가장 최근 글은 몇 달 전에 쓴 것으로, 스위스에서 존엄사를 진행할 때 사용하는 약물의 종류를 물어보는 글이었다. 오래전에 쓰인 글에 계속해서 댓글이 달리고 있었다.
김정민2: 전 글 다 보고 왔는데…요즘 그렇게 쉽게 못 죽습니다…병원 실려 가면 바로 눈떠요. 위세척하고요……약 먹으면……몸만 망가집니다--;; 그러니까 그냥 죽을 생각 마시고 사세요…
포롱이: 힘내세요… 혹시 금전적인 문제로 힘들어하시는 거라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쪽지 보내주세요.
↳74papa: 최근 글에 스위스 예기 보면 돈 없는 건 아닌것갓은데요. 대신 제가 쪽지 보네드려도 될까요?
↳KAYZ: 74papa님아 개념좀요.
구영헬스: 요즘 하늘이 어두운데 그래도 밝은 날은 옵니다! 곧 쨍쨍한 여름이 올 테니 그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조금만 더 버텨보세요! 꿀꿀할땐 운동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phidel: 잘 지내시죠? ㅠㅠ 이분 왜 요즘 글 안 올리시나요…근황 아시는 분?
영웅은 떨리는 손으로 다른 알림을 눌러보았다. 스위스행 티켓이 예매되었다는 메일 알림이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이불을 뒤집어쓴 채 울고 있던 채언의 모습이 떠올랐다. 토마토가 죽었다며 서럽게 울었었다. 드라마가 곧 끝날 것 같다며 힘들어했었다. 때때로 멍하던 눈. 신발장 앞에서 붙잡아오던 손. 가족사진을 절대 보여주지 않던 채언과 가족들을 보러 갈 것이라고 했던 채언.
영웅의 얼굴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폐 속에 공기 대신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괜찮아?’
번개가 치듯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누구지. 누구의 목소리지.
‘좀 어때?’
‘오랜만이다. 다음엔 펍에서 볼까?’
‘그냥.’
‘그럴 수 있으면 좋겠네.’
뒤죽박죽 섞인 대화였다. 영웅은 이마를 짚은 채 허리를 숙였다. 노이즈가 낀 것처럼 흐린 목소리를 선명히 기억해내려 애썼다. 일그러진 얼굴에 식은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괜찮지?’
‘나쁘지 XX.’
‘그럼 다행이네.’
‘괜찮지?’
‘XXX 않아.’
‘그럼 다행이네.’
순간, 구름이 걷히듯 노이즈가 사라졌다.
‘괜찮지?’
‘나쁘지 않아. 아니, 사실 이젠 괜찮은 것 같아. 정말로.’
‘그래? 그럼 다행이네.’
‘응. 그러니까 이젠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병문안을 안 와도 괜찮겠어?’
‘그래. 괜찮다니까.’
영웅은 오래전 자살한 친구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괜찮으시죠?’
‘그럼요. 괜찮아요.’
‘이제, 비가 와도 괜찮으시죠?’
‘그럼요.’
뒤이어 채언과 나누었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영웅은 심장이 조여와 천천히 숨을 마셨다 뱉어냈다. 마치 슬로 모션에 걸린 것 같았다. 패닉에 빠질 것 같아서 영웅은 주먹을 쥐었다. 꽈악 힘을 주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강한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고 있었지만, 정신을 차려야 했다. 고작 빗방울 따위에 나약해질 수 없었다.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운전기사의 목소리에 영웅은 고개를 들었다. 눈가를 찌푸린 채 식은땀을 흘리는 그를 본 기사가 놀란 눈을 떴다.
“어디 편찮으세요?”
“차 돌려주세요.”
“예?”
“당장 집으로 돌아가야겠어요. 어서요!”
무릎 위에 있던 노트북이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기사가 차를 돌리는 동안 영웅은 진원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당장 집으로 가서 채언이 잘 있는지 확인해 달라는 부탁에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옆에 계시는 줄 알았는데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까 서영웅 님의 번호로 저에게 메시지가 와서요. 심채언 씨가 입주 도우미 일을 그만두겠다고 하셨거든요.>
하. 영웅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조금 뒤, 다시 전화를 걸어온 진원에 의하면, 영웅의 핸드폰은 신발장 옆에 놓여있었다고 했다. 피트니스 센터 카드 한 장과 채언이 사용하던 생활비 카드가 함께 놓여있었지만, 집 안 어디에도 채언은 없었다고 했다.
서울로 되돌아온 영웅의 차는 집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계속해서 병원으로 가자는 운전기사의 제안을 묵살한 영웅은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었다. 노트북으로 확인한 채언의 출국 날짜는 이틀 뒤였다. 그전에 마음을 바꿔 집으로 돌아올지도 몰랐다. 만약을 대비해 진원에게 불법적인 일을 동원해서라도 채언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범죄자가 되는 게 채언을 잃는 것보다는 나았다. 출국 날 공항에 사람을 깔아서라도 찾아낼 생각이었다.
영웅은 어금니를 물었다. 채언의 상태가 괜찮아졌다고 생각한 제 잘못이었다. 그동안 꾸준히 신호를 주었던 것 같은데 알아채지 못했다. 밥을 잘 먹지 못하고, 잠이 늘고, 때때로 멍한 얼굴. 미국에서 병원 생활을 하던 자신과 같았다. 그리고 자살하기 직전 평온해 보이던 제이슨과 닮아있었다. 왜 더 눈여겨보지 않았는지. 영웅은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손을 쥐었다 폈다. 사실 채언의 상태를 인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애써 무시하려 했던 것인지도. 그러지 않기를 바랐던 건지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채언이 베란다에 기대어있던 추운 날. 그때 느꼈던 불안함을 기억했어야 했다. 깨진 토마토 화분을 치울 때 느꼈던 불쾌감을 놓쳐서는 안 됐다.
‘괜찮으시죠?’
묻는 말에 괜찮다고 대답하지 말았어야 했다. 괜찮지 않다고, 영영 옆에 함께 있어달라고 애원해야 했다.
차가 주차되자, 영웅은 기사에게 대기해 달라고 부탁한 뒤 노트북만 든 채 밖으로 나왔다. 아침에 채언과 함께 타고 내려왔던 엘리베이터에 혼자 몸을 싣고 집으로 올라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마중 나온 사람은 없었다. 진원의 말대로 핸드폰은 카드 두 장과 함께 신발장 옆 거울 아래 놓여 있었다. 아침에 채언에게 쥐여 주었던 것이었다.
영웅은 괴로운 표정으로 핸드폰을 잡았다. 잔뜩 힘이 들어간 손에 핏줄이 돋아났다. 찌푸린 눈가의 초록색 눈동자가 물기로 일렁였다.
영웅은 신발을 벗지도 않고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채언 씨!”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 집 안을 돌아다니며 닫힌 문을 전부 열어보았다. 방문을 열 때마다 채언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공중에서 흔들리는 발끝을 보게 되지는 않을까, 쓰러져있는 채언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집 안 어디에도 채언은 없었다. 드레스룸에 조금 남아있던 옷가지마저 사라진 상태였다.
복도 끝 방에는 마카로니도, 사과도 없었다. 영웅은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자꾸만 씨근덕거리는 숨이 쉬어졌지만, 정상적인 호흡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아직 이틀이라는 시간이 남아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텅 빈 복도 끝방 안에서 영웅은 채언이 인터넷에 올린 글들을 떠올렸다. 오래전부터 자살을 결심한 듯했다.
하지만 왜 하필 지금일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식물원에 간 날, 카페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채언은 멀쩡했다. 넘어진 후로 급격히 상태가 안 좋아졌고. 영웅은 눈가를 좁혔다.
의사는 사람이 갑작스레 고통을 느끼면 과호흡을 일으킬 수 있다고 했지만, 불안정해 보이던 채언의 상태는 단지 발목 때문이라기엔 조금 미심쩍었다. 핸드폰을 고치지 않겠다고 한 것도 이상했다. 그 뒤로 새것을 사지도 않았다. 순간 영웅의 눈앞이 번쩍 튀었다. 채언이 그 뒤로 핸드폰을 찾지 않았으니, 고장 난 핸드폰이 집 안에 남아있을지도 몰랐다.
서둘러 침실로 들어간 영웅은 마른 입술을 핥으며 서랍을 열었다. 손바닥만 한 상자가 보였다. 핸드폰 액정이 부서지듯 깨졌던 탓에 유리가루가 떨어지지 않게 따로 담아두었던 것이었다. 영웅은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하….”
핸드폰이 그대로 담겨있었다.
몇 번이나 천둥 번개가 쳤지만, 영웅은 귀를 막지 않았다.
충북은 낮부터 비가 온다는 소식에 아침 일찍부터 포도 농장에 나와 거봉을 싸는 중이었다. 중부지방에서부터 비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거봉 포장을 마치면 서둘러 청포도 하우스 위에 비닐도 씌워야 했다. 그나마 일꾼이 한 명 늘어 다행이었다.
날씨가 습해 이마 옆으로 땀이 흘렀다. 충북이 목에 걸어둔 수건으로 땀을 닦기 위해 한쪽 장갑을 벗던 찰나,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에서 알림이 울렸다. 띠링, 띠링, 띠링. 몇 번이나 울렸다.
“보자, 보자, 보자. 무슨 연락이 왔나.”
핸드폰을 꺼낸 충북은 잠금 화면에 입금 알림이 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게 누구여?”
알림을 타고 들어가 계좌를 확인한 충북의 눈이 동그래졌다. 채언에게서 350만 원이 입금되어 있었다. 돈은 여러 차례에 나뉘어 들어왔는데, 글자를 남길 수 있는 칸에 회당 몇 글자씩이 쓰여 문장을 이루고 있었다.
“뭐라고 쓴 겨, 이게?… 아저씨, 저예요. 갈 곳이 있어서… 이렇게 남겨요. 남은 계절도… 부탁드릴게요. 그동안 정말로, 감사했어요….”
그동안 과일을 부탁하면 부탁한다고 전화나 메시지를 남기던 채언이었다. 이런 식으로 연락을 해온 것은 처음이라, 충북은 땀에 젖은 머리를 긁적였다. 게다가 돈도 지금껏 보내오던 액수와 한참 차이가 났다.
“아, 맞다.”
충북은 고개를 들어 저쪽 거봉 나무 아래 서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아야! 에?”
충북의 부름을 들은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예? 뭐라고요?”
“이리 좀 와봐라. 건영아! 채언이한테서 돈이 왔는데.”
충북의 말을 들은 건영은 서둘러 뛰어오며 분통 터진 듯 말을 쏟아냈다.
“아 진짜!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아저씨 제가 형한테 돈 받지 말라 그랬죠!”
충북은 서둘러 손을 저었다.
“내가 달라고 한 거 아녀! 갑자기 돈이 왔어, 방금. 그런데 이게 좀 이상하다?”
“뭐가요. 왜요?”
“돈이 쬐끔 많다? 그리고 보내온 게 좀 이상한데. 느낌이 영….”
“봐봐요. 얼마 보냈는데요?”
“삼백.”
“예? 삼배액?”
“쁘라스 오십.”
“이 형이 진짜! 혼자 쓰라고 줬더니 아예 기부를 하고 있네. 또 과일 사서 보내래요?”
건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충북이 내민 핸드폰 화면을 보았다.
“이게 뭔 말이에요? 형 원래 이런 식으로 돈 보냈어요?”
“아니. 원래는 전화 같은 거로 직접 말하는데. 왜 이렇게 보낸 건지, 나도 참 희한하다.”
“어딜 간다는 거지.”
건영은 목덜미를 긁적이며 허리를 폈다.
“아저씨. 형한테 전화 한번 걸어봐 주시면 안 될까요?”
“그래. 전화 한번 해보자.”
“저 여기 있는 건 말하지 마시고요.”
채언의 이야기만 나오면 쭈뼛거리는 건영을 보며 충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진짜 네 말이 맞네. 채언이가 한 방에 돈 보낼지도 모른다더니.”
충북은 채언에게 전화를 걸며 예전 일을 떠올렸다.
한 달 전쯤이었다. 전날 밤, 비가 온 탓에 포도를 보러 새벽부터 출근했는데 농장 앞 가게에 누군가 앉아있었다. 맨발에 젖은 바지 차림을 한 건영이었다. 술에 취해 있었는데 자신을 보자마자 대뜸 그러는 것이었다.
‘아저씨. 채언 형이… 끅, 과일 산다고 돈 보냈어요?’
익숙한 이름을 말하는 저 녀석이 누군가 자세히 살펴보던 충북은 예전 일을 기억해냈다. 채언이 친한 동생이라며 데리고 왔던 잘생긴 놈이었다. 나중에 채언을 찾으러 왔었던 바로 그 녀석. 졸린지 반쯤 풀린 눈을 끔뻑거리고 있었으나, 확실했다.
그동안 채언이 사람을 피해 다닌다고 어렴풋이 짐작해왔던 충북은 건영을 껄끄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취한 사람을 인적 없는 도로로 내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그냥 취한 것이 아니라 맨발이었다. 핸드폰도 없었다.
‘저기, 너. 여기 어떻게 왔냐?’
‘택시, 끅… 택시 타고 왔는데요.’
말이 통하지 않아서 가게 안쪽에 들여놓고 좀 재웠다. 날이 밝아서는 본인도 어리둥절해 있는 것을, 숙취 해소나 하라고 국밥을 먹여놨더니 머리가 좀 맑아진 듯했다. 그러더니 살살 눈치를 보면서 또 채언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제가 형한테 돈을 줬는데요. 그거 다 혼자 쓰라고 준 거거든요? 그런데 형은 또 과일 사다가 기부할 것 같단 말이죠. 형이 갑자기 과일 잔뜩 달라고 그러면 꼭 거절해주세요.’
충북은 신발도 없어서 슬리퍼를 빌려 신은 놈이 채언에게 많은 돈을 주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채언에게 전화해서 확인해보겠다고 했더니, 그때는 또 그러지 말라며 설설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형이… 저 안 좋아해요.’
그 뒤로 말해오는 사연이 기구했다. 핸드폰도 없어, 갈 곳도 없어, 돈은 조금밖에 없어. 미심쩍으면서도 짠한 마음에 하루 이틀만 지내라고 가게의 낡은 소파를 빌려줬더니, 건영은 밥값은 하겠다며 포도 농장 일을 돕기 시작했다.
건영이 채언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된 일인지 꼭 말해주겠다는 것에 충북은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 뒤로 어찌어찌 지내다 보니 나쁜 애는 아닌 듯하여 그렇게 지내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는 혜옥도 건영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채언은 정말로 갑작스럽게 과일을 잔뜩 살 돈을 보내왔다. 예전과는 너무 다른 방법으로.
“채언이가 전화를 안 받네.”
핸드폰에서는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된다는 안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통화종료 버튼을 누른 충북은 다시 채언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루. 뚜루루루. 몇 번이나 다시 걸어보았지만 채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뭐지. 느낌이 좀 이상한데. 아저씨, 형 어디 여행 간다고 그랬어요?”
“아니. 그런 적 없는데. 요즘에는 전처럼 말도 잘 안 하고.”
두 사람은 찝찝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너. 채언이 어디 사는지 아냐?”
“아저씨. 차 좀 빌려주세요.”
몰려오던 검은 구름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채언은 호텔 레스토랑 앞에서 대기하는 중이었다. 영웅과 여행을 갔을 때 묵은 호텔에서는 24시간 룸서비스를 시킬 수 있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호텔 레스토랑도 막연히 24시간이겠거니 생각하고 온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 확인해보니 아직 오픈 전이라는 안내가 돌아왔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가방에 꽂아둘 수 없어서 채언은 우산 손잡이를 들고 있었다. 부은 눈가가 따가웠다.
은행에 들러 충북에게 돈을 보내놓고, 잠시 밖을 떠돌았다. 길을 걸을 때마다 낡은 캐리어 바퀴는 덜덜거리며 소음을 남겼다. 아직도 귓가에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멍하니 젖은 운동화를 보고 있던 채언에게 직원이 다가왔다. 어느덧 오픈 시간이 된 것이었다.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은 채언은 맞은편 빈 의자를 보다가 메뉴판으로 눈을 돌렸다. 사실 메뉴판을 볼 필요는 없었다. 뭘 먹을지는 이미 정해둔 상태였다.
“게살 볶음밥. 하나만 부탁드립니다.”
“네. 게살 볶음밥 하나 맞으세요?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시고요?”
“네. 그것만 부탁드릴게요.”
레스토랑 안은 금방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일행과 온 사람들이 저들끼리 즐겁게 대화를 나눌 때, 채언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앉아 손가락을 매만졌다. 전에 영웅과 함께 왔을 때는 목도리를 하고 있었다. 건영이 준 빨간 목도리였다. 그러나 이제는 옆에 영웅도, 건영도, 목도리도 없었다.
잔뜩 주눅 든 채언의 몸은 당당히 펴질 줄을 몰랐다. 거스러미가 뜯겨나간 손가락에는 자꾸 피가 비쳤다.
시킨 음식은 금방 나왔다. 볶음밥을 내려놓은 직원에게 인사를 한 채언은 곧바로 숟가락을 들었다. 통통한 새우를 입에 넣고 씹자 뜨거운 살이 톡 터졌다. 비린내도 나지 않은 좋은 새우였지만 턱을 움직이는 채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단단한 젤리를 씹는 듯했다.
고슬고슬한 밥을 몇 번 더 떠먹어보았지만, 역시나 맛이 없었다. 채언은 제대로 씹지 않은 음식물을 그냥 삼켜버린 뒤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방금 먹은 것이 얹힌 듯 가슴이 무거웠다.
채언은 물을 마신 뒤 직원을 불렀다.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과일 케이크 있나요? 생과일 케이크요.”
“후식으로 드실 조각 케이크를 말씀하시는 거면, 제철 생과일 케이크로 멜론과 망고 케이크 준비되어 있습니다. 메뉴판 가져다드릴까요?”
“혹시, 딸기 케이크는 없나요?”
“생딸기 케이크는 3월에 판매가 종료되었습니다. 딸기가 들어간 제품을 찾으시는 거면 다른 디저트를 추천해드려도 될까요?”
“…아니에요. 그냥 멜론 케이크, 조각으로. 한 개만 부탁드릴게요.”
영웅이 개인 수리 센터에 보낸 채언의 핸드폰은 두 시간여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노트북으로 채언의 기록을 거슬러 올라가던 영웅은 퀵으로 도착한 핸드폰을 켰다. 가장 최근까지 누구와 연락했는지 찾아볼 생각이었다. 핸드폰을 켜자마자 부재중 전화 알림이 여러 개 떴다. 가장 최근 것은 ‘충북 아저씨’에게 온 것이었다.
채언은 요즘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았으니, 지금 부재중 전화는 중요하지 않았다. 영웅은 채언이 식물원에서 넘어지기 전에 누구와 통화를 했는지가 궁금했다. 손가락은 빠르게 움직였다.
“건영이, 건영이, 건영….”
통화 목록도, 메시지 목록도 자신 아니면 건영이라는 사람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채언이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도 건영이었다. 영웅은 미간을 찌푸렸다. 건영은 백화점에서 채언의 팔을 함부로 낚아채려던 남자였다. 도대체 두 사람이 어떤 사연으로 얽혀있는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채언이 건영과 나눈 메시지를 넘겨볼수록 영웅의 얼굴은 굳어졌다. 돈 때문에 어떤 갈등이 있었던 듯했다. 피가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채언을 잃을까 두려워하던 마음과 다른 감정이 가슴에 차올랐다. 떨리던 손이 놀랍도록 차분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식은땀도 나지 않았다.
부우우-. 영웅의 핸드폰으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진원에게서 온 것이었다. 채언이 호텔 레스토랑에서 카드로 결제한 내역이 확인되었다고 했다. 다만, 여기저기서 협조를 얻어내느라 결제한 시점으로부터 시간 차가 있었다.
곧 호텔 이름과 함께 지도가 도착했다. 사진을 확인한 영웅의 머릿속에 어렴풋한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빨간 목도리를 한 채언. 예전에 함께 호텔 레스토랑에 간 적이 있었다. 영웅은 서둘러 노트북을 챙겨 일어났다. 다른 손에는 핸드폰 두 개를 쥔 채였다.
지하로 내려간 영웅은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던 차의 운전석 문을 열었다. 앉아있던 기사가 눈을 끔뻑거렸다.
현관문 카드키와 함께 기사를 집으로 올려보낸 영웅은 직접 운전을 해서 호텔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액셀을 밟는 그의 머릿속에 자꾸만 무언가 어긋났다는 경고가 울렸다.
잠시 길가에 차를 댄 영웅은 핸드폰을 꺼냈다. 진원이 보내온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레스토랑에서 결제가 된 시각은 한 시간도 더 전이었다. 영웅은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쉬었다. 채언은 이미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컸다.
영웅은 진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호텔 쪽으로 사람을 보내서 그 주변 좀 확인해주세요. 그리고 연락처를 하나 보낼 테니까. 번호 주인이 뭐 하는 사람인지 좀 알아봐 줘요. 채언씨랑 어떤 관계인 건지.]
영웅은 핸들을 톡톡 두드리다가 채언의 핸드폰 기록을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자잘한 정보 하나하나에 흥분해서는 안 됐다.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해 중요한 단서를 찾아야 했다.
메시지 함을 보던 영웅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정확한 주기는 아니었지만, 채언이 충북 아저씨라는 사람과 일정한 시기마다 메시지를 주고받은 기록이 남아있었다. 과일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채언이 그에게 물건을 주문하는 듯했다.
영웅의 눈에 의문이 서렸다. 채언은 과일을 즐겨 먹는 편이 아니었다. 딸기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고, 지난번 사과를 잔뜩 주문해줬을 때 열심히 먹기는 했지만, 대부분을 갈아서 자신에게 주스를 만들어 주고는 했다. 세 팩짜리 사과도 책상 위에 한참을 있었다. 그리고 주문한 과일이 있었다면 냉장고에 보관했을 텐데. 지금까지 채언 전용으로 비워두었던 냉장고 칸이 꽉 찼던 적은 없었다. 사과 박스를 보관하던 발코니도 마찬가지였다.
[아저씨. 저 지금 서울에서 출발해요.]
[충북 아저씨: 그래]
예전에 나눈 메시지를 확인한 영웅은 이번에는 전화 기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조금 전 메시지에 찍혀있던 날짜 즈음까지 스크롤을 움직였다.
채언이 연락하는 사람은 적었다. 자신 또는 건영, 충북 아저씨와 송 교수 정도였다. 그중에 이름이 아닌 ‘하늘의 집 원장’으로 적혀있는 저장 명이 눈에 띄었다.
영웅은 통화목록을 빠르게 내리기 시작했다. 메시지 목록도 다시 훑었다. 드문드문하지만 채언은 하늘의 집 원장과도 주기적으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연락한 다음에는 어김없이 충북 아저씨라는 사람과 전화 통화나 문자를 했다.
영웅은 자신의 핸드폰을 꺼냈다. 검색창에 하늘의 집을 쳤다. 화면에 뜬 것은 대동에 있는 보육원이었다. 대동. 낯설지 않은 지명이었다. 바로 얼마 전에 그곳으로 여행을 다녀왔으니까. 사전에 보육원이라는 단어를 검색한 영웅은 해석된 것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심채언 씨는 가족분들이 안 계시는데요.>’
‘저도 가족들을 보러 가려고요. 너무 오래 못 봬서.’
멈춰있던 영웅의 차가 도로 쪽으로 빠져나갔다. 영웅은 액셀을 밟기 시작했다.
채언은 버스 창문에 이마를 기댄 채,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울을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달릴수록 하늘은 어두워지고, 바람은 거세졌다. 바깥에 보이는 가로수 잎들이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영웅이 탄 비행기는 하늘을 잘 날고 있을까. 채언은 구름 위는 맑기를 바라며 고개를 숙였다. 현금을 털어 버스표를 산 탓에 이제 손에 쥔 지갑은 텅 비었다. 하지만 돈이 잔뜩 들어 있는 카드가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채언은 주먹 쥔 손으로 가슴을 문질렀다. 볶음밥과 케이크를 몇 입 먹지 못하고 나온 것이 다행이었다. 속이 좋지 않았다.
“15분간 쉬다 가겠습니다. 지금이 25분이니까, 40분까지는 다들 돌아와서 착석해주세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버티던 채언은 휴게소에 버스가 정차하자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버스에서 내렸다. 떨리는 손으로 펼친 접이식 우산은 비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거세게 내리는 비가 채언의 몸과 얼굴을 적셨다.
화장실에 들어가 속을 게워낸 채언은 몇 번 헛손질을 한 후에 겨우 변기 물을 내렸다. 핸드폰이 없어 시간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혹시 15분이 지났을까 봐 채언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일어섰다.
급히 물로 입을 헹군 뒤 화장실을 나왔는데, 옆에 늘어선 간식 판매대에서 달콤한 냄새가 풍겨왔다.
“흐…으.”
호두 과자나 알 감자를 파는 매대를 보던 채언의 입꼬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울지 않으려고 이를 물어보았지만, 눈에 차오르는 눈물을 막을 수는 없었다. 채언은 팔뚝으로 눈물을 훔친 뒤, 약한 우산을 펼쳐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채언이 좌석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간식 봉지를 쥔 사람들이 허겁지겁 버스에 올라탔다. 여행을 가는 길인지 저들끼리 즐거워 보였다.
버스가 출발했다. 채언은 즐겁게 속닥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를 들으며 억지로 눈을 감았다. 휴게소를 빠져나간 버스는 반대편 도로를 달리는 파란 트럭과 교차했다.
핸드폰 스피커를 켜놓고 진원의 말을 듣던 영웅은 핸들을 꽉 쥐었다.
-<가드레일에 부딪혀 사고가 났는데, 직선도로였고 그날 날씨도 괜찮았답니다. 이상함을 느낀 보험회사에서 조사해보니, 심채언 씨의 부모가 사고 발생 얼마 전에 어린이 보험을 들어놨다고 하고요. 목격자 증언에 의하면 잘 가던 차가 갑자기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는데, 오른쪽 뒷좌석에 어린애가 타고 있었답니다. 운전석에 한 명, 뒷좌석에 한 명 부모가 나눠 타고 있었는데, 사고 난 직후 옆에 탄 어린애를 보호하려는 행동을 취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어린이 보험 중에서도 꽤 고급형이었고, 중상을 입거나 사망 시 지급되는 금액이 커서, 어린이 보험금을 타내려고 고의 사고를 낸 것으로 결론이 난 사건입니다. 그래서 보험금은 지급되지 않았고요. 심채언 씨는 그때부터 하늘의 집에서 자라게 되었는데 중간중간 입양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 혼자였던 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건영은 하늘의 집에서 자라다 중간에 입양이 되어 나갔는데 성인이 된 후에 파양됐습니다. 전입신고를 확인해보니 파양되기 전에 잠깐 심채언 씨랑 같이 살았던 것으로 나옵니다, 그때.>
<됐어요, 이제. 충분해요.>
털썩. 시트에 몸을 기댄 영웅은 조수석을 돌아보았다. 채언은 차에 타면 제일 먼저 안전벨트를 매고는 했다. 차가 달리는 중간중간 두 손으로 안전벨트를 꼭 쥐는 버릇이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영웅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눌러 삼키며 팔로 얼굴을 가렸다. 뜨거운 숨이 터져 나왔다.
-<문제없으시죠?>
스피커를 통해 진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없어요.>
-<전화는 끊지 않고 계속 연결해놓겠습니다.>
<그래요.>
진원은 영웅이 운전기사 없이 혼자 운전 중이라는 것을 조금 전에 알았다. 채언의 상황을 보고하기 시작한 후였다. 그가 트라우마를 자극받지 않을까 중간에 말을 그만두려 했으나, 영웅의 태도가 완강했다. 위치를 추적해서 따라와도 상관없다는 말에, 이미 조수석에 진원을 태운 차 또한 고속도로로 진입한 상태였다. 뒷자리에는 의사 한 명과 상담사가 함께 타고 있었다.
<그럼, 다른 연락이 오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겠어요.>
진원은 방금 전 보고한 내용이 적힌 태블릿을 내려놓고, 노트북 화면에 뜨는 영웅의 위치를 틈틈이 확인했다. 변함없이 대동으로 향하는 도로 위였다.
장건영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봐 달라던 그는, 갑자기 하늘의 집과 입주 도우미의 연관성을 함께 알아봐달라고 부탁해왔다. 채언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쉬웠다. 예전 방송이나 신문에 사연이 자세히 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갓길에 잠시 서 있던 영웅의 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동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조금 남아있었다. 정확한 목적지는 하늘의 집이었다. 채언이 보육원과 연이 닿아있다면, 부모님을 보러 간다는 말이 보육원에 간다는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진원의 보고로 영웅은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진 상태였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찝찝했다.
그래도 차는 멈추지 않고 달렸다.
영웅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잡생각을 물리치며 운전에 집중하고 있을 무렵, 채언의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 위에 뜬 저장명은 충북 아저씨였다. 빗물을 치우는 와이퍼의 움직임에 흐리던 차창이 맑고 투명해졌다. 영웅은 한 손으로 핸드폰을 터치해 전화를 받았다.
-어! 받았다. 채언아!
“….”
-채언아. 너 왜 이렇게 돈을 보냈냐? 여기 통장에 남긴 말은 또 뭐고.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어? 아저씨 지금 서울 가는 중인데. 응? 채언아.
영웅은 말없이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뭐지… 건영아. 이거 연결된 거 맞지? 저쪽에서 말을 안 하는데.
핸드폰에서 들려온 이름에 영웅의 눈이 크게 뜨였다.
버스에서 내려 터미널에 잠시 앉아있던 채언은 주변 사람에게 물어 가까운 약국에 들렀다. 속이 좋지 않다는 말에 약사는 유리병에 든 물약을 내밀며 가격을 말했다.
“죄송하지만, 카드… 로 해도 될까요?”
얼마 되지 않는 소화제 가격에 채언은 지갑을 쥔 채 머뭇거렸다.
“네.”
카드를 내밀어 결제를 마친 채언은 정수기 옆 의자에 가서 앉아 병뚜껑을 열었다.
곧 죽기로 마음먹었으면서 몸이 좋지 않아 약을 먹는다는 게 모순처럼 느껴졌다. 채언은 약국 벽에 걸린 거울을 보며 헛웃음을 치는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꿀꺽꿀꺽 약을 마셨다. 작은 병은 금방 비었다.
병을 쥔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언은 입안에 남은 쓰고 단 맛을 삼켰다. 스위스에 도착하면 이것보다 더 쓴 약을 먹게 될 수 있을까. 찾아본 바로는 깊은 잠을 자게 해준다는 그 약은 아주 쓰다고 했다. 초콜릿을 하나 내어준다는데, 자신에게 초콜릿을 줄 사람은 있을지….
채언은 멍하니 주머니에 손을 넣어 천사의 날개를 만졌다. 이 날개에 양말을 걸었었다. 초콜릿이 들어있었는데.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언은 약병을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약국을 나섰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채언은 영웅과 여행을 떠났을 때 이렇게 세찬 비가 내리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약한 접이식우산은 비를 막는 용도로는 꽝이었다.
비가 내려 시야가 좁은데도 도로를 달리는 차들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채언은 물웅덩이를 밟고 지나가는 차 꽁무니를 쳐다보았다.
병원에 입원한 영웅에게로 달려가던 날. 저런 차들이 튀긴 물에 몸이 잔뜩 젖었었다. 옷이 젖어 태워주지 않는 택시를 몇 대나 보내야 했다. 우산을 든 채언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길가를 달리지도 않았고, 우산도 쓰고 있는데 옷이 축축했다. 바지 밑단부터 허벅지, 티셔츠 배 부분까지 옷 색깔이 진해져 있었다. 손을 뒤로 돌려 등에 멘 가방을 만져보니, 가방 앞주머니에 물이 고여 있는 것이 느껴졌다. 눈앞으로 가져온 손에 물이 흥건했다. 운동화 안쪽 양말을 신은 발도 축축했다.
속상한 것은 단순히 찝찝한 기분 때문이 아니었다. 영웅이 사준 운동화에 젖은 흙이 묻어있었다. 입꼬리를 내린 채언은 캐리어를 옆에 세워둔 채 다리를 굽혔다.
“여기에도 곰팡이가 슬겠네.”
손으로 운동화 위를 털었다. 젖은 흙은 잘 떨어지지 않았다.
-<방금, 새로운 결제 내역이 떴는데요.>
갑작스레 들려오는 진원의 말에, 영웅은 채언의 핸드폰으로 통화하던 것을 멈췄다.
-<대동 시외버스 터미널 근처 약국에서 카드가 사용됐습니다.>
<알겠어요.>
고속도로를 빠져나온 차는 터미널이나 하늘의 집 쪽으로 향하지 않았다. 조수석 앞에 놓인 양 인형을 흘끔 쳐다본 영웅은 핸들을 돌렸다. 거센 비가 차창을 때렸다.
비가 퍼붓는 해변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메인 거리와 먼 곳이었다.
날씨가 좋지 않은 데다, 바람 때문에 파도가 거칠어서 해수욕장 입구에는 입수 금지를 알리는 현수막이 붙어있었다. 모래사장 곳곳에 입수 금지가 써진 빨간 깃발도 꽂혀있었다. 채언은 그런 곳을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한 손에는 우산을, 다른 손에는 캐리어를 든 탓에 중심 잡기가 힘들었다. 관자놀이 옆으로 흐르는 땀을 훔치고 싶었지만, 손이 없어 그냥 흐르게 두었다.
“읏!”
누군가 파둔 얕은 구덩이에 발이 걸린 채언은 손에 쥔 캐리어로 모래를 찍듯이 눌렀다. 겨우 넘어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다행히 발목을 접질리지는 않은 것 같았다. 채언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살짝 굽힌 무릎을 폈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던 마음이 어깃장 난 것 같았다.
안도의 숨을 내쉬었던 입술 사이로 씨근덕거리는 숨이 뱉어졌다. 채언은 미간을 좁히며 먼바다를 바라보았다. 문득, 채언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왜 안도했을까. 속이 불편해 약을 사 먹은 것과 비슷한 모순이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은 왜 이러고 있는 걸까. 빗물에 젖어있던 바지와 신발은 모래가 붙어 엉망이었다. 무거운 캐리어와 가방을 들고 옮기느라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온몸이 끈적하고 불쾌했다.
영웅과 걸었던 거리를 걷고, 영웅과 다녀온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영웅과 여행을 왔던 장소에 혼자 왔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그와의 추억을 혼자서 되새김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다 젖은 몸인데 우산은 무엇 하러 들고 있었는지. 혼자 평온하게 산책이나 즐기고 있었다니.
파도는 영웅과 보았을 때보다 거칠었다. 물색은 그때보다 검었고, 부서지는 파도 거품이 넓게 퍼졌다. 무생물인 바다가 징그럽고 무섭게 느껴졌다. 건영이 바닷가에 왔을 때가 이랬을 것 같았다. 그날도 비가 왔다고 했었으니까.
부서져도 계속해서 밀려오는 파도는 죽여도 죽지 않는 괴물 같았다.
우산을 들고 있던 채언의 팔이 천천히 아래로 추락했다. 우산은 모래사장 위에 떨어져 바람에 굴렀다. 채언은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우산이 사라지자 머리 위로 비가 쏟아졌다. 머리카락 사이로 흘러내린 물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렀다.
채언은 다른 손에 쥐고 있던 캐리어 손잡이도 내팽개쳤다. 무게감 있는 가방이 뒤로 기울다가, 퍽,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등에 메고 있던 가방도 바닥에 던져버린 채언은 바지 주머니에서 날개 달린 천사 장식품을 꺼냈다. 가만히 손안의 날개를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미련만 늘 것이었다. 스스로 영웅의 집에서 도망쳐 나왔으면서, 그와의 추억을 되돌아보기 위해 이곳에 왔다. 신파도 이런 신파가 없네. 채언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손에 쥔 것을 다시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어둠을 머금은 바다를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건영이 진짜로 저 징그러운 파도에 먹혔다면 자신도 저 하얀 포말에 휩쓸려 가야 했다. 어차피 스위스에 간다고 해도 안락사는 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온화한 죽음을 맞이하려면 엄격한 절차를 통과해야 했으니까. 삼천만 원을 가지고 비슷한 약물을 살 생각이었다. 그보다 더 적은 돈 때문에 사람도 죽이는데, 빼돌린 약물을 파는 사람이 없을까 싶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런 계획조차 너무 복잡하게 느껴졌다. 너무 피곤했다. 단순해지고 싶었다.
비에 젖은 채언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적당히 술을 마신 것처럼 기묘한 흥분감이 몸에 감돌았다. 진한 커피를 마신 것처럼 심장이 쿵쿵 뛰었다.
채언은 모래사장 곳곳에 흩어진 자신의 짐을 둘러보았다. 뭐 하러 낑낑거렸는지 모르겠다. 온몸이 끈적했고 더웠다. 너무 피곤해서 잠들고 싶었다.
모든 짐을 벗어던진 채언은 가벼운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바닷물 가까이 다가갈수록 채언의 걸음이 빨라졌다. 하아, 가쁘게 내쉬는 숨이 하, 하, 웃는 소리로 변해갔다. 채언의 표정은 물가에 놀러 가는 어린애처럼 가벼웠다. 마침내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위로 한 걸음 내디뎠다.
안 돼, 안 돼, 안 돼. 모래사장으로 뛰어 내려가는 영웅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안 돼요. 채언 씨!”
충격으로 벌어진 입에서 조그맣게 읊조려지던 말이 크게 터져 나왔다.
“안 돼, 안 돼!”
모래 위에서 비틀거린 발에 넘어질 뻔한 영웅은 바닥을 손으로 짚어 버텼다. 곧바로 몸을 세워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멈춰요! 안 돼!”
해수욕장 주변을 돌다 겨우 채언을 발견했다. 아무렇게나 세운 차 안에서 나올 때까지 안도의 숨을 쉬던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손에서 떨어지는 우산 대신 자신이 손으로 비를 가려주면 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랬는데.
모래 위를 달리는 영웅의 표정이 자꾸만 일그러졌다. 제발 나에게 당신을 구할 기회를 달라고,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지만 채언의 귓가에 영웅의 목소리는 잘 닿지 않았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두 사람을 갈라놓고 있었다.
콰앙! 천둥이 쳤다.
파도에 뒤로 밀려났다가 앞으로 휩쓸리는 채언의 몸은 허리 바로 아래까지 물에 잠겼다. 하늘이 너무 흐려서 멀리 수평선이 보이지 않았다. 머리꼭지가 바다에 잠기면 하늘에 뜨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하아.”
입김이 새어 나오지 않아서 채언은 입술을 동그랗게 모아 다시 숨을 뱉었다.
“호오.”
조그맣게 입술을 벌린 채언은 검은 바다가 하얗게 흐려지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꿈속을 걷는 듯 몸이 부유하는 기분이었다.
빗물이 들어간 눈이 시려서 채언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폐가 아플 정도로 달린 영웅은 망설이지 않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물의 저항을 받는 다리가 무거웠지만 이를 악물고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자꾸만 멀어지는 채언을 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큰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몸이 휩쓸린다면 바다 멀리까지 빨려 들어갈지 몰랐다. 손으로 휘저어도 거두어지지 않는 물을 헤치며 영웅은 계속해서 앞을 보고 걸었다.
검은 물속처럼 어두운 하늘에서 계속해서 천둥과 번개가 쳤다. 영웅은 귀를 막지 않았다. 오로지 한 사람만 바라보며 물을 헤쳤다.
“심채언!”
멍하니 물속을 걷던 채언은 자리에 멈춰 섰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 사이로 영웅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돌리려는 채언의 몸에 파도가 부딪쳐 포말이 일었다.
“읏!”
눈을 따갑게 만드는 바닷물에 채언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더 심해진 고통에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언은 앞을 보지 못했다. 철썩! 밀려오는 파도를 그대로 맞은 채언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흔들리는 몸 위로 더 큰 파도가 덮쳐오려는 찰나, 영웅의 손이 채언의 팔을 낚아챘다.
“채언, 큿!”
채언을 품에 안고 등을 돌려 대신 파도를 맞은 영웅은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뒤로 빨려 들어가려는 몸을 버텼다. 하지만 발아래로 모래가 쓸려감과 동시에 디디고 있던 땅이 사라졌다. 영웅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파도에 휩쓸린 두 사람의 몸이 물속으로 처박혔다.
갑작스레 물에 빠진 채언은 당황하며 팔을 저었다. 쓴 물이 눈과 코를 괴롭게 했다. 공기 대신 목 뒤로 넘어오는 물 때문에 답답함과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바닷물에, 채언은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거리며 입을 열었다. 눈이 따가운지도, 입 안으로 짠 기가 느껴지는지도 모르고 공기를 마시기 위해 뻐끔거렸다. 하지만 폐 속으로 공기 대신 물이 밀려 들어왔다.
검은 물속에서 숨이 막힌 채언은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후회가 되었다. 제발 누군가 자신을 구해주었으면 했다. 채언은 허리를 붙잡고 있는 팔이 누구의 것인지 모르고 떼어내려 마구 밀어냈다. 거센 파도가 자신의 허리를 휘감고 있는 것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물속에서 정신없이 굴렀지만, 영웅은 품 안의 채언을 놓지 않았다. 휘저어진 모래알들이 얼굴을 따갑게 스쳤다. 방향감각을 잃었지만 계속해서 다리를 움직이던 영웅은 겨우 물속에서 모랫바닥을 디뎠다. 단단한 감각을 놓치지 않고 다리에 힘을 줘 일어섰다.
“허억!”
물 위로 얼굴을 내민 영웅은 채언의 몸을 단단히 붙잡고 위로 끌어올렸다. 계속해서 밀려오는 파도가 두 사람의 몸에 부딪히며 잘게 쪼개졌다.
“푸하! 채언 씨. 정신, 차려요!”
“콜록, 컥.”
“채! 크윽.”
쓸려나가는 모래 때문에 영웅의 발이 비틀거렸다. 물 위로 머리를 올렸던 두 사람의 몸이 다시 물속으로 처박혔다.
영웅은 이를 악물고 손에 힘을 주었다. 금방 휩쓸려가는 모래처럼 파도가 앗아가려는 채언을 절대 놓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자꾸만 품 안을 벗어나려는 몸을 끌어당겨 안았다.
“흐윽!”
물속에서 무거운 다리를 일으킨 영웅은 채언의 몸을 안아 올렸다. 계속해서 밀려오는 파도를 등으로 막아주며 품 안을 확인해보니 눈을 감은 채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는 것이 보였다.
<제발… 제발.>
어금니를 꽉 깨문 영웅은 눈가를 찌푸리며 모래사장 쪽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완전히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 전 채언을 잡아 다행이었다. 영웅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모래사장 가까이 가기 위해 기를 쓰고 걸었다.
철퍽! 무거운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의 몸이 모래사장 위로 쓰러졌다. 부서진 파도가 밀려왔지만, 몸이 휩쓸려가지 않을 정도로 안전한 장소였다.
“하아, 하아. 채언 씨. 나 보여요? 정신 차려봐요.”
영웅은 떨리는 손으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뒤로 넘겼다. 얼굴을 쓸어내려 따가운 바닷물을 털어냈다. 하지만 후드득 떨어지는 빗물에 자꾸만 얼굴이 젖어 들었다.
“콜록, 흐… 큭”
물을 잔뜩 마신 채언은 계속해서 기침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영웅은 옆으로 돌아간 채언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고 자신을 보게 했다. 콜록거리는 입에서 투명한 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채언 씨. 정신 차려요. 심채언!”
영웅은 채언의 창백한 뺨을 손으로 두드리며 이름을 불렀다. 잘 뜨지 못하는 눈을 엄지로 쓸어주자 채언의 눈이 꽉 감겼다. 파들파들 떨리던 눈꺼풀이 가늘게 뜨여 깜빡였다. 초점을 잡지 못하고 여기저기 배회하던 검은 눈동자가 영웅의 얼굴에 닿았다. 순간 번개가 쳐 두 사람의 얼굴이 희게 비쳤다. 뒤이어 쿠르릉, 콰앙! 천둥이 치자 채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 아… 으….”
파랗게 질린 입술이 달싹였다. 채언은 비행기에 탔어야 할 그가 왜 여기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귀신을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설마 비행기가 추락했나. 설마 영웅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그가 맑은 날 떠나지 못하게 만들어서. 또 자신이 잡아채는 바람에. 채언은 손을 들어 영웅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저리, 저리 가!”
영웅은 곧바로 몸을 숙여 채언의 몸을 끌어안았다. 격렬한 발길질에도 굴하지 않고 애원했다.
“제발요. 채언 씨, 나예요.”
“위험해요. 위험해진다고요. 저는… 저는.”
정신없이 반항하는 몸짓에 영웅은 이를 악물고 온몸에 힘을 주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하듯 모래사장을 굴렀다.
“읏!”
깨진 조개껍데기가 영웅의 볼을 긁었다. 붉은 실선 사이로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피를 본 채언이 기겁하며 몸을 떨었다. 상처 난 얼굴을 만지려다, 손을 뒤로 물려 모래를 콱 움켜쥐었다.
“죄송해요. 죄송, 죄… 제가 제가 잘못… 죄송해요.”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언은 모래를 짚고 뒤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자꾸만 무너지는 팔 때문에 모래 위에 몸이 나동그라졌다.
“허억…흐읏, 으윽.”
모래가 잔뜩 묻은 몸으로 다시 기어가려는 채언을 본 영웅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어금니를 문 영웅은 채언의 옷자락을 잡아채 단단히 쥐었다. 채언은 옷을 붙잡은 손을 떨쳐내려 했다.
“으… 으…!”
공포에 질린 눈으로 자신을 밀어내는 채언 때문에 영웅은 어쩔 수 없이 거칠게 채언을 잡아당겼다. 모래 위에 털썩 눕혀놓고 손목을 잡아 눌렀다.
“심채언! 정신 차려!”
채언의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초점을 잡지 못하는 눈 위로 빗물이 떨어져 눈물과 함께 흘렀다.
“흐으… 죄송해요. 흑, 가야 되는데. 제가 가면.”
“괜찮아요, 괜찮아요. 채언 씨.”
어린애처럼 엉엉 울던 채언의 가슴이 위로 튀었다. 끄윽, 목이 막히는 소리가 났다.
“제가, 어… 동생을 죽였는데, 어… 부… 부모님도 제가, 죽… 죽였어요. 제가.”
더듬더듬 말을 뱉는 채언의 숨이 가빠졌다. 억지로 말하는 사이사이 끅끅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몸이 굳어지고 있었다. 모래를 움켜쥔 손가락이 곱아들었다.
“끄윽, 제가… 너, 무, 쓸모 없, 흑, 없어서.”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영웅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채언의 손을 쥐어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댔다. 빗물에 눈물이 섞여 흘렀다. 얼굴에 붙은 모래가 핏자국을 가려주었다.
“응? 미안해요, 내가 몰랐어요.”
“흐으….”
영웅은 늘어진 채언의 몸을 들어 안았다. 자그만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한 뒤 등을 토닥여주었다. 천천히 숨을 쉬어보라고 나지막이 속삭여주었다.
“…죄송해요. 흑, 죄송….”
“채언 씨는 잘못한 거 없어요. 많이 힘들었다는 걸 내가 몰랐어요.”
꺽꺽거리며 우는 채언을 영웅은 팔을 조여 안았다. 세게 안아주었다. 단단히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파도는 계속해서 둘의 발목을 적셨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와 세차게 떨어지는 빗소리가 시끄러웠다.
“나에게는 당신이 필요해요. 정말로.”
하지만 두 사람의 귓가에는 서로의 목소리만 들렸다.
굳은 채로 떨리던 채언의 몸이 서서히 늘어졌다. 울음이 멈추지는 않았지만, 호흡의 속도도 정상적으로 돌아오는 듯했다. 영웅은 잘하고 있다며, 자신에게 기댄 얼굴에 입을 맞춰주었다. 계속해서 내리는 비가 짠 바닷물을 씻겨주고 있었다.
영웅의 입술에 닿는 축축한 볼에서 쓴맛이 사라졌을 무렵, 채언이 파들거리는 손을 들어 영웅의 옷자락을 쥐어왔다. 힘없는 손길에 영웅은 울컥 치밀어오르는 것을 삼켜냈다.
“잘했어요. 잘했어, 채언아.”
채언을 다독여주며 긴 숨을 쉬었다.
“이렇게 날 안아주면 되잖아요.”
영웅은 차가운 채언의 볼에 자신의 볼을 문질렀다.
“왜 쓸모가 없다고 생각해요. 나한테 이렇게 필요한데.”
“…흐윽….”
채언은 손에 쥔 영웅의 옷자락을 놓지 않았다. 모래가 잔뜩 붙은 두 사람의 운동화 앞코가 붙어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채언은 가물가물 감기는 눈을 뜨려 노력했다. 빗물이 속눈썹에 떨어져 자꾸만 눈이 깜빡였다. 저 멀리서 달려오는 사람 여럿이 보였다. 익숙한 얼굴이 섞여 있었다. 정말로 침대 위에서 편안하게 눈 감게 된다면, 마지막 순간에 눈인사하고 싶었던 사람들이었다.
채언은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고 생각했다. 온몸이 축축한데 바닷속인 걸까. 아니면 여기가 스위스인 건지. 깊은 잠이 들게 해주는 약을 먹어 이렇게 달콤한 꿈을 꾸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죽기 직전에 그동안 살아온 삶이 주마등처럼 스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보고 싶었던 이들의 얼굴이 떠오르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왜 혜옥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 걸까. 조금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채언은 잠드는 순간이 이 정도면 꽤 괜찮은 것 같았다. 정말로 눈이 감기기 전에, 영웅의 모습이 사라지기 전에 채언은 말하기로 했다.
“…같이, 같이… 읏. 흐윽, 가고 싶었어요.”
“응. 같이 가요. 집으로 가요 우리.”
영웅은 축축하게 젖은 검은 머리카락을 넘겨준 뒤, 채언의 볼에 손바닥을 댔다. 모래 때문에 그의 손은 까끌까끌했지만, 채언은 온기를 좇아 고개를 틀었다. 단단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영웅과 눈이 마주쳤다.
“나도 더 이상 떠돌지 않을래요. 여기 정착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우리.”
검은 눈동자가 눈꺼풀 아래로 사라졌다. 채언의 눈 위에 입을 맞춘 영웅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함께 있어요.”
채언은 숨을 내쉬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감긴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두 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영웅은 잠든 채언을 놓지 않고 고개를 돌려 달려오는 사람들을 보았다.
“형! 형! 채언 형!”
울먹이며 달려오는 저 사람은 아까 고속도로 위에서 자신과 통화를 했던 건영이었다. 그 옆에서 허겁지겁 뛰어오다 모래밭에 넘어진 사람은 모르는 얼굴이었다. 아마도 저 사람이 충북 아저씨인 듯했다. 진원과의 전화 통화를 들은 두 사람도 서울로 향하던 차를 돌려 대동으로 온 것이었다.
급히 다가와 우산을 펼친 진원이 비를 맞고 있는 영웅의 머리 위를 가려주었다.
<괜찮으십니까?>
채언의 등이 오르내리고 있는 것을 확인한 영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늦지 않아 다행이었다.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이자, 진원과 함께 왔던 의사가 무릎을 굽히고 앉아 두 사람의 상태를 살폈다. 뒤이어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비 오는 해변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