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팡이 핀 딸기 4권 (완결)
10.
영웅은 잠든 채언의 얼굴을 바라보며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볼 위에 붙어있는 밴드가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이 현실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과호흡이 온 상태로 눈물을 뚝뚝 흘리던 채언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볼에 난 상처와 팔에서 흐르던 피의 색깔이 선명했다. 영웅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식물원 의무실에서 응급처치를 받고 병원으로 이동하는 동안 덜덜 떨리는 손으로 채언의 손을 잡고 있던 자신의 모습이 바보 같았다. 너무 아프다는 말만 반복하는 채언을 안심시켜줄 수가 없었다. 다친 것은 채언인데 떨고 있던 것은 자신이었다. 상처 난 곳은 하나도 없으면서, 눈감은 채언의 옆에서 같이 안정제를 맞아야 했다.
영웅은 채언의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한숨을 쉬었다. 주사 자국이 남은 자신의 팔이 보기 싫었다.
채언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의사가 채언이 평소 복용하는 약은 없냐고 물었을 때. 진짜 보호자를 찾아야 했을 때.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심채언 씨는 가족분들이 안 계시는데요.>’
할 수 없이 진원에게 채언의 보호자 연락처를 물었을 때, 그가 제 손에 차 키를 건네주며 해준 말이 귓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채언은 자신과 함께 살게 된 이후 오래 집을 비운 적이 없었다. 가족들을 만나러 가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일찍 독립했다는 채언의 말이 생각났다. 술에 취해 울던 채언의 얼굴과, 아무리 졸라도 어떤 사진도 보여주지 않던 모습이 떠올랐다. 정말로 채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으음.”
감겨있던 채언의 눈꺼풀이 떨렸다. 영웅은 가슴을 토닥여주던 손을 멈췄다.
가늘게 뜨인 눈을 끔뻑거리던 채언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까만 눈동자가 양옆으로 조금씩 움직였다. 눈을 감고 있던 내내 좋지 않은 꿈을 꿔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몽롱한 정신으로 방 안을 둘러보던 채언은 온기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리려고 했다. 그런데 다리가 무거웠다. 먼저 돌아간 얼굴이 영웅을 바라보았다. 익숙하고 편안한 침대 안이었다. 옆에는 영웅이 있었다. 그래서 꿈인 줄 알았는데. 무거워진 다리는 낮의 일이 꿈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갑자기 동그래지는 채언의 눈에, 영웅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채언 씨. 괜찮아요.”
“흐윽.”
채언은 상체를 틀어 영웅의 옷자락을 쥐었다.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댄 채 떨리는 숨을 쉬었다.
“괜찮아요. 나예요.”
영웅은 품 안의 채언을 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래도 떨림은 한참 동안 잦아들지 않았다. 의사는 사람이 너무 놀라면 과호흡을 일으킬 수 있다고 했다. 갑작스레 느낀 통증에 놀랐을 것이라고. 의사의 말처럼 채언은 반깁스를 하고 집에 오는 동안 멍하다가, 치료를 마친 팔꿈치나 발을 보고 덜덜 떨었다.
카페에 혼자 들어가는 게 아니었는데, 함께 계단을 올랐다면 다치지 않았을 텐데. 영웅은 깊은 후회를 하며 떨리는 몸을 꽉 안아주었다.
“괜찮아요.”
채언에게는 영웅의 목소리가 잘 와닿지 않았다. 분명 귓가에 속삭여주는 것은 그인데 머릿속에 돌고 있는 목소리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것이었다.
‘혹시 이분 어디 계시는지 모르세요?’
‘경찰에 신고를 한번 해봐야 할 것 같거든요.’
‘여기 신발이….’
‘죽기 전에 벗어둔 것처럼.’
채언은 영웅의 옷자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낮에 있었던 일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공포에 질린 얼굴이 일그러졌다. 떨리는 손안에 짙은 반달 자국이 남았다.
두 사람은 얕은 잠을 자다 깨며 일요일 아침을 맞이했다. 아침이 밝아오는 동안, 채언의 마음은 어둡고 고요해졌다. 건영의 소식을 들었던 것을 꿈이라 여기고 깨어나 보면 어김없이 발이 무거웠다. 족쇄를 찬 것 같았다.
가물가물 눈을 뜰 때마다 갑갑함을 느끼던 채언은 자신이 내뱉은 말이 불러온 현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영웅의 얼굴을 보면서 채언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몽롱했지만, 더는 잠이 오지 않았다. 채언은 한참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영웅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 안이 완전히 밝아지기 직전에 영웅이 눈을 떴다. 피곤이 가득한 눈에 채언의 얼굴이 비쳤다.
“채언….”
잠긴 목소리로 곧바로 자신을 찾아오는 것에, 채언은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갑작스러운 사과에 영웅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뭐가요.”
“걱정시켜드려서요.”
“그게 왜 죄송해요.”
영웅의 눈이 찌푸려졌다. 미안함이 잔뜩 담긴 얼굴이었다.
“저… 이제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어제는 너무 놀라서 그랬나 봐요. 조금, 아팠고.”
영웅은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손에 닿는 채언에게서 떨림이 느껴지지 않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영웅의 넓은 가슴에 이마를 기댄 채언은 초점 없는 눈으로 시간을 죽였다. 다정한 온기가 자신을 감싸고 있었지만, 전과 같은 안정감을 느낄 수 없었다. 숨을 쉴 때마다 영혼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채언은 느리게 숨을 쉬어야 했다.
채언은 일요일의 대부분을 영웅에게 안긴 채 보냈다. 그가 밥까지 먹여주겠다는 것을 겨우 말렸다. 심하게 접질린 발목 때문에 3주 정도 반깁스를 해야 했지만, 뼈가 부러지거나 금이 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영웅은 채언이 혼자 걷는 것을 두고 보지 못했다. 말갛던 볼 위에 덮인 네모난 밴드를 볼 때마다 입꼬리가 처지는 것 또한 어쩌지 못했다.
“핸드폰은 오늘 보내서 고쳐줄게요. 액정이 다 깨졌던데.”
“아니에요.”
채언은 영웅의 다리 사이에 앉아 소파 위에 다리를 뻗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의 손을 만지작거리는 이유는, 소파에 앉아 보이는 시야에 화분 없는 유리창 앞이 너무 잘 보였기 때문이다.
“안 고칠래요.”
“왜에?”
말꼬리를 늘여 묻는 다정한 목소리에, 채언은 영웅의 반질반질한 손톱을 문질렀다.
“어차피, 너무 오래된 거라서요.”
“이참에 새걸로 바꿀까요? 가지고 싶은 모델 있어요?”
채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생각해보고 알려줘요.”
채언은 말없이 몸을 틀어 영웅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핸드폰은 고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고친 핸드폰으로 걸려올 연락이 두려웠다. 그리고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그냥 어떤 것이든 알고 싶지 않았다. 건영은 단순히 소지품을 잃어버린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안 좋은 일이 생긴 것일지도 몰랐다.
채언은 어느 쪽이든 정답을 듣는 것으로부터 도망치기로 했다. 어쨌든 건영을 떠나가게 만든 것은 자신이었다. 상처를 준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충북과도 그랬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태도를 바꾸는 자신 때문에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이런 상황을 만들었던 이유를 그대로 지고 가기로 했다.
죽기로 결심한 뒤,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싶지 않아 멀어졌던 것인데. 혼자 남은 시간이 너무 외로웠다. 삭막하고 괴로운 마음만 품은 채 삶을 끝내는 것이 억울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온기를 찾아 그들 주변으로 다시 다가가고 말았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행복한 상태로. 영영 그 상태로 눈을 감고 싶었던 것뿐인데. 영웅의 방문을 두드린 것 또한 제 잘못이었다.
하지만 채언은 당장 품 안의 이를 놓을 수 없어 괴로웠다. 채언은 영웅의 옷자락을 쥐는 대신 손바닥 안의 살을 눌렀다.
영웅은 채언의 등을 토닥이며 하얀 목에 입을 맞췄다.
“채언 씨.”
“네.”
“우리 여행은 조금 더 나중에 갈래요?”
“…왜요?”
채언은 울컥하는 마음에 영웅의 목을 끌어안았다.
“어디, 가셔야 해요?”
그가 곁에 없으면 단 한순간도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 게 아니라.”
영웅은 채언의 어깨를 잡았다. 얼굴이 보고 싶어, 딱 붙어있는 몸을 조금 밀어 내려 했다. 그러자 채언이 숨을 헉 들이마시는 게 느껴졌다. 과호흡 증세를 보이던 채언의 모습이 떠오른 영웅은 황급히 품 안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런 게 아니에요.”
보드라운 목에 코를 박고 채언의 향기를 들이마셨다. 짙은 눈썹 사이가 패었다.
“아프잖아요. 움직이는 것도 불편하고.”
“저 지금도 걸을 수 있어요.”
“알지만, 다 나으면 가는 거 어때요?”
“진짜로, 잘 걸을 수 있어요.”
채언은 영웅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몸을 들었다. 소파 아래로 발을 뻗는 채언의 모습에 영웅은 당황했다.
“채언…!”
“으윽!”
갑작스레 힘을 준 발에 통증이 올라서 채언은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영웅은 재빨리 비틀거리는 몸을 붙잡아 다시 품에 안았다. 발목을 타고 올라오는 아픔과 무기력함 때문에 채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죄송해요. 사과를 반복하는 채언의 모습은 불안정해 보였다. 마른 입술을 핥은 영웅은 채언의 눈가를 닦아준 뒤 등을 토닥여주었다.
“왜 자꾸 미안해요. 잘못한 게 없는데.”
조용한 거실에는 간간이 채언이 훌쩍이는 소리만 들렸다.
“알겠어요. 우리 여행, 원래 가려던 날에 가요.”
채언은 영웅의 어깨에 기댄 머리를 끄덕이며, 자꾸만 흘러나오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쳤다.
“왜 울어요.”
“잘 모르겠어요.”
“내가 여행을 또 미루자고 해서 그래요?”
채언은 고개를 저었다. 혹시 머리가 어지럽지는 않으냐는 물음에도 고개를 저었다. 그냥 눈물이 나올 뿐이었다.
“병원에 다녀와서 긴장했던 게 이제 풀리나 보네요.”
영웅은 애써 밝은 목소리로 채언을 다독였다. 마주 안고 있었지만, 서로를 보지 못하는 두 사람의 표정은 자꾸만 어두워졌다.
다음 날. 영웅이 출근하고 혼자 집에 남은 채언은 무기력하게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영웅이 베고 자는 베개를 끌어안은 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초점 없는 눈으로 벽지 무늬를 보며 의미 없이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그러다 문득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들면 베개를 꽉 껴안고 얼굴을 묻은 채 떨었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뜬 다음에도 같았다. 침실 안으로 환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지만, 빛을 등지고 누운 채언은 벽지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인터폰 벨 소리가 울렸다. 잔잔한 클래식에 깜짝 놀란 채언은 몸이 굳은 채로 눈만 굴리다가, 아침에 영웅이 한 말을 기억해냈다. 그는 망가진 핸드폰에 전화를 걸 수 없으니, 인터폰과 연결된 집 전화에 전화를 걸겠다고 했었다. 베개를 꽉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푼 채언은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느린 걸음에도 벨 소리는 끊어지지 않았다.
예상대로 인터폰 화면에는 문을 열라는 표시가 아닌, 전화가 왔다는 수화기 모양 아이콘이 떠 있었다. 채언은 손가락을 들어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채언 씨. 나예요. 뭐 하고 있었어요?
“그냥요. 거실에.”
-다리는 괜찮아요?
“괜찮아요.”
-점심은요.
“먹었어요. 바쁘지 않으세요?”
채언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점심은 먹지 않았다. 아침에 영웅의 옆에 앉아 주스 한 잔을 마신 것이 다였다. 하지만 밥을 먹지 않고 지금까지 누워있었다고 하면 그가 걱정할 것이 뻔했다. 오늘 아침. 출근하지 않겠다고 버티던 그를 보낸 것이 자신이었다. 쉴 수 있다면 차라리 여행 가는 날짜를 하루 더 늘려달라고 부탁하자 영웅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었다. 채언은 벽에 손을 기댄 채 영웅과 얼마간 통화를 이어나갔다.
채언이 스피커에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챈 건 통화가 끊기고도 한참 지나서였다.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멍하니 까만 인터폰 화면을 바라보던 채언은 손으로 눈을 비비며 뒤돌아섰다. 다시 침실로 들어갈지, 소파에 앉아 TV를 켤지 간단한 것조차 정하지 못해 고민했다. 거실을 둘러보던 까만 눈에 유리창 앞, 빈 곳이 보였다. 식물원에 가서 화분은커녕 모종이나 씨앗도 사지 못했다. 레모네이드도 마시지 못했고, 공원도 절반밖에 걷지 못했다.
따듯한 햇살이 거실을 환히 비추고 있었지만 채언은 어두운 복도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창문이 없는 복도를 걸었다. 해가 들지 않아 서늘하게 느껴지는 복도 끝방 문 앞에 섰다. 채언은 문고리를 잡고 천천히 돌려 열었다.
익숙했던 공간은 낯설게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빵빵한 마카로니 봉지는 벽에 기대 서 있었고, 책상 위에는 선인장과 사과 팩, 죽은 토마토 줄기가 놓여있었다. 책상 위에 시선이 닿은 채언은 시간이 멈춘 듯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한참 만에 굳어있던 손이 움직였다. 채언은 플라스틱 팩을 뜯어 사과를 한 알 꺼냈다. 입을 벌려 그것을 한입 베어 물었다. 퍼석하고 마른 사과는 맛이 없었다. 계절에 맞지 않아, 고작 세 알밖에 들지 않은 사과 팩은 아주 비쌌을 것이었다. 백화점에서 사 왔을 사과였다.
채언은 맛없는 사과를 쉬지 않고 베어 물었다. 입안에 가득 찬 것을 계속 씹었다.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턱을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진작 먹을걸. 받았을 때 바로. 그 자리에서 먹었다면 아주 맛있었을 텐데. 채언은 멍하니 턱을 움직였다. 입술 사이로 타액 섞인 과즙이 흘러내렸다. 오래되어 식감이 좋지 않은 사과는 입안에서 가루처럼 부서졌다.
자신이 이 집에서 편히 먹고 자는 동안 건영도 이렇게 부서졌을 것이다. 순간, 파도에 휩쓸리는 건영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웁.”
가운데 뻣뻣한 심까지 전부 입안에 넣고 씹어 삼키던 채언은 손등으로 입을 막았다. 죽은 토마토 줄기와 말라버린 사과. 제 곁에 있던 것들은 모두 불행해졌다. 초점 없던 눈에 공포가 서렸다.
“우욱.”
손으로 입을 막은 채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벌벌 떨었다. 속이 불편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가 속을 게워내고 말았다.
“커억, 콜록… 컥, 하아….”
벌어진 턱이 떨렸다. 압박감에 의해 고인 눈물이 볼에 붙인 밴드 위로 흘러내렸다.
영웅은 시동 끈 차 안에 앉아 영원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보통 할 이야기가 있으면 메일을 주고받는 남매 사이였다. 그런 누나가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는 사실에 영웅은 마음이 불편했다. 별다른 안부 없이 용건만 간단히를 실행하는 영원의 화법 때문에 더 그랬다.
<몰라. 난 갈 생각 없어졌어. 계속 한국에 있을 거야.>
<너 벌써 병원에 두 번이나 갔어. 나중에 어떡하려고 그래?>
병원에 갈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진원을 불렀는데, 역시나 모든 소식이 전달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미 예상한 바였지만, 영웅은 가슴이 답답했다.
<점점 나아지고 있어. 부모님한테도 걱정하지 마시라고 전해줘.>
<네가 직접 말씀드려.>
영웅은 한숨을 쉬며 핸들 위에 손을 올렸다.
여름에 한국을 떠나려 했던 것은 이곳에 오기 전부터 계획했던 일이었다. 비가 많이 내릴 때는 몸이 더 예민해지니,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다른 나라에 가서 몇 달을 지낼 예정이었다. 하지만 채언과 함께 지내면서 상태가 많이 안정되었고, 채언만 옆에 있어 준다면 온종일 빗소리를 들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천둥소리 따위, 방에 들어가 헤드폰을 쓰면 막을 수 있었다.
<누나.>
<왜.>
<나 정말 괜찮아.>
<그럼. 미국으로 가.>
<그건… 안 돼.>
영웅은 비어있는 조수석을 돌아보며 말했다. 차에 탈 때마다 곧바로 안전벨트를 매던 채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왜?>
<여기서 살 거니까.>
<누가 살지 말래? 미국에 가서 네가 직접 말씀드리고 와. 부모님께.>
<뭘?>
맹한 물음에 귀찮은 기색이 실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다며, 가서 얼굴 보고 말씀드리고 와.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영원의 말을 들은 영웅의 눈이 깜빡거렸다.
<어, 그렇지. 그 정도는.>
<끊어.>
<출근 준비 중이야?>
손목시계를 들여다본 영웅이 물었다.
<그래. 끊어.>
<응.>
어쩐지 목소리에 귀찮음이 묻어나더라니, 저쪽은 아침이라 더 그랬던 듯했다. 영웅은 차 문을 열고 나오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퇴근길에 차가 밀린 데다, 주차장에서 통화를 하느라 평소보다 집에 도착한 시간이 늦었다. 영웅은 현관문에 걸려있는 가방 안에서 도시락을 꺼낸 뒤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음을 서둘렀다.
신발장 앞에 다다랐지만, 오늘도 마중 나온 사람은 없었다. 도시락을 식탁 위에 내려놓고 침실로 향한 영웅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은은하게 불이 밝혀진 침실 안에는 채언이 잠들어있었다. 영웅은 발소리를 죽이며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채언 씨.”
침대에 걸터앉은 그는 고른 숨소리를 내는 채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만 일어나야죠.”
머리를 쓸어주자 감겨있던 눈이 스르륵 뜨였다. 깜빡거리던 눈동자에 초점이 잡히고, 채언은 얼굴에 닿은 영웅의 손길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오셨어요.”
눈을 비빈 채언은 나른한 몸을 일으켜 앉은 뒤, 졸음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을 영웅의 어깨에 기댔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채언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눈을 떴다.
“자.”
영웅은 한쪽 팔을 내밀었다. 채언은 단단한 그의 팔에 팔짱을 끼며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영웅은 채언의 걸음에 맞춰 느리게 걸었다.
요즘 채언은 잠이 늘었다. 다리가 불편하다 보니, 마트나 수영장에 쉽게 갈 수 없었다.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것이 유일한 외출이었다. 요즘은 음식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은 부엌에도 오래 서 있지 말라며 벌써 며칠째 영웅이 점심, 저녁 도시락 배달을 시켜놓고 있었다. 병원에 다녀와서는 할 일이 없으니, 영웅이 오기 전까지 TV만 조금 보다가 긴 낮잠을 자는 것이 채언의 요즘 일과였다. 퇴근한 영웅이 와서 채언을 깨우면 함께 저녁 도시락을 먹고 조금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잠들었다. 아침에는 침대에서 서로를 배웅했다.
샤워를 하고 나온 영웅은 소파에 앉아있던 채언을 데리고 와 식탁에 앉았다. 채언은 혼자 앉아있던 짧은 시간 동안 잠이 깼는지, 도시락 뚜껑을 척척 열어 각자의 앞에 하나씩 두었다.
“오늘은 뭐 했어요?”
“그냥.”
채언은 젓가락을 들어 밥 위를 쿡 찔렀다.
“치료받고 와서, TV를 좀 봤어요.”
어제와 똑같은 대답이었다. 영웅은 손에 턱을 괴며 눈썹을 올렸다. 채언은 맨밥을 입에 떠 넣고 있었다.
“많이 심심하죠?”
“아뇨. 별로.”
요 몇 달 영웅과 함께 여기저기 다녀보기는 했지만, 혼자 방 안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은 채언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다만 예전에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시간을 죽였다면, 요즘은 혼자 있을 때마다 자신이 식물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채언은 반찬을 입에 넣으며 거실 유리창 앞을 흘끔 쳐다보았다. 죽은 토마토 대신 제가 화분에 심어졌어야 했다. 그럼 건영에게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텐데. 식물은 입이 없으니까.
채언은 의무적으로 턱을 움직였다. 음식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은 덕에 발목이 많이 나아졌대요. 병원에서 이대로면 치료 기간을 늘리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고 했어요.”
“그래요? 다행이네.”
기뻐하는 영웅의 얼굴을 보면서 채언은 입꼬리를 올렸다. 내내 무심해 보이던 얼굴이 미소를 띠자 영웅은 하얀 볼 위를 살폈다. 밴드는 떼어냈지만, 딱지가 앉은 볼에는 보조개가 패지 않았다. 영웅은 입안의 여린 살을 살짝 물었다 놓았다.
“여행은, 가고 싶은 곳은 생각해봤어요?”
그 말에 채언은 고개를 숙였다. 흐트러짐 없이 예쁘게 말린 계란말이를 보다가 반을 쪼개 입에 넣었다. 겹겹이 말려있던 것이 입안에서 부서졌다.
“네.”
느릿한 대답에도 영웅은 재촉하는 기색 없이 다음 말을 이었다.
“어디요?”
“전에 가기로 했던, 포천보다 좀 더 먼 곳인데 괜찮을까요?”
“그럼요. 어디에 가고 싶은데요. 부산? 아니면, 인천?”
“아뇨. 말씀드린 적 없는 곳이요.”
젓가락을 내려놓은 채언이 고개를 들었다. 까만 눈을 보던 영웅은 그곳이 어디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마주친 하얀 얼굴이 꼭 처음 보았을 때와 닮아있어서, 영웅은 채언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덮었다.
“바다에 가고 싶어요.”
채언은 자신의 손을 덮은 따듯하고 커다란 손을 내려다보다가 초록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의 눈 색깔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에메랄드빛 바다 같다고 생각했다.
“대동이라는 곳이, 있거든요.”
뒤이어, 앞으로 저 눈동자와 닮은 색의 바다를 보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채언은 영웅에게 잡혀있던 손을 빼며 젓가락을 쥐었다.
“거기에 가고 싶어요.”
영웅은 뒤늦게 빈손을 움켜쥐었다. 허전한 손안이 이상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손등을 내려다보던 영웅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채언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영웅은 식탁 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거두어 입가를 가렸다.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 있었는지, 채언이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래요. 어딘지는 잘 모르겠지만, 채언 씨가 가고 싶다니까. 나도 좋아요.”
말을 마친 영웅은 애써 미소 지으며 손을 내렸다.
“그러면 또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뭔데요?”
영웅은 샐러드를 집어 먹었다.
“호텔은 제가 예약할게요.”
“호텔도 다 정했어요? 어딘데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제가 돈을 내고 싶어서요.”
“아.”
예상과 다른 대답에 영웅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지난번 여행은 나 때문에 취소했.”
“대표님 때문이 아니라, 제가 다음에 가자고 했잖아요.”
“…음.”
당혹스러운 얼굴로 눈썹을 매만지던 그는 채언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제가 예약할게요.”
머리를 쓸어 올린 영웅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런데 채언 씨. 핸드폰도 망가졌는데 어떻게 알아보려고요?”
“어… 그건.”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채언이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영웅은 호텔비를 자신이 결제하는 쪽으로 유도할 타이밍을 재었다.
“피시방에 다녀올게요.”
“어디요?”
“내일부터 나가서, 컴퓨터로 알아볼게요.”
“그건.”
영웅은 미간을 찌푸렸다. 채언의 행동에 제약을 걸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다친 몸으로 밖을 돌아다닐 채언을 생각하면 걱정이 돼서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급해졌다. 물리치료를 받으러 갈 때도 꼭 택시를 타라고 당부해놓은 터였다.
“채언 씨. 잠깐만요.”
의자에서 일어난 영웅은 부엌을 나섰다. 잠시 후, 돌아온 그의 손에는 노트북이 들려있었다.
“이거 써요.”
노트북을 보던 채언은 고개를 들었다.
“이번 여행은 채언 씨에게 맡길 테니까. 알겠죠?”
“네.”
노트북은 커다란 식탁 한쪽에 놓였다.
“그럼 우리 밥 마저 먹을까요?”
채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반쪽짜리 계란말이를 입에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젓가락을 내려놓는 채언을 보며 영웅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맞은편에 놓인 도시락은 절반도 비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영웅은 채언에게 더 먹으라거나, 이따 밤에 배가 고프지 않겠냐고 묻지 않았다. 이미 몇 번이나 반복했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채언은 요즘 몸을 많이 움직이지 않아서 그런지 배가 잘 고프지 않다고 대답해왔다. 혹시 먹고 싶은 게 있냐고 물어보면 고개를 저었고, 영웅이 직접 요리를 해주어도 많이 먹지 않았다. 토마토와 마늘을 넣은 스파게티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도 배가 안 고파요?”
“배불러요.”
“알겠어요.”
젓가락을 내려놓았지만, 채언은 식탁을 떠나지 않고 영웅이 도시락을 비우는 것을 기다려주었다. 영웅은 밥을 먹는 중간중간 채언에게 말을 걸었다. 맞은편의 대답은 느릿했다.
잠을 많이 자고, 음식은 조금 먹고, 때때로 멍하니 초점이 흐려지는 눈. 영웅이 보기에 요즘 채언은 천천히 정지해 가는 로봇 같았다. 음식을 잘 먹지 않는다는 것을 빼면 겨울잠에 들기 직전의 동물 같기도 했다. 회복단계에 들어선 몸 때문인 것 같았다. 피곤하거나, 아플 때는 잠이 늘어나니까.
다행히 채언의 발목은 나아지는 중이었다. 볼에는 커다란 밴드를 붙이는 대신 연고만 바르고 있었다. 영웅은 요즘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는 채언의 상태를 다친 몸을 회복 중이기 때문인 것이라 여기기로 했다. 미국 병원에서 지낼 때, 영웅도 그랬던 적이 있었다. 그러니 채언도 괜찮아지리라 여겼다.
그토록 기다려왔던 여행을 갈 때쯤엔 채언이 진짜로 웃어주지 않을까 싶었다.
“하아….”
방금 먹은 것을 전부 토한 채언은 욕실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마음이 지옥에 떨어지니, 그야말로 속이 엉망이었다.
함께 저녁을 먹을 때마다 걱정하는 영웅을 생각해 점심때마다 천천히 식사량을 늘려보려 했지만, 어느 정도 배가 찼다 하는 지점에서 조금만 더 먹으면 어김없이 속이 울렁거렸다.
채언은 눈에 고인 눈물을 훔쳐냈다. 변기 물을 내린 뒤 벽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세면대 물을 틀어 입을 헹군 채언은 거울을 바라보았다. 빨개진 눈과 창백한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볼에 앉은 딱지가 거의 사라진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젖은 얼굴에 수건을 문지르며 욕실을 나오는 채언의 귀에 노트북 알림음이 들렸다. 거실로 나온 채언은 테이블 앞에 앉았다. 노트북 화면에 뜬 아이콘을 누르자 영웅의 얼굴이 나타났다.
-씻었어요?
“네. 방금.”
채언은 손에 들고 있던 수건에 얼굴을 반쯤 묻었다. 화면을 통해 보는 얼굴은 실제로 마주 보는 것보다 흐렸지만, 혹시나 자신의 창백한 낯빛을 들킬까 봐서였다.
영웅은 핸드폰으로, 채언은 그의 노트북으로 영상통화를 했다. 영웅은 진작 인터폰 대신 노트북을 사용할 걸 그랬다고 후회 섞인 말을 했는데, 채언은 화면이 켜질 때마다 조마조마했다. 목소리로만 대화할 때보다 얼굴을 보이며 대화할 때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시선 처리에도 신경을 써야 했고, 표정 관리도 해야 했다. 오늘 같은 날 특히 더 그랬다.
채언은 긴장한 상태로 통화를 하다가, 화면 속에서 손을 흔드는 영웅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카펫 위에 몸을 뉘었다. 피곤했다.
한참 무기력하게 누워있던 채언은 고개를 틀어 천장을 보았다. 가물가물 감기려는 눈을 찌푸리는데 깨끗하고 판판한 벽이 순간 일렁였다.
“허억…!”
채언은 팔로 눈앞을 가렸다. 눈을 감은 채 마른침을 삼키다가 한참 만에 팔을 내려 주위를 살폈다. 두려움 서린 눈이 거실을 돌아보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은 여전히 깨끗하고 판판했다.
작게 벌어진 입에서 가느다란 숨이 새어 나왔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채언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순간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상상을 했다. 얼굴을 가리던 손을 내린 채언은 잘게 떨리는 팔을 쓸었다. 팔꿈치에 붙어있는 밴드의 느낌이 뻣뻣한 살가죽 같아서 금방 손을 떼어내야 했다.
소파 다리에 등을 기대앉은 채언은 까만 노트북 화면에 비친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밝아 보이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힘들어, 채언은 손을 움직여 노트북 화면을 켰다. 밝아진 화면에는 더 이상 자신의 모습이 비치지 않았다.
심호흡을 한 채언은 손바닥으로 볼을 두드렸다. 어서 호텔을 결정해야 했다. 그렇게 기다리던 여행 날짜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채언은 인터넷 창을 열었다. 원래는 영웅이 이용하던 사이트가 곧바로 뜨던 것이었지만, 채언이 노트북을 사용하게 된 뒤로는 한국 사이트로 홈 화면이 변경되었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미리 휴가를 떠나려는 사람들이 많아 숙박할 곳이 많지 않았다. 남아있는 곳은 비수기 때보다 가격이 훨씬 올라있었다. 하지만 영웅과 떠나는 여행이니 저렴한 곳만 골라 보고 싶지 않았다. 채언은 미리 추려놓은 후보 중에서도 룸 컨디션이 좋다는 호텔 위주로 후기를 살피기 시작했다. 후기를 찾아보는 것에 푹 빠져 하마터면 물리치료 시간을 놓칠 뻔했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채언은 은행에 들러 통장 두 개의 잔고를 확인했다. 하나는 적금통장, 또 다른 하나는 체크카드의 돈이 빠져나가는 월급통장이었다. 정리가 완료된 통장 두 개를 손에 든 채언은 뻣뻣한 종이를 차례대로 넘겨보았다. 최종 금액이 찍혀있는 곳을 보던 채언의 표정이 고요해졌다.
삼천만 원에는 훨씬 못 미쳤지만, 통장 두 개에 찍힌 숫자를 합쳐보니 아까 알아본 호텔에 한 달을 묵어도 남을 돈이 모여 있었다. 멍하니 숫자를 바라보던 채언은 가방 안에 통장을 챙겨 넣고 은행을 나왔다.
중문을 열고 들어오던 영웅의 눈이 동그래졌다.
“채언 씨.”
“오셨어요.”
이 시간에 잠들지 않은 채언의 얼굴을 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영웅은 서둘러 구두를 벗으며 문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일찍 일어났어요?”
채언은 슬리퍼를 꺼내는 것을 까먹은 그를 대신해 신발장 문을 열었다.
“아, 고마워요.”
허둥지둥 슬리퍼를 꺼내 발을 끼워 넣은 영웅은 다시 채언을 살폈다.
“발목은 괜찮고요?”
“네.”
채언은 도시락 봉지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영웅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반대쪽 손으로 채언의 허리를 감싸 끌어안았다. 퇴근하고 들어오자마자 보는 얼굴이 반가웠다.
“오늘은 낮잠 안 잤어요.”
“그랬어요? 왜?”
“호텔이랑, 이것저것.”
채언은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자꾸만 영웅이 볼에 입을 맞춰오는 바람에 얼굴이 간지러웠기 때문이다. 결국, 말을 잇는 대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영웅은 허리를 숙여 채언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이 웃음소리를 들어본 게 너무나도 오랜만이었다. 채언은 목에 기대온 영웅의 머리를 쓸어주며 복도 끝방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호텔이랑 이것저것 알아보느라 잘 시간이 없었어요?”
이내 고개를 돌린 채언은 손가락 사이를 보드랍게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만지며 대답했다.
“네. 많이 알아봤어요.”
두 사람은 팔짱을 낀 채 복도를 걸었다. 신발장 앞을 비추던 센서등은 금방 꺼졌다.
영웅의 다리 사이에 앉은 채언의 무릎 위에 노트북이 펼쳐져 있었다. 두 사람은 호텔 사진을 보는 중이었다.
“여기는 욕실 창문이 바다 쪽으로 되어있대요. 그래서 욕조에서 바다를 보면서 목욕할 수 있다는데. 맞다, 그리고 여기는.”
찾아놓은 호텔에 관해 열심히 설명하던 채언은 아무런 반응이 없는 영웅을 올려다보았다. 초록색 눈동자와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여기 별로예요?”
“아, 뭐라고 했죠? 미안해요. 못 들었어요.”
“바다 쪽으로 창문이 있는 욕실이요.”
“좋네요. 엄청.”
영웅은 품 안의 몸을 끌어안으며 채언의 어깨에 턱을 올렸다. 오랜만에 말을 많이 하는 채언을 보고 있자니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여행지에 대해 알아보는 것만 해도 이렇게 좋아하는 것을,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난번에 글램핑을 취소하지 말고 끝까지 가자고 밀어붙일 걸 그랬다. 영웅은 채언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다른 호텔 룸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조식이 맛있다는 곳과 수영장이 멋있는 곳, 욕실에서 보이는 풍경이 좋은 곳과 발코니가 딸린 곳 등등. 채언이 찾아온 곳은 전부 깨끗하고 좋았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화면에는 가격표를 잘라낸 사진만 떠 있었지만, 그동안 호텔을 이용해본 경험에 따르면 후보지 전부 어느 정도 가격대가 있는 곳인 게 분명했다. 채언이 돈을 쓰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난번 신발 사건 때처럼 기분을 상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이번 여행은 채언에게 맡기고 다음 여행은 자신이 준비하는 것으로 하자며, 영웅은 카드를 꺼내고 싶은 욕구를 눌러 참았다.
“어디가 좋으세요?”
“음. 다 좋은 것 같은데.”
“그래도 한 곳만요.”
채언은 영웅을 올려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영웅은 신중한 표정으로 노트북 화면을 보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는 채언이 귀여워서 일부러 흐음, 소리를 내기도 했다.
“여기?”
후보지 모두 다 좋았지만, 바닷바람을 맞으며 발코니 문을 여는 채언을 상상했더니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럼, 여기로 예약할게요.”
“알겠어요. 그럼 부탁할게요.”
“네. 여기가 바다에서 5분 거리라.”
딱지가 거의 사라져가는 볼에 입을 맞추려던 영웅의 아랫입술과, 말을 하며 고개를 들던 채언의 윗입술이 스쳤다. 서로의 숨결이 닿았다. 채언은 살짝 눈을 내리깔아 그의 시선을 피하다가 다시 눈을 들었다. 영웅은 까만 눈동자를 보며 마른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살짝 눌렀다. 촉. 가벼운 소리가 났다. 다시 고개를 조금 숙여 도톰한 입술을 물자, 채언의 눈꺼풀이 감겼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가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아.”
채언의 다리가 움찔했다. 동시에 입술이 떨어지고 작은 얼굴이 영웅에게서 멀어졌다.
“노트북 떨어트릴 뻔했어요.”
채언은 전원을 끄지 않은 노트북을 접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허리에 감겨있던 영웅의 팔이 스르륵 풀렸다.
“저녁 먹어야죠.”
채언은 늘어져 있던 영웅의 손을 잡았다. 키스를 거절당한 건가 싶어 살짝 시무룩해졌던 영웅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요즘, 긴 낮잠을 자고 일어난 채언이 눈을 뜨자마자 밥을 먹으면 탈이 날까 봐 일부러 깨워놓고 샤워를 하던 그였다.
“오늘은 밥을 먹고 씻어야겠어요.”
영웅은 넥타이를 끌어 내리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채언은 입안에 든 것을 천천히 여러 번 씹어 삼켰다. 이미 배가 적당히 찼지만 조금 더 먹어보려 노력 중이었다.
영웅은 도시락 절반을 비우고도 젓가락을 내려놓지 않는 채언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장식용 꽃 모양 당근까지 먹어버릴 정도였다. 그는 채언이 입에 든 것을 삼키는 것을 확인하고 질문했다.
“요즘 보는 드라마는 재미있어요?”
“드라마요?”
요즘도 채언은 가끔 낮에 드라마를 틀어놓기는 했다. 하지만 내용은 머릿속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곰곰이 무언가 생각하던 채언은 동그란 고기 완자를 젓가락으로 굴리다가 눈을 들었다.
“대표님. 아까 물리치료 받으러 갔다가 들은 드라마 내용인데요.”
채언은 오래전에 보았던 드라마 내용을 짧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주인공의 뒤통수를 치고 잠적한 악역과 천사병에 걸린 조연 캐릭터의 이야기였다.
“거기서 주인공한테 술을 따라주던 사람이 그러거든요. 어… 뭐라고 그랬냐면… 사정이 있었겠지, 우리 포기하지 말고 같이 찾아보자.”
말을 마친 채언은 영웅에게 물었다.
“대표님이라면 어떻게 하실래요? 꼭, 배신을 했다는 조건이 아니더라도요. 떠난 사람을 찾아보실 거예요? 아니면 마음 편히 잊는 편이 낫겠어요?”
“흐음.”
평소 드라마 내용을 물어보면 줄거리 정도만 설명해주던 채언이었다. 이렇게 역으로 질문해온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영웅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미 떠난 사람이라면, 찾지는 못하겠죠.”
영웅의 말에 채언은 눈을 내려 식탁을 보았다.
“그런데 잊지도 못할 거예요.”
“왜요?”
“쉽게 잊을만한 사람이라면 애초에 이런 고민도 필요 없겠죠.”
젓가락에 눌린 완자를 보던 채언은 다시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잊지 않으면 마음이 아프잖아요.”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그런 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영웅은 여전히 잊지 못한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이제는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흐르지 않았지만, 마음이 아릿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영웅은 장식용 당근을 하나 더 집어 먹었다. 오독오독 소리가 났다. 채언은 이런 걸 물어본 게 아니었을 것이다. 한국 드라마와 어울리는 스토리를 생각해보자면,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관계에 대입해 보아야 했다.
“그리고 나라면, 떠나기 전에 엄청나게 매달려서 못 떠나게 할 거예요.”
“떠나는 사람은, 떠나기 전에 말을 안 할 텐데요.”
“헤어지기 전에는 불안한 느낌이 들 테니까?”
영웅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채언은 한 가지를 더 물어보기로 했다.
“떠난 사람을 미워하실 거예요?”
“미워하진 못할걸요.”
그리워하겠죠. 뒷말을 삼킨 영웅은 당근을 하나 더 씹어 먹었다. 그런 그를 멀뚱히 바라보던 채언은 젓가락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이거 드세요.”
입 앞으로 내밀어진 고기 완자를 내려다본 영웅은 눈을 끔뻑였다.
“당근만 드셨잖아요. 그건 먹는 거 아닌데.”
채언은 젓가락을 조금 더 내밀었다.
“채언 씨가 배불러서 주는 건 아니고요?”
“사실은, 그것도 맞고요.”
영웅은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찌푸리며 입을 벌렸다. 제가 먹여준 것을 우물거리는 그를 보던 채언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식탁 위를 한 손으로 짚은 채, 영웅에게 이쪽으로 조금 더 와보라며 손짓했다. 영웅은 순순히 몸을 앞으로 숙였다. 쪽. 갑작스러운 뽀뽀에 그는 볼에 문 것을 씹지도 못하고 굳었다.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요. 대표님은 드라마 주인공을 좀 닮았어요.”
채언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영웅은 서둘러 입안에 든 것을 씹었다. 겨우 꿀꺽 삼킨 뒤 입을 열었다.
“누구, 누구요?”
“예전에 말씀드린 드라마인데요. 이웃집 바둑이라고.”
“내가 거기 남자주인공이랑 닮았어요?”
영웅은 부끄러운 듯 눈썹을 만졌다.
“…비슷해요.”
채언은 자신의 도시락에 담긴 당근을 하나 집어먹었다. 살짝 단맛이 났다. 비록 장식용으로 담겨있던 것이었지만 꽃 모양 당근은 식감도 나쁘지 않았다. 채언은 조금 전 영웅과 나눈 대화를 생각하며 입안의 단맛을 삼켰다.
그 뒤로 채언은 차차 떠날 준비를 했다. 호텔을 예약하고, 주변 관광지를 알아보고, 여행을 가기 전에 깁스를 풀기 위해 열심히 물리치료를 받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더 이상 남은 사과는 없었다. 퍼석퍼석한 마른 사과에 랩을 씌워두고 매일 조금씩 먹어왔던 것이다. 볼에는 옅은 자국이 남았지만 딱지가 모두 떨어졌고, 팔꿈치에 붙여놓았던 밴드의 크기는 줄어들었다. 먹는 양은 점점 늘어 전과 비슷해졌다.
영웅이 보기에 채언은 나아지고 있었다. 괜찮아 보였다.
채언은 차에 타자마자 안전벨트를 맸다.
“뭐 빠트린 거 없겠죠?”
영웅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흠.”
빤히 바라봐오는 채언의 시선에 영웅은 헛기침을 하며 표정 관리를 했다. 글램핑이 아니라 호텔에 가는 것이었다. 수건이나 세면도구가 모두 마련되어 있었고, 음식 재료도 준비할 필요가 없으니 크게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없었다. 챙길 것이 있다면 여분의 옷이나 지갑 정도였다. 하지만 채언은 떠나기 사흘 전부터 짐을 싸는 데 열을 올렸다. 호텔을 예약하려는 사이 또 방이 나가서 이틀을 지내려던 계획이 하루로 단축되었는데, 큰 캐리어를 가져가려고 하는 것을 영웅이 겨우 말렸다. 채언은 어젯밤에도 가방 안을 한참이나 확인했었다.
“무인도에 가는 건 아니니까. 빠트린 게 있으면 새로 사줄게요.”
“혹시나 해서 확인한 것뿐이에요.”
하늘에는 구름이 많이 끼어있었다. 일기예보에서 비는 내리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혹시 몰랐다. 채언은 고개를 돌려 가방 옆 주머니를 확인했다. 새로 산 접이식 우산이 얌전히 꽂혀있었다. 안심한 채언은 가슴을 가로지르는 안전벨트를 손에 쥐었다.
대동으로 향하는 동안 두 사람은 가끔 손을 잡았다. 중간에는 휴게소에 들러 간식을 한 아름 샀다.
다시 차가 달리는 동안 채언은 품에 안은 호두과자를 영웅의 입에 넣어주었는데, 그가 얌전히 잘 받아먹는 것을 보고 문득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네 개를 연속으로 먹여주자 양쪽 볼이 빵빵해진 채로 자신을 돌아보는 것에, 채언은 오랜만에 보조개가 팰 정도로 웃었다. 영웅이 눈을 가늘게 뜨자 채언은 아랫입술을 물며 웃음을 참았다. 깁스를 푼 발이 까딱까딱 움직였다.
영웅은 운전을 하느라 손이 없어서 웃는 채언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지 못한 것이 아쉬웠고, 채언은 핸드폰이 망가져 영웅의 얼굴을 간직할 수 없는 것이 조금 슬펐다.
차가 달릴수록 채언에게 익숙한 길이 나타났다. 혼자 버스를 타고 대동에 갈 때, 한참 자다 깨면 보이는 구간이었다. 최종 목적지가 달라 완전히 같은 길을 따라간 것은 아니었지만, 멀리 보이는 바다는 채언에게 익숙했다. 겨울에 혼자서 가보았던 곳이었고, 건영의 신발이 발견된 장소이기도 했다. 마음이 아렸지만 채언은 겉으로 티 내지 않고 안전벨트를 만졌다.
가슴을 짓누르는 죄책감을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죗값은 치를 예정이었다.
호텔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가벼운 짐을 스스로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영웅은 카운터에서 안내를 받을 때부터 긴장하기 시작한 채언의 손을 살짝 잡아주었다. 맞잡은 손은 카드키를 찍고 방 안에 들어갈 때까지도 풀리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릴 때, 채언이 영웅의 손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와아.”
발코니 문을 열고 나간 채언은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층이 높아서 아래쪽 야외 수영장과 해변의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하늘은 흐렸지만 채언은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 불만이 없었다. 영웅은 채언을 안고, 어깨 위에 턱을 올렸다.
“저, 호텔 처음 와 봐요. 저번에 밥을 사주시긴 했지만.”
“나도 여긴 처음 와봤어요. 고마워요, 채언 씨.”
이보다 더 좋은 호텔에 많이 와봤을 사람이 고맙다고 말하자 채언은 조금 민망함과 동시에 뿌듯함을 느꼈다. 밖을 내다보던 채언은 등 뒤의 몸에 살짝 기댔다.
바다는 아주 넓었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흐린 하늘과 먼바다의 검푸른 빛이 섞여 하나로 이어진 듯했다. 마치 색이 번진 수채화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파라솔 아래 사람들이 누워 쉬었고, 아이의 손을 잡은 부모나 연인이 모래사장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튜브를 타고 파도 위를 둥둥 떠다니는 사람들도 많았다. 멋있는 풍경에 대한 감탄은 눅눅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가라앉았다.
“정말 바다에 안 들어가도 되겠어요?”
영웅은 채언을 안은 팔을 살짝 조이며 물었다.
“네. 아쉬워도, 잘못해서 여행을 망치는 것보단 나아요.”
마지막 진료를 받던 날, 채언은 의사에게 여행 계획을 말했다. 그랬더니 바다를 조심하라는 소리를 들었다. 깁스를 풀고도 한동안은 발목을 조심해야 하는데,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에 들어갔다가 다시 병원에 오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었다.
“바다에 들어갔다 오실래요? 저는 구경하는 것도 좋은데.”
영웅은 고개를 저었다.
“나가서 좀 걸을까요? 시간이 좀 애매하지만 늦은 점심을 먹어도 괜찮고.”
채언은 몸을 살짝 틀어 영웅의 얼굴에 양손을 얹었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의 볼을 늘렸다.
“아까, 간식을 엄청 많이 드셨잖아요.”
영웅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도 채언이 마음껏 얼굴을 주무르게 놔두었다.
“그거 다, 이 손으로 먹여준 거잖아요.”
“제가요?”
볼을 잡아 늘이던 손을 뗀 채언은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언제 그랬지…? 잘 모르겠는데.”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친 영웅은 아프지 않게 채언의 손가락을 물었다. 그러자 뭐가 좋은지 채언이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소리가 듣기 좋아서 영웅은 팔을 더 조여 그를 안았다. 입가에 닿는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며 미소 지었다.
“졸리지는 않아요? 차 타고 멀리까지 왔는데.”
영웅은 한동안 낮잠을 잤던 채언을 생각하며 말했다.
“저보다는 운전하신 분이 더 피곤할 것 같은데요.”
“난 괜찮은데. 채언 씨도 괜찮으면, 옷 갈아입고 나갈까요?”
“네.”
그런 두 사람은 발코니에 서서 한참을 더 끌어안고 있었다. 바닷바람에 머리카락이 다 헤집어지고 나서야 서로의 허리에 두르고 있던 팔이 풀어졌다.
채언은 가방을 열어 갈아입을 옷을 꺼냈다. 입고 있던 반바지 위에 셔츠만 더 얇은 것으로 바꿔 입을 생각이었다. 언제, 뭘 입을 건지 미리 정해두고 챙겨온 것이었기 때문에 고민은 하지 않았다. 반면에 영웅은 계속 가방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가 옷을 갈아입지 말고 잠깐 기다리라고 했기 때문에 채언은 셔츠를 들고 멀뚱히 서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없어요….”
“뭐가요?”
영웅은 어두운 표정으로 채언을 바라보았다.
“혹시 지갑이나 핸드폰이 사라진 거예요?”
채언의 눈이 동그래졌다. 차에서 내려 다른 곳에 들르지 않고 바로 호텔 방으로 올라왔으니, 뭔가 잃어버렸다면 휴게소에 놓고 왔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차에 타서 지갑이랑 핸드폰 있는 거 확인했었는데. 차에 두고 온 거 아닐까요?”
채언의 말에 영웅은 허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옷이….”
“옷이요? 갈아입을 옷?”
영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의 숨을 내쉰 채언은 들고 있던 셔츠를 내밀었다.
“이거 빌려드릴까요? 조금 작겠지만 그래도.”
“그게 아니라. 채언 씨가 선물해준 셔츠요.”
“제가 선물… 아, 분홍색, 연두색 그거요?”
“몰래 가져와서 같이 입자고 하려고 했는데. 휴… 다른 가방에 넣어놓고, 두고 왔어요.”
집에서 채언이 빠트린 게 없냐고 물어봤을 때, 한 번 더 확인해볼 걸 그랬다며 영웅은 몇 번이나 한숨을 쉬었다. 채언은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같이 입자고 하려고 했다니, 차라리 두고 온 게 나았다. 하지만 티 내지 않고 그를 위로하는 척 등을 두드려줄 뿐이었다.
“…어쩔 수 없네요. 다른 거 입어야지.”
“맞아요. 그 셔츠는 다른 곳에서 입으시면 되죠.”
영웅은 시무룩한 얼굴로 가방 속에서 다른 셔츠를 꺼냈다. 분홍색, 연두색 셔츠와 별 다를 바 없는 화려한 무늬의 셔츠였다.
두 사람은 해변과 도로 사이에 놓인 인도를 걸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시 모래사장도 밟아보았지만 채언은 몇 걸음 가지 못해 뒷걸음질 쳤다. 해변으로 달려 들어오는 어린애들과 몸을 부딪칠 뻔해서도, 발목이 꺾일까 봐서도 아니었다. 파도가 밀려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샌들 안으로 들어온 모래를 느껴본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영웅은 겁먹은 눈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채언의 손을 잡고 인도로 빠져나왔다.
조금 더 걷자 꼬치구이나 음료, 아이스크림 등을 파는 트럭이 즐비한 거리가 나왔다. 다트나 공을 던져 상품을 뽑는 게임 트럭도 중간중간 섞여 있었다. 트럭은 달라도 먹거리의 가격은 비슷했고, 게임 상품도 고만고만했다. 대부분 1등 상품은 커다란 인형, 2등 상품은 작은 인형, 3등 상품은 조개 목걸이, 4등과 5등 상품은 문방구에서 흔히 파는 길쭉한 막대사탕이었다.
“채언 씨. 저 인형 귀엽지 않아요?”
영웅은 트럭에 걸려있는 하늘색 돌고래 인형을 가리키며 말했다. 채언이 보기에는 그저 그랬다.
“네. 귀여워요.”
“내가 뽑아줄게요.”
“저걸요?”
영웅은 요령 없이 다트를 던졌지만, 돈이 많았기 때문에 겨우겨우 상품을 하나 받을 수 있었다. 3등 상품을 따냈는데, 먼지가 잔뜩 앉은 허술한 조개 목걸이를 받고 한참을 멍하니 트럭 앞에 서 있었다. 이런 게임을 해본 적이 없어서 뒤로 빼던 채언은 옆 트럭에서 한 번에 4등 상품을 탔다. 두 사람은 과일 향도 나지 않는 설탕 맛 사탕을 반씩 쪼개 먹으며 사람들 사이를 거닐었다.
빌린 자전거나 킥보드를 타는 사람들이 둘을 스쳐 지나가고, 조개구이와 회를 파는 식당에서 나온 사람들이 호객행위를 했다. 채언과 영웅은 간식을 많이 사 먹은 데다 점심을 먹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어 식당으로 들어오라는 제안을 몇 번 거절했지만, 옷 스타일도 외모도 너무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있어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눈에 자꾸 띄었다. 고민하던 채언은 영웅의 셔츠 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냥 지금 밥 먹을까요? 배고프진 않은데. 이따 호텔에 들어가면 다시 나오기 귀찮아질 것 같아요.”
“그럴까요?”
영웅은 핸드폰 시계를 확인했다. 늦은 점심이라기엔 시간이 많이 흘러있었다. 거의 저녁에 가까웠다.
“밤늦게 배가 고프면 룸서비스를 시키면 되니까.”
채언이 고개를 끄덕이자 영웅은 옆에 늘어선 가게 간판을 살펴보았다. 대부분 비슷한 메뉴를 팔고 있었다.
“뭐 먹을래요?”
채언도 간판을 훑었다. 조개구이는 구울 때 펑펑 튀는 소리가 나서 영웅이 무서워할 것 같았다. 횟집 위주로 식당을 찾아보는데, 두 사람이 식당을 고르는 것을 눈치챈 호객꾼이 격렬히 손짓하며 바로 앞에 있는 가게로 갈 것을 제안했다.
“저기로 갈까요? 다 비슷해 보여요.”
“그래요.”
호객꾼은 해산물의 싱싱함을 자랑하며 두 사람을 식당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순식간에 길거리에서 식당 테이블 앞에 당도한 채언은 어쩐지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꼭 술을 마신 것 같았다.
의자를 당겨 앉던 채언은 눈을 굴려 영웅을 보았다. 손에 닿는 의자는 끈적했고 테이블 위에는 넓은 비닐이 깔려있었다. 조금 더 깨끗한 곳에 갈 걸 그랬나. 살짝 그의 눈치를 살피는데 영웅은 이런 곳에 온 게 처음인지 재미있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뭐 드실래요?”
“어, 사실 뭘 먹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채언 씨 먹고 싶은 메뉴로 골라줄래요?”
“회 좋아하세요?”
채언은 직원이 두고 간 메뉴판을 살폈다. 회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한쪽에 따로 적혀있는 칼국수나 부침개, 탕 종류가 끌렸지만, 영웅은 회를 좋아할지도 몰랐다. 메뉴판을 보던 채언이 눈을 들자 영웅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우럭, 아니면 광어요?”
“그게 뭔지 모르겠어요.”
생각해보니 채언도 강아지나 고양이는 영어로 말할 수 있었지만, 우럭이나 광어의 영어 이름은 알지 못했다.
“음, 보통 그 두 개를 제일 많이 먹거든요. 무난하게 광어로 할게요.”
상은 금방 차려졌다. 반찬으로 튀김이나 익힌 해산물 몇 개가 나왔고, 미역국이나 샐러드 같은 것들도 놓였다. 메인 메뉴로 광어회가 가운데 놓이니 꽤 푸짐했다.
영웅은 간장에, 채언은 초장에 회를 몇 번 찍어 먹었다. 그리고 한참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회는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콘치즈를 떠먹던 채언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테이블 위를 훑어보았다.
“회 안 좋아하시죠.”
젓가락으로 샐러드를 집던 영웅이 손을 멈췄다. 눈을 끔뻑거리던 그는 살짝 벌어진 입속에 샐러드를 집어넣고 씹기 시작했다.
“그렇죠? 안 좋아하시죠?”
“싫어하진 않아요. 잘 못 먹을 뿐이지.”
영웅은 머쓱한 얼굴로 눈을 굴렸다. 숟가락을 내려놓은 채언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왜 이거 시킬 때 안 말리셨어요?”
“채언 씨는 먹고 싶을지도 모르니까요.”
민망해하는 그를 보며 채언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저도 회 별로 안 좋아해요. 물컹해서.”
“그럼 왜.”
의아한 듯 채언을 보던 영웅도 이내 미소를 지었다.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럼 우리, 다른 거로 다시 시킬까요?”
“네.”
두 사람은 다시 메뉴판을 받아 펼쳤다. 진짜로 먹고 싶은 것을 하나씩 골랐다. 몇 점 먹지 않은 회는 대학생들끼리 놀러 온 듯한 옆 테이블에 넘겨주었다. 얼큰하게 취해있던 그들은 고맙다고 몇 번이나 떠들썩하게 감사 인사를 한 뒤 저들끼리 회를 나눠 먹기 시작했다. 해산물이 들어간 칼국수를 앞에 두고 그 모습을 보던 채언은 술이 마시고 싶어졌다.
“대표님. 소주 드실래요?”
“술 마시고 싶어요? 그럼 조금 시킬까요.”
종일 날이 흐렸지만, 해가 질 때는 주변이 온통 붉은빛에 물들었다.
채언은 바닷가에서 이렇게 재미있게 시간을 보낸 적이 처음이었다. 다트를 던져 상품을 따는 게임을 처음 해봤다. 호텔을 잡아놓고 노는 것도, 좋아하는 사람과 여행을 온 것도 전부 처음이었다. 영웅과 처음 해본 것들이 많아서 좋았다.
좋은 만큼, 영웅과 더 해보고 싶은 많은 것들이 떠올랐지만 그건 전부 다 해볼 수 없을 것 같아서 조금 씁쓸해졌다. 작은 잔에 소주를 따른 채언은 맥주를 시킨 영웅과 건배한 뒤 달고 쓴 감정을 목 뒤로 넘겼다.
식당을 나왔을 때는 이미 하늘이 어두워진 뒤였다. 푸우. 숨을 내쉬는 채언은 알딸딸했다. 이제는 전보다 주량이 약해졌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해수욕장 개장 시간이 지나 인도가 북적북적했다. 영웅은 도로 쪽으로 걸으면서, 가끔 술에 취해 뭉쳐 다니는 사람들이 가까워지면 채언의 손목을 잡고 걸음을 멈췄다. 그럴 때마다 채언은 바다 쪽을 내려다보았다.
“아까보다 바다에 사람이 없어요.”
“다들 술 마시러 갔나 보네요.”
“…파도도 까맣고.”
“내려가 볼래요?”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는 채언에게 영웅이 물었다.
“아뇨.”
채언은 고개를 저었다.
“다칠 것 같아요.”
메인 거리를 지나자 모래사장에 보이는 사람들은 더 줄어들었다. 가끔 보이는 이들은 군데군데 가로등이 켜진 곳에만 돗자리를 깔고 앉아있었다. 채언의 머리는 자꾸만 바다 쪽으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영웅은 자리에 멈춰 섰다.
“채언 씨.”
“네?”
까만 바다를 보고 있던 채언이 고개를 돌리자, 영웅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나한테 업힐래요?”
“저 그만큼 안 취했어요.”
“알아요. 그냥 업어주고 싶어서 그래요.”
“갑자기요? 아… 제가 걸음이 너무 느렸죠.”
채언은 허리를 숙여 영웅의 팔을 잡으려 했다. 그때 영웅이 먼저 채언의 손을 잡았다.
“사람이 많아서, 아까 호텔에서 잠깐 안고 있던 게 다잖아요. 취한 척 업히면 아무도 이상하게 안 볼 거예요.”
“으음.”
“어서요.”
영웅은 고민하는 채언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망설이던 채언이 쭈뼛쭈뼛 그의 등에 업히자 영웅은 힘든 기색도 없이 몸을 일으켰다. 불쑥 높아지는 시야에 채언은 영웅을 단단히 붙잡았다. 넓은 가슴에 안기는 것은 익숙했지만, 듬직한 등에 업혀보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지난번 회식 자리에서 필름이 끊겼던 채언은 여전히 그날 영웅에게 업혀보았던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업혀본 기억은 아주 어릴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찾아낼 수 있었다. 따듯한 등에 업혀있는데도 서글퍼진 채언은 영웅의 목 옆에 볼을 기댔다. 천천히 걷는 걸음은 마치 가슴 위를 토닥여주는 손길 같았다.
“그런데 조개 목걸이는요?”
“어? 그러고 보니 없네. 식당에 놓고 왔나 봐요.”
“일부러 두고 오신 거 아니에요?”
“아닌데에.”
영웅이 웃는 소리가 등을 타고 울렸다. 채언은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좋아서 따라 웃었다.
“지금 되게 따듯한데. 하나도 안 더워요.”
“그래요? 잘 됐다.”
호텔을 향해 걷던 영웅은 갑자기 옆으로 몸을 틀었다. 해변 쪽으로 나 있는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디 가세요?”
몸이 덜컹이는 느낌에 채언은 고개를 들었다. 까만 바다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디, 어디에.”
채언은 영웅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아까 사람이 많아서 제대로 모래도 못 밟아 봤잖아요. 업어줄 테니까 이번에는 저 앞까지 같이 가 봐요.”
영웅이 모래를 밟고 걸어갈수록 파도치는 소리가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완전히 어두워진 하늘 때문에 바다는 새까맸다. 파도가 밀려오는 곳 가까이 가고 나서야 모래 위로 물이 올라왔다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채언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영웅에게 비정상적인 심장 박동을 들킬까 봐 그의 등에서 가슴을 떼어내야 했다.
채언은 왜 자신이 이곳에 오고 싶어 했는지를 떠올렸다. 건영이 이 바다 앞에 서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알고 싶었다. 자신을 원망했을까. 화가 많이 나 있었을까. 아니면 모든 걸 체념했을까. 고장 난 핸드폰에는 어떤 연락이 와있을까. 연락이 오기는 했을까. 채언은 물기 어린 눈으로 검은 바다를 바라보다가 둥글게 몸을 말아 영웅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혼자서는 와볼 용기가 나지 않아 영웅과 함께 온 것이었다.
“내려줄까요?”
바다에 발을 담가보겠냐는 물음에 채언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발이 젖으면 모래가 붙을 것 같아요.”
영웅은 소극적인 채언의 태도에 천천히 물에서 멀어졌다. 아까 채언이 계속 바다 쪽을 돌아보길래 물에 들어가 보고 싶어 하는 듯해 데려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자신도 바다에는 그다지 미련이 없었다. 조용한 곳에서 채언에게 할 말이 있었다.
영웅은 넓은 해변을 둘러보았다. 호텔에서도, 메인 거리에서도 적당히 떨어져 있는 곳이라 주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조금 거리가 있는 저쪽 가로등 밑에 몇 사람이 앉아있었지만, 그들이 하는 말이 여기까지 들려오지는 않았다.
“잠깐 앉을까요?”
“네.”
영웅은 천천히 몸을 낮춰 채언을 내려주었다. 모래 위에 깔 것이 없었지만 두 사람은 그냥 털썩 앉았다. 어차피 갈아입을 옷이었다.
불빛이 잘 닿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둘은 서로의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바다를 보는 중이었다. 솨아. 밀려드는 파도 소리를 듣던 영웅은 한참 만에 먼저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어요.”
한쪽 무릎을 세운 채언은 영웅을 돌아보았다. 멀리서 비치는 가로등 불빛 때문에 그의 얼굴이 어둡게 보였다.
“조금 긴장되네요.”
“왜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먼저 말을 꺼내 본 적 없는 일이라.”
채언은 그의 손톱을 문질렀다.
“뭔데요?”
재촉하는 투는 아니었다.
“내가 시끄러운 소리를 싫어하는 이유요.”
영웅의 손을 만지던 채언의 움직임이 멎었다. 솨아아. 파도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저한테 말해주셔도… 괜찮아요?”
“채언 씨니까 말하고 싶어요.”
잘 보이지 않는 영웅의 얼굴을 바라보던 눈이 깜빡거렸다.
“그런데 듣는 사람이 더 부담스러울지도 모를 이유라, 조금….”
그의 말끝에 가벼운 웃음소리가 따라붙었지만, 채언은 영웅의 입에서 가볍지 않은 이야기가 나올 것이란 것을 짐작했다. 그래서 아예 그의 손등을 덮어 잡았다. 영웅은 긴 숨을 쉬었다.
“내 문신 아래에는, 흉터가 있어요.”
입을 뗀 뒤에도 여전히 긴장한 기색이 느껴졌다.
“어떻게 생긴 흉터냐면.”
채언은 미동도 하지 않고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한국에 오기 전에… 친구가 프러포즈를 계획했던 걸, 도우려고 했어요.”
겨울, 스케이트장에 모인 사람들이 많았다며 영웅은 자꾸만 뒷말을 미루었다. 이내 작은 한숨과 함께 마른침을 삼켰다.
“같이 아는 친구들이 많이 모였었는데. 그때, 그러니까. 그날.”
그리 길지 않은 문장을 말하는데도 영웅은 여러 번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놓았다.
“테러를 당했어요.”
예상치 못한 말에 채언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어떤 반응도 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파도치는 소리가 가슴속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범인은, 그날 같이 갔던 친, 구… 중에 한 명이었는데. 아마도 프러포즈를 하려던 다른 친구를 질투했던 모양이에요. 질투라고 가볍게 말하기엔 너무 추악한 감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영웅은 그날 들었던 총소리에 대해 말했다. 허리를 베인 상처와 정신적인 충격 때문에 꽤 오랜 기간 입원을 했었다고. 뉴스와 신문 기사에 실린 자신의 이름을 보고 들을 수 없어 개명까지 해야 했다고 말하는 그가 애써 덤덤한 목소리 톤을 유지하려는 것이 느껴져서, 채언은 영웅이 보지 못하는 다른 손으로 모래를 꽉 쥐었다.
자신 또한 오래된 신문과 방송에 얼굴이 박제되어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잠시 잊었던 기억이 떠올라 채언은 피가 싸하게 식는 것 같았다. 짧은 손톱 사이로 모래가 파고들었다.
“사실은, 지금도 상담을 받고 있어요.”
“…언제요?”
채언의 얼굴에 혼란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영웅은 퇴근 후, 또는 쉬는 날이면 거의 항상 자신과 함께 있었다. 서로 얼굴도 잘 모르고 지내던 때가 있기는 했지만, 관계가 깊어진 지 꽤 되었다.
“가끔 채언 씨에게 퇴근 시간을 거짓말했어요.”
채언은 유동적이던 그의 퇴근 시간을 떠올렸다. 하지만 대부분 고정된 시각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최근에는 더 안정적이었고. 하지만 퇴근 시간 따위는 지금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거짓말을 했다고 자신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채언은 영웅의 손등을 쓸어주었다. 파도 소리는 멈추지 않고 침묵을 파고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채언의 머릿속에 그동안 영웅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토스터기를 바라보고 있던 그, 비 오는 날 아침 서재에서 나오던 그, 귀를 막으며 쓰러지던 그, 독감에 걸린 자신을 지나치게 걱정하던 그와 불안하게 잠에서 깰 때마다 자신을 지켜봐 주던 그의 모습. 그리고 그런 영웅의 불안을 당부하던 영원의 목소리.
채언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영웅은 검은 어둠에 묻히려는 눈동자를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괜찮아요.”
몸을 돌려 앉은 그는 무릎 위에 두었던 손을 들어 채언의 귓가에 가져다 댔다.
“많이 나아졌어요. 채언 씨가 옆에 있어서, 정말로.”
부드럽게 귓바퀴를 쓸어주는 손길이 간지러워 채언은 그쪽으로 볼을 기댔다. 커다란 손이 채언의 볼을 덮었다.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 사이로 몇 번이나 파도가 쳤다.
“나랑 미국에 갈래요?”
“…미국이요?”
“오랫동안 떠나있자는 말은 아니에요. 오늘 여기 여행 온 것처럼 잠깐만. 같이 가는 거 어때요?”
채언은 아무 말 없이 영웅의 손바닥에 기대어 있었다.
“사실 여름이 오면 한국을 떠나려고 했어요.”
검은 눈동자가 금세 반질반질해졌다. 희미하게 주변을 밝히는 불빛에 채언의 눈동자에 서린 물기가 보여 영웅은 애틋한 표정을 지었다.
“채언 씨를 만난 후에 계획을 바꿨지만요.”
나직한 목소리는 신뢰감을 주었지만 채언은 입술에 힘을 주었다.
“입원했던 것 때문에 가족들이 조금 걱정을 했다더라고요. 그래서 괜찮다고 얼굴만 보여주러 잠깐 다녀올 생각이에요.”
“언제요?”
“당장 다음 주라도 난 좋은데.”
영웅은 상처가 났던 채언의 볼을 살살 문질렀다. 주위가 어두운 탓에 옅게 남은 자국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낮에도 흉이 보이지 않게 나아질 것이라 믿었다.
“같이 갈래요?”
영웅은 낮은 목소리로 다시 한번 물었다. 채언이 그토록 기다렸던 말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새 여권에 그와 함께 떠나는 나라의 도장이 찍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먼 미래를 상상하면서. 채언의 입술이 달싹일 때였다.
피융- 펑! 퍼엉!
하늘로 쏘아진 불꽃에 두 사람의 얼굴이 순간 밝아졌다. 크게 뜨인 눈 안의 초록색 눈동자가 불빛 색으로 얼룩져있었다. 조금만 더 빨리 말해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채언은 눈가를 찌푸려 울컥 치솟는 눈물을 참았다. 영웅의 손등을 덮고 있던 손을 들어 그의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폭죽 소리에 놀란 귀를 막아주는 대신 입을 맞추었다.
사실은 구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지긋지긋한 우울감에서 자신을 좀 끄집어내 달라고. 하지만 채언은 말을 하는 대신 조용히 키스를 이어나갔다. 모래 묻은 손이 영웅의 몸을 쓸었다. 문신이 새겨진 위치였다.
채언은 감았던 눈을 떠 먼바다를 바라보았다. 새까만 바다는 하늘과 이어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을 살리고 흉터를 얻은 그와 자신은 달랐다. 영웅의 셔츠 자락을 쥔 채언은 시큰한 발목과 뻣뻣한 살가죽 같던 밴드의 느낌을 떠올렸다. 손에서 모래가 후드득 떨어졌다.
연달아 터지던 폭죽이 불꽃 대신 연기만 남기고 사라졌을 때, 채언은 입술을 떼어냈다. 울적한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 그대로 영웅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다녀오세요.”
자신은 그와 함께 갈 수 없었다. 곰팡이 핀 딸기는 한 개만 상해도 주변에 포자를 퍼트리니까.
“채언 씨.”
“저도 가족들을 보러 가려고요. 너무 오래 못 봬서.”
영웅의 손이 채언의 등을 쓸었다. 채언에게 가족이 없다던 진원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자신이 친구들의 기일에 맞춰 미국에 다녀온 것처럼, 채언 또한 가족들을 보러 가야 하는지도 몰랐다.
“서로 시간을 조정해보는 건 어때요.”
채언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 한 번도 떨어져 본 적 없잖아요.”
마음속에 품은 계획을 바꾸는 것은 쉬웠다.
“제가 옆에 없어도 괜찮으셨으면 해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계획이니, 자신만 눈감는다면 목표를 바꾼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 소리를 들을 때마다 지우개로 머릿속을 지우는 것 같았다. 가을의 영웅과 겨울의 그의 모습을 지워냈다. 멋대로 했던 상상을 끝마치니 마침내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어둠뿐이었다. 그래서 채언은 잠시 이대로 눈을 감고 영웅의 품에 안겨있기로 했다.
모래사장을 빠져나오던 채언은 기어이 비틀거리고 말았다. 발목이 꺾이기 전에 영웅이 단단히 붙잡아주었지만, 놀라서 앗! 소리를 낸 후였다.
인도 위로 올라온 뒤, 영웅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채언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아파요?”
샌들을 신은 발목을 살펴보며 묻는 말에 채언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프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듯 몇 걸음 걸어 보였다. 앉아서 채언을 올려다보던 영웅은 다행이라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를 멀뚱히 바라보던 채언은 영웅의 등 뒤로 걸어갔다. 영웅이 앉은 채로 고개를 돌리자 얼굴이 가까워졌다.
“업어주세요.”
흔치 않은 채언의 어리광에 영웅의 입에서 잔잔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업힌 채로 호텔 방까지 들어온 채언은 욕조 위에 앉혀졌다. 잠시 풀어진 팔은 다시 서로를 안았다. 두 사람은 눈앞에 보이는 셔츠 단추를 대신 풀어주며 입을 맞췄다.
폭신한 베개 대신 영웅의 팔을 베고 누운 채언은 졸린 눈을 겨우 뜨고 있었다. 호텔 침구는 하얗고 깨끗했지만, 집에서 덮는 이불보다 묵직했다. 뻣뻣한 천을 만지자 바스락 소리가 났다.
“피곤하지 않아요?”
“…졸려요. 그런데 이불이.”
살짝 갈라진 목소리에 채언은 민망해졌다. 하지만 좋은 호텔이니 욕실에서 내지른 신음이 다른 방에는 들리지 않았을 거라고 스스로 위안했다.
“이불이?”
“무거워요.”
“이불이 무거워요? 흐음.”
영웅은 팔과 다리를 채언의 몸 위로 올렸다.
“그럼, 이렇게 하면?”
“윽. 더 무거워요.”
채언은 장난스럽게 미간을 찌푸리며 영웅의 가슴을 밀었다.
둘은 이불 위를 뒹굴며 장난을 쳤다. 껴안은 채 웃다가 서로 눈이 마주쳤다. 활짝 벌어졌던 입이 점차 다물렸다. 웃음소리가 잦아들고 가쁜 숨소리만 남았다. 영웅은 다정한 눈으로 채언을 바라보았다.
“정말, 같이 가지 않을래요?”
채언은 영웅의 목 뒤로 팔을 둘렀다. 고개를 젓자 커다란 손이 머리를 덮어왔다.
“대표님.”
조용한 부름에 영웅은 품 안의 연인을 내려다보았다. 채언은 한쪽 손을 풀어 그의 볼과 귓가를 쓸었다. 천천히 얼굴을 살피다 입을 열었다.
“진짜 이름은 뭐예요?”
영웅은 고개를 숙여 하얀 목에 입을 맞춘 뒤 속삭였다.
“라이언.”
다음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하늘이 맑았다. 올 때와 달리, 가는 차 안에는 양떼목장에서 사 온 양 인형 두 개가 놓여있었는데, 조수석에 앉은 채언은 가끔 손에 쥐고 있던 안전벨트를 놓고 인형을 쓰다듬었다.
양에게 건초를 줄 때 보슬비가 내리기는 했지만, 가방에 꽂아둔 우산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잠깐 내리다 그쳤다. 실제로 본 양은 인형보다 조금 무섭게 생겼었다. 복슬복슬한 인형 털을 만지던 채언은 영웅과 함께 있는 차 안이 참 편안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뒤에는 부모님과 함께 탔던 차가 뒤집어지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그날도 이렇게 평화롭게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던 길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고 덧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너무 깊이 빠져들지는 않았다. 갑작스레 벌어진 사고가 아니었으니, 어딜 가는 길이었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든 이제 와서 상상해볼 필요는 없었다.
채언은 노을에 물든 영웅의 얼굴을 돌아보며 금방 지는 미소를 지었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건영에게 받은 돈을 확인해보았다. 원래 있던 통장 두 개에 들어있던 것과 합쳐보니 삼천만 원이 훌쩍 넘었다.
채언은 거실 창밖으로 하늘을 보는 중이었다. 요즘 일기예보가 정확하지 않아 걱정이었다. 비가 온다고 한 날에는 내내 흐리기만 했고, 흐리기만 할 거라던 날에는 비가 내렸다. 오늘도 저녁부터 비가 내린다고 했는데 구름만 잔뜩 끼어있었다.
채언은 손바닥으로 유리문을 밀어낸 뒤 발걸음을 뗐다. 토마토가 죽은 후로 새로운 화분을 들이지 않았다. 끝방에 두었던 선인장을 거실에 꺼내두었을 뿐이었다. 다시 방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지는 않았다.
‘올해 여름 가장 기대되는 영화 1위! 어둠의 권력에 맞선 가장 위험한 전투. 베리 메이즈 감독의 액션 블록버스터 시리즈. 그 첫 번째! 검푸른 저주, 인.’
틀어놓은 TV에서 영화 예고편이 흘러나왔다. 채언은 리모컨 버튼을 눌러 TV를 끈 뒤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손에는 수영가방을 든 채였다.
넓은 수영장 안에는 사람이 몇 없었다. 여기는 왜 언제나 텅텅 비어있을까. 헬스장 쪽은 사람이 좀 있던데. 채언은 가끔 첨벙거리는 소리가 울리는 내부를 둘러보며 생각하다가 물속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물에 들어와 기분이 좋았다. 한동안 수영을 하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몸이 물에 잘 떴다. 지난 여행 때 묵은 호텔에도 수영장은 있었지만, 돌아오기 전날 밤, 늦게까지 영웅과 뒹굴었던 터라 일찍 일어나 수영장에 갈 수가 없었다. 몸 여기저기 흔적이 남았던 것도 이유였다. 정확히 그와 몇 번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새벽에 배가 고파 잠에서 깨어났었다. 발코니 테이블에 앉아 룸서비스를 시켜 먹은 기억을 떠올리며, 채언은 몸을 뒤집었다.
가라앉으려는 생각이었는데 힘을 빼고 있자니 몸이 물에 둥둥 떴다. 얼떨결에 배영을 하게 되자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조금만 몸을 비틀면 중심이 무너질 것 같아서 채언은 그냥 가만히 그 상태로 물 위를 떠다녔다. 아마 외부 수영 강습장이었다면 레인 하나를 차지하고 떠 있는 것을 봐주지 않았을 것이었다.
어쩌다 이런 고급 피트니스 센터에 들어오게 된 건지…. 채언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영웅과 만나게 된 것은 배영에 성공한 것처럼 얼떨결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입주 도우미 일에 지원하고, 특이한 조건에 맞아 곧바로 채용되었다. 둔한 줄 알았는데 세상 예민했던 집주인과도 얼떨결에 계약을 연장하게 되었고.
현관 앞에서 처음 영웅을 마주친 날을 떠올리자 무표정하던 채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잔뜩 굳어있던 그를 오해했었다. 딱딱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같이 밥을 먹고 싶다고, 이름을 불러달라고, 선물을 받아달라고 다정하게 부탁하는 그는 딱딱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옅은 색깔의 머리카락이 좋았다. 머리를 기댈 수 있는 넓은 어깨와 낮은 목소리도. 웃을 때면 시원하게 올라가는 입꼬리와 커다란 손도. 전부 좋았다. 그러니까 더더욱 그의 곁을 욕심내서는 안 됐다.
죽음에 트라우마가 있는 영웅의 옆에 시시때때로 죽을 생각을 하는 제가 붙어 있으면,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 나쁜 영향을 줄 게 뻔했다. 그러니까 조용히, 물이 증발하듯 아주 조용히, 그의 곁에서 사라져주는 게 나았다.
순간, 물안경 속 채언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갑작스레 몸을 덮쳐오는 두려움에 허억, 숨을 들이마셨다. 심장이 조여와 팔을 움츠리자 중심이 무너졌다. 떨리는 손을 벽 위에 올리자 타일 위 작은 웅덩이에 파문이 일었다.
채언은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몇 번이나 이런 두려움이 자신을 찾아올 것이었다. 그러면 영웅은 매번 걱정을 할 테고. 불꽃에 얼룩진 그의 눈이 떠올랐다.
이제는 완벽히 결정을 내렸다. 되돌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숨을, 하압, 참고 다시 물속으로 손을 뻗었다.
홀로 수영을 마치고 돌아온 채언이 거실로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있던 영웅이 웃으며 반겨주었다. TV에는 스포츠 프로그램이 틀어져 있었다.
“왔어요?”
“비 내리기 전에 오셨네요.”
영웅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영 잘했어요?”
“네.”
“이제는 레인 끝까지 갈 수 있어요?”
이번에는 채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끝까지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충분히 숨을 참을 수 있었음에도 수영을 하던 중간에 몸을 멈췄었다.
채언은 소파 앞으로 걸어가 영웅의 옆에 털썩 앉았다. 큰 손이 검은 머리카락을 쓸었다.
“머리 젖었네요.”
“다 말리기 귀찮아서요.”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요.”
그 말에 채언은 작게 웃었다.
“이젠 더워서 감기 안 걸려요. 그리고 대표님은 매일 머리 안 말린 채로 돌아다니잖아요.”
채언의 말을 들은 영웅은 딴청을 피우듯 어깨를 으쓱했다. 드라이기 소리를 싫어하는 영웅은 매번 수건으로 머리를 말렸다. 열심히 수건을 문지른 날에는 머리카락이 금방 보송해졌지만, 가끔은 물이 뚝뚝 흐르는 상태로 집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소파 위에 두 발을 올린 채언은 무릎을 껴안았다.
“상담은 잘 받으셨어요?”
“네에. 잘 받고 왔어요.”
영웅은 무릎에 팔을 두른 채언의 손을 풀어 자신의 손에 쥐고 깍지를 꼈다.
“미국 가는 날짜는 정하셨고요?”
영웅은 깍지 낀 손을 들어 채언의 손등에 가볍게 뽀뽀를 했다.
“응. 정했어요.”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는 벌써 장맛비가 내리는 중이었다. 채언은 함께 가는 여행 날짜를 미뤘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행 후 곧바로 장맛비가 내려 그가 비행기를 타지 않기를 바랐었다. 하늘길이 막혔으면 해서 미룬 여행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곧 미국에 가야 하는 영웅이 궂은 날씨에 비행기에 탑승했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한동안 영웅은 미국에 가는 날짜를 정하지 못했다. 계속 미루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얼른 정해야 하지 않겠냐고 종종 물었었는데, 막상 날짜를 정했다는 말을 들으니 얼굴이 뻣뻣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언제요?”
“다음 주 금요일에. 될 수 있으면 일요일이 지나기 전에 돌아올게요.”
“평일인데요. 저녁에 출발하실 거예요?”
“우리 이번 여행을 짧게 다녀왔잖아요. 남은 휴가를 좀 썼어요. 다녀와서 월요일까지 쉬려고요. 우리 그때 또 어디 갈까요?”
채언은 영웅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또 너무 빠듯하게 물었나?”
영웅은 맞잡은 손을 살짝 흔들었다.
“채언 씨는 가족분들 뵈러 언제 다녀올 거예요?”
“…저도, 그쯤에 가려고요.”
덜 마른 채언의 머리카락 때문에 영웅의 한쪽 어깨가 축축해졌다. 옷이 젖는 것을 신경 쓰지 않는 걸까. 채언은 영웅의 손등을 엄지로 쓸었다.
저녁을 먹을 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영웅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채언은 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천둥이 칠 때 귀를 막아주려고 했는데, 하필 채언이 물컵을 들었을 때, 쿠르릉, 하늘이 울렸다. 서둘러 영웅을 돌아본 채언은 물기 묻은 손을 들다가, 손가락을 접어 내려놓았다. 긴장한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깨문 영웅은 잠시 그대로 멈춰 있었다. 하지만 고통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이내 하아. 숨을 내쉬고는 채언을 돌아보며 웃었다.
“봤죠? 휴우….”
채언은 그의 귀를 막아주지 못하고 내린 손에 주먹을 쥐었다.
“괜찮으세요?”
“그럭저럭요. 심장은 조금 뛰지만.”
영웅은 가슴 위에 손바닥을 올려 꾹 눌렀다.
“이건 채언 씨가 옆에 있을 때도 그러니까.”
귀여운 장난을 치는 그의 모습에 채언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가끔 번개가 쳤다. 번개가 친 후 천둥이 치기까지 짧은 텀이 있었다. 누군가의 손은 자꾸만 움찔거렸고, 누군가는 혼자서 버틸 준비를 했다. 콰앙. 천둥이 쳐도 영웅의 귓가에 채언의 손이 닿는 일은 없었다.
영웅이 미국으로 떠나기 이틀 전.
마지막으로 장을 보기 위해 나온 채언은 백화점 2층에서 ATM을 확인했다. 비행기를 예매했어도 돈은 넉넉하게 남아있었다. 영웅과의 추억이 돈으로 남은 것 같아 조금 씁쓸했다.
그까짓 추가수당 따위 받지 않고 처음부터 그와 밥을 먹었다면 계획을 실행할 돈이 모자라지 않았을까, 숙식을 제공받는 대신 월급이 적었다면 어땠을까.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생각을 했다.
채언은 영웅과 손을 잡고 타던 엘리베이터에 혼자 몸을 실었다.
마트에 들어온 채언은 카트를 끌고 돌아다니며 메모지에 적어둔 장 볼 거리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채소 칸 앞에서 빨간 파프리카를 살까, 노란 파프리카를 살까 고민하며 몇 개를 들어보는 중에 옆에 있는 브로콜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브로콜리만 보면 영웅이 생각났다. 채언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노란 파프리카 한 개를 카트에 집어넣었다.
냉장고를 많이 채워놓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이틀 후, 영웅이 떠나면 집에 남아 음식을 먹을 사람이 없었다. 그는 금방 돌아올 것이라고 했지만, 해산물이나 금방 숨이 죽는 채소는 사두지 않기로 했다. 카트 안에 들어 있는 재료는 대부분 오늘 아니면 내일 해 먹을 것들이었다. 채언은 통조림 매대와 소스 매대 사이를 걸었다. 혼자 살 때 많이 먹었던 참치 캔과 햄은 고급 아파트에 들어와 살게 된 이후로 먹지 않았다. 자극적인 것보다는 순한 맛의 음식을 먹었다. 그동안 분수에 맞지 않게 호강을 누리고 있었구나 생각하며 지나가려는데 채언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옥수수가 든 통조림이었다. 글램핑을 가려고 급히 준비하던 날 옥수수 통조림과 유리병에 든 소시지를 샀었다. 그리고 마시멜로. 입에 달콤한 마시멜로를 물고 그와 키스하던 때가 채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처음으로 영웅과 다투었던 날이 떠올랐다. 다투었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서운해했던 것에 가까웠다.
‘나중에, 채언 씨도 나한테 선물해줘요.’
‘서로 새 신발 신고 멀리 가자고요.’
채언은 자신이 신고 있던 연분홍색 신발을 내려다보다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서둘러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온 채언은 짐을 정리한 뒤 신발장 문을 열었다. 영웅의 신발 사이즈를 하나씩 확인해보았다. 메모지에 브랜드명과 사이즈를 옮겨 적은 뒤, 다시 백화점으로 향했다.
하늘은 내내 흐렸다. 여린 비가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습하고 꿉꿉한 날이었다.
퇴근 후. 샤워를 마친 영웅은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 않고 거실로 나왔다가 채언에게 붙잡혔다. 수건을 가지고 와 그의 머리를 말려주려던 채언은 손을 들다 멈칫했다.
“손 줘보세요.”
그리고 영웅의 손에 마른 수건을 쥐여 주었다.
“머리 안 말려 주.”
“저거 끓어요.”
머리를 숙이고 있던 영웅은 삐뚜름히 기울어진 자세로, 부엌에 들어가는 채언의 뒷모습을 봐야 했다.
영웅은 머리를 조금 더 말린 뒤 세탁 바구니에 젖은 수건을 넣어놓고 왔다. 식탁 위에 푸짐한 저녁 식사가 차려진 뒤였다.
“그런데 채언 씨.”
“네.”
“옷 정리했어요? 내 것 말고. 채언 씨 옷이요.”
채언은 식탁 의자를 빼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절에 안 맞는 건 정리해놨어요.”
“그렇구나. 옷이 좀 없어진 것 같아서 물어봤어요.”
요 며칠 영웅은 드레스룸을 열 때마다 허전함을 느꼈다. 쌀쌀할 때 채언이 자주 입었던 후드나 맨투맨 같은 것이 보이지 않아 그런 것이었다.
“캐리어는요?”
“원래 쓰던 방에 가져다 놨어요. 자리를 많이 차지하니까.”
“아하.”
고개를 끄덕인 영웅은 젓가락을 들었다.
“그런데 오늘 음식이 되게 많네요.”
식탁 위에는 그동안 영웅이 잘 먹었던 반찬들이 잔뜩 차려져 있었다. 금방 먹을 양만 새로 한 것이었다.
“내일은 좀 가볍게 드시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오늘 많이 드시라고요.”
금요일 아침 비행기를 타는 영웅을 배려한 것이었다. 이른 시각에 공항으로 출발할 사람이니 전날은 가볍게 먹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채언은 자꾸만 반찬 접시를 영웅 쪽으로 밀어주었다.
“어어. 이러다 식탁이 한쪽으로 기울겠어요.”
영웅은 자기 쪽으로 와있던 불고기를 중간에 옮겨 놓은 뒤 눈을 들었다.
“혹시, 채언 씨.”
초록색 눈동자가 자신을 살피는 것이 느껴져 채언은 긴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손톱만큼 나물을 집어 입에 넣고 앞니로 오물거렸다.
“또 밥 먹는 게 좀 그래요? 못 먹을 것 같아요?”
걱정 담긴 물음에 채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다음, 보란 듯이 불고기를 가득 집어 먹었다. 영웅은 그래도 걱정이 되는지 반찬 한입 먹고 채언의 얼굴 한 번 보기를 반복했다. 걱정스러운 얼굴은 채언이 밥그릇 절반을 비우고도 숟가락을 놓지 않자 풀어졌다.
접시를 많이 사용해 설거짓거리가 잔뜩 나왔지만, 채언은 식기세척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영웅과 싱크대 앞에 나란히 서서 함께 설거지를 했다. 한 쌍밖에 없는 고무장갑은 서로가 서로에게 미뤄주다가 끼지 않기로 하고 내버려둔 상태였다.
그릇 물기를 털던 채언은 문득 예전 생각이 나서 피식 웃었다.
“왜 웃어요?”
거품 씻어낸 그릇을 채언에게 넘겨주려던 영웅은 허리를 굽히며 물었다.
“그때 기억나세요?”
“언제요?”
“여기서, 손가락으로 제 얼굴을 찌르셨는데.”
채언이 손가락으로 매끄러운 그릇을 문지르자 뽀드득 소리가 났다.
“그릇 만져보라고 했더니 갑자기 제 볼을, 이렇게.”
물기 묻은 손가락이 영웅의 볼을 콕 찔렀다. 채언은 웃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 기억 안 나세요?”
미간을 찌푸린 채 굳어있는 영웅의 모습에 채언은 소심하게 손가락을 접었다.
“…기억 안 날 리가 있겠어요.”
영웅의 얼굴이 천천히 붉게 달아올랐다. 눈썹 사이를 모으고 있던 그는 별안간 채언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덜그럭. 그릇이 싱크대 안에 떨어지고 물 묻은 손이 채언의 허리를 안았다. 얇은 티셔츠가 젖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언제부터 여길 노렸는데.”
쪽. 영웅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보조개 자리에 뽀뽀를 했다. 반사적으로 감겼던 채언의 한쪽 눈이 천천히 뜨였다. 가려져 있던 까만 눈동자가 원형을 되찾는 모습에 영웅은 다시 한번 채언의 볼에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두 눈이 감겼다 뜨였다. 세 번째 뽀뽀는 입술에 내려앉았다. 눈꺼풀이 감기며 검은 눈동자가 완전히 가려졌다.
영웅에게 허리를 붙잡힌 채언의 몸은 뒤로 밀리며 둥글게 휘었다. 시원한 물에 닿아있던 축축한 손이 채언의 상의 안쪽을 파고들었다. 영웅은 낮은 온도에 흠칫 놀란 몸을 부드럽게 안아 들어 올렸다. 채언은 이제 그에게 번쩍 들리는 것이 익숙했다. 두툼하게 근육 잡힌 몸에 자연스럽게 다리를 감았다.
침실로 들어가는 동안 두 사람의 입술은 자주 맞붙었다. 잠시 떨어질 때면 뜨거운 숨을 내쉬며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침대 위에 눕혀진 채언은 가슴을 만져오는 손길에 몸을 움찔 떨었다. 반쯤 눈을 뜨고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발가락을 움츠렸다.
“아…! 아?”
발가락에 닿는 이불의 감촉에 뭔가 생각나려 했다. 채언은 배 위에 입을 맞춰오는 영웅 때문에 숨을 흡 들이마셨다.
“잠시만, 요.”
애무를 받을 때 채언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입고 있던 티셔츠를 순식간에 벗어 던진 영웅은 다시 하얀 몸 위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아니, 하… 잠, 깐만요.”
간지러움에 몸을 비틀던 채언이 상체를 일으켰다. 옷을 벗느라 머리가 흐트러진 영웅이 젖은 입술 사이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마찬가지로 채언의 가슴이 오르내렸다.
“드릴 게 있어요.”
눈앞의 젖은 입술에 쪽 입을 맞춘 채언은 침대 아래로 내려가 침실을 나가버렸다.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영웅은 채언을 따라가려다 털썩 침대에 걸터앉았다.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려 머리를 쓸어 올리는데 직육면체 모양의 상자를 든 채언이 문 안으로 들어왔다.
“그게 뭐예요?”
“선물이요.”
“선물?”
채언은 영웅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천천히 상자 뚜껑을 여는 모습은 마치 프러포즈라도 하는 듯했다.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은 검은 운동화였다. 예상치 못한 선물에 영웅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채언은 신발 한쪽을 꺼내 영웅에게 내밀었다.
“디자인 어떠세요?”
채언은 긴장 서린 목소리로 물었다.
“흐음.”
영웅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운동화를 보다가, 불현듯 채언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엄청 예쁜데요.”
손을 내밀어 운동화를 가져오려는데 채언이 손을 물렸다. 영웅이 의문 담긴 눈으로 쳐다보자 채언은 몸을 숙여 신발 끈을 풀었다. 안에 들어있던 종이 뭉치를 꺼낸 뒤 조심스레 영웅의 발을 잡고 운동화를 신겨주었다.
“사이즈는 제일 잘 맞아 보이는 거로 골라왔는데, 한번 직접 신어보세요. 안 맞으면 내일 바꾸러 가야 해요.”
채언은 오늘 종일 바빴다. 장을 보고 서둘러 집에 와서 신발장 안에 있는 영웅의 거의 모든 신발 사이즈와 브랜드명을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백화점으로 가 영웅에게 선물로 줄 운동화를 골랐다. 직원에게 집에서 메모해온 것을 보여주며 같이 사이즈를 고민해야 했다. 선물을 산 뒤에는 다시 뛰어서 집에 돌아왔다. 그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저녁을 차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쁘게 뛰어다녔음에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 그는 저녁을 맛있게 먹었고, 운동화는.
“딱 맞네요.”
영웅에게 아주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채언은 기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한쪽도 마저 신어볼게요.”
영웅은 다른 발을 운동화에 집어넣었다. 양쪽 모두 그에게 딱 맞았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고마워요. 채언 씨.”
영웅은 채언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린 뒤, 허리를 숙여 그의 볼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가벼운 키스 후 영웅이 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선물을 해줬어요?”
채언은 그를 올려다보며 미소지었다.
‘다른 곳에서 다시 만나면 되니까.’
“멀리 가시니까요. 발이 편했으면 했어요.”
머릿속에 떠오른 그의 목소리를 생각하며 다른 말을 했다. 채언의 말에 영웅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대표님. 산책하러 가실래요?”
“지금요?”
“네. 걸어봐야 진짜로 잘 맞는지 알 수 있잖아요.”
“어… 그건 조금.”
망설이는듯한 영웅의 목소리에 채언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왜요?… 불편하세요?”
“그게, 발이 불편한 건 아니고. 다른 곳이.”
말끝을 얼버무린 그는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다가 자신의 다리 사이를 내려다보았다. 채언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아.”
채언의 입에서 짧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고 보니 선물을 가지러 가기 전까지 그와 입을 맞추고 있었다. 분위기를 다 깨버린 것은 자신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채언은 무릎걸음으로 걸어 영웅의 다리 사이로 들어갔다. 양쪽 허벅지 위에 손을 올린 뒤 고개를 들었다. 은근한 손짓으로 허벅지 위를 문지르자 순식간에 침실 안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럼, 산책은 내일 해요.”
영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뻗어 채언의 몸을 들어 올리려 했다. 하지만 채언은 자신의 겨드랑이 안쪽으로 들어오려는 그의 손을 잡아 눌렀다.
영웅을 향해있던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발기한 성기 옆에 얼굴을 가져다 댄 채언은 천천히 입을 벌렸다. 영웅이 입은 바지는 이로 물어내리기 쉬운 잠옷이었다.
“채언….”
제 이름을 부르며 말리려는 영웅의 손을 다시 힘주어 잡은 채언은 이로 문 것을 천천히 끌어내렸다. 한쪽 손에 힘을 풀어 드러난 속옷 밴드를 잡은 다음 그것마저 아래로 잡아당기자, 반쯤 발기해 있던 것이 채언의 볼을 치며 퉁, 튀어나왔다. 볼에 뽀뽀를 당했을 때처럼 한쪽 눈을 감았다 뜬 채언은 망설임 없이 입을 벌려 눈앞의 것을 물었다.
그 상태로 고개를 더 숙이자 턱이 벌어지며 매끈한 혓바닥에 뜨끈한 살덩이가 문질러졌다. 끝부분만 입에 넣었는데 입안이 꽉 차는 느낌이었다.
“하아….”
불편하게 혀를 꿈틀거리자 위에서 한숨처럼 뱉어지는 숨소리가 들렸다. 채언은 영웅의 것을 입에서 빼지 않은 채 기둥 아랫부분을 손으로 잡고 고개를 젖혔다. 눈가를 찌푸린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영웅과 마주쳤다. 채언은 초록색 눈동자를 보며 입을 더 크게 벌렸다. 입에 물고 있던 것이 크기를 더 키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채언은 침이 흐를 것 같았지만 입이 벌어져 삼킬 수가 없었다. 축축한 입안에 뜨거운 기둥이 조금 더 깊게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목구멍을 꼴깍이자 둥근 선단이 자극되었다.
아랫배를 타고 올라오는 감각에 영웅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눈썹 사이를 좁혔다. 커다란 손이 검은 머리카락을 쓸었다. 보드라운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든 손가락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다가 자그마한 귀에 걸렸다.
채언은 눈을 감고 고개를 더 숙였다. 귀가 만져지는 것뿐인데 그의 흥분이 전달되는 것 같았다. 서툴게 그의 것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전에 영웅이 해준 것처럼 사탕을 빨듯 입술을 오므려, 색이 붉은 귀두를 쭈웁, 소리 나게 빨았다. 곧바로 입을 벌려 다시 기둥 윗부분까지 입안에 집어넣은 뒤 머리를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기둥 아래를 쥔 손을 움직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위에서 흘러내린 타액이 채언의 손을 적셨다.
채언은 아주 커다란 사탕을 문 듯 볼이 불룩해진 채로 입가를 우물거리면서 간혹 영웅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나 온화한 표정의 그가 눈가를 잔뜩 찌푸린 채 입술을 물고 있는 것을 보니 등줄기에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그를 더 기분 좋게 해주고 싶었다.
작은 입안에 다 들어오지 못한 살 기둥은 뿌리까지 젖어 번들거렸다. 채언의 머리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보다, 손의 움직임이 빨랐다. 추웁, 춥. 타악, 탁, 탁. 질척이는 소리가 엇박자로 들리는 동안 둥글게 말아쥔 채언의 손 틈 사이는 더 벌어졌다. 입술도 마찬가지였다. 완전히 발기한 성기는 아까보다 입안에 들이기 버거웠다.
“…읏… 큭.”
채언은 눈가를 찌푸렸다. 머리를 깊게 숙일수록 목구멍 근처가 자극을 받아,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이 느껴졌다. 삼키지 못할 침을 삼키려고 반사적으로 목을 조일 때였다.
“우웁…!”
“하아….”
영웅의 허벅지 위에 올려두었던 팔꿈치가 미끄러지며 채언의 자세가 흔들렸다. 본의 아니게 목 안쪽까지 성기가 삽입되었다. 눈을 크게 뜬 채언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려 했다.
“…우욱, 응…!”
하지만 머리를 누르는 손 때문에 머리를 들 수가 없었다. 아까보다 흥분한 게 분명한 숨소리가 채언의 귓가에 닿았다. 영웅은 조금 전의 실수를 적극적인 태도로 오해한 듯했다. 그의 손가락은 채언의 머리카락을 거의 쥐어 잡고 있었다.
채언은 눈가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어쩌지 못하고 영웅의 허벅지 위에 다시 손을 얹었다. 다른 손으로는 그의 음낭과 기둥 아래를 애무하며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목구멍 사이를 빠져나오는 두툼한 살 기둥의 느낌이 선명했다. 채언의 손가락이 절로 곱아들며 돌처럼 단단해진 굵은 허벅지를 긁었다.
질척한 소리와 함께 오므린 입술 안에서 성기가 완전히 빠져나왔다.
“콜록, 콜록.”
참으려고 했는데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기침에 채언은 고개를 돌려 손등으로 얼굴을 가렸다. 흥분에 젖어 있던 영웅은 채언의 기침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아, 채언 씨, 하… 이제 그만.”
허벅지에 이마를 기댄 작은 얼굴을 들어 올리려 볼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자 채언이 얌전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 고인 눈가가 붉고 입술은 잔뜩 젖어 번들거리는 상태였다. 색색 숨을 내쉬는 채언의 볼을 엄지로 쓸어주자 다시 입술을 벌리는 것이 보였다.
“그만, 해도 괜찮아요.”
채언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영웅이 다시 말릴 새도 없이 꺼떡거리는 그의 성기를 다시 입에 물었다.
“읏, 후….”
고개를 튼 채언은 입술로 기둥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뜨거운 성기에 핏줄이 펄떡거렸다. 추웁, 츳. 자극적인 소리가 침실을 울렸다.
“…흣.”
영웅의 잇새로 계속해서 뜨거운 숨이 새어 나왔다.
타악, 탁- 탓. 축축한 손날을 탄탄한 살에 부딪치며 채언이 눈을 들었다. 영웅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고여 있던 눈물이 붉어진 눈가를 타고 볼 옆으로 흘렀다. 미간을 찌푸린 영웅은 단번에 채언의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는 몸을 단단히 안고 침대 위에 눕혀주었다. 정신없이 두 사람의 입술이 맞붙었다. 채 삼키지 못한 타액이 채언의 턱을 타고 흘렀다.
순식간에 채언의 옷이 벗겨졌다. 반면에 신발까지 신은 영웅은 잠시 조깅을 하다 온 사람처럼 상의만 벗고 있었다.
잠시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다. 격렬한 키스에 숨이 가빠진 채언이 폭신한 이불에 볼을 기대는 사이, 영웅은 협탁 서랍을 뒤져 콘돔과 젤, 실리콘 링을 가져왔다.
눈을 반쯤 감고 새액 새액 숨을 쉬던 채언의 붉어진 볼이 커다란 손에 붙잡혀 정면으로 돌아왔다. 영웅은 채언의 보조개 자리에 입을 맞춘 뒤 콘돔 비닐을 이로 물어 찢었다.
발기한 성기에 콘돔을 씌운 그는 채언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몸을 숙였다. 하얀 목에 키스하며 손에 잡히는 링을 뜨거운 살 기둥에 끼웠다.
“으, 응.”
채언은 구멍 위로 축축한 젤이 흘러내리는 느낌과 곧바로 파고드는 굵은 손가락의 압박감에 아랫입술을 물었다.
다리 사이에서 들려오는 찔꺽이는 소리가 익숙해질 무렵, 핏줄이 흉흉하게 선 성기가 구멍을 파고들었다.
“…아, 으읏….”
채언은 영웅의 목 뒤로 팔을 둘렀다. 중간까지 들어오던 성기는 말랑한 실리콘이 닿는 느낌과 함께 뒤로 빠져나갔다. 영웅이 몇 번 더 허리를 쳐올리는 동안 채언은 흐윽, 흑, 신음을 참다가 그의 목 뒤에 두른 팔을 풀었다. 눈 밑이 붉어진 영웅의 볼에 손을 올리자 그의 허리 짓이 멈췄다. 채언은 때를 놓치지 않고 영웅의 어깨를 밀었다.
불쑥 몸을 일으키는 채언의 등을 받쳐준 영웅은 좁은 구멍 안에서 성기가 빠져나오는 느낌에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다시 힘을 풀 시간도 없이 자세가 뒤바뀌었다. 채언이 미는 대로 밀려준 순종적인 몸 때문이었다.
“후우… 채언 씨?”
영웅은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탄 채언을 보며 거친 숨을 쉬었다. 단단하게 근육 잡힌 가슴이 오르내렸다.
패기 좋게 그의 몸 위에 올라탄 것까지는 좋았는데, 채언은 그다음 행동이 망설여졌다. 확신이 서지 않는 불안한 눈빛으로 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단단히 발기한 것은 실리콘 링을 제외하더라도 길고 두툼했다. 너무 깊은 삽입을 방지해주는 링을 제거한다면 정말로 배꼽 아래까지 들어올지 몰랐다.
아랫입술을 깨물던 채언은 다시 고개를 돌려 영웅의 얼굴을 보았다. 마른침을 삼키자 커다란 손이 땀에 젖은 등줄기를 훑어 올리는 것이 느껴졌다. 채언은 천천히 한쪽 손을 뒤로 뻗었다.
“흣… 채언 씨.”
뜨거운 살 기둥을 쥐고 미끄러진 손에 실리콘 링이 닿았다. 이미 그것도 녹은 젤로 축축하게 젖은 상태였다. 채언은 영웅을 보며 천천히 뒤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러자 영웅이 한쪽 다리를 접어 채언의 등을 받쳐주었다.
채언은 나머지 손마저 등 뒤로 보낸 뒤 두툼한 성기를 잡고 실리콘 링을 빼내었다. 쫀쫀한 링이 기둥을 훑어 올리는 것에 자극받은 영웅은 숨을 참았다. 마침내 하늘색 링이 귀두 끝을 빠져나왔다. 영웅은 양손으로 채언의 허리를 잡았다. 땀이 난 손에 보드라운 살결이 만져졌다.
“괜찮겠어요?”
채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뒤 상체를 숙여 영웅에게 몸을 겹쳤다. 빈틈없이 맞닿은 가슴에 눌린 젖꼭지가 간지러웠다. 눈을 감은 채언은 영웅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단단한 팔에 하얀 등이 둘러 잡혔다. 채언은 엉덩이 사이에 문질러지는 뜨거운 성기의 느낌에 긴장했다. 애써 입안에서 섞이는 매끈한 혀에 집중하려 할 찰나였다.
“흐읍!”
깊게 숨을 마신 채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몸 안으로 쑤욱 들어온 성기는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깊게 삽입되었다. 꽉 조여오는 구멍에 영웅은 채언을 다독이듯 등을 쓸어주었다. 하지만 하얀 엉덩이 사이로 뿌리 끝까지 박아넣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으읏… 하아, 하….”
떨리는 손이 영웅의 가슴 위를 긁었다. 채언은 아랫배에 들어간 힘을 풀어낼 수가 없었다. 몸 안의 내장이 위로 밀려 올라온 느낌이었다. 엄청난 압박감에 밭은 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영웅의 붉은 혀가 채언의 벌어진 입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키스에 제대로 응하지도 못하고 굳어있는 채언의 몸 곳곳을 부드럽게 만져주며 긴장을 풀게 해주었다. 다정한 노력에 서서히 채언의 몸이 풀려갔다.
채언은 조금 여유를 가지고 입술을 벌렸다. 따듯하고 축축한 혀가 얽혔다. 전혀 움직일 기미가 없는 아래쪽의 상황에 안심하며 채언은 영웅을 끌어안았다.
“흑, 으…!”
갑작스레 쳐올리는 허리 짓에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다. 영웅의 커다란 손이 채언의 엉덩이를 잡아 쥐었다. 구멍이 더 벌어지며 쑤욱, 성기가 안쪽을 파고들었다.
“아윽…! 읏, 아!”
삽입의 깊이가 달라진 만큼 안을 드나드는 속도가 달라졌다. 전보다 느릿했지만 채언은 전보다 몸 안쪽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한번 들어올 때마다 깊은 곳을 찌르는 느낌에 내장이 망가질까 봐 무서워졌다. 찌릿한 쾌감과 두려움이 뒤섞였다.
영웅은 교접한 아래쪽에 다시 젤을 뿌렸다. 잔뜩 흘러내린 것이 금방 녹아내렸다.
“흐… 읍.”
영웅의 것이 채언의 안을 더 매끄럽게 파고들었다. 즈윽, 즈윽. 천천히 움직이던 영웅의 몸짓이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영웅이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묵직한 침대가 흔들렸다. 그의 몸 위에 올라탄 채언은 속절없이 흔들리며 입술을 물어야 했다.
“흐윽, 읏, 으응… 앗.”
녹은 젤이 채언의 아래로 흘러내려 시트를 적셨다.
“후우….”
영웅은 채언의 한쪽 허벅지를 그러쥐며 몸을 옆으로 틀었다. 나머지 손은 팔베개를 하듯 채언의 목 아래 집어넣고 등 뒤로 어깨를 잡아 품에 안았다. 즈윽, 즈윽. 길게 반복되는 이어지는 질척함 끝에 서로의 살이 철썩이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손자국이 붉게 남은 하얀 엉덩이 사이로 굵은 성기가 꿈틀거리며 먹혔다 빠져나오기를 반복했다. 채언은 단단한 품에 안긴 채 울먹이듯 신음을 내뱉었다.
“아… 으, 으…, 앗!”
푸욱, 깊은 곳까지 찔러오는 느낌에 눈앞에 불꽃이 터지는 듯했다. 온몸이 찌릿거렸다. 모양 좋게 쪼개진 복근 위에 채언의 성기가 비벼졌다. 손으로 만지지 않고도 잔뜩 발기한 것은 끈적하게 늘어지는 액체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하아… 흣.”
나직이 신음을 뱉은 영웅은 품 안의 채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눈물 고인 눈이 자신을 바라봐 오는 것에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주다가, 더 격렬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퍼억, 퍽 강하게 쳐 올릴 때마다 채언의 몸 안이 더 좁아지는 느낌이었다. 쾌감이 깊어질수록 내벽이 더 쫀쫀하게 달라붙었다. 깊게 삽입하는 것이 처음이니 억지로 더 안쪽을 열려고 하지는 않았다.
채언이 자꾸만 입술을 깨무는 게 보여서 영웅은 부어오른 입술에 혀를 가져다 댔다. 이에 눌린 것을 살짝 핥아주자, 안쪽으로 물려있던 입술이 스르륵 제 모양을 되찾았다.
추웁, 입술이 맞붙고 끈적하게 혀가 얽혔다. 아래쪽에서는 구멍을 파고드는 기둥 때문에 찔꺽이는 소리가 났다. 밀려 나온 젤은 빠르게 움직이는 몸 여기저기로 튀었다.
“흐으… 읏! …으응, 앗.”
채언은 손으로 영웅의 등을 긁으며 울먹였다. 몸을 비틀어도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뜨거운 기둥은 멈출 줄 모르고 움직였다.
“아읏, 아… 앗, 윽.”
“하, 힘들어요?”
“힘들, 힘들어… 읏.”
영웅은 고개를 숙여 채언의 유륜을 빨아들였다.
“으으… 응.”
딱딱하게 굳어있던 유두 주변을 덧그리던 말랑한 혀가, 면적을 넓게 하며 돌기 위를 눌렀다. 쪼옥 소리를 내며 입술이 떨어졌다. 곧바로 가슴에 붙은 입술 사이로 영웅의 붉은 혀가 움직였다. 채언의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비틀리는 어깨를 꽉 잡아 쥔 영웅은 더 세게 아래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몸 아래 이불이 구겨지고, 끝이 분홍빛으로 물든 발가락과 검은 운동화에 스친 시트에서는 스윽, 스윽, 소리가 났다. 채언의 하얀 다리가 바지를 입은 영웅의 다리 사이에 얽히며 선명한 근육 선을 드러냈다.
채언은 실리콘 링을 빼버린 것을 후회했다. 배 속이 아플 정도로 얼얼하게 파고드는 굵은 성기의 모양이 전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굵은 귀두가 몸 안을 거의 빠져나가듯 물러나다 퍼억, 갑자기 안을 밀고 들어왔다. 머리끝까지 쾌감이 차올랐다.
“으윽!… 흐윽!… 앗… 아, 윽.”
영웅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채언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바들거리는 하얀 손이 불룩해진 아랫배로 향했다. 여기까지 들어온 것 같아. 쾌감과 두려움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스스로 살갗을 만져 확인하려는데 영웅의 손이 채언의 손을 잡아챘다.
“조금만, 하, 조금만 더요….”
채언이 스스로 앞을 만져 서둘러 사정하려는 것으로 오해한 영웅은 채언의 팔을 뒤로 잡아당기며 세게 허리를 쳐올렸다.
“흑…! 잠깐, 잠시만요. 못 하겠, 아윽”
퍽, 퍽. 내벽을 짓이기는 단단한 성기가 몸속에 꽂힐 때마다 눈꺼풀이 떨렸다. 귓가에 들리는 나지막한 숨소리마저 자극적이었다. 사정감이 깊어지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채언은 몸을 떨었다. 마찰에 붉어진 엉덩이 사이로 영웅의 성기가 깊게 삽입되며, 철썩, 끈적한 살끼리 부딪쳤다. 커다란 손이 하얀 허벅지를 세게 잡고 더 위로 올리자, 입술 사이로 늘어지던 타액처럼 살과 살에 묻어있던 젤이 늘어졌다.
“…크흣.”
순간 좁은 구멍이 꿈틀거리는 살덩이를 꽉 조여 물었다. 눈동자가 반쯤 위로 올라간 채언이 사정하는 사이, 영웅은 움찔거리는 몸을 품에 안고 어깨에 입을 맞춰주었다. 작은 감각에도 예민해진 몸은 잘게 튀었다. 영웅은 아직 사정하지 못해 단단한 성기를 천천히 채언의 몸 안에서 빼내었다.
“흐윽… 끅.”
굵고 뜨거운 성기가 몸 안을 긁으며 빠져나가는 느낌에 채언의 허리가 비틀렸다. 엉덩이 사이에서 녹은 젤이 흘러나와 시트를 적셨다.
영웅은 동그랗게 입을 벌린 채 밭은 숨을 쉬는 채언을 보며, 다 녹은 젤과 콘돔에 묻어있던 윤활유로 번들거리는 제 것을 쥐고 흔들었다. 사정하는 순간엔 붉게 부은 채언의 입술 사이로 혀를 집어넣으며 키스했다. 거친 숨을 쉬는 두 사람의 복부가 맞닿았다 떨어질 때마다 서로의 몸에 튄 정액이 끈적하게 늘어났다.
“하아…하.”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린 채언은 영웅의 눈을 바라보다가 옅은 색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쓸어주었다.
촉, 촉. 가벼운 키스가 수도 없이 채언의 몸에 내려앉았다.
거친 숨결이 정리될 때쯤, 영웅은 자신의 품에 기대어있던 채언의 작은 얼굴을 들어 올렸다. 피곤한 듯 눈꺼풀이 무겁게 처져있었다. 눈가는 여전히 붉었다.
“또 샤워를 하면, 오늘은 몇 번 씻는 거예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영웅이 물었다.
“오늘은… 으음… 오늘은, 두 번째.”
채언은 나른한 숨을 내쉬며 천천히 말했다. 영웅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웃음기가 남은 입술로 말랑한 볼에 뽀뽀를 했다. 채언의 눈은 느릿하게 감겼다 뜨였다.
“물 좀 가져다줄까요?”
“…네.”
붉은 눈가를 매만져주던 영웅은 콘돔을 빼버린 뒤 아래를 대충 정리했다. 팔로 침대를 밀며 몸을 일으켰다.
“어.”
영웅은 포근한 이불의 느낌이 느껴지지 않는 발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은 여전히 검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신발을 신고 침대 위에 올라온 것은 오랜만이었다.
“채언 씨. 산책은 안 가도 되겠어요.”
영웅은 다시 몸을 숙이며 채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채언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섹스하는 동안에도 신발이 불편하지 않았거든요.”
장난기 섞인 그의 말에 채언은 눈가를 찌푸리다가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침대 위에서 한 운동이 산책보다 격렬했잖아요.”
“그래도….”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영웅은 채언을 끌어안으며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응? 뭐라고요?”
“그래도… 내일 저랑 산책해요.”
눈을 가린 채언이 앞을 보지 못하는 사이 영웅의 입꼬리가 시원하게 올라갔다.
“알겠어요. 우리 내일 산책해요.”
그는 다정한 눈으로 채언을 보다가, 흰 가슴과 배 위에 입을 맞춰준 뒤 침대를 내려갔다. 목이 마를 채언에게 물을 가져다주기 위해서였다.
이불을 그러쥔 채언은 열린 침실 문을 바라보며 느리게 눈을 끔뻑였다. 영웅이 운동화를 신고 집 안을 걷는 소리가 들렸다. 피곤한 몸에 잠이 밀려들었다.
채언의 감각이 둔해지는 사이 물컵을 든 영웅이 돌아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많이 졸려요? 이대로 잘래요?”
“…네….”
채언은 감은 눈을 뜨지 않고 대답했다.
“…그런데… 물….”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영웅은 컵에 있던 물을 입안에 조금 머금었다. 그런 뒤 몸을 숙여 채언의 입술 사이로 미지근한 물을 흘려 넣어주었다. 마른 목을 적실만큼만 들어오는 물을 삼킨 채언은 다시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내일 저녁은 나가서 먹을래요?”
침대 위로 올라가 누운 영웅은 이불 위로 흩어진 검은 머리카락을 보며 물었다. 채언이 천천히 고개를 젓자 부스스하게 떠 있던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왜?”
“집에… 있고 싶어요. 같이.”
“알겠어요.”
영웅은 둥근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채언이 바라던 대로 다음 날 두 사람은 집 근처를 산책했다. 딱히 정해진 길 없이 가보지 않은 곳 구석구석을 걸었다.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공원에서 손을 잡고 벤치에 앉아있기도 했고, 평소 자주 오가던 백화점 근처 거리를 걷기도 했다.
긴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채언은 가끔 빵을 사러 갔던 베이커리와 얼마 전 적금을 해지하기 위해 들른 은행 간판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집에 돌아온 둘은 평범한 저녁 식사를 했다.
그리고 같은 디자인의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운 밤. 채언은 영웅의 반듯한 콧날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손가락이 코끝에 닿자 영웅은 웃으며 입을 벌려 아프지 않게 채언의 손을 물었다. 그다음 쪽, 쪽, 손가락마다 입을 맞추는 것은 이제 그의 습관이었다. 채언은 손가락 틈 사이로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영웅이 잠들고 나서도 채언은 눈을 감지 못했다. 그와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혹여 영웅이 깰까 봐 얼굴을 만지지도 못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한번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새벽을 접는 느낌이었다. 밤의 시작은 채언의 눈앞에서 새벽의 끝과 금방 맞닿았다.
부우-. 조용한 알람이 채언의 귓가를 시끄럽게 울렸다. 작은 진동을 느낀 영웅의 눈꺼풀이 살짝 움직였다. 그걸 본 채언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놓은 뒤 눈을 감았다.
잠에서 깨어난 영웅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속으로 하나, 둘, 셋, 숫자를 센 채언은 막 잠에서 깬 것처럼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옅게 미소 짓고 있던 영웅과 눈이 마주쳤다. 더없이 평온한 아침이었다.
채언은 소시지를 굽는 영웅의 허리에 매달린 채로 익은 소시지의 칼집이 벌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토독, 톡. 프라이팬에서 들리는 소리가 바깥에 내리는 빗소리와 비슷했다. 튼튼한 유리창을 때리는 비바람이 제법 거셌다.
“비가 와요.”
다 익은 소시지를 접시에 옮겨 담던 영웅은 고개를 돌려 채언의 자그마한 머리통을 보았다.
“괜찮으시죠?”
“그럼요. 괜찮아요.”
영웅의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을 풀어 내린 채언은 식탁 의자에 가서 앉았다.
채언이 그릇에 시리얼을 담고 우유를 붓는 동안 미리 빵을 집어넣어 놨던 토스트기에서 띵, 소리가 울렸다. 우유팩을 기울이던 채언은 잼 뚜껑을 돌려 여는 영웅을 바라보았다. 놀라지 않은 그를 보고 숟가락을 들어 시리얼을 우유 속에 담가버렸다.
채언은 음식을 천천히 씹었다. 잼 바른 빵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영웅은 느릿한 채언을 보며 귀엽다는 듯 미소 지었다.
채언이 느리게 행동해도 시간은 계속 흘렀다.
아침을 먹고 거실에 앉아 쉬는 사이,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운전기사가 영웅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핸드폰을 귀에 댄 영웅을 보며 채언은 아무렇지 않은 척 호흡을 조절했다. 정말로 그를 보내야 할 시간이었다.
깨끗한 검은 운동화에 발을 집어넣는 영웅을 보며 채언은 주먹 쥔 손 안쪽을 살살 긁었다.
“짐은, 다 챙기셨죠?”
“어젯밤에도 확인해 봤고, 오늘 아침에도 캐리어 열어서 확인해 봤으니까. 다 챙겼을 거예요.”
“지난번처럼 두고 가는 건 없으시고요?”
“흐음.”
턱에 손을 대고 고민하는 자세를 취하던 영웅은 가늘게 뜬 눈으로 채언을 바라보았다.
“집에 채언 씨를 두고 가는 게 좀 걸리긴 하네요.”
장난스럽게 뱉은 말이었지만 두 사람 다 활짝 웃지 못했다. 영웅은 몸을 숙여 채언에게 아쉬운 키스를 했다.
“다녀올게요.”
주먹을 쥐고 있던 채언의 손을 잡으며 영웅이 다정하게 말했다. 스륵 빠져나가는 손을 붙잡은 채언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아직! 뭐, 두고 가셨을지도 몰라요. 제가 다시 한번 둘러볼게요. 잠깐만요.”
옆에 세워놓은 작은 캐리어를 내려다본 영웅은 다시 채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끄덕였다. 비행시간이 길 뿐 미국에 오래 머물다 올 생각은 없었다. 어지간한 것은 본가에 다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챙길 거리도 많지 않았다. 사실 캐리어를 가져가지 않아도 되었지만 반쯤 빈 곳에 채언의 선물을 채워 돌아올 생각이었다. 영웅은 복도를 달려가는 채언의 뒷모습을 보며 캐리어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간 채언은 이불이 정리되어있는 침대와 깔끔한 가구 위를 살펴보았다. 영웅이 두고 간 물건 따위는 없었다. 있을 리가 없었다. 그를 조금 더 붙잡고 있기 위해 꺼낸 말이었으니까.
침실 문손잡이를 꽉 잡고 있던 채언은 거실 쪽으로 발을 옮겼다. 화분을 가져가라고 할까? 아니, 그건 말이 안 되니까. 트리에 걸린 장식품을 하나 주머니에 넣어가라고 할까? 아랫입술을 물며 거실을 둘러보아도 그가 가져갈 만한 물건이 없었다. 손톱 옆 거스러미를 뜯던 채언의 눈에 테이블 위에 놓인 노트북이 들어왔다.
복도를 걸어오는 발소리에 신발장 앞에 서 있던 영웅은 허리를 기울였다. 노트북을 든 채언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거. 두고 가셨어요.”
“노트북은 딱히 사용할 일이 없는데요. 이건 채언 씨가 써요.”
채언은 고개를 저으며 노트북을 내밀었다.
“저도 사용할 일이 없는걸요.”
“핸드폰 망가졌잖아요. 원래 하던 것처럼 여기로 영상통화 걸게요.”
채언은 말없이 영웅을 올려다보았다.
“아, 혹시 채언 씨가 밖에 있거나 그러면….”
영웅은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노트북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내밀었다.
“이거 가지고 있을래요? 아무 때나 나한테 전화해요. 메시지를 보내도 되고, 메일도 되니까. 원래 하던 것처럼 영상통화를 걸어도 되고. 나는 미국에 도착하면 다른 핸드폰을 빌릴게요.”
영웅은 가만히 늘어져 있는 손에 핸드폰을 쥐여 주었다. 핸드폰을 내려다보던 채언은 고개를 들어 영웅을 보았다.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해요. 알았죠?”
그는 대답 없는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해주었다.
“다녀올게요.”
캐리어 손잡이를 고쳐 쥔 영웅은 뒤로 몸을 물렸다. 검은 운동화가 대리석 바닥을 디디는 소리가 들려 채언은 마음이 급해졌다. 어쩌지, 어쩌지. 달싹이던 입술 사이로 망설이던 말이 튀어나왔다.
“같이, 같이 가고 싶어요.”
그 말에 영웅의 눈이 동그래졌다. 채언은 핸드폰을 거울 앞에 내려놓고 그에게 다가갔다.
“주차장까지 같이 갈래요.”
“아….”
채언은 영웅의 캐리어 손잡이를 뺏듯이 잡고, 그의 빈손에 자신의 손을 끼워 넣었다.
“알겠어요. 채언 씨.”
알겠다고 대답한 영웅이 손을 빼내려 해서 채언은 다급히 손에 힘을 주었다.
“신발은 신어야죠.”
영웅은 웃으며 고갯짓으로 슬리퍼를 신은 채언의 발을 가리켰다. 채언은 서둘러 신발장을 열어 연분홍색 운동화를 꺼내 신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도, 안에 몸을 싣고 내려가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내내 손을 잡고 있었다.
차 앞에 다다르자 대기하고 있던 운전기사가 운전석 문을 열고 나왔다. 영웅은 그와 짧게 대화했다. 작은 캐리어가 트렁크에 실리고, 기사는 다시 운전석에 들어가 앉았다.
영웅은 채언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다가 입을 열었다.
“얼른 올게요.”
채언은 말없이 웃었다.
“가지고 싶은 거 있어요? 다 사다 줄게요.”
대답하지 않고 영웅의 손만 만지작거렸다.
손에 쥐어본 것 중에 가장 따듯한 것. 처음으로 가지고 싶다고 욕심내본 것. 어쩌면 아주 나중에도 자신의 옆에 있어 주었을 사람.
채언은 고개를 저었다.
“아프지 마시고요.”
잡고 있던 영웅의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볼에 대었다. 눈을 감고, 따듯하게 볼을 감싸주는 온기를 느꼈다. 손톱 끝부터 기다란 손가락, 단단한 손목까지 조심히 만졌다. 이 온기를 잊고 싶지 않았다. 폐 안에 들어 있는 숨을 끝까지 내쉰 뒤 천천히 눈을 떴다. 자신을 바라봐주는 초록색 눈동자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채언은 숨도 쉬지 않고 그의 얼굴을 눈에 새겼다. 옅은 색의 머리카락과 짙은 눈썹, 단단한 몸의 골격만큼이나 반듯이 자리한 코, 언제나 다정한 말만 내어주던 입술을.
더 이상 숨을 참지 못한 채언은 그의 목 가까이 얼굴을 기댔다. 가슴 안이 가득 찰 정도로 숨을 들이마셨다.
“여기서도, 언제나 좋은 향기만 났어요.”
언젠가 그가 그랬다. 자신에게서는 언제나 좋은 냄새가 난다고. 눅눅한 방 안에서 곰팡이 핀 것들과 생활하다가 영웅을 만났으니, 잠시나마 좋은 햇볕을 쬐다 가는 것 같았다.
채언의 볼을 만져주던 커다란 손이 검은 머리카락을 쓸었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요.”
목덜미를 타고 내려온 손은 채언의 어깨를 꽉 쥐었다 놓았다.
“무서운 일 있어도 전화하고.”
다시 채언의 볼을 감싼 영웅은 작은 얼굴을 들어 올렸다.
“내가 보고 싶으면, 꼭 말해줘요.”
채언은 영웅과 눈을 맞추며 손바닥에 얼굴을 문질렀다. 영웅은 채언에게서 시선을 떼기가 힘들었다. 고작 사흘도 안 되는 시간을 떨어져 있을 예정인데, 왜 이렇게 멀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일까. 처음으로 이렇게 며칠을 떨어져 지내야 하기 때문일까. 현관문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괜찮던 기분이 가라앉았다. 채언을 보던 영웅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굳어졌다.
“아무래도 나, 가지 말고 여기에.”
“이제 가셔야죠.”
채언은 자신의 볼을 감싼 손을 잡아 천천히 떼어냈다.
“공항에는 비행기 시간보다 일찍 가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운전석에 앉아있는 기사는 시간을 재촉하지 않았지만, 원래 출발하려던 시간보다 많이 지체된 상태였다.
“저 때문에 많이 늦었어요.”
“채언 씨.”
“가세요. 여기서 배웅할게요.”
채언은 영웅의 손을 잡은 채 엄지로 그의 손등을 쓸었다.
“괜찮으시죠?”
영웅이 눈썹을 살짝 올리며 채언을 보았다.
“이제, 비가 와도 괜찮으시죠?”
다정한 연인의 걱정이 살갗에 따갑게 와 닿는 것 같았다. 달콤하게 느껴지지 않는 걱정이었다. 영웅은 채언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목덜미를 쓸었다.
“그럼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는 고갯짓에 채언은 잡고 있던 영웅의 손을 놓았다. 두 사람의 손가락 끝이 스쳤다 떨어졌다.
채언은 온기가 남은 손을 꽉 쥐었다가 편 뒤에, 제 손으로 직접 조수석 차 문을 열어주었다. 차에 타는 것을 망설이던 영웅은 자신이 신은 검은 운동화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연락할게요. 받아줘야 해요?”
“일단, 지금은… 이거 타고 가시면.”
채언은 차 문 뒤에 숨어 손톱으로 손바닥을 아프게 눌렀다.
“저는, 지금부터 늦게까지 낮잠을 좀 잘래요.”
평범한 일상을 보내겠다는 것처럼 들리는 채언의 말에 영웅은 조금 안심했다.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푹 자고 일어나요. 공항 도착해서 비행기 타기 전에 전화할게요.”
영웅은 차에 몸을 실었다. 채언은 차 문을 닫았다. 차창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채언은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영웅은 채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지만, 볼에 패는 보조개는 볼 수 없었다.
천천히 바퀴가 구르는 것을 몇 걸음 따라나서던 채언은 멀어지는 차를 보면서 계속해서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의 사이가 너무 멀어지는 바람에, 날카로운 것에 베인 듯 반달 모양이 깊게 새겨진 손바닥을 영웅은 끝내 보지 못했다.
차는 코너를 돌아 주차장 경사로를 올라갔다. 채언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색색 소리가 나는 짧은 숨이 쉬어졌다. 덜덜 턱이 떨렸다. 이내 굵은 눈물방울이 채언의 볼을 타고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직 내리지 못한 손이 떨려서, 채언은 손가락을 접으며 팔을 아래로 내렸다. 가슴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깨문 입술 사이로 끄윽, 끅, 서럽게 울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영웅이 탄 차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흐으….”
한참을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서 있던 채언은 결국 어린애처럼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턱이 덜덜 떨리는 바람에 벌어진 입술 사이로 이가 부딪혔다. 손으로 눈가를 쓸어내려도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손바닥과 손등이 다 젖어 팔뚝에 눈가를 문질러보아도 채언은 얼굴 위로 흐르는 눈물을 모두 닦아낼 수가 없었다.
“같이… 흐윽, 같이… 흐… 가, 고 싶어요.”
홀로 우는 채언의 모습은, 혹시라도 잃어버린 부모님이 자신의 앞을 지나쳐 갈까 봐, 눈물이 차올라 흐려진 눈앞을 서둘러 닦던 어린 시절과 닮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