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다음 날 아침. 병실 문을 연 진원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가에 서서 내부를 둘러보았다. 밤사이 온풍기를 켜놓았는지 공기는 더울 정도로 훈훈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널려있는 후드와 바지, 간병인용 소파 겸 침대에 누워있는 남자와 환자용 침대에 누워있는 남자.
한 사람만 있는 줄 알았던 1인실에는 한 명이 더 누워있었다.
<뭐 하십니까?>
진원의 물음에 소파 위에 누워있던 영웅은 몸을 일으키며 검지를 입 앞에 가져다 댔다. 쉿. 그러면서도 눈은 침대 위의 남자를 향한 채였다.
<오자마자 미안한데, 부탁 하나만 할게요.>
소곤소곤 말하는 목소리에 진원은 발소리를 죽여 소파 가까이 다가갔다.
진원이 병실을 나간 후 영웅은 다시 평온하게 소파 위에 엎드렸다. 침대 위에 누워 잘 자고 있는 채언을 보면서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자정이 넘어서 영웅은 채언에게 같이 나가서 밥을 먹고 올 것을 제안했다. 자신 때문에 두 끼나 굶은 사람에게 비싸고 좋은 것을 먹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늦은 시각이라, 24시간 식사를 파는 식당이 최선이었다. 그래도 제대로 된 밥을 먹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채언은 환자가 주삿바늘을 꽂은 채로 어딜 나가냐며 극구 거절하더니, 혼자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고 돌아왔다. 그러고는 금방 집에 돌아가겠다는 것이었다. 젖은 옷이 이유였다.
맛있는 걸 먹고 오겠다고 해서 보내줬더니, 컵라면을 먹고 온 채언이었다. 그것만 해도 속상해 죽겠는데 비가 오는 새벽에 혼자 돌아가겠다니. 영웅은 펄쩍 뛰었다. 집에서 병원까지 택시를 타면 오래 걸리는 거리는 아니었으나, 왔다가 갔다가 꽤나 피곤할 터였다.
결국 채언은 영웅이 꺼내준 그의 새 옷과 칫솔을 받아들고 병실에 딸린 샤워실에서 따듯한 물로 씻고 나왔다. 윗옷은 커도 그럭저럭 잘 맞았지만, 바지는 허리끈을 꽉 묶어야 했다.
따듯한 물에 샤워를 하는 동안 영웅이 높여놓은 병실의 온도와 손등을 덮는 소매의 느낌에, 긴장이 풀린 채언은 금방 졸기 시작했다.
침대에 걸터앉아 대화를 나누던 채언의 고개가 까딱까딱 흔들리자 영웅은 침대 옆자리를 내어주려 했는데, 환자의 침대에 누울 수 없다며 채언은 소파 위로 올라가 버렸다. 몇 번이나 더 침대를 권해보았지만 돌아오는 답변마다 거절이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집에 갔어야 했다. 그랬으면 넓고 폭신한 침대 위에 함께 누워 꽉 끌어안고 잘 수 있었을 텐데. 영웅은 또다시 자신의 상황에 좌절하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채언이 깊은 잠에 빠질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작게 들려오는 숨소리가 일정해졌을 때, 조심히 침대 위에서 내려온 영웅은 채언을 몰래 안아 침대 위로 옮겨놓았다. 깊게 잠들어 따끈따끈한 체온과 향긋한 체향을 폴폴 풍기는 몸을 그냥 내려놓기란 힘든 일이었다. 결국 볼에 또 몇 번 입을 맞추었다가 채언을 깨울 뻔했다.
영웅은 새벽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나저나 이제 아침이었다. 몸을 일으킨 영웅은 여전히 웃음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한 채, 침대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새벽에 그랬던 것처럼 조심히 채언의 목 뒤와 다리 아래로 팔을 집어넣고 따끈한 몸을 들어 올렸다.
잠시 후. 병실 문을 연 진원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가에 서서 내부를 둘러보았다.
간병인용 소파 겸 침대에 누워있던 남자와 환자용 침대에 누워있던 남자의 위치가 바뀌어있었다.
<진짜 뭐 하십니까?>
진원의 물음에 영웅은 몸을 일으키며 검지를 입 앞에 가져다 댔다. 쉿. 그러면서도 눈은 소파 위의 남자를 향한 채였다.
데자뷔인가. 틀린 그림 찾기인가. 진원은 겉으로 티 내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부탁드린 건요?>
소곤소곤 말하는 목소리에 진원은 발소리를 죽여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사 왔습니다.>
진원이 손에 들고 있던 봉지를 살짝 들어 보였다. 고급 도시락집에서 사 온 한우 스테이크 도시락이 든 것이었다.
<고마워요.>
<여기 놔두겠습니다. 그런데 이 옷은 뭔가요?>
진원은 테이블 위, 채언의 옷 쪽으로 눈짓했다.
<이런. 아까 그것도 부탁드릴 걸 그랬네요.>
<세탁 맡겨서 집으로 보내드릴까요?>
<네. 그러면 감사하죠.>
도시락을 내려놓은 진원은 덜 말라 축축한 후드와 바지를 집어 들었다.
툭.
젖은 옷감이 떨어지는 소리에 진원과 영웅의 시선이 바닥으로 모였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채언이 후드 아래 숨겨놓았던 속옷이었다. 화장실에 걸어놓기도, 테이블 위에 널어놓기도 애매해 벗어놓은 옷 아래 놔둔 것이었다.
속옷을 보던 진원은 고개를 들어 소파 위에 누워있는 채언을 살폈다. 어제 영웅의 새 옷과 속옷을 챙겨두고 갔는데 이제 보니 채언이 그 옷을 입고 있었다. 아까 침대 위에 누워 있을 때는 몸 위에 이불이 덮여있어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어제 분명 집에 보냈는데 왜 아침에 이곳에 저 사람이 누워있는 건가 의문이 들기는 했었다.
“흠.”
진원은 후드의 면을 장갑처럼 사용해 바닥에 떨어진 속옷을 잡았다. 그리고 원래 테이블 위에 널려있던 모양대로 옷을 내려두었다.
<이건 그냥 여기 두는 게 낫겠네요.>
<그게 낫겠네요.>
후드 속으로 감춰지는 채언의 속옷을 보고 있던 영웅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퇴.>
<여기 병원입니다.>
진원에게 퇴원 수속을 부탁하려던 영웅의 말이 가로막혔다.
장소를 되짚어준 이의 한쪽 눈은 미묘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진원의 손이 채언의 후드 위를 툭툭 쳤다.
진원의 얼굴을 바라보던 영웅은 그를 따라 한쪽 눈을 찌푸리다가, 의미심장한 손짓에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런…!>
<병원이에요. 병원.>
꺼림칙한 표정을 지으며 뒤도는 진원에게 영웅은 그런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변명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지난밤을 떠올리면 완벽하게 결백을 주장할 수 없었다.
“흐음….”
영웅과 진원이 나눈 조용하고 속 시끄러운 대화 소리에 채언의 몸이 뒤척였다. 잔잔하던 숨소리가 불규칙하게 바뀌더니 감겨있던 눈이 가느다랗게 뜨였다.
병실 안에 영웅 말고 다른 사람이 있었다. 의사나 간호사가 들어 온 줄 알고 비몽사몽 몸을 일으켜 앉은 채언은 눈을 비비고 다시 앞을 보았다.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심채언 씨.”
하지만 인사를 건네 온 것은 병원 관계자가 아니라 진원이었다.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진원이라는 것을 인지한 채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겨우 제대로 된 말을 내뱉었다.
“아. 안녕하세요.”
어제 있었던 일이 생각난 채언은 겸연쩍게 인사에 답한 뒤 고개를 숙였다. 왜 여기 있냐고 추궁하면 어쩌지. 또 집에 가라고 하면. 손등을 반쯤 가린 옷소매를 만지작거리며 진원의 눈을 피했다.
지나치게 놀라는, 소극적인 태도의 채언을 보던 진원은 고개를 돌려 영웅을 보았다. 아까보다 좀 더 명확해진 표정이었다.
<조금 있으면 환자용 아침 식사가 올 시간입니다.>
<그런데요.>
“콜록.”
두 쌍의 눈동자가 채언을 향했다.
“채언 씨. 어디 아파요? 불편하게 자서 그런가?”
“아뇨. 잠깐 목이 간지러워서요.”
자신에게 쏠린 시선에 부담을 느낀 채언은 입 앞을 가리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이미 침대 아래 있는 슬리퍼에 발을 끼워 넣은 영웅은 링거 폴대를 잡고 있었다.
곧바로 소파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앉아 채언의 여기저기를 살피는 영웅을 본 진원은 티 나지 않게 고개를 저었다. 만약 이번에도 심채언 씨가 독감에 걸려 일을 그만두겠다고 하면, 붙잡지 않고 계약 해지 처리를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조용히 생각을 마친 진원은 병실을 나갔다. 새 옷을 한 벌 더 구해와야 했다.
채언은 자신의 손에 땀이 날까 걱정하면서도 맞잡은 영웅의 손을 놓지 않았다. 지하 주차장에서 운전기사를 보내고 나서부터 내내 잡고 있던 손이었다.
어제는 혼자였는데, 오늘은 영웅과 함께 집에 돌아왔다. 채언은 자꾸만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간혹 아랫입술을 깨물다가, 어젯밤 일이 생각나서 입술에 힘을 풀고는 했다.
대신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는데, 그럴 때마다 영웅이 맞잡은 손에 힘을 주어왔다. 옆을 흘끔 올려다볼 때마다 그의 표정에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아 무의식중에 그러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나 층 버튼을 누를 때, 영웅은 채언의 손등을 엄지로 쓸어내리고는 했다.
기분 좋은 티를 내기 민망해서, 채언은 다른 손에 쥔 쇼핑백을 조금 흔드는 것으로 웃음을 대신했다. 쇼핑백 안에는 햇볕에 말리지 못한 운동화와 옷가지들이 담겨있었다.
띵-. 문이 열렸습니다.
열린 문 밖으로 나갈 때는 영웅이 한발 앞서 나가서 뒤를 돌아보았다.
“발. 조심해요.”
채언은 영웅이 병원에서 신고 있던 슬리퍼를 신고 있었는데, 입고 있는 옷처럼 신발도 사이즈가 컸다. 뒤축이 헐렁한 구두도 아니고 슬리퍼였기 때문에 걷는 데 큰 무리는 없었으나, 영웅은 채언이 갓 걸음마를 뗀 아기라도 되는 양 걱정하고 있었다.
“네.”
채언이 천천히 걸어와 나란히 서고 나서야 영웅은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좀 쉬고 나서, 오후에 나갈래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실내용 슬리퍼로 신발을 갈아 신는 도중 영웅이 물었다. 자연스럽게 손이 풀린 상태였다.
“어디에요?”
고개를 들며 묻는 채언 쪽으로 영웅이 고개를 숙였다.
“신발 사러요. 나 때문에 다 젖어서 못 쓰게 됐잖아요.”
쪽.
신발장 안에 있는 건조기를 사용하면 되지 않느냐고 대답하려고 했는데, 볼에 입을 맞춘 영웅 때문에 채언은 입을 열 타이밍을 놓쳤다.
밤에는 무슨 마법에라도 걸렸던 건지. 대담하게 행동해놓고 이제야 모든 일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조개처럼 입을 다문 채언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등을 가리던 소매가 팔목까지 흘러내렸다.
“옷부터 갈아입고 나올게요.”
복도 끝방으로 들어온 채언은 방전된 핸드폰부터 충전기에 연결했다. 배터리가 다 된 지 오래라 케이블을 꽂아도 바로 켜지지 않았다.
책상 위에 핸드폰을 내려놓은 채언은 품도 크고 길이도 긴 옷을 벗고 몸에 맞는 옷을 꺼냈다. 바지를 입고 티셔츠에 머리를 집어넣는데 핸드폰이 켜졌는지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핸드폰을 집어 든 채언의 눈이 동그래졌다. 건영에게 답장이 와있었다.
[정말 돈 안 찾아갈 거야? 나 정말 이거 다 써버린다.]
[건영이: 그래. 형 쓰고 싶은 곳에 써. 근데 하늘의 집에는 가져다주지 마. 거기다 줄 과일 사는데도 쓰지 말고. 형이 사고 싶은 거 사.]
어디서 지내는지, 뭘 하며 지내는지 물어도, 알려주기 싫으면 돈이라도 다시 가져가라고 아무리 메시지를 보내도 답장한 적 없으면서 돈을 써버리겠다는 말에 답장을 보내왔다.
화면을 보던 채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걱정하던 중에 연락이 와서 다행이기는 한데 마음이 놓이는 것은 아니었다.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주던 채언은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래도 답장을 해왔으니 혹시 몰랐다. 전화를 받아줄지도.
통화 연결음은 잠시 가다 끊어졌다. 다시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가 지나치게 빨리 들려왔다. 차단을 당한 것이었다.
툭.
힘없이 내린 손에서 핸드폰이 떨어졌다. 케이블이 빠진 오래된 핸드폰은 금방 전원이 꺼지고 말았다.
괜찮아. 괜찮아. 속으로 되뇌며 채언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핸드폰을 주워 책상 위에 올려놓은 뒤 잠시 눈을 감았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서로 얽혀 상처받은 삶이었다. 건영의 옆에 자신이 없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 떠나왔던 것이니 이렇게 선을 끊게 된 것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건영은 지금까지 혼자서도 잘 해왔으니까.
일부러 남겨준 돈도 사용하지 않고 나름대로 살길을 찾으며 지내온 애였다. 그러니 앞으로도 잘 살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누가 됐든, 나는 나 떠난 사람 안 찾을래.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내가 싫어서 떠난 거 아냐?’
마지막이 매정했으니, 이제는.
주먹을 꽉 쥐고 일어난 채언은 눈물을 흘리는 대신 벗어놓은 옷을 집어 들었다. 이렇게 하나씩 정리해가면 되는 일이었다.
젖은 옷이 들어 있는 쇼핑백과 방금 벗은 옷을 들고 방 밖으로 나간 채언은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영웅과 눈이 마주쳤다.
“채언 씨.”
아까 신발을 갈아신을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아 보이던 그였는데, 지금은 얼굴이 밝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린 영웅의 표정에 채언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혹시 뭐가 잘못됐나? 다시 몸이 아픈 걸까?
새벽에 영웅은 오후에라도 장을 봐서 포천에 가자고 했다. 하지만 채언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가 팔에 링거줄을 달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곧바로 멀리 나가 놀자는 말에 동의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팔에 걸치고 있던 옷과 쇼핑백을 내려놓은 채언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아까 자신이 한 작은 기침 한 번에, 곧바로 달려와 안절부절못하던 영웅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런 마음이었겠지. 이제는 자신이 그의 작은 표정 변화에도 안달을 내고 있었다.
채언이 곁으로 다가오자, 영웅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어디가 또 안 좋으세요?”
살짝 무릎을 굽힌 채언이 영웅의 몸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채언의 시선을 피해 눈을 옆으로 굴리던 영웅은 테이블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손에 쥔 것은 사과였다.
“이거.”
“아.”
“겨우 이거 한입이, 저녁이었던 거예요?”
영웅은 손에 쥔 사과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작게 베어 문 부분은 갈변되어 있었다.
할 말 많은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시선에, 이번에는 채언이 눈을 굴렸다. 굽혔던 무릎을 펴고 서서 딴청을 피우는데, 사과를 다시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영웅이 채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번 주말은 엄청 행복할 줄 알았는데. 조금 속상하네요.”
채언은 영웅의 머리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포근한 색깔만큼이나 보들보들한 머릿결이었다.
끌어안은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영웅이 삐딱하게 고개를 들었다. 가늘어진 초록색 눈과 마주친 채언은 웃으며 상황을 무마해보려 했다.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보는데 시야가 흔들렸다.
“어어?”
갑자기 몸이 뒤로 넘어가는 느낌에, 채언은 옆에 있는 영웅의 목에 팔을 감았다.
요령 좋게 채언을 자신의 무릎에 앉힌 영웅은 놀란 채언의 몸을 안정적으로 받쳐주었다.
“놀랐어요….”
“나도 놀랐어요. 채언 씨. 사과 한입이라니. 한 알은 먹은 척해놓고.”
엄밀히 따지자면, 채언은 그의 오해를 정정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저녁으로 사과를 먹었다고 했지, 한입이든 한 알이든, 양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해봤자 억울함이 어필될 것 같지는 않았다. 채언은 영웅의 눈을 피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던질 뿐이었다.
“왜 눈 피해요?”
“제가 뭘요.”
“응? 여기 보라고요. 채언 씨.”
“어디를요.”
“저 사과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건영의 문제로 살짝 우울했는데. 영웅과 소파에 앉아 고작 사과 얘기로 다투고 있자니 채언은 어이가 없었다. 그것도 영웅의 무릎에 앉아서. 예전이었다면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 잠들려고 노력했을 텐데.
채언은 작게 웃고 말았다.
“지금 웃었어요?”
“아뇨.”
곧바로 표정 관리를 했지만 이미 웃음소리를 들킨 후였다.
“난 심각해요. 채언 씨. 어제도 맛있는 거 먹고 온다고 해놓고 컵라면 먹었으면서.”
“저, 컵라면 좋아해요.”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하아….”
영웅은 한쪽 눈썹을 삐죽 올렸다 내리며 채언의 등 뒤로 두르고 있던 팔에 힘을 주었다.
“채언 씨가 스노우 화이트예요?”
딴청을 피우고 있던 채언은 그 말에 귀를 쫑긋했다. 속으로 영웅의 발음을 한번 따라 해보았다. 스노우 화이트. 영웅은 한국 생활에 적응했는지 예전처럼 말할 때 영어를 섞어 쓰지 않았다. 가끔 영어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한국인처럼 발음하고는 했다. 한글 발음 그대로의 정직한 티비, 브로콜리였다. 그래서 채언은 요즘 은근히 아쉬워하고 있던 참이었다.
“겨우 사과 한입이 뭐예요.”
“저기, 방금 한 말 다시 한번만 해주세요.”
“뭘요. 사과 한입?”
채언의 부탁에 영웅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그거 말고요.”
“겨우?”
채언은 고개를 저었다. 영웅은 자신이 했던 말을 되짚어 생각하다 말했다.
“스노우 화이트.”
정답이었다. 그 말을 하자마자 채언은 보조개를 보이며 활짝 웃었다. 어떤 포인트가 그를 웃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가까이서 귀엽게 웃는 모습을 보니 속상했던 마음이 사르르 풀리는 느낌이었다.
“왜 웃어요. 그 단어가 좋아요?”
“아뇨.”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고개를 저은 채언은 다시 입을 열었다.
“목소리요. 영어를 하실 때는 목소리가 좀 더 낮아지는 거 아세요?”
그 말에 영웅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채언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내 목소리가 좋아서 웃었다고요?”
“네.”
“…정말.”
영웅은 채언을 꽉 끌어안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채언 씨.”
“네.”
“가지고 싶은 거 없어요?”
“네?”
“뭐 가지고 싶은 거 없냐고요.”
“네. 별로.”
지난번에도 이런 대화를 했던 것 같은데, 언제였지? 채언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먹고 싶은 건? 사과 말고요.”
사실 먹고 싶은 것도 딱히 없었지만, 손에 닿는 영웅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채언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무거나라고 하면 또 속상해할 게 분명했다.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음식이 뭐가 있을까.
음. 고민하는 티를 내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헤집는 채언의 손길에 영웅은 소리 내지 않고 웃었다. 하얀 목에 얼굴을 기댄 채 목 안에서 울리는 낮은 소리를 들었다.
으음. 길게 이어지던 목소리가 아, 하고 짧게 끊겼다.
“결정했어요?”
채언의 목에 코를 묻고 있던 영웅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저번에 먹은 거요.”
“저번에? 언제요. 뭐?”
영웅의 머릿속에 그동안 채언과 함께 했던 식사 메뉴가 주르륵 이미지로 지나갔다. 혹시 얌냠치킨인가? 아니면 호텔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것? 그때 채언은 게살 볶음밥을 먹었던 것 같다. 하지만 자신은 무슨 메뉴를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집에서 해주셨던 거요. 스파게티.”
채언은 영웅이 마늘 네 쪽을 넣고 만들어주었던 스파게티를 떠올렸다. 마늘이 적게 들어가서 걱정했는데, 맛있어서 놀랐던 것이었다.
“마늘이랑 토마토랑 오일 같은 게 들어있었는데. 그거 먹고 싶어요.”
영웅은 다정한 눈빛으로 채언의 얼굴을 바라보다 천천히 물었다.
“채언 씨. 그때 내가 뭘 넣고 만들었다고요? 다시 한번만 말해줄래요?”
그런 다음 채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채언이 천천히 말하기 시작하자, 영웅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요리 재료를 말하는 목소리가 이렇게 좋을 일인가. 토마토. 마늘. 올리브오일. 그리고 확신 없이 던져지는 해산물의 명칭.
조금 전, 채언이 스노우 화이트를 한 번 더 말해달라고 했던 게 이런 이유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비가 그쳐 바깥 날씨가 좋아졌지만, 어디 나가지 않고 이렇게 끌어안은 채로 오후 시간을 다 보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다른 거 먹어도 저는 좋아요.”
“아니에요. 먹고 싶은 거 다 해줄게요.”
하지만 계속 이러고 있다가는 또 어제 일이 반복될 것이었다. 채언에게 먹고 싶은 메뉴까지 물어봐 놓고 라면이나 먹게 될지도 몰랐다. 어떤 재료가 모자란지 얼른 파악해서 사 와야 했다.
어차피 계속 함께 있을 건데도, 영웅은 채언과 딱 붙어서 떨어지기가 싫었다. 아쉬운 마음을 담아 크게 한숨을 쉰 그는 팔에 힘을 풀었다.
“그럼, 나도 옷 갈아입고 올게요.”
영웅의 무릎 위에서 소파로 내려온 채언은 영웅이 입고 있는 옷을 살폈다. 아까 진원이 가져다준 편한 옷이었다. 이대로 나갈 줄 알았는데. 역시 영웅은 밖에 나갈 때면 좀 더 차려입는 편인 듯 했다. 이번에는 옷을 갈아입으려다가 테이블 위의 사과를 발견해서 소파 위에 눌러앉았나 보다.
소파에서 일어서는 영웅을 따라 채언도 일어섰다.
“저는 저 옷들 좀 세탁기에 넣어놔야겠어요.”
채언이 손을 들어 바닥에 내려둔 쇼핑백 쪽을 가리키자, 영웅이 그쪽으로 걸어갔다.
“앉아있어요. 내가 할게요.”
바닥에 있던 것들을 주워든 영웅은 잠시 서서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세탁실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다시 거실을 지나 방으로 들어가는 영웅의 손에는 어제 채언이 입고 잔 옷들이 들려있었다.
저건 어디로 들고 가는 거지? 얌전히 소파에 앉아있던 채언은 고개를 갸웃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웅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나른함이 감돌던 채언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왜, 그걸.”
혹시 같은 옷이 몇 벌 있는 건가? 예전에 채언도 무늬 없는 흰 티셔츠 같은 것을 몇 벌 사본 적 있었다. 하지만 저런 옷은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새 옷을 샀나?
“가요.”
영웅의 말에 채언은 혼란한 얼굴로 천천히 일어섰다.
영웅의 옆으로 걸어가 그의 몸과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드레스룸에 있던 옷이라기에는 묘하게 구겨진 상태였다. 채언은 손가락으로 영웅의 옷 소맷자락을 슬쩍 만져보았다. 세탁해서 잘 말린 빳빳한 재질이 아니었다. 마치, 하루 입고 벗은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영웅은 채언의 행동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거.”
“네?”
“이 옷이요.”
“네.”
“제가 입었던 거 아닌가요?”
“맞아요.”
영웅은 변명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탁기에 가져다 넣으려고 옷을 들었더니, 채언에게서 맡아지던 냄새가 폴폴 나길래 홀랑 입어버린 것이었다. 분명 어제 같은 바디워시를 썼을 텐데, 자신의 몸에서 나는 것과는 다른 좋은 향기가 났다. 병원에서 하도 흐트러진 모습만 보여주었기 때문에, 머리도 옷도 잘 정돈하고 싶었지만, 이런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런 행동이 살짝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채언에게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그냥 뻔뻔하게 나가자. 방문을 열고 나올 때 영웅이 했던 생각이었다.
뭐가 문제냐는 듯한 영웅의 능청스러운 태도에 채언만 더 혼란스러워졌다.
“이걸 왜 입으셨는데요? 이거 빨려고 세탁기에, 세탁기에 넣으려던 건데요.”
“한 번밖에 안 입었잖아요. 옷도 자주 세탁하면 안 좋아요.”
평소에는 하루 입은 옷을 잘만 세탁하던 그였다.
“이제 갈까요?”
채언은 자신의 어깨를 감싸 오는 영웅의 팔을 잡아 내렸다. 건영과 함께 살 때 네 옷 내 옷 없이 서로 옷을 돌려 입고는 했지만, 영웅과 그러자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혹시 자다가 땀을 흘렸을지도 모르는데. 냄새가 나면 어쩌지. 그런 걱정도 들었다.
“아까 입고 있으셨던 옷은요. 그건요.”
“내일 또 입으려고 잘 정리해서 드레스룸에 뒀어요.”
옷 한 벌만 세탁기에 집어넣으면 의심을 살까 봐. 영웅은 짧은 시간 동안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 노력이 통한 듯했다.
두 손으로 영웅의 팔을 잡은 채언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생각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방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영웅의 손에는 벗은 옷이 들려있지 않았다. 정말로 옷을 자주 빨면 옷감이 상하니까 이러는 걸까? 하지만 뭔가 이상한데. 의심 서린 눈으로 채언은 다시 영웅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옷이 살짝 구겨지기는 했지만, 영웅의 모습은 지저분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이 입었을 때는 티셔츠가 품도 크고 길이도 길었는데. 바지는 허리가 크고 길이가 길어서 끈을 꽉 묶고 입었어야 했는데. 그에게는 딱 맞았다. 영웅의 옷이니 사이즈가 잘 맞는 게 당연하긴 했다. 색도 잘 어울렸다.
채언의 생각은 영웅이 왜 이 옷을 입고 외출을 하려 하는가에서, 옷이 참 잘 어울린다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영웅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살짝 찌푸린 채언의 미간 사이에 쪽, 뽀뽀를 했다.
“앗!”
깜짝 놀라 이마를 가리는 채언의 손을 잡아 내린 뒤에는, 그대로 꼭 붙잡고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영웅의 차가 멈춰선 곳은 지난번 두 사람이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었던 백화점의 지하 주차장이었다.
영웅은 슬리퍼를 신고 주차장을 걷는 채언의 발을 내려다보며 걸었다.
“그러다 제가 넘어지는 게 아니라, 대표님이 넘어질 것 같은데요.”
채언의 말을 듣고 나서야 그는 똑바로 고개를 들고 앞을 보았다. 터벅터벅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끔 눈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 동안,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나서, 나란히 선 두 사람의 손등은 자주 닿았다 떨어졌다. 조용하고 밀폐된 공간이었다. 아무도 말을 하기 위해 입술을 열지는 않았지만, 살짝 닿았다 떨어지는 손등과 손가락의 느낌은 안타까운 입맞춤을 하는 입술의 느낌과 닮아있었다.
6층에 도착하기 전, 3층에서 문이 열렸다. 문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내리고 바깥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올라탔다. 뒷걸음질 치던 채언은 왼쪽 구석에 몸을 기댔다. 옆에 서 있던 영웅도 뒤쪽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유모차까지 한 대 들어오자 좁은 엘리베이터 안이 꽉 찼다. 손등이 닿던 두 사람은 이제 어깨까지 밀착된 상태였다.
둘만 있는 공간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긴 것뿐인데. 아예 몸을 끌어안아 본 적도 있는데. 채언은 이상하게 긴장되는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왼쪽 어깨에 닿는 엘리베이터 벽은 차가운데 오른쪽 어깨에 닿는 영웅의 몸은 따듯했다. 그때 맞닿아 있던 그의 어깨 근육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영웅의 손이 채언의 손목 안쪽 여린 살을 스치며 파고들었다. 키스할 때 입 안쪽을 가르고 들어오던 혀처럼, 영웅의 손가락은 채언의 손목에서 손바닥 그리고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살짝 고개를 숙인 채언은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의 손에 깍지를 낀 그의 손등 쪽으로, 천천히 늘어진 손가락을 닿게 했다. 힘이 들어간 영웅의 손가락이 채언의 손가락과 손등이 연결되는 뼈 위를 꾸욱 눌러왔다. 그러자 채언의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위로 떠올랐다. 하지만 손바닥 안쪽 말랑한 살 부분은 더욱 밀착되었다.
3층부터 6층까지 고작 3개 층을 올라가는 동안 두 번 더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지만, 두 사람의 손바닥 안쪽은 뜨겁게 밀착되어 있었다. 양옆으로 살짝 비틀려 비벼질 때도 빈틈없이 맞닿아 있었다.
6층에 도착해 내릴 차례가 되었을 때는 지하에서는 건조하게 말라 있던 두 사람의 손 안쪽에 습기가 어려 있었다. 풀어지는 손가락 사이가 아쉽게 스치고, 채언의 검지에 영웅의 새끼손가락이 얽혔다 떨어졌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영웅은 채언을 보지 않고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자신의 발밑을 지켜봐 주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고 해서 채언은 서운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영웅이 오른쪽 손을 들어 머리를 쓸어 올리더니 작게 하, 숨을 내쉬는 것이 보였다. 그의 등, 어깨뼈가 움직이며 티셔츠 사이가 팽팽해지는 것이 보였다. 채언은 영웅이 보지 못하는 사이 오른쪽 손을 꽉 주먹 쥐었다 놓았다.
“갈까요?”
잠시 후, 채언을 돌아보는 영웅은 웃고 있었지만, 평소와 달리 얼굴이 뻣뻣해 보였다. 활짝 웃어줄 수 없는 것은 채언도 마찬가지라.
“네.”
짧게 대답한 뒤 작게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백화점 매장을 둘러보러 다니는 동안 채언의 걸음마다 터벅터벅 소리가 따라붙었다. 발소리를 조심하려 해도 커다란 슬리퍼를 신고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영웅은 그 걸음 소리를 들으며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다. 소리를 죽이려 천천히 걷는 걸음이 귀엽기도 했고 조심스럽게 걷게 만들어 미안하기도 했다.
평소 같았으면 처음 들른 매장에서 곧바로 신발 몇 개를 사서 채언의 품에 안겨주었겠지만. 터벅거리는 발소리를 들으며 함께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게 좋아서, 그의 취향을 최대한 존중해주는 척 여러 매장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에취!”
발소리가 끊기더니 재채기 소리가 들렸다. 휙! 고개를 돌린 영웅의 눈에 팔로 얼굴을 가린 채언이 보였다.
“저, 괜찮아요.”
허리를 숙여온 영웅이 묻기도 전에 채언이 대답했다.
“그냥, 코가 간지러웠어요.”
벌써 입술이 삐죽해지려는 영웅에게 서둘러 변명까지 했다.
“목이 아프지도 않고 열도 안 나요.”
“나중에라도 몸이 안 좋으면 꼭 말해줘야 해요.”
“네.”
고개를 끄덕이는 채언을 본 영웅은 이제 돌아다니는 것은 그만하고 매장 하나를 고르기로 했다. 허리를 펴고 지금까지 지나온 매장들과 아직 들어가 보지 않은 곳을 살펴보다가, 상품 색깔이 제일 알록달록해 보이는 곳에 가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건 좀, 그래요”
옆에 선 직원에게 들리지 않게 채언은 영웅의 귓가에 속삭였다.
“불편해요? 사이즈 다른 거로 할까요?”
영웅은 의자에 앉아있는 채언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힌 채 앉아있었다. 직원이라도 되는 양 직접 신발을 신겨주기까지 한 그였다.
“아뇨. 그게 아니라. 색깔이….”
“채언 씨. 혹시 남자는 블루, 여자는 핑크. 뭐 그런 거예요?”
영웅의 눈이 장난스럽게 가늘어졌다. 채언의 발에는 연분홍색 운동화가 신겨있었다.
“아니,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의자 가죽을 손톱으로 살살 긁던 채언은 다시 상체를 살짝 숙여 영웅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 이런 색깔 신발은 신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조금.”
그리고는 눈을 굴려 옆을 올려다보았다. 서비스용 미소를 장착한 직원과 눈이 마주친 채언은 황급히 영웅 쪽으로 시선을 옮긴 뒤 또 다른 변명을 했다.
“그리고 사이즈가 조금 크기도 하고요.”
“이거, 사이즈가 반 정도 작은 것도 있나요?”
“네. 고객님. 10단위 아니고 5단위로 나온 제품이라서요. 지금 매장에는 없는데 창고에 있는지 확인 한번 해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직원은 카운터 쪽으로 가서 노트북 자판을 치기 시작했다. 직원의 동선을 따라 움직였던 채언의 고개는 영웅에게 돌아왔다. 그는 연분홍색 운동화를 신은 채언의 발을 손바닥 위에 두고 요리조리 돌려보는 중이었다.
“채언 씨는, 발이 참 작은 것 같아요.”
“평균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신발에 따라 다르지만 270이나 275를 신는 채언은 자신의 발이 작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그의 슬리퍼를 신고 돌아다니면서 온갖 곳에 발소리로 존재감을 드러냈던 것을 생각하면 영웅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가 가긴 했다.
“그런데 정말, 이 신발은 좀 그래요. 색깔을 검은색으로 바꾸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왜요. 엄청나게 잘 어울리는데.”
영웅은 채언이 자신에게 선물해줬던 셔츠 두 개 중 하나를 그에게 입히는 상상을 했다. 애초에 나눠 입고 싶어서 구매를 고민했던 것이었다. 바닷가에서 운동화는 좀 안 어울리는 조합이지만 모래사장 위, 분홍색 셔츠에 연분홍색 운동화를 채언을 상상하면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번에 가지 못한 글램핑 대신 바다에 가보자고 할까. 상상에 상상을 더하는데 채언의 손이 영웅의 어깨를 흔들었다.
“검은색으로 바꿀래요.”
“날이 더워지는데. 검은색보다는 밝은색이 좋지 않을까요?”
그때 직원이 곁으로 다가왔다.
“말씀하신 사이즈가 창고에 하나 남아있더라고요. 그걸로 가져다드릴까요?”
“이거. 한 개 남은 거면, 이 색깔이 제일 인기 있는 거 맞죠?”
“네. 저희도 지금 나가면 한동안 재입고 예정 없고요. 전국 품절이라 다른 매장 가셔도 연분홍색은 구매 어려우실 거예요.”
“거봐요.”
직원과 영웅의 공세에 채언은 입을 다물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난번 그가 눈독 들이던 연두색, 분홍색 셔츠도 그러지 않았는가. 누가 저걸 사가나 했더니 누가 사가서 예약을 걸어놔야 했다. 그동안 자신이 너무 무채색의 옷만 입다 보니 보통 사람들이 즐기는 다른 색깔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것 같기도 했다.
“정말, 이게 저한테 어울려요?”
“네.”
“너무 잘 어울리세요.”
경쟁하듯 대답한 직원과 영웅의 목소리에 채언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걸로 할게요.”
“딱 하나 남은 거 고객님이 신고 가시겠네요.”
작게 박수를 친 직원은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막 다른 손님 응대를 마친 다른 직원을 불렀다.
“민정 씨. 창고 가서 제품 좀 가져다줄래요?”
“네. 노트북에 떠 있는 모델 말씀하시는 거죠?”
“맞아요. 그거.”
영웅은 몸을 기울여 앉아있는 채언의 뒤를 보다가 아리송한 표정을 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의 혼잣말을 들은 채언은 영웅을 따라 뒤를 돌아보는 대신 초록색 눈동자를 보았다.
“왜요?”
“아니에요. 이건 사이즈가 크다고 했죠?”
채언의 발에서 운동화를 벗겨낸 영웅은 손에 든 것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켜 빈 의자에 앉았다.
창고에 다녀온 직원이 새 신발 상자에서 운동화를 꺼내주었다.
사이즈가 잘 맞는지 확인한 뒤에 채언은 새 신발을 곧바로 신고 가기로 결정했다.
“그럼, 신고 오신 이 슬리퍼는 쇼핑백에 담아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결제는 카운터에서 도와드릴게요.”
직원이 쇼핑백을 가지러 가고, 신발 끈을 제대로 묶은 채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옆에 서 있던 영웅은 지갑을 꺼내 들었다.
“잠시만요.”
“왜요? 다른 것도 볼래요?”
영웅은 곧바로 매장 곳곳에 있는 다른 신발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후보로 정해둔 2번, 3번, 4번 신발이 더 있었다. 아까 지나쳐온 다른 브랜드의 신발을 몇 개 더 골라줄 예정이었지만 여기서 몇 개를 더 사겠다고 하면 그것도 좋았다.
“이거. 제가 살 거예요.”
“네. 뭐라고요. 채언 씨?”
하얀 운동화를 보던 영웅은 채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지갑을 든 영웅의 손목을 잡아 내린 채언은 다시 한번 말했다.
“이 신발은 제가 신을 거니까 제 돈으로 살 거예요.”
“나 때문에 오늘 슬리퍼 신고 나온 거잖아요.”
“어차피 운동화가 오래돼서 새걸 사야 했어요.”
시선을 내린 채언은 연분홍색 운동화로 감싸인 발을 한 번 까딱해보았다. 새 신발을 살 예정은 없었지만, 그의 신발들이 늘어선 신발장 안에 낡은 운동화 말고 깨끗한 신발이 놓이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예전만큼 생활비가 드는 것도 아니니 새 신발 하나 사지 못할 만큼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채언 씨는 나한테 생일 선물을 세 개나 줬잖아요. 난 하나밖에 안 줬는데.”
“저한테 수영복이랑 물안경 같은 것도 사주셨잖아요.”
“기억 안 나요.”
영웅의 눈썹이 삐죽 위로 올라갔다. 채언은 그를 보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잠시 생각하던 채언은 영웅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사실 한국에는 이런 말이 있거든요.”
채언이 속삭이는 말을 듣고 있던 영웅의 표정이 곤란하다는 듯 굳어졌다.
“그래서 보통 신발 선물은 잘 안 해요.”
“거짓말.”
“거짓말 아니에요.”
“난 그런 거, 안 믿어요.”
그러면서도 영웅은 손에 든 지갑과 채언의 신발을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결제는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카운터 앞에 선 두 사람에게 직원이 물었다.
“카드로 할게요. 잠시.”
“이 카드로요.”
지갑을 꺼내려는 채언의 옆에 서 있던 영웅이 빠르게 카드를 내밀었다.
“네. 결제 도와드릴게요.”
얼떨떨하게 운동화의 금액을 설명해주는 직원의 말을 듣고 있던 채언이 정신을 차렸다.
“어. 어? 이거 제가 하기로 했는데!”
“난 그런 거 안 믿어요. 채언 씨.”
“영수증 여기 있습니다.”
신고 가겠다고 해서 이미 태그를 제거했기 때문에 교환이나 환불도 되지 않았다. 환불 후 카드만 바꿔서 다시 결제하는 것은 되지 않을까. 채언은 억울한 표정으로 영웅을 올려다보았다. 한국에는 신발을 선물하면 선물 받은 사람이 도망간다는 속설이 있다고 그에게 말해주었는데. 아까는 그 말에 넘어간 듯하더니 연기를 한 것이었나 보다.
결제를 마치자 옆에 있던 다른 직원이 슬리퍼가 든 쇼핑백을 내밀었다. 손잡이를 넘겨받은 영웅은 감사합니다, 인사한 뒤 가벼운 발걸음으로 먼저 매장 밖으로 향했다.
“가요. 채언 씨.”
그리고 뒤돌아서 가벼운 미소를 짓는 것에 채언은 처음으로 그가 얄밉다고 생각했다.
요리 재료를 사러 가는 길에 채언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영웅은 채언의 뒤에서, 옆에서 입을 꾹 다문 얼굴을 살피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재료를 확인하고 나왔어야 하는데 그냥 나오는 바람에 혹시 모를 부족한 것들을 모두 사가기로 했다. 올리브 오일과 토마토. 등등 몇 가지 재료를 카트 안에 집어넣고 걷던 중에 영웅이 채언 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새우가 좋아요. 아니면 조개가 좋아요?”
“마음대로 고르세요.”
이거 살까요? 이건 어때요? 일부러 이것저것 물어보며 카트를 채웠는데,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네 또는 아뇨, 였다.
채언의 표정이 어두운 것도 아니고, 목소리에 날이 서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영웅의 눈썹이 축 처졌다. 마치 겨울의 채언을 보는 것 같았다. 같이 TV를 보자고 하면 아뇨, 밥 먹었냐고 물어보면 네, 하던 그때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채언 씨. 화났어요?”
“아뇨.”
제가 왜요? 덧붙이는 채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영웅의 어깨에서 힘이 추욱 빠졌다. 카트 손잡이를 내려놓은 그는 채언의 양쪽 팔 사이에 손을 집어넣고 교차해 끌어당겼다.
“여, 여기 마트예요!”
뒤에서 안아오는 영웅 때문에 채언은 당황했다. 배 위로 교차된 영웅의 팔을 풀어내려 했지만, 그럴수록 끌어안아 오는 힘은 더 세졌다. 영웅은 고개를 숙여 채언의 어깨 뒤쪽에 얼굴을 묻었다.
“왜 화났어요?”
“화, 안 났어요.”
“채언 씨가 도망간다고 한 거 듣고도 신발 선물해서?”
“저는, 그렇게 말한 적… 없어요.”
도망가겠다고 한 적은 없었다. 신발을 선물 받은 사람이 도망간다는 속설이 있다고 했지. 장난 반으로 했던 말인데. 생각해보니 쉽게 웃어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도망은 아니지만 계약 기간은 이제 일 년도 남지 않았으니까.
그 순간, 채언은 자신이 정말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무슨 욕심을 부리는 거지. 책상 위에 올려둔 전원 꺼진 핸드폰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정말로 화 안 났어요.”
허공을 보던 채언은 당장 자신을 안은 팔을 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망설이던 손을 결국 영웅의 팔 위에 얌전히 얹었다.
“나중에, 채언 씨도 나한테 선물해줘요.”
“뭘요?”
“신발.”
서로 도망가자는 건가. 채언은 가만히 그의 말을 마저 들었다.
“서로 새 신발 신고 멀리 가자고요.”
아까는 다정하게 손을 잡아줬으면서 정말 그러자는 걸까. 채언은 가슴이 아릿했다. 하지만 그러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까는 풀어내고 싶었던 이 팔이 영영 자신을 잡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자신의 생각이 어느 방향으로 뻗어나갈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다른 곳에서 다시 만나면 되니까.”
그 말에 채언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목이 메는 바람에 쉽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잠시 숨을 고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저도, 신발 선물해드릴게요.”
“그럼 우리 어디 갈지도 지금 정할까요?”
“어디 가고 싶으신데요?”
“바다는 어때요?”
채언의 화가 풀린 듯해 영웅은 그를 안고 있던 팔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곧바로 한 손을 들어 채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옆에서 마주 보며 대답을 재촉하자 채언은 대답하지 않고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럼, 이건요?”
“어떤 거요?”
“새우랑 조개.”
그 말에는 보조개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새우요.”
웃음기가 묻은 채언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영웅은 다시 카트 손잡이를 잡았다.
멈춰있던 바퀴가 천천히 굴렀다.
채언이 설거지를 할 때 영웅이 뒤에서 기웃거리던 것처럼, 영웅이 요리하는 동안 채언은 소파에 앉아 부엌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처럼 마늘 네 쪽으로 뭘 할까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끔 시선을 느낀 영웅이 뒤돌아보려 하면, 채언은 빠르게 고개를 돌려 창밖이나 TV를 보는 척했다.
스파게티 면이 막 끓는 물에 들어간 순간이었다. 인터폰 화면이 켜지고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거실을 울렸다.
“제가 나가볼게요.”
요리하는 영웅을 대신해 현관문을 연 채언은 퀵으로 온 물건을 가지고 들어왔다.
“누구예요?”
“비서님이 보내셨나 봐요.”
“아하. 대신 상자 좀 열어줄래요? 아마 안에 핸드폰이 들어있을 거예요.”
“핸드폰이요?”
“고친 거요.”
그의 말대로 상자 안에는 핸드폰이 들어있었다. 채언은 그것을 꺼내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다른 사람들은 며칠씩도 걸린다는 핸드폰 수리를 하루 만에 뚝딱 해치우다니. 갑자기 돈으로 시간도 살 수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채언은 거실 창 너머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이 집에서 지내는 게 익숙해져 잊고 있었는데. 지금 자신이 머무는 곳은 서울, 그것도 엄청나게 비싼 동네에 지어진 고급 아파트였다. 부엌에서 토마토를 썰고 있는 남자는 그런 집의 소유주였고. 새삼 대단한 부자와 함께 살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영웅의 재력이 어떻든 채언에게 그는, 그저 마늘 네 쪽만 가지고도 맛있는 스파게티를 만들 수 있는 남자일 뿐이었다.
팬 위에 재료를 넣고 볶는 소리가 들렸다. 맛있는 냄새가 나기 시작해서, 소파에 앉아있던 채언은 저도 모르게 발끝을 까딱거렸다.
“채언 씨. 다 됐어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채언은 내용도 모르고 보는척하던 TV에서 눈을 뗐다.
영웅은 식탁 의자 등받이에 손을 올리고 서 있다가 채언이 식탁 쪽으로 다가오자 의자를 뒤로 빼주었다. 채언이 앉자 앨리를 불러 TV를 끄고 노래까지 틀었다.
“여기, 레스토랑인 건가요?”
“비슷한 거죠.”
기분 좋게 웃은 영웅은 곧바로 맞은편에 앉지 않고 어딘가로 향했다.
“저, 술은.”
영웅의 손에는 코르크가 없는 화이트 와인이 들려있었다. 요리에 쓰고 남은 것인 듯했다.
그를 말리려던 채언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마시지 않는다고 영웅이 마시는 것까지 말릴 필요는 없었다. 글램핑 준비물 목록을 정할 때도 한 명이 마실 술은 사기로 했었으니까. 식탁 위에는 빈 와인 잔 두 개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자신은 물을 따라 마시면 되는 일이었다.
영웅은 잔 하나에 와인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머지 잔에도 적당히 와인을 채웠다.
“저는.”
빠르게 와인이 채워진 잔을 보던 채언은 옆에 선 영웅을 올려다보았다.
“마시지 말고, 같이 치얼스만 해요.”
채언이 고개를 끄덕이자 영웅은 반대편 의자를 빼서 앉았다. 두 사람은 건배사 없이 잔을 부딪쳤다.
포크를 든 채언은 제일 먼저 새우를 찍어 입에 넣었다. 볼 한쪽이 불룩해질 만큼 큰 새우였다.
영웅은 면을 적당히 감아 입에 넣었다. 지난번보다 더 잘 만든 것 같은데 채언의 입맛에는 맞을까? 그는 턱을 움직이면서, 맞은편 채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입에 든 것을 천천히 씹어 삼킨 채언은 자신을 보며 포크에 면을 둘둘 감고 있는 영웅을 보다 웃었다.
“엄청 맛있어요. 저번에도 맛있었는데, 오늘은 더 맛있어요.”
“다행이다.”
풀어진 얼굴로 영웅도 마주 웃었다. 그대로 포크를 들어 입가로 가져다 대던 그는 채언에게 행동을 저지당했다.
“왜요?”
“너무 많은 것 같아서요.”
그제야 영웅은 손에 쥔 포크를 내려다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둘둘 말아버린 면이 야구공만 했다. 그는 얌전히 포크를 접시 안에 내려놓고 면을 풀어냈다.
접시 안의 스파게티가 절반쯤 줄었을 때쯤, 영웅은 비어버린 와인 잔에 새로 와인을 따랐다. 새로 따른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뒤, 그는 들고 있던 잔을 둥글게 굴렸다. 옅은 노란빛을 띠는 액체가 출렁거렸다.
“채언 씨.”
익은 토마토를 씹고 있던 채언은 즙이 흐르지 않게 입술을 다물고 내용물을 삼켰다.
“네.”
“이따, 어디서 잘 거예요?”
“네? 저는 방에서…….”
당연한 것을 묻는 말에 대답하던 채언은 말꼬리를 흐렸다. 어쩐지 영웅은 당연한 걸 묻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으음.”
영웅은 계속 와인 잔을 굴리고 있었다.
포크를 쥔 채언의 손이 움찔거렸다. 아까까지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던 식사 시간이 갑자기 어색하게 느껴졌다. 말이 없어진 두 사람 사이를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재즈 음악이 채우고 있었다.
아직 접시에는 맛있어 보이는 새우가 몇 마리나 남아있었는데, 아까처럼 한입에 넣었다가는 제대로 씹지 못할 것 같아서, 채언은 새우 허리를 포크로 찍어 절반만 베어 물었다. 입을 작게 우물거리던 채언은 앞에 있는 와인 잔에 손을 뻗었다. 화이트 와인을 한입 마시자 향긋한 향이 코끝에 스쳤다. 그래서 다시 한 모금을 더 마셨다.
술을 마시지 않을 것처럼 말해놓고, 한 잔을 다 마셔버리면 그가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채언은 입가에 닿아있던 잔을 떼었다. 두 손으로 와인 잔을 머그잔처럼 쥐고, 입이 닿았던 둥근 곡선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채언 씨.”
“네.”
“혹시 방 옮길 생각 없어요?”
“어… 방을. 갑자기 어디로…….”
영웅의 시선이 잔 위를 문지르는 채언의 손가락 끝에 닿았다 떨어졌다.
“복도 끝은 너무 멀잖아요. 중간에 있는 방으로 옮기는 건 어때요?”
영웅은 턱을 괴고 있던 손 뒤로 입술을 숨겼다.
“아. 중간 방이요.”
집에 찾아와 자고 가는 손님도 없고 아무도 사용하지 않아, 먼지가 쌓이지 않게끔만 청소를 하는 곳이었다.
채언은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아무래도 그를 오해한 듯했다. 괜히 긴장한 자신이 부끄러워서 채언은 입술을 깨물 듯 핥았다. 씁쓸한 와인 맛이 났다.
“지금 채언 씨가 지내는 방에는 욕실이 있어서 그게 더 편하긴 하겠지만요. 그냥.”
영웅은 힘 빠진 소리로 웃더니 잔을 내려놓았다. 크흠.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했다.
“그냥, 물어봤어요.”
“네. 생각해볼게요.”
“그나저나. 와인 마시기로 한 거예요? 한 잔 더 할래요?”
그렇게 묻는 영웅은 이미 병을 손에 들고 있었다. 채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남아있지 않던 와인은 식사를 하는 동안 모두 비워졌다.
식탁을 정리한 뒤에 두 사람은 소파에 앉지 않았다. 천천히 식사하는 동안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기 때문이다.
끝방으로 향하는 복도에 서서 영웅은 채언의 허리를 끌어안고 목에 입을 맞췄다. 같은 집에 사는데 마치 멀리 가는 애인을 배웅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볼에 뽀뽀를 해줄 줄 알았는데. 목에 와 닿는 감각에 채언은 간지러움을 느꼈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혹시 자다가 몸이 안 좋아지면, 저한테 전화하세요. 문자 보내셔도 돼요.”
영웅은 채언의 목에 입술을 대고 웃었다.
“나는 진짜로 전화할 거예요.”
“네. 진짜로.”
채언은 영웅의 어깨너머, 닫혀있는 방문을 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전화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방금은 전화하라고 했으면서.”
“안 아프셨으면 해서요.”
그 말에 영웅은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한숨을 쉬었다. 팔에 힘을 푼 채언과 달리, 그의 허리를 끌어안은 영웅의 팔에는 힘이 들어갔다.
“내가 방을 옮기는 게 낫겠어요.”
집에서 제일 큰 방을 버리겠다는 영웅의 말에 채언은 작게 웃었다. 와인을 마셔서 기분 좋게 취기가 오른 데다 다정한 투정을 듣자 노곤노곤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눈을 비비는 채언의 움직임을 느낀 영웅은 안고 있던 허리를 놓아주었다.
“그럼, 잘 자요.”
“네. 안녕히 주무세요.”
채언이 먼저 불 켜진 복도를 걸어 방문 앞으로 가는 동안, 영웅은 팔짱을 낀 채 벽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문손잡이를 잡은 채언이 뒤돌아 손을 흔들자 영웅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하아.”
채언의 방문이 닫히자 영웅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발걸음에 힘을 주어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샤워를 하고, 잘 때 입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채언은 침대 안으로 들어가려다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핸드폰을 발견했다.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다가 충전기 케이블을 연결했다. 잠시 후 화면에 불이 들어왔지만, 울리는 알림 소리는 없었다.
핸드폰이 꺼진 동안 아무에게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안심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복잡한 표정을 지은 채언은 침대 위로 올라가 누웠다. 폭신한 베개에 머리를 기댄 뒤 이불을 목 아래까지 끌어올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슬슬 잠에 빠져들려는 찰나였다.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려서, 채언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화면에 불이 들어온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여보세요.”
-채언 씨. 자요?
“아뇨. 아직.”
영웅의 목소리를 듣던 채언은 꾸벅 감기려던 눈을 번쩍 떴다.
“어디 안 좋으세요?”
-그건 아닌데.
“그럼 다행이고요. 무슨 일이세요?”
-아무래도 안 되겠어서요.
“뭐가요?”
채언은 들려올 뒷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핸드폰을 귀에 대고 기다려도. 그다음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여보세요?”
귀에서 핸드폰을 뗀 채언은 화면을 확인했다. 통화 시간이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전화가 끊긴 것은 아니었다.
“여보세요.”
다시 물었지만 여전히 들려오는 소리가 없었다.
“뭐지. 고장 난 건가.”
핸드폰이 오래되어 갑자기 스피커가 망가진 건가 했다. 채언은 전화를 끊었다. 다시 그에게 전화를 걸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말하려고 했다.
똑똑.
통화 목록을 열어서 영웅의 번호를 누르려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문이 벌컥 열리고 굳은 표정의 영웅이 들어왔다. 갑자기 소리가 안 들려서 걱정을 했나 보다. 채언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갑자기 핸드폰에서 소리가 안 들려서요. 제가 다시 걸려고.”
“채언 씨. 베개 들어요.”
“네? 베개는 갑자기 왜요?”
그렇게 물으면서도 채언은 고분고분 영웅의 말을 따랐다. 뒤로 돌아 베개를 잡아 드는 순간, 몸이 위로 떴다. 영웅이 사용하는 바디워시 향기가 짙게 풍겨왔다.
“어어?”
채언을 들어 올린 영웅은 그대로 활짝 열린 방문을 나갔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너무 멀잖아요.”
순식간에 영웅의 어깨 위로 몸이 걸쳐진 채언은 당황해서 영웅의 옷을 잡느라 베개를 놓쳤다. 철퍽! 소리를 내며 떨어진 베개가 복도에 덩그러니 놓인 채 멀어졌다.
“어디, 어디 가세요?”
그럴 확률은 낮았지만 혹시나 그가 자신을 집어 던질까 봐 채언은 영웅의 옷을 꼭 붙잡고 있었다. 지난번에도 그렇고, 어떻게 성인 남자를 이렇게 훌쩍 들어 올리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영웅의 빠른 걸음 탓에 채언의 눈앞으로 보이는 것들이 휙휙 지나갔다. 머리가 어지러워 눈을 꼭 감아야 했다.
복도를 지나, 거실을 지나, 다시 짧은 복도를 지나쳤다.
마침내 두 사람이 들어온 곳은 영웅의 침실이었다.
눈을 감고 있던 채언은 이번에는 몸이 뒤로 기우는 느낌에 영웅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등에 폭신한 것이 닿고 나서야 감고 있던 눈을 한쪽씩 차례로 떴다.
“오늘은 여기서 자는 거로 해요.”
채언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암막 커튼이 반만 쳐진, 낯설지만 익숙한 곳이었다. 조명이 어둡게 조절되어 있어서 가까이 있는 영웅의 눈이 평소보다 짙어 보였다. 초록색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던 채언은 자신이 그를 너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눈을 돌렸다.
“저… 베개. 떨어트렸어요.”
“내 팔 베고 자요.”
침대로 올라온 영웅은 정말로 팔 한쪽을 채언에게 내어준 뒤, 만족스러운 얼굴로 눈을 감았다.
엄청나게 폭신하고 보드라운 침구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채언은 잠이 오지 않았다. 양을 세어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목 아래와 허리 위로 둘러진 팔을 의식하느라 온몸이 긴장되었다. 시계 초침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방 안이었다.
머리 위에서 들리는 영웅의 숨소리를 듣고 있던 채언은 그 소리에 맞춰 숨을 쉬어보려고 몇 번이나 노력했다. 전에는 여기서 어떻게 잠들었지? 평범한 숨소리를 따라 해보아도 평소보다 빨리 뛰는 심장을 천천히 뛰게 할 수는 없었다.
채언은 침을 삼켰다가, 꼴깍 넘기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는 것 같아서 잠시 숨을 멈췄다.
숨을 참았다가 쉬자 숨결이 아까보다 더 거칠어졌다. 조용히 미간을 찌푸린 채언은 빠르게 뛰는 심장을 들킬까 봐, 영웅과 자신의 몸 사이에 팔을 올려 중간에 공간을 만들었다. 손등에 닿는 영웅의 가슴은 따듯했다. 그의 심장도 그다지 느린 속도로 뛰는 것은 아닌 듯했다. 하지만 영웅은 평소에도 이것과 비슷했으니까. 이상할 건 없었다.
공간이 조금 생기자 그래도 마음이 편해졌다. 긴장을 풀고 눈을 감은 채언은 다시 속으로 양을 세기 시작했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머릿속에서 뛰어다니는 양이 백팔십 마리쯤 되었을 때, 채언은 자신이 잠들지 못하는 이유를 알아챘다. 이불 안이 너무 더웠다. 요즘 날이 더워지고 있는데 한 이불 속에 다른 사람과 같이 누워있으니 체온까지 전달되어 더 더운 듯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건지, 영웅의 몸은 너무 뜨끈뜨끈했다.
한참이나 뜬눈으로 시간을 보내던 채언은 살짝 눈을 들어 영웅의 얼굴을 확인했다.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을 보다가, 몸을 돌리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이불을 걷어내야지, 하고 생각했다.
채언은 조심스레 반을 돌아 천장을 바라보며 누웠다가, 다시 천천히 몸을 반쯤 돌렸다. 영웅의 잠옷과 자신의 옷, 그리고 이불이 쓸리는 소리가 뒤섞였다. 하지만 영웅을 등지고 눕는 것에는 성공한 듯했다.
“후우.”
조심히 한숨을 내쉬는데 뒤에서 풉, 웃는 소리가 들렸다. 곧바로 영웅의 손이 채언의 배를 스쳐 옆구리까지 가더니, 갈고리로 당기듯 몸을 끌어당겼다.
“앗!”
무의식중에 목소리를 낸 채언은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잠이 안 와요?”
가라앉은 영웅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낮게 들렸다. 영어를 할 때보다 더. 입을 가린 손을 내린 채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까는 졸려 했잖아요.”
“졸려요.”
“그런데. 왜 안 자요?”
“그냥.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등 뒤에서 한숨 쉬듯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와서 채언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괜히 자세를 바꾸는 바람에 손을 올려 중간을 띄워두던 공간조차 사라졌다.
영웅의 팔이 품 안의 몸을 더 끌어당겼다. 채언의 옷자락이 살짝 들려, 영웅의 손에 맨살이 스쳤다. 빈틈없이 맞닿은 등과 가슴으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가 쿵쾅 뛰고 있었다.
그도 더운 걸까. 아까는 자신의 숨소리만 의식되었는데, 이제는 뒤에서 들려오는 숨소리도 의식되었다. 채언은 입술이 마를 것 같아서 천천히 침을 삼켰다. 목울대를 움직이는 소리 정도는 이제 다른 소리에 가려질 것 같았다.
“깊게.”
“…네?”
“잠들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한데.”
살짝 갈라진 영웅의 목소리가 귀 뒤에서 들렸다. 이런 상태로 아침까지 버티는 것보다 빨리 잠드는 편이 나았다. 채언은 차마 뒤돌아보지 못하고 시트 위를 손톱으로 살짝 긁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어떻게요?”
팔베개를 해주던 영웅의 팔이 천천히 안쪽으로 굽었다. 커다란 손이 채언의 쇄골 위를 가로질러 어깨 위를 잡았다.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이 더 좁아지며 채언은 영웅의 몸에 거의 감싸지듯 안겼다.
등에 닿아 울리는 그의 심장 박동에 채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심장이 아까보다 더 빨리 뛰고 있었다. 거칠어진 영웅의 숨소리와 달리 어깨를 매만지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뭘 하려는 거지? 채언이 손을 들어 영웅의 팔뚝을 쓸어내리자 커다란 손에 어깨가 꽉 쥐어졌다.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동시에 채언이 헉, 숨을 들이켰다.
“…아!”
배 아래로 천천히 내려오던 영웅의 다른 손은 채언의 바지 속에 들어가 있었다. 얇은 속옷 한 장을 두고 한 번도 남에게 닿아 본 적 없던 곳에 뜨거운 손바닥이 문질러졌다.
“흐, 읏.”
어쩔 수 없이 복부와 허벅지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잠시, 잠시만요. 이건!”
눈이 감기기는커녕 잠이 다 달아나버렸다. 채언은 쇄골을 가로지른 영웅의 팔을 다급히 붙잡았다.
바르작거리는 몸을 더 힘을 줘 껴안은 영웅은 검은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천천히 속옷 위를 문지르던 손에 좀 더 선명한 양감이 실리기 시작했다.
“흐윽….”
자꾸만 아래쪽에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채언의 등이 앞으로 굽었다. 몸을 말면서 자신을 안고 있는 영웅의 팔을 떼어내려 했다. 손가락에는 바짝 힘이 들어갔지만 밀어내는 손길은 힘없이 미끄러졌다. 짧은 손톱에 살 긁히는 소리가 들려,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채언의 미약한 버둥거림에 자세가 틀어지며 두 사람의 등과 가슴이 떨어지고 하반신이 밀착되었다. 등 뒤에 단단히 버티고 있던 영웅의 몸이 움찔했다. 채언의 것을 손에 쥐고 문지르던 손길이 멈췄다.
채언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쉬는데 자꾸만 몸이 떨렸다. 이제라도 영웅의 손이 움직이던 것을 멈춰 다행이었다.
“저, 저는. 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채언의 입에서는 더듬더듬 끊어진 말소리가 나왔다. 머릿속이 새하얬다. 방으로 돌아가겠다고 할까? 바지 속에서 손을 빼달라고 해야 할까? 뭐라고 말해야 하지. 그저 숨을 몰아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아! 으응….”
그 순간 영웅의 손이 채언의 것을 위로 주욱 훑어 올렸다. 몇 번 움직이던 손은 다리 사이 더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더니 기둥 아래 음낭까지 쥐어 만졌다. 그리고 손가락을 세워 회음부를 문지르는 것에 채언의 허리가 튀었다.
채언의 상체가 더 굽어지자 두 사람의 하체는 더욱 밀착되었다. 영웅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다시 손바닥을 펴서 다리 사이 깊숙한 곳에서부터 위로 주욱 훑어 올라왔다. 그대로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속옷 밴드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하아. 이건, 이러면. 흐읏…!”
예민하고 여린 살갗을 완전히 감싸 쥔 손 때문에 채언은 발끝을 세워 침대 시트를 긁어내렸다. 속옷 위로는 천천히 문지르던 손길이 천 안으로 들어와서는 거침없어졌다. 동그랗게 고리를 만든 손에 밀착된 피부가 쓸리며 아까보다 더한 쾌감이 채언의 몸을 타고 올랐다. 위아래로 흔드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복부와 허벅지에 힘이 들어간 채언은 겨우 숨을 헐떡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움직이는 영웅의 팔이 옆구리를 계속해서 스쳤다. 그러는 바람에 채언의 상의가 점점 위로 올라왔다. 드러난 허리와 영웅의 팔이 마찰했다.
“하아, 채언 씨.”
등에 붙은 영웅의 가슴에서 펄떡거리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채언은 얼굴까지 열이 올랐다. 몸이 달아올라서 내쉬는 숨이 곧바로 습기처럼 퍼질 것 같았다.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듯 발을 움직이는데 발바닥에 단단한 것이 닿았다. 영웅의 발등에 채언의 발끝이 닿은 것이었다.
그대로 한쪽 무릎을 든 영웅에 의해 채언의 다리도 직각으로 올라갔다. 살짝 비껴간 발등과 발끝이 스치고, 영웅의 한쪽 다리는 채언의 다리 사이로 들어갔다. 몸 위로 이불이 덮여있어, 두 사람이 움직이는 소리는 천에 슥슥 문질러지며 묻혔다.
채언은 벌어진 다리 사이를 좁히고 싶었지만 사이에 낀 단단한 허벅지가 그것을 방해했다.
“흐읍. 읏, 흐으….”
채언이 몸에 힘을 주면 그것이 영웅의 몸으로 그대로 전달되었다. 근육이 움직이는 모양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채언의 입술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없었다. 코로 급히 숨을 마시는 소리와 목 안쪽에서 울듯이 떨리는 소리만 영웅의 귓가에 닿았다.
채언의 뒷목에 코를 묻고 얼굴을 비비던 영웅은 달아오르기 시작한 몸의 짙어진 체향을 깊숙이 들이마셨다.
<지금. 또 입술 물고 있죠.>
영웅은 채언의 어깨를 쥐고 있던 손을 들어 채언의 턱을 잡고 양쪽 볼을 살짝 눌렀다. 볼을 누르자 채언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뜨거운 숨이 영웅의 손가락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 틈이 다시 닫히지 않게 영웅은 검지를 들었다. 말랑한 입술 사이에 손가락을 물려준 뒤, 속옷 안쪽에 집어넣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그의 손가락에 이를 대지 않으려고 채언은 턱에 힘을 주고 버텼다. 영웅은 바짝 힘이 들어간 턱 근육이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그냥, 내 손가락 물어요.>
“…흐읏, 흑.”
영웅은 일부러 영어로 말했다. 낮게 갈리는 그의 목소리에 채언은 손가락을 물고 말았다.
“…으, 응.”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숙이느라 손가락은 이에 긁히며 입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말랑하고 질척한 혀가 닿는 느낌에 영웅은 채언의 입안에 다른 것을 삽입이라도 한 듯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귓가로 닿아오는 숨결에 채언은 몸을 더 움츠렸다.
영웅의 손가락이 하나 더 입안으로 들어왔다. 천천히, 느리게. 마디가 선명한 굵은 손가락이 혀 위를 눌렀다.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혀가 눌린 채언은 침을 삼키지 못해 목구멍을 올각거렸다. 연한 내부의 움직임에 매끈한 혀 위를 문지르는 손가락의 힘이 더 세졌다. 미처 삼키지 못한 침이 손가락을 타고 흘렀다. 입술 옆으로 흐르는 것도 닦지 못했다.
영웅의 양손 모두가 젖어가기 시작했다. 속옷 안쪽으로 채언의 성기를 쥐고 흔들자 구멍에서 몽글거리며 솟아오른 액체가 흘러내리는 일이 잦아졌다. 기둥을 잡고 움직이던 손가락 고리가 위로 올라갔다. 손바닥을 펼쳐 귀두 끝을 둥글게 굴리자, 다른 자극에 채언의 아랫배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다시 위아래로. 다리 사이로 더 깊숙이. 이불을 스치는 소리 중간중간. 찔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흐윽! 아, 읏.”
검지를 세운 영웅이 요도구를 누르듯 문지르자, 다물리지 못한 채언의 입술 사이에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눈앞에서 불꽃이 터지는 기분이었다. 한껏 예민해진 몸은 혀를 문지르는 손길에도 심하게 반응했다.
이러다 정말 정신을 못 차리고 그의 손에 사정할 것 같아서 채언은 눈가를 찌푸렸다. 단단한 영웅의 복근을 손바닥으로 밀어내려 했다. 아까 그의 팔을 떼어내려던 것보다 손에 더 힘을 주었다. 땀에 젖은 손바닥으로 영웅을 밀어내자, 주욱 손이 미끄러지며 맞닿아 있던 하반신 사이에 공간이 생겼다.
“읏, 흐… 으.”
하지만 채언이 그의 몸을 밀어낸 만큼 영웅은 성기를 말아 쥔 손바닥에 힘을 풀었다. 둥글게 말려있던 틈이 더 벌어지며 성기가 안으로 쉽게 미끄러져 들어갔다. 흠칫 놀란 채언은 서둘러 복근을 밀어내던 손에 힘을 빼고 몸을 뒤로 물렸다. 때를 놓치지 않고 영웅은 손에 힘을 줘 공간을 좁혔다.
채언은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자꾸만 몸을 타고 오르는 쾌감에 머릿속에 불꽃이라도 터진 듯했다. 그를 벗어나려다 도리어 자위하듯 허리 짓을 해버린 셈이 되었다. 거기다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단단한 허벅지에 회음과 음낭이 문질러지며 더 큰 자극을 받아버렸다.
어쩔 수 없이 반응하는 몸에 호응하듯 영웅은 손을 위아래로 계속 움직였다. 채언의 입안이 그랬던 것처럼 영웅의 손바닥 안도 미끄럽고 축축해졌다.
“채언 씨. 최근에, 혼자 한 적 있어요?”
영웅은 채언의 침이 잔뜩 묻은 손가락을 그의 입안에서 빼내었다. 길에 이어진 실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흐으… 없, 없어요. 그런 적.”
낮에는 영웅이 집을 비우고, 밤에는 방과 방 사이가 멀어 한쪽에서 뭘 하든 소리가 잘 들리지는 않지만 채언은 이 집에 들어온 뒤로 자위를 한 적이 없었다. 짓궂게 그런 것을 물어오는 의도가 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난 있는데.”
영웅의 목소리에 한숨 같은 웃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네. 하아, 네에?”
그의 갑작스러운 비밀고백에 채언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다시 손가락이 입안을 밀고 들어왔다.
“우으….”
세게 아래를 잡고 문질러오는 손길에 채언의 발가락이 자꾸 곱아 들었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었다. 몸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채언의 눈가가 더욱 달아올랐다. 허벅지 사이에 힘을 주며, 저도 모르게 발을 차느라 아래 깔린 영웅의 다리를 문지르는 셈이 되었다.
채언은 손목 안쪽 살이 드러나도록 한쪽 손을 뒤로 꺾었다. 뒤에 있는 영웅의 어깨에 손가락이 닿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겨우 그의 옷자락을 잡자. 입안에 들어있던 손가락이 도톰한 입술을 퉁 스치며 빠져나왔다. 채언의 눈에, 입술과 손가락에 연결된 침이 질척하게 늘어나는 것이 보였다. 다리 사이를 띄우던 영웅의 단단한 허벅지마저 빠져나갔다.
옆으로 누워있던 채언의 몸이 반쯤 내리눌렸다. 침대에 등을 붙인 채언은 가슴을 들썩이며 풀린 눈으로 헐떡였다. 흐린 눈앞에 짙은 초록색 눈동자가 보였다. 숨을 다시 들이마시려는 찰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눈이 가까워졌다. 공기를 마시지 못하고 입술이 가로막혔다.
“으, 응.”
대신 코로 숨을 깊게 마시자 채언의 갈비뼈와 가슴이 위로 솟았다. 병실에서의 다정했던 입맞춤보다 훨씬 거칠었다. 추웁, 춥, 초옥. 젖어있던 입술에 마른 입술이 달라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질척했다.
입술이 붙고 나서야 혀가 가르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입술 밖에서 두 사람의 혀가 얽혔다 떨어지기도 했다. 자석으로 들어 올리는 듯 자꾸만 채언의 목이 둥글게 떴다. 영웅은 자신의 얼굴을 따라오려는 채언의 입술을 보고 부드럽게 입을 벌려주다가도, 깨물 듯 내리눌렀다.
정해진 패턴 없이 서로를 먹어치우듯 입을 맞췄다. 쿠퍼액이 흘러나온 성기를 쥔 영웅의 손안이 끈적해졌다. 로션이나 젤을 바르지 않았음에도 질척했다. 단단해진 살덩이를 문지르는 손을 더 빠르게 움직이며 영웅은 채언의 목구멍 가까이 혀를 밀어 넣었다. 숨을 쉬지도 못하고 쾌감을 느낀 채언이 허리를 들썩였다.
“으음… 음! 으응….”
언제부턴가 영웅의 어깨를 끌어안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다리를 세운 채언의 무릎이 영웅의 옆구리에 닿았다. 정말로 놓아달라는 듯 몸부림을 치는 것에도, 영웅은 봐주지 않고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빠르고 짧게 후욱 훅, 채언이 코로 숨을 마셨다. 아랫배가 경련하듯 움찔거렸다. 마침내 허벅지에 선이 생길 정도로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윽, 흣…!”
영웅의 손바닥에 뜨거운 정액이 사출되었다. 손바닥이 아까보다 끈적해졌음을 알면서도 영웅은 채언의 성기를 훑어올리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대신 속도를 느릿하게 즈윽, 즈윽, 위아래로 움직였다. 정점을 찍은 쾌감에 이어 자극적인 감각이었다. 밭은 숨을 쉬는 채언의 몸이 간헐적으로 떨려왔다.
영웅은 자신의 손안에 사출된 채언의 정액을 기둥 곳곳에 펴 바른 다음에야 팔을 움직이는 것을 멈췄다.
“하아. 하아….”
움찔거리며 힘이 들어갔던 채언의 몸에서 천천히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얽히던 혀에도 힘이 빠졌다. 쪼옥, 소리를 내며 떨어진 입술을 바라보는 영웅의 목덜미가 맥박 때문에 펄떡거렸다. 붉게 젖어 부어오른 채언의 입술 사이로 고르지 못한 숨이 터져 나왔다. 풀린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채언, 후우… 채언 씨.”
눈 밑이 붉게 달아오른 채언을 내려다보며 영웅은 하반신을 밀착했다.
땀이 난 이마에 검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있었다. 뜨거운 몸이 서로 밀착된 이불 속은 축축하고 후덥지근했다. 채언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네, 대답하려 했지만. 그 짧은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온몸에 힘이 빠진 상태였다. 아까는 밀어내려 했던 영웅의 몸에 힘없이 머리를 기댔다.
아까는 영웅이 사기를 쳤다고 생각했는데. 탈력감과 함께 잠이 몰려들었다. 눈을 뜨려고 노력해보아도 자꾸만 눈꺼풀이 감겼다. 지금 눈을 감으면 정말로 깊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늘게 뜨고 있던 채언의 눈이 긴 숨소리와 함께 천천히 감겼다.
“채, 어? 채언 씨. 잠깐만요.”
팔꿈치를 세워 자신의 몸무게를 버티고 있던 영웅은 잠든 채언을 보고 당황했다. 여전히 속옷 안에 들어있던 손을 빼어 채언의 볼을 두드렸다.
“채언 씨. 일어나 봐요. 잠깐만.”
진하게 묻어있던 정액이 색색 숨을 내쉬며 잠든 얼굴에 묻었다. 영웅은 황급히 손을 뒤로 물렸지만 이미 묻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깊게 잠들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했지. 혼자 잠들게 해주겠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
“하아.”
몸을 일으켜 앉은 영웅은 한숨을 내쉬었다. 허벅지 위에 털썩 손을 내려놓자, 손등에 발기한 성기가 닿았다.
<아, 이런.>
고개가 삐뚜름히 틀어졌다. 고른 숨소리를 듣자 하니 채언은 깊게 잠든 듯했다. 어깨를 흔들어도 깰 것 같지 않았다.
여전히 발그레한 눈가와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을 내려다보던 영웅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바지 속이 점점 더 불편해지고 있었다. 후우, 후우. 심호흡해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슬쩍 눈을 뜬 그는 다시 채언을 내려다보았다.
“…으음….”
정면을 보고 누워있던 얼굴이 살짝 틀어지며, 볼에 묻은 정액에 조명 불빛이 비쳐 번들거렸다.
영웅은 흡, 숨을 참고 침을 꿀꺽 삼켰다. 자연스럽게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손으로 눈길이 향했다. 자신의 손을 진득하게 적신 것은 저 볼에 묻은 것과 같은 것이었다.
영웅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을 보다가 채언을 보았다.
“채언 씨.”
대답 대신 색색 내쉬는 숨소리만 들려왔다.
“덥죠?”
아까부터 발그레한 얼굴도 그렇고, 땀에 젖은 이마가 식지 않는 것으로 보아 채언은 많이 더운 듯했다. 영웅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 뒤, 한쪽 손을 뻗어 채언의 몸 위에 덮인 이불을 걷어냈다.
바지를 내리지 않고 그 안으로 손을 넣었던 터라 하의는 살짝 내려간 것 말고는 얌전했다. 다만 팔에 스치며 올라간 상의는 위로 말려 올라가 허리가 드러나 있었다. 저 피부의 촉감을 알고 있었다. 일부러 팔뚝 안쪽에 대고 더 스쳤으니까.
양쪽 다리를 벌려 채언의 몸 위로 올라간 영웅은 아까 채언의 입속에 집어넣었던 손가락으로 자신의 상의 끝자락을 잡았다. 천천히 옷을 위로 들어 올리자 맨 가슴이 드러났다. 옷자락을 입에 물고 코로 숨을 쉬자, 영웅의 근육 잡힌 가슴이 위로 솟았다 내려왔다.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든 얼굴을 보고 자위하는 것이 벌써 두 번째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제는 얼굴을 보고 나서, 오늘은 얼굴을 보면서였지만.
1인실에 딸린 욕실에서 손장난을 했던 것이, 병원이라며 자신을 나무라던 진원에게 영웅이 제대로 변명할 수 없었던 이유였다.
영웅은 자고 있는 사람에게 무게가 실리지 않게 몸을 세운 뒤, 잠옷 상의를 올렸던 손으로 침대를 짚었다. 채언은 겨드랑이 아래, 옆구리와 팔 사이를 파고드는 손에도 깨지 않고 잠들어 있었다.
자신의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넣은 영웅은 발기해서 허벅지 아래로 길게 뻗어있던 것을 손에 쥐어 꺼냈다. 바지와 속옷을 조금 더 아래로 내려 골반 쪽에 걸쳐두자, 속옷 밖으로 나온 것이 꺼떡거렸다.
영웅은 다시 그것을 쥐어 잡고 천천히 아래서 위로 훑었다. 채언의 정액이 묻어 있던 손이었다. 손바닥에 묻어있던 것은 영웅의 성기 곳곳에 펴 발라졌다. 천천히 기둥 전체에 바른 뒤 귀두 위를 덮듯이 문질렀다. 남의 정액이 잔뜩 발린 성기가 어두운 불빛에도 번들거렸다. 입안의 천을 꽉 물며 영웅은 적극적으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점도 높은 액체가 묻은 손과 성기가 마찰하며 처덕처덕 소리가 났다. 질척한 소리에 예민한 귓가가 자극되었다. 단단히 버티고 선 허벅지 근육이 긴장될 정도였다.
순하게 잠든 채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영웅의 꽉 짜인 복근에 힘이 들어갔다. 갈라지는 근육의 선만큼이나 선명하게 손안의 두툼한 기둥에도 핏줄이 서기 시작했다.
열일곱 살도 아니고. 좋아하는 상대가 앞에 있는데 자위나 하고 있다니. 옷자락을 입에 문 영웅의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연애를 할 때 육체적으로 담백한 관계를 가지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안아주면 순진하게 얼굴만 기대오는 상대는 처음이라서, 오랜만에 끌린 사람의 성별이 남자인 것은 처음이라, 조심스럽게 다가간 것이었다.
영웅은 상체를 좀 더 숙여 채언 가까이 다가갔다. 이불을 걷어주었지만 깊게 잠들어 따끈하게 오른 체온이 열기처럼 느껴졌다. 영웅은 참지 못하고 잠든 이의 얼굴 아래, 목 가까이 코를 가져다 댔다. 옷을 물고 있어 채언의 목을 물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었다.
영웅은 코로 숨을 깊게 마시며, 손을 움직이는 대신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까 채언이 자신의 손에 대고 허리를 움직였던 것처럼. 자위하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삽입하듯 허리를 움직였다.
“…흐읏.”
잇새로 뜨거운 숨이 새어 나왔다. 채언의 목선에 코를 비비던 영웅은 고개 각도를 틀어 검은 머리카락과 말랑한 볼에 얼굴을 비볐다. 정액이 묻어있던 채언의 볼과 영웅의 볼이 맞닿았다 떨어졌다. 마르지 않은 정액이 두 사람의 얼굴 사이로 끈적하게 늘어졌다.
영웅의 손은 큰 편이었지만, 길고 두툼한 성기를 위아래로 훑는 데는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터억, 터억. 아래를 치고 올라오는 소리는 쿠퍼액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느릿했다. 막 솟아올라 흘러내리는 것은 영웅의 손안에서 마찰하며, 이미 펴 발라진 채언의 정액과 섞였다.
간혹 힘이 들어간 다리가 움찔하면 발끝이 아래쪽에 있는 이불을 스쳤다. 스윽 쓱. 천이 구겨지는 소리가 아까 채언의 것을 만져줄 때 들리던 소리 같아서 영웅은 허리를 움찔거렸다. 흥분이 고조될수록, 쾌감이 심해질수록 훤히 드러난 가슴이 크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깊게 숨을 마시고 뱉을 때마다 거친 숨소리가 났다. 손을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호흡도 짧아지기 시작했다. 허벅지가 단단해지고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모양 좋게 잡혀 있던 복근이 꽉 조여졌다. 손이 움직일 때마다 문신이 그려진 골반과 옆구리에 팔이 스치며 슥슥 소리가 났다.
“…흐으… 흐, 읏.”
잇새로 새어 나오는 숨에 낮게 갈린 목소리가 섞이자.
“으음….”
목소리에 반응하듯 채언의 몸이 움직였다. 천장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던 몸이 옆으로 살짝 세워지며 두 사람의 다리가 스쳤다. 단단한 허벅지 안쪽을 스치는 느낌에 영웅은 어금니까지 꽉 물었다. 초록색 눈동자가 욕망으로 인해 짙어졌다. 마른 입안에는 목 뒤로 넘길 것이 없었지만, 하반신에서 타고 오른 쾌감을 삼키듯 꿀꺽 목울대를 울렸다. 마른침을 삼키자 계속 목 안이 가려웠다. 이를 물고 마른기침을 토해낸 영웅은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이윽고 손잡이 없는 컵을 잡듯, 엄지와 나머지 손가락 사이로 잡아 문지르던 것을, 검지와 중지 사이를 활짝 벌려 흔들었다. 손가락 사이가 팽팽하게 벌어졌지만, 안쪽의 뜨거운 살 기둥은 꽉 눌려 자극이 더해졌다. 쿠퍼액이 몽글몽글 솟아오른 머리 부분을 손바닥에 문지르다가, 다시 기둥을 즈윽, 즈윽, 흔들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성기 전체가 축축했다.
손안이 뜨겁다는 것을 느낀 영웅의 머릿속에 조금 전 채언과 혀를 섞던 것이 떠올랐다. 채언의 정액과 자신이 흘린 것이 섞이는 소리가, 키스할 때 타액이 섞이는 소리와 비슷했다. 풀린 눈으로 입술을 벌리고 따라오던 얼굴을 생각하자, 전기가 오르듯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쾌감이 퍼졌다.
“…큿.”
영웅은 갑작스레 사출된 정액을 막아보려 손바닥을 감싸 쥐었지만 손가락 사이를 타고 흐른 것은 아래로 뚜욱, 뚝, 떨어졌다.
“하아, 하아….”
상기된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래를 손에 쥔 채 영웅이 몸을 세우자. 손을 타고 흐른 정액이 채언의 바지 위로 실을 그리듯 늘어졌다.
턱에 힘을 빼고 입술을 벌리자 물려있던 잠옷 상의가 스르륵 내려왔다. 천천히 옷으로 덮인 가슴이 가쁜 숨을 쉬느라 오르내렸다. 손에서도 힘을 빼자, 겹쳐진 속옷과 바지 밴드 밖으로 번들거리는 성기가 투욱 떨어졌다, 사정 후에도 묵직한 살덩이 끝에서 늘어진 정액이 영웅의 바지 위에 흔적을 남겼다.
영웅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사이까지 흥건히 적신 유백색 액체가 보였다. 그리고 손 아래 채언의 몸, 옷이 말려 올라간 허리에 점점이 정액이 떨어져 있었다.
<…내가, 미쳤나.>
잠자리를 함께한 상대의 몸에 정액을 흩뿌리는 짓은 포르노 배우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잠든 사람의 몸 위에서 자위한 것보다 콘돔이나 티슈 안에 얌전히 사출하지 못했다는 것에 자책감이 든 영웅은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꽉 감았다. 팔을 들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어깨로 땀을 닦았다. 방 안이 너무 더웠다.
집에서 제일 큰 방인 영웅의 침실에는 욕조가 있는 욕실이 딸려있었지만, 영웅은 그곳에서 씻지 않고 다른 욕실에서 샤워를 하기로 했다. 혹시 방 안의 욕실에서 샤워를 하다가 물소리 때문에 채언이 깰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매너 없는 짓을 저질렀다며 터덜터덜 방 밖으로 나간 영웅은 복도 불도 켜지 않고 걸었다. 주인 없는 방에 들어가 씻는 것도 좀 그러니, 중간 방 옆에 있는 손님용 화장실 샤워기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걸어가던 도중 툭, 말랑한 무언가가 발에 챘다.
아까 채언이 떨어트린 베개였다. 허리를 숙여 베개를 잡은 영웅은 그 상태로 멈칫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는 말랑한 베개를 한 손에 쥔 채 얼굴을 굳혔다. 베개에서 채언이 사용하는 샴푸 향기가 폴폴 풍겼다. 한 번 빼낸 것으로는 모자랐던 하반신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아니야. 안 돼.>
영웅은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지만 발은 이미 채언의 방 쪽으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다음 날 아침. 편안한 침대 위에서 자연스럽게 눈이 떠진 채언은 몸에 닿는 포근한 느낌에 기분 좋게 미소 짓다가 번쩍 눈을 떴다. 옆으로 누운 상태 그대로, 눈만 깜빡거렸다. 이제는 낯설게 느껴지지도 않는 영웅의 방 안이었다.
좋아하는 향기와 엄청나게 폭신한 침구의 느낌. 몸은 편안했지만, 눈썹이 움찔했다. 채언은 가위에 눌린 사람처럼 몸은 움직이지 않고 손가락만 살짝 까딱해보았다. 침대 위에 손바닥을 대고 누워있었던 터라 손톱에 시트가 긁혔다. 뭔가 익숙한데….
채언은 눈을 가늘게 좁히며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려는 기억의 꼬리를 잡아챘다. 그 순간 어젯밤이 떠올랐다. 갑자기 방에 들어온 영웅의 어깨 위로 들쳐 올려져 그의 침실까지 들어왔다. 함께 침대 위에 누웠는데. 그랬는데…….
가늘게 좁혀져 있던 채언의 눈이 동그래졌다.
“…허!”
시트를 긁던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소리 없이 놀란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심장이 어젯밤처럼 미친 듯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옆에 있을까? 부끄러움에 아랫입술을 꼭 깨문 채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아.”
예상과 달리 영웅은 옆자리에 없었다. 부끄럽고 설레서 뛰던 심장이 다른 의미를 가지고 뛰기 시작했다.
왜 없지. 혹시 어젯밤에 뭔가 실망한 걸까. 다시는 보기 싫어진 거 아닐까. 아니면, 혹시 어젯밤 일은 자신이 꾼 꿈이고, 그러니까 자다가 자신이 이상한 소리를 내서 불쾌해졌다든가.
영웅이 없어 허전해진 채언의 마음에 순식간에 불안이 들어찼다. 일요일이라 출근을 한 것도 아닐 테다.
축 처진 눈을 굴리며 채언은 몸 위에 덮인 이불을 슬쩍 걷어 내렸다. 분명 바지를 입고 있는데, 이 어색한 느낌은 뭘까 싶었다. 이불 안으로 보이는 바지가 낯익었다. 발등까지 내려온 바지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바지 천 느낌이 평소보다 적나라하게 살에 닿아오는 기분이었다.
상체를 일으킨 채언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속옷은 어디로 간 거지? 아니, 속옷 없이 바지만 입혀준 사람은 어디 간 거지? 영웅이 바지를 새로 입혀준 걸 보면 자신이 뭘 혼자 한 게 아니라, 그가 해준 게 맞는 것 같았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채언은 핑글핑글 눈앞이 돌았다. 그래서 심호흡을 하며 일단 마음을 진정시키기로 했다. 후우, 후. 겨우 평소의 호흡을 따라가는데 어딘가에서 낑낑거리며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마를 짚은 손을 내린 채언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뭐지.”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여전히 들려오는 소리에 채언은 침대 위를 무릎걸음으로 걸었다. 속옷 없는 맨살에 바지가 스치는 느낌 때문에 침대 끝까지 가기 전에 눈을 한 번 질끈 감아야 했다. 그래도 채언은 꿋꿋이 네발로 걸어 반대편 침대 끝으로 가서 바닥을 보았다.
“댚….”
채언은 반갑게 대표님, 하고 부르려던 입을 다물었다.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자다가 떨어진 건가? 채언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영웅은 맨바닥에 누워 불편하게 몸을 말고 있었다. 이불도 베개도 없었다.
채언은 몸을 숙여 침대 아래로 손을 뻗었다. 침을 꿀꺽 삼킨 뒤 손끝으로 영웅의 어깨를 흔들었다. 손끝에 닿는 그의 몸이 뜨끈했다.
“저기.”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끙끙거리는 것을 보아하니 가위에 눌린 듯했다. 왜 바닥에 누워서 고통받고 있는 건지. 채언은 조금 더 힘 있게 영웅의 몸을 흔들었다.
“왜 여기… 바닥에 계세요.”
“…으으.”
“침대 위로 올라오세요.”
“…으… 채….”
몸을 흔드는 손길에 굳었던 몸이 슬슬 풀리는지 잔뜩 긁힌 목소리로 영웅이 반응을 보였다. 감겨있던 눈이 가늘게 뜨였다.
침대 아래로 발을 뻗어 내려간 채언은 영웅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옆에 앉은 것뿐인데 뜨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영웅은 정말로 체온이 높은가 보다. 어제 이불 속에서 더위를 느낀 것은 그 때문이 맞는 듯했다.
채언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괜히 눈을 굴리다가 맨바닥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보일러를 켜지 않았기 때문에, 이불 속보다는 바닥 온도가 낮았다. 간밤에 더워서 바닥으로 내려온 걸까?
“채언 씨….”
“괜찮으세요?”
몽롱한지 끔뻑거리는 눈꺼풀 사이로 초록색 눈동자가 보이다 사라졌다.
“채언 씨… 나는.”
“네.”
채언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젯밤 일들이, 흐린 눈앞으로 스치던 것들이 자꾸 떠올라서, 무릎 위에 올린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하아.”
무슨 말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건지. 채언은 발그레해진 얼굴을 살짝 영웅 쪽으로 숙였다.
“네.”
채언이 가까이 오자 영웅은 힘없이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콜록. 마른기침을 한 뒤 입술을 열었다.
“난… 쓰레기예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영웅의 고개가 옆으로 툭 떨어졌다.
“네? 갑자기 무슨.”
묻는 말에 대답이 없었다. 뭔가 이상했다.
“괜찮으세요? 어디 안 좋은 거예요?”
당황한 채언은 영웅의 어깨를 잡고 아까보다 힘 있게 흔들었다.
이제 보니 영웅의 몸이 정말로 뜨끈뜨끈했다. 채언은 몸을 숙여 그의 몸을 껴안아 보았다. 안겼을 때 포근하던 평소의 느낌과 달랐다.
이상함을 감지한 채언은 양손을 들어 그의 이마와 자신의 이마에 각각 가져다대고 양손에 닿는 체온을 비교해보았다. 옅은 색의 머리카락이 스치는 이마는 열이 절절 끓고 있었다.
“대표님. 일어나보세요.”
채언은 영웅의 팔을 자신의 목 뒤로 두르고 그를 일으키려 노력했다. 술 취한 사람처럼 힘이 축 빠진 몸은 쉽게 들어 올리기 힘들었다. 영웅은 자신을 번쩍번쩍 들어 올렸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힘이 센 걸까. 채언은 목에 둘린 팔을 꽉 잡고 허리를 숙였다.
“응?”
침대 옆에 떨어져 있는 바지가 보였다. 어젯밤 잠들기 전 자신이 입고 있던 것이었다.
“…으으….”
머리가 어지러운지 영웅이 채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금방 한쪽 어깨가 뜨끈해지는 느낌에 채언은 다시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켰다.
겨우 영웅을 침대 위에 눕힌 채언은 욕실로 들어가 수건에 물을 적셨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숨이 가빴다. 택배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 무거운 짐을 옮기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때 채언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쌀포대를 옮기는 자신을 지켜보던 사람.
“쌀….”
그리고 침대 위에 누워있는 남자.
“…쌀?”
혹시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영원이 체력 테스트를 한 것은 아닐 테다. 채언은 머리를 젓고 수건의 물기를 짰다.
어쨌든 자신에게 영웅을 부축할만한 힘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차가운 물에 수건을 적셔 영웅의 이마에 올려놓은 채언은 서둘러 핸드폰을 찾았다. 주변 약국의 주말 영업시간을 검색해보았지만 문 연 곳이 없었다. 차를 타고 가야 하는 먼 곳에 영업 중인 약국이 있었지만 아픈 사람을 홀로 두고 다녀오기에는 마음이 불안했다. 손톱을 깨물던 채언은 기도하는 심정으로 구급상자를 꺼내왔다.
“아! 있다.”
상비약들 사이에는 해열제도 있었다. 무인도에서 지나가는 배를 찾은 사람처럼 채언의 얼굴이 밝아졌다.
얼른 물 한 잔을 받아와 영웅의 방으로 들어가던 채언은 발을 멈칫했다. 일어나자마자 빈속에 약을 먹으면 안 좋을 텐데.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을 식탁에 내려놓은 뒤, 부엌으로 들어가 얼음주머니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영웅은 오랜만에 가위에 눌려 고통받고 있었다. 형체를 알 수 없는 뜨거운 괴물이 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그것은 영웅의 팔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움켜잡아놓고 눈앞에 끔찍한 장면들을 펼쳐놓기까지 했다. 웃고 있던 친구들이 다른 사람들과 뒤섞여 쓰러져 있는 모습. 손을 흔들며 병실로 들어온 친구의 얼굴이 영정사진 속에 박제되는 모습. 피가 흐르다 얼어붙는 바닥. 끔찍한 광경이었다. 멀어지는 친구들의 이름을 불러 보려 해도 혀가 굳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눈앞의 장면들을 떨쳐내 보려 해도 감긴 눈꺼풀 안에서 눈을 굴리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때 차가운 것이 닿는 느낌에 몸이 흠칫 떨렸다. 뜨거운 열기에 갇혀 움직이지 않던 몸이 풀리는 것 같았다. 곧이어 다정한 손길이 볼을 쓰다듬어왔다. 영웅은 안도의 숨을 길게 쉬었다.
그 뒤로도 고통스러운 장면이 눈앞을 스칠 때면 어김없이 다정한 손길이 다가왔다. 끔찍한 비명에 움찔거릴 때면 듣기 좋은 목소리가 자신을 불러 주기도 했다.
식탁 의자를 가져와 영웅의 침대 옆에 앉은 채언은 얼음주머니를 올려놓은 이마가 너무 차가워지지 않게, 간혹 주머니를 들어 올려 영웅의 목 옆이나 가슴 위에 대주었다.
죽 만드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쌀을 갈아 물을 많이 부어 둔 채 끓이는 도중이었다. 내내 냄비 앞에 서 있기에는 침대에 누워있는 영웅이 걱정되어 어쩔 수 없었다. 앓아누운 사람을 잠시 돌보다가 부엌으로 달려가 냄비 안을 휘휘 저어 주기를 반복했다.
체온계로 영웅의 체온을 재보니, 생각했던 것만큼 열이 심하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그러나 영웅은 힘든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심한 열 때문이 아니라면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는 걸까.
“악몽을 꾸나?”
찌푸린 눈썹이 안타까워서. 채언은 얼음주머니를 만져 차가워진 손으로 영웅의 볼을 쓸어주곤 했다. 아까 바닥에 누워서 쓰레기 뭐라고 했던 건 무슨 이유일까. 채언은 가끔 웅얼거리듯 달싹이는 입술 가까이에 귀를 대보았지만.
“…제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듯한데, 명확히 전달되는 말소리는 듣지 못했다.
“대표님. 뭐라고요?”
귓가에 조용히 속삭여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영웅의 말을 알아듣기 포기한 채언은 그에게 덮어준 이불 위를 토닥이며 혼잣말을 했다.
“왜 바닥에 누워계셨어요?”
혹시, 거기 누워있던 게 아니라 쓰러져있던 걸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가를 삐죽거리던 채언은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들어 영웅의 코앞에 가져다 댔다. 분명 가슴이 오르내리며 숨 쉬는 것이 보였지만, 손가락에 닿는 숨결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 자신의 행동이 우스워서, 채언은 이내 손가락을 떼고 영웅의 가슴에 귀를 대어 쿵 쿵, 뛰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묽은 죽이 완성되자 채언은 전에 영웅이 그랬던 것처럼 베드 트레이에 죽과 물, 해열제를 담아가지고 왔다. 협탁 위에는 작은 케이스가 놓여있었는데 그걸 옆으로 밀어놓고 베드 트레이를 올려놓았다. 영웅의 이마 위에 얹어 놓았던 얼음주머니를 옆으로 치운 채언은 그를 깨우기 시작했다.
“대표님. 일어나보세요.”
불러도 일어나지 않아서 어깨를 살살 흔들자, 얌전하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내 꼭 감겨있던 눈이 뜨이고 예쁜 색깔의 눈동자가 보였다.
“괜찮으세요?”
몽롱해 보이는 얼굴을 쓸어주자 흐리던 눈빛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채언 씨.”
살짝 갈린 듯한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아있었다. 채언의 얼굴을 확인한 영웅은 팔을 얼굴 위로 올려 눈을 가렸다. 땀을 닦듯 문지른 뒤 팔을 치운 그는, 다시 채언의 얼굴을 보더니 옆으로 돌아누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
손등에 닿는 시원한 느낌에 영웅이 눈을 깜빡였다.
“열이 나길래 얼음주머니 잠깐 대놨어요.”
“내가 열이 나요? 콜록.”
어리둥절 묻는 목소리 뒤로 곧바로 마른기침이 따라붙었다. 어제저녁에 목이 조금 간지럽더니 감기 기운이 있었나. 영웅은 기침이 터진 입가를 가리며 눈썹을 찌푸렸다.
“네. 그러니까 이거 드시고, 약도 드세요.”
채언은 협탁 위에 올려두었던 베드 트레이를 가리켰다. 영웅이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자, 그의 몸 위로 트레이가 놓였다.
영웅은 죽 그릇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잘게 다진 애호박과 당근이 들어간 묽은 죽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채언은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지난번에 그가 사다 준 소고기죽이나 전복죽과 비교되는 비주얼이었다.
“급하게 만든 거라. 별로 들어간 게 없죠? 약 드시고 몸이 좀 괜찮아지시면 장 보고 올게요. 수프 같은 것도 좀 사 올게요. 따로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그러면 그거… 만들어드릴게요.”
자신 없이 고개를 든 채언과 영웅의 눈이 마주쳤다.
“채언 씨.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숟가락을 손에 쥔 영웅이 입꼬리를 시원하게 올려 웃었다. 그 웃음에 안심이 된 채언은 티 나지 않게 아랫입술을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마터면 발끝을 까딱거릴 뻔했다.
영웅은 숟가락을 쥔 손에 꽉 힘을 주었다. 몸이 좋지 않을 때는, 거의 무조건 악몽을 꿨다. 채언과 지낸 뒤로 귀마개를 끼지 않고 잠드는 일이 늘었지만. 엊그제 입원을 한 데다 감기까지 걸려 상태가 좋지 않은 듯했다. 잠깐 잠든 사이에 여지없이 안 좋은 꿈을 꿨다.
하지만 오늘 꾼 악몽은 오래가지 않았다. 괴로움에 빠질 찰나마다 다정한 목소리가 자신을 끌어올려 주었으니까. 괴로워할 때는 비싼 곰돌이나 안겨주던 미국 병원에서의 생활과 지금은 너무나 달랐다. 그저께 병실에서 압박감이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채언이 옆에 있으면 금방 상태가 안정되는 것 같았다.
숟가락을 든 영웅은 가슴속에 솔솔 피어나는 애정을 죽과 함께 꿀꺽 삼켰다.
죽을 먹는 영웅을 보던 채언은 자신이 앉아있는 의자 모서리를 매만지다 물었다.
“그런데, 왜 바닥에 누워계셨어요?”
“크흠. 큼. 콜록.”
“괜찮으세요?”
갑자기 큰 기침을 하는 영웅 때문에 당황한 채언은 주변을 살피다 얼음주머니를 풀었다. 녹은 얼음이 든 봉지를 바닥에 내려놓고, 겉을 감싸고 있던 수건을 풀어 그에게 내밀었다.
찬 기운이 남은 수건을 받아든 영웅의 얼굴이 새빨갰다.
“크흠. 그건.”
새벽의 일이 영웅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쳤다. 복도에 떨어져 있던 베개를 가지고 채언의 방에 들어가서 부끄러운 짓을 한 뒤, 열을 식히기 위해 찬물에 샤워를 해야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샤워를 하러 들어간 욕실이 채언이 사용하던 곳이었고, 그래서 더욱더 오래도록 찬물을 맞고 있어야 했다. 겨우 진정시킨 후에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는데 땀에 젖은 채언의 몸을 좀 닦아주고 옷을 갈아입히다가 또 말 못 할 짓을 해버렸다. 그 뒤에는 주인 없는 샤워실에 들어가서 폭포수를 맞듯 찬물을 맞았고. 어제저녁부터 새벽까지, 집 안의 온 욕실을 돌아다니며 샤워를 한 꼴이었다.
수건에 얼굴을 묻은 영웅은 슬쩍 채언을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로 멀뚱거리는 채언의 모습에 죄책감이 들었다.
“그건… 말해줄 수 없어요.”
“네? 왜요?”
걱정 어린 까만 눈을 보자 양심이 더 찔렸다.
“그게. 지금은, 배가 고파서. 콜록. 이거부터 먹어야겠어요.”
“아. 네! 어서 드세요.”
“그런데 채언 씨.”
영웅은 내렸던 수건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내 옆에 있으면 안 돼요.”
“네? 왜요?”
“감기가 옮아요.”
채언은 독감에 걸렸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옆에 있겠다는 그를 밀어냈었는데. 영웅이 어떻게 했더라. 잠시 고민하던 채언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저, 마스크 쓰고 올게요!”
방 밖으로 나가는 채언의 뒷모습을 보던 영웅은 손으로 눈을 가렸다. 어제 채언에게 입혀놓은 바지가 보였다.
잠시 후. 마스크를 쓰고 돌아온 채언은 침대 쪽으로 다가오다가 멈칫거렸다. 그리고 의자가 놓여있는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마스크에 가려진 얼굴이 겸연쩍어하는 것 같아서, 영웅은 채언의 행동을 살폈다. 침대 옆에 서서 허리를 숙인 채언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바지를 들어 올렸다. 도르륵 까만 눈이 구르며 품에 안은 바지를 살펴보는 듯했다. 당황 섞인 눈동자가 침대 아래 주변을 살폈다.
“혹시 제 속옷….”
“그건, 그, 옷 세탁하는 곳에, 기계에 있어요.”
세탁기라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영웅은 손바닥 안에 얼굴을 숨기고 겨우 말했다. 채언이 속옷을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어제 옷을 갈아입혀 준답시고 벗겨냈다가 그 속옷을 가지고 자신이 뭘 했으니까. 주인 없는 욕실에 들어가서 또다시 찬물을 맞은 이유였다.
열일곱 살도 아니고. 눈이 돌았던 새벽이 부끄러워서 영웅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샤워를 세 번이나 했지만, 채언의 옆에 누우면 또 손이 움직일 것 같았다. 그래서 침대 위에 올라갈 수가 없었다. 다른 방에 가서 자도 되었지만, 채언과 멀리 떨어지기는 싫어 바닥에 누웠던 것이다. 세탁기가 다 돌아갈 때까지만 그러고 있으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세탁기 안에서 빨래를 꺼낸 기억이 없었다.
욕정에 눈이 멀어 감기에 걸린 게 틀림없었다. 이만하면 값싼 벌인 듯했다. 아니, 아까 그런 꿈을 꾸었으니 제대로 벌 받은 건가. 영웅은 입안에서 부드럽게 으깨지는 채소를 꼭꼭 씹었다.
말없이 죽을 먹는 영웅을 바라보던 채언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럼, 죽 마저 드시고 계세요. 저는 부엌 정리 좀 하고 올게요.”
영웅의 옆에 있고 싶어서 마스크까지 쓰고 온 것이었지만, 어제 벗어둔 바지를 품에 안고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채언은 붉어진 목덜미를 긁적이다 영웅의 방을 빠져나왔다.
옷을 갈아입고 와서 세탁기 뚜껑을 연 채언은 바지 두 개를 쥐고 고개를 갸웃했다. 속옷만 덜렁 들어 있을 거로 생각한 세탁기 안에는 영웅의 옷가지와 커버가 분리된 베개도 들어있었다. 익숙한 디자인의 베개 커버였다. 어제 자신이 복도에 떨어뜨린 것인 듯했다. 집 안이지만 얼굴이 닿는 베개가 바닥에 떨어져서 더러워졌다고 생각한 걸까? 영웅은 생각보다 깔끔한 편인 듯했다.
앞으로 청소를 더 열심히 해야지! 그렇게 마음먹은 채언은 바지를 세탁기에 집어넣었다.
안에 들어있던 것들은 제때 건조시키지 않아, 바지를 빠는 김에 한 번 더 돌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세제를 넣고 버튼을 눌러 작동시키자 물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세탁기 앞에 쭈그려 앉은 채언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예전에는 이 소리를 들으며 혼자 시간을 보냈었는데. 전처럼 이렇게 가만한 순간이 심심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금방 눈을 뜬 채언은 세탁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해열제를 먹고 몇 시간 푹 잔 영웅은 금방 열이 떨어졌다. 한 번에 감기가 나은 것은 아니었지만, 침대 위에서 요양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가끔 기침을 하긴 해도 목이 많이 붓지 않아서 평소처럼 음식을 먹어도 괜찮았다.
두 사람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식탁에 대각선으로 앉아 저녁을 먹었다.
영웅은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채언과 눈이 마주치면 간혹 손으로 눈 앞머리 쪽을 문지르며 시선을 피했다. 그런 그를 볼 때면 채언은 손바닥으로 볼을 문질렀다. 아침에는 갑작스레 병간호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부끄러워할 타이밍을 놓쳤는데, 어젯밤 일이 정말 꿈이라거나 없었던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채언은 부끄러움과 동시에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두 사람은 평범하게 대화를 하다가도 어색하게 마른 입술을 핥았다. 함께 있는 시간이 싫었던 건 아니었다.
밤늦은 시각. 이마에 쿨시트를 붙인 영웅은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구급상자에 들어있던 것을 뒤늦게 찾아낸 채언이 붙여준 것이었다. 같은 침대에 누웠으면 좋았을 텐데. 채언에게 감기를 옮길까 봐 함께 자자고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지난번 자신이 복도에 서서 채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던 것처럼 오늘은 채언이 방에 들어가는 자신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새벽에 마음만 잘 다스렸어도 오늘 밤 쓸쓸하게 혼자 누워있지 않았을 텐데. 영웅은 천장을 보며 멍하니 후회했다. 감기에 걸린 것은 간단한 벌이 아니라 큰 벌이었다.
영웅이 작은 케이스에서 귀마개를 꺼내 귀에 꽂으려던 찰나였다.
똑똑.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채언 씨?”
“네.”
“들어와요.”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영웅은 리모컨으로 조명 밝기를 조절했다.
“무슨 일이에요?”
밝아지는 불빛에 마스크를 낀 채언의 얼굴이 보였다. 등 뒤에, 포근하게 마른 베개를 숨긴 채였다. 커다란 솜 베개가 언뜻언뜻 보였다.
“운전 조심하세요.”
채언의 배웅에 마스크 위로 보이는 영웅의 눈이 휘었다.
“네. 조심해서 다녀올게요.”
입을 맞추지 못해 살짝 서로 볼을 댄 채 안고 있다가 영웅이 먼저 몸을 물렸다. 채언은 영웅에게 기대있는 동안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같은 침대에서 자고 눈을 뜬 것이 벌써 나흘째였다.
천천히 닫히는 현관문 사이로 두 사람은 눈을 마주했다. 기우뚱 몸이 기울고 점점 좁혀지는 틈 사이로 끝까지 서로를 지켜보다 웃었다. 문이 닫혔다. 마스크를 내리는 채언의 볼에 보조개가 폭 패어있었다.
채언은, 자신이 독감에 걸렸을 때 마스크를 쓰고 같은 방에 누워 잤어도 괜찮았으니, 가벼운 감기 정도는 그것보다 더 괜찮지 않겠냐고 주장하며 영웅의 방에 베개를 들고 찾아갔던 날 밤을 떠올렸다.
어쩔 수 없이 옆자리를 내어주는 영웅의 옆에 누워서, 그의 이마에 붙어있던 쿨시트를 슥슥 문질러주었었다. 간밤에 열이 심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가 아프지 않았으면 했지만, 아프다면 옆에서 돌봐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베개를 들고 영웅의 방문 앞을 서성이다가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잘 때 귀마개를 자주 끼세요?’
손에 쥐고 있던 케이스 안에 귀마개를 집어넣는 영웅을 보며 채언이 물었다. 죽을 가져왔을 때 협탁 위에 있던 케이스였다. 거실에서 함께 잔 날 노트북 옆에 놓여있던 것이기도 했다.
‘요즘에는 잘 안 끼고 잤는데, 몸 상태가 안 좋을 때는 끼는 게 나아서요.’
채언은 악몽을 꾸는 듯 찡그린 얼굴로 잠들어 있던 영웅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런데 지금은 왜 다시 케이스에 넣으세요?’
‘채언 씨가 옆에 있을 때는 괜찮은 것 같아요.’
채언은 이마를 쓸어주던 손을 내려 조심스레 영웅의 귓가를 쓸었다. 귓바퀴를 부드럽게 타고 내려온 손으로 귓불을 만져주었다. 성적인 의미는 담기지 않은 다정한 손길이었다.
‘안심하고 주무세요. 오늘도 제가 옆에 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현관문이 닫힌 것을 확인한 뒤, 채언은 슬리퍼를 갈아 신고 복도를 걸어 들어왔다.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거실 쪽으로 향하던 발걸음은, 영웅의 방문 쪽에서 멈췄다.
닫힌 문을 바라보던 채언은 눈을 감았다. 전에는 마음이 불안해지면 눈을 감고 안정을 찾기 위해 버텨야 했다. 그게 통하지 않을 것 같으면 무작정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어딘가를 걸었다. 그날. 처음으로 영웅의 방문을 두드린 날. 복도 끝방을 빠져나와 복도를 걸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그럴 때면 생각하는 것보다 몸의 속도가 빨랐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는 것이지만, 몸이 알아서 누군가에게 구조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불안하게 걷는 걸음을 멈춰달라고.
채언은 천천히 눈을 떴다. 영웅과 같은 방에서 잠들고 눈을 뜨는 생활을 하는 동안, 예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조금 더 오래 그의 옆에 붙어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불안해서 눈을 감지 않으니까.
요즘은 눈을 감을 때마다 영웅이 볼을 쓸어주거나 머리카락을 만져주고는 했다. 새벽에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도 옆에 그가 있었다.
의식하지 않고 숨 쉬듯, 언제나 죽고 싶다는 생각이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을 생각하는 시간이 전보다 늘었다. 예전에는 나중을 생각해보려 해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이제는 영웅의 옆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고는 했다.
채언은 다시 발을 옮겼다. 몇 걸음 가지 않아 도착한 곳은 영웅의 방 옆, 서재 앞이었다.
영웅이 입원한 병실로 달려가기 전에 서재 문을 열었었다. 비가 심하게 내렸던, 혼자 먹는 저녁이 싫어 식탁 의자에 한참 앉아있었던 그다음 날 아침. 서재에서 나온 영웅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서재 안에는 창문이 없었다. 책이 빼곡할 거라는 생각과도 달랐다. 침대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도구들, 헤드폰이나 턴테이블 같은 것이 책장과 책상을 대신하고 있었다. 토도도독. 비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서재 안으로 들어가 천천히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힐수록 빗소리가 잠잠해졌다. 문이 완전히 닫혔을 때는 귀가 먹먹할 정도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신이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눈을 감고 안정을 취하거나 무작정 걸었다면, 영웅은 세상과 단절된 조용한 공간 안에 들어가 웅크린 것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온 세상을 울리는 소리가 싫다면 대신 막아주고 싶었다. 그래서 빗길을 달렸던 것이었다.
서재 문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린 채언은 화분에 물을 주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금요일 저녁. 두 사람은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었다. 영웅은 여전히 마스크를 쓴 채였다. 채언에게 감기를 옮기고 싶지 않았고, 마스크 없이 닿고 싶은 마음에, 월요일이 되자마자 가기 싫은 병원에 다녀온 그였다. 채언 몰래 처방받은 약까지 먹으니 감기는 다 나은 지 오래였다. 그러나 아픈 자신을 돌봐주겠다고 같은 침대에서 잠드는 채언 때문에 아픈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병원에 있어 본 뒤로는 자그마한 꾀병을 부리는 것도 싫어하던 영웅이었다. 그래서 아픈 척하는 연기도 무의식이 거부해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채언의 앞에서는, 필요하다면 어색하게나마 아픈 척이라도 하고 싶었다.
체온도 정상이고 밥도 잘 먹는데, 왜 감기가 떨어지지 않는지 의아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채언의 앞에서 영웅은 가끔 양심에 찔린 미소를 지어야 했다. 곧 채언도 자신의 침실에서 잠드는 것이 익숙해질 테니, 다음 주쯤 그냥 한방에서 계속 같이 지내자고 말해볼 참이었다.
옥수수 통조림을 카트 안에 집어넣은 채언은 또 살 것이 있나 확인하며 메모지를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카트 손잡이를 잡고 바퀴를 굴리던 영웅은 발을 멈췄다.
“채언 씨. 우리 이거 먹을래요?”
“어떤 거요?”
영웅은 소시지가 담긴 병을 들고 있었다. 미국에 살 때도 가끔 먹던 것이었다. 비닐에 담긴 소시지가 아니라 병에 담긴 소시지는 먹어본 적이 없어서, 채언은 영웅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냥 구워 먹는 건가요?”
“보통 소시지예요.”
“네. 그럼 내일 아침 준비할 때 같이 구울게요.”
소시지가 든 병을 카트에 집어넣은 영웅은 다시 카트를 앞으로 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웅은 또다시 멈춰 섰다.
“오! 이거요.”
그는 바닥에 쭈그려 앉더니 부스럭거리는 봉지를 잡아 들었다. 옆에서 허리를 숙인 채언은 영웅의 손에 들린 마시멜로를 보다가 영웅의 얼굴을 보았다.
“마시멜로 좋아하세요?”
채언도 마시멜로를 먹어본 적은 있지만, 바람 든 젤리 같은 식감 때문에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지난번 글램핑에 가져갈 목록 쓸 때 뭔가 하나 빠졌다고 생각했는데 마시멜로였어요. 우리 그때 뭐, 뭐 사기로 했….”
말이 끊기고 봉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채언은 끊어진 영웅의 뒷말을 기다리다가 마스크 위로 보이는 초록색 눈이 시무룩해지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채언은 무릎을 굽히며 영웅의 옆에 앉았다.
“왜요?”
“나 때문에 글램핑 못 갔잖아요.”
엄청 기대했을 텐데. 뒷말을 삼킨 영웅은 눈썹을 움직여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왜 대표님 때문이에요.”
초록색 눈을 바라보던 채언은 빨간 줄이 그려진 마시멜로 봉지를 쳐다보았다.
“늦게라도 가자고 하신 거, 제가 거절했잖아요.”
무릎 위에 팔을 올린 채언은 영웅이 보지 못하는 쪽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글램핑을 가지 않은 덕분에 영웅과 키스를 했고, 집에 돌아와서는 더한 것도 했다. 스킨십 이후로 그와의 사이가 더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함께 침대 위에 눕는 것도 더는 어색하지 않았고.
하지만 채언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말하지 않고, 다른 것을 말하기로 했다.
“그리고 안 가길 잘했어요. 감기 걸리셨잖아요. 글램핑 갔으면 더 아팠을지도 몰라요.”
채언의 말에 영웅은 가슴이 찌릿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마스크를 아래로 내려야 했다.
“채언 씨. 나 이제 안 아파요.”
“네?”
“사실 기침 안 한 지도 좀 됐어요.”
“아까, 하셨는데.”
마트에 들어올 때부터 그는 기침을 했었다. 채언은 멀뚱히 영웅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한쪽 눈을 슬며시 찌푸렸다.
“아직 아프다고 거짓말하신 거예요?”
변명하지 않고 영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내가 아파야. 채언 씨가 내 방에서 자니까.”
채언은 영웅이 아픈 척을 했다고 해서 화가 나지 않았다. 그저 의문스러워 눈을 찌푸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에는 눈이 동그래졌다. 함께 자고 싶어서 거짓말을 했다니. 채언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바닥을 봤다. 연분홍색 운동화에 감싸인 발끝에 힘을 주었다.
“화났어요?”
“아뇨.”
지난번에도 마트에서 이런 대화를 했던 것 같은데. 아뇨, 라고 해서 자신이 또 화가 났다고 영웅이 오해할까 봐 채언은 금방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영웅을 똑바로 쳐다볼 수는 없었다. 옆에서 빤히 쳐다보는 초록색 눈동자와 잠시 눈을 마주친 채언은 서둘러 마시멜로를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으로 볼을 문지르던 채언은 머릿속에 맴돌던 말을 꺼냈다.
“그럼, 오늘부터는 마스크 안 쓰고 누워도 되죠?”
사과할 준비를 하던 영웅은 채언의 말에 침을 잘못 삼켜 사레가 들렸다. 가짜로 기침할 때와 달리 심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당황한 채언은 영웅의 등을 급히 토닥여주었다. 한참 만에 겨우 기침을 멈춘 영웅은 빨개진 얼굴로 채언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이번 주말에는 진짜 어디 갈까요?”
마시멜로는 카트 안에 담겼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서둘러 장 본 것을 정리한 영웅은 노트북을 가지고 와서 거실 테이블 위에 펼쳤다.
“어디 숙소 남은 곳이 있겠죠. 없으면 서울에 있는 호텔이라도 가면 되고.”
집에 오는 길에 두 사람은 여행지 이곳저곳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채언은 급할 필요 없다고 영웅을 말렸지만, 영웅은 당장에라도 소시지와 마시멜로를 구워 먹을 수 있는 곳을 찾고 싶어 했다.
이리 와요.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린 영웅은 채언을 앉히고 노트북 전원을 눌렀다.
인터넷 창을 열자, 홈 화면으로 설정된 사이트에 자동 로그인되더니 메일 알림이 하나 떴다.
“잠깐만요. 메일 좀 확인할게요.”
“네.”
채언은 혹시 그가 확인하려는 게 업무 메일일까 봐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확인하시고 말씀해주세요.”
그런 채언을 보던 영웅은 웃으며 말랑한 입술에 쪽, 뽀뽀했다.
“앗.”
격정적인 키스를 했던 날로부터, 거의 일주일이나 지나서 하는 어린애 같은 입맞춤이었다.
“눈, 안 가려도 돼요.”
그 말에 눈 앞을 가리던 손을 내려 입을 가린 채언은 말없이 영웅의 얼굴을 보다가 노트북으로 시선을 던졌다.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마음을 꾹 눌러 삼킨 영웅은 핸드폰을 들었다. 액정을 톡톡 두드린 그는 노트북과 아이디가 연동된 사이트로 들어가 메일을 열었다.
메일을 읽던 영웅의 표정이 점점 찌푸려졌다.
“…채언 씨.”
“네?”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던 채언이 고개를 돌렸다.
“회사에 무슨 문제가 생겼나요?”
영웅의 짙은 눈썹이 한껏 가운데로 몰려있었다.
“주말에, 하아, 우리 또 날짜를 미뤄야 할 것 같아요.”
채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급하게 일정을 짤 바에야 천천히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그런데 무슨 일 생긴 건 아니죠? 괜찮으세요?”
“일이 생긴 건 아니고요.”
손을 들어 눈썹 뼈를 문지르던 영웅은 흠, 탐탁지 않은 듯 숨을 내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주말에 누나가 온대요.”
누나라는 말에 채언은 자신이 앉아있는 소파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영원은 이 자리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개월 전에 딱 한 번 본 사람이라 어떻게 생겼는지 생생히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차가운 이미지였다는 것은 기억이 났다.
“토요일에 오시나요? 아니면, 일요일?”
“일요일이요.”
“그럼, 저는 일요일에 잠깐 나가 있을까요?”
채언의 말에 영웅은 고개를 갸웃했다.
“채언 씨. 그날 약속 있어요?”
“아뇨.”
“그럼 어디 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
채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영웅은 의문스럽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런데 왜 나가요?”
“누나분이 오신다고 해서요.”
영웅은 옆에 앉은 채언의 허리를 양팔로 끌어안고 어깨 위에 머리를 기댔다.
“채언 씨가 왜 나가요. 여기는 우리 둘이 사는 집인데.”
둘이 사는 집. 채언은 양말 안쪽에 숨겨진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너무 앞서나간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영웅의 말은 꼭 집에 손님이나 가족이 와도, 그들보다 자신이 더 중요하다는 것처럼 들렸다. 채언은 어깨 위에 얹힌 머리에 가볍게 머리를 기댔다.
“혹시, 다른 사람이 집에 오는 게 불편해서 그러는 거라면, 채언 씨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지만요.”
“안 불편해요. 집에 있을게요.”
“잘 생각했어요.”
영웅은 영원의 메일 내용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애정 어린 안부 같은 것은 묻지 않는 평범한 남매사이인지라, 메일은 간략하기 그지없었다. 다음 주에 한국지사와 사업 협력에 관한 건으로 업무차 한국을 방문할 예정인데, 비행시간을 앞당겨 잠시 이 집에도 들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때도 아니고, 자신이 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한국에 오겠다니. 누나의 속내가 무엇인지 영웅은 짐작이 가능했다. 자신이 가족들을 걱정시킨 게 분명했다. 어린애도 아니고 이 나이를 먹어서까지 돌봄을 받다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영웅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한숨 소리를 들은 채언은 조금 전 대화를 할 때까지만 해도 나쁘지 않아 보였던 영웅의 기분이 가라앉고 있음을 알아챘다. 눈앞에는 여전히 숙소를 검색하기 위해 올려둔 노트북이 펼쳐져 있었다.
“잠시만요.”
기울어진 영웅의 몸을 잡고 똑바로 세운 채언은 소파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요?”
어리둥절하게 묻는 영웅을 돌아본 채언은 살짝 미소 짓고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찬장 문을 열고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건 왜요?”
부스럭거리는 봉지를 쥔 채언은 다시 소파로 와서 앉았다. 비닐을 찢자 달콤한 냄새가 올라왔다.
“주말에 또 여행을 못 가게 돼서 아쉬우시죠.”
봉지 속에 손을 집어넣은 채언은 영웅의 입 앞으로 마시멜로 하나를 내밀었다. 지난번 백화점에서 비틀거리던 영웅은 꿀과 스프링클이 뿌려진 아이스크림을 먹고 나서 상태가 괜찮아졌었다. 가끔은 기분이 몸 상태를 좌우하기도 하니까. 지금도 단 걸 먹으면 영웅의 기분이 나아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가져온 것이었다.
“이거, 가져가서 먹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나중에 먹을 건 그때 새로 사고, 이건 지금 드세요.”
영웅은 하얀 마시멜로를 쥔 손가락이 달콤해 보이는 건지, 코끝에 닿는 마시멜로 냄새가 달콤한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는 채언을 보던 눈길을 거두지 않고, 천천히 입을 벌린 뒤 고개를 숙여 마시멜로를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장난스럽게 채언의 손가락을 앞니로 물었다 놓았다.
어느새 기분이 좋아진 영웅은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통통한 것을 어금니 쪽으로 밀어 넣고 씹는 느낌은, 폭신폭신하고 달콤했다.
달큰해진 침을 꿀꺽 삼킨 영웅은 채언이 들고 있던 봉지를 건네받았다. 빵빵한 봉지를 부스럭거리던 그는, 뜯어진 구멍 안에 손을 넣어 마시멜로를 한 개 꺼냈다.
“채언 씨도 먹을래요?”
“저는 이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러나 채언은 마시멜로를 들고 있는 영웅의 얼굴을 보자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저는 조금만.”
채언은 한 개 말고 절반을 찢어 조금만 먹으려고 했다. 영웅이 들고 있는 것을 가져오려 했는데, 채언이 손을 들자 그는 손을 피했다. 먹으라고 해놓고 장난이 치고 싶어진 걸까? 멀어진 손을 쳐다보다 시선을 돌리자 영웅과 눈이 마주쳤다. 달콤한 냄새가 가까워졌다. 입술에 닿는 마시멜로의 느낌에 채언은 입을 조금 벌렸다. 통통한 마시멜로가 입술을 밀고 들어와 앞니에 닿았다. 그래서 입을 조금 더 벌려야 했다. 조금만 찢어 먹으려던 것이 통째로 입안에 들어왔다. 볼 안쪽으로 밀어 넣고 씹어보자, 역시나. 바람 든 젤리 같은 식감이 느껴졌다.
“별로예요?”
영웅의 물음에 채언은 입안에 든 것을 천천히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심하게 우물거리는 채언의 입술을 보던 영웅의 눈동자가 느리게 위로 올라왔다.
“그럼 남은 건 내가 먹어도 돼요?”
“네. 다 드세요.”
어차피 그가 먹고 싶어 해서 사 온 것이었다. 채언은 볼에 든 마시멜로 때문에 웅얼거리며 말했다.
“어?”
어쩐지 모르게 몸이 뒤로 밀리는 것 같았다. 뒤로 기우는 몸을 의식하는 순간 채언의 머리가 커다란 손바닥에 감싸였다. 채언은 소파에 몸이 눕혀진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얀 천장이 보였고 동시에 의지와 상관없이 고개가 틀어졌다.
“으응….”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물컹한 혀와 입안에서 녹진해진 마시멜로가 함께 움직였다. 입안에 혀가 세 개쯤 있는 기분이었다. 입안이 꽉 차 공간이 부족했다.
쪼옥, 촉. 영웅이 고개를 틀어 입 맞추는 각도를 바꿀 때마다, 입술이 살짝 떨어졌다 붙었다. 혀와 혀 사이에 찐득해진 마시멜로가 눌리다가 끈적하게 그사이를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남은 걸 먹겠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입천장을 긁는 것이 영웅의 혀인지, 겉이 녹은 마시멜로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키스하는 도중에 채언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쩔 줄 모르고 헤매던 손을 영웅의 어깨 위에 올린 채언은 눈을 감았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그에게 응하기 시작했다. 몸 옆에 놓여있던 봉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곧이어 툭, 떨어진 봉지에서 하얀 덩어리들이 데굴데굴 굴러 나왔다.
누구의 목 뒤로 넘어갔는지 모를 마시멜로가 입안에 달콤한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 후에도 붙어있던 입술은 한참 후에야 쪼옥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끈적하게 섞이던 타액은, 입술과 입술 사이에서 짧게 늘어나다 끊어졌다. 영웅은 자신의 아래에서 달큰한 숨을 내쉬고 있는 입술 위를 살짝 핥았다.
사실 영웅도 마시멜로의 맛 자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캠핑을 하러 가서 불에 굽는 행위나, 크래커나 비스킷 사이에 눌러 먹는 것을 재미있어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몇 개를 더 먹어도 맛있게 먹어 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혼자만 과했던 지난밤을 떠올리며 자제해야지, 자제해야지, 마음을 다독여보았지만, 손은 어느새 아래 깔린 채언의 옷 사이로 들어가고 있었다. 상의 속으로 파고든 손은 촉감 좋은 피부를 몇 번 쓰다듬다가 옷 밖으로 빠져나왔다. 영웅은 소파 아래 떨어져 있는 채언의 다리를 들어 올려, 자신의 다리 사이에 가두었다.
축축해지는 분위기를 느낀 채언은 영웅의 어깨 위에 두르고 있던 팔을 풀어 손으로 그의 어깨를 살짝 밀어냈다.
“저희, 저녁은, 어떤.”
“마시멜로 한 개 더 먹을래요?”
영웅은 소파 아래 떨어진 봉지를 뒤적여, 안에 남아있던 마시멜로를 한 주먹 꺼냈다. 그중 한 개를 입에 물고 곧바로 채언의 얼굴로 돌진했다. 세상에 마시멜로로 입막음하는 사람이 있나. 얼떨결에 입을 벌린 채언은 혀 위로 눌리는 달콤함을 맛보며 당황을 금치 못했다.
입에 물고 있던 것을 채언의 입에 물려놓고 입술을 뗀 영웅은 팔을 교차해 상의를 벗어 던졌다. 먼저 쥐고 있던 마시멜로는 소파 이곳저곳을 굴러다니는 중이었다.
옷을 벗는 영웅의 모습에 당황한 채언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미 그의 다리 사이에 갇힌 하반신 때문에 팔꿈치로 소파 위를 짚는 정도에서 그치고 말았다. 그마저도 곧바로 목덜미가 잡혀 소파 위에 누운 자세로 돌아갔다.
채언의 뒷목을 잡고 있던 영웅의 손이 소파와 머리카락 스치는 소리를 내며 밖으로 빠져나왔다. 가로막힌 입술로 뭐라고 웅얼대는 채언의 목소리가 귀엽게 들렸다.
영웅은 허투루 노는 손이 없게 했다. 한 손은 채언의 볼에 얹고, 한 손은 다시 상의 안쪽을 파고드는 중이었다. 왼쪽 볼을 쓰다듬어 주는 손길에 채언의 고개가 왼쪽으로 틀어졌다. 영웅은 채언의 무의식적인 습관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손이 닿는 곳에 항상 고개가 따라오곤 했다. 특히 볼을 만져주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엄지로 눈 밑을 쓸어주자 손바닥에 볼을 비비는 것이 느껴졌다. 영웅은 입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살짝 벌어진 채언의 입안에 절반쯤 남은 마시멜로가 보였다. 눈 밑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까만 눈 때문에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왼쪽으로 틀어진 고개 때문에 턱선 아래, 하얀 목이 잘 보였다. 다시 아래로 내려온 영웅의 입술은 마시멜로를 물고 있는 입술이 아니라 채언의 턱밑으로 향했다. 아프지 않게 턱을 잘근잘근 물다가 맥박이 뛰는 목선에 입술을 묻었다. 자국이 남지 않을 정도로 빨아들이며 코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여기서 항상 좋은 냄새가 나요.”
목에 입술을 붙이고 하는 말에 채언의 허리가 움찔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영웅은 요령 좋게 채언의 옷을 허리 위로 올렸다. 그 바람에 드러난 살과 소파의 가죽이 마찰하는 소리가 났다. 쇄골 근처까지 내려가 입을 맞추던 영웅의 얼굴이 다시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입술이 닿는 길마다 쪽, 쪼옥, 간지러운 뽀뽀 소리가 들렸다. 이로 살짝 목을 물자, 코끝에 채언의 머리카락이 닿았다.
“저녁, 저녁을.”
자꾸만 저녁 얘기를 하는 채언이 귀여워서, 영웅은 작게 웃음이 터졌다.
“읏.”
귀 옆에서 들린 웃음소리를 따라 바람이 들어와, 채언의 어깨가 살짝 튀었다. 바르작거리는 몸짓에, 시원하게 올라갔던 영웅의 입꼬리 모양이 변했다. 이로 귓불을 문 뒤 빨아 당겨, 작고 말랑한 살덩이를 입술 사이에 끼워 눌렀다. 또 다른 자극에 채언이 고개를 틀려 하자, 영웅은 왼쪽 볼에 대고 있던 손을 슥슥 문질러주었다. 그러자 또 얌전히 그쪽으로 볼을 비벼오는 것이었다.
영웅은 귓불부터 귓바퀴까지 천천히 애무하며, 간간이 자연스러운 숨소리를 들려주었다. 편안하고 부드러운 움직임에, 어깨를 밀어내던 채언의 손끝이 얌전히 얹혔다. 저도 모르게 올라온 팔은 이내, 영웅의 목 뒤로 둘렸다. 영웅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상체를 아래로 내리눌렀다. 채언의 옷은 이미 쇄골 바로 아래까지 올라간 뒤였다. 맨가슴끼리 닿는 간지러운 느낌에 채언은 감기던 눈을 크게 떴다. 귓바퀴를 핥던 혀가 귓속으로 들어오며 질척한 소리를 냈다.
“…흐윽.”
손에 잡히는 것은 단단하고 탄력 있는 영웅의 맨살뿐이라 채언은 눈가를 찡그렸다. 키스할 때 타액이 섞이던 소리가 귓속에서 들렸다. 매끈한 혀가 움직일 때마다 오른쪽 목과 어깨에 힘이 들어가며 움찔거렸다.
“이거, 그만. 그만하, 고 싶어요.”
소리로 인한 자극이 이렇게 크게 다가올 줄 몰랐다. 혀가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이 떨릴 정도로 자극이 심했다.
“알겠어요. 그만.”
채언의 귀에 속삭인 영웅은 정말로 귀에서 입술을 뗐다. 대신 작은 머리통은 아래로 쑤욱 내려갔다. 상의가 올라간 채언의 맨가슴에 입술을 대자, 숨을 쉬느라 오르내리던 가슴이 위로 들렸다. 영웅은 양손으로 옷을 밀어 올려 벗겼다. 겨드랑이를 스치는 손에 간지러움을 느낀 채언은 곧바로 팔을 내리려 했지만, 이미 머리카락이 부스스해진 뒤였다. 방금까지 입고 있던 옷이 소파 아래로 떨어졌다.
하얀 가슴에 유륜과 유두만 붉은빛이 돌았다. 영웅은 채언을 올려다보며 살짝 혀를 내밀었다. 힘주어 뾰족하게 만든 혀로, 흥분해서 딱딱해진 돌기 위를 누르듯 핥아 올렸다.
하반신에 피가 몰리는 느낌에 채언은 무릎을 움찔거렸다. 즉각적인 채언의 반응에 영웅은 입을 조금 더 크게 벌리고 입술로 유륜 위를 덮었다. 키스 마크를 남기듯 빨아들인 다음, 입 안쪽에서 혀로 유두를 자극했다. 몸을 비틀던 채언이 다리를 슬쩍 들어 올리자, 쪼옥, 소리를 내며 입술을 뗀 영웅이 위로 올라왔다. 채언의 귀 안쪽으로 더운 숨이 들어왔다. 간지러움이 동반되는 감각에 채언의 목이 딱딱하게 굳었다. 채언은 영웅과 똑같이 더운 숨을 쉬며 그를 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소파 가죽이 뿌득거렸다. 채언의 다리 사이로 영웅의 왼쪽 다리가 파고들었다.
“윽, 흣…!”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감각에, 채언은 눈앞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단단한 허벅지 근육이 하반신을 문지르는 감각과 동시에, 조금 더 두드러져 양감을 나타내는 것이 허벅지 안쪽에 문질러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서로의 허벅지가 문질러지는 것은 얇은 옷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발기한 성기가 문질러지는 것과 같았다.
채언은 저도 모르게 떨리는 손으로 영웅의 맨살을 문질렀다. 영웅은 자신의 등을 긁듯이 잡아 오는 채언을 양팔로 힘 있게 안아주면서, 그의 목에 쪽쪽 느릿한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었다.
“오늘은, 혼자 잠들면 안 돼요.”
“네, 네….”
채언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거… 이제, 그만.”
밭은 숨과 함께 나온 대답이었다. 그 대답에 두 사람의 몸 사이로 영웅의 손이 뱀처럼 미끄러져 들어왔다. 늑골 아래로 내려간 손은 의도적으로 채언의 배꼽을 스쳤다. 더 아래쪽으로 내려가서는 태연히 바지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비슷한 소리는 한 번 더 들렸다.
“이거. 이거, 지금은 좀.”
“뭐가요?”
“아, 안 돼요.”
막 벨트를 잡아 빼려던 영웅이 멈칫했다.
“싫어요?”
아래에서 움직이던 손이 멈추자 채언은 안심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은 너무 밝고, 그리고, 아직 샤워도 안 해서.”
“아아.”
물결표시가 따라붙는 듯 산뜻한 대꾸였다.
“그러니까, 일단, 저녁부터.”
그 순간 채언의 바지와 속옷이 동시에 아래로 쑥 내려갔다.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까만 눈과 입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채언의 등과 목덜미를 받친 팔에 단단히 힘이 들어가고, 두 사람의 몸이 함께 소파에서 일으켜졌다.
“어떻게, 어떻게, 매번 이렇게.”
어떻게 이렇게 쉽게 자신을 들어 올리는 건지. 의문을 표하던 채언은 말문이 막혔다. 지금 자신은 알몸으로 영웅에게 딱 달라붙어 있었다. 영웅은 자세를 고쳐 채언을 단단히 안고 걷기 시작했다.
그는 거실을 나서다가 조명 스위치 쪽에 어깨를 대고 눌러 불을 껐다. 몸짓에 흔들린 벨트가 벽과 부딪히며 철컹 소리를 냈다.
채언은 영웅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눈썹을 찌푸렸다. 소파에 누워있을 때 반쯤 발기했던 성기가 아무런 가리개 없이 영웅의 복근에 문질러지고 있었다. 자극을 최소화하기 위해 몸에 힘을 준 채 가만히 버텨보았지만, 영웅이 다시 걷기 시작하자 어쩔 수 없는 자극이 전달되었다.
채언은 마시멜로 봉지를 괜히 뜯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흰 덩어리들은 거실 바닥과 소파 위를 구르고 있었다.
침실 문이 열린 뒤, 또 다른 문이 한 번 더 열렸다.
“여긴….”
채언의 목소리가 타일로 된 벽을 울렸다.
“샤워하고 싶다면서요.”
물기 없는 욕조 안에 채언을 내려놓은 영웅은 거슬리던 벨트를 빼내 바닥에 던졌다. 차캉 소리와 함께 떨어진 벨트는 욕실 바닥을 뒹굴었다. 바닥에 앉은 채언은 욕조 벽을 잡고 눈을 굴렸다. 붙어있을 때는 민망하게 닿는 것이 부끄러웠다면, 지금은 몸이 훤히 보이는 게 부끄러웠다.
“그럼. 저는 씻고 나갈게요.”
채언은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들킬까 봐, 물 온도도 확인하지 않고 수도꼭지를 틀었다.
“앗! 차가….”
금방 발을 적신 물이 너무 차가웠다.
“차가운 물로 샤워하면 감기 걸려요.”
영웅은 조금 뜨겁다 싶을 정도로 물 온도를 조절한 뒤, 두 번째 수도꼭지까지 틀었다. 금방 물이 차기 시작했다. 욕조 안에 손을 집어넣고 손목까지 고인 물 온도를 확인한 영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일으키는 영웅을 따라 시선을 올리던 채언은 그의 하반신이 가까워지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럼 조금 이따 봬요.”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채언 씨.”
시원하게 바지를 벗어버린 영웅은 속옷까지 잡아 내렸다. 벨트가 있는 곳에 옷을 집어 던진 그는 당황한 채언을 보며 웃었다.
“왜, 옷을 벗으세요?”
“나도 아직 샤워 안 했어요.”
“아침에 샤워하지 않으셨어요?”
“난 원래 하루에 두 번 해요. 그런데, 오늘은 아직 한 번밖에 안 했네요.”
채언의 허벅지까지 물이 찬 욕조 안으로 영웅이 발을 집어넣었다. 욕조 벽에 붙어 팔에 머리를 기댄 채언은 그를 돌아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영웅이 다른 쪽 발을 마저 집어넣는 소리가 들리고, 조금 더 큰 물소리와 함께 수위가 높아졌다. 허벅지까지 차던 물은 이제 허리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흐음.”
욕조에 팔꿈치를 올린 영웅은 손에 머리를 기댔다. 돌아앉은 채언이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까 잠시 지켜보기로 했다. 벗은 몸을 보이는 게 부끄러운 건지, 보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수영장에 갈 때는 별로 수줍어하지 않던 채언이었다. 그랬던 사람이 지금 저렇게 목까지 빨개진 것을 보면, 이제는 완벽하게 자신을 의식하게 된 듯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영웅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채언 씨. 이리 와 봐요.”
영웅은 채언의 등을 덮듯이 다가가 허리를 끌어안았다. 잔뜩 긴장한 몸에 더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저는, 생각해보니까.”
가슴 위로 젖은 손바닥이 올라오는 느낌에 영웅은 고개를 숙였다. 물에 젖은 채언의 손톱과 손등이 반질거렸다. 손가락을 하나씩 물어버리기 전에 영웅은 턱에 힘을 주고 참았다.
“먼저 몸부터 닦고 들어와야 했어요.”
“아하. 그렇죠.”
영웅은 채언을 안고 있던 팔을 풀고 몸을 뒤로 물렸다. 갑자기 욕실 안이 조용해졌다. 영웅이 수도꼭지를 하나씩 잠가버렸기 때문이었다. 고요했던 욕실에 첨벙거리는 물소리가 울렸다. 채언은 움츠렸던 고개를 들었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욕조 안에 선 영웅은 바디워시를 펌핑한 샤워 타월에 거품을 내고 있었다.
“그렇죠. 순서가 있으니까.”
영웅은 부드럽게 웃고 있었으나 훤히 드러난 하반신은 그다지 온화해 보이지 않았다.
채언은 다시 서둘러 욕조 벽 위에 팔을 올리고 엎드렸지만, 다시 안긴 다음에는 빠져나올 수 없었다. 욕조 안에서 백허그를 당한 채로 등, 그다음엔 가슴에까지 거품이 문질러졌다. 부드럽게 문질러지는 샤워 타월이 지나갈 때마다 몸에는 거품이 남았다. 간지러운 느낌에 채언이 고개를 돌리자 영웅은 멀어지는 얼굴을 따라가 귀를 물었다.
“흣.”
영웅은 움찔 튀는 몸을 더 꽉 붙잡고 다리 사이로 당겨 안았다. 거품 때문에 서로의 몸이 닿는 곳마다 미끈거렸다. 채언의 귀를 애무하는 데 정신이 팔린 영웅의 손은 문지르던 곳만 계속 문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채언의 귓속으로 곧바로 퍼부어지는 질척한 소리는, 욕실 안을 크게 울려 반대쪽 귀에도 들어왔다. 자꾸만 움찔거리며 고개를 트는 채언 때문에 영웅은 한 손으로 채언의 볼과 턱을 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채언은 자신의 얼굴을 잡고 있는 영웅의 팔을 꼭 붙잡았다. 말간 손끝에 힘이 들어가 하얘졌다가 붉어졌다가 색이 변하고 있었다.
영웅은 채언의 목에도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언제 묻은 건지 거품이 흘러내리고 있어 입을 댈 수 없었다. 자신이 묻혀놓은 거품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영웅은 들고 있던 샤워 타월을 욕조 밖으로 던져버리고 손을 물 안에 집어넣었다. 허리 쪽에서 튄 물이 채언의 얼굴에 튀었다. 물이 튄 쪽 눈가를 찡그림과 동시에 입에서는 신음이 튀어나왔다.
“윽! 흐… 잠깐, 만요.”
영웅은 물속에서 발기한 채언의 것을 손으로 잡고 천천히 문지르기 시작했다. 팔꿈치 아래로는 물에 잠겨 있어 영웅이 팔을 움직일 때마다 물이 참방거리는 소리가 욕실을 울렸다.
품 안의 몸이 자꾸만 앞으로 기울려고 해서, 영웅은 채언의 턱을 잡고 있던 손을 내려 어깨를 잡았다. 그 팔을 잡고 있던 채언의 손도 따라서 내려가다가 미끄러졌다. 욕조 안으로 빠진 채언의 손은 영웅의 허벅지 위에 얹혔다. 그의 팔을 잡고 있던 것처럼 허벅지를 잡을 수는 없어서, 갈고리처럼 곱아든 채언의 손가락이 영웅의 허벅지 위를 긁었다.
허벅지를 쓸던 손가락은, 영웅의 팔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떨렸다. 자극을 참지 못한 채언은 짧은 손톱으로 허벅지를 길게 긋고 말았다. 손가락에 긁힌 허벅지 근육이 단단해졌다. 영웅은 자극받은 쪽 무릎을 세웠다. 그러자 허벅지 위에 얹혀있던 손이 물속에서 미끄러졌다. 몸과 몸 사이에 끼인 채언의 손에 잔뜩 발기한 영웅의 것이 닿았다.
“내 것도 만져줘요.”
낮은 목소리는 거의 속삭이듯 말해져, 욕실 안을 울리지 않고 채언의 귀에만 들렸다. 곧바로 귓바퀴를 핥아오는 혀 때문에, 채언은 떨리는 아랫입술을 물었다. 가슴이 오르내릴 정도로 크게 숨을 쉬다가 천천히 등 뒤에 닿는 몸에 자신의 몸을 기댔다.
채언은 고개를 기울여 자신의 어깨를 쥔 영웅의 손등에 볼을 비빈 뒤, 머뭇머뭇 등 뒤로 손을 더 뻗었다. 전부터 느꼈는데 몸에 닿아오는 느낌이나, 욕실에 들어와 스치듯 보았던 윤곽에 의하면 영웅의 것은 꽤 컸다. 하지만 손에 닿는 것은 흐릿하게 떠올려본 것보다 더 두툼하고 길었다. 그의 것을 부드럽게 말아 쥔 손의 엄지와 중지 끝이 닿지 않았다. 따듯한 물보다 더 뜨겁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런 게 계속 등 뒤에서 꼿꼿이 버티고 서 있었다니. 새삼 부끄러워진 채언은 아랫입술을 더 꽉 깨물며 얼굴에 닿는 핏줄 오른 손등에 볼을 기댔다. 말랑한 볼이 눌리듯 닿자 영웅의 손등이 뒤집혔다. 영웅은 채언의 턱을 위로 들어 올려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의 팔이 움직일 때마다 욕조 물이 찰랑거렸다. 마시멜로를 입에 넣지 않아, 아까보다 공간이 빌 텐데, 채언은 어쩐지 소파 위에 누워있을 때보다 입안이 꽉 들어찬 것 같다고 느꼈다. 입안의 젖은 살덩이끼리 문질러지는 느낌이 좋았다.
채언은 자신이 서툴게 손을 움직일 때마다 등 뒤에 맞닿는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혹시 잘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영웅은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했다. 조금 더 자신감이 들어간 채언의 손은 기둥 아래쪽을 천천히 문지르다가, 두툼한 성기 끝까지 주욱 올라왔다. 둥그런 기둥 끝을 구부린 검지 안쪽으로 문질렀다.
“하아….”
잠깐 입술이 떨어졌다. 영웅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채언은 천천히 눈을 들어 영웅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급하게 입을 맞췄다. 물이 첨벙거리는 소리와 함께 질척하게 타액이 섞이는 소리가 욕실을 울리기 시작했다. 목이 거의 뒤로 꺾인 채언의 뒤통수는 영웅의 단단한 어깨에 기대어져 있었다. 입술이 떨어지지 않은 채로. 의미 없이 침을 삼키니, 목울대가 움직이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채언은 눈을 감고 아무것도 손에 쥐지 않은 쪽 팔을 들어 영웅의 목덜미를 잡았다. 축축한 손끝에 맺혀있던 물이 머리카락에 옮겨 묻었다. 팔을 더 올리자, 손가락 안쪽 연한 살 사이로 영웅의 보드라운 머리카락이 스쳤다. 서로의 얼굴에도 물기가 스몄다.
조금 전까지 채언의 얼굴을 잡고 있던 영웅의 손은, 다시 동그란 어깨 위에 놓였다가 점점 더 아래로 내려왔다. 팔을 내리다 손가락에 돌기가 스쳤다.
“…으, 응.”
잠깐의 자극에, 입술이 가로막힌 채언에게서 비음이 새어 나왔다. 영웅은 검지를 굽혔다 펴며 채언의 유두를 짓누르듯 굴렸다. 딱딱하게 굳어진 것은 손가락에 눌려도 동그란 모양을 유지했다.
영웅이 작은 돌기를 꼬집듯 굴리자, 쾌감에 자극받은 채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연쇄작용처럼 힘이 들어간 채언의 손에 성기를 자극받은 영웅은 양손에 잡히는 것을 더 세게 문질렀다. 품 안의 몸이 바르작거려도 봐주지 않았다. 결국 목을 뒤로 꺾고 있던 채언이 고개를 숙였다. 질척한 소리와 함께 떨어진 두 사람의 입술은 다물리지 않고 밭은 숨을 토해냈다. 채언은 눈을 감고 영웅의 목에 눈꺼풀과 콧등을 대고 비비다가 조금 더 얼굴을 들었다. 금붕어처럼 뻐끔거리는 입술이 맥박이 펄떡이는 목에 닿았다. 옅은 색의 머리카락을 헤집던 손은 아래로 떨어진 지 오래였다.
“흐으… 흑. 읏.”
영웅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품 안의 몸을 가두듯 세게 끌어안고, 물속의 손을 더 빨리 움직였다. 욕조 안의 물이 파도치듯 출렁거렸다. 영웅의 것을 쥐고 있는 채언의 손은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바들거렸다.
“저, 으읏… 하아.”
채언은 물 안에 잠겨있던 손을 들어 급하게 영웅의 팔뚝을 잡았다. 아랫배와 허벅지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겨우 버티는 중이었다.
“그만, 그만 하! 흑.”
거품이 떠다니는 맑은 물 안에 유백색 액체가 퍼졌다. 간헐적으로 떨리는 몸을 풀어주지 않은 영웅은 채언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잠들면 안 돼요.>
그리고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읏, 저 방금, 갔….”
채언의 몸이 경련하듯 비틀리자 영웅은 그의 몸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곧바로 채언의 겨드랑이 사이로 두 손을 집어넣고 몸을 들어 올렸다. 힘 빠진 다리가 미끄러지지 않게 허리를 꽉 붙잡고 서서 앞으로 걸어가게 한 뒤 친절하게 몸을 뒤돌려 벽에 등을 기대게 해주었다.
차가운 타일 느낌에 채언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조급해 보이는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핥는 영웅의 모습이 보였다. 방금 사정한 채언의 성기에, 여전히 꼿꼿한 자신의 것을 가져다 댄 그는 한 손을 들어 벽을 짚었다. 채언의 허리에 두른 팔에는 더 힘을 주었다.
물보다 땀에 더 젖은 채언의 머리카락이 영웅의 어깨에 닿았다. 그의 어깨에 이마를 문지른 채언은 아까 영웅이 그랬던 것처럼, 눈앞의 목에 입술을 붙였다. 초옥, 촉. 위로 타고 오르는 입술에 영웅은 살짝 등을 구부렸다. 채언은 입술 사이로 들어온 영웅의 말랑한 귓불을 물고, 배꼽까지 닿아오는 뜨거운 성기를 다시 손에 쥐었다. 즈윽, 즈윽, 몇 번 위아래로 문지르자 끈적한 액체가 채언의 손가락에 묻어 늘어졌다.
“후우….”
만족스러운 자극을 느끼며 영웅은 한 손을 들어 채언의 등을 쓸었다. 젖은 피부를 쓸어내리던 손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엉덩이를 꽉 쥐어오는 손길에, 영웅의 귓바퀴를 잘근잘근 물던 채언의 이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채언이 보지 못하는 영웅의 눈은, 이글이글 욕정으로 들끓고 있었다. 한국에 들어와서 채언을 만나기 전까지, 밤을 보내기 위한 상대를 만나지 않았던 터라 집 안에는 콘돔도 젤도 없었다. 여행지를 알아볼 것이 아니라, 필요한 물품부터 주문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흣.”
몸을 타고 오르는 쾌감에 눈가를 찡그린 영웅은 채언의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을 풀어 내렸다. 뜨거운 살 기둥 두 개가 질척하게 비벼지는 소리가 한참이나 욕실 안을 울렸다.
바스락. 이불이 스치는 작은 소리에, 감겨있던 채언의 눈이 뜨였다. 졸음기가 가득한 눈은 가늘게 뜨여 깜빡거리다가 점점 시야를 넓혀갔다. 눈앞의 것이 어렴풋이 보일 정도로만 불이 밝혀진 어두운 방 안이었다. 옆에서는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손끝에서는 일정한 속도로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편안하게 숨을 들이마신 채언은 기대고 있던 영웅의 몸에 얼굴을 비볐다. 따듯하게 맞닿은 두 사람의 맨살에서는 같은 향이 풍겼다. 채언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어깨 위에 덮여있던 이불이 스르륵 아래로 떨어졌다.
욕조 안에서 한 번, 욕실 벽에 기대서 한 번, 진짜로 샤워를 하겠답시고 물을 틀어놓고 씻다 한 번. 채언은 총 세 번을 영웅의 손에 사정하고 나서야 욕실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뜨거운 물 때문에 숨이 막혀, 거의 기절할 것처럼 흐물흐물해진 상태로 영웅의 팔에 안겨 나왔었다.
이마를 짚은 채언은 조용히 한숨을 내쉰 뒤, 암막 커튼이 쳐지지 않은 창밖을 보았다. 하늘은 완전히 깜깜해진 뒤였다. 장을 보고 들어 온 지 얼마 안 된 시각부터 그런 짓을 했기 때문에 욕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나왔을 때도 열 시가 지나지 않았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 후로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채언은 더 잘 수가 없었다.
“어디 가요?”
조심히 이불을 치우고 침대 아래로 발을 뻗는데, 숨소리가 깔린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불 스치는 소리와 함께 영웅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손바닥으로 눈을 비빈 뒤 채언과 눈을 마주했다.
“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채언 또한 목이 잠겨 있었다. 채언은 입을 손으로 가리고 작게 헛기침을 한 뒤 손을 내리며 말했다.
“배가 고파서요.”
채언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리고 있던 영웅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듣고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아. 저녁.”
영웅의 머릿속에, 소파를 벗어나기 전, 저녁 이야기를 하던 채언의 모습이 떠올랐다. 혹시 그때부터 배가 고팠던 건가.
“지금 몇 시죠.”
영웅은 고개를 돌려, 소리 없이 불빛으로 시간을 나타내는 시계를 보았다. 막 자정을 넘긴 시각이었다.
“아직 배달이 된다면….”
말을 흐리며 채언을 돌아본 영웅은 잠시 고민하다 말을 던졌다.
“얌냠치킨 시켜 먹을까요?”
정말로 배가 고팠던 채언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속옷과 잘 때 입는 옷이 모두 복도 끝 방에 있는 채언은 영웅의 가운을 빌려 입고 거실로 나왔다. 속옷과 잠옷을 챙겨 입고 뒤늦게 거실로 따라 나온 영웅은 카펫 위에 앉아 있는 채언의 뻗친 뒷머리를 쓰다듬은 뒤, 소파에 앉았다.
“옷을 몇 개 드레스룸에 가져다 놓는 건 어때요?”
요즘 같은 침대에 누워 잠들고 있었지만, 채언이 언제 복도 끝 방으로 돌아갈지 몰랐다. 잠옷을 모두 옮겨 놓는다면 자연스레 이 집에 침실은 하나가 되지 않을까 했다.
그런데 열심히 꼬드기는 말에 채언은 반응이 없었다. 멀뚱히 카펫 위에 앉아 거실을 둘러보고 있을 뿐이었다.
“뭐 봐요?”
소파에 앉아있던 영웅은 몸을 숙여 채언의 얼굴을 살폈다.
“날이 밝으면 청소를 좀 해야겠어요.”
그 말에 영웅도 거실을 둘러보았다. 입주 도우미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은 채언 덕분에 언제나, 충분히 깨끗한 집이었다.
“깨끗한데요. 그리고 내일은, 아니, 오늘부터 주말인데. 왜 일을 하려고 해요?”
“일요일에 손님이 오신다고 했잖아요.”
바닥에 굴러다니는 마시멜로를 집어 든 채언은 말없이 말랑말랑한 흰 덩어리를 손으로 눌러댔다.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채언 씨가 불편하다면 내가 누나를 밖에서 만나도 되고. 카페 같은 곳이나.”
채언의 얼굴을 보며 말하던 영웅은 입을 다물고 미소를 지었다. 마시멜로를 누르며 자신을 바라보는 까만 눈에, 알 수 없는 청원 같은 것이 담겨있는 듯해 보였기 때문이다.
“알겠어요.”
고개를 끄덕인 영웅은 소파 위에 떨어져 있는 마시멜로를 몇 개 주워 한 손에 쥐었다. 소파 위에 있던 것을 모두 주운 다음에는, 카펫으로 내려가 채언과 함께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것들을 줍기 시작했다.
양손에 마시멜로를 쥐고 있던 영웅은 물끄러미 손을 내려다보다가 채언을 불렀다.
“채언 씨.”
뜯어진 봉지 안에 떨어진 것들을 주워 담고 있던 채언은 고개를 돌려 영웅을 보았다.
“이거 느낌이 꼭.”
그는 양손으로 마시멜로를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이거 꼭, 채언 씨 엉덩이 같은데요?”
그가 무슨 말을 할까 집중하고 있던 채언의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무슨,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채언이 손안의 봉지를 꽉 쥐자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정말 느낌이, 읍.”
봉지 속에서 마시멜로를 한 주먹 꺼낸 채언은 그대로 손을 들어 영웅의 입에 가져다 댔다.
“이거. 혼자 치우세요.”
채언은 미간을 찌푸렸다. 팔을 움직이는 바람에, 아까 한참 물고 빨린 가슴에 가운이 쓸려 따가웠다. 영웅에게는 차마 말 못 할 느낌이었다.
채언이 손을 떼자, 영웅의 입에 들어가지 못한 하얀 덩어리들이 아래로 떨어져 카펫 위를 굴렀다. 입안에 들어온 마시멜로를 우물거리며, 바닥을 보던 영웅은 장난스럽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거, 아까 바닥에 떨어진 거잖아요.”
“깨끗하다고 하셨잖아요.”
채언은 뒤늦게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영웅은 어깨를 으쓱한 뒤, 입안에 남은 것을 뱉지 않고 열심히 씹어 삼켰다.
“어쨌든 나머지는 내가 주울 테니까, 채언 씨는 앉아있어요.”
소파 위에 앉는 척을 하던 채언은 다시 아래로 내려와 흰 덩어리들을 줍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웃던 영웅은 몸을 아래로 바짝 숙였다. 아까 소파 아래로 마시멜로 하나가 굴러가던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소파 아래 틈은 어두웠지만, 희끗한 형체가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뜬 영웅은 틈새로 손을 뻗었다. 어렵지 않게 말랑한 마시멜로를 잡고, 손을 밖으로 빼내려는데 손날에 얇고 딱딱한 것이 스쳤다.
<뭐지?>
일단 마시멜로를 꺼내고 나서 영웅은 다시 틈새로 손을 집어넣고 주변을 더듬었다.
<잡았다.>
스윽. 딱딱한 것에 바닥이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일으킨 영웅은 손에 든 것을 내려다보았다. 초록색의 빳빳한 여권이었다. 여권의 앞뒤를 돌려보던 그는 앞장을 펼쳤다. 무표정하게 찍힌 채언의 사진이 보였다. 몇 개월 전, 현관 앞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그때를 생각하자 영웅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채언 씨.”
“네?”
벌어진 가운을 여미며 채언이 고개를 들었다.
“이거. 채언 씨 여권 같은데요?”
느리게 끔뻑이는 눈꺼풀에 가려, 채언의 눈에는 초록색 여권을 손에 쥐고 웃는 영웅의 모습이 한 장씩 넘기는 사진처럼 보였다.
“그게,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