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팡이 핀 딸기 3권
7.
채언은 손가락을 세워 화분에 담긴 흙 위를 살살 긁었다. 적당히 구멍을 낸 뒤, 옆에 있던 축축한 티슈를 조심히 들어 올렸다. 티슈 위에는 발아한 지 얼마 안 된 토마토 새싹들이 놓여있었다. 채언은 신중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티슈에서 화분으로 천천히 새싹을 옮겨 심은 뒤 손가락으로 흙을 다졌다. 빠르면 두 달 후에 방울토마토가 열릴 것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브로콜리가 담겨있던 화분이었다.
‘저 브로콜리 화분은 처음 봤어요. 어떻게 키우는지 아세요?’
매년 브로콜리 화분을 받았다고 했으니, 채언은 영웅이 브로콜리를 키우는 방법쯤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영웅은 말 대신 행동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양손으로 각각 화분과 브로콜리 머리를 잡더니 위로 쑥 빼 올린 것이었다.
‘키우라고 준 거 아니에요. 먹으라고 준 거지. 뿌리도 없어요. 봐요.’
댕강 잘린 밑동이 드러난 브로콜리는 마트에서 파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뿌리가 어떻게 생겼을지 조금 궁금했는데. 채언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티 내지 않고 멜론 케이크를 떠먹었다.
브로콜리를 쥔 영웅은 고민이 많아 보였다. 손에 든 것을 어떻게 먹어 치워야 할지 막막해하는 것 같아서, 채언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도 흙에 있던 거라 그런지 엄청 싱싱하네요.’
‘그런가요? 난 잘 모르겠는데.’
‘내일 아침에 뭐 드실 거예요? 밥? 아니면 빵? 밥 드실 거면 반찬으로 만들어둘게요.’
‘이런, 내일 아침은 간단히 먹을 생각이었는데요. 계란이랑 주스 정도로.’
‘그럼 나중에 요리해드릴게요.’
채언은 며칠에 걸쳐, 적절한 방법으로 브로콜리를 요리에 집어넣어 없애버렸다.
브로콜리가 화분에서 뽑혀 냉장고로 들어간 다음 날. 흙만 남은 화분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던 채언은 영웅의 지난 생일 선물을 살 겸 백화점에 갔다가 방울토마토 씨앗을 사 왔다. 검색해보니 키우기 쉽고 열매도 비교적 빨리 맺히는 편이라고 했다. 영웅의 선물로 사려고 했던 것은 뜻밖에도 이미 다 팔린 뒤라 예약만 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재입고까지 일주일 정도만 기다리면 된다고 했으니 곧 매장에서 연락이 올 것이었다.
채언은 손가락을 비벼 흙을 살살 털어낸 뒤 일어섰다. 긴 컵에 물을 받아 와서는 바닥에 흐르지 않게 조심히 기울여 토마토 화분 위에 부어주었다.
빠르게 흙 안으로 스며드는 물을 보니 괜히 목이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채언은 자신도 물을 한 컵 마시기 위해 다시 정수기 앞으로 갔다. 얼음을 담고 물을 받는 도중에 핸드폰이 울렸다. 영웅에게서 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스피커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채언은 정수기에서 컵을 뗐다.
“물 마시려고 정수기 앞에 서 있었어요.”
말을 마친 채언은 작게 웃었다.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아뇨. 아까 먹었어요. 지금은 그냥 목이 말라서. 점심 드셨어요?”
컵 위를 손가락으로 매만지던 손가락에 물방울이 묻었다.
“네. 토마토는 화분에 옮겨 심었어요.”
의자를 빼서 앉은 채언은 식탁 위에 팔을 올렸다. 그 위에 엎드려 눈을 감고 통화를 이어나갔다.
이제는 메시지가 아니라 전화 통화를 하는 것도 어색하지 않았다. 채언은 영웅이 하는 말에 종종 웃음 지었다. 컵 표면에는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아… 네.”
핸드폰이 귀에서 떨어지지 않게 위치를 조정해 올려두고 채언은 컵에 손을 뻗었다. 표면을 톡톡 두드리자 컵이 흔들렸다. 커다란 물방울이 옆에 있던 작은 물방울을 먹어 치우듯 몸을 합쳤다. 그렇게 주변의 물방울 몇 개가 합쳐지다가 무게를 이기지 못해 아래로 흘러내렸다. 둥글고 긴 컵을 주욱 훑어 내린 손이 축축해졌다.
“아뇨. 그건 좀.”
영웅에게 착실히 대답하며 채언은 컵을 만지작거렸다. 검지를 타고 흐른 물은 중지와 약지 소지를 지나 식탁 위로 떨어졌다. 얼음은 빠르게 녹고 있었다. 컵 아래는 이미 물이 흥건한 상태였다. 오래 통화를 한 것도 아닌데 체온이 닿은 핸드폰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채언은 베고 있던 팔을 움직였다.
“으음.”
영웅이 하는 말에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을 때는 듣고 있다는 소리를 내는 식으로 대꾸했다.
팔을 움직여 손으로 핸드폰 끝을 잡고 내릴 때였다.
“…아!”
-채언 씨?
나지막한 영웅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아….”
채언은 숨을 몰아쉬며 다리를 적신 물을 내려다보았다.
불편한 자세로 움직이다가 컵을 쳐서 떨어뜨릴 뻔했다. 다행히 다른 손으로 컵을 잡아챘지만, 물은 이미 넘쳐흐른 뒤였다. 식탁 아래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물을 쏟았어요.”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영웅은 다른 손에 쥐고 있던 음료 캔을 흔들어 보았다. 코코넛 젤리가 들어있다는 음료는 아까 지영이 준 것이었다. 자판기에서 이온 음료를 뽑으려던 것을 잘못 눌렀다며 음료 두 개를 들고 와서는 하나를 나눠주었다.
학생들이 자주 마시는 음료라고 했는데 채언도 어릴 때 이걸 마셔봤을까. 캔을 흔든 영웅은 아까 물을 쏟았다는 채언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조심히 뚜껑을 땄다.
어서 퇴근하고 싶었다. 채언에게 줄 선물이 드디어 도착했다. 집 말고 회사로 배송시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택배를 보내도 채언이 마음대로 뜯어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왕 주는 선물이라면 제 손으로 직접 전해주는 게 좋았다. 코코넛 젤리를 우물거리며 영웅은 다리를 흔들거렸다.
선물을 받으면 채언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웃어줄까? 보조개가 폭 파인 얼굴로? 빨리 보고 싶었다. 조금 전에도 이런 마음을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건 것이었는데, 통화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전화를 걸고 싶어졌다. 영웅은 남은 음료를 단번에 털어 마시고 캔을 구겼다.
왜 저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지? 채언은 반찬을 입에 넣으며 영웅을 흘끔 쳐다보았다. 원래도 잘 웃는 사람이기는 했지만, 마냥 헤실거리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영웅은 오늘 집에 들어올 때부터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저녁을 다 먹고 설거지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소파에 앉아있지 않고 자꾸 옆에서 얼쩡거리더니, 접시를 헹굴 때마다 가로채 건조대에 꽂아 넣는 것이었다.
채언은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기분이 좋은 게 아니라 할 말이 있는 건가? 생각하기 무섭게 영웅이 채언의 손에서 접시를 가져갔다.
“다 끝났죠?”
마지막 접시를 건조대에 놓은 영웅이 물었다.
“네.”
“그럼. 잠깐 이리 와볼래요?”
영웅은 고무장갑을 벗은 채언의 손을 잡아끌었다. 데려간 곳은 소파 앞이었다.
TV를 보자는 건가? 채언은 고개를 갸웃했다. 할 말이 있는 줄 알았는데 영웅의 행동은 다른 날과 다름이 없었다. 저녁을 먹고 자기 전까지 같이 소파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은 두 사람의 일상이 된 지 오래였다.
“아! 맞다.”
이번에는 채언이 영웅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토마토 보실래요?”
영웅을 소파에 앉혀두고 채언은 화분을 들고 왔다. 새끼손톱만큼 자란 새싹 몇 개가 심어져 있었다. 영웅은 뿌듯한 얼굴로 화분을 바라보는 채언을 보다가, 채언이 고개를 들면 화분을 보는 척했다.
채언은 며칠 전부터 토마토 씨를 돌보는 것에 푹 빠져있었다. 가끔 회사에 있을 때 메시지가 와서 보면, 전날과 별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씨앗 사진이 와있고는 했다.
얼마 전에 발아한 것을 오늘 화분에 옮겨 심을 거라고 했으면서, 사진을 보내오지 않아 아까 전화로 이야기 하고 말았는데, 이제 보니 채언은 토마토 화분을 실물로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그나저나 영웅에게는 토마토 새싹을 구경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남아있었다.
“얼른 자랐으면 좋겠네요.”
“아까 낮에 심었을 때보다 좀 자란 것 같아요. 어디 가세요?”
말을 하던 채언의 얼굴이 갑자기 일어선 영웅을 따라 움직였다.
“채언 씨, 잠깐 여기 있어 봐요.”
몸을 일으키려는 채언의 어깨를 두드려 앉힌 영웅은 혼자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잠시 후 다시 거실로 나온 그는 뒷짐을 지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 영웅을 기다리고 있던 채언은 여전히 손에 토마토 화분을 들고 있었다.
“그건 나중에 다시 구경하고요.”
그 말에 채언은 거실 테이블 위에 화분을 내려두었다. 어리둥절한 얼굴의 채언을 보며 영웅은 천천히 소파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불쑥 손을 내밀었다.
“채언 씨, 생일 선물이요.”
눈앞에 내밀어진 쇼핑백을 보며 채언은 눈을 깜빡거렸다.
“제 생일은 지났는데요.”
“알아요. 지난번에 말해줬잖아요.”
영웅은 쇼핑백을 받아볼 생각을 하지 않는 채언의 손을 잡아 손잡이를 쥐여 주었다.
“한번 꺼내 봐요.”
천천히 쇼핑백 안에 손을 넣은 채언은 안에 있던 것을 꺼냈다. 선물은 고급스러운 종이 포장지에 한 번 더 포장되어 있었다. 뭔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만져보니 폭신한 게 옷 종류 같았다.
“뜯어봐요.”
왜 선물을 준 사람이 더 기대하고 있는 거지. 채언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영웅을 흘끗 쳐다본 뒤 쇼핑백을 바닥에 내려놓고 포장지를 뜯었다.
도톰하고 보드라운 털실 느낌이 났다. 하얀 스웨터였다. 펼쳐보니 소매에 빨간 실로 자수가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날이 더워진 지가 언제인데 스웨터일까. 요즘 날씨에 이걸 어디서 사 온 거지? 그리고 갑자기 생일 선물이라니. 예쁘긴 하지만.
채언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스웨터를 펼쳐 든 두 팔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영웅은 활짝 웃어줄 채언의 얼굴을 기대하며 스웨터를 잡은 손을 내려주었다.
“생일이 안 기다려진다면서요. 미리 선물 받으면, 적어도 이거 입어볼 겨울은 기다려지지 않겠어요?”
보드라운 스웨터를 쥔 채언의 손을 영웅이 따듯하게 감싸고 있었다.
“채언 씨?”
채언은 아무 말 없이 스웨터를 보고 있었다.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들었나. 취향을 좀 더 살펴볼 걸 그랬나. 기대했던 것과 다른 반응에 영웅은 조심히 눈을 굴렸다.
“감사합니다.”
가라앉은 채언의 목소리에 영웅은 얼른 얼굴을 살폈다.
“혹시,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걸로.”
스웨터를 품에 안은 채언은 고개를 저었다.
“마음에 들어요. 지금 입어 봐도 될까요?”
채언의 말에 영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놓아주자 채언은 스웨터를 들고 복도 끝방으로 향했다. 거실에 혼자 남은 영웅은 목덜미를 매만졌다.
방 안으로 들어온 채언은 문에 등을 기대고 서서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손에 쥔 스웨터를 보다가 왼쪽 손을 꽉 쥐었다. 몇 걸음 더 걷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까 잠시 이 스웨터를 입고 내년을 맞은 모습을 상상했다. 상상 속 자신은 여전히 이 집에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에 채언은 움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옷, 입어봤어요?”
영웅의 목소리가 들렸다. 채언은 스웨터를 손에 쥔 채 일어섰다. 방문을 잠그기 위해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시간을 벌어야 했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아무리 숨을 쉬어 보아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생일 선물을 받아 본 게 너무 오랜만이었다. 울컥 속에서 치미는 것에 채언은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잠시만요.”
말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문을 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 순간, 방문이 열리며 채언의 몸이 뒤로 밀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영웅은 그대로 채언을 품에 안았다.
“아직, 아직. 흑, 제가…….”
영웅은 채언의 몸을 더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 까만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천천히. 자신의 어깨에 완전히 얼굴을 묻게 했다. 어깨가 축축이 젖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울 것 같은 얼굴로 방에 들어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역시나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채언은 숨을 헐떡이며 울고 있었다.
“안 울었으면 좋겠어요.”
훌쩍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영웅은 아픈 표정을 지었다.
“웃어줄 줄 알았는데, 또 이렇게 울면 어떡해요.”
속상하게. 작게 덧붙인 그의 말에 채언은 영웅의 등을 끌어안았다.
“죄송, 흐윽… 죄송해서.”
“뭐가요.”
몇 번 눈물을 삼킨 채언은 영웅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들었다. 젖은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저는, 아무것도, 못 드렸는데.”
예약을 걸지 말고 다른 백화점에 가볼 걸 그랬다. 그랬으면 자신도 영웅에게 빨리 선물을 줄 수 있었을 텐데. 한가롭게 토마토나 심고 있었다니. 조금 전과는 다른 이유로 채언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다시 붉은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뭘 바라고 준 거 아니에요.”
영웅은 커다란 손바닥을 채언의 볼에 대고 엄지로 눈가를 쓸어주었다. 채언의 허리를 안은 팔은 풀지 않은 채였다. 오래도록 얼굴을 쓸어주자 울음은 점점 잦아들었다.
“채언 씨가 좋아할 줄 알았어요.”
그래서 여기에, 자신이 좋아하는 보조개가 팰 줄 알았는데. 영웅은 손가락으로 채언의 볼 위를 문질렀다.
“선물도 내가 좋아서 한 거니까.”
영웅은 지금까지 채언이 울 것 같은 얼굴을 할 때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신이 선물한 스웨터 때문임이 분명했다. 생일을 말하지 않은 것만 속상해하는 줄 알았더니, 선물을 챙겨주지 못한 것까지 마음에 두고 있었나 보다.
채언이 정말 그런 이유 때문에 우는 거라면 귀엽기는 했지만, 울려서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 애틋하게 눈가를 쓸어주는데, 눈물 때문에 투명한 빛이 나는 검은 눈동자 안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것이 보였다. 채언은 오로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가를 쓸어주던 손길이 멈추자 채언은 눈을 깜빡였다. 맺혀있던 눈물이 한 방울 똑 떨어졌다.
영웅은 자신의 손등을 타고 흐르는 낮은 온도에 데인 것 같았다. 멍하니 선연한 얼굴을 바라보다 입을 열고 말았다.
“좋아해요.”
조용히 헐떡이는 소리만 방 안을 울렸다.
채언은 고개를 숙여 영웅의 어깨에 다시 머리를 기댔다.
“그래서 채언 씨가 안 울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말한 영웅의 눈이 동그래졌다. 자신이 한 고백에 자신의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저도 좋아해요.”
허리를 끌어안아 오는 팔의 느낌에 영웅은 숨을 멈췄다.
“지금 뭐라고….”
“대표님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채언은 젖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간혹 훌쩍거리며 넓은 가슴에 편안히 기대었다.
“이렇게까지 직원을 챙겨주는 상사는 별로 없거든요.”
더 오래 안 충북과도 안아본 적이 없었다. 채언은 영웅이 스킨십에 후한 외국인이라 좋다는 생각을 했다.
이 집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안는다는 것은 꽤나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는 행위였다. 샤워한 지 얼마 안 된 영웅에게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그래서 이렇게 안고 있는 것이 좋았다. 영웅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채언은 영웅의 심장이 빨리 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신의 심장도 같은 속도로 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어.”
채언의 대답에 잠시 굳어있던 영웅은 조금 전 대화의 맥락을 다시 한번 파악하기 시작했다.
하. 작게 헛웃음이 나왔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요….”
따끈해진 채언의 몸을 끌어안고 있었지만 김이 새는 기분이었다. 우느라 정신없었던 사람에게 얼떨결에 고백했으니, 이렇게 될 수밖에. 본인을 직원이라고 지칭한 채언에게 이곳은 정말로 직장이기도 하니까.
영웅은 고개를 숙여 채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제대로, 정식으로, 진지하게 말해봐야겠다. 장소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로맨틱한 곳으로. 영웅은 채언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코에 닿는 목선에 입을 맞추고 싶은 것을 참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채언 씨.”
목 곁이 간지러워진 채언은 살짝 움츠러들었다. 그래도 영웅은 그를 놔주지 않았다.
“생일 축하 노래 대신 들어주기로 한 소원 쓸게요.”
“소원이요?”
“우리 어디 좀 가요. 빠른 시일 내에.”
“어디요?”
“그냥. 이 집에서 먼 곳. 조용한 산 밑이나 바다 같은 곳.”
영웅의 몸을 통해 울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던 채언은 지난번 그와 같이 본 TV 프로그램을 떠올렸다.
“약초 튀김 같은 걸 해먹을 수 있는, 그런 곳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그런 곳.”
“알겠어요.”
흐지부지 지나간 마음이 아쉽기는 했지만, 영웅은 따끈한 채언의 몸을 끌어안고 있는 것이 좋았다. 고백은 실패했지만 달래는 것은 성공했으니까. 영웅은 잔잔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분위기를 좀 더 풀어볼까 했다. 스웨터 이야기를 다시 해도 될까? 안전하게 다른 이야기를 할까.
눈을 굴려 방 안을 보던 영웅은 책상 위의 사과를 보았다. 여전히 세 알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어질러져 있던 방 안은 다시 깔끔해진 상태였다. 액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사진을 보고 싶었는데.
“채언 씨.”
“네.”
품 안에 기대어있던 채언이 고개를 들었다. 영웅은 자기 딴에는 나름 무난한 질문을 던졌다.
“사과는 왜 책상 위에 뒀어요?”
“사과요?”
그 말에 책상으로 시선을 던진 채언의 입이 꾹 다물렸다. 영웅은 조금 전 질문이 무난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사과는… 흐, 으….”
검은 눈동자에 다시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엇. 그게,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궁금해서.”
“그냥. 먹고, 먹고 싶어서요.”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사과 말고 토마토 이야기를 할걸. 사과라는 단어가 이렇게까지 슬픈 것이었나. 영웅은 이번에는 눈물을 닦아줄 기회도 주지 않고 얼굴을 가린 채 우는 채언을 겨우 달래 거실로 데리고 나갔다. 하도 울어 열이 오른 채언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서였다.
다음 날 채언의 핸드폰에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예약해둔 상품이 들어왔다는 연락이었다. 그날 저녁. 채언은 영웅에게 분홍색 셔츠와 연두색 셔츠, 그리고 검은색 수영복 바지를 선물했다.
그다음 날에는 집으로 커다란 상자가 하나 배송되어 왔는데, 안에는 고당도 꿀사과 10kg이 들어있었다.
“그럼, 여기로 할까요?”
영웅이 노트북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깨끗한 카라반 내부 사진을 보던 채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산 밑이나 바다 같은 곳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글램핑장에 가기로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영웅은 장소 몇 곳을 골라와 채언에게 보여주었다. 옵션이 추가될 때마다 비용이 껑충 뛰는 고급 글램핑장을 풀 옵션으로. 가격을 지운 내부 사진만 따로 저장해 화면을 띄워놓은 것이었다.
이곳은 뭐가 좋고 여기는 뭐가 좋다며 후보지의 장점을 설명해주는 영웅을 보면서, 채언은 대부분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글램핑은커녕 캠핑도 가본 적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엇에 중점을 두고 장소를 골라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게다가 영웅이 보여준 곳들은 전부 TV에서 보던 호텔 뺨치게 좋은 곳들이었으므로 딱히 거를만한 곳이 없었다. 그런 곳 중에서 한 군데를 고를 수 있었던 이유는 위치가 괜찮았기 때문이었다.
영웅은 조용한 산 밑 아니면 바다 같은 곳에 가고 싶다고 했다. 후보지 중 포천에 있는 곳이 그 조건에 가까웠다. 산이 가까운 호수 옆. 서울에서도 그리 멀지 않았다.
“우리 진짜로 주말에 여기 가는 거예요.”
노트북 화면을 보는 영웅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지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있어도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채언은 테이블 위에 있던 사과에 포크를 꽂아 그에게 내밀었다.
“고마워요.”
영웅이 포크를 받아들자 채언도 자신의 포크를 들어 사과 하나를 찍었다. 씹을 때마다 아삭 소리가 나는 사과는 달았다.
채언은 사과를 씹을 때마다 두 사람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건영과 영웅에게였다. 여전히 책상 위의 사과는 세 알이었다. 도저히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건영은 아직도 채언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답장도 전화도 없었다.
책상 위의 사과를 본 영웅은 사과를 10kg이나 주문했다. 겨울에 귤 먹는 사람 옆을 지나가면 상큼한 향기 때문에 귤이 먹고 싶어지는 것처럼 그는 사과가 먹고 싶어졌나 보다.
세 알이나 있는데 한 알도 나눠주지 못해 영웅이 박스째로 주문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이 부지런히 먹어도 넘치는 양이었다. 한 알을 나눠주었다면 발코니 한편을 사과 박스가 차지하는 일이 없었을 텐데.
채언은 사과를 아삭거리며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영웅을 흘끔 쳐다보았다.
영웅은 스킨십을 정말 좋아했다. 근래 들어 어깨에 머리를 기대오는 일이 늘었다. 소파에 앉아있을 때 주로 그랬는데 처음에는 TV를 보다가 졸려서 그런가 싶었다. 하지만 졸리냐고 물어보면 말짱한 목소리로 아니라고 대답해왔다. 초록색 눈동자도 눈꺼풀에 가려지지 않은 채였다. 너무 오래 기대있어 어깨를 무겁게 하는 것도 아니고 딱히 비켰으면 하는 마음도 들지 않았다.
혹시 미국에 있을 때, 다른 직원이랑 함께 살 때도 이랬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왜인지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무심코 어깨에 기대어 있는 영웅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었다가 편안함을 느낀 뒤로는 그가 마음대로 하게 놔두었다.
이런 걸 상부상조라고 하나. 채언은 포크에 꽂혀있던 사과를 한입 베어 문 뒤 영웅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기댔다. 하핫.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 왜요?”
갑작스레 들려온 채언의 웃음소리에 영웅은 고개를 움직이다 멈칫하고 눈을 굴렸다. 채언의 보조개가 보고 싶었지만, 고개를 들면 붙어있던 몸이 떨어질 것 같았다.
사실 꽤나 긴장하는 마음으로 채언에게 다가가는 중이라 이렇게 붙어있을 때면 몸을 움직이는 것이 부자연스러워졌다. 고백할 타이밍을 재보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영웅은 보조개를 보지 못해 아쉬운 마음 대신 입에 든 사과를 씹었다.
“이렇게 있으니까, 대표님 사과 씹는 소리가 더 잘 들려서요.”
꼭 동굴에 있는 것 같아서, 그냥 웃겼어요. 그렇게 말한 채언의 목소리 뒤에도 아삭거리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턱을 움직이는 느낌과 간지러운 소리가 딱 달라붙은 몸을 통해 전해졌다. 영웅은 웃지 못하고 괜히 귓가를 긁었다.
“아. 앨리스 님이 미안하다고 전달해달라던데요.”
“저한테요? 왜요?”
“송 교수님이 자꾸 귀찮게 하지 않느냐고요.”
“귀찮을 정도로 연락하시는 건 아닌데. 전 괜찮아요.”
회식 이후로 여러 날이 지났지만, 송병규 교수는 채언에게 간간이 안부 메시지를 보내오고 있었다. 채언이 답장을 하면 송 교수는 그가 맡을 예정인 프로그램에 대한 홍보로 끝인사를 하곤 했다. 건영에게 무시를 받은 뒤로 채언은 송 교수의 연락에 꼬박꼬박 답장하고 있었다.
송 교수의 메시지와 오지 않는 건영의 답장을 생각하던 채언은 포크에 꽂혀있던 작은 사과 조각을 마저 입에 털어 넣었다. 씹는 속도는 아까보다 현저히 느려진 상태였다.
“모레, 포천 가기 전날에 퇴근하고 필요한 거 사러 가요.”
“네. 그런데 저 그런 곳에 가는 건 처음이라 뭘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캠핑 같은 것을 하게 된다면 숯이나 침낭 같은 것을 바리바리 챙겨가야 할 줄 알았는데. 영웅이 보여준 곳들은 식기부터 침구까지 대부분 준비되어 있었다.
“텐트까지 챙겨가는 캠핑 준비물에서 다 빼고 음식만 좀 가져가는 걸로 생각하면 돼요.”
“캠핑을 가본 적이 없어서요.”
“잠깐만요.”
영웅은 채언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는 작은 얼굴을 마주 보며 물었다.
“한 번도?”
“네.”
“가족 아니, 친구들이랑 비슷한 여행 가본 적 없어요?”
채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조금…….”
채언의 까만 눈이 도르륵 옆을 보다 다시 돌아왔다.
“기대되기도 하고,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니 조금 긴장되네요.”
“왜요?”
“첫 단추를 잘 끼워야 그다음도 있을 테니까.”
긴장된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영웅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네요.”
“그럴 거예요.”
채언은 자신을 쳐다보는 영웅의 초록색 눈동자를 보다가 그 너머에 있는 트리로 시선을 던졌다. 여름이 가까워지는 동안에도 겨울 추억을 담은 트리는 이 집에 남아있었다.
더 이상 천사 날개에 양말이 걸려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초콜릿을 지고 있던 천사를 생각하자 채언은 웃음이 나왔다. 영웅은 보조개가 폭 팬 얼굴로 웃는 채언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좋은 기억으로 남을 거예요.”
맑은 웃음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며 영웅은 어느새 뜨끈해진 목덜미를 만졌다.
“맞다. 그래서 뭘 사야 하죠? 목록을 미리 적어두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소파에서 일어선 채언은 메모지를 가져오겠다며 식탁 앞으로 갔다. 전화나 메시지를 자주 주고받는 와중에도 식탁 위의 메모지는 치워지지 않았다.
펜과 메모지를 가져온 채언은 다시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이제 준비물을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드는 얼굴에는 비장함이 담겨 있었다.
“고기나 술 정도? 그쪽에서도 살 수 있긴 하지만, 미리 먹고 싶은 걸 골라서 사가면 좋잖아요.”
“고기랑 술….”
버릇대로 입으로 소리를 내며 글씨를 쓰는 채언을 바라보던 영웅이 별안간 입을 열었다.
“그런데 술은 조금만 가져가는 게 낫겠어요.”
“네. 집에서 자는 게 아니니까요. 다음 날 다시 짐도 챙겨야 하고.”
“으, 음.”
의도가 있어 보이는 으음, 에 메모지를 보고 있던 채언이 고개를 들었다.
“왜요?”
“앞으로는 둘 다 술을 줄이는 게 좋겠어요.”
영웅이 밖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일은 없었고 집에서 같이 마신 날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채언은 의미심장한 말을 해놓고 딴청을 피우는 영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혹시 제가 전에 술 마시고 무슨.”
초록색 눈동자가 도르륵 움직였다. 반응이 있었다.
“실수 같은 걸… 했나요?”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겼던 날. 채언은 죽을 먹으면서 영웅에게 혹시 자신이 간밤에 어떤 실수를 하지는 않았는지 물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그러셨는데… 그때.”
소심하게 메모지 위를 끼적이던 채언은 술 위에 빗금을 그었다.
“실수 같은 거 안 했어요.”
아예 술이라는 글자를 지워버리려는 손짓을 막으며 영웅이 웃었다.
“그냥. 채언 씨 데리러 가려고 전화했을 때 약간 애를 먹었죠.”
“어. 왜… 왜요?”
“술 많이 마셨으면 데리러 간다고 했더니 갑자기 숫자를 세더라고요. 아마도 소주를 몇 병이나 마셨는지 세고 있던 것 같은데.”
영웅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채언의 눈동자가 혼란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나온 숫자가, 거의 열 병?”
“거짓말. 거짓말하지 마세요. 저 그렇게 못 마셔요.”
“그러니까 취한 거죠. 채언 씨.”
그 말에는 또 긴가민가했다. 장난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위해 채언은 수치스러움을 참고 물었다.
“그리고. 제가 또, 뭐 안 했죠?”
자신 없는 목소리에 영웅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내려왔다.
“나한테 엄청나게 보고 싶다고 했어요. 엄청! 많이! 그러니까 빨리 데리러 오라고.”
이번에는 거짓말하지 말라고 펄쩍 뛰지 않을까. 채언의 반응을 기대하며 영웅은 장난기 가득한 입술을 물었다.
“제가, 제가.”
예상대로 채언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말로 했어요?”
“네?”
그러나 당황한 것은 영웅이었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냐고. 그럴 리 없다고 부인할 줄 알았는데.
“회식 자리에서 그런 생각을 하긴 했던 것 같은데. 당사자한테 말한 줄은 몰랐어요.”
채언은 살짝 달아오른 뺨에 손바닥을 대고 문질렀다.
“술은 안 사는 게 좋겠어요. 아니. 저는 안 마실래요. 대표님 드실 것만 사는 거로 해요.”
그러고는 다시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중얼거리며 펜을 움직이는 채언의 모습에, 영웅은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막았다.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참기로 했다.
밤이 더 깊어지기 전에,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목록을 적었다.
“컵은요?”
“그쪽에 있어요.”
이름이 호텔이 아닐 뿐이지, 호텔 수준의 카라반을 예약하는 것으로 결정했기 때문에 사갈 것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혹시 빠진 게 없나 둘은 열심히 말을 주고받았다.
노트북으로 인터넷 검색까지 하며 필요한 물건을 찾아본 둘은, 한참 뒤 살 것 외에도 준비물을 확정 지었다.
필요한 물건을 적어놓은 메모지는 얌냠치킨에서 받은 자석을 사용해 냉장고에 붙여놓기로 했다.
-필요한 것-
고기, 술, ★술 조금만★, 양념(소금이나 후추 허브솔트), 양송이버섯
물(2L짜리로), 음료수, 양파, 과일->사과 많으니까 사과
세면도구(수건은 있음), 속옷, 겉옷, 잠옷, 갈아입을 옷
소시지, 모기약?, 라면
튀김재료(미리 사서 조금만 덜어가기)
아이스박스
각자의 방으로 자러 들어간 것은 밤이 늦은 시각이었다.
“채언 씨. 이거 마셔요.”
영웅은 주스를 따른 컵을 채언 쪽으로 밀어주었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식빵을 씹고 있던 채언은 네네, 대답했지만 핸드폰 화면에 고정한 눈을 들지는 않았다.
“오늘 밤늦게부터 내일 새벽까지 비가 내릴 거래요. 그런데 그 뒤로는 쨍쨍하다니까 괜찮겠죠?”
“네. 괜찮아요. 우린 토요일 낮에 출발할 거니까.”
“일기예보가 틀릴 수도 있어요. 혹시 새벽이 아니라 해 뜨고 나서 비가 내리면 어떡하죠?”
“그래도 괜찮아요. 카라반 입구에 천막이 처져 있으니까. 비가 온다고 해도 걱정할 건 없어요.”
영웅은 턱을 괸 채 식빵을 씹었다. 주말여행 날짜와 시간을 확정 지은 뒤로 채언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있었다. 어젯밤에도 그랬다. 글램핑을 엄청나게 기대하고 있는 것이 느껴져 영웅은 가슴이 뻐근했다. 미간을 찌푸린 채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채언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기 때문이다.
비가 오는 날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 주말에는 비가 내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직 장마 기간도 아니고 내려봤자 보슬비일 테니까. 소나기가 내린다 해도 채언과 함께 있을 테니까. 이름만 서재인 꽉 막힌 방에 들어가 온종일 귀를 막고 있는 것보다 둘이서 비 내리는 것을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영웅은 아직도 일기예보를 들여다보고 있는 채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손가락으로 톡톡 식탁을 두드렸다. 그 소리에 식빵을 우물거리던 채언이 눈을 들었다. 검은 눈과 마주친 영웅은 웃으며 턱짓을 했다.
“아.”
앞에 놓인 컵을 두 손으로 쥔 채언은 머쓱하게 웃으며 주스를 마셨다.
출근하는 영웅을 배웅한 뒤 채언은 부지런히 집을 쓸고 닦았다.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더 꼼꼼히.
오전에 할 일을 끝낸 뒤 채언은 손을 씻었다. 물기를 턴 다음 핸드폰을 꺼내 연락 온 것이 없는지 메시지 함을 열어 확인해보았다. 건영에게 답장이 왔는지 확인하는 것은 채언의 습관이 되었다.
어젯밤. 전화를 했을 때 신호음이 갔던 것으로 보아 차단당한 것은 아니었다. 나중에라도 연락을 받아줄 생각이 있다는 걸까. 채언은 지난번, 자신이 건영의 번호를 차단하지 않고 놔두었던 이유를 떠올려보려 했다. 왜 그랬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완전히 그 애를 끊어내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걸까. 아니면 얕은 희망에 지쳐서 떨어져 나가게 하려고 했던 걸까.
채언은 손가락을 움직여 보고 있던 화면을 내렸다. 일방적이던 건영의 메시지 아래, 자신이 보낸 일방적인 메시지가 줄줄이 늘어져 있었다.
“하아….”
답답한 마음에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건영과의 메시지 함을 나온 뒤. 채언은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온 메시지를 열었다. 여권이 발급되었으니 찾으러 오라는 내용이었다. 며칠 전에 온 것이었다. 그동안 찾으러 가는 것을 미루었는데 오늘은 가볼 예정이었다.
저녁에는 영웅과 글램핑에 가서 먹을 음식을 사기로 했다. 그러니 오늘이 적절했다. 여권을 손에 쥐고 나서 혹여 기분이 좋지 않더라도 저녁에는 기분이 좋아질 테니까.
대학교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엠티는 가보지 못했고 중고등학생 때 친했던 몇몇과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다. 그래서 채언은 성인이 되고 나서 어딘가에 놀러 가본 적이 없었다. 같이 갈 사람도 없었고, 시간도 돈도 없었으니까. 부모님과의 기억을 되찾은 이후 어디에 놀러 가자는 말이 두렵게 다가왔던 이유 때문도 있었다.
그래도 건영이와 살 때 어디라도 같이 다녀올걸. 둘이 함께였으니 어릴 때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바쁘게 살아왔는데 남은 게 하나도 없었다.
씁쓸한 마음으로 식탁 위에 핸드폰을 내려놓은 채언은 찬장에서 컵을 하나 꺼냈다. 토마토 화분에 물을 주기 위해서였다. 정수기 물을 받아서 부엌을 나서려는 찰나. 냉장고에 붙어있는 메모지가 보였다. 기대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린애도 아닌데 자꾸만 일기예보를 찾아보게 되었다. 날씨가 좋았으면. 별일 없이 무사히 포천에 도착했으면. 설레는 마음으로 메모지 위를 쓸어본 채언은 작게 웃으며 부엌을 나섰다.
새싹은 금세 또 자란 것 같았다. 컵에 있는 물을 절반쯤 화분에 부은 뒤 채언은 남은 것을 마셨다. 점심을 먹기 전에 여권을 찾아올 생각이었다.
방에 들어간 채언은 얇은 후드를 걸친 뒤 이어폰과 지갑만 챙겨 집을 나섰다.
지난번에는 적막했던 골목이 건물 공사 소리로 인해 시끄러웠다. 깡깡 내려치는 소리와 드릴로 땅을 파는 듯한 소리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잠시 조용했다가 시끄러워지기를 반복하는 것에, 채언은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틀었다. 가사가 없는 음악을 들으며 걷는 길은 지난번보다 나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가야 하는 길만 보고 걸을 수 있었다.
그때였다. 듣고 있던 잔잔한 음악이 끊기고 커다란 벨 소리가 채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소리였다. 이어폰을 꽂고 있을 때 전화가 온 건 오랜만이라, 당황한 채언은 귀에 꽂은 이어폰을 만지작거리다가 허둥지둥 후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겨우 화면을 터치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채언 씨. 지금 통화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사실. 지금 집에 왔거든요.
“집에 오셨다고요? 아직 시간이 이른데. 아침에 뭐 두고 가셨어요?”
-일찍 퇴근했어요. 채언 씨 놀래켜주려고 말 안 하고 왔는데. 지금 밖인가 봐요?
“네. 나온 지 얼마 안 됐어요.”
-이런, 엇갈렸네요. 말해주고 올걸.
“잠깐 볼일이 있어서 나왔어요. 금방 들어가긴 할 건데. 점심은 드셨어요?”
-채언 씨는요. 점심 먹었어요?
“저는 아직이요. 진짜 금방 들어갈 거라, 집에 가서 먹으려고요.”
-볼일은 언제 끝나는데요? 혹시 누구 만났어요?
“아뇨. 그게 은행 같은, 그런 곳에 볼일이 있었던 거라. 혼자 있어요. 그리고…….”
말을 멈춘 채언은 핸드폰 시계를 확인했다.
“삼십 분 내로 집에 갈 수 있어요.”
어차피 여권은 찾기만 하면 그만이고 택시를 탄다면 금방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는데. 혹시 집에서 먼 곳이에요? 데리러 갈게요.
“아뇨. 가까워요.”
-그래도 데리러 갈게요. 밖에서 같이 점심 먹고 내일 사용할 음식 재료 사러 가요.
“여기 정말 가까워서 괜찮아요. 막 퇴근하셨으니까, 조금 쉬고 계시면 제가 집 근처 도착해서 전화 드릴게요.”
-가까우면 더 좋죠. 사실 나 배고프거든요. 거기가 어딘지 위치 알려줄 수 있어요?
뜬금없이 발급받은 여권을 찾으러 왔다고 하면 이상한 의심을 살 것 같았다.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괜히 찔린 채언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보이는 건물 이름을 댔다.
“맞다. 그럼 오실 때 냉장고에 붙여놓은 메모지요. 그거 가져와 주세요.”
-알겠어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아뇨. 딱히.”
-생각해봐요. 먹으러 가게.
금방 가겠다는 영웅의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핸드폰을 쥔 채언은 목적지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빳빳한 여권을 쥔 채언은 숨을 몰아쉬며 다시 골목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예상대로 여권을 찾는 것은 금방이었지만 아까 건물 이름을 댄 곳까지 되돌아가야 했다.
영웅은 근처까지 왔지만, 차를 댈 곳이 없어 서행하며 주위를 도는 중이라고 했다. 서로 길이 엇갈릴까 봐 채언은 마음이 급했다. 거친 숨소리를 들키지 않기 위해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숨을 쉰 다음 다시 얼굴에 댔다.
“왼쪽으로 도셨다고 했죠? 저, 그쪽으로 가고 있어요.”
-지금 파란 간판 편의점 보이는데. 혹시 보여요?
“어… 아뇨. 좀 더 가볼게요. 저는 녹색 간판 해물탕집이랑 그 위에 노래방이 있는 건물 근처거든요.”
-녹색 간판 해물탕집이랑 노래방. 아!
“건물 보이세요?”
-그게 아니라. 여기 차 댈 곳 찾았어요. 잠깐 주차해놓고 걷는 게 낫겠어요.
“네. 저는 편의점 있나 계속 둘러보고 있을게요.”
-알겠어요. 그럼 전화 다시 걸게요. 잠깐만요.
전화가 끊어졌다. 채언은 주변을 둘러보며 골목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쿵쿵.
“뭐지?”
통화에 신경 쓰느라 인지하지 못했는데 공사장 가까이 온 것 같았다. 아까보다 소음이 심했다. 걸어갈수록 소리는 더 커지고 있었다. 양옆을 살피던 시야를 넓혀 앞을 보니 공사장이 코앞이었다. 깡깡 내려치는 소리를 듣던 채언은 자리에 멈춰 섰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는데 목 곁이 서늘했다.
영웅은 시끄러운 소리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잠시 소음이 줄어든 틈에 정신을 차린 채언은 서둘러 핸드폰 화면을 켰다. 최근 통화 목록 제일 위쪽에 자리한 영웅의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채언 씨.
“여기 오지 마세요.”
-네? 왜….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요. 오지 말고 차 안에 계시면 제가 갈게요.”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지금 막 주차하고 나왔는데.
그러고는 들려오는 목소리가 없었다. 채언은 좋지 않은 느낌에 다급히 영웅을 불렀다.
-어? 채언 씨!
잠시 멀어졌던 영웅의 목소리가 이중으로 들렸다. 채언은 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건물 사이에서 나온 영웅이 팔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사람 없는 골목에 그와 단둘뿐이었다. 백 미터, 아니, 오십 미터도 되지 않는 것 같은데. 짧은 길이 멀게 느껴졌다. 골목 안이 영웅의 모습과 함께 어그러지는 것 같았다.
채언은 달리기를 준비하는 선수처럼 숨을 골랐다. 입으로 내뱉은 숨이 귓가에 달라붙었다. 불안한 고요였다.
-그쪽으로 갈게요.
그렇게 말한 영웅은 귀에서 핸드폰을 떼어내고 있었다. 멍하니 그의 얼굴을 보던 채언은 다급히 말했다.
“아니, 오지 마세요. 제가!”
콰앙. 쾅! 쾅!
통화가 끊어지지 않은 핸드폰 스피커를 통해서, 그리고 곧바로 채언의 귓가로 깨질 듯 큰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슬로모션으로 영상을 틀어놓은 것 같았다. 핸드폰을 떨어트린 영웅이 귀를 막고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 보였다.
쿠웅 쿵. 가슴을 때리는 소리와 함께 눈을 크게 뜬 채언은 걷기 시작했다. 걸음걸이가 점점 빨라졌다. 달렸다. 목 안이 콱 막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땅을 뒤집는 소리 말고, 쇠를 내리치는 소리 말고, 차라리 목소리를 크게 들려주고 싶은데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달리는 제 발에 걸려 넘어질 뻔한 것을, 몸을 휘청이면서도 넘어지지 않고 뛰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영웅에게로 달려간 채언은 곧바로 그를 감싸 안았다. 영웅은 몸을 웅크린 채 양손으로 귀를 막고 있었다.
“괜, 괜, 괜찮. 으읏.”
괜찮은지 물어보고 싶은데 목이 콱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채언은 품에 안은 영웅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 몸을 더 굽혔다.
크게 뜨인 초록색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영웅은 공포에 질린 듯 밭은 숨을 쉬고 있었다. 얼굴이 창백했다. 상태가 좋지 않았다. 단순히 잘 놀라고 큰 소리를 싫어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채언의 손에 영웅의 몸이 떨리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채언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어쩔 줄 모르고 영웅을 붙잡은 손에만 더욱 힘을 주었다. 핸드폰. 손에 핸드폰이 있었다. 채언은 패닉에 빠진 듯한 영웅을 더 꽉 끌어안으며 119에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스피커 너머에서 물어오는 목소리에 채언은 더듬거리며 눈에 보이는 건물 이름을 댔다.
“네, 네에. 여기. 빨리 와주세요.”
환자의 상태를 묻는 말에 채언은 눈에 보이는 상황을 그대로 설명했다. 목이 메어 겨우 목소리를 낸 것은 조금 전과 다르지 않았다.
통화를 하는 사이 잠시 소음이 멈추자, 채언은 재빨리 고개를 숙여 영웅의 눈을 보며 물었다.
“괜찮, 괜찮으세요?”
그러나 그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불안하게 주변을 살피던 채언은 119와 연결된 전화를 끊어버리고 핸드폰에 이어폰을 꽂았다. 땀이 나서 미끄러운 손으로 음악을 틀고 영웅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자신을 바라보게 한 뒤 귀를 막고 있는 그의 손을 힘주어 떼어냈다.
“이거, 이거 들으세요. 그리고 그 위로, 제가, 손을 덮어드릴게요.”
영웅의 귀에 이어폰을 꽂아준 뒤 채언은 다시 그의 몸을 안았다.
“다, 막아드릴게요.”
팔을 교차해 영웅의 머리를 감싸 안고 손으로 귀를 꽉 막아주었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골목에 태양을 등진 두 사람의 그림자가 뚜렷하게 늘어져 있었다. 바닥에 엉킨 검은 형체를 보는 채언의 눈에 차오른 것은 선명한 두려움이었다.
차르륵. 커튼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얀 침대에 누워 잠든 영웅의 얼굴을 보고 있던 채언은 심란한 표정으로 의자에서 일어섰다. 커튼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영원의 비서, 김진원이었다. 입주 도우미 재계약을 진행할 때 얼굴을 보고 그 뒤로는 메시지나 전화로만 연락했던 사람이었다.
진원은 묵례한 뒤 손을 내밀어 채언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제야 인사드리네요. 오랜만입니다. 심채언 씨.”
채언의 연락을 받고 병원에 온 그는 영웅의 상태를 확인한 뒤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다시 나타났다. 채언은 내내 영웅의 옆을 지키느라 진원이 어디에 다녀왔는지는 알지 못했다. 서류접수를 하거나 의사를 만나고 왔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가볍게 맞잡고 있던 두 사람의 손이 떨어졌다.
“때마침 옆에 계셨다니 다행입니다.”
“네.”
과연 그것이 다행일까. 채언은 링거줄과 연결된 영웅의 팔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진원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네.”
“대표님. 그러니까, 서영웅 님은 어디가 아프신 건지…….”
그의 이름을 이렇게 말하게 될 줄은 몰랐다. 눈을 감고 있는 영웅의 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채언은 손을 뒤로 감춘 뒤 주먹을 쥐었다.
“계약조건에 적혀있던 것처럼 소리에 많이 민감하세요. 그리고.”
“심채언 씨.”
진원은 입술을 올려 웃었다. 완벽하게 관리된 표정이었다. 웃고 있었지만 다정함은 배어있지 않았다.
“많이 놀라셨나 봅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집에 가 계세요.”
“저는.”
“가실 때는 택시 타고 가세요. 따로 비용 청구는 안 하셔도 됩니다.”
“네?”
“서영웅 님과 병원까지 동행해주셨으니 할 일은 다 하셨습니다. 계약조건대로 추가 수당이 지급될 겁니다. 택시비도 포함해서요.”
“제가 궁금한 건 그런 게 아니라.”
하지만 채언은 더 물어볼 수가 없었다. 진원은 돌려 말하고 있었다. 집주인에게 어떤 문제가 있건 그것을 입주 도우미에게 알려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당신은 그저 계약서에 쓰인 일만 제대로 하면 된다는 뜻이었다. 그 이상 알려고 하지 말고.
진원이 무례한 언어를 사용하거나 깔보는 표정 따위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채언에게도 눈치는 있었다. 그리고 그게 맞았다. 영웅과 자신의 사이는 고용인과 피고용인, 집주인과 입주 도우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채언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추가 수당이라니. 전에는 자신이 먼저 바란 적도 있었다. 영웅과 식사를 함께 하기 시작한 것도 돈 때문 아니었나. 그랬으니 이제 와서 진원의 말에 기분 나빠할 필요 없었다. 하지만 목이 콱 막혀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네. 저는 집으로.”
꽉 쥔 주먹 사이로 손톱자국이 새겨지는 것이 느껴졌다. 손바닥이 아파야 하는데 가슴이 아팠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택시에서 내린 채언은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갔다. 잘 부탁드리겠다고 해놓고 영웅이 입원할 1인실이 준비되는 것까지 꾸역꾸역 보고 온 참이었다. 혹시나 도와야 할 일이 생기지 않을까 머뭇거린 것이었는데, 자신이 그곳에 남아서 할 일은 없었다. 결국 혼자 돌아오고 말았다.
채언은 혼자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혼자서 신발을 갈아 신고 복도를 걸었다. 쓰러진 것은 영웅인데 왜 자신의 기력이 쪽 빨린 느낌이 드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소파에 앉은 채언은 멍하니 TV 화면을 바라보았다. 전원을 켜지 않아 까만 화면에 홀로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자꾸만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거실 한쪽에 놓인 토마토 화분이 낮에는 파릇파릇해 보였는데, 지금은 시들시들 죽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수돗물을 부어주는 다른 화분과 달리 특별히 정수기 물을 부어주면서 정성을 들이는 것이었다. 이제 막 올라온 새싹인데, 왜 저렇게 늘어진 것 같지. 뭐가 부족한 거지.
토마토 화분을 보던 채언은 자신 또한 점심으로 물 반 컵만 마신 것이 생각났다. 배가 고픈 건가. 그래서 속이 허한가. 입맛은 없었지만, 뭐라도 먹어야 기운이 날 것 같았다. 배가 든든하면 기분이 나아질지도 몰랐다.
채언은 방금 앉은 소파에서 다시 일어섰다. 천천히 걸어 냉장고 앞으로 간 뒤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아….”
아침까지 여기 메모지가 붙어있었는데. 냉장고에는 이제 자석만 남아있었다.
아까 영웅에게 메모지를 가지고 와달라고 부탁했는데. 그는 필요한 물건이 적힌 메모지를 잘 챙겨서 자신에게 오고 있었나 보다.
주말에 같이 글램핑을 가기로 했는데. 냉장고 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채언은 입술을 깨물며 냉장고에 머리를 기댔다.
적막한 집 안이 싫어서 채언은 TV를 틀려고 했다. 그런데 리모컨이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소파 쿠션 아래 깔려있는지도 몰랐다.
대충 주위를 둘러본 채언은 리모컨 찾는 것을 쉽게 포기했다. 손에는 사과 한 알을 쥔 채였다. 발코니에 놔둔 사과 박스에 들어있던 것이었다.
채언은 의미 없이 고개를 돌려 까만 화면을 보았다. 진원이 입원 수속을 마쳤으니 영웅은 오늘 집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었다. 매일 저녁 그와 소파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일과였는데. 지금부터 뭘 해야 할지 머릿속이 멍했다. 이 집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그때는 혼자 방 안에서 뭘 하며 지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마치 멈춰있는 것 같았다.
채언은 그냥 이렇게 아침까지 버티고 싶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꾸만 창백하게 질린 영웅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디가 아픈 걸까.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소리와 관련된 무언가가.
그는 단지 청각이 예민한 게 아닌 것 같았다. 구급차 안에서 영웅은 귀를 막고 있던 손을 떼고 허리 부근을 잡고 있었다. 피가 나는 상처를 지혈하듯이. 힘줄이 오른 손으로 영웅이 부여잡고 있던 곳은 문신이 새겨진 자리였다. 얇은 흉터가 그어진 살 위를 교묘하게 가리고 있던 문신. 수영장에 처음 갔던 날 본 것이었다.
등을 굽힌 채언은 빈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혼자 이렇게 고민해본다 해도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영웅의 상태를 추측해볼 뿐이었다.
진원은 영웅이 쓰러지다 머리를 다친 것도 아니니, 그의 상태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안정제를 맞고 잠든 것뿐이라고. 괜찮다고 했으면서 입원까지 하는 것은 왜일까. 그때부터 시간이 좀 지났는데 지금은 깨어났을까. 손에 힘을 주자 딱딱한 사과에 손가락 마디가 눌렸다.
어젯밤에도 함께 소파에 앉아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는데. 사과를 나누어 먹으면서. 자꾸만 몸이 축 처지는 기분에 채언은 입술을 깨물었다.
“읏.”
기분 나쁜 감각이었다. 하도 깨물어 입술에 멍이라도 든 듯했다.
입술이 아파서 채언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달콤한 걸 먹으면 좀 나아질까. 내키지 않았지만, 손을 들어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흐윽.”
카펫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사과 맛이 전처럼 달게 느껴지지 않았다.
“뭘 잘했다고 우는 거야.”
옷소매로 눈물을 닦은 채언은 테이블 위에 사과를 내려놓았다. 한입 베어 문 속살에는 입술에서 스며 나온 피가 번져 있었다.
그때였다. 핸드폰 메시지 알림음이 들렸다. 숨을 멈춘 채언은 서둘러 후드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도우미 계약 김진원 비서님: 안녕하세요. 김진원입니다. 심채언 씨 집에 잘 들어가셨는지 확인차 연락드렸습니다.]
기다리던 누구의 번호도 아니었다. 입술을 꾹 다물고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던 채언은 서러운 마음이 올라와서, 흐읍, 숨을 삼켰다 내쉬었다. 겨우 손가락을 움직여 짧게 답장을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알림음이 울렸다.
[도우미 계약 김진원 비서님: 혹시 지금 전화 통화 가능하십니까? 걱정하실만한 일 때문은 아닙니다.]
또다시 기대했지만 역시나 실망스러웠다.
참아보려 했는데. 핸드폰 액정 위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이런 상태로는 통화를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채언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답장을 보냈다.
“…아뇨.”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는데 빳빳한 종이 같은 것이 만져졌다. 채언은 손에 잡힌 것을 꺼내 보았다. 낮에 찾은 여권이었다.
“…흐윽. 읏.”
소파 위로 엎드린 채언은 팔에 얼굴을 묻고 울기 시작했다. 영웅이 쓰러진 것은 다 자신 때문이었다. 여권을 찾으러 가지만 않았으면 영웅이 그 자리에 올 일은 없었을 텐데. 오늘이 아닌 다른 날이었다면. 하다못해 발급 완료 메시지를 받은 날 바로 찾으러 갔더라면.
오늘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그를 만나는 저녁을 보험처럼 여기고 나갔던 것이 문제였다. 그러지 말걸. 혼자 속상하고 말걸. 또 다른 사람에게 불행을 옮겨버렸다.
채언은 몸을 웅크린 채 계속 울었다. 팔 안에 얼굴을 숨겼지만 헐떡이며 우는 소리가 내내 거실을 울렸다.
<죄송하지만, 심채언 씨와 통화는 어려울 것 같은데요.>
진원은 방금 온 메시지를 영웅에게 보여주었다.
무례함을 무릅쓰고 남의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본 영웅의 눈썹이 아래로 처졌다. 자신의 핸드폰은 액정이 나가서 진원에게 대신 채언과의 연락을 부탁한 것이었다. 많이 놀랐을 텐데. 채언은 지금 괜찮을까. 직접 물어보고 싶은데 통화를 할 수 없다니 답답했다.
<혹시 병원에 와서 많이 놀라거나 무서워하지는 않던가요?>
<무서워했다기보다는 걱정은 조금 하셨습니다.>
진원의 말에 영웅은 한숨을 쉬었다. 어렴풋이 자신을 끌어안던 채언의 모습은 기억이 나는데 그때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무슨 말을 나눴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하필 이런 모습을 보여주다니. 나약하고 비참한 꼴이었을 게 분명했다. 그깟 공사장 소리 때문에 이렇게 되다니. 아까 들었던 쇳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 같아 영웅은 미간을 찌푸렸다.
<난 괜찮다고 메시지 하나만 더 보내줄래요? 부탁할게요.>
지금쯤 채언은 쉬려고 침대에 누웠을지도 몰랐다. 쓰러진 자신을 챙기느라 고생했을 테니까. 통화가 불가하다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면, 정말 이쪽에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놀랄까 봐. 영웅은 진원에게 메시지 하나만 더 남겨 달라고 부탁했다.
<네. 그럼 옷은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
영웅이 병원복으로 갈아입기 전에 입고 있던 옷을 챙겨 든 진원은 새 옷이 담긴 쇼핑백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건 여기 있습니다.>
귀마개가 든 작은 케이스는 베개 위에 놓였다.
대충 눈인사를 해서 진원을 보낸 영웅은 침대 위에 털썩 누웠다. 주말을 기대하며 일기예보를 확인하던 채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하필 이런 날.
<멍청이.>
답답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토독, 토독.
톡.
소파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던 채언은 귓가를 거슬리게 하는 소리에 움찔 눈썹을 찌푸렸다.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몽롱한 와중에도 계속해서 토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늘게 뜨이던 눈이 이내 다시 감겼다. 눈물 때문에 짓무른 눈가가 따가웠다. 아직도 축축한 소매에 눈을 비빈 채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집 안이 어두웠다. 어느새 밤이 된 것이었다.
채언은 손을 들어 뜨끈한 이마를 짚었다. 울다 잠들어 머리가 아팠다.
토독. 톡. 톡.
그런데 왜 여기 누워있었지? 멍하니 앉아있던 채언은 일어서서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걸어갔다. 창밖으로 비가 내리는 것이 보였다. 가로등 빛이 비치는 곳을 확인해보니 빗줄기가 약하지 않았다.
채언은 발코니 쪽으로 가서 창문을 연 뒤,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토독. 톡.
톡, 톡.
금방 손을 적시는 빗방울에 체온이 식어가는 것 같았다.
툭. 커다란 빗방울이 손바닥에 고여 있던 물 위로 떨어졌다.
투둑, 툭. 빗소리에 맞춰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왜 이렇게 불안하지.
비. 그리고 불빛. 쿠르릉 소리를 내며 치던 천둥.
몽롱한 채언의 눈앞으로 창백한 영웅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비 오는 날을 싫어하는 사람인데. 천둥이 치면 어쩌지. 천둥소리 대신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채언의 온몸을 두드리고 있었다.
‘어제는 몸이 좋지 않아서 일찍 잤어요. 제가 잘 놀라잖아요.’
‘천둥소리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헤드폰을 끼고 있느라, 채언 씨 들어오는 소리를 못 들었어요.’
안 되는데. 그럼 안 되는데.
누구의 인생도 망쳐서는 안 되는데. 그러면 안 되는데.
초점 없는 눈으로 빗줄기가 스치는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채언은 망설이지 않고 창문가에서 몸을 돌렸다.
잠시 후. 현관문 여닫히는 소리가 텅 빈 집 안을 울렸다. 신발장 옆 수납함. 우산꽂이에는 낡은 비닐우산이 꽂혀있었다.
채언은 비 오는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낡은 운동화가 젖어 들었다. 물이 고인 손바닥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던 것처럼, 간혹 있는 웅덩이에 발을 디뎠다. 그럴 때면 유리가 깨지듯 물방울이 튀었다. 차가 많이 다니는 도로 쪽으로 채언은 쉬지 않고 달렸다.
영웅은 한쪽 팔로 얼굴을 가린 채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손에는 MP3 플레이어를 쥐고 있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때부터 커튼을 쳐놓고 헤드폰을 낀 상태였다.
옆에 아픈 사람이 누워있는 것도 아니고 병원 특유의 분위기가 드러나는 일반실도 아니었지만, 병원 침대에 누워있다는 사실 자체가 영웅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아까 잠을 많이 자서 이제는 잠도 오지 않았다.
영웅은 슬쩍 팔을 내려 1인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불빛을 은은하게 켜놓은 내부는 꼭 호텔 같았지만 어쨌든 이곳은 병원이었다.
바보같이 길거리에서 쓰러지지만 않았다면 지금쯤 채언과 거실 소파에 앉아 내일을 기대하고 있었을 텐데. 채언은 아침까지 비가 내리면 어떡하냐고 걱정 했을지도 모른다. 언제쯤 비 내리는 구름이 해님 모양으로 바뀔지 일기예보를 들여다보면서. 너무 기대해서 긴장한 얼굴로.
채언의 얼굴을 떠올리던 영웅은 잠시 웃었다. 그러나 금방 입꼬리가 내려갔다.
침대 옆 소파 테이블에는 구겨진 메모지가 한 장 놓여있었다. 낮까지만 해도 집 냉장고에 붙어 있던 것이었다. 액정이 산산조각이 나 무용지물이 된 핸드폰과 지갑은 TV 아래 서랍장에 들어있었다.
헤드폰과 MP3 플레이어는 진원이 주고 간 것이었다. 아기들 자장가로도 틀어준다는 클래식이 잔뜩 담겨 있었지만, 뭘 들어도 마음이 편해지지는 않았다.
채언의 발 앞으로 차가 한 대 멈춰 섰다. 낡은 운동화는 푹 젖어버린 상태였다. 빗줄기는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검은 도로 위로 줄줄 액체가 흘렀다. 멈춰 섰던 차는 금방 자리를 떠났다.
빗소리도 천둥소리도 들리지 않는 상태였지만 영웅은 자꾸만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켜놓은 헤드폰 덕분에 세상과 차단된 기분이 들었다.
어떤 자세로 누워도 불편했다. 병원 침대보다 거실 소파에 누워 자는 게 몸도 마음도 편할 것 같았다. 그냥 지금 몰래 집에 가볼까? 어차피 진원도 퇴근했으니까. 그는 내일 이른 아침쯤에나 다시 올 것이었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채언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서 영웅은 마음이 급해졌다. 혹시 울고 있으면 어쩌지. 자신이 건져낼 때까지 수영장 물속에 잠수하고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검은 머리카락이 물속에서 흔들렸었다.
이래서 병원은 좋지 않았다. 자꾸 좋지 않은 생각만 떠오르니까. 이렇게 가만히 누워 있던 사이 소중한 사람들을 모두 잃었으니까. 불안했다. 순간, 영웅의 머릿속으로 붉은 피로 뒤덮인 얼음 바닥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의식하지 않고 쉬던 숨이 거칠어졌다.
몸을 일으킨 그의 얼굴이 금세 창백해졌다. 등을 굽힌 채 손으로 허리께를 꾹 눌렀다.
“하아. 하아.”
자신의 마음대로 기분을 조절할 수가 없어서 영웅은 눈가를 찌푸렸다. 이를 깨물자 턱에 힘이 들어갔다. 손이 떨렸다.
영웅은 너스콜을 누르는 대신 쓰고 있던 헤드폰을 벗어 침대 위로 던져버렸다. 언제까지 이까짓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야 하는지. 영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인정해야 했다. 많이 괜찮아진 것이 완전히 벗어났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그랬다면 미국으로 다시 돌아갔겠지. 아니, 떠나오지도 않았을 거다.
스케이트 날에 제일 크게 베인 것은 오른쪽 허리와 허벅지였다. 수술은 잘 끝났지만, 상처가 아문 뒤 같은 부위에 몇 번 또 상처가 생겼다. 다시 친구를 잃고 나서 자해를 했기 때문이었다. 죽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죽고 싶었다면 칼로 다른 곳을 그었을 것이다. 칼이 아니더라도 방법은 많았다.
영웅은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죄책감을 느꼈다. 결국 마지막 친구도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었다.
많이 괜찮아진 후에도, 가끔 길게 봉합된 흔적을 볼 때마다 그것이 다시 벌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흉터 위를 아프게 긁어내리면 피가 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붉은 피가 얇게 얼어붙은 빙판이 생각났지만, 그러면 그날을 완전히 잊지 않고 나름의 방법으로 속죄할 수 있었다. 비정상적인 방법의 추모라는 것을 영웅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복잡한 그림의 문신을 새겨 넣은 것이었다. 흉터가 보이지 않게.
많이 괜찮아진 뒤에는, 다시 상처를 내고 싶을 때마다 그 위를 꾹 누르며 버텼다.
영웅이 문신을 새긴 것을 아는 사람들은, 문신이 단순히 수술 흉터를 가리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진짜 이유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니 가족들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새 등이 축축할 정도로 땀이 났다. 침대에 걸터앉아 숨을 몰아쉬던 영웅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바깥에서 복도를 뛰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다른 병실에 응급상황이 생겼나. 심장이 쿵쾅거렸다. 발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렸다. 가까워지다가, 영웅이 머무는 1인실 앞에서 멈췄다. 무의식중에 너스콜을 눌렀던가? 의사나 간호사가 아니라 진원인 걸까?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든 영웅은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오기로 버텨봤자 힘들어질 뿐이었다.
그런데 왜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거지? 영웅은 손바닥으로 침대를 누르며 일어섰다. 링거 폴대를 잡고 걸어간 영웅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
혼자 있을 때. 때때로 괴로워서 환영을 볼 것 같을 때. 그는 차라리 귀신이 정말 있는 건지 확인하듯 혼잣말을 하고는 했다. 나와 보라고 말했을 때 아무것도 눈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그나마 안심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채언….”
눈앞에 보이는 것이 환영이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비가 내려서요.”
후드를 뒤집어쓴 채언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녁부터, 새벽까지. 비가…….”
토독.
톡.
톡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채언의 젖은 소매 끝자락에서 떨어지는 것이었다. 후드를 뒤집어썼지만, 앞머리가 젖어있었다. 운동화 주위로 동그랗게 물 자국이 생겼다. 영웅은 그런 채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런 날은, 제가.”
어두운 복도에 서서 문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기다리던 사람을. 때마침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 준 사람을.
“지켜드려야.”
채언의 젖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이 까만 눈 옆으로 흘러내렸다.
영웅은 그 눈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가까워지는 것을 보며 눈을 감았다. 채언의 허리를 끌어안은 팔이, 그를 문 안으로 들였다.
급하게 맞닿은 입술 사이로 더운 숨이 섞였다. 이제는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신 다른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울리기 시작했다. 초옥, 촉. 짧고 급하게 입술을 빨아들이다 떨어지는 소리. 옷과 옷이 마찰하는 소리. 여유 없이 내뱉은 숨이 가로막히는 소리. 예민한 귓가에 와 닿는 것들 때문에, 영웅은 채언의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영웅의 뜨거운 혀가 채언의 입술 사이를 가르는 동안 채언의 고개는 자꾸만 뒤로 밀렸다. 머리 위에 쓰고 있던 후드가 천천히 흘러내렸다.
단단한 팔이 난간이라도 된 듯했다. 힘줄이 오른 팔에 기댄 허리가 둥근 곡선을 그리며 휘었다. 떨어지지 않고 맞닿은 입술 안쪽에서 타액이 섞였다. 입술을 떼지 않았기 때문에 질척한 소리는 오로지 두 사람에게만 들렸다.
“읏.”
채언의 신음에, 그의 입술을 파고들던 영웅의 움직임이 멎었다.
“…하아.”
채언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있다 떨어지는 영웅의 얼굴에서 아쉬움이 묻어나왔다. 고개를 들려 해도 달아오른 몸은 그러기를 거부했다. 결국 보드라운 턱 근처에서 입술을 달싹거려야 했다. 뜨거운 숨이 턱을 간질이는 느낌에 채언의 몸이 떨렸다.
무서운 걸까. 채언의 표정을 확인하기 위해 영웅은 천천히 눈을 들었다.
까맣고 순한 눈과 마주했다. 채언의 눈가가 붉었다.
영웅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목 끝까지 차오르는 욕망을 삼켜냈다. 목울대가 크게 위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불빛을 등진 초록색 눈동자는 살짝 옆을 향했다가 되돌아왔다. 문은 아직 열려있었다.
거친 숨을 쉬는 두 사람의 가슴이 맞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
“…….”
“어깨를, 세게 밀어요.”
영웅은 낮은 목소리로 다시 한번 말했다.
“뺨을 때려도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눈앞에 보이는 입술에 닿고 싶었다. 좀 전의 입맞춤으로 살짝 부어오른 입술은 붉은빛을 띠었다.
“그게 아니라면.”
영웅은 짙어진 눈빛으로 품 안의 채언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는 이의 손은 갈 길을 잃고 허공에 떠 있었다.
“내 목에 팔을 둘러요.”
나지막이 속삭이는 목소리에 채언은 홀린 듯 숨을 멈췄다. 젖어 있어 영웅의 귓가에 닿지 못한 손이었다. 여전히 축축했지만, 채언은 조심스레 영웅의 팔꿈치에 손을 대었다. 그렇게 위로. 팔을 쓸어 올리며 어깨에. 마침내 목 뒤로 팔을 감고 그를 끌어당겼다.
1인실의 문이 닫혔다.
두 사람은 정신없이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 채언의 물기가 영웅에게로 스몄다. 영웅이 고개를 틀어 채언의 입술 사이를 가르면, 채언은 서툴지만 그에 맞춰 움직였다. 젖은 운동화 밑창이 바닥과 마찰하며 삑삑거렸다.
뜨거운 살덩이가 입안의 점막을 핥아올 때마다. 채언에게서 의식하지 않은 비음이 새어 나왔다.
어느 정도 그의 혀에 농락을 당한 뒤에, 채언은 소심하게 영웅의 입술을 물어보기도 했다. 도톰한 입술을 살짝 이로 누르자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잡아먹을 듯 나누던 키스는 쪽쪽, 가벼운 소리를 내는 뽀뽀가 되기도 했다.
채언은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 허리를 끌어안아 오는 팔을 밀어내지 않았지만, 숨 쉴 틈도 없이 맞닿아오는 영웅 때문에 머리가 어질했다. 코로 숨 쉬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 채언은 살짝 고개를 숙여서 맞붙은 입술을 떼어냈다. 그러자 영웅도 각도를 틀었다. 아래에서 위로. 채언의 머리가 뒤로 넘어가자 다시 아래로 내리누르는 키스를 퍼부었다. 얼떨결에 아까보다 더 깊게 혀를 받아들인 채언은 한계까지 숨을 참다가 영웅의 옷을 꽉 쥐었다. 결국 입술을 숨기는 방법을 선택했다. 영웅의 목 뒤로 감고 있던 팔을 풀어 내린 뒤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그 덕에 영웅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목에 닿는 숨소리와 온도가 자극적이었다.
“숨이, 하아.”
빈틈없이 닿은 상체로 채언의 가슴이 오르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숨을 못, 쉬겠어요.”
영웅은 자신이 채언을 너무 밀어붙였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달래는 척 따끈한 볼에 손을 대어 얼굴을 보았는데, 손바닥에 볼을 비비는 채언의 눈이 반쯤 풀려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과했음을 인정하는 것과 그다음에 행한 행동 사이에 연관성은 없었다. 영웅은 손에 닿아오는 말랑한 볼을 놔주지 않고 다시 채언에게 입을 대고 말았다.
채언이 편안하게 숨을 쉬기 시작한 것은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였다.
숨을 고르는 동안 채언의 자세는 점점 더 편하게 바뀌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영웅의 어깨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채언의 등을 토닥여주던 영웅은 까만 머리카락에 조심히 입을 맞추었다.
“왜 이렇게 젖었어요.”
채언은 말없이 영웅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응? 우산은.”
“생각을 못 했어요.”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그럼.”
채언은 영웅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초콜릿… 사다주세요.”
영웅은 도르륵 눈을 굴리는 채언을 보다가, 고개를 숙여 채언의 입술 바로 옆, 볼에 입을 맞췄다.
“딸기는요?”
“딸기. 별로 좋아하진 않아요.”
쪽. 이번에는 눈 밑이었다. 영웅은 다정한 눈으로 채언을 보며 물었다.
“딸기 안 좋아해요?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싫어하는 건 아니고요. 그냥.”
영웅의 허리를 안은 손이 꼼지락거렸다.
“지금은 초콜릿이 더 좋아서.”
“알겠어요. 초콜릿.”
웃으면 보조개가 들어가는 자리에 몇 번 더 입을 맞추다가. 영웅은 채언의 눈꺼풀 위에 입술을 내려 앉혔다. 채언은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울었죠.”
“….”
“왜 울었어요.”
감겨있던 눈이 살며시 뜨였다. 채언은 영웅을 보지 않고 눈을 깜빡거리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 물지 말고.”
그의 말에 채언은 입술을 누르던 이를 들었다. 부어서 통통해진 아랫입술이 드러났다.
입술을 물지 말라던 영웅은 말과 모순된 행동을 했다. 그는 채언의 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았다. 아프지 않게 최대한 부드러운 속도로. 살짝 핥아보기까지 했다.
남에게 입술을 빨리는 느낌은, 기분 나쁜 감각은 아니었다. 입술이 아파서 채언은 이제 가슴이 아프지 않았다.
왜 울었냐는 물음에 답을 고민하던 채언은 돌려 말하지 않기로 했다. 기억에는 없지만, 어차피 이미 한 번 말했다니까.
“보고 싶어서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걱정이 돼서.”
채언은 영웅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들었다. 바로 앞에서 마주 보는 얼굴에는 애틋함이 깃들어 있었다. 채언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영웅은 다정하게 채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시작은 다정했지만, 젖은 살덩이끼리 비벼질수록 체온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다시 바닥과 신발 밑창이 마찰하며 삑삑 소리를 냈다. 벽에 기대어 있던 몸이 떨어졌다.
채언의 뒤통수를 감싸고 있던 영웅의 한쪽 손이, 물을 먹어 축축한 후드 안을 파고들었다. 허리 위로 옷이 올라가려던 찰나였다.
꼬르륵.
채언의 몸이 움칫 굳었다. 어느새 침대에 눕혀진 상태로, 채언은 자신의 위에 있는 영웅을 올려다보았다. 허리 뒤쪽을 파고들던 손이 스륵 앞으로 올라왔다.
꼬륵.
또다시 민망한 소리가 들렸다. 채언은 영웅의 목 뒤로 둘렀던 손을 풀었다. 볼을 문지르는 것 정도로는 부끄러움을 숨길 수 없었다.
아마 배 위에 얹어 놓은 그의 손으로 꼬르륵거리는 진동이 느껴졌을 것이었다. 아예 손바닥 안에 얼굴을 묻어버린 채언을 보며 영웅은 눈을 찌푸렸다.
“점심은 나 때문에 못 먹었죠.”
젖은 옷 안에서 손을 꺼낸 영웅은 채언의 손등 위로 손을 겹쳤다.
“저녁은?”
커다란 손으로 그보다 작은 손을 아래로 내리자, 까만 눈동자가 민망하다는 듯 옆으로 굴렀다.
“…사과.”
“사과 한 알?”
한 알이 아니라 한입이었지만, 채언은 굳이 영웅의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다시 정면을 보자 예쁜 색의 눈동자가 보였다. 잘생긴 얼굴에 자주 떠오르던 장난기는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시원하게 올려 웃던 입꼬리는 아래를 향해있었다.
“지금 먹어야겠네. 초콜릿.”
몸을 숙인 영웅은 채언의 목에 얼굴을 비비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채언은 손을 들어 영웅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옅은 색의 머리카락이 사라락 손가락 사이로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