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22)

5.

살 게 있었으면 아까 함께 샀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왜 이제야 쇼핑에 열을 올리고 있는 걸까. 채언은 영웅의 손목에 벌써 세 개째 걸린 쇼핑백을 바라보았다. 그는 손에 잡히는 것마다 쓸어 담아 계산하는 중이었다. 이미 살 것을 정해두고 온 것인지 고민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 들어온 매장이 벌써 네 번째 장소였다. 아까 들렀던 곳과 같은 브랜드도 있었고, 다른 곳도 있었지만 영웅이 결제하는 품목은 채언이 샀던 것과 같았다. 거기에 몇 가지 더 추가되어있었지만.

수영복을 고를 때는 홀린 듯이 두 개를 골랐다. 같은 디자인으로 사이즈만 다른 것이었다. 다른 백화점에서 채언에게 스치듯 추천해준 디자인과 비슷했다.

아까 본 수영복이 너무 마음에 들었던 건가. 비슷한 걸 고르네. 그런데 자기 사이즈를 모르나? 그래서 두 개를 샀다가 나중에 하나는 환불하려는 건가. 집에 수영복이 있을 텐데. 신발처럼 브랜드가 다르면 사이즈도 다른 건가. 따지고 보면 속옷과 비슷한 건데 나중에 환불이 되나?

채언이 영웅을 두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영웅도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있었다.

“이건 입어보거나 거울 앞에서 대보고 사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 말에 영웅은 몸을 반쯤 틀었다. 쇼핑에 푹 빠졌는지 손에 쥔 수영복을 내려다보는 눈에 초점이 없었다. 채언은 조심스럽게 자신 쪽으로 내밀어진 영웅의 팔을 잡았다. 아무래도 이걸 바로 사겠다는 뜻으로 내민 모양이었다.

“사이즈를 모르시면 직원한테 물어봐서.”

“아, 아니. 이건, 그렇죠! 하나만.”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있던 영웅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수영복 한 장은 행거에 걸어두고, 채언에게 대 보려던 수영복 하나만 쥔 채 서둘러 다른 코너로 가버렸다. 영웅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채언은 방금 그가 걸어두고 간 수영복 태그를 확인했다.

이쪽이 더 큰 사이즈인데. 잘못 고른 거 아닌가. 그나저나 또 뭘 사러 간 걸까. 매장을 둘러보던 채언의 눈에 삐죽 솟은 머리통이 들어왔다. 영웅은 벽에 걸린 상품을 보고 있는 듯했다. 얼굴이 아니라 뒤통수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저것도 홀린 듯이 쳐다보고 있을 게 뻔했다.

날이 점점 따듯해지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 여름 상품이 깔릴만한 시기는 아니었다. 매장 안에는 대체로 어두운색의 상품들이 진열되어있었다. 그래서 영웅이 보고 있는 것이 더 눈에 띄었다. 매장 한쪽 벽에는 분홍색, 연두색 하와이안 셔츠가 두 장 걸려있었다. 딱 두 장뿐이었다. 주력 판매상품이라기보다는 인테리어 소품 쪽에 가까운 디자인이었다.

손에 쥐고 있던 수영복 태그를 놓은 채언은 천천히 영웅에게 다가갔다.

“안목이 좋으시네요. 이게 저희 매장에 지금 딱! 두 장밖에 안 남은 거거든요. 친구분이랑 같이 오신 것 같은데 두 분이 한 장씩 하시면, 와… 진짜 그 순간 베스트 프렌드. 누가 봐도 세트거든요. 한 분은 이거, 분홍색 깃털 그림. 한 분은 저거! 연두색 야자수. 새가 나무 좋아하는 거 아시죠? 이게 그래서 두 개가 딱!”

아무래도 놓칠 수 없는 손님이라는 판단을 내렸는지, 매장 직원이 영웅의 옆에 붙어서 벽에 걸린 상품을 어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채언 씨. 아무래도 아까 그 셔츠…….”

채언은 대답하지 않고 앞서 걸었다. 수영복만 서둘러 결제시키고, 다른 건 더 둘러보고 오겠다는 말로 방어하며 영웅을 데리고 나온 참이었다. 뭘 사든 그의 마음이었기에 말릴 생각은 없었다. 웬만해서는 그의 쇼핑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고. 하지만 그 셔츠들은 정말이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영웅 때문에 채언은 발걸음을 멈췄다.

“오늘 집에 가서도 그 셔츠가 자꾸 생각나면 다시 오세요.”

“하지만 딱 두 장밖에 없던 거라, 그사이에 누가 사 가면 어쩌죠?”

“그런 옷은 아무도… 아무튼 이번 주까지는 안 팔릴 거예요.”

채언은 아까 열정적으로 셔츠를 홍보하던 직원과 그 옆에서 열심히 듣고 있던 영웅의 모습을 떠올렸다. 직원은 분명히 한국말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게 영웅에게는 먹힌 듯했다. 혹시 외국인이라 한국말을 제대로 못 알아듣는 줄 알고 그런 식으로 말을 한 건 아닐까. 알맹이 없는 말로 정신을 쏙 빼놓던 직원을 생각하던 채언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 영웅은 예의 차린 한국말부터 배웠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한국에서 사용하는 거친 언어들은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나중에 날을 잡고 영웅에게 국어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말을 좀 가르쳐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것은 나중 일이고, 살건 다 산 듯했다. 채언은 어서 다른 층으로 이동하거나 아까 그 매장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영웅을 데려가기로 했다. 멀리 키즈 매장 쪽에 아이스크림 냉장고가 나와 있는 카페가 보였다.

“대표님. 아이스크림 드실래요?”

“채언 씨.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요?”

아이스크림은 미끼일 뿐이었지만 채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당 떨어질 것 같아서요. 아, 이게 무슨 말이냐면요.”

“하하. 그거 무슨 말인지 알아요.”

“아신다고요?”

“회사에 그 말을 자주 하시는 분이 있거든요. 앨리스 님이라고, 죽집을 추천해줬던 분이에요.”

“아, 정말요?”

영웅이 해주는 말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채언은 이상하게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네. 정말로.”

둘은 자연스럽게 카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채언은 카페 메뉴판을 보고 나서야 자신의 수중에 지갑이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잠시만요.”

카페 앞에서 자신의 손목을 잡아오는 채언 때문에 또 스르륵 입꼬리가 올라가던 영웅의 표정은 뒤를 돌아보는 순간 원상복귀 되었다.

“저, 지갑이요. 아까 잃어버려서….”

“하아, 채언 씨.”

영웅은 갑작스레 허리를 숙이며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몸 상태가 안 좋다는 듯 숨을 포옥 내쉬는 그의 모습에 채언이 따라서 몸을 숙여왔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어디 안 좋으신 거예요?”

“너무 많이 돌아다녔나 봐요. 당 떨어진 것 같아요.”

이럴 때 쓰는 말이 맞겠지? 아픈 척을 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영웅은 어지럽다는 듯 눈을 감고는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더듬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지갑을 꺼내더니 카드 한 장을 채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제일 달콤한 맛으로 부탁한다며 카페를 가리키는 그를, 채언이 부축해서 테이블에 앉혔다. 영웅은 곧바로 테이블 위로 엎드렸다.

“괜찮으세요?”

한쪽 팔을 베고 엎드려있던 영웅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채언이 곧바로 자리를 떠날 줄 알았다.

“잠시만요.”

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따듯한 손이 영웅의 이마를 가린 옅은 색의 머리카락을 살짝 넘겨왔다. 스륵. 살 스치는 소리와 함께 손바닥이 볼을 감쌌다가 귓바퀴를 타고 내려왔다. 따듯한 체온이 귓불에 닿아왔을 때, 영웅은 감고 있던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머뭇거리는 기색이 느껴지는 손가락으로 가볍게 귓불을 눌러보는 채언의 손길에 영웅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들었다.

“컨디션이 안 좋을 때는 귀가 차가워진대요.”

영웅은 테이블 아래로 떨어트려 놓았던 한쪽 손을 꽉 쥐었다.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마주쳐오는 까만 눈동자에, 자연스레 심장이 빨리 뛰었다. 저도 모르게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열기가 새어 나갈까 봐 의식해서 입술을 다물었다.

“그런데 다행히 아직 따듯해요.”

귓불을 만지던 손은 다정스럽게 볼을 잠시 감쌌다 떨어졌다.

“빨리 다녀올게요.”

타이밍 좋게 채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영웅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손이 조금만 더 아래로 내려왔다면, 목 근처라도 스쳤다면 분명 빠르게 펄떡이는 맥박이 전해졌을 테니까.

채언이 카페 직원에게 가장 달콤한 맛의 아이스크림을 추천받아 기다리는 동안, 영웅은 혼자 테이블 위에 엎드려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놀랄만한 큰소리를 들은 것도 아닌데, 무서운 것을 본 것도 아닌데, 벌써 이렇게 심장이 뛴 게 몇 번째인지 몰랐다. 소리가 아닌 어떠한 자극 때문에 놀란 것이라고 생각하며 혼자 묻어 두려 했지만, 이런 감정을 계속해서 부정할 정도로 어린 나이는 아니었다.

잘해주고 싶고, 다른 사람이 만지는 것을 보는 게 싫고, 조금 더… 그 또한 이렇게 당황스러워했으면. 이런 마음이 드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영웅의 짙은 눈썹이 일그러졌다.

아이스크림이 담긴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채언은 의자를 빼서 앉았다. 영웅은 아예 팔에 고개를 묻고 뒤통수만 보이고 있었다. 사실 아까는 영웅이 너무 갑작스럽게 비틀거려서 꾀병을 부리는 건 아닐까 의심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는 정말로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듯했다. 작은 머리통 위로 살짝 기웃거려보니, 아래쪽에서 작게 한숨 쉬는 것이 들려왔다.

“대표님.”

조용히 부르며 그의 등에 손을 올리자 움찔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채언은 머쓱하게 손을 떼고는 앞에 놓아둔 아이스크림 컵을 끌어왔다.

“아이스크림 안 드세요?”

그러자 한숨 쉬는 소리와 함께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언은 상체를 숙여 그의 머리통 가까이 귀를 가져다 대었다. 뜨끈뜨끈한 기운이 느껴졌다.

“손에 힘이 없어서 못 먹겠어요. 아이스크림은 채언 씨 먹어요.”

애초에 영웅은 아이스크림이 별로 먹고 싶지 않았다. 방금 입으로 내뱉은 핑계는 이 테이블에 부축되어 올 때부터 생각해둔 것이었다. 힘은 차고 넘쳤지만 팔을 베고 엎드려 있어서 그런지 눈앞이 깜깜했다.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하지만 이걸 먹어야 좀 나아지지 않을까요?”

채언은 양손으로 컵을 쥔 채 오른쪽 왼쪽으로 고개를 기울여보았다. 하지만 영웅은 계속해서 팔 안으로 고개를 숨기고 있을 뿐이었다. 테이블 옆 바닥에 놓인 쇼핑백이 많기도 했다. 열정적으로 쇼핑을 하고 난 후였으니 힘이 없을 만했다. 채언은 일어서서 의자를 살짝 옆으로 옮긴 뒤 다시 앉았다. 엎드린 영웅의 어깨를 살살 흔들었다.

“저기요. 대표님.”

“…네에.”

“잠깐만 고개만 좀 옆으로 돌려보세요.”

“채언 씨. 나는 정말 아이스크림 안 먹어도 괜찮아요.”

그러면서도 영웅은 착실히 채언의 말을 들었다. 슬쩍 고개를 틀어 눈 한쪽을 보였다. 그리고 당황했다.

“팔 내리고 조금만 더요. 이쪽으로요.”

채언이 바로 옆에 있었다.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 컵이, 다른 손에는 아이스크림을 뜬 스푼이 들려있었다.

영웅의 팔 한쪽이 테이블 아래로 스르륵 떨어졌다. 그러자 팔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더 드러났다. 채언은 플라스틱 스푼을 내밀었다. 살짝 벌어진 영웅의 입술 사이로 차가운 기운이 다가왔다.

누워있는 사람의 입술 사이로 아이스크림이 담긴 스푼을 밀어 넣는 것은 은근히 집중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각도를 잘못 틀면 아이스크림이 떨어지거나, 날카로운 선에 입술이 베일 수도 있었다. 영웅 쪽으로 몸을 숙인 채언은 그의 입술에 스푼이 완전히 닿기 전에 손목의 각도를 틀었다. 손목을 따라 자연스레 고개를 꺾은 채언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마른 입술은 서로 달라붙어 있다가 붉은 속살을 살짝 늘이며 열렸다. 무의식중에 눈앞에 있는 영웅의 입술이 조금 더 크게 벌어졌으면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둘은 서로의 벌어진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입술 사이에 알맞게 공간이 생겼다. 혀끝에 와 닿는 맛이 달았다.

조심스레 입안을 침범했던 스푼이 입술을 빠져나가는 순간, 영웅은 달콤한 독을 삼킨 것처럼 막막해졌다. 남자를 좋아하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혼란스러웠지만 그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스푼은 다시 아이스크림 컵에 꽂혔다.

“좀 괜찮으세요?”

차가운 손이 이마에 닿아서 영웅은 눈을 살짝 찌푸렸다.

“열이 나는 것 같기도 한데, 지금 제 손이 차가워서 대표님 이마가 더 뜨겁게 느껴지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던 손이라 시원하죠?”

영웅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를 좋아하게 된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아직 서로의 온도가 너무 다른 것 같아서, 그것이 막막할 뿐이었다.

채언은 아직도 엎드려있는 영웅의 얼굴을 살폈다. 단 걸 먹으면 좀 괜찮아지지 않을까 했는데 여전히 표정이 시무룩했다. 그래서 평소와 달리 진지해 보이기도 했다. 긴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깐 눈이 자꾸 신경 쓰여서, 채언은 잠시 그의 음영 진 눈을 보고 있었다. 너무 오래 들여다본 것 같아서 괜히 옆에 있는 아이스크림 컵을 끌어왔다.

“이게 별로면 다른 맛으로 사 올까요?”

바닐라 맛 젤라또 위에는 꿀과 스프링클이 잔뜩 뿌려져 있었다. 달콤하고 맛있어 보였지만 아무래도 그의 취향이 아니었나 보다. 아니면 달기만 하고 맛이 없나. 채언은 스푼 가득 아이스크림을 떠서 먹어보았다. 맛있었다.

“이건 제가 먹고, 다른 거로 사 올게요.”

테이블에 엎드린 채, 입술을 우물거리는 채언을 올려다보던 영웅은 스윽 몸을 일으켰다. 다시 아이스크림을 뜨던 채언은 갑자기 솟아오른 영웅을 보고 손을 멈췄다.

시무룩한 얼굴로 앉아있던 그는 별안간 입술을 아, 하고 벌렸다. 채언은 홀린 듯 아이스크림을 뜬 스푼을 내밀었다. 영웅의 입속으로 들어간 스푼 때문에, 그쪽으로 채언의 손이 함께 낚이듯 딸려갔다.

백화점 4층. 스포츠&아웃도어 매장과 키즈 매장 사이에는 젤라또 전문점 ‘B카페 젤라또’가 있었다. B는 베이비의 약자로, B카페 젤라또는 아기들을 위한 달지 않은 젤라또 전문점이면서 커피와 주스도 판매했기 때문에 음료 매출이 더 좋은 곳이었다.

B카페 젤라또의 아르바이트생 박민정은 카운터 의자에 앉아 천장 불빛을 보고 있었다. 매장 앞에는 의자와 테이블이 몇 개 놓여 있었지만, 앉아있는 손님은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녁밥을 먹을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B카페 젤라또는 백화점에 전략적으로 입점한 가게였다. 칭얼대는 아기들에게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쥐여 주고 아빠들이 앉아 쉴 수 있도록, 그들의 지갑이 열리기 딱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밥을 먹기 전에 아기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쥐여 주면 식사 시간이 엉망이 될 것이었다. 그래서 보통 이 시간대에는 손님이 없었다.

멍하니 천장 불빛을 보던 민정의 시야에 남자 두 명이 걸어오는 것이 걸렸다. 둘 다 키가 크고 훤칠해서 불빛보다 더 시선을 끌었다. 멀리서 봐도 잘생긴 둘이었다. 한 명은 외국인 같았다.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기 때문에 민정은 속으로, 와라, 이쪽으로 와라, 하고 바랐다. 그때였다. 멀쩡히 걸어오던 두 사람 중 하나가 이마를 짚고 허리를 숙였다.

“뭐지. 연기하는 건가?”

까만 머리 남자가 옅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를 부축했다. 그러자 그는 딱 봐도 보드라울 것 같은 머리카락을 자신을 부축해준 남자의 어깨에 살짝 기대는 것이었다.

저러려고 아픈 척하는 건가? 연기를 진짜 못하는데. 옆 사람은 알면서도 속아주는 건가? 민정은 눈을 찌푸렸다. 눈앞의 광경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내 민정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 둘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제일 단 걸로 아이스크림 하나만 추천해주실 수 있나요?”

주문을 하러 온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민정은 ‘아기들을 위한! 많이 달지 않은 아이스크림’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B카페 젤라또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제일 달게. 최선을 다해 토핑을 얹어 달게 만들어주겠다고 다짐한 뒤 민정은 스쿱을 들었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잘생긴 얼굴이었다. 눈썹은 반듯했고, 쌍꺼풀 없는 까만 눈이 순한 느낌을 주는 남자였다. 백화점 주변에는 고급 아파트와 주택, 엔터테인먼트 건물이 있었기 때문에 일을 하다 보면 연예인이나 모델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민정은 단정한 인상의 그가 신인 배우이거나, 신인 모델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신인을 앞에 붙인 이유는 그의 얼굴이 낯익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까 얌전히 두 손으로 카드를 내밀던 모습은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정량보다 많이 푼 젤라또 위에 꿀과 스프링클을 들이부었다. 스푼은 두 개 꽂아주려고 했다. 두 사람이 온 것을 보았으니까. 하지만 준비된 것을 가지고 카운터 앞으로 갔을 때는 스푼을 하나만 꽂아주고 말았다. 카운터 앞에 서 있던 남자는 테이블 위에 엎드린 일행을 돌아보고 있었는데, 완벽한 콧대를 온전히 보여주는 그 옆모습 때문에 막 꽂아주려던 스푼 중 하나를 떨어트렸기 때문이었다.

“감사합니다.”

젤라또를 받아들고 자리로 돌아갈 때도 그는 예의가 발랐다.

민정은 그 뒤로 두 남자가 앉아있는 테이블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생각이 바뀌었다. 검은 머리 남자는 배우도, 모델도 아닌 것 같았다. 연예계 종사자라면 이런 장소에서는 연인과의 관계를 더욱 숨기는 법이었다. 하지만 그는 대놓고 다정한 눈으로 엎드린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옅은 색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는 모습을 본 민정은 흐뭇한 얼굴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스푼을 하나만 꽂아줘서 다행이었다.

다 먹은 젤라또 컵을 치우는 것은 머리카락 색이 옅은 쪽이었다. 카운터 바로 옆에 다 먹은 것을 놓아두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카운터 안쪽에 서있던 민정은 그의 얼굴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젤라또를 사러 온 쪽도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지만, 이쪽은 휴! 더 했다. 가까이서 보니 동양적인 느낌이 섞여 있었는데, 그래도 깊은 아이 홀 때문인지 남자는 살짝 차가운 인상이었다. 얼굴은 작았지만 선명한 티존과 턱선이 남자다워 보이는 데다 입을 꾹 다물고 있어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잘 먹었습니다. 수고하세요.”

그의 입에서 나온 좋은 목소리에 한 번, 어색하지 않은 한국말에 한 번, 시원하게 입매를 올려 웃는 얼굴에 또 한 번 놀란 민정은 침착하게 카운터 서랍을 열었다.

근무 중 핸드폰을 하는 것을 들키면 잘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민정은 이 소식을 친구들에게 전해야 했다. 연예인을 제외하고, 진짜로 잘생긴 남자를 보는 일은 몇 년에 한 번뿐이었다. 길거리에 흔해 빠진 게 남자였지만, 잘생긴 남자는 봉황도 아니면서 찾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민정과 친구들은 가끔 남자의 외모나 이상형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이 년 전쯤 다 같이 제주도에 놀러 갔다가 우도에서 잠시 스친 남자 이야기를 해야 했다. 우려먹기가 구전 설화 급이었다.

하지만 오늘부터 이야기는 새로 갱신될 예정이었다.

“저녁 먹고 들어갈까요?”

아이스크림이 효과가 있었는지 영웅의 상태가 괜찮아졌다. 안전벨트를 맨 채언은 그의 옆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까 시간이 없다고 하셨잖아요. 빨리 돌아가셔야 할 일이 생긴 거 아니었나요?”

“그건 이미 했잖아요.”

영웅은 뒷좌석에 놓인 쇼핑백을 흘끔 쳐다보았다.

“혹시 시간이 없다고 하신 게 쇼핑할 시간을.”

띠링-. 그때 채언의 핸드폰에서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조용한 차 안에 앉아있던 두 사람 모두 그 소리를 들었다.

“잠시만요.”

채언은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010-87xx-xxxx: 형 쇼핑백 두고 갔어. 백화점 안내데스크에 맡겨놨으니까 찾아가.]

[010-87xx-xxxx: 혹시나 해서. 나도 이미 자리 뜬지 오래니까 문 닫기 전에 찾아가.]

아까 온 것과 방금 새로 온 메시지였다.

영웅은 핸들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아직 시동이 걸리지 않은 차 안에서 그 소리는 시계 초침 소리처럼 들렸다.

“지갑하고 수영복을 찾은 것 같아요.”

“그래요?”

그렇게 말하는 채언의 얼굴은 기뻐 보이지 않았고, 대꾸하는 영웅의 표정 또한 밝지 않았다. 지갑과 수영복에 핸드폰 번호가 적혀있지도 않았는데 백화점에서 찾았다는 연락이 왔을 리가 없었다.

“백화점에 맡겨놨대요. 건영이가.”

아까 본 그 동생이요. 핸드폰 모서리를 만지던 채언이 고개를 들었다.

“안내 데스크에 맡겨놨대요. 여기서 멀지 않으니까 지금 가면 문 닫기 전에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얼른 다녀올게요.”

“채언 씨. 안 돼요.”

영웅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채언의 핸드폰 위에 손을 올려 힘주어 내렸다.

“내가 시간 없다고 했잖아요.”

채언은 뒷좌석에 놓인 쇼핑백을 쳐다보았다.

“그거 말고요. 아,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얼른 가야 해요.”

“저녁 먹으러요?”

“배고파요?”

“아뇨.”

아직 오랜 시간에 걸쳐 먹은 단맛이 입가를 맴돌고 있었다.

“그럼 빨리 가죠.”

영웅은 익숙한 장소에 주차했다. 도착한 곳은 아파트 지하 주차장이었다.

엘리베이터에 탄 영웅은 버튼 패드 앞에 서서, 쇼핑백을 잔뜩 든 손으로 1층을 눌렀다. 그걸 본 채언은 다른 쪽 버튼 패드 앞으로 가서 22층을 눌렀다.

1층과 22층 버튼에 불이 들어와 있었는데 22층 불이 먼저 꺼졌다. 영웅이 다시 눌러 취소한 것이었다. 1층을 취소할 것을 잘못 누른 건가. 채언이 다시 22층을 누르자 영웅이 또 22층을 취소했다. 장난치는 건가. 다시 손가락을 드는 채언에게 영웅이 말했다.

“장난치지 말아요. 채언 씨.”

채언은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때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내려요.”

1층에 내린 영웅이 채언을 재촉했다.

“시간이 없다니까요. 어서요.”

“저희 어디 가는 건데요?”

“수영장이요.”

“네?”

“수영하러 가기로 했잖아요.”

“그렇긴 한데요.”

어느새 해가 져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몸은 괜찮으세요? 아까 몸 상태가 별로 안 좋으셨잖아요.”

“이젠 괜찮아요. 아이스크림을 먹어서.”

둘은 조금 걸어서 단지 내 피트니스 센터에 도착했다. 채언은 처음 와 본 곳이었다. 낮에 막연히 상상했던 것과 비슷했다. 고급스러운 분위기는 전에 한 번 가보았던 호텔과 비슷했다. 살짝 주눅이 든 채언에게 영웅이 말했다.

“여기 잠시만 앉아있어요.”

로비의 소파도 폭신했다. 채언이 앉아서 기다리는 동안 영웅은 익숙하게 회원 카드를 재발급받았다. 카운터에는 피트니스 센터 이용 기간과 인원에 따른 비용이 적힌 패널이 놓여있었는데 영웅이 몸으로 그것을 가리고 서 있었기 때문에 채언은 보지 못했다.

보라색 카드를 쥔 영웅은 채언의 앞으로 다가가서 그것을 내밀었다.

“새로 받았어요.”

“감사합니다.”

시간이 없다는 게 카드를 재발급받을 수 있는 시간을 말한 듯했다. 채언은 손을 내밀어 보라색 카드를 넘겨받았다.

“대표님은 이제부터 수영하러 가실 건가요?”

“네.”

“그럼 저는 집에 가서 저녁 만들어 놓을게요. 몇 시쯤 들어오실 예정이세요?”

영웅이 고개를 갸웃했다. 채언은 방금 자신이 한 말 중에 어려운 단어가 섞여 있었는지 생각해보았다.

“채언 씨. 왜 집에 가요?”

이번에는 채언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는 수영을 못하니까요.”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가르쳐줄게요.”

“아뇨, 그게 아니라. 오늘이요. 저는 지금 수영복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내일 백화점에 가서 쇼핑백을 찾아올게요. 나중에 가르쳐주세요.”

“다음에는 좀 곤란한데요. 앞으로는 시간 내기가 좀 그래서. 오늘이 딱인데.”

“아……. 그러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요.”

채언의 시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영웅은 한 손을 허리 위에 올리고 다른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의 얼굴 옆에서 쇼핑백이 흔들렸다.

“좋은 생각이 있어요.”

발끝을 내려다보던 채언이 고개를 들었다. 영웅은 들고있던 쇼핑백을 내밀었다.

“마침 여분이 생겼으니까 빌려줄게요.”

여분이라는 단어도 아네. 역시 영웅은 고급 한국어를 먼저 배운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채언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건 전부 새것이잖아요. 주인보다 먼저 사용하는 건 좀 그렇죠.”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이런 게 몇 개씩 있거든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이걸 빌려주시면 대표님은 뭘 사용하실 건데요? 집에 가서 가져오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난 이런 게 몇 개씩 있다니까요.”

영웅은 개인 로커에 필요한 물건이 다 들어있다고 말했다. 두 세트를 준비해놓고 하나를 집에 가져가는 날에는 나머지를 두고 번갈아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빠져나갈 구석이 사라진 채언의 팔을 잡고 소파에서 일으켰다.

채언은 겉옷을 벗어 간단히 개어 로커 안에 집어넣었다. 유료로 개인 로커를 사용하는 영웅의 자리와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로커와 수영장으로 나가는 입구 사이에는 칸막이가 나뉜 샤워실이 있었다. 충북과도 대중목욕탕에 가본 적이 없는데 집주인과 수영장에 오다니. 채언은 옷을 벗고 있는 와중에서야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영웅은 자신의 로커 문을 열고 그 안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채언에게 벗은 몸을 보여주고, 봐야 한다는 것을 깨닫자 살짝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물론, 어떤 것에든 자신은 있었지만, 수영장은 마음을 자각하자마자 오기에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아까 카페 테이블에 엎드려서 한참을 생각했다. 남자를 좋아해 보는 건 처음인데.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 거지. 게다가 상대는 채언이었다. 만약 성별이 달랐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 자체로 만만치 않은 상대였을 것이다. 전보다 많이 가까워졌다지만 아직도 방어적인 사람인데. 어떻게 해야 지금까지 지내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좋아하게 되는 줄도 모르고 그를 좋아하게 된 자신처럼 스며들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일방적이었다.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감정이라는 것이 강요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랬는데, 수영장이라니. 아무런 티도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저 혼자만 좋을 장소에 왔다. 하지만 혼자 좋을 일이니 채언에게는 아무 상관 없으려나. 영웅은 로커 안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원래는 채언에게 선물할 것을 산 뒤에 저녁을 먹으러 갈 생각이었다. 하필 그때 그 남자한테 연락이 온 것이었다. 장건영이라고 했던가. 다시 그를 만날지도 모르는 곳에 채언을 보내기 싫어서 시간 핑계를 대며 이곳에 데려온 것이었다. 계획이 틀어진 것을 상기하자 부끄러웠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영웅은 로커 모서리를 노려보다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저는 먼저 안에 들어가 있을게요.”

그때 뒤에서 채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준비하고 오세요.”

등 뒤로 걸어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훅. 숨을 내쉰 영웅은 상의를 벗어 로커 안에 집어넣었다.

채언은 물기 어린 손으로 플라스틱 의자 손잡이를 문지르고 있었다. 저쪽에 앉아 있는 안전요원이 꼭 필요한가 싶을 정도로 수영장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간간이 풍덩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깜깜했다. 아직 수영을 한 것도 아니고 샤워를 하고 나온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축축한 몸으로 앉아서 창밖을 보고 있자니 휴가를 온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된 휴가를 가본 적이 있었나. 가끔 혼자 시간을 보내기 위해 세탁기 앞에 앉아 물이 출렁거리는 소리를 들은 적은 있었다. 심심한 삶이었다. 채언은 다리를 접고 무릎을 끌어안았다. 파랗게 보이는 물이 출렁거렸다. 지난번 대동에 가서 본 바다보다 수영장 물이 더 푸르렀다.

“그냥 들어가도 되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언은 고개를 들어 옆을 돌아보았다. 영웅은 대체로 정장과 코트를 즐겨 입는 편이었고, 집에서도 아무거나 주워 입는 사람은 아니었다. 잠옷 바지도 항상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것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헐벗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사실 서로가 서로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처음이었다.

채언은 영웅의 몸을 보고 조금 놀랐다. 속옷 모델도 아닌 그가 완벽하게 짜인 근육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의 복근 옆, 허리께에 문신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문신은 요즘 흔하게들 새기는 것이었지만 어쩐지 영웅의 몸에 새겨진 그림을 보고 있자니, 어울리기는 했지만 그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유행하는 것처럼 문신이 작은 것도 아니었다. 수영복 위로 보이는 것은 문신의 끄트머리쯤이었다. 무슨 모양이지. 물끄러미 영웅의 허리께를 보고 있던 채언은 그의 살에서 어딘지 모르게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부분을 발견했다. 문신이 덮고 있는 것은 얇고 긴 흉터였다. 위치가 위치인 만큼 이렇게 쳐다보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채언은 금방 고개를 들었다.

“갈까요.”

고갯짓으로 물을 가리키는 영웅과 눈이 마주쳤다. 초록빛 눈동자에 물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 와서 그런가. 오늘따라 그의 얼굴이 자꾸만 다르게 보였다.

레인 옆에 서서 채언은 물속에 잠긴 영웅을 보고 있었다. 잘 봐요. 채언 씨! 하고 물속으로 뛰어든 그는 정말 수영을 잘했다. 물속의 영웅을 따라 타일 위를 걷던 채언의 입술이 오, 하고 동그래졌다. 이래서 수족관이 있는 건가 싶었다.

레인 끝에 와서 푸하, 숨을 쉬는 영웅의 넓은 가슴이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채언은 소리가 나지 않게 작게 박수를 치다가, 영웅의 앞에 쭈그려 앉아 그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저도 그렇게 수영할 수 있을까요?”

“내가 잘 가르쳐줄게요.”

물 위로 상반신만 드러낸 영웅은 타일 위로 팔꿈치를 기대며 웃었다.

“어릴 때부터 수영을 잘하셨어요?”

영웅은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릴 때 누나한테 배웠는데, 빨리 배울 수밖에 없었어요.”

채언은 다리부터 물속으로 집어넣었다. 계단은 반대편에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천천히 수영장 안으로 빠져드는 것을 선택한 것이었다. 물속에 들어가는 동안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지 않게 영웅이 팔로 받쳐주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팔뚝에도 흉터가 있었다. 어깨와 가까운 곳이었다.

“누나랑 사이가 좋으신가 봐요.”

“딱히 사이가 좋은 건…….”

영웅은 어깨를 으쓱했다.

“집 마당에 수영장이 있었는데, 수영하면서 숨 쉬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하니까 잘 참는 법부터 배우라고 뒤통수를 누르더라고요.”

내가 수영장 안에 들어가 있는 걸 볼 때마다 그랬는데, 확실히 효과는 있었어요. 그의 말에 채언은 쭈뼛거리며 팔을 들어 자신의 뒤통수를 만지작거렸다. 영웅은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난 그렇게 안 할 거거든요.”

영웅은 일단 물을 무서워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며 물속에서 힘을 빼는 법부터 차근차근 익혀보자고 했다. 다행히 채언은 영웅이 알려주는 동작 몇 개를 어렵지 않게 따라했다.

최대한 안전하게 가르쳐 줘야지. 그리고 천천히…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것들도 할 수 있게 되겠지. 영웅은 채언을 앞에 세워두고 혼자 레인 안에서 뒤로 걸으며 생각했다.

“처음에는 거기서 여기까지만 와도 잘하는 거예요. 그런데 일단.”

그때 옆 레인에서 격하게 발차기를 하며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풍덩거리는 소리 때문에 채언은 영웅이 저쪽에서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일단 와보라는 건가 싶어 물안경을 썼다. 팔 동작 몇 개만 알려줘 놓고 수영을 해보라니 너무 빠르다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물을 무서워하지 않는 법을 익히라는 거라면 일리가 있었다. 어차피 몸이 뜨지도 않을 테고 머리만 잠긴 채 바닥을 걷게 될 터였다.

“어? 채언 씨!”

채언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물속으로 잠수했다.

영웅은 자꾸만 뒤로 걸었다. 처음이라고 했으면서 채언은 물속에서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뭘 많이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잘하는 채언이 신기하고 뿌듯했다. 그래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뒤로 가는 중이었다. 이런 게 바로 처음 자전거를 탄 자식을 보는 부모의 마음인 건가. 아이는 없었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반면에 물속에 있는 채언은 당황스러웠다. 그냥 움직이는 건데 몸이 앞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이게 수영을 하고 있는 건가, 아닌가. 혼란스러워서 일단 계속 팔을 저었다. 물안경 너머로 보이는 영웅은 여기까지만 오라고 했던 선에서 자꾸만 뒤로 가고 있었다. 앞으로 가도 가도 그에게 닿지 않았다.

결국 채언은 참고 있던 숨을 토해내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분명 서 있을 때는 적당한 곳까지 차있던 물이었는데, 잠수했다가 위로 올라오려 하니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자꾸 휘청이며 땅에 발이 닿지 않는 것처럼 앞으로 고꾸라지려 했다. 숨을 쉬려다 코로 물이 들어가서 더 정신이 없었다. 그때 단단한 팔이 채언의 몸을 안아 들었다.

물안경을 벗어버린 채언은 손바닥으로 얼굴의 물을 닦아내며 콜록거렸다. 코가 매워서 눈물이 차올랐다.

“괜찮아요?”

“콜록. 아까 거기에, 있는다고. 하셨…! 콜록.”

채언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영웅을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을 본 영웅은 채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미안해요. 이만큼이나 온 줄 몰랐어요. 채언 씨가 이쪽으로 너무 잘 오길래.”

“콜록. 앞으로 잘 간 게 아니라, 멈추는 방법을 몰랐을 뿐이에요.”

영웅은 서둘러 허공에 손을 털고 채언의 빨개진 눈가를 닦아주었다.

“정말 미안해요. 앞으로는 어디 안 가고 그 자리에 서서 잘 기다리고 있을게요. 멈추는 법도 가르쳐줄게요.”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미안함과 동시에 영웅은 다른 마음이 들었다. 채언은 얼굴에 감정이 잘 드러나는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렇게 찌푸린 얼굴을 제대로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자신을 향해서. 앞으로 더 이렇게 다른 표정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웃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찌푸려도 괜찮고 울어도 괜찮았다. 다만 이렇게 자신이 볼 수 있는 앞에서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괴로워하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내뱉을 수가 없어서, 영웅은 계속 미안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채언의 기침이 멎었다. 숨 쉬는 것도 편안해졌다.

“이제 괜찮아요?”

영웅의 양 손바닥에 얼굴을 잡힌 채언은 물에 반사된 빛으로 일렁거리는 초록색 눈동자를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코가 매워요.”

젖은 볼과 손바닥이 마찰했다.

두 사람이 집에 들어온 시각은 열 시에 가까워졌을 때였다. 배가 고파서 편의점에 들러 각자 컵라면을 한 개씩 먹고 봉지라면 5개들이 멀티팩을 하나 사 왔다.

영웅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큰 냄비에 물을 가득 받았다. 물 양이 적당한지 가늠이 되지 않아 버렸다 다시 받기를 몇 번 반복했다.

채언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옷을 갈아입었다. 새 속옷을 챙겨가지 않아 씻고 물기를 꽉 짠 수영복을 입고 돌아온 것이었다. 아까 영웅이 로커에서 포장도 뜯지 않은 새 속옷을 가져와 내밀었지만 거절했다. 속옷까지 빌려 입는 것은 좀 그렇다고 거절하지 않았다면 영웅이 수영복을 입고 돌아가야 했을 것이었다. 어차피 피트니스 센터는 단지 내에 있었기 때문에 빨리 집에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편의점에서 라면까지 먹고 오게 될 줄은 몰랐다. 라면이 익는 동안 채언의 수영복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그래서 두 사람은 편의점 의자에 앉지 않고 서서 컵라면을 먹었다. 서서 먹게 된 것이 미안해 채언은 컵라면이 다 익기도 전에 과자같이 딱딱한 면을 뒤적거렸지만, 영웅은 서서 먹는 것도 좋아했다.

냄비의 물이 끓는 동안 영웅도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나와 보자 채언이 라면 봉지를 뜯고 있었다. 두 사람 다 보송보송했다.

수영은 생각보다 더 체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젓가락으로 면을 집어 후후 불던 채언은 왼손으로 눈을 비볐다. 배가 고프면서 동시에 졸리다니. 욕구에 충실한 인간이 된 느낌이었다. 국물이 바짝 졸아든 라면은 이상하게 맛있었다.

“피곤하죠.”

“조금요.”

다시 면을 집어 올리던 채언은 입을 열지 않고 머뭇거렸다.

“그런데 재미있었어요.”

영웅의 젓가락에서 주르륵 면이 흘러내렸다. 먹지도 않았는데 사례가 들린 듯 목이 꽉 막혀왔다.

“다행, 이네요. 그럼 앞으로도 같이 가요.”

영웅은 쇠젓가락을 부러뜨릴 듯이 꽉 쥐었다. 흐뭇한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다음에는 시간이 안 될 것 같다고 하셨잖아요. 저 때문에 괜히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니, 그건.”

띠링-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잠시만요.”

채언은 식탁 위에 엎어두었던 핸드폰을 뒤집었다.

[010-87xx-xxxx: 연락한다고 했잖아. 왜 답장 안 해줘? 형 쇼핑백은 가져갔어?]

조용해진 채언을 보던 영웅이 식탁 위로 팔을 올려 기댔다.

“그 사람이죠.”

“아, 네. 맡겨 놓은 거 찾아갔는지 물어보네요. 죄송해요. 빨리 답장만 보낼게요.”

채언의 손가락이 핸드폰 액정 위를 머뭇거렸다. 영웅은 천천히 손을 뻗어 그 위를 덮고 아래로 내리눌렀다. 커다란 영웅의 손을 보던 채언이 고개를 들었다.

“쇼핑백. 내일 내가 가서 찾아올게요.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다 알고 있으니까. 백화점에서 내가 주인이 맞는지 뭘 물어봐도 대답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러니까, 가지 말아요.”

채언이 핸드폰을 식탁 위에 내려놓자, 영웅이 그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너무 귀찮게 해드리는 것 같아서요.”

“안 귀찮아요. 몰랐어요? 나 쇼핑하는 거 좋아해요. 백화점 가는 것도 좋아하고요.”

잡힌 손과 영웅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채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요.”

“네. 그런데?”

“다시 가셔도 아까 본 셔츠는 사지 마세요.”

영웅은 웃음이 터질 뻔한 것을 참았다. 힘을 주어 입꼬리를 내렸다.

“그게 그렇게 이상했어요?”

힘 빠진 목소리를 들은 채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가 손을 빼려 하기에, 채언은 자신의 손을 뒤집어 영웅의 손을 잡았다.

“그렇진, 않아요.”

채언은 옆으로 눈을 굴렸다. 물론 영웅은 잘생겼고 체격이 좋아서 뭘 입어도 잘 어울리겠지만, 그 셔츠는 정말 이상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영웅이 상처받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직 여름도 아니고, 나중에 더 좋은 옷이 나올 것 같아서요.”

채언은 변명을 하면서 손을 꼼지락거렸는데 엄지로 영웅의 손가락을 문지르는 꼴이었다.

“알겠어요. 그건 안 살게요.”

“정말 안 사실 거죠?”

“네. 그리고 어차피 셔츠는 채언 씨가 쇼핑백 잃어버린 곳이랑 다른 백화점에 있잖아요.”

“아.”

채언의 손이 움찔했다. 잡고 있던 영웅의 손을 놓고 라면 그릇을 더 끌어당겼다.

“라면, 마저 드세요. 면이 엄청나게 통통해졌어요.”

그렇게 말하고는, 따듯한 기운이 남아있는 손을 들어 자신의 볼을 문질렀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운 채언은 아까 복도 끝에 서서 손을 흔들어주던 영웅의 모습을 떠올렸다. 살면서 잘 자라고 말해주는 사람을 몇 명이나 만났지. 몇 명 안 되는 것 같았다. 아주 어릴 때 부모님이, 시설에서 선생님이, 그리고 건영이가 그랬다.

채언은 베개 옆에 둔 핸드폰을 켜서 메시지 함에 들어갔다. 결국 답장을 하지 않았다. 연락처를 저장해놓지도 않아 건영의 메시지 위에는 이름 대신 번호가 떠 있었다.

채언은 건조한 눈으로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잠이 오고 있었다.

건영이 양부모의 집으로 완전히 들어가던 날. 하늘의 집 식구들이 전부 식당에 모여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식당에는 건영의 양부모가 차려준 음식이 가득했다. 출장 뷔페가 차려진 테이블부터 식당 안의 모든 식탁과 의자가 그들이 준 선물이었다. 그동안 자신들의 자식이 될 아이를 잘 돌보아준 값이라고 했다.

어쨌든 후원자가 마련해준 자리였기 때문에 원장은 그날을 위해 아이들에게 재롱떠는 법을 가르쳤다. 채언도 다른 아이들과 함께 앞에 나가 합창을 해야 했다. 뻐끔뻐끔 입을 벌려 노래 부르는 시늉을 하는 동안, 건영은 양부모 사이에 앉아 포크질을 하고 있었다. 앞에 놓인 딸기 케이크 한 판을 자르지도 않고 포크로 떠내고 있었다. 그러다 채언과 눈이 마주치자 히죽 천진하게 웃었다.

어둑해질 무렵이었다. 양부모가 원장과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는 틈을 타서 건영이 다가왔다.

‘형. 이거 줄게. 혼자서 다 먹어.’

비닐봉지 안에 가득 담겨있던 것은 크림이 잔뜩 묻은 딸기들이었다.

하늘의 집 정문에 대기하고 있던 검은 차 앞으로 건영이 양부모의 손을 잡고 걸어갔다. 채언은 건물 입구에 서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저 손을 잡고 가는 것이 자신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건영의 양부모가 된 사람들은 채언이 원장실에서 가끔 보던 사람들이었다.

‘애기야. 말할 줄 알아?’

‘말 좀 해볼까?’

‘아저씨 어때? 우리랑 같이 가고 싶지 않아?’

채언의 사진을 찍어가서 기사를 쓰던 지역 신문 기자들처럼, 부부는 가끔 와서 그렇게 말을 걸었다. 그러면 원장은 그 뒤에 서서 채언을 내려다보았다.

절대로 대답하지 마. 그렇게 말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자식이 없었던 부부는 사랑해줄 아이가 필요했고 외양을 보고 채언을 선택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건영을 데려가는 것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건영이 더 아이답게 해맑고 애교 있다는 것이 마음을 바꾼 이유였다.

검은 차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건영이 뒤돌아보았다.

‘형. 안녕!’

손을 흔들길래 채언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똑같이 안녕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 아, 안, 안.’

쇳소리를 내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채언이 말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은 사고의 충격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충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누가 물어보면 엄마 아빠 이름 모른다고 해. 집도 어딘지 모른다고 해야 해. 그래야 착한 아이야.’

채언은 자신의 옷을 단단히 여며주는 아빠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채언의 부모는 종종 그렇게 말하고는 했다.

그렇게 말한 날 중 어느 날엔 아이의 손을 잡고 나들이를 하러 갔다.

첫 번째 나들이를 하러 간 것은 채언이 부모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어린아이였을 때였다. 그날 채언의 부모는 옆 동네 공원에서 아이를 잃어버렸다. 평소 그들과 친분이 있었던 이웃집 아주머니가 아이를 발견하고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두 번째는 옆 도시의 놀이공원 주차장이었다. 해 질 무렵 혼자서 주차장에 앉아있는 아이를 보고 누군가 경찰에 신고했다. 부모님은 어디 갔는지, 집이 어딘지 묻는 경찰의 물음에 채언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저었다.

축 내려간 입꼬리 옆으로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붉게 짓무른 눈가가 부어올랐다. 여기 올 때는 어떻게 왔어? 누구랑 차 타고 왔니? 버스 타고 왔어? 입을 꾹 다물고 울던 채언은 버스를 타고 왔다고 대답했다. 누가 물어보면 엄마 아빠 이름과 집이 어딘지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이건 대답해도 될 것 같았다. 몇 번 버스를 타고 왔는지 정확히 말했다.

그 무렵 채언은 자동차와 공룡 장난감에 흥미를 느꼈지만 가지고 놀 게 없어서, 집 창문 밖으로 보이는 버스나 자동차 모양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다른 곳에 가는 것도 좋아했다. 그래서 자신이 타고 온 버스 번호를 알고 있을 뿐이었다.

경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 채언은 집 문이 열리는 순간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부모의 얼굴을 보았다. 그래서 곧바로 아빠 품으로 뛰어들어 안겼다. 따뜻한 품에 얼굴을 묻고 눈을 꼭 감았다.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아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동안 채언의 부모는 경찰과 대화를 했다. 최대한 다정스러운 부모의 모습으로 보이기 위해 아이의 볼이며 등을 계속해서 쓰다듬어주어야 했다. 눈을 감은 채언은 그 손길에 매달렸다. 커다란 손에 얼굴을 비볐다.

동갑 부부는 계획 없이 아이를 낳았다. 낳아놓고 보면 아이는 어떻게든 자라겠지, 쉽게 생각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세 가족의 삶을 버텨내기 쉽지 않았다. 채언은 원래 누구와 있어도 잘 놀고 잘 웃는 활발한 아이였지만, 두 번의 나들이에서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그러지 않았다. 무엇도 보채지 않는 조용한 아이가 되었다.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주어진 공간 안에서 가만히 시간을 보내는 것이 편안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버스나 공룡 장난감보다 부모의 품에 안겨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어지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마지막 세 번째 나들이 날은 채언의 부모가 아이에게 산타를 보러 가자고 한 날이었다.

‘채언아. 누가 물어보면 엄마 아빠 이름 모른다고 해. 집도 어딘지 모른다고 해야 해. 아니, 누가 뭘 물어보면 아무 말도 하지 마. 알겠지?’

채언은 가끔 부모가 자신에게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불안을 느꼈다. 아빠가 자신에게 하는 말이 싫었다. 왜 모르는 척을 해야 하지? 먼 곳에 가고 싶지 않았던 채언은 낡은 자가용에 타기를 거부하다가, 엄마 품에 안기고 나서야 차에 올랐다. 웬만해서는 보채지 않는 채언이었지만, 그날은 차 안에서 내내 엄마의 옷을 쥐고 칭얼거렸다.

‘왜 엄마 아빠 모른다고 해요? 우리 어디 가요? 어, 그냥 집에 가면 안 돼요?’

‘산타 할아버지 보러 가야지. 채언아. 크리스마스잖아.’

운전석에서 아빠가 하는 말에 채언은 고개를 저었다.

‘안 보러 가도 돼요. 나는, 어, 선물 안 받아도 돼요.’

채언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엄마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고 계속 말했다.

‘나 엄마랑 아빠 이름 아는데. 엄마 이름은 김…….’

그 순간 차가 도로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차 안이 흔들렸다. 채언은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엄마의 품 안에서 몸을 둥글게 말았다. 온몸이 깨질 듯이 아팠다.

세 번째 나들이를 가던 길에, 채언은 그렇게 손에 쥐고 있던 부모님을 잃어버렸다.

‘누가 뭘 물어보면 아무 말도 하지 마. 알겠지?’

‘그래야 착한 아이야.’

그리고 입을 열지 않게 되었다.

사고 당시 상황이 전부 기억나는 것은 아니었다. 어린아이가 겪기에는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충격이 컸기 때문이다. 차 안에서 정신을 잃은 채언은 며칠 뒤 병원에서 눈을 떴다.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채언의 머릿속에는 도형들이 떠다니기도 했고 부모님의 얼굴이 다가왔다가 멀어지기도 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장면들은 서서히 지워졌다. 부모님의 모습은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다정한 모습으로만 기억에 남았다.

‘산타 할아버지, 제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엄마랑 아빠를 다시 만나게 해주세요.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요.’

채언은 하늘의 집 트리에 소원 종이를 걸 때, 부모님을 다시 만나게 해달라는 소원을 적었다. 자신이 부모님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열심히 빌면 소원이 이루어질 것 같았다.

왜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는 건지. 왜 글씨를 빨리 써도 예쁘게는 써지지 않는 건지. 그런 것에 의문이 들 때쯤이었다. 학교에서 미술 시간에 신문지를 구겨 만들기를 하기로 한 날, 채언은 같은 반 친구가 가져온 오래된 신문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했다. 채언은 직감했다. 자신을 보는 어른들이 친절한 이유는 저것 때문일 거라고.

‘글씨를 잘 쓰고 말을 잘하게 해주세요. 신문에서 내 얼굴을 다 지워주세요.’

하지만 아무리 바라도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혼자서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해주세요.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마음속으로 바라던 소원을 입 밖으로 읊조린 것은 처음이었다.

믿지 않는 신에게 바라게 된 것은 혼자서도 잘 살 수 있게 해달라는 소원 하나뿐이었다.

키가 자라는 동안 채언은 점점 예전 일을 기억하지 않게 되었다. 예전 일을 떠올리려 할 때마다 마음이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것이 나빴는지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채언은 어린 시절이나, 부모님과의 마지막이 생각나지 않는 것은 아쉬웠지만, 자신의 기억력이 좋지 않아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름 모를 신에게 빌었던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린 시절을 떠올렸을 때 제대로 기억나는 것은 건영과 지냈던 일뿐이었다. 건영과는 잠시 연락이 끊겼었지만 채언이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그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형. 우리 엄마가 동생을 낳았어.’

채언이 대학에 들어가지 않기로 결정했을 때도, 돈을 모아 고시원에서 투룸으로 이사했을 때도 둘은 계속 연락했다. 원장실의 전화기로, 메일로, 핸드폰으로. 서로 사는 곳이 멀었기에 두 사람이 만나는 일은 손에 꼽을 만큼 가끔 있었다.

헤어진 이후 처음 만난 것은 채언의 고등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건영은 교복을 입고 찾아왔는데, 양부모가 돈이 많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교복을 입고 있어도 부잣집 아이다운 태가 났다. 몸에 꼭 맞는 브랜드 운동화와 외투, 가방은 새것인 듯 깨끗했다.

건영의 졸업식 날에는 채언이 찾아갔다. 건영의 키는 부쩍 자라있었고 와이셔츠 소매와 바지 끝단이 그만큼 올라가 발목과 손목뼈가 살짝 드러났다. 신발을 꺾어 신은 건영의 옆에는 양부모와 어린 동생이 함께 있었다. 채언은 그 모습을 보고 미지근한 질투를 느꼈다.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씁쓸해서 운동장 바닥을 한 번 찼다.

긴 졸업식이 지루했던 듯 삐딱한 자세로 서 있던 건영은 주변을 둘러보다 채언을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형! 진짜 왔네?’

‘졸업 축하해.’

채언은 준비해온 꽃다발을 내밀고 건영의 양부모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심채언입니다.’

어린애를 안고 있던 부부는 채언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오래전 일이 생각난 듯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혹시 하늘의 집에 있지 않았어요?’

그다지 숨길 필요 없는 사실이었다.

‘네. 맞습니다.’

‘낯이 익다 했더니, 맞구나. 혹시 우리 기억해요?’

채언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하는 동안 건영의 양아버지 품에 안겨있던 아이가 칭얼거렸다. 걸을 수 있는 나이의 어린애였지만 발에 꼭 맞게 신긴 신발 밑창이 하얬다. 옆에서 건영이 품에 안은 꽃다발 포장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몇 년 후 어느 여름날이었다.

딩동-. 벨을 누르는 소리에 채언은 들고 있던 반팔티에 서둘러 목을 집어넣고 현관 앞으로 갔다.

‘누구세요?’

문을 열었을 때 보인 것은 팔을 들어 이마의 땀을 닦고 있던 건영이었다.

‘너.’

‘나 더워. 형.’

‘어? 일단 들어와.’

맹한 표정으로 서서 문 앞을 비켜주는 채언을 보던 건영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너무 쉽게 들여보내 주는 거 아냐?’

‘못 들어오게 막을 이유는 없잖아.’

채언은 현관문을 닫고 들어와 에어컨 리모컨을 찾았다. 삐빅. 소리를 내며 가동을 시작한 에어컨 앞에 선 건영은 티셔츠 앞섶을 잡고 펄럭거렸다.

‘어디 가려고 했어? 에어컨 꺼져있었네.’

건영은 성인이 된 후 채언을 종종 찾아왔다. 둘은 만나면 평범하게 놀았다. 술을 마시기도 했고, 같이 게임을 하거나, 그러다 가끔은 건영이 채언의 집에서 자고 가기도 했다.

‘응. 아르바이트.’

‘지금 가야 해?’

‘어. 한 오 분 후에 나가야 돼. 너 밥은 먹었어?’

‘아니. 근데 알아서 먹을게.’

채언은 작게 딸린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었다.

‘반찬 별로 없는데. 뭐 해줄까?’

‘해주긴 뭘 해줘. 시간도 없으면서. 그리고 나 배 안 고파. 그래서 안 먹은 거야.’

‘그래도.’

‘배고프면 내가 이따 알아서 시켜 먹을게. 아니, 해 먹을게.’

‘너 이젠 우리 집이 자연스럽다, 되게.’

‘응. 그럼 다녀와. 나 좀 자고 있을게.’

채언은 눈을 감은 채 에어컨 바람을 쐬고 있는 건영의 앞으로 다가갔다.

‘야.’

‘어?’

건영의 머리를 양손으로 마구 흩트린 뒤 채언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물러났다.

‘잘 거면 밥 먹고 자. 다녀올게.’

건영은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대충 빗어 내린 뒤 채언에게 손을 흔들었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던 채언은 뒤를 돌아보았다. 에어컨 앞에 서 있는 건영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건영은 이렇게 불쑥 찾아오곤 했지만 채언은 그것이 싫지 않았다. 집에 돌아왔을 때 자신을 반겨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같이 살자고?’

‘응.’

채언은 물고 있던 칫솔을 입 밖으로 꺼내며 손등으로 입술에 묻은 거품을 닦았다.

‘잠시만. 너, 기다려.’

채언이 입안을 헹구고 돌아오는 동안 건영은 얌전히 두 손을 모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그냥.’

여름, 가을. 찾아오는 빈도가 잦아지더니 건영은 요 며칠 채언의 집에서 지냈다.

‘건영아. 집에 무슨 일 있어?’

채언은 자신과 눈높이가 비슷해진 동생의 눈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입을 다문 건영은 입꼬리를 올려 웃기만 했다.

‘너 학교는? 여기서는 너무 멀잖아.’

‘이번 학기 1교시 없어서 괜찮아. 곧 방학이고.’

채언은 목덜미를 만지며 집 안을 둘러보았다. 투룸이었지만 낡고 오래된 곳이었다. 방 두 개짜리 아파트와는 달랐다. 가끔 건영이 놀러 와 자고 간다지만 아예 둘이 같이 살게 된다면 이것저것 들여놓아야 할 것이었다. 집이 좁아 불편할 텐데.

‘월세는 같이 내. 공과금도 반씩. 아니, 내가 더 많이 낼게.’

보증금을 조금 많이 내는 대신 월세를 낮춰 계약했기 때문에 채언은 굳이 룸메이트를 들일 필요가 없었다.

‘너한테 월세 낼 돈이 어디 있어. 아르바이트도 안 하면서.’

‘그냥. 어떻게 생겼어. 그리고 이제부터 일하면 되지.’

‘학교는?’

‘여기서 기차 타고.’

‘기차 타고 다니면서 어떻게 일을 하냐고.’

채언은 건영의 머리 위에 손바닥을 올려 꾹꾹 눌렀다. 불만이 가득 담긴 눈을 위로 치켜뜬 건영이 채언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돈 있어. 우리 집 망할 뻔했거든.’

‘뭐?’

채언의 눈이 동그래졌다. 돈이 있다는 것과 망할 뻔했다는 것 사이에 맥락이 없는 것처럼,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말에 깜짝 놀랐다.

‘TV 보니까 집이 망하면 다 버리고 야반도주하더라? 아빠가 사업 정리하는데 나도 버리고 야반도주할까 봐 따로 쓸 거 좀 모아뒀어.’

‘너, 그 말 진짜야? 아니면 장난치는 거야?’

‘결론적으로 망한 건 아니더라고.’

건영은 팔을 벌려 채언의 허리를 안은 뒤 어깨 위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렸다.

‘근데 그 집에 있기 싫어. 그래서 그래. 장난치는 거 아니야…….’

채언은 품에 안긴 건영의 등을 토닥였다. 어린 시절을 공유한 사이였다. 이미 사라진 가족과 집에 대한 불안은 가끔 채언을 찾아와 덜컥 겁을 먹게 했다. 기억하지 못하니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었다.

채언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알겠어.’

‘허락한 거야?’

‘대신 큰방은 내 거야.’

‘응!’

‘물도 조금만 써.’

‘응!’

‘보일러도 틀지 말고.’

‘가끔 틀게.’

‘아침저녁으로 청소기 돌리고. 설거지도 전부 네가 해.’

‘…어.’

‘일요일마다 대청소할 거야.’

‘그건 좀 그렇다.’

서로의 불안을 털어내듯 말장난을 하며 웃었다.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이던 채언은 피곤한 눈을 떴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이었다. 잠들기 전에 건영의 메시지를 봤더니 얕은 잠을 자는 동안 옛날 꿈을 꾸었다. 자다 깨다 반복하며 눈을 떴지만 끊어진 잠 사이사이에 과거가 빼곡히 들어찼다.

채언은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알람이 울리려면 몇 시간이나 남아있었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몇 시간 후면 영웅과 아침을 먹을 시간이니까. 그가 출근 준비를 시작하면 나가서 아침을…….

“아.”

채언은 핸드폰을 내려두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일요일이었다. 오늘은 영웅도 늦잠을 잘 터였다. 한숨을 쉬자 베개가 뜨끈해졌다.

건영을 데리고 대동에 가던 날이었다.

‘형은 하늘의 집이 좋아?’

‘좋으냐고?’

‘이렇게 매번 찾아올 일이냐고. 여기서 뭐 좋은 일이 있었다고.’

‘좋아서 온다기보다는 그냥 가끔 찾아뵙는 거지. 원장님이나 뭐 다른 분들.’

‘나라면 원장 보러 갈 시간에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을 보러 가겠어.’

‘담임 선생님이 누구셨는지 기억은 나고?’

‘아니.’

‘그러면서 뭘.’

‘그러니까 아무도 안 보러 가겠다는 거지.’

채언은 그날따라 삐딱한 표정을 짓고 있던 건영의 태도를 걱정했다.

‘그런데 왜 하필 과일이야?’

‘음. 그냥. 건강에 좋잖아.’

건영은 채언이 하늘의 집에 과일을 기부하기 위해 종종 들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함께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채언은 건영이 충북과 혜옥에게 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생이 잘 보여서 귀염 받기를 바랐다.

‘저기야?’

생글 포도 농장을 가리키며 묻는 건영에게 채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눈을 감았다가 떠도 시간은 빨리 흐르지 않았다. 겨우 해가 뜨기 시작했다. 꿈을 꾸지 않으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생각이 물밀 듯 밀려왔다. 눈을 감아도 떠도 예전 모습이 보였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도대체 뭐가.

채언은 가슴이 답답해서 천천히 깊게 숨을 마시고 내쉬었다.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그만 생각하고 싶은데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건영이 이상해진 것은 시간이 흘러 딸기 철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여보세요.’

-채언아. 아까 말한다는 걸 까먹어서 지금 전화했는데. 지금 전화 괜찮지?

‘네. 아저씨.’

-딸기 끝나기 전에 좋은 거 있길래. 두 박스 보냈거든. 너 동생이랑 먹어라.

충북은 채언과 함께 생글 포도 농장에 들렀던 건영을 잊지 않고 있었다. 채언은 대동에 가는 길에 왜인지 모르게 심통 났던 녀석을 걱정했지만, 막상 어른들을 만날 때는 싹싹하고 살가운 태도로 호감을 산 건영이었다. 다행이었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아껴먹지 말고, 상하기 전에 빨리 먹어. 하나 곰팡이 피면, 다른 거 멀쩡해 보여도 싹 다 안 좋은 거다.

‘네. 바로 먹을게요.’

-그런데 채언아, 너 요즘 그거 보냐?

‘저번에 말씀하신 드라마요?’

둘은 잠시 인기리에 방영 중인 드라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 채언은 호프집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이른 저녁부터 취객에게 시비를 걸려 속상해하고 있었다.

외상이 되지 않는 동네 호프집이었다. 막무가내로 외상을 해달라며 채언의 멱살을 쥐고 흔들던 취객은 요구를 거절당하자 폭언을 하기 시작했다. 어린 게 어른 공경을 할 줄 모른다느니, 가정교육을 못 받아서 그렇다느니, 마침내 부모님의 안부를 물어오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채언은 이를 물고 참아야 했다. 눈가가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열이 받고 속상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지인들과 가게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사장이 달려와 둘을 떼어놓았다. 사장은 유니폼 목 주변이 잔뜩 늘어난 채언의 등을 토닥여주며 오늘은 일찍 퇴근하라고 대타를 불렀다. 채언은 일머리가 좋아서 사장이 아끼는 아르바이트생이었다. 갓 스무 살이 되었을 즈음부터 일하다가, 이사 보증금을 모으기 위해 다른 곳에 취직했다 돌아온 채언에게 다시 일할 것을 제안한 것도 그였다. 사장은, 이런 일이 있을 때는 쉬게 해주어야 아르바이트생들이 가게에 오래 붙어 있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충북과 별거 아닌 이야기를 나누자 속상했던 마음이 좀 가시는 것 같았다.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내려놓은 채언은 시간을 확인했다. 늦은 밤이었지만 집에는 혼자뿐이었다.

건영은 학교 동기들과 놀다 오겠다며 나가서는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날이 늘었다. 겨울방학을 하고도 동기들을 만나러 간다길래 채언은 대학생들은 원래 저런가, 신기하게 생각했다.

경험해본 적 없는 생활에 대해 부러움을 느끼는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며칠씩 연락이 끊겼다가 술에 취해 들어오는 건영을 보다 보니 부러움보다는 걱정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개강 후에는 그런 일이 더 잦아졌다. 대학 동기들이라는 것들이 기차 타고 다니는 애를 저렇게 취한 채로 집에 보내나. 자기들 집에서 좀 재워주지. 건영이 취한 채로 들어오는 새벽마다 채언은 속으로 얼굴도 모르는 건영의 대학 동기들을 나무랐다. 어느 날 술 취한 건영에게 너 학점관리는 안 하느냐고 물었더니 응, 안 해도 돼,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바르게 살지 않아도 된다니까.’

술에 취해 풀린 눈으로 건영은 주정을 했었다.

그래서 채언은 다음 날 아침, 숙취에 고통스러워하는 건영을 깨워 앉혀두고 걱정 섞인 화를 냈다. 그랬더니 온순하게 잘못했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미안해져서 부랴부랴 해장국을 끓여준 것이 며칠 전이었다. 건영은 그 뒤로 또 나가서는 나흘째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충북 아저씨가 우리 먹으라고 딸기 보내주셨어. 엄청 많아.(사진)]

[건영이: 엄청 싱싱하네]

[오늘 안 들어와?]

[건영이: 모르겠어ㅠㅠ]

[언제 올 거야.]

[이거 점점 쪼그라드는 것 같아.]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채언은 건영과 나눈 메시지를 올려다보다 한숨을 쉬었다. 첫날 싱싱했던 딸기는 사진으로만 남아있었다. 충북이 아끼지 말고 서둘러 먹으라고 했던 딸기는 스티로폼 박스에 담긴 채로 점점 무르더니 결국 곰팡이가 피고 말았다. 곰팡이가 핀 것을 버리고 괜찮은 것들만 골라 놔두었지만 아침저녁으로 확인해볼 때마다 곰팡이 핀 것들은 늘어만 갔다.

열두 시가 넘었을 때, 채언은 TV를 끄고 방에 들어가서 누웠다. 방문은 열어놓은 상태였다.

새벽에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려서 채언은 비몽사몽 잠에서 깨었다. 와르르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날 새벽을 생각하자 채언은 갑갑한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눈을 감고 다시 잠들기 위해 노력하던 채언은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핸드폰을 켜서 메시지 함을 열었다.

비틀거리며 들어온 건영은 채언을 보고 성의 없이 인사했다. 술에 취해 제대로 인사할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건영은 그러다 거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벽에 기댄 몸이 양옆으로 흔들렸다. 옆에는 딸기가 담겨있던 스티로폼 박스가 나뒹굴고 있었다. 발에 차여 그렇게 된 듯했다.

방 불을 켜고 거실로 나온 채언은 짓무른 딸기가 곳곳에 굴러다니는 것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냥 버릴 것을, 그래도 깨끗한 것 몇 개는 괜찮지 않을까 놔둔 것이 잘못이었다.

‘건영아, 씻어. 그리고 방에 들어가서 자.’

‘귀찮아.’

‘이거 밟아서 발이 젖었잖아, 너.’

채언은 건영 앞에 주저앉아 그의 발을 콕콕 찔렀다. 그러자 건영은 옆에 굴러다니는 뭉개진 딸기 하나를 들더니 눈을 찌푸리며 들여다보았다.

‘형… 이거 다 썩었어. 곰팡인데.’

푸우, 숨을 내쉰 건영은 딸기를 들고 있던 손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곰팡이 핀 딸기가 데구르르 바닥을 굴렀다.

‘왜 이렇게 늦었어? 일찍 다녀야지.’

취한 사람을 혼내봤자 제대로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별로 혼낼 마음도 들지 않아서 채언은 건영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물 가져다줄까?’

‘아니이.’

‘손잡아줄게, 일어나. 방에 들어가자.’

‘싫어!’

‘왜?’

‘그냥 싫다고, 그냥. 여기서 잘래. 이렇게….’

건영은 요즘 정말 이상했다. 눈을 끔뻑거리며 푸우, 푸우, 술 냄새 나는 숨을 내쉬던 건영이 입술을 달싹이기 시작했다.

‘왜 그래?’

‘뭐라고?’

‘형은 왜 그렇게 살아?’

꼬부라진 혀로 발음하는 문장은 채언의 귀에 정확히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뜻인지도 모를 말이 들린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채언은 정말로 건영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 입에서 나온 말이 자신에게 상처 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형은, 왜.’

‘네가 지금 뭐라고 했는지 못 들었어. 근데 너 취했으니까 안 들을래.’

채언은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가 이불을 안아 들고 나왔다.

‘이불 펴줄게. 얼른 자.’

바닥에 이불을 깔았다. 공기에는 형태가 없는데 숨을 쉴 때마다 딱딱하고 네모난 벽돌을 삼키는 것 같았다. 숨을 쉴 때마다 온몸이 무겁게 짓눌렸다.

‘누워. 어서.’

베개까지 놓아주었지만 건영은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눈을 끔뻑이며 채언의 얼굴만 보고 앉아있었다.

‘응? 왜 그렇게 반듯하게 살아?’

‘내가 뭘.’

‘그냥 이런 데서, 자고. 밖에서 아니면, 자다가. 뭘. 뭐를 하든가.’

‘건영아.’

‘그래 봤자 아무도 안 알아주잖아. 아껴주는 척했다가 다 버리잖아.’

혼잣말하듯 낮게 읊조리던 건영은 갑자기 큭큭 웃기 시작했다.

‘왜 웃어.’

이불을 쥐고 있던 채언은 고개를 들어 건영을 보았다.

‘웃겨서.’

‘뭐가.’

어두운 방 안에서 둘은 대치하듯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채언의 얼굴에 얕은 긴장이 깔렸다. 안 좋은 일이 생기기 직전에는 직감적으로 느낌이 왔다. 심장 뛰는 것이 의식되기 시작했다. 귓가에 쿵 쿵 소리가 들렸다.

‘저게, 웃겨서.’

건영은 느릿한 턱짓으로 스티로폼 박스를 가리켰다. 박스 아래 나뒹구는 딸기들은 하나같이 짓무른 상태였다.

‘가지고 있으면 뭐 해. 다, 버리는데.’

웅얼거리던 건영은 앉은 채로 비틀거리다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채언은 팔을 벌려 앞으로 쏟아지는 건영의 몸을 받아냈다.

“형! 채,언 형!”

“응.”

‘형은… 꼭…….’

웅얼거리는 건영의 말을 들은 채언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웃기지 않아? 우리, 다… 그렇다니까.’

서로의 옷자락을 꽉 쥐고 있었다. 채언은 품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낮은 목소리를 재생하고 있었다.

‘형. 응? 혀엉.’

점차 느려지는 말투에 채언은 눈을 감았다. 잦아드는 건영의 숨소리와 다르게 채언의 숨은 거칠어지고 있었다. 건영의 등을 토닥이는 이유는 잘 자라는 다독임이 아니었다. 채언은 자신의 불안을 잠재워야 했다. 어린 시절이 잘 기억나지 않게 된 이후로 이유 없이 불안이 차오를 때가 있었다.

잠들기 전, 높은 계단을 내려갈 때, 좁고 어두운 공간에 들어갈 때, 차를 탈 때,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리는 알록달록한 공간에 발을 들일 때 자꾸만 무언가 떠오르려 했다. 그럴 때마다 채언은 눈을 감고 아무것도 떠올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사는 게 좋았다. 그래야 살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어느덧 불안은 공포로 뒤바뀌어 있었다. 채언은 가쁜 숨을 내쉬며 품 안의 건영을 세게 안았다. 눈을 감아도 불안이 사라지지 않아서 천천히 눈을 떴다. 발끝에 물컹한 것이 닿아 고개를 돌려보니 널브러진 스티로폼 박스가 보였다.

‘형은… 꼭, 곰팡이 핀 딸기 같아.’

턱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마음속에 단계별로 파인 흔적이 있었다. 불안은 그것을 밟고 위로 기어올랐다. 마침내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들이 채언의 눈앞에 펼쳐졌다.

채언아. 누가 물어보면 엄마 아빠 이름 모른다고 해.

인터뷰는 아직 무리겠죠?

아무 말도 하지 마. 알겠지?

산타 할아버지, 제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엄마랑 아빠를 다시 만나게 해주세요.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요.

채언아, 표정 이렇게 해봐. 아니, 좀 더 불쌍하게. 카메라 보고.

야. 심채언, 이거 너 아니야?

68번, 버스 타고 왔어요. 엄마 아빠랑 버스, 타고 왔어요.

찰칵거리며 얼굴을 찍어대던 카메라 셔터음. 눈앞으로 내밀어지던 신문지. 몇 번이고 버려지던 기억과 입 다물게 시키던 어른들의 얼굴. 꽉 쥐고 있던 엄마의 옷자락과 피가 흘러 매끈해진 손가락의 느낌. 그래서 놓쳐버렸던 것들.

채언의 눈앞이 흐려졌다 선명해지기를 반복했다. 덜덜 떨리는 턱 아래로 눈물방울이 모여 떨어졌다.

‘…건영아.’

채언은 건영의 등을 토닥이던 것을 멈추고 옷자락을 쥐었다. 살살 흔들어보았다.

‘건영아아.’

점점 세게. 하지만 술에 취해 잠들어버린 건영은 눈을 뜨지 않았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채언의 가슴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참고 참던 울음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취객이 멱살을 잡고 흔들 때도 참고 참았던 서러운 마음이었다.

‘너도, 나를 그렇게, 그렇게 생각했어?’

꾹꾹 눌러두던 것들이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

‘응? 너도, 나를….’

헐떡이는 울음소리가 작은 방 안을 계속해서 울렸다. 채언은 새벽 동안 어린애처럼 혼자 울었다. 사람의 몸에서 이렇게 많은 눈물이 흘러나올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도저히 멈춰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헐떡이는 소리는 잦아들었지만 부은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무도 자신을 안아주지 않았다. 먼저 안기려고 애를 썼다. 자신의 품 안에 안겨 잠이 든 건영의 등이 보였다.

채언은 그제야 가끔씩 불안으로 메슥거리던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사람은 견딜 수 있을 만큼만 기억을 안고 살아간다고 하던데. 완벽한 망각은 자신에게 성립되지 않는 단어인 듯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알아버렸다. 먹을 만해 보여 괜히 아껴뒀다가 곰팡이가 슬어버리는 딸기처럼, 자신의 과거에 켜켜이 어둠이 끼어있었다는 것을.

딸기 한 알에 곰팡이가 피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주변의 딸기에도 포자가 퍼진다던데. 상해버린 것을 억지로 삼키려 노력해봤자 이미 배 속 가득 썩은 것들투성이일 텐데.

채언은 손에 쥐고 있던 건영의 옷자락을 놓아버렸다. 뚝뚝 떨어지던 눈물처럼 탁, 손이 떨어졌다. 길게 내쉬는 숨 속에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딱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충동적인 것이었다.

뭘 위해 아등바등 살았지?

배가 고플까 봐 음식을 챙겨주던 호프집 사장님도, 최대한 사정을 봐주며 좋은 과일을 챙겨주던 충북 아저씨도 결국 끝은 같지 않을까. 낳아준 부모님도 버린 자신을 누가 사랑해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자신을 찾아왔던 건영마저도 이렇게 돌아서는 끝을 보았는데. 이제는 눈앞에서 누군가의 등을 보는 끝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많이 울어 어지러웠다. 새벽이 지나고 아침을 맞이하는 순간에 채언은 자신이 아무 감정도 느끼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멍하게 빛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한 작은 방 안에 앉아있었다. 발끝에 햇살이 와 닿기 전에 채언은 몸을 일으켰다. 외투도 걸치지 않고 현관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골목으로 나선 순간 밝아오는 주변이 보였지만 신경 쓰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세상 모든 불행이 몸에 달라붙은 것 같았다. 이걸 다 버리고 싶었다.

질척한 늪에 빠져 무거운 다리를 계속해서 움직였다. 골목 끝에서 한 번 더 꺾으면 시간에 상관없이 많은 차가 다니는 큰 도로가 나왔다. 아르바이트를 갈 때면 항상 건너는 건널목이 거기 있었다. 채언은 그곳을 목표로 계속 걸었다. 가까워질수록 빠르게 달리는 차 소리가 들려왔다. 한 발자국씩 힘겹게 떼던 발걸음은 뜀박질로 바뀌었다. 채언은 헉헉 소리가 나올 정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달려나간 순간 보이는 것이 빨간불이라면 멈추지 않고 건너기로 했다. 사람은 죽기 전에 잊었던 것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는데, 그게 이런 건가 싶었다. 잊고 싶었던 것들이, 잊은 줄 알았던 것들이 죽기 직전에야 떠올라서, 그래서, 이렇게 예고도 없이…….

끼이익-!

‘야 이 미친 새끼야 죽고 싶어!’

문득, 정신을 차린 채언은 자신이 도로 바닥에 넘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앞에는 차가 한 대 서 있었고, 흥분한 운전자가 문을 열고 나와 자신에게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이게 누구 인생을 망치려고 뛰어들어, 뛰어들기를! 뒤지고 싶어서 환장했어?’

자신에게 삿대질하는 남자를 보던 채언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바닥을 짚은 손목이 아릿하게 아파서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쉬었다.

‘죄… 죄송, 죄송합니다.’

‘술을 처마셨으면 잠이나 처잘 것이지! 재수 없게 누구 인생을 망치려고!’

‘죄, 송합니다. 죄, 죄송합니다.’

씩씩거리던 남자는 한참이나 도롯가에 넘어진 채언을 보며 삿대질을 하다가 차 안으로 돌아갔다. 기다시피 해서 인도로 올라온 채언은 온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지금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거지. 정상적인 사고가 되지 않는 머릿속이 윙윙 돌았다.

건영에게서 온 메시지들을 바라보던 채언은 하,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메시지를 하나씩 삭제했다.

메시지 함을 비운 채언은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선인장을 바라보다가 방문을 열고 나갔다.

선인장 화분의 마른 흙을 보니 목이 마른 것 같았다. 부엌으로 걸어간 채언은 컵에 물을 받았다. 하지만 막상 찰랑이는 물을 보니 마시고 싶지가 않았다.

왜 밖으로 나왔지. 컵 안에 비치는 흐린 얼굴을 보던 채언은 들고 있던 것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멍하니 빈손으로 티셔츠 끝자락을 매만졌다.

채언은 부엌을 나와서 방문 앞으로 갔다. 영웅의 방문 앞이었다.

똑. 똑.

채언은 처음으로 영웅의 방문을 두드렸다.

“아.”

문을 두드린 채언은 한걸음 물러섰다. 자는 사람을 깨워서 뭘 하려고 했던 거지. 방황하는 손을 등 뒤로 숨긴 채 뒷걸음질 치다가 몸을 돌렸다.

“채언 씨?”

아까 따라둔 물이나 마실 생각으로 부엌에 가려고 했는데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당황한 채언은 고개를 돌려 방금 떠나온 자리를 쳐다보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영웅은 어쩐지 긴장한 표정이었다. 평소라면 좀 더 자다가 일어났겠지만, 그는 밤새 잠을 설쳤다. 백화점 오픈 시간에 맞춰 서둘러 채언의 쇼핑백을 찾으러 갈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잠을 자려고 노력해 봐도 잠이 안 와서 자꾸 시계만 들여다보다가 결국 귀마개를 빼고 늦잠 자는 것을 포기했다. 아침을 먹으며 시간을 때워볼까 했지만, 그럼 채언과 함께 식사하는 타이밍이 맞지 않을 테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영웅은 긴장한 채 문고리를 돌렸다. 귀신 아니면 바람, 그것도 아니면 채언. 셋 중 하나일 텐데 셋 중 가장 가능성 낮은 것이 채언이었다.

그런데 문을 열자 채언이 보였다.

“채언 씨가 노크 한 거예요?”

“아, 그게…….”

힘주어 문을 두드린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채언은 영웅이 일어날 줄 몰랐다. 소리에 예민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했다. 그는 왜 이 시간에 잠을 깨웠냐고 핀잔을 줄 사람은 아니었지만, 왜 문을 두드렸냐고 이유를 물어보면 채언은 할 말이 없었다.

“네.”

입술을 깨문 채언은 영웅을 보고 바로 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영웅은 놀란 표정을 감추고 잠긴 목을 가다듬었다.

“왜, 왜? 무슨 일로.”

그렇게 묻고 나자 혹시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게.”

딱히 이유를 댈 수 없는 채언은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혼나는 중도 아닌데 긴장이 되어서 손발이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바닥을 보다가 영웅을 흘끔 쳐다보자 눈이 마주쳤다.

“그게, 손이 좀 차가운 것 같아서요… 아니, 발도 좀. 그래서 속도 좀 그렇고.”

병원에 온 것도 아닌데. 채언은 할 말이 없어서 몸 상태를 줄줄 웅얼거리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채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귀를 기울이고 듣던 영웅은 깜짝 놀랐다. 성큼성큼 다가가 채언의 손을 잡고 주물럭거리며 안색을 살피기 시작했다.

“손발이 차가워요? 속도 안 좋고? 아파서 온 거였어요?”

몸 이곳저곳을 살피는 걱정스러운 시선에, 채언은 아무 말이나 해서 상황을 무마하려던 계획이 실패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단, 이리 와요.”

영웅은 채언의 손을 잡고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요.”

독감에 걸렸을 때도 자신에게 전화 한 번 걸지 않았던 채언이었다. 영웅은 방에 들어오지 않으려고 버티는 채언을 심각한 얼굴로 보다가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어어?”

갑자기 세상이 도는 바람에 채언은 손에 잡히는 것을 꽉 끌어안았다. 별다른 힘도 들이지 않고 채언을 안아 든 영웅은 침대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다소 거친 발걸음과 달리, 안고 있던 이를 내려놓을 때는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폭신한 침대에 채언의 등이 닿았다. 포옥 소리를 내며 머리가 베개에 파묻혔다. 영웅이 샤워를 하고 나올 때면 맡아지던 향기가 채언의 몸 전체를 휘감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이던 채언은 자신이 누운 채로 영웅의 목을 끌어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스륵. 그의 목 뒤로 감고 있던 팔을 풀어내자 영웅도 채언의 목 뒤와 다리 아래를 받치고 있던 팔을 빼내었다. 하지만 둘 사이는 멀어지지 않고 더 가까워졌다.

“아파요?”

채언의 얼굴 양옆으로 손을 내린 영웅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채언은 고개를 저었다. 부정하는 몸짓에 영웅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영웅은 손을 거두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누운 채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채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침대 위에 얌전히 놓여있던 그의 한쪽 손을 잡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손도 차고 발도 차다고 했으면서.”

얽힌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건, 이젠 괜찮아요.”

영웅은 괜찮다는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듯 얽힌 손가락을 놓아주지 않았다. 다행히 채언의 손은 걱정할 만큼 차갑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도 안 좋다고 했잖아요.”

영웅은 깍지 낀 손을 천천히 움직여 채언의 배 위에 살짝 얹었다.

“아니. 아픈 게 아니라요…….”

“아픈 게 아니면요?”

“졸려서 말을 잘못했어요.”

반만 걷어놓은 암막 커튼 때문에 방 안은 적당히 어두웠다. 눈을 굴리던 채언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적당한 변명을 찾아냈다.

“배가 고파서요. 배고프다는 걸 잘못 말한 거예요.”

그래도 영웅은 의심을 거두지 않고 채언의 얼굴을 살폈다. 방 안이 밝지 않아 가까이 다가가 살펴야 했다.

“어디 봐요.”

깍지 낀 손이 풀리자 채언은 주먹을 쥐었다.

영웅은 방금까지 깍지를 끼고 있어 뜨끈해진 손으로 채언의 귓가를 만졌다.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귀가 차가워진다던 채언의 말을 기억한 것이었다.

“…괜찮죠?”

“흠.”

온도를 가늠하듯 귓불을 살짝 누르던 손가락이 살살 움직이더니 볼을 감쌌다.

“그럼 채언 씨. 정말 아픈 게 아니고, 졸리고 배고픈 거예요?”

“네.”

채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손에 볼이 쓸리자, 채언은 무의식중에 그쪽으로 살짝 고개를 틀었다.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을 들어 자신의 볼을 쓰다듬는 영웅의 소맷자락을 쥐었다.

“그냥, 아침을 같이 먹고 싶어서…….”

손바닥에 기대오는 느낌에 영웅은 소리 내지 않고 웃었다. 채언은 정말 졸린 듯했다. 아직 잠이 덜 깬 것이 틀림없었다. 아침을 같이 먹고 싶어서 문을 두드렸다니.

“채언 씨.”

“네.”

“아프지 않다니 다행이지만.”

영웅은 일부러 조용하고 느릿하게 말했다.

“앞으로 내가 방 안에 있을 때 무슨 일이 생기면 꼭 불러줘요.”

“네.”

“별일 없어도 부를 일 있으면 오늘처럼 문 두드려요.”

따듯하고 폭신한 침대였다. 좋은 향기도 났고 볼을 감싼 손 덕분에 채언은 안심이 되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영웅은 잠시 말이 없었다. 방 안에는 숨소리와 가끔 살살 볼을 쓸어내리는 소리만 들렸다. 밤새 잠을 설친 채언의 눈에 졸음기가 담기기 시작했다.

채언의 눈꺼풀이 반쯤 내려앉았을 때 영웅의 입꼬리가 조용히 위로 올라갔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채언의 속쌍커풀 라인이 선명히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나 쉽게 볼 수 없는 풀어진 얼굴이었다.

“그럼 잠깐 여기 누워있어요.”

영웅은 한참 만에 속삭이듯 말하고 일어서려 했다. 그런데 소매를 잡고 있던 손이 딸려왔다. 까무룩 감기려던 채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저도, 같이.”

거의 재울 수 있었는데. 영웅은 아쉬움을 삼키며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채언의 얼굴 위로 다른 쪽 손을 올려 눈을 가려주었다.

“배고프면 눈앞이 핑핑 돌잖아요. 따라 나오지 말고 잠깐 누워있어요.”

“그 정도는 아닌데요.”

채언은 여전히 영웅의 소맷부리를 쥐고 있었다.

“그리고 저는 제 방도 있고.”

속눈썹이 손바닥을 스치는 느낌으로 영웅은 채언이 눈을 깜빡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사실 난 지금도 너무 걱정되거든요. 채언 씨가 아픈데 졸리다고 거짓말한 걸까 봐.”

아픈 사람을 대하는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영웅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채언은 가만히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졸려요.”

“그럼 눈 감아요.”

뭐라 말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던 채언은 이내 얌전히 입을 다물고 눈도 감았다. 여전히 눈 위를 가린 손의 온기를 느끼며 잡고 있던 소매를 천천히 놓았다.

채언의 쇼핑백을 찾아 가지고 온 영웅은 조용히 현관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손목에서 달랑거리는 것에서 부스럭 소리가 나지 않게 한 손으로 쇼핑백 중간을 잡고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혹시 채언이 복도 끝 방으로 돌아갔나 싶어 복도를 좀 기웃거리다가 거실 쪽으로 걸어갔다. 부엌에서도 거실에서도 채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식탁 위에는 아까 만들어놓고 나간 팬케이크가 그대로 있었다. 영웅은 쇼핑백을 소파 위에 올려놓았다. 안에 든 것들을 건영이 살폈을 테니 모두 환불하고 싶었지만 채언의 카드로 결제한 것이라 그러지 못했다. 눈썹을 삐죽 올린 영웅은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조심히 문고리를 돌려 연 뒤, 문 앞 조명 조절 버튼을 눌러 방 안을 살짝 밝혔다. 발소리가 나지 않게 살살 걸어 침대 가까이 다가가 보니, 채언은 숨소리도 거의 내지 않은 채 자고 있었다. 풀어진 얼굴이 편안해 보여 영웅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침을 만들고 들어와 보니 깊이 잠든 것 같아 깨우지 않고 놔두었는데, 백화점에 다녀오는 동안에도 혼자 잘 자고 있었다. 영웅은 손가락을 세워 매트리스를 꾹 찔러보았다. 웬만한 차 한 대 값이 훌쩍 넘는 침대였다. 그럼에도 자신은 여기 누워 자주 가위에 눌렸는데. 이렇게라도 제값을 하니 다행이었다.

채언은 가지볶음 위에 깨를 뿌린 다음 가지가 뭉개지지 않게 살살 뒤섞었다. 집에서 사용하는 조리도구와 반찬 만들기 수업에서 사용하는 조리도구는 브랜드가 달랐다. 처음에는 손에 익지 않았던 도구들이 이제는 익숙했다.

“아이쿠! 이런.”

옆을 돌아보니 교수가 만들고 있던 가지볶음에 깨가 뭉쳐 쏟아진 것이 보였다.

“아이, 이것 참.”

어차피 조금씩 나눠 받은 재료였기 때문에 그릇에 담겨있던 것을 모두 쏟았다고 해서 깨 범벅 가지볶음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팬 안을 바라보는 교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잘 섞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 도와드릴까요?”

“아니. 그게 아니라.”

한 손을 허리 위에 손을 올린 교수는 뒤집개로 깨를 살살 퍼 올리기 시작했다.

“우리 딸이 깨를 별로 안 좋아해서. 쥐똥만큼 들어간 건 먹는데, 이러면 안 먹거든.”

채언은 브로콜리를 잘 먹지 않는 영웅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예 넣지 말까 하다가. 그래도 조금 넣는 게 맛있을 것 같아서 넣은 건데. 이것 참.”

“숟가락으로 조금씩 덜어볼까요.”

채언은 양념을 만들 때 사용하던 숟가락을 키친타올로 닦았다. 그리고 나서서 질척한 가지에 달라붙은 깨를 덜어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교수도 숟가락을 들었다. 가지볶음 속 깨를 골라내는 작업에 동참했다.

“그런데 따님은 깨만 안 먹나요?”

“어어. 우리 딸은 깨랑 오이랑.”

두 사람은 거의 이마를 맞댄 채 가지볶음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학생도 저번에 소고기볶음 만들 때 브로콜리 안 넣었지?”

“네. 저희 집에는 브로콜리 안 먹는 사람이 있어서요.”

“동생?”

“아뇨.”

“그러면 부모님이랑 같이 사나?”

“아뇨.”

깨를 골라내는 것에 열중한 두 사람은 눈도 감지 않고 가지볶음만 보며 대화하고 있었다.

“어어. 그것도 아니면. 뭐 결혼했나? 애인?”

“예? 결혼…….”

그 순간 조리실 내부의 모든 시선이 채언 쪽으로 쏠렸다. 조리도구를 움직이는 소리가 일순간 멈췄다. 시선을 느낀 채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수강생들은 갑자기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생님! 이거 맛 좀 봐주세요. 이게 잘 된 건가?”

“제가 먹어볼까요? 우리 바꿔 먹어봐요.”

조리도구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숟가락을 든 채언은 여전히 깨를 골라내는 것에 힘을 쏟고 있는 교수의 얼굴을 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영웅은 가족도 아니고 애인도 아니었다. 집주인이라고 설명하면 깔끔하겠지만 채언은 어쩐지 그와 자신의 관계를 집주인과 방 한 칸을 얻어 사는 사이로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고용주와 고용인은 그보다 더 딱딱한 것 같았다. 머뭇거리던 채언은 다시 허리를 숙였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요? 완전히 다 걷어내시게요?”

“아이고 허리야… 음. 요만큼이면 괜찮은 것 같은데.”

“그럼 저는 이제 제 것 마무리할게요.”

교수는 채언에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리고는 혹시 깨가 뭉친 곳이 남아있지 않나 팬 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채언은 몇 발자국 옆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무난히 관심을 돌릴 수 있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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