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2권) (4/22)

곰팡이 핀 딸기 2권

4.

일요일 낮. 채언과 영웅은 식탁에 앉아 점심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음 주 토요일에는 갈 데가 있어서요. 주말 동안 드실 음식은 냉장고에 넣어둘게요. 뭐 드시고 싶은 거 있나요?”

토요일에 대동에 가겠다고 하늘의 집에 미리 연락을 넣어둔 터였다. 충북은 그즈음 거래하는 딸기 농장의 딸기 상태를 확인해보고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확인해보고 연락을 주겠다는 말은 충북이 종종 끝인사처럼 하는 말이었으니, 토요일 대동행은 거의 확정이었다. 채언은 식탁 한쪽에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메모지를 한 장 뜯어와 자신의 앞에 놓아두었다.

“굳이 준비해놓지 않아도 돼요. 나도 혼자 해먹을 수 있거든요.”

“하지만…….”

제 일인데요. 굳이 뒷말을 꺼내지 않고 채언은 말끝을 흐렸다. 왜인지 모르게, 일이라는 말을 꺼내기 싫었던 탓이었다.

채언의 침묵을 오해한 영웅은 버터나이프를 내려놓고 말했다.

“나 요리 잘해요. 이런 거, 버터 바르는 정도만 할 줄 아는 거 아닌데.”

“네.”

채언은 딱히 영웅의 요리 실력에 대해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볼 일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채언 씨. 나 정말 요리할 줄 알아요.”

그는 억울하다는 듯 장난스럽게 눈썹을 찌푸렸다. 잼 발린 식빵을 베어 물던 채언은 입안에 들어 있는 것 때문에,

“옙.”

하고 대답했다. 바삭한 소리와 함께 입에 단맛이 돌았다.

요즘 채언은 쉬는 날 아침이면 영웅이 먹는 것처럼 빵을 먹고는 했다. 이것도 슬슬 그들의 저녁처럼 습관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빵을 우물거리는 채언의 얼굴을 보던 영웅은 저도 모르게 검지가 살짝 위로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주먹을 쥐었다.

“오늘 저녁에는 내가 요리할게요.”

“네? 갑자기 왜 그런…….”

생각해보니 집주인이 자기 집에서 요리를 하겠다는데 막을 이유가 없었다. 채언은 눈을 굴리다가 빵을 한입 더 베어 물었다. 입가에 잼이 묻은 것이 느껴졌다. 엄지로 입가를 훔친 후 손가락에 묻은 것을 가볍게 빨아 먹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영웅은 옆에 있던 우유를 벌컥벌컥 마셨다. 다 마시고는 식탁 위에 팔꿈치를 올려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그냥. 해주고 싶어서요.”

“네. 그러세요.”

“채언 씨.”

남은 식빵 조각을 한입에 집어넣은 채언이 영웅을 보았다.

“대신 나랑 같이 재료 사러 가요.”

“…네.”

오늘은 나갈 생각이 없었는데, 어쩐지 일이 더 늘어난 것 같았다.

둘은 해가 지기 전에 저녁 재료를 사러 마트에 가기로 했다. 어차피 외출할 거라면 채언은 도서관에 먼저 다녀오겠다고 했다. 전에 읽던 책의 반납 기간이 아직 남아있었지만, 이미 다 읽었기 때문에 나가는 김에 반납하고 새로운 책을 빌려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혹시 도서관에 차 댈 곳 있어요?”

“주차장이요? 네. 넓지는 않지만, 도서관 입구에 있어요.”

“그럼 이따 데리러 갈게요. 네 시 반이면 될까요.”

그렇게 멀지 않은데요. 대답하려던 채언은 걸어서도 갈 수 있는 백화점에 영웅의 차를 타고 갔던 것을 떠올렸다. 입주 도우미 면접을 볼 때, 그의 누나도 운전기사를 시켜 장 보는 곳까지 태워다주지 않았던가. 자신이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니는 것에 익숙한 것처럼, 그들은 차를 타고 다니는 것에 익숙할지도 몰랐다.

“네. 그럼 이따 연락해주세요. 그런데 도서관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시는 거죠?”

여기서 가깝긴 한데요. 채언은 말을 덧붙였지만, 생각해보니 영웅이 도서관에 가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알까? 물음표를 단 얼굴로 영웅을 쳐다보자, 연한 색의 속눈썹을 깜빡이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초록빛 눈을 굴리더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걸로 찾아보면 되지 않을까요.”

“그렇긴 한데요.”

잠시 고민하던 채언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지금부터 할 일 없으시면 같이 가실래요?”

채언이 먼저 어딘가에 같이 가자고 제안한 것은 처음이었다. 영웅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리기 위해 주먹을 입 옆에 두고 헛기침하는 척을 했다.

집주인이 열심히 표정을 가리는 동안, 채언은 어느새 익숙해진 도서관 내부를 떠올리고 있었다.

영문으로 된 책이 있었나. 그런 건 신경을 안 써봐서 잘 모르겠다. 글씨가 예쁜 사람이니까, 한글로 된 책을 읽는 데도 무리 없어 보이기는 하고. 좋아하는 내용의 소설 같은 게 있을까. 아니, 그는 이미 자신보다 더 많은 책을 읽었을지도 모른다.

허리에 한 손을 올리고 생각하던 그는 문득 영웅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짙은 눈썹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혹시 도서관에는 가기 싫은가.

“바쁘시면 이따 네 시 반에 오셔도 되고요.”

허리에 올리고 있던 채언의 손이 주륵 미끄러졌다.

“같이 가요! 지금 바로 준비할게요. 얼른 준비할게요.”

영웅은 자신의 방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본 채언도 외출 준비를 하기 위해 복도 끝 방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무언가 찜찜한 것이 있었다.

“아. 이런.”

방문 손잡이를 잡은 채언은 서둘러 핸드폰으로 검색을 했다. 도서관 공사 기간이었다.

간단히 씻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채언은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영웅은 아직도 준비 중이었다.

도서관에 엄청나게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는데 어쩌지. 채언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그렇게 얼마간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며 앉아있었다.

“채언 씨! 저 준비 다 했어요. 이제 얼른 가요.”

예의 목 뒤로만 걸친 목도리와 코트 차림이었다. 채언은 그가 외출할 때 편한 옷을 입은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머리까지 뒤로 넘긴 영웅은 출근할 때와 비슷한 옷차림이었다. 정장을 차려입은 것은 아니니, 지난번 병원에 갈 때 입었던 옷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가끔 세탁물을 넣어놓을 때 본 그의 옷장에는 분명 티셔츠나 맨투맨 같은 옷들이 걸려있었다. 혹시 저렇게 차려입는 것이 그에게는 편안하게 느껴지는 걸까. 채언은 완벽하게 깔끔한 그의 차림새를 바라보다가 심호흡을 하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대표님. 죄송하지만 도서관에는 못 갈 것 같아요.”

“왜요?”

영웅의 얼굴이 빠르게 실망으로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그럼, 우리 안 나가나요?”

“그게 아니라, 언제 나가든 상관은 없는데요. 제가 깜빡한 게 있어요. 오늘 도서관 문 닫는 날이에요.”

공사 기간이거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놓은 채언이 영웅을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우리 안 나가요?”

고개까지 옆으로 살짝 떨군 영웅의 얼굴에는 여전히 실망이 가득했다. 도서관에 가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냥 같이 나가고 싶었던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채언은 긴가민가한 말투로 말했다.

“지금, 나갈까요?”

“어, 가도 돼요?”

“도서관은 아니지만 장 보러요. 어차피 나갈 거였으니까.”

정답을 맞힌 듯했다. 금방 웃는 얼굴이 된 영웅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도리 때문에 정전기가 일어난 건지 그의 연한 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방방 떴다.

그래봤자 두 시간 정도 일찍 나가는 것뿐인데. 네 시 반에 만나기로 한 거랑 다를 게 있나. 채언은 슥슥 팔뚝을 매만졌다.

채언은 안전벨트를 맨 뒤 두 손으로 그것을 살짝 잡고 있었다. 차에 시동을 건 영웅은 그 모습을 확인하고는 작게 미소 지었다.

“버릇인가 봐요. 그렇게 잡는 건.”

“예?”

영웅의 시선이 잠깐 안전벨트에 머물렀다 정면으로 향했다.

“아.”

채언은 안전벨트를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는 마른 입술을 핥았다. 부드럽게 차가 앞으로 나갔다.

“어디 갈래요?”

고개를 숙이고 있던 채언은 영웅의 물음에 그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장 보러 가는 거 아닌가요.”

“그건 네 시 반에 가기로 했잖아요.”

핸들을 꺾으며 영웅이 웃었다.

차를 타고 일단 주변을 도는 동안 영웅은 채언에게 친구와 만나면 뭘 하느냐고 물었다. 간단한 질문이었지만 채언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최근 몇 년간 친구를 만난 적이 없었다.

교복을 입고 다니던 시절에는 그래도 뭘 하면서 놀기는 했던 것 같은데. 안전벨트를 매만지던 채언은 드라마 주인공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여자주인공은 남자주인공과 본격적으로 이어지기 전에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그 둘이 친구 사이였을 때 뭘 했더라.

“그냥 강가를 걷거나 음, 차를 마시거나 했던 것 같은데요.”

채언은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앞을 보고 있는 영웅의 표정이 대수롭지 않아 보여서 안심했다.

“아아.”

작게 입을 벌리고 대꾸를 해준 영웅은 강가라는 말에, 뜬금없이 채언이 센트럴파크를 산책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햇살이 비추던 아침에 화분에 물을 주며 웃던 모습이 풀과 나무가 가득한 곳과 잘 어울렸다. 강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나저나 데이트 코스랑 비슷하네. 하지만 한국은 동성 친구끼리 스킨십을 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편이니까.

“대표님. 그런데 저희 지금 어딜 가는 거죠?”

새로운 호칭은 전의 것보다 채언의 입에 잘 붙었다. 만족스러웠다.

“강가 걸으러요.”

영웅의 말을 듣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채언의 눈앞에 한강이 펼쳐졌다.

날이 풀려서 산책하러 나온 사람들이 꽤 있었다. 채언은 친구와 강 근처를 걸어본 적이 없었지만 대충 잘 둘러댔다고 생각했다.

“이것도 이젠 필요 없겠어요.”

영웅은 목에 걸친 목도리를 풀어 손에 쥐었다.

“조금 더워요.”

그는 햇빛을 받으며 기분 좋다는 듯 눈을 감았다. 자연스레 찡그린 얼굴이 장난스러워 보였다. 이런 사람을 딱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니. 채언은 괜히 주먹으로 자신의 어깨를 툭툭 치며 걸었다.

“어. 귀엽네요.”

“네?”

산책로 옆에 핀 꽃을 보고 있던 채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기 봐요. 채언 씨.”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있던 영웅은 고갯짓으로 멀리서 뛰어오는 개를 가리켰다. 주인과 산책 중인 개는 혀를 내밀고 헥헥거리며 신나게 털을 펄럭거리고 있었다.

개는 둘의 곁을 지나갈 때 채언 쪽으로 잠깐 다가와 코를 킁킁거렸다. 주인이 안 돼! 하며 목줄을 끄는 바람에 몸에 직접 닿지 않고 떨어지기는 했지만, 잠깐 동안 채언은 가만히 선 채로 굳어있었다.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주인의 사과에 채언은 머쓱하게 대꾸했다. 무서워서 굳은 것은 아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귀여워해 줬어야 했나? 코가 반질반질했는데.

영웅은 굳어있는 채언의 얼굴을 보고는 물었다.

“혹시 동물 무서워해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요. 방금은 그냥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요.”

“채언 씨는 개 안 키워봤나 봐요.”

“네.”

멀리 사라져가는 개의 뒷모습을 흘끗 돌아본 채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은 개 키워보셨어요?”

“미국 집에 한 명 있어요. 아니 한 마리요.”

가족들이 사는 집에서 함께 키우는 개라고 했다.

“이름이 뭔데요?”

“엘리예요.”

그건 집에 있는 AI 스피커 이름 아닌가? 채언은 이름을 부르면 네에- 하고 대답하는 스피커를 떠올렸다.

“지금 스피커 생각했죠?”

채언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한국에 혼자 와서 지내는 동안 너무 외로웠는데 광고하는 걸 봤어요. 앨리를 부르면 대답하길래 미국에 있는 엘리가 생각나서….”

이렇게 귀여운 애거든요. 영웅은 허공에 조그만 원을 그리며 쓰다듬는 시늉을 했다.

“작은 강아지인가 봐요.”

채언의 물음에 영웅은 허공에 그리던 원을 더 크게 늘렸다.

“이만큼.”

그리고는 개의 종을 말했는데 채언은 그의 발음을 알아듣지 못했다. 막연히 아까 본 골든리트리버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어리둥절한 채언의 반응에 영웅은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곧 내민 핸드폰 화면에는 셔틀랜드 쉽독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까만 털과 갈색 털이 섞인 점잖게 생긴 개였다.

산책하듯 천천히 걷던 둘은 편의점에서 따듯한 커피와 유자차를 사서 마셨다.

따듯한 유자차 병을 두 손으로 쥔 채언은 가끔 영웅이 하는 농담에 웃곤 했는데, 영웅은 한 손으로 커피를 들고 마시다가 채언의 눈 밑에 생기는 보조개를 보고는 했다.

해가 질 무렵, 둘은 다시 차를 타고 집 근처 백화점으로 갔다.

주차를 하고 백화점 건물로 올라가 통로를 걸어 마트로 넘어가는 길이었다. 에스컬레이터 근처를 지나가던 채언은 무심코 아래층을 구경하다가 한 남자를 보았다. 그는 검정 슬랙스에 흰 셔츠를 입고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시향지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어디서 본 사람 같은데. 얼핏 본 얼굴이 꼭……. 채언의 발이 멈췄다. 시향지를 나누어 주던 남자가 위를 향해 고개를 드는 순간이었다.

“뭐가 있어요?”

나란히 걷고 있던 영웅이 몸을 더 붙여오며 물었다.

“아뇨. 그냥 잠깐 구경했어요.”

얼굴이 꼭 건영을 닮은 것 같은데.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린 채언은 몇 번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이미 아래층이 보이는 유리 난간을 지나쳤기 때문에 뒤돌아 확인해 보아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채언이 뒤를 돌아볼 때마다 영웅은 말없이 같은 곳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아이스크림을 파는 디저트 카페와 젤리나 사탕을 파는 캔디샵. 캐주얼한 옷을 파는 곳이 늘어서 있을 뿐이었다.

둘은 저녁으로 해산물과 올리브오일, 마늘과 토마토가 들어간 파스타를 먹었다. 요리를 잘한다는 영웅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채언은 아까 그가 깐 마늘을 네 쪽만 썰어서 집어넣길래, 겨우 마늘 네 쪽 가지고 뭘 하려는 건지 혼자 미심쩍어했던 것이 미안했다.

채언은 재료의 맛이 잘 느껴지는 파스타를 먹으면서, 전에 호텔에서 영웅이 먹었던 스파게티가 이런 맛이었을까 잠시 예전 일을 떠올려보았다. 그러다 영웅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는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맛있어요.”

채언의 말에 금방 웃음을 짓기는 했다.

둘 다 절반쯤 접시를 비웠을 때였다.

“채언 씨, TV 볼래요?”

포크로 통통한 새우를 찌른 영웅이 물었다.

TV가 보고 싶은가. 그럼 그냥 틀면 되는데 왜 물어보는 거지.

“네.”

채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웅은 새우를 한입에 넣고는 입술에 꾹 힘을 주었다. 천천히 새우를 씹어 삼킨 그는 목이 멘 듯한 목소리로 AI 스피커를 불러 TV를 켰다. 채언은 말없이 그에게 물컵을 건넸다.

“마늘이 맵네요.”

물을 삼키며 변명하듯 말하는 영웅을 본 채언은 그의 접시로 시선을 내렸다.

자신의 접시에 있던 마늘은 아주 잘 익어 감자 같은 맛이 났는데. 그의 것에는 안 익은 부분이 있었나보다 생각하며 안타까워했다.

자기 전에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은 채언은 책상 위에 올려둔 소설책을 손에 들었다. 이미 다 읽은 것이었기에, 의미 없이 페이지를 넘겨보다가 다시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책 옆에는 묵묵히 자라고 있는 작은 선인장이 놓여있었다. 꼭 아기 고양이의 배내털처럼 보송보송해 보이는 가시가 겉을 뒤덮고 있었다. 채언은 선인장을 볼 때마다 그것을 쓰다듬어 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뒤이어 가시에 찔리는 상상을 하고는, 가까이 대보려던 손가락을 거두고는 했다.

이불을 어깨까지 덮고 옆으로 누운 채언은 이렇게 누워서 영웅을 보던 새벽을 떠올렸다.

고민에 고민을 더하던 밤.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워 뜬눈으로 지새웠던 새벽. 하지만 오늘은 편안했다. 채언은 슬며시 미소 지으며 천천히 눈꺼풀을 깜빡였다. 오늘 하루가 참 편안했던 것 같다.

아까 장을 보러 갔을 때, 제가 보기엔 다 똑같아 보이는 올리브 오일을 양손에 쥐고 진지하게 비교해보던 영웅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리고 한 층 아래 에스컬레이터 앞에 서 있던 남자.

감겨가던 채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입가의 미소가 사라졌다.

정말 건영이었을까.

채언은 폭신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오늘은 채언에게 별다를 일 없는 보통날이었다.

채언은 볼펜과 메모지를 손에 쥐고 냉장고 안을 살피고 있었다. 메모지에는

-오늘 날씨 좋아요^↓^ -

라고 쓰여 있었다. 영웅이 아침에 남기고 간 것이었다. 그는 얼마 전에 아침 쪽지로 웃는 얼굴을 그려놓고 채언에게 질문을 남겼다.

-채언씨는 웃는 얼굴을 : ) 어떻게 그려요?-

그래서 채언은 영웅이 퇴근하고 온 저녁에 같이 밥을 먹으면서, 메모지에 ^^ 한국에서 보통 사용하는 웃는 이모티콘을 그려주었다.

‘입은 없어요?’

‘입 있는 것도 있어요.’ -^_^-

‘코는요?’

‘어….’ -^.^-

채언은 웃는 눈 아래 찍은 점이 코인지, 뽀뽀하듯 모은 입술인지 확신이 가지 않아 자신 없게 그림을 그렸다.

그 뒤로 영웅은 채언이 그려주었던 웃는 눈 모양 사이에 멋대로 무언가를 더해 쪽지에 남기고는 했다. 오늘은 자기 나름대로 화살표를 그려 코 모양을 추가한 것이었다.

냉장고를 살핀 채언은 메모지 뒷장에 장 볼 것들을 적기 시작했다.

“우유, 양상추, 치즈….”

오늘은 영웅이 메모지에 적어놓은 것처럼 날씨가 좋았다. 기온도 적당하고 구름이 끼지도 않은 날이었다. 그는 주머니에 메모지를 넣어놓고, 지갑과 장을 볼 때 사용하는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오늘따라 마트 안에 사람이 많았다. 카트 안에 물건을 채워 넣으며 돌아다니던 채언은 마트 곳곳에 걸려있는 현수막을 보고, 오늘이 국내산 돼지고기 할인 행사 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돼지고기는 메모지에 적어온 품목과는 상관이 없었으므로, 정육 코너는 흘긋 보고 스쳐 지나갔다.

우유와 치즈를 카트에 넣은 채언은 베이커리 코너를 지나다 잠시 멈춰 섰다. 플라스틱 뚜껑이 덮인 통 안에 딸기 케이크가 들어있었다. 곧 있으면 딸기 철도 끝날 것이었다. 손에 쥔 메모지를 바스락거리던 채언은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채소 코너 앞에서 애호박을 집어 든 채언은 상품의 상태를 확인하다가 옆에 있는 브로콜리에 시선을 뺏겼다. 뽀글뽀글한 파마머리 같아서 작게 미소 짓고는 애호박만 카트 안에 집어넣었다. 아까 드라마에서 호박전을 부쳐 먹는 배우들을 보고 채언도 호박전을 하기로 생각한 것이었다. 채언은 종종 드라마 속에서 주인공이나 대표, 회장 부부가 식사를 하고 있는 식탁 위를 관찰한 뒤 메모지에 재료를 적고는 했다. 그렇게 몇 번 새로운 반찬을 할 고민을 덜었었는데, 곧 드라마가 끝난다는 것이 아쉬웠다.

아니, 반찬 때문에 아쉬운 게 맞나. 잠시 카트를 쥐고 선 얼굴이 멍했다.

다시 한번 메모지에 적어 놓은 목록을 확인하던 채언은 물건을 다 샀음에도 자신이 자꾸 마트를 빙빙 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선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멀리 있는 베이커리 코너를 돌아보았다. 카트 손잡이를 꽉 쥐었다가 놓기를 반복하던 채언은 결국 아까 본 딸기 케이크가 진열된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알이 작은 딸기 겉면에는 시럽이 발려 있었다. 마트의 환한 형광등 빛에 반사되어 싱싱하고 맛있어 보이도록 한 상술이었다. 별로 맛이 없을 게 분명했다. 플라스틱 상자에 든 딸기 케이크가 놓여있는 곳은 베이커리 코너에 따로 마련되어 있는 유통기한 임박 식품 냉장고였다. 냉기를 맞으며 서 있던 채언은 카트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케이크를 들어 올렸다.

오늘은 채언의 생일이었다.

채언은 돈을 벌기 시작했을 때부터 생일이면 혼자 딸기 케이크를 사 먹었다. 특별히 딸기 케이크를 좋아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매년 그러는 것은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일 거라고, 채언은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짐작했다.

시설에서 지낼 때 한 달에 한 번 생일 파티를 했다. 가끔은 두세 달에 한 번 생일 파티를 할 때도 있었다. 그달에 생일인 아이들을 모아 커다란 케이크 한판을 두고 촛불을 껐다.

케이크가 커 봤자 다 같이 먹기에는 작은 것이었다. 하얀 버터크림 케이크 위에는 사람 수보다 훨씬 적은 과일들이 올라가 있었는데, 과일은 인기가 좋아 경쟁이 치열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잘라주는 자기 몫의 케이크에 딸기나 시럽에 절인 체리 같은 것이 올라오기를 바랐다. 채언 또한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채언의 케이크 위에 크림에 파묻혀 있던 딸기 한 알이 담긴 적이 있었다. 채언은 딸기부터 먹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케이크를 떠먹었다. 마침내 그릇 위에 버터크림이 잔뜩 묻은 딸기 한 알이 남았다.

‘나도 그거 먹고 싶다.’

채언이 포크를 들자 옆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영은 채언보다 두 살 어린 남자아이였다. 시설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는 채언을 잘 따랐다. 형아, 형, 하며 졸졸 따라다니고는 했다.

어린아이들 사이에도 묘한 위계가 있었다. 그 때문에 다른 형들은 고작 한두 살 차이로 어린 건영을 귀찮아했다. 하지만 성격이 덤덤하고 순했던 채언은 누가 옆에서 귀찮게 해도 짜증 부리지 않고, 장난을 받아주고는 했다. 붙어있는 시간이 긴 만큼 두 아이는 친해졌다. 건영은 채언이 종이에 글씨를 쓰지 않아도 입 모양을 잘 알아들었다.

‘먹을래?’

채언이 입을 뻐끔거리며 딸기를 포크로 떠서 내밀자, 건영은 대답도 없이 입을 벌려 한입에 그것을 먹어 치웠다. 먹지 못한 딸기가 아쉽기는 했지만 채언은 동생의 모습이 밉지는 않았다.

‘형. 이거 줄게.’

건영은 자신의 케이크 위에 올려진 설탕 장식을 포크로 떠서 채언의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고마워.’

설탕 장식은 단단하고 맛이 없었다. 씹으면 아무 맛도 나지 않는 가루처럼 부서지곤 했다. 하지만 채언은 크림과 함께 떠올린 설탕 장식을 입에 넣었다.

시럽 발린 딸기를 쳐다보던 채언은 생각 속에서 빠져나왔다. 올해는 딱히 먹을 생각이 없었는데.

플라스틱 통 안에 든 케이크를 카트에 집어넣은 채언은 천천히 베이커리 코너 앞을 벗어났다. 할인용 빨간 줄이 그어진 가격표는 구매를 결정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유통기한 임박이었다. 자신이 사지 않으면 버려질 것 같았다.

물건을 고를 때도 사람이 많다 했더니, 카운터 앞은 사람이 더 많았다. 대부분 사람들의 카트 안에는 돼지고기가 몇 팩씩 담겨 있었다. 길게 늘어선 줄에 자리를 잡은 채언은 천천히 바퀴를 움직였다.

얼마쯤 지나 차례가 돌아왔다. 채언의 뒤로는 여전히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빨리 계산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채언은 물건이 찍히면 곧바로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물건을 가방에 담는 것보다 바코드 찍히는 속도가 더 빨랐다. 합산 가격이 나오자 캐셔가 말을 걸었다.

“포인트 적립하시나요?”

“아뇨.”

“주차하셨나요?”

“아뇨.”

“카드는 이쪽에 꽂아주세요.”

캐셔가 패드를 손으로 가리켰다. 생활비 카드를 꽂아 넣자 금방 영수증이 찍혀 나왔다. 자연스레 영수증을 확인하고, 남은 것들을 가방에 담던 채언은 당황했다. 딸기 케이크는 자신의 카드로 계산을 하려던 것이었다.

“저기, 이거.”

채언이 말을 꺼내자 이미 자신의 물건을 계산 중이던 옆 사람이 눈을 마주쳐왔다.

이것만 다시 환불하고 다른 카드로 계산해도 될까요. 물어보고 싶었는데, 말문이 막혔다. 당황한 채언은 일단 물건을 모두 챙겨 카운터 앞을 벗어났다.

환불용 계산대가 따로 있나 찾아보았는데, 그쪽도 이미 두세 명씩 줄을 서 있었다. 직원과 손님이 길게 말을 주고받는 모습이 보였다. 직원이 난감한 얼굴로 손님을 상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하니, 줄이 짧긴 했지만 그쪽도 오래 걸릴 것 같았다.

어쩌지. 생활비 카드를 개인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면 안 되는데.

만 원도 안 되는 돈이었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결제 내역이 당장 영웅에게 보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와는 사소해도 껄끄러울 만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채언은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 창을 열었다.

뭐라고 자판을 누를지 여러 번 말해보며 메시지를 고쳤다.

[착각하고 제 카드를 써야 할 걸 생활비 카드로 결제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나중에 제 월급에서 차감 받겠습니다.]

투명한 증거를 위해, 영수증에서 딸기 케이크 품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찍은 사진도 한 장 보냈다.

그때 채언의 핸드폰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영웅은 이모티콘으로 화면을 채워 보낼 때는 답장이 재빨랐지만, 한글로 답장을 보낼 때는 살짝 느린 편이었다. 하지만 느려도 메시지에는 메시지로 답장을 하는 사람이었다. 전화를 걸어왔던 것은 채언이 오타를 내서 잘못 보냈을 때 한 번뿐이었다.

의아한 눈으로 전화가 걸려온 핸드폰을 확인한 채언은 충북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아, 했다.

“여보세요.”

-어. 채언아 난데.

“네. 아저씨.”

-확인해 봤는데 이번에 딸기가 안 될 것 같다네. 어쩌지.

채언은 장 본 것을 식탁 위에 하나씩 꺼내 놓았다. 애호박과 우유 등등을 꺼내는 손이 느렸다. 입을 꾹 다문 얼굴은 굳어 있었다.

충북이 거래하던 딸기 농장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딸기 농장주가 충북 말고 다른 곳과 거래하던 중에 유통 문제가 생겨 딸기 공급에 골머리를 썩는 중이라고 했다. 오래 거래해오던 곳이라 품질이나 단가를 맞출 수 있었는데 급히 새로운 농장을 알아보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아마 충북의 가게에도 물건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곤란한 상황일 게 뻔했다. 채언은 안 되는 것을 억지로 해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다른 날 다른 과일로 다시 부탁드리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곧바로 하늘의 집 원장에게 연락해 방문을 취소했다. 다음에 뵈어야겠다고 하자, 머뭇거리던 원장이 말을 꺼냈다.

-채언아. 혹시 건영이 때문에 그러니?

그 애 이름이 갑자기 왜 나온 것일까. 잠시 멈칫한 채언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원장에게 되물었다.

-그게… 며칠 전에 오랜만에 연락이 왔었거든. 혹시 너랑 연락이 되느냐고.

‘제 연락처 가르쳐 주셨어요?’

-아니. 모른다고 했지. 그런데 채언아. 정말로 전에 둘이 무슨…….

‘또 연락 와도 지금처럼 모르는 척해주세요. 그럼 다음에 뵐게요.’

그렇게 급하게 전화를 마무리 짓고 곧장 집으로 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백화점 쪽을 둘러볼까 했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채언은 입술을 잘근잘근 물다가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차근차근 정리해야지. 하나씩. 식탁 위에 늘어진 것들부터.

급하게 우유 팩을 집어 들었다.

퍽. 물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우유 팩을 들고 뒤를 돌다가 딸기 케이크가 든 통을 친 것이었다. 헐겁던 플라스틱 뚜껑이 열려 안에 있던 것들이 반쯤 쏟아진 상태였다.

“하아.”

채언은 쏟아진 케이크 앞에 주저앉았다.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꾹 다문 입술 아래, 턱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무언가 참아내듯 한숨을 쉰 채언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대표님: 스위트 레드 딸기 케이크가 오늘 채언씨 간식인가요?(딸기)(케이크)]

글자 뒤에는 딸기 이모티콘과 케이크 이모티콘이 번갈아 붙어있었다.

“네.”

답장을 보내놓고 핸드폰을 식탁에 올려두었다. 바닥에 어질러진 케이크를 치워야 했다.

채언은 맨손으로 질척한 케이크를 모아 통 안에 담고, 따듯한 물에 손을 씻었다. 기름기가 남은 손에 작게 물방울이 맺히는 게 보였다. 멍하니 손가락에 맺힌 것을 바라보다가 또르르 떨어트렸다.

그다음에는 페이퍼 타올로 바닥에 남은 흔적을 닦고 스팀 청소기로 그 위를 밀어버렸다. 청소를 마친 채언은 자신이 무기력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녁밥은 뭘 하지. 뭘 만들어야 하지.

이미 케이크의 흔적이 모두 지워진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새까만 머릿속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퇴근한 영웅이 집에 왔을 때 마중 나온 사람은 없었다.

채언은 부엌 옆으로 난 발코니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까 김치를 볶다가 한눈을 팔아 다 태워버리고 말았다. 많은 양을 태운 것도 아닌데 집 안에 탄 냄새가 퍼졌다. 그래서 집 안의 자체 환기 버튼을 눌러놓고 거실과 부엌 쪽 창문도 열어놓은 것이었다. 찌개와 호박전까지 태울까 봐 겨우 집중해서 요리해야 했다. 저녁 차리기가 끝났을 즈음엔 몸에 힘이 다 빠졌다. 이마에 땀까지 난 것 같았다.

집 안 환기가 끝날 무렵 채언은 거실 창은 닫아놓고 터덜터덜 부엌 옆 발코니로 걸어갔다. 잠시만 더 창문을 열어놓기로 하고, 난간 위에 팔을 기댄 뒤 그 위에 고개를 올렸다.

어두운 도로를 다니는 차들 덕에 눈앞에 불빛이 번쩍이는 야경이 펼쳐졌다. 채언에게는 야경이 멋지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생각이 들었다.

저 도로 위에 서 있었다면, 드라마처럼 헤드라이트 불빛을 앞에 두고 눈앞을 손으로 가렸을까. 코앞에서 멈춘 차 바퀴에서 끼이익 소리가 났을까. 채언의 입에서 가느다란 숨이 흘러나왔다. 빠르게 도로를 달리는 차 소리가 점점 다가오는 것 같았다. 마치 머리 위로 지나다니는 듯 가까워졌다.

똑똑. 그때 발코니 유리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팔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채언은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집 안의 환한 불빛을 받고 서 있는 영웅이 웃으며 한 손을 흔들었다.

“거기서 뭐 해요?”

“그냥…….”

채언은 잠시 말을 멈추고 다정한 집주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말을 재촉하는 법이 없었다.

“잠깐 환기를 하고 있었어요.”

“환기요?”

영웅은 거실 쪽으로 고개를 돌려 코를 킁킁거리고는 다시 채언을 보았다.

“맛있는 냄새밖에 안 나는데.”

채언은 여전히 난간에 팔을 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영웅의 목깃에 바깥에서 불어온 바람이 스쳤다. 초록색 눈동자가 살짝 크게 뜨였다.

이상한 신호였다. 눈앞에 보이는 선연한 모습에, 등줄기를 타고 오른 감각이 그의 살갗을 따갑게 일으키고 있었다.

“안 추워요? 환기 그만하고 이리 와요.”

이쪽으로 와요. 다시 한번 느릿하게,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채언은 천천히 창문을 닫고 영웅이 서 있는 유리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의 말을 들으니 좀 추운 것도 같았다.

발코니를 나오자 확실한 온도 차가 느껴졌다. 오래 창문을 열어 두어 공기가 순환됐을 텐데, 집 안이 훨씬 따듯했다.

채언이 유리문을 빠져나오는 순간, 영웅이 한쪽 팔을 들어 그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나머지 손으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코니 문을 닫았다. 도로를 다니는 자동차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영웅은 옷을 갈아입고 손을 씻고 오겠다고 했다. 찌개를 불에 올린 채언은 보글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쯤 미리 만들어둔 반찬을 그릇에 덜어 식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아까 식탁 위에 올려놓고 까먹은 핸드폰은 한쪽에 밀어 놓고, 나머지 밑반찬을 꺼내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었다.

채언은 그대로 냉장고 안을 보고 서 있었다. 첫 번째 칸은 채언 전용이었는데, 전에 한 번 초콜릿을 넣어 놓았던 것 말고는 따로 뭘 넣어두었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 거기에 아까까지는 없었던 상자가 하나 들어 있었다. 케이크 상자였다. 영웅이 퇴근길에 사 온 것인 듯했다.

채언은 냉장고를 꽉 채워두는 편이 아니었고, 정리도 잘해두는 편이었다. 그래서 냉장고 다른 칸에도 케이크 상자를 넣어둘 만한 공간이 있었다. 영웅이 그냥 눈에 바로 보이는 빈 공간에 상자를 집어넣은 건가. 잠시 생각하던 채언은 허리를 숙여 밑반찬이 담긴 통을 꺼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영웅이 거실로 나왔다. 머리카락이 젖어있었다.

둘은 평소처럼 저녁을 먹었다. 드라마 이야기도 했다. 이제 이웃집 바둑이가 몇 편 남지 않았다는 채언의 말에 영웅이 아쉽다고 했다. 드라마 이야기를 한 후에는 날씨 이야기도 했다.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둘은 저녁을 먹었다.

마침내 식사를 끝냈을 때. 영웅이 빈 그릇들을 옆으로 밀며 말했다.

“우리 이제 케이크 먹어요.”

“네?”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난 영웅은 냉장고 문을 열고 케이크 상자를 꺼냈다.

“채언 씨 거랑 같이 나눠 먹자고요.”

채언은 의자에 앉은 채 영웅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몰라 눈만 깜빡거리는 중이었다. 입매를 시원하게 올려 웃은 영웅은 케이크 상자를 한 손에 쥐고 부엌 찬장에서 접시를 꺼내기 시작했다.

식탁 위의 빈 그릇과 넓은 등을 번갈아 보던 채언은 식탁 한쪽에 밀어놓았던 핸드폰을 발견했다. 혹시……. 손을 뻗어 핸드폰을 가져왔다. ‘대표님’에게 메시지가 와있었다.

[대표님: 저도 딸기 케이크 좋아해요. 제가 채언 씨 것 사 갈게요. 채언 씨가 산 건 저 주세요. 같이 먹어요.]

월급을 차감해달라는 부탁을 그가 민망하지 않게 돌려서 거절한 것이었다.

아까 영웅은 채언의 메시지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몇백만 원짜리 가전제품이라도 잘못 산 건가 했는데 영수증에는 8,900원이 적혀있었다. 품목은 케이크. 홀 케이크 한판도 아니고, 한 조각 가격이었다.

딸기 케이크 한 조각 때문에 채언이 전전긍긍하고 있는 건가? 도리어 걱정을 하다가, 채언이라면 1달러짜리를 잘못 샀어도 이렇게 엄격한 선을 그었을 것 같다고 생각을 고쳤다. 1달러든 8,900원이든 몇백만 원이든 가격이 문제인 것 같지는 않았다. 자신의 실수에 엄격한 편인 건가. 영웅은 뭐라고 답장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천천히 한글 자판을 찾아 눌렀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채언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저는 아까 케이크를 다 먹어 버렸어요.”

작은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영웅은 입술을 달싹였다. 채언은 그동안 본적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영웅은 반질거리는 까만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웃었다.

“아. 채언 씨 배고팠구나.”

까만 눈동자에 의문이 서렸다.

“내가 늦게 와서 미안해요. 차가 밀려서. 우리 저녁이 좀 늦었죠.”

케이크 상자와 접시를 가지고 식탁 앞으로 온 영웅이 사과했다. 그는 케이크 상자를 열어 딸기가 잔뜩 올라간 케이크를 꺼냈다. 시럽을 바르지 않았음에도 싱싱해 보이는, 품질 좋은 딸기가 가득 올려진 딸기 생크림 케이크였다.

채언은 자신의 앞에 놓인 케이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자꾸만 입꼬리가 아래로 축 처지려고 했다.

케이크를 꺼내는 동안, 아무런 대꾸가 들려오지 않아 채언 쪽으로 고개를 돌린 영웅의 입에서 끝맺음 되지 않은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어. 아, 아 그게. 채언 씨.”

채언은 어쩐지 아까부터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잠시 눈을 뗀 사이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영웅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채언이 가끔 보조개를 보이며 웃을 때 빼고는, 덤덤하고 감정 기복이 별로 없는 차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단정하고 잘생긴 얼굴은 대부분 무표정했다. 처음 봤을 때도 그랬다. 당황할 만한 상황에서도 까만 눈을 깜빡이며 조심히 묻고 대답하길래. 그래서 채언의 그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영웅은 잠시 마른 입술을 핥은 다음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채언 씨. 왜 울어요.”

“안, 울어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손으로 눈가를 문지르던 채언은 입술을 물었다. 영웅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러다 상처가 날 것 같은데. 저 입술에 손을 댈 수도 없고.

“혹시 이거 먹기 싫어요? 아까 케이크를 이미 먹어서?”

“아뇨. 그게 아니라.”

손바닥으로 붉어진 눈가를 비비던 채언은 아예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조금 더 고개를 숙였다.

“그럼 왜 그래요.”

영웅은 의자에 앉아있는 채언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한동안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요, 를 반복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잠시 후 채언이 작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채언 씨, 뭐라고요?”

“…드라마가.”

“드라마가?”

“드라마가 곧 끝나서요.”

채언은 여전히 팔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보이지 않았다.

영웅의 어깨는 젖어있었다. 미처 말리지 못하고 나온 머리카락에서 톡, 톡, 떨어진 물 때문이었다.

영웅은 오늘 채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드라마 때문이라는 채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복합적인 감정이 뒤섞여 속이 상했으니 그 또한 이유 중 하나였다. 몇 편 남지 않은 드라마를 다 보고 나면 영웅과 이야기 할 것이 없었다. 채언은 자신의 일상에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만큼 특별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집주인과의 호칭을 바꿀 의도로 보기 시작한 것이었는데 이렇게 되다니. 고작 이런 것 때문에. 숨을 크게 들이마신 채언은 곧 얼굴을 가리고 있던 팔을 내렸다.

눈가가 붉고 표정이 좋지 않았다. 방금 전 울지 않는다고 했던 말대로 눈물을 흘려 운 흔적은 없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팔 안에 얼굴을 숨기고 열심히 눈물을 참은 듯했다.

영웅은 순간 채언을 끌어안아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안아주고 싶었다. 이미 젖은 어깨를 흠뻑 적셔도 좋으니까. 마음껏 얼굴을 숨기고 울어도 좋으니까.

“죄송해요.”

하지만 그러는 순간 채언은 이곳에서 도망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요.”

팔이 뻗어 나가지 않게 주먹을 꽉 쥐었다 놓으며 영웅이 말했다. 손등과 팔에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채언은 대답하지 못했다. 왜 죄송하다는 말이 나왔을까. 조금 전 답답하게 굴어서? 아니면 그와 계속 이런 저녁을 보내고 싶다고 생각해서?

“그냥요.”

눈꼬리가 붉어진 채언을 바라보고 있던 영웅이 굽히고 있던 다리를 펴고 일어섰다.

“이제 케이크 먹을래요?”

“네.”

영웅은 케이크를 잘랐다. 가장 크고 좋은 딸기가 올려진 조각을 채언의 접시에 담아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접시에도 한 조각 덜어갔다.

말없이 포크를 든 채언은 잠시 케이크를 내려다보다가 커다란 딸기를 찍어 입에 넣었다. 달고 고소한 크림이 묻은 상큼한 딸기의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채언은 케이크를 먹는 동안 자주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그래서 붉은 기가 내내 가라앉지 않았다.

“채언 씨.”

포크로 생크림을 찌르고 있던 영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네.”

“다른 드라마도 봐도 돼요. 많이 있잖아요.”

그렇게 말한 영웅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고작 한다는 말이 다른 드라마를 보라는 말이었다.

“그럼.”

그런데 반응이 있었다. 포크로 딸기를 으깨고 있던 영웅이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른 것도 보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무슨…….”

“드라마 내용이요.”

“네.”

영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그는 반쯤 으깨놓은 딸기를 떠서 입에 넣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내내 힘을 주고 있던 손에는 반달 같은 손톱자국이 가득했다.

밤이 지나고 채언은 다시 평소처럼 돌아왔다.

무심해 보이는 단정한 얼굴. 영웅은 그런 채언을 보며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동시에 아쉬워졌다. 채언이 울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참지 않았으면 싶었다. 그의 얼굴에서 다른 감정을 좀 더 찾아내고 싶었다.

며칠 후 채언은 담담하게, 그동안 보던 드라마의 결말을 영웅에게 말해주었다.

부모가 딸을 되찾은 해피엔딩이었다.

토요일 오전. 영웅은 방에서 나와 거실 소파에 털썩 앉았다. 채언은 아마 나갔을 것이었다. 지난번에 이번 주 토요일에 갈 데가 있다고 했었으니까. 사람 없이 비어있는 식탁을 보던 그는 아침을 거르기로 했다.

방금까지 자고 일어났는데, 거실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해가 좋아서 영웅은 소파에 길게 누웠다. 살짝 정전기가 일어나서 옅은 색의 머리카락이 방방 떠올랐다. 채언이 없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평온한 주말이었다.

집 안은 아주 조용했다. 천장을 보며 할 일 없이 눈을 깜빡이던 영웅은 오늘 혼자서 뭘 할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할 게 없었다. 그냥 단지 내 피트니스 센터에 가서 운동을 하거나 수영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어디선가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옆에서 의자를 밀어 넘어트리듯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영웅 혼자 있는 적막한 집이었기에 멀리서 들린 쾅 소리는 그의 귀에 선명하게 다가왔다.

뭐지. 긴장한 영웅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거실을 가로질러 복도 쪽으로 다가간 그는 벽에 붙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쿵. 또다시 소리가 들렸다. 채언의 방 쪽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채언 씨?”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갈 일이 있다고는 했지만, 혹시 몰랐다. 영웅은 복도에 서서 불안과 동시에 반가운 기운을 담아 채언을 불러보았다.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다.

채언은 심란한 얼굴로 방문을 반쯤 열다 멈췄다. 집주인이 문 앞에 서서 왼쪽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

“채, 하아.”

“죄송해요. 시끄러우셨죠.”

영웅이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디 안 좋으세요?”

숨을 몰아쉬는 것을 보니 몸이 안 좋은 듯했다. 채언이 다가가자 영웅은 크게 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뇨. 좀 놀라서요. 채언 씨, 집에 있었네요.”

“네. 약속이 취소돼서요.”

“아….”

“정말 괜찮으세요?”

채언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비쳤다.

“네에. 그냥 좀 놀랐어요. 채언 씨는 분명히 오늘 아침 일찍 나갈 거라고 했는데. 여기서 자꾸 무슨 소리가 들려서 와봤다가.”

노크를 하려는 순간 방문이 열린 것이었다.

채언은 문이 반쯤 열려있는 방 안을 뒤돌아보았다. 하드케이스 캐리어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애초에 이 집에 들어올 때 짐을 많이 가지고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마저도 모두 풀어놓지 않고 캐리어에 보관해두던 상태였다. 그래서 붙박이장 안에 들어 있는 옷들은 전부 도톰했다. 얇은 옷을 꺼내기 위해 오랜만에 캐리어를 열었다. 그걸 다시 세워놓고 닫을 때, 뒤로 넘어가 쿵 하는 소리가 났는데 영웅이 그걸 들은 것 같았다. 그다음에 들린 것은 실수로 발에 챈 캐리어가 붙박이장 문에 부딪히는 소리였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도둑이나 귀신 같은 건 아니고, 제 캐리어가 여기저기 부딪히는 소리였어요.”

“그렇게까지 생각하진 않았어요. 귀신 같은 건.”

진짜 별로 안 무서워하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집주인의 얼굴이 파리해 보였다.

잘 놀라는 편이기는 하지만 고작 이런 일로 놀라는 사람은 아니라고, 영웅은 해명하고 싶었다. 정말로 손을 뻗은 동시에 문이 열려서 놀란 것뿐이라고. 하지만 이미 채언이 자신의 모습을 정면으로 마주한 뒤였기에 구구절절 변명할 수가 없었다.

머쓱하게 웃는 영웅을 보던 채언은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이 머물고 있는 방 안을 쳐다보았다. 그다지 고급스럽지 않은 캐리어는 실크 벽지가 발려있는 방과 어울리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채언은 눈앞의 영웅을 올려다보았다. 채언의 마음속에서 그는 이미 많은 것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무서워하지도 마시고요.”

“뭘요?”

“제가 귀신이 되면 대표님 집에 붙어서 다른 귀신이 못 들어오게 막아드릴게요.”

그러자 영웅이 눈썹을 꿈틀 움직이며 고개를 저었다.

“채언 씨가 왜 귀신이 돼요.”

그리고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그리고 그건… 좀, 그것 나름대로 무섭지 않을까요? 아는 사이라도 귀신인데.”

영웅의 말에 채언은 눈을 옆으로 굴리며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진지한 대답에 영웅은 농담이었다고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

“그러니까 우린 귀신 되지 말고 건강하게 밥이나 먹어요.”

그리고 저 귀신 진짜 안 무서워해요. 영웅이 뒤늦게 덧붙였지만 채언은 대답하지 않고 방문을 닫았다.

계란 프라이의 노른자를 반으로 가르자 진하고 노란 액체가 주룩 터져 나왔다. 채언은 포크를 옆으로 세워 흰자를 자른 뒤 노른자에 찍어 입에 넣었다.

토스트를 하나 해치운 영웅은 천천히 계란을 먹고 있는 채언을 보다가 물었다.

“약속이 취소됐다고 했죠?”

“네.”

“그럼 오늘 뭐 할 거예요?”

포크를 내려놓은 채언이 우유 팩에 얼마 남아있지 않던 우유 전부를 컵에 따랐다.

“별로 생각해둔 건 없는데요.”

영웅의 말을 듣고 나서야 채언은 오늘 할 일을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도서관에나 갈까. 토요일은 다섯 시까지 도서관 문이 열려있었다.

“대표님은 오늘 약속 있으세요?”

“아뇨. 그냥 수영이나 할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수영이라는 말에 채언이 잠시 지나간 수영 강의를 떠올렸다. 순간 미간에 힘이 들어갈 뻔한 것을 참았다.

“수영 잘하세요?”

“그냥 해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영웅의 머릿속에 혼자 외롭게 레인을 헤엄치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채언 씨는 수영할 줄 알아요?”

그의 물음에 채언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사실 배워보고는 싶었는데…….”

쓰린 기억에 채언은 포크로 계란 흰자를 콕콕 찔렀다.

“그럼 같이 갈래요?”

“어디에요?”

“수영하러요.”

입주민이라면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피트니스 센터와 그곳에 딸린 수영장을 이용할 수 있었다. 채언 또한 회원권을 결제할 자격이 있다는 뜻이었다. 수영시설만 전문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수영장처럼 크고 호화롭지는 않지만 꽤 괜찮은 곳이라고 영웅은 설명했다. 이렇게 생긴 곳이라고, 그는 포크에 노른자를 찍어 접시에 그림을 그렸다.

노른자로 그린 그림을 바라보던 채언은 잠시 집 안을 둘러보았다. 넓은 거실과 통유리창, 대리석 바닥이 깔린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그에 맞춰 가구도 모두 고급이었다. 채언은 복도 끝 방을 떠올렸다. 자신이 없었다면 손님방으로 쓰일 곳이었다. 그런 곳마저 고급스러웠다. 그만한 방을 월세를 주고 얻으려면 아마 월급을 탈탈 털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 방 안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자신의 낡은 하드케이스 캐리어.

피트니스 센터가 입주민용이라고는 해도,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것이었다. 비쌀 것 같았다.

영웅의 손에 이끌려 백화점에 오게 된 것이 벌써 몇 번째였다. 채언은 손에 꼭 쥐고 있던 안전벨트를 푼 뒤 그의 차에서 내렸다.

수영을 배운다면 수영복 정도야 살 생각이 있지만, 피트니스 센터 회원권을 끊을 생각은 없다며 거절하는 채언에게 영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식사를 마친 뒤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금방 다시 집에 들어와서는 채언에게 보라색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패밀리용으로 회원 카드를 새로 만들어 온 것이었다.

‘원래 쓰던 건데, 카드만 한 장 더 받아왔어요.’

채언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영웅은 자신의 지갑을 펼쳐 보였다. 지갑 속에는 방금 내민 것과 같은 패밀리용 피트니스 센터 회원 카드가 한 장 들어있었다. 개인용으로 사용하던 카드는 이미 반으로 부러뜨려 버리고 온 참이었다.

그 뒤로 두 사람이 수영 물품을 사러 오기까지 두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요즘 채언은 백화점을 피하는 중이었다. 마트에 갈 때도 빙 둘러서 입구를 찾아 들어가고는 했다.

스포츠용품은 6층에서 판매하고 있었다. 지하 주차장에서 곧장 엘리베이터를 탔다. 지난번에 시향지를 나누어 주던 남자가 있던 에스컬레이터 쪽을 지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거 어때요?”

영웅이 검은 물안경 하나를 손에 쥐고 물었다.

채언은 그의 손 뒤로 보이는 가격표를 먼저 살폈다. 물안경 가격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비쌌다. 평소였다면 곧바로 고개를 저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수영을 할 수 있는 것도 올해뿐일 텐데. 한 번쯤은 좋은 것을 사볼까. 채언은 까맣고 반질거리는 물안경 겉면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걸로 할게요.”

영웅의 손에 들려있던 것을 받아들었다.

그때부터 채언은 쇼핑에 대해 살짝 의욕이 생겼다.

자신의 뒤를 따라다니던 채언이 나서서 물건을 고르는 것을 본 영웅은 옆에서 열심히 서포트하기 시작했다. 수영복을 고를 때는 기능에 대해 설명하다가 자신의 취향대로 디자인을 추천하는 실수를 하긴 했다.

사실 영웅은 오늘도 채언을 막무가내로 끌고 왔다는 핑계로 그가 고른 것들을 전부 자신이 결제할 생각이었다. 남들보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고, 지금도 가진 것이 많았기에 영웅은 돈을 아끼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남에게 퍼주는 성격도 아니었지만, 채언에게는 자꾸만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자꾸만 잘해주고 싶었다. 수영복도 같은 디자인으로 입고 싶었다.

그런데 대신 결제를 하려 할 때마다 채언이 단호한 얼굴로 자신의 카드를 내밀었다.

‘채언 씨! 이건 제가!’

하고 손을 막으면

‘대표님이 이걸 왜요?’

하는 것에 당신한테 잘해주고 싶어서요! 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미리 몰래 계산을 하려고 카운터 쪽을 서성거리다가, 의심하는 채언의 시선에 붙잡혀 실패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다른 브랜드 매장도 한번 둘러보자는 핑계로 채언이 지갑을 꺼내려는 것을 말려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본인 물건을 사겠다는데 끝까지 다른 핑계를 대며 막을 수가 없어서 영웅은 시무룩하게 지갑을 다시 집어넣어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급하게 백화점에 오지 말고 인터넷으로 채언의 것을 사서 선물했어야 하는 건데. 역시 마음이 급하면 실수를 하게 되는 법이었다.

후회하던 영웅은 아까 채언이 손에 쥐고 비교하며 고민했던 것들을 나중에 모두 사서 선물하기로 했다. 어차피 한번 사용하면 낡는 소모품이니까. 오늘 산 물안경 끈이 내일 끊어질 수도 있으니까. 돈을 쓰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자기합리화를 했다.

필요한 물건을 모두 산 건 몇 시간이 흐른 뒤였다. 채언은 심호흡을 했다. 고작 쇼핑을 한 것뿐인데 꽤나 힘이 들었다. 게다가 손에 쥐고 있는 쇼핑백을 잃어버릴까 봐서인지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쇼핑을 하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었고, 이렇게 돈을 쓰는 것도, 백화점에서 의류 관련된 것을 구입한 것도 처음이었다.

최근 채언은 하늘의 집에 과일을 사갈 때 빼고는 큰돈을 써본 적이 없었다. 오늘 긁은 카드 값에 살짝 허탈함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괜찮다고 자신을 다독였다. 의도치 않게 이번 달에 하늘의 집에 쓰려고 했던 돈을 아꼈으니까. 그리고 올해뿐이니까.

채언은 쇼핑백을 들지 않은 손으로 어깨 위를 툭툭 두드렸다. 옆에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던 영웅이 채언을 불렀다.

“조금 늦었지만, 점심 먹고 들어갈래요?”

쇼핑하느라 벌써 시간이 많이 흘러있었다.

“배고프세요?”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채언에게 맛있는 걸 사주고 싶을 뿐이었다.

“아. 우유 한 팩만 사가도 될까요?”

“그래요.”

“아…….”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은 채언은 잠시 후회했다. 옆에 서 있던 영웅이 작은 목소리에 반응하며 무슨 일이냐는 듯 시선을 보냈다.

“아뇨.”

고개를 저은 채언은 괜히 손에 쥐고 있던 쇼핑백을 향해 고개를 떨어트렸다. 에스컬레이터는 이미 아래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그동안 혹시 몰라 조심하고 있었는데, 방심했다. 조금 기다리더라도 엘리베이터를 탈 걸 그랬나. 하지만 일 층을 거쳐 가는 것도 아니고 중간층에 내려서 가는 거니까 괜찮겠지. 쇼핑을 할 때는 다른 것에 집중하느라 잠시 미뤄두었던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채언 씨. 먹고 싶은 거 없어요?”

“네?”

옆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사람들을 살펴보느라 채언은 영웅의 말을 듣지 못했다.

“죄송해요. 뭐라고 하셨죠?”

“먹고 싶은 거 없는지 궁금해서요.”

“네. 저는 별로.”

마트와 연결된 3층에 도착해서 채언은 잠시 주변을 살폈다.

“대표님은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우유 사는 김에 다른 재료도 같이 사면 되니까요.”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관심을 끄는 상품을 구경하고 있었다. 채언은 영웅과의 대화에 집중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꾸 저도 모르게 주변을 살피느라 시선과 말의 방향이 제각각이었다.

매장을 너무 많이 돌아다녀서 피곤한가. 옆에서 영웅이 살짝 고개를 숙여 채언의 얼굴을 살폈지만, 그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네?”

그저 주변을 살피던 고개를 돌리다가, 아까보다 더 가까이 다가온 그를 발견하고 되물을 뿐이었다. 영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무언가 물어보았냐는 듯 바라보는 채언의 얼굴에 아무것도 아니라며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입꼬리를 올려 보이는 그의 미소에, 채언은 그제야 불안감을 조금 내려놓고 움직일 수 있었다.

달큰한 설탕 냄새가 났다. 멀리 솜사탕 가판대가 보였다. 그 옆에는 동전을 넣고 타는 어린이용 놀이기구가 음악 소리를 내며 작동하고 있었다. 둘은 알록달록하게 꾸며진 구역을 천천히 걸었다. 아이들 웃는 소리가 들렸다. 평온하고 평범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채언은 자꾸만 긴장이 됐다. 손에 쥐고 있는 쇼핑백 때문일까. 오랜만의 쇼핑에 지쳤기 때문일까. 이상하게 자꾸 날이 섰다.

“채언 형?”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채언의 어깨가 움찔했다.

분명 아까 주변을 확인했는데. 그랬는데. 순식간에 목 뒤가 뻣뻣해졌다.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빨리 이 자리를 떠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게도 익숙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영웅 또한 고개를 돌리려 했다.

“대표님. 저희, 어서 가요.”

채언이 영웅의 손목을 잡았다.

“채언 씨?”

영웅은 갑자기 자신의 손목을 잡아 오는 이의 얼굴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채언이 먼저 자신을 잡아 온 것은 기억하는 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웃음은 이내 거두어졌다. 채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채언은 눈을 깜빡이며 발걸음을 빨리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뭔가 이상하기는 했다. 영웅은 더 묻지 않고 그에 맞춰 자연스레 보폭을 넓혔다.

“아이 씨. 형!”

뒤에서 탁탁 속도감 있는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채언 씨. 왜 그래요.”

이쯤 되자 영웅도 어쩔 수 없이 물었다.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두어 걸음 더 발을 뗐을 무렵, 영웅은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손을 떼어냈다.

손안에서 따듯한 온도가 빠져나가는 느낌에 채언은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반대로 채언의 손목이 영웅의 큰 손에 잡혔다. 어깨가 감싸였다. 옆으로 몸이 당겨지는 감각에 채언은 발을 헛디딜 뻔했지만, 손목과 어깨를 단단히 잡아준 영웅 덕에 넘어지지 않았다. 손에 쥐고 있던 쇼핑백이 바닥에 떨어졌다.

딱딱한 플라스틱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등 뒤로 무언가 스치는 감각이 들었다.

“씨발.”

바로 옆에서 들리는 욕설에 채언은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무언가 낚아채려다 놓친 듯 허공에 주먹을 쥐고 있던 건영 또한 눈동자를 옆으로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채언 형 맞잖아.”

천천히 몸을 바로 세운 건영이 히죽 웃었다.

아이들 웃는 소리와 놀이기구가 작동하며 들리는 멜로디. 알록달록한 색의 간판과 바닥에 떨어져 물건이 쏟아진 쇼핑백. 채언은 눈앞이 어지러웠다. 영웅의 품에 안긴 채 거칠게 숨을 쉬었다.

장건영. 그는 채언에게 여러 가지의 의미를 가진 사람이었다. 아주 어릴 적에는 나름 애틋했던 동생, 조금 더 자라서는 미지근한 열등감과 자괴감을 느끼게 해준 친구.

한때는 그가 좋은 의미로 삶의 자극제이기도 했다. 하지만 모순적으로 그는 채언에게서 모든 의지를 앗아갔다.

건영은 채언이 삶의 목표로 죽음을 결심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채언 씨, 아는 사람이에요?”

건영의 손이 닿지 않게 영웅이 어깨로 채언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조용하게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멍하니 서 있던 채언이 고개를 들었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넓은 품에 안정감이 들었다.

“그게 그냥, 아는.”

“저, 형 동생인데요.”

쭈그려 앉아 채언이 떨어트린 물건을 줍고 있던 건영이 불쑥 일어섰다. 갑자기 끼어드는 목소리에, 영웅은 반사적으로 채언의 팔뚝을 잡고 자신의 등 뒤로 보냈다.

“동생이요?”

“네. 거의 친형제나 다름없는 사이인데요. 그런데 그쪽이야말로 누구세요? 외국인 같아 보이는데 한국말 잘하시네요.”

건영의 말투는 무례함과 천진함을 넘나들고 있었다. 악의가 없어 보이는 물음에 영웅은 당황했다. 정말로 눈앞의 남자가 채언의 친한 동생이라면 지금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자신이 무례한 것일 테니까.

영웅은 고개를 돌려 채언의 얼굴을 살폈다. 살짝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지만 딱히 불쾌감이 떠올라 있지는 않았다. 그러기 싫었지만, 영웅은 채언의 팔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채언은 힘이 빠져나가는 손길이 아쉬워서 작게 아, 소리를 내다 입을 다물었다. 다시 팔 위로 체온을 끌어다 놓고 싶어 손가락 끝이 움찔거렸다. 영웅이 보지 못한 얼굴 위로 아쉬움이 스쳤다.

“서영웅입니다.”

영웅은 건영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안 그러면 그가 다른 것을 잡기 위해 손을 뻗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네. 안녕하세요. 장건영입니다.”

손을 맞잡은 건영이 눈인사를 하는 척 영웅의 발끝부터 얼굴까지 빠르게 훑었다.

“그런데 저희 형이랑은 무슨.”

“장건영.”

두 사람이 손을 놓자 채언이 빠르게 건영의 팔을 낚아챘다. 영웅의 시선이 그곳에 머무르다 떨어졌다.

“무례하게 굴지 마. 내가 일하는 곳 대표님이셔.”

“형. 회사 취직했어?”

그래서 나한테 말도 없이 서울로 온 거야? 한가롭게 덧붙이는 말에 채언은 입술 안쪽 살을 물었다. 마치 어제도 얼굴을 봐놓고 왜 얘기해주지 않았냐는 듯 투정 섞인 말투였다.

건영은 오른손을 들어서 자신의 왼쪽 팔을 잡고 있는 채언의 손 위로 겹쳤다. 그대로 잡아 내려 깍지를 꼈다. 당황한 채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옆에서 영웅이 보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그마저도 얼굴에서 얼른 지워내야 했다. 괜히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뭐 하는 거야. 놔.”

건영은 목소리를 낮추는 채언을 끌어당겨 자신 쪽으로 오게 했다. 상체를 가까이 붙이고 귓속말하듯 말을 뱉었다.

“놓으면 도망갈 거잖아. 형, 그동안 어디 있었어? 혹시 사이비 다단계 뭐 그런 곳에 들어간 거야?”

저 사람 한국말은 왜 이렇게 잘해? 이름도 한국식이야. 좀 이상해. 귓가에 속삭이는 말에, 채언은 남는 손을 들어 건영의 몸을 밀어냈다.

“그런 거 아니야. 놔. 나 가야 돼. 일하는 중이야.”

깍지를 낀 손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주말에도 일해? 좋은 회사는 아닌가 보네.”

건영이 고개를 돌려 다시 영웅을 보았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다. 한숨을 쉰 채언은 영웅에게 양해를 구했다.

“죄송해요. 잠시만 이야기 좀 하고 오겠습니다.”

억지로 잡힌 손에 머물러 있던 초록빛 시선이 채언의 검은 눈과 맞닿았다.

“형, 핸드폰 번호도 바꿨지. 왜 나 두고 도망갔어? 다른 데는 잘만 가면서 난 왜 피해?”

“그런 적 없어.”

건영이 깍지를 낀 손에 힘을 주었다. 제대로 힘을 쓴다면 건영을 밀어낼 수 있었을 테지만, 한쪽 손이 단단히 붙잡힌 채였다. 이걸 억지로 풀기 위해 몸을 쓴다면 싸우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써야 했다. 조금 전 가라앉은 듯 보였던 영웅의 표정 또한. 채언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너, 이 손 좀.”

“아니라는 사람이 이 년씩이나 감감무소식이야?”

잡힌 손가락이 부러질 듯 아파와 채언은 이를 꽉 깨물었다.

“너 여기엔 왜 있는 거야? 서울에는 무슨 일이야.”

“하늘의 집에 갔더니 어떤 애가 형 목도리 비슷한 걸 가지고 있더라고. 가서 물어보니까 서울에서 온 사람이 줬대. 그래서 무작정 서울로 왔지.”

내가 선물해줬던 건데, 못 알아볼 리가 없잖아. 덧붙이는 건영의 말에 채언은 지난번 하늘의 집에 갔을 때 본 아이에게 목도리를 풀어주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또 하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채언아. 혹시 건영이 때문에 그러니?’

건영의 이름이 갑자기 왜 나온 것일까. 원장에게 되물었었는데.

‘그게… 며칠 전에 오랜만에 연락이 왔었거든. 혹시 너랑 연락이 되느냐고.’

‘제 연락처 가르쳐 주셨어요?’

‘아니. 모른다고 했지. 그런데 채언아. 정말로 전에 둘이 무슨…….’

아마 그때 건영은 원장에게 연락을 한 게 아니라 하늘의 집에 갔던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원장이나, 목도리를 쥐여 준 아이나 자신이 서울 어느 동네에 사는지는 알지 못했다. 충북에게도 거주지를 말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까. 채언은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단번에 여기서 나를 만났다고? 서울이 얼마나 넓은데. 거짓말하지 마.”

“아르바이트하러 왔다가 형 봤어.”

“뭐?”

채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건영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는 순진무구해 보이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지난번에 여기에 아르바이트하러 왔다가 형 봤다고. 그래서 그 뒤로 자주 왔어.”

무작정 왔어도, 나도 먹고살아야 할 거 아냐. 건영이 입을 삐죽거리며 덧붙였다.

역시 그때 에스컬레이터에서 본 남자가……. 채언은 입술을 깨물었다.

“형. 정말 여긴 왜 온 건데? 진짜 좋은 회사 취직했어? 어, 그런데 여기 뭐 묻었다. 속눈썹에.”

타악.

“아야. 아파.”

얼굴 가까이 다가온 손을 채언이 쳐내자 건영이 어린애처럼 칭얼거렸다. 얼핏 상처받은 표정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뿌리쳐진 건영의 손목에서 쇼핑백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건영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어디서든 주눅 들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하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다. 몇 년 만에 봤지만, 채언에게 어린애처럼 구는 것 또한 그대로였다.

“빨리 손 놔.”

여전히 꽉 잡혀있는 손에 감각이 없었다. 손가락 사이가 하얗게 변해 있었다.

“싫어. 또 아무 말도 없이 나 버리고 갈 거잖아. 난 솔직히 여기서 형 만난 것도 기적 같거든.”

“버린 거, 아니야.”

힘주어 겨우 내뱉은 말 뒤로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둘 다 어린 시절을 하늘의 집에서 보냈다. 건영은 채언의 앞에서 유독 애처럼 굴고는 했지만 버림받았다는 말을 쉽게 올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것은 채언 또한 마찬가지였다.

채언은 건영을 바라봤다. 건영은 짙은 눈썹에 힘이 들어간 채 바닥을 보고 있었다. 성장기 청소년도 아니면서, 이 년 전보다 더 자란 것 같았다. 아래를 향했던 고개가 살짝 움직이려는 듯해서, 채언은 눈이 마주치기 전에 건영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영웅이 서 있었다. 이 이상 시간을 끌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았다. 아픈 손에 힘을 줘서 뿌리치고 싶었지만, 이곳은 백화점이었다. 몸싸움을 하거나 소란이 일면 보안요원이 달려올 것이었다. 애초에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건영을 조금 밀어낸다고 해서, 몸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영웅은 어떤 식의 소란도 좋아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갈 거면, 형 바뀐 핸드폰 번호 알려줘. 그리고 어디 사는지도 알려줘.”

그렇게 말한 건영은 채언의 손을 잡아당겼다.

“읏!”

그 바람에 채언의 몸이 중심을 잃고 건영의 품안으로 무너졌다. 순식간에 채언을 부축한 건영이 남은 손으로 멋대로 채언의 바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가기까지 순식간이었다. 핸드폰은 따로 잠금이 걸려있지 않았다. 건영은 빠르게 자신의 번호를 입력하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너, 뭐 하는…!”

채언의 핸드폰을 외투 주머니에 넣어준 건영은 채언의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전화 꼭 받아. 형. 아직도 그 과일가게 다니는 것 같더라.”

충북의 가게를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채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못된 애는 아니었는데, 조금 전 그것은 마치 협박이라도 하는 듯한 말투였다.

“형, 여기 봐봐.”

건영이 손깍지를 풀고 채언의 어깨에 팔을 걸쳐 끌어당겼다.

찰칵.

“뭐, 뭐 하는 거야!”

갑작스런 셔터음에 당황한 채언이 양손을 들어 밀어내자 건영은 의외로 쉽게 밀려났다.

“사진 좀 찍었어. 또 형 보고 싶을까 봐.”

자신의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는 건영의 얼굴이 꽤 뿌듯해 보여서 채언은 당황했다. 지금 이게 뭘 하는 거지. 혼란스러워서 눈을 깜빡이며 멀뚱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심채언 씨.”

그때 딱딱한 음성이 들려왔다. 채언은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볼일 끝났으면 이제 그만 가시죠.”

어느새 다가온 영웅이 삐딱한 얼굴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내 고개를 들고는 긴 손가락으로 옅은 색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아는 분 만나서 얘기하는 건 좋지만, 업무시간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건 적당히 해야죠. 안 그래요?”

이마 위로 흩어지는 머리카락 사이로 그의 초록빛 눈동자가 보였다. 채언은 정말로 혼란스러워서 눈을 깜빡이며 멀뚱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영웅은 한쪽 팔꿈치를 차 창문에 기댄 채 손으로 입술 위를 가리고 있었다. 채언이 안전벨트를 매자 차에 시동이 걸렸다.

부드럽게 울리는 엔진 소리 외에 들리는 것이 없었다.

채언은 가슴을 가로지르는 안전벨트를 손에 쥐고 주물거리는 중이었다. 영웅에게 조금 전 백화점에서의 일을 사과하고 싶었다.

이제껏 본 적 없는 그의 불량한 태도였다.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 따분하고 지루해 못 견디겠다는 듯한 영웅의 모습에 채언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갑작스레 건영과 마주쳤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당혹감이었다. 등에서 목덜미까지 삐죽 따가운 감각이 타고 올랐다. 땀이 솟았다.

‘아직도 할 이야기가 남았습니까?’

한쪽 눈을 찡그린 뒤, 다시 손목시계 위로 고개를 돌리는 그의 시선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까 봐 불안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다정하고 친근하게 굴던 사람들이, 한순간 차갑게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채언의 삶에는 좋은 기억으로 그은 나이테보다, 지워내고 싶은 상흔이 줄지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연락할게. 그러니까 지금은, 나 가야 해.’

덜컥 겁이라도 집어먹은 듯 긴장한 표정의 채언을 보던 건영은 자신의 두 손을 등 뒤로 숨기며 말했다.

‘진짜 상사인가 보네.’

채언은 영웅을 보고 있느라 건영이 자신을 어떤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게 곤란하게 안 해. 그럼 다음에 봐, 형.’

조금 전 억지로 손을 잡아끌었던 것과 달리 유순해진 태도였다.

‘내 연락 받아.’

그제야 채언은 건영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순순히 보내줄 거면 왜 사진까지 찍어대며 혼을 빼놨던 걸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시간은 짧았다. 더 이상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내 고개를 돌리고 영웅에게 다가갔다.

‘죄송해요. 이야기 다 끝냈어요. 기다리셨죠.’

그 뒤로 둘은 아무 말도 나누지 않고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채언은 불안했다. 아까 처음 들어본 영웅의 말투에 혹시 그가 장난을 치고 있는 건 아닐까 잠시 생각했지만, 딱딱하게 변한 표정은 둘만 남은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지하 주차장까지 가는 버튼을 누르는 그의 표정을 살핀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는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다시 보았을 때 여전히 그런 얼굴을 하고 있다면, 속상하고 민망해서 앞으로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하루 종일 고민해야 할 것 같았다. 다시 보나 안 보나 속 끓이고 있는 것은 동일했지만.

누가 목을 잡고 고정해놓은 듯 고개가 뻣뻣해졌다. 채언은 손에 쥐고 있던 안전벨트를 손톱으로 긁다가, 혹시 흠집이 날까 봐 주먹 쥔 손가락을 아프게 긁기 시작했다.

그가 아픈 사람에게 친절하다는 진원의 말을 제외하고 생각해보아도 그동안 영웅은 자신에게 충분히 잘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안일해졌는지도 모른다. 언젠가부터 저도 모르게 기대려고 했던 것도 같다. 다시는 이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예전처럼 또 너무 쉽게, 결심했던 것과 다르게…….

왜 항상 이렇게 되는지 모르겠다.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점점 더 아래를 보고 있었지만, 눈앞의 초점이 흐려지는 듯해, 채언은 다물고 있던 입술을 벌려 숨을 쉬었다. 몸 전체가 팽창했다가 한순간에 꾹 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최대한 긴장한 티가 나지 않게 밭은 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들었다. 영웅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죄송…….”

“미안해요. 채언 씨.”

“네?”

뻣뻣하게 굳어있던 목이 그의 한마디에 쉽게 풀어졌다. 흐리던 눈앞이 선명해졌다.

“오랜만에 만난 동생… 같던데.”

영웅은 한 손으로 핸들을 쥐고 다른 손으로 목덜미를 만지고 있었다. 표정은 겸연쩍어 보였으나, 아까만큼 딱딱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채언은 뻣뻣하던 손에 힘을 풀 수 있었다.

“옆에서 보니까, 그 사람 말대로 엄청 친해 보이지는 않아서. 그래서 살짝 끼어들었던 건데.”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채언은 그가 자신의 주변 사람들과 엮이기 원치 않았다. 애초에 자신과 건영이 어떤 식으로 멀어졌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무엇 하나 들키고 싶지 않았다. 영웅과는 이 정도를 유지하다가, 그저 이만큼, 이대로만.

“착각했다면 정말 미안해요.”

영웅은 백화점에서의 건영과 채언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친한 동생이라던 남자는 채언보다 조금 더 키가 컸다. 둘이 손을 잡는 순간 불쾌감이 치밀어 올라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차라리 그쪽을 보지 않고 얌전히 기다리는 게 두 사람이 대화를 빨리 끝내는 데 도움이 될까 잠시 기다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 채언의 표정을 보고 짐작했다. 두 사람이 예전에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전혀 친하지 않은 사이라는 것을. 채언의 표정은 당혹스러움을 억지로 눌러 참는 듯 보였다. 충분히 건영을 밀어낼 수 있었음에도, 왜인지 그러지 않고 그 상황을 견디고 있었다. 정말로 친한 동생처럼 보였다면 같이 알고 지내자고 이쪽에서 먼저 적극적으로 나섰을 거다. 하지만 곱씹어 생각해도 채언을 중간에 두고 그와 아는 사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는 채언에게 다른 친구를 소개해달라는 말도 꺼내지 않을 예정이었다.

“화가 나신 줄 알았어요.”

“내가요?”

“네.”

“왜 그런, 혹시 내가 윙크한 거 못 봤어요?”

채언은 고개를 저었다. 이마를 쓸어 올릴 때 눈을 살짝 찡그리기는 한 것 같은데…….

“이렇게 했었는데.”

영웅은 앞을 본 채로 살짝 고개를 틀어 오른쪽 눈을 찡긋거렸다. 의도치 않게 양쪽 눈이 동시에 감겼다. 윙크라고 하기에는 어설펐다. 몇 번을 더 시도해보았지만 결국 한쪽 눈만 깔끔하게 감지 못했다.

“사실, 잘 못해요.”

영웅은 한숨을 쉬며 한쪽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하지만 연기 실력은 좀 훌륭했나 봐요. 내가 진짜 화가 난 줄 알았던 거라면.”

“화를 내실 만한 상황이었으니까요.”

“음.”

그 남자와 손깍지를 껴서? 그 남자와 사진을 찍어서? 그 남자와 거의 끌어안다시피 붙은 채로 말을 주고받아서? 영웅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이유가 스쳤지만, 이것들은 차마 그의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할 생각들이었다. 화낼 만한 상황으로 왜 그런 이유들이 떠올랐는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만 조금 전의 상황을 다시 떠올리다 보니 눈썹이 삐뚜름히 올라갈 뿐이었다.

“사실 난, 채언 씨가 조금 곤란해 보여서 끼어든 거였어요. 무례했을까 봐 걱정한 건 이쪽인데. 그래서 잘 모르겠어요. 내가 왜 화를 낼 만한 상황이었는데요?”

“대표님은 제 고용주가 맞으시고, 아까 제가 업무시간을 사적으로 사용한 것도 맞으니까요.”

“으음.”

영웅은 핸들을 꺾으며 목을 울렸다.

“둘 다 아닌데요.”

영웅은 사이드미러를 보고 있었지만, 옆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채언의 시선을 느꼈다. 무의식중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채언 씨를 고용한 건 누나고, 오늘은 휴일이에요.”

영웅은 앞의 말보다 휴일이라는 단어를 더 강조하며 말했다. 채언의 월급은 자신의 통장에서 빠져나가고 있었지만 그건 진원이 알아서 처리할 일이었고, 처음 계약서를 작성할 때는 누나가 관여했으니 얼렁뚱땅 따져보면 앞에 한 말도 맞는 말이었다.

옆에서 딱히 큰 소리를 내는 반응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채언의 눈이 동그래져 있을 것이 예상되었다. 결국 영웅은 참지 못하고 눈을 굴려 옆을 보았다. 웃음이 터졌다.

채언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영웅은 재빠르게 앞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방금 소리 내 웃었던 것 같은데 그건 아직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채언이 혼란스러워하는 틈을 타서 영웅이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업무시간이 아니었다는 말이죠.”

“아!”

아랫입술을 물고 있었지만, 입꼬리가 곡선을 그리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영웅은 아무 말이나 더 해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고용인과 고용주의 관계도 아니고, 오늘 채언 씨가 실수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신호대기에 걸렸다. 영웅은 액셀을 밟고 있던 발에서 힘을 빼 속도를 줄였다.

“혹시 채언 씨, 나랑 있을 때를 전부 업무시간이라고 생각했던 건 건 아니죠? 설마….”

브레이크를 밟았다. 말해놓고 보니 심장이 콕 찔리는 느낌이었다. 입꼬리가 저절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영웅은 상체를 기울여 핸들에 팔을 걸치고 머리를 기댔다.

“아뇨, 그런 건 아닌데요. 아까 너무 정신이 없어서 착각했나 봐요. 제가 밖으로 잘 돌아다니는 성격이 아니라서, 백화점은 놀러 가는 곳도 아니었고, 주로 일할 때, 그러니까 마트 갈 때만 가던 곳이라서요.”

상처받은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그에게 채언은 다급히 변명했다. 영웅과 함께 있는 것을 업무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아니, 예전에는 그랬던 것 같기도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집에 있을 때 그가 퇴근하는 것을 기다리게 되었으니까. 그래서 그와 이만큼의 거리를 유지하고 싶었다. 이만큼만이라도.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는 입술이 점차 벌어졌다. 왜 이렇게 변명하고 있는 거지. 채언은 핸들에 머리를 기댄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영웅과 눈을 마주쳤다. 그는 어느샌가 다시 웃고 있었다. 긴 속눈썹을 가진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저 눈이 차갑게 변하는 것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결론 내리기로 했다. 더 이상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채언은 가슴을 가로지르는 안전벨트를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차창 밖에서는 빨간불이 곧 주황색이 되었다.

영웅은 등을 시트에 기댔다. 초록 불이 켜졌다.

“수영은 다음에 할까요?”

안전벨트를 손에 쥐고 있던 채언은 그의 옆모습을 보며 물었다.

“왜요?”

“그냥요. 저번처럼 맛있는 거 해줄까요?”

아까 집에서의 행동을 떠올려보면 수영을 엄청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는데. 채언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필요한 것도 전부 샀고, 원래 계획대로 수영하러 가도.”

갑자기 말이 끊겼다. 영웅은 전방을 주시하면서 살짝살짝 채언을 돌아보았다.

“왜 그래요?”

“아, 저기.”

채언이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급히 차 안을 둘러보며 무언가 찾는 듯하더니, 이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수영은 다음에 해야 할 것 같아요.”

“아니, 그건 사과하지 않아도 되는데요. 몸이 안 좋아요?”

채언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한참이나 고개를 들지 못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맛있는 건 제가 해드려야 할 것 같아요.”

“채언 씨가 해주는 건 다 맛있는데….”

영웅도 덩달아 목소리를 죽이며 혼잣말하듯 대답을 뱉어냈다.

“정말 왜 그래요? 속이 안 좋아요? 차가 너무 빨리 달렸죠.”

그럼 오늘 저녁은 저번에 먹었던 죽집에 가서 사 오겠다며, 영웅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차는 백화점을 나온 뒤로 목적지 없이 도로를 뱅뱅 도는 중이었다. 그냥 바로 집으로 갈 것을 후회하며 영웅이 핸들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그게 아니라.”

채언은 정말 이것만은 말하기 싫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주먹을 꽉 쥐고 입을 열었다.

“전부 잃어버렸어요.”

손발이 피가 돌지 않는 것처럼 차가워졌다. 모순되게 심장은 쿵쿵 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수영과 자신은 인연이 아닌 것 같았다.

“아까 들고 있던 쇼핑백이요….”

그 안에는 오늘 산 물건들과 채언의 지갑이 들어있었다. 결제 후 물건을 건네받고 그대로 쇼핑백 안에 지갑을 넣어둔 것이었다. 채언의 시선이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물건은 아깝지 않았다. 지갑 안에는 현금도 별로 들어있지 않았고, 신분증이나 체크카드 같은 것은 재발급받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잃어버린 지갑 안에는 피트니스 센터 회원 카드와 생활비 카드가 꽂혀있었다. 왜 오늘 이런 일만 일어나지. 왜 안 좋은 일은 연달아 닥쳐오는 거지. 정말로 더는 영웅과 껄끄러운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쇼핑백 안에 오늘 산 물건 말고 다른 것도 들어있었어요?”

기껏 긴장을 풀어놨는데 다시 굳어버린 채언을 보면서 영웅은 손가락으로 핸들 위를 톡톡 두드렸다.

“지갑이 그 안에 있었어요. 지갑 안에 아까 주신 회원 카드랑 생활비 카드가 들어있고요.”

지갑을 잃어버렸다면 이렇게 시무룩해질 만했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었다. 하지만 채언은 지갑보다 그 안에 들어있던 카드 두 장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다음 말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분명 과하게 사과하려 들 것이었다. 딸기 케이크를 잘못 샀다고 털어놓았을 때도 그랬으니까. 채언은 자신의 실수에 엄격한 사람이었다.

“죄송합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일단 카드를 정지하거나 분실신고부터 해야 할 것 같아요. 분명히 손에 잘 쥐고 있었는데 어디서 잃어버린 건지.”

채언의 머릿속에, 와르르 안에 들어있던 것들이 쏟아지던 쇼핑백이 떠올랐다.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백화점에서 잃어버린 거니까. 여기서 내려주시면 제가 돌아가서 한번 찾아보고 올게요.”

채언은 차창을 돌아보며 말했다. 분명 백화점 지하 주차장을 떠난 지 시간이 좀 된 것 같은데 시야에 백화점 건물이 보였다. 영웅은 채언의 말을 흘려들었다. 액셀을 밟은 발에 조금씩 힘을 주며 아까 들린 백화점과 정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럼. 지금 채언 씨 기분이 안 좋겠어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하는 눈으로 채언이 영웅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심각했다. 자기 기분이 안 좋다고 돌려 말한 건가. 채언은 마른 입술을 꾹 다물었다.

“혹시 지갑 안에 채언 씨한테 중요한 게 들어있었어요? 다시 발급 받으면 되는 거 말고요. 사진 같은 거.”

영웅은 돌려 말한 것이 아니었다. 조금 돌려서 생각하기는 했다. 그 순간 목적지가 정해진 것이었다. 신용카드나 피트니스 센터 회원 카드는 분실신고를 한 뒤 재발급받으면 되는 일이고, 짧은 시간 동안 누군가 그것을 주워 사용했다면 경찰에 신고하면 되는 일이었다.

“아뇨. 그런 건 넣어놓지 않았어요.”

“흠.”

영웅은 겉으로는 고민하는 척 미간을 찌푸렸지만, 확신을 가지고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난 오늘 꼭 수영을 하고 싶어요.”

아까는 수영 말고 다른 걸 하자고 했으면서. 계속 그랬으면 집에 가서 브로콜리를 뺀 아주 맛있는 요리를 해줬을 텐데.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맛있게, 정말 정말 맛있게.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채언은 그에게 미안해하는 동시에 자신을 자책하며 속을 끓였다.

“지금 채언 씨는 아까 산 걸 잃어버려서 기분이 안 좋고.”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영웅은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고작 카드 두 장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인지시켜주듯이.

“나는 오늘 꼭 수영을 해야겠으니까, 우리는 갈 데가 있어요.”

“집에 가 계시면 저는 아까 그 백화점에.”

“그 백화점 말고요.”

영웅은 교통법규를 지키는 선 안에서 최선을 다해 빠르고 정확하게 운전을 했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백화점 지하 주차장이었다. 아까 들렀던 곳과 차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경쟁사 백화점이었다.

채언은 그가 건물을 착각한 것인가 했다.

“대표님. 저희가 아까 들린 곳은 여기가 아니라 저쪽 백화점인데요.”

영웅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아, 그게 지금 시간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그냥 가까운 곳으로 온 거거든요. 내려요. 채언 씨.”

정말 시간이 없다는 듯 그는 자리가 보이는 곳에 급히 주차를 한 참이었다.

“잃어버린 건 누가 주워서 맡겨놨을 거예요. 백화점이라 CCTV도 곳곳에 있을 거고. 훔쳐 가지는 못했을 거예요. 어서 내려요. 시간이 별로 없어요.”

자꾸 시간이 없다는 말에 채언은 일단 차 문을 열었다. 영웅도 운전석을 빠져나왔다. 보닛 앞을 돌아온 그는, 차 문을 닫고 내린 채언에게 손을 내밀었다.

“빨리 와요.”

얼떨결에 채언이 그 손을 마주 잡자 그는 고개를 휙 돌리고는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영웅의 걸음이 빨라질수록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서로 놓치고 싶지 않아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힘을 준 것이었다.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둘은 손을 잡고 있었다. 잡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잡고 있었다. 내릴 때가 되어 발을 옮길 때에서야 한쪽이 끌어당기는 것에 서로 아! 하며 여태 서로 손을 잡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엘리베이터를 나와 문이 닫히는 동안에도 잡고 있다가 천천히 놓았다. 에스컬레이터도 아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매장이 있는 곳까지 올라온 것이었는데도 둘 다 숨을 가쁘게 쉬었다.

“이쪽으로 가죠.”

영웅은 답지 않게 뚝딱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채언은 그가 한국말이 서툰 외국인처럼 말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뒤를 따라가는 내내 심장이 뛰었는데 그 이유는, 아까 너무 빨리 걸었고 엘리베이터를 탄 시간은 너무 짧아서 차마 숨을 다 고르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래서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서 심장 위에 손을 올리고 두어 번 숨을 마셨다 내쉬었다.

그렇게 멈춰선 시간은 짧았다. 천천히 걷고 있는 영웅이 너무 멀어지기 전에 그를 향해 다시 걸어갔기 때문이다.

채언의 외투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핸드폰에서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하지만 채언은 점차 빨라지는 자신의 발걸음 소리와 하아, 하, 숨소리, 주변의 소음과 건물 안에 틀어놓은 노래 때문에 메시지 알림음을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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