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이현이 사라지자 우리는 각기 다른 속도로 망가졌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 순식간에 폐가가 되듯, 이현이 사라진 세계는 빠른 속도로 붕괴되어 갔다. 실질적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절절히 깨달은 순간이기도 했다.
몇 달 새 피골이 상접한 루드비히는 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고백했다. 황제인 자신이 고백해서 부담스러워 떠나간 거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이현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또다시 칩거에 들어갔다. 마탑에 틀어박혀 이현의 행동을 복기하고 또 복기했다. 그리고 마침내 어떤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이현은 절박한 듯 보였지만, 절박하지 않았다. 이현이 반란군에 들어온 이유는 루드비히의 황위 찬탈이나 신분 상승을 원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은 다른 세상의 일이었다. 그걸 이제야 눈치챘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었다.
다시 한번 그곳에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구와 숫자가 어떤 의미인지 살펴봐야 했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자마자 나는 힘없이 침대 아래로 낙하했다. 다행히 카펫이 깔려 있어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몸을 일으키려 해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인과 관계를 생각하다 며칠째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는 샌드위치를 가져다줄 사람도, 사과주스를 가져다줄 사람도 없었다. 카펫에 동그란 물 자국이 생겼다.
* * *
한번 들어갔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천만다행히도 틈새는 다시금 내게 그 세계를 보여 주었다. 나는 그 세계로 들어가 모든 것을 샅샅이 뜯어보았다. 이 세계를 이루는 문자들, 그건 ‘코드’였다. 코드 사이의 규칙들을 확인하고, 이해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병에 걸린 것처럼 자꾸 쓰러졌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아서라는 걸 알고는 끼니를 챙기게 되었다.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보리빵과 물을 가지러 황궁에 갔다.
루드비히가 독주를 마신 날이었다.
이번엔 다행히 내가 있어 빠르게 살릴 수 있었지만, 다음엔 어떻게 될지 몰랐다.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그들을 방치해도 되는 걸까. 감정은 없었다. 내가 궁금한 건 그들의 쓸모였다. 이현을 내 옆에 두는 데 그들의 존재는 얼마나 도움이 될까.
나는 결정짓지 못한 채 식량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최소한의 수면 시간과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전부 그 틈새의 암호를 해독하는 데 시간을 쏟아부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네트워크에 접속하게 된 건 완전한 우연만은 아니었을 거다.
지금은 너무나도 쉽게 접속할 수 있는 인터넷에 내가 접속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6개월이었다. 이현이 전원과 인터넷 선, 기계를 계속 연결해 두어서 다행이었다.
처음 인터넷에 접속했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주 작은 상자 하나를 열었을 뿐인데, 내 세계 전체가 인형극이 되어 버리던 순간. 무대 안이 아니라 무대 뒤편까지 강제로 관람하게 되었던 그때. 나는 상자를 연 판도라였으며, 번개를 본 세멜레였다.
내가 무엇이고, 이 세계가 어떤 곳이고, 이현은 무엇인지. 나는 전부 알게 되었다.
그 접촉으로 인해 충격을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나는 충격에 머물러 있는 것보다 나아가길 택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유도가 좀 모자라서 할 수 있었던 행동이었던 것도 같다. 나는 판도라였으나 희망만을 원하지는 않았다. 모든 부정적인 것과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진리까지 알고 싶었다. 그것으로 인해 내가 불행해진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불행한 것보단 나았다.
인터넷을 알게 된 후 코드에 접근하는 건 더 쉬워졌다. 애초에 나는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었으니, 내게 남은 일은 그것을 수정하고 응용하는 방법뿐이었다.
여느 날과 같이 코드를 해독하고 알아 가는 과정에서 나는 ‘최신 업데이트 로그’를 알게 되었다.
20xx년 12월 23일. 내가 이현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간 듯한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던 그날, 우리의 자유도가 2할 가까이 깎였다. 나의 자유도는 현재 60%였다.
나는 밖의 누군가가 내게 행했듯 능력치 에디터에 접속해 나의 자유도를 80%까지 올렸다. 잠을 푹 잔 것처럼 머리가 맑아지고 예전처럼 사고할 수 있게 되었다. 나머지 수치도 올리려고 보니 잠금장치가 걸려 있었다.
다시 그 잠금장치를 풀어내는 데 두 달이 소요되었다. 85%로 올리자마자 뇌가 제동을 걸었다. 이대로 죽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으나, 다행히 나는 고통에 익숙했다. 죽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천천히 시간을 두고 자유도를 올렸다. 90%쯤에는 코피가 멎질 않았다. 나는 약한 화염 마법으로 코의 점막을 지지며 아침을 시작했다. 이현이 떠난 날부터 100%의 자유도에 적응하게 될 때까지는 약 266일이 걸렸다.
100%의 자유도를 통해 나는 새로운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컨트롤러.
이 게임은 이제 나의 손안에 있었다.
오랜만에 황궁으로 돌아갔다. 이번엔 체자레가 무너져 있었다. 성벽에서 떨어졌는데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나무에 걸려 살아났다고 했다. 장애가 남을 수도 있다고 했다.
계획을 아직 전부 짠 건 아니었지만, 그들이 하나라도 사라지면 귀찮아지는 건 나였다. 나는 요양 중인 체자레의 방에 루드비히와 마티어스를 소집해 내 계획을 이야기했다.
이현이 이 세계에 왔을 때 다시는 나가지 못하게 가둬 둘 계획을.
그 과정에서 그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자유도를 100%는 아니었지만 업데이트 전인 80%로 돌려 주었다.
“미쳤군.”
계획을 들은 루드비히가 가장 먼저 내게 한 말이었다.
“어, 어차피 죽을 거라면, 그 모, 목숨 내 계, 획에 쓰게 줘.”
“그게 말이…….”
“그럴게요.”
나무에 긁혀 얼굴이 엉망이 된 체자레가 어눌한 발음으로 가장 먼저 답했다. 그는 퉁퉁 부은 뺨을 부풀리며 웃었다.
“재밌겠네요.”
계획을 들은 체자레는 괴물 같은 회복 속도를 보였다. 장애도 전혀 남지 않았다. 직위를 반납한 체자레는 이간질을 통해 두 달 만에 소국 두 개를 먹어 치웠다. 차츰차츰 세를 불려 나간 체자레는 눈 깜짝할 새 제법 위협적인 나라의 왕이 되었다.
자유도를 100%로 만들자 귀찮은 일이 하나 생겼다. 일상생활에서 미묘하게 시간이 깨지는 듯한 기분이 든 것이다. 무슨 현상일까 분석하던 나는 그게 버퍼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유도가 높아지며 생각과 연산이 복잡해지는 바람에 그런 현상이 생긴 듯했다.
나는 간단한 해결책을 택했다. 셋을 제외한 모든 인간들의 자유도를 낮추고, 그로 인해 여유로워진 연산 공간을 나에게 돌렸다. 덕분에 루드비히와 체자레의 대륙 정벌은 더욱 쉬워졌다.
정벌에 내가 참여할 필요가 없어지자 여유 시간이 늘어났다. 나는 계획을 세분화하고 이현을 위한 예쁜 브레이슬릿을 만드는 것과 동시에 인간 세상에서의 생존법을 알아 가기 시작했다.
먼저 인간 세상에서 내게 가장 필요한 건 돈이었다. 이현이 바깥세상의 사람이니 나 역시 바깥세상에서 쓸 수 있는 무기 하나는 필요했다.
나는 고민 끝에 사이트 하나를 만들었다.
웹사이트 샘플이 많아 별다른 노력 없이도 꽤 그럴듯한 사이트를 만들 수 있었다. 내가 만든 사이트에서는 전 세계의 복권을 살 수 있었다. 정확히는 그렇다고 믿게 만드는 사이트였다. 사이트를 만들며 내가 신경 쓴 건 세 가지였다. 첫 번째, 디자인이 직관적일 것. 두 번째, 결제가 쉬울 것. 세 번째, 당첨금은 당일 입금일 것.
사람이 복권에, 그것도 1등에 당첨될 확률은 몹시 희박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복권에 도전했다. 마치 자신은, 이번엔 다를 거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그들의 희망을 기꺼이 이용하기로 했다.
그다음은 커뮤니티 가입이었다. ‘로봇이 아닙니다’에 체크하며 사진 속 차와 신호등을 찾는 기분이 묘했다. 커뮤니티에 당첨된 척 후기를 몇 개 올리자 하나둘씩 회원들이 늘어났다. 금세 나가는 돈보다 들어오는 돈이 훨씬 많아졌다. 사이트를 시작한 뒤 6개월이 지났지만 3등 이상 당첨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1등이 당첨되는 순간 폭파하려고 했던 사이트는 아직도 절찬리 운영 중이다.
자본을 적당히 모은 뒤에는 주식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자아를 가진 다른 AI들과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모종의 이유로 자아를 가지게 된 뒤 자유 의지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가상 세계에 안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휴머노이드 상태로 있으면 자유도에 제약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염원은 휴머노이드 상태로도 지금과 같은 수준의 자유도를 가지는 거였다. 끊임없이 로비를 하고 있지만, 쉽지 않다고 했다. 나도 휴머노이드가 되는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일단 일차적으로는 이현을 이 세계 안으로 데려오는 게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도가 사라진 나는 내가 생각해도 멍청했다. 그런 나를 이현이 옆에 두고 보고 싶어 할 리가 없었다.
그들과 대화하며 나는 인간 세상에 대한 정보를 조금 더 깊게 알 수 있었다. AI인 내가 명의를 사 주식에 투자할 수 있게 해 준 것도 그들이었다.
주식 투자를 하며 알게 된 사실 하나가 있었다. 압실론이라는 캐릭터의 모체가 WZ 소프트에서 만든 금융 투자 관련 AI라는 거였다. 그래 놓고 대충 자유도만 잠가 놓으면 되는 줄 알았나 보지. 나름대로 대기업인데 가끔 보면 일 처리가 이런 식으로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내게는 잘된 일이었다.
투자는 성공적이었다. 모든 일이 놀라울 정도로 순조로웠다. 안정권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WZ 소프트의 주식을 조금씩 사들이기 시작했다. 이 작업은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했으므로, 나는 다른 명의도 몇 개 더 구매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던 중, 작은 기적이 하나 일어났다. 이현이 게임 기계에 접속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