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지하실에서 나온 것만으로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나와 달리 이현은 나를 꽤 조심스럽게 대했다. 기본적으로 다정했지만, 전부 받아 주지는 않았다. 때때로 나를 피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어쩐지 그가 이유가 있어 일부러 그런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와 대화하다 보면 더러운 유리창을 천천히 닦아 내듯 사고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그건 차갑고 맑은 물로 머릿속의 주름을 하나하나 깨끗이 씻어 내는 듯한 기분에 가까웠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그런 기분은 느끼지 못할 것 같았다. 그와 함께할수록 온전한 내가 되는 기분이었다. 어떤 마법사가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감정에 못 이겨 고백한 적도 있지만, 그와 이루어지고 싶다는 마음은 작았다. 내게는 이현과 이루어지는 것보다 함께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애정이 식은 그에게 버림받아 더 이상 함께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같이 지내며 가끔 그의 옷깃을 만지고, 하루에 한두 마디 대화하고, 미소를 보는 것 정도로도 마음은 차고 넘쳤다.
반란이 제법 진행되었을 무렵, 이현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군대에 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미 반란군에 들어와 있는데 군대에 왜 또 간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말뿐만이 아니라 행동도 조금 이상해졌다. 말이 없어졌다가, 말이 많아졌다가, 안 마시던 술도 마시고, 혼자 밤에 나가 소리를 지르며 마구 뛰기도 했다. 원체 특이한 말이나 행동을 종종 하던 터라 별일 아니겠거니 생각했었는데, 정말로 별일이 생겼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일이.
그 사실을 깨달은 건 어느 날 오후였다.
이현과 대화를 나눈 뒤, 나는 무언가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무언가가 분명히 달라졌는데, 뭐가 달라졌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뭔가가 풀린 것도 같고, 옥죄어진 것도 같은 그 감각. 다른 것을 할 때는 잠잠하다가, 이현과 대화를 한 뒤면 그 감각이 꼭 느껴졌다. 별거 아니라 생각하고 넘길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 감각이 어쩌면 내 삶보다 중요할 수도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나 새, 생각할 시간이 필, 요해.”
나는 그 직감이 사라지기 전 루드비히에게 달려갔다. 루드비히와 함께 있던 마티어스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생각할 시간?”
“이, 일주일이면 돼.”
평소라면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바로 일주일 동안 칩거에 들어갔겠지만, 지금은 나름대로 중요한 상황이었다. 황제군은 우리를 죽이기 위해 매일같이 살수를 보내고 있었고, 우리는 적은 인원으로 방어하는 것과 동시에 그들을 총공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반란군이 죽는 건 상관이 없었지만, 이현이 열심이니 나도 이 정도 말은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이현은 정말이지 쓸데없는 데 애정을 가진다니까. 그런 모습까지 귀엽지만.
“그러니까 무슨 생각을 해야 하냐고.”
“모, 몰라.”
“뭘 모른다는 거야. 확실히 얘기를 해야 널 빼든 말든 할 거 아니야.”
마티어스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진작 힘이 생겼을 때 얘를 죽였어야 했는데, 타이밍을 놓쳐서 아깝게 되었다.
“나, 나는 지금까지 모, 르는 게 어, 없었어. 그, 런데 이건 모, 르겠어. 그러니까, 새, 생각해야 해.”
“하, 나는 모르겠다.”
“……일주일이라고.”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루드비히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치, 칠 일. 더 짜, 짧아질 수도 있어.”
“알았다.”
루드비히의 허락에 마티어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루드비히, 정말 괜찮겠어? 며칠 뒤면 총공격이야. 지금 쓸 만한 마법사라곤 이현이랑 쟤밖에 없잖아.”
“압실론, 너는 쓸데없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네가 지금 이 말을 꺼낸 건, 지금 너에게 그 일이 필요해서겠지.”
“마, 맞아.”
“하고 싶은 만큼 해 보고 와. 사람 하나 없다고 무너질 만큼 우리는 약하지 않으니.”
“진심이야, 루드비히?”
“그래.”
마티어스가 괴로운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하 씨……. 그럼 일정 다시 조정해 볼게. 7일이면 되는 거지?”
“으, 응. 7일이면, 돼.”
“알았어.”
결정이 내려지자마자 자연스럽게 마티어스가 일정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날이 이들을 진짜 동료로 생각하게 된 날이었던 것 같다.
나는 바로 방에 틀어박혀 명상을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하루하루를 되짚기 시작했다. 생각을 많이 해서인지 머리가 종종 뜨거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좀처럼 이렇다 싶은 마땅한 순간을 찾아낼 수 없었다. 항상 잘 되던 것이 되지 않으니 짜증이 났다. 하지만 생각하는 걸 멈추지는 않았다. 여기서 멈추면 평생 여기에서만 머물게 될 것 같았다.
7일 내내 누구의 방문도 받지 않으려 했는데 거부할 수 없는 방문객이 찾아왔다. 이현이었다. 이현은 거의 문을 부수듯이 열고 들어왔다. 생각을 방해받은 게 화가 나 짜증을 부리려고 했지만, 이현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자 분노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이, 이현, 여기까지는 무, 무슨 일이야.”
“아무리 생각할 게 많아도 밥은 먹어야지. 이틀 내내 밥도 안 먹고 물도 안 마셨다며? 이거라도 좀 먹으면서 해.”
“아…… 이, 틀 지났구나…….”
생각에 열중하느라 시간이 그만큼 지난 줄도 모르고 있었다.
“이거라도 좀 먹으면서 해. 건강 상한다.”
이현이 혀를 끌끌 차며 바구니를 내밀었다. 바구니 위의 천을 걷어내자 토마토와 양상추를 넣은 먹음직스러운 샌드위치와 사과주스가 보였다. 이현은 밥 먹는 걸 참 중요하게 생각했다. 나는 배고픔에 익숙했고, 두세 끼 거르는 건 일도 아니었는데 이현은 자기가 굶는 것처럼 안타까워하고 입에 뭐라도 넣어 주려고 했다. 나는 그런 이현이 정말 사랑스러웠다.
“고, 고마워, 이현.”
“지금 먹어. 너 먹는 거 보고 갈 거니까.”
이현은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팔짱을 꼈다. 내가 이현을 좋아하긴 하는구나. 이런 행동도 귀찮지 않고 기껍다니.
“아, 알았어.”
배시시 웃으며 빵을 집어 들려는 순간, 머릿속에 번개처럼 과거의 파편 하나가 떠올랐다.
몇 달 전 정복한 영지의 들판에서 나는 묘한 현상을 하나 발견했다. 새끼손톱만 한 크기의 구멍. 그것은 세상 한편이 살짝 찢어진 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무심코 손을 넣어 보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지금 그 장면이 떠오른 까닭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현의 소매를 잡고 조심스레 물었다.
“이현, 지, 지금 바빠?”
“아니, 지금은 괜찮아. 일 거의 다 끝내 놓고 온 거야.”
“나랑 같이, 어, 디 좀 가 줘. 거, 기서 머, 먹고 싶어.”
“생각할 게 많다는 애가 먹는 장소도 가리려고 하네. 뭐, 알았어. 먹는 게 중요한 거니까.”
이현은 내 엉뚱한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긍정했다. 다행히 들판은 내 방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나는 이현을 데리고 그 들판으로 향했다.
“오면 나을 것 같다는 데가…… 여기야?”
“응, 맞아.”
이현은 잠시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최대한 무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남들에게 의심받지 않을 표정을 짓는 건 내게 좀 어려운 일이었다.
“하여간 엉뚱하다니까. 얼른 먹고 가자.”
다행히 별다른 의심은 사지 않은 것 같았다.
“아, 알았어.”
나는 걸치고 있던 망토를 풀밭에 깔고 그 위에 자리 잡았다. 내가 부스럭거리며 샌드위치 포장지를 벗기는 동안, 사과주스의 코르크 마개를 따 내게 건네준 이현이 내 옆에 드러누웠다.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대고 누운 상태로 다리를 꼰 이현이 지나가는 구름을 보다가 툭 말을 던졌다.
“요즘 너 없으니까 나한테 일이 쏟아져서 아주 죽을 맛이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오래 해야 하는 건지는 몰라도 적당히 하고 돌아와.”
“아, 알았어, 이현. 그렇게, 할게.”
이현에게는 역시 내가 필요했다. 나는 그런 이현의 말이 기뻐 배시시 웃었다.
날이 좋았다.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고, 바람이 살랑거리며 이현의 머리칼을 간질였다.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니 졸음이 오는지 이현의 눈이 자꾸만 감겼다.
“너무 졸리다. 나 조금만 잘게.”
“응, 이현. 잘 자.”
“나 두고 가면 안 돼. 깨워 줘야 해…….”
이현은 이 말을 마지막으로 눈을 끔뻑이더니 이내 까무룩 잠이 들었다. 나는 옆으로 돌아누워 이현의 말랑말랑한 뺨을 매만졌다. 쭉 늘리자 빵 반죽처럼 늘어나는 뺨의 감촉이 너무 좋았다.
나는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 구멍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나는 무심코 이현의 뺨을 쓸며 그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
그곳에 손을 넣었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기억한다.
검은 화면에 깨알같이 깔려 있는 이름 모를 문구들과 숫자들.
그것은 내가 있는 이 세계를 부수는 것과 동시에 바깥에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걸 알게 해 주는 매개체였다. 아마 플레이어인 이현과 내가 접촉하며 어떤 오류가 일어났었던 것 같다.
어렴풋이 이 세계가 만들어진 세계라는 걸 알게 되었던 나는 미련 없이 휴가를 마치고 복귀했다. 하루빨리 전쟁을 끝내고 여기에 대해서 더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더 큰 일이 일어났다.
이현이 우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