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아셀과 체자레, 시종과 나란히 걷고 있는데 누군가가 우리 쪽을 향해 뛰어왔다. 아셀이 먼저 알아보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베일!”
“아셀, 왜 이렇게 늦었어?”
“그게, 이현이 잠들어서.”
“어쨌든 오늘 주인공은 너잖아.”
“나도 알아.”
“하아,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든가 했어야지.”
“지금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거야?”
“……아니,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취임사는 외웠어?”
“당연히 외웠지. 내가 뭐 못 외우는 거 봤어?”
“아니, 못 봤어. 내가 미안해. 빨리 가자.”
베일즈, 괜찮은 남자로 컸다만 여전히 아셀에게는 못 이기는구나. 아셀이 안 내킨다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저 먼저 갈게요. 이현도 되도록 빨리 와서 나 지켜봐야 돼요. 알았죠?”
“응, 그럴게. 바로 갈게.”
아셀이 자연스럽게 베일즈의 손을 잡고 달려 나갔다. 나를 스쳐 지나가는 둘의 모습이 낯설었다.
아셀은 코너를 돌기 전 확인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런 아셀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셀이 안심한 듯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아셀이 코너를 돌아 완전히 사라지자 어쩐지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그들이 보고 싶었다.
“마티어스랑 루드비히는 어딨어?”
내 질문에 체자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좀 이상하네요, 이현.”
“어? 응? 왜?”
“루드비히는 몇 년 동안 제국 일으키느라 고생한 것 때문에 이제 여기 안 오잖아요.”
“아, 그랬었나.”
루드비히의 모습도 보고 싶었는데, 아쉽네.
내가 아쉬워하자 체자레가 재미있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밖에서 매일 보면서도 또 보고 싶은 거예요?”
“아아니, 그냥…….”
“아, 마티어스 저기 오네요.”
나는 무의식적으로 체자레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마티어스와 압실론이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역광을 받아서인지 어쩐지 둘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운 듯한 느낌이 들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려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아.”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수면 위로 끌어 올려지듯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일어나고서도 한동안 현실과 꿈을 구분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곁에 진짜로 마티어스와 압실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를 향해 걸어오는 건 아니었고, 옆에 누워 있었다.
“뭐야……?”
나는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아셀을 비롯해 마티어스와 압실론, 체자레가 내 옆에서 자고 있었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았는지 침대와 침대 주변은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나는 무심코 마티어스의 붉은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들었다.
반대편에는 압실론이 내 손가락 하나를 쥔 채 잠들어 있었다. 아셀은 압실론의 옆에서 자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압실론이 내 옆에서 잠든 아셀을 옆으로 굴리고 자기가 내 옆자리를 차지한 것 같았다.
나이가 아깝다, 나이가.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압실론의 손가락을 가볍게 털어내 보았지만, 접착제라도 붙인 양 압실론의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
나는 가만히 압실론을 노려보았다. 자는 척을 하는 건지 정말로 자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몇 번 더 시도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나는 결국 압실론의 손을 뿌리치길 포기했다.
타닥, 타닥. 벽난로에서 장작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체자레는 마티어스의 옆이자 벽난로와 가장 가까운 쪽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벽난로의 열기를 고스란히 받고 있으면서도 체자레는 담요를 둘둘 덮고 있었다.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니 슬며시 웃음이 났다.
그럼 루드비히는 어디 있을까.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멀지 않은 곳에서 그를 발견했다.
루드비히는 침대와 세 걸음 정도 떨어진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앉은 채로 서류를 보다가 잠이 든 것 같았다. 그새 루드비히의 눈 밑이 거뭇해져 있었다. 최근 잠을 거의 자지 않는 모양이었다. 침대에 와서 자라고 할까, 아니면 저대로 둘까 고민하던 나는 루드비히의 뒤에 있는 창문에서 무언가가 내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 눈이다.”
나는 작게 탄성을 질렀다. 모든 것을 희게 덮어 줄 듯한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낮부터 하늘이 어두침침하더라니 눈이 오려고 그랬나 보다.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나는 한참이나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방 안에서는 장작 타는 소리와 작은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밤이 깊어져 방 안이 옅은 푸른 물감을 푼 것처럼 짙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그제야 이곳이 아셀의 방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자 의구심이 들었다.
얘네는 대체 왜 아셀 방에서 이러고 있는 걸까.
추리하기가 어렵진 않았다. 나를 찾으러 왔다가 자고 있는 걸 깨우기가 좀 그래 기다리던 와중에 같이 잠들어 버린 거겠지. 그러고 보니 예전에 이런 적이 종종 있었던 것도 같았다.
나는 시선으로 그들의 낯을 하나하나 쓸어 보았다.
여전히 서류를 쥐고 있는 루드비히, 내 손가락을 쥐고 있는 압실론, 나를 끌어안고 있는 마티어스, 이불을 덮고 불을 쬐고 있는 체자레, 대자로 뻗어 있는 아셀까지.
아주 오랫동안 이 풍경을 기억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때 아셀이 잠결에 작게 기침을 했다. 나는 이불을 끌어다 아셀에게 덮어 주었다. 조금 전 꿨던 꿈이 생각났다.
어른이 되어 나라의 중책을 맡게 된 아셀, 그런 아셀의 곁에 있던 베일즈, 이제 이 세계에 오지 않는 루드비히, 아름답게 나이 먹은 체자레, 내게 다가오던 압실론과 마티어스, 이제는 황제가 필요 없는 세상이 된 이 세계.
그건 그저 꿈이었을까, 아니면 미래를 엿본 걸까. 알 순 없지만, 그렇게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잠들어 있는 평화로운 풍경을 보고 있자니 다시금 졸음이 쏟아졌다. 나는 눈을 두어 번 끔뻑이다가 입을 쩍 벌려 하품하고 다시 누웠다. 안온한 공기가 나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어디선가 소록소록 눈 쌓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저녁이었다.
Chapter 4. 사실 너를 구원한 건
“이현, 오늘도 나갔다 온 거야?”
내 질문에 나의 세상이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질문을 던진 게 나라는 걸 알고선 이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직도 화가 안 풀렸나 보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실망도 하지 않았다. 이현의 화는 소중함에서 비롯된 것이고, 우리에겐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이현은 요즘 바쁘다. 조금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주고 싶다 선언한 뒤부터 인재를 육성하는 데 열심이다. 방법은 간단했다. 이현이 마을을 다니며 아이들을 만나 그들의 손을 잡고 대화를 나누어 주는 게 다였다. 하지만 효과는 좋은 편이었다. 이현과 가볍게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의 사고는 넓어진다. 사칙 연산을 겨우 하던 아이가 이차 방정식 정도는 쉽게 풀 수 있게 된달까.
사람들은 이 현상을 두고 ‘신의 축복’이라고 불렀다. 덕분에 이현은 요즘 이 세계에서 거의 신 취급을 받고 있었다.
이제는 그와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아이가 똑똑해진다는 소식을 들은 부모들이 자식들을 데리고 성 앞으로 모이고 있어 굳이 다른 마을에 발걸음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현은 굳이 굳이 작은 마을까지 방문했다. 드래곤 하트를 얻어 텔레포트가 자유로워졌기에 가능한 일정이었다. 조금 아쉽긴 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현은 내 도움을 받아야만 했을 텐데.
이현이 오지 산간을 다니며 아이들에게 축복을 내리는 가장 큰 이유가 그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유를 안아 드는 이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현! 오늘은 일찍 왔네요?”
“오늘 저녁 같이 먹기로 했잖아.”
이현의 말에 아이가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현은 기본적으로 다정했지만, 특히나 저 아이에게는 더 다정했다. 아이를 없애 버릴까 고민하다가 포기한 이유도 그거였다. 아이를 없애면 이현은 나를 다시는 보지 않을 테니까.
이현은 아이의 손을 잡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옆에는 마티어스도 함께였다.
마티어스는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이현과 함께 있었다. 쉬는 날이면 이현을 따라 마을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이현은 종종 나를 경계하듯 바라보았다. 내가 마티어스를 어떻게 하기라도 할 줄 아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이현이 귀여웠다. 나로서는 굳이 마티어스를 없앨 이유가 없었다. 마티어스는 체스 말로 치면 전진만이 가능한 나의 룩이었으니까.
나는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다시 이현의 모습을 좇았다. 이현은 아셀과 마티어스, 루드비히와 식사 중이었다. 큰 빵을 베어 물었는지 양 뺨이 볼주머니가 가득 찬 다람쥐처럼 부풀어 있었다.
귀여워.
“이현.”
나는 자연스레 이현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이현은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자연스레 나를 무시했다. 나는 그런 이현이 귀엽기도 하고 조금은 야속하기도 했다. 불쑥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이현에게 물었다.
“그거 알아, 이현?”
이현이 빵을 우물거리다 내 질문을 듣고 눈가를 찡그렸다. 또 무슨 개소리를 하려고 저러는 걸까, 생각하고 있을 때 나오는 표정이었다. 이현은 나를 무시한 채 샐러드를 씹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호기심에 진 표정이었다.
“뭐 말하는 거야.”
나는 그런 이현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나를 미워하면서도 호기심이 많은 이현. 그래서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현.
“우리 중 누군가가 너를 구원했어.”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이현을 밑에서 위로 올려다보았다.
“그게 누구인지, 이현은 궁금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