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공들이 미쳤는데 로그아웃이 안 된다니요-143화 (143/149)

#143

방 꼴을 본 아셀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게, 이현을 만나고 나니까 계속 고민하고 있었던 마도구 수식이 생각나서요.”

“마도구 수식?”

“네, 제가 있던 마을은 작아서 성인이 되면 다들 수도나 더 큰 마을로 떠났거든요. 그러다 보니 몬스터가 침입하면 남은 인원으로는 감당하기가 어려웠어요.”

“아, 그랬었지.”

그러니 사람이 사는 숲에 몬스터가 나타나도 토벌할 생각을 못 했던 거구나. 그러다 아셀이 죽을 뻔한 거고.

“그런데 이 마도구가 있으면 오크나 고블린 같은 몬스터들이 침입해도 끄떡없어요! 수식만 완벽하게 적용하면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고, 사용 기간도 길고, 제일 좋은 점은 마나석을 적게 먹는다는 거죠. 10회 공격에 손톱만 한 마나석 하나만 있으면 돼요! 유지 비용이 적으니 작은 소도시에서도 무리 없이 쓸 수 있어요.”

아셀이 흥분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눈을 반짝이며 상기된 뺨으로 설명을 이어 나가는 게 영락없는 꼬마 마법사였다.

“너 진짜 멋지다, 아셀.”

나는 진심으로 아셀에게 감탄했다. 내 칭찬에 아셀이 우쭐해하는 게 보여 귀여웠다.

“그리고 또 생각한 게 있는데요. 우리 마을은 해가 뜨거운 편이었잖아요.”

“응, 그랬었지.”

“가끔은 해가 너무 강해서 작물들이 다 말라 죽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그 햇빛을 모아서 밤에 쓸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은 거예요. 몬스터나 짐승들은 보통 빛을 싫어하니까……. 이현 생각은 어때요?”

태양열 발전을 말하는 건가. 이래서 아셀과의 대화는 재미있었다. 아셀이 그 가설을 실제로 이뤄 낼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더욱더.

“아셀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또 하고 싶은 건 없어?”

“많아요! 또 뭐가 있냐면…….”

아셀은 마치 처음으로 자신을 알아준 사람을 만난 것처럼 흥분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마을에는 또 저 같은 애들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형편 때문에 아카데미에 가지 못할 수도 있고, 지금 있는 학교들은…… 너무 천차만별이에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나라에서 학교를 만들고 모든 아이들을 모아서 똑같이 가르쳐 달라고 건의하고 싶어요. 수학이나 역사 말고 다른 걸 더 잘하는 애들도 있을 수 있으니까 여러 가지 과목을 가르치면 좋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아셀 말대로네.”

“으음, 그리고 중요한 건 애들이 학교에 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밥을 주면 어떨까 싶어요.”

“밥을 준다고?”

“네, 점심밥이요! 밥은 중요하니까요.”

아셀은 생각보다 정치적 감각이 있었다. 정치가 뭐 별 건가.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고 능력을 발휘하게 해 주는 게 정치였다.

“아셀.”

“그리고 또 무슨 생각을 했냐면…… 네?”

“높이 올라가고 싶어?”

“지금요? 저 높이 올라간다고 좋아하는 어린애 아닌데…….”

아셀의 말이 귀여워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비행기 태워 준다는 말로 잘못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아니, 그거 말고. 내가 말을 좀 더 쉽게 했어야 했는데, 미안. 그러니까 아셀,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사람 말이야.”

“할 수 있다면요.”

“그럼 넌 뭐든 될 수 있을 거야. 정말로.”

나는 아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셀의 눈동자가 총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요, 저는 마도구 제작자도 되고 싶거든요. 그럼 어쩌죠?”

“둘 다 하면 되지. 낮에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밤에는 마도구를 제작해도 되고. 하루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하루는 마도구 제작자가 되고.”

“이현은 정말 천재예요.”

아셀이 동경을 가득 담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천재는 너야, 아셀. 정말이야.”

“다른 사람들도 절 천재라고 하는데요, 이현이 그렇게 말해 주는 게 제일 기분 좋아요.”

아셀이 둘밖에 없는 방 안에서 손나팔을 만들어 내 귀에 속삭였다. 이런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나는 아셀을 안아 높이 들어 올렸다. 기분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아닌 척하는 모습이 귀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럼 우리 천재, 오늘 뭐 하고 놀까?”

“마도구 설계……?”

“그럼 나는 뭐 하고?”

“제 조수요!”

“……그래.”

아셀에겐 어쩐지 꼼짝할 수가 없었던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셀이 신이 나서 나를 침대로 이끌었다. 큰 침대 두 개를 이어 붙여 하나로 만든 아셀의 침대는 열 명은 누워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며 설계도를 조금씩 발전시켰다.

“이현이 옆에 있으니까 머리가 더 잘 돌아가는 것 같아요. 기분 탓인가?”

아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기분 탓이 아니라 진짜일 거야. 내가 옆에 있을수록 네 세계는 넓어질 테니까. 나는 대답하는 대신 시종이 가져와 준 꿀을 넣은 따뜻한 우유를 아셀에게 건네주었다.

“이것 좀 마시면서 해. 아침도 안 먹었지?”

“고마워요, 이현.”

나는 아셀이 우유를 마시는 사이 수식을 검토했다. 글씨체가 고르지 못해 개발새발 낙서를 하는 것 같은데 자세히 보면 수식이 맞아 신기했다.

“여기 수식 하나 틀렸다. 체크해 둘게.”

“으, 알았어요.”

아셀은 자신이 수식을 틀렸다는 사실이 못내 분한 듯 우유 수염을 묻히고 미간을 찌푸렸다. 우유를 마시다, 대화를 하다가, 설계를 짜다가 그렇게 설핏 잠이 들었던 것도 같다.

“이현, 일어나요!”

“음…….”

“이현!”

나는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아셀이 황당하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정말 아셀인가? 키가 좀 큰 것 같고, 얼굴도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꼭 어른처럼……. 얼핏 보면 다른 사람 같았지만, 눈매와 앙다문 입술은 영락없는 아셀이었다.

“아셀……이야? 너, 키 크는 약이라도 잘못 먹은 거야?”

“무슨 소리예요? 제가 아셀이 아니면 누구예요. 이현이야말로 뭐 잘못 먹은 거 아니에요?”

“아니,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꿀 넣은 우유에 뭐가 들어 있었던 건가? 혼란스러워하고 있는데 아셀이 내 손목을 잡고 침대에서 쭉 일으켰다. 몸이 단박에 위로 딸려 올라왔다. 힘도 세졌구나, 아셀.

“혹시나 해서 와 봤는데 진짜 와 보길 잘했지. 하마터면 놓칠 뻔했잖아요!”

“응? 뭘 놓쳐?”

아셀이 황당함을 넘어 살짝 열 받은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취임식이요! 오늘 제 취임식 날이잖아요. 일찍 온다고 했으면서 자정 넘어서야 오고! 준비한다고 하길래 알아서 잘하겠거니 했는데 옷 다 입고 졸고 있으면 어떡해요.”

“아, 미안. 미안. 내가 잘못했어.”

나는 영문도 모르고 아셀에게 싹싹 빌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냥 키 크는 약만 먹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뺨을 긁적이며 아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셀, 네가 지금 몇 살이더라?”

“그것도 몰라요? 그러니까 자주 좀 오라고 했잖아요. 스물하나예요.”

“아, 스물하나…….”

아셀을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열 살 때였으니까, 11년 정도 지난 건가? 스물한 살의 아셀은 이런 느낌이구나. 꿈을 꿀 때면 으레 그렇듯 조금 전 느꼈던 당황스러운 감정은 점차 사라지고 나는 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납득하게 됐다.

나는 천천히 아셀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아셀은 머리를 짧게 잘라 목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와 아주 잘 어울렸다. 하얀 정복 차림의 아셀을 보고 있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내가 키운 것도 아닌데 내가 키운 느낌이 든달까.

“아셀.”

“왜요.”

“너 오늘 정말 멋지다.”

내 말에 아셀이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말해도 화 안 풀 거예요.”

“미안해. 일이 바빠서 그랬어.”

“그래도 일 년에 한두 번 보는 건데, 게다가 오늘은 내 취임식인데……!”

서러움이 복받치는지 아셀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옆에 있던 사용인이 기겁하며 아셀의 눈가를 부채질했다.

“우시면 안 됩니다. 화장 고칠 시간이 없어요.”

“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어…….”

아셀은 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울음을 참기 위해 애썼다. 이런 모습은 좀 성장한 것 같기도 하고.

“정말 미안해, 아셀. 용서해 주라.”

이 정도면 이게 꿈이라고 해도 싹싹 빌어야 할 상황이었다. 내가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게 보였는지 아셀이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용서해 줄게요.”

“이제 가셔야 합니다.”

“……알았어. 같이 가요, 이현.”

“으응, 그럴게.”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셀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옷 다 입고 자니까 주름 잡혔잖아요. 머리도 망가지고.”

아셀이 손을 뻗어 내 옷과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항상 내가 했던 일을 아셀이 내게 해 주자 기분이 이상했다. 이건 단순히 꿈일까, 아니면 미래일까.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나는 앞에 있던 사람과 부딪칠 뻔했다. 가까스로 멈추어 서서 위를 올려다보자 낯선 듯 익숙한 이의 모습이 보였다.

“체자레……?”

“일어나 있었네요, 이현.”

나는 넋을 잃고 체자레를 보았다. 나이를 먹은 체자레는 더 근사해져 있었다. 중성적인 매력을 그대로 간직한 채 나이를 먹어, 얼굴만 봐도 미중년이라는 게 뭔지 알 수 있었다. 상대가 많을 것 같아 생겼던 본능적인 거부감이 사라지고 중후한 멋이 생겨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는 순수하게 체자레에게 감탄했다.

“체자레, 너 세월에 강한 타입이었구나.”

“하하, 고마워요.”

체자레는 처음에는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눈을 휘며 살포시 웃었다. 사람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은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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