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공들이 미쳤는데 로그아웃이 안 된다니요-142화 (142/149)

#142

“뭔데? 말해 줘.”

“나도 같은 거 걱정했다? 너랑 똑같이.”

내 말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마티어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꼭 큰 강아지 같아 귀여워 웃음이 났다.

“밖에 나가면 나보다 잘난 사람투성이거든. 그래서 걱정했어. 너희가 내가 별거 아닌 사람이라는 걸 알고 실망하면 어쩌나,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어쩌나…….”

심각은 AI가 주인만 따르고 사랑하도록 프로그래밍할 수도 있다 말했지만, 나는 따로 설정하지 않았다. 오프라인으로 나오는 순간 그들에게는 많은 제약이 생긴다. 더 옭아매고 싶지 않은 데다 그런 식으로 그들이 날 사랑하는 걸 원치 않았다. 가짜로 만들어진 애정이라니,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현.”

“응?”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나는 네가 잘나서 널 좋아하는 게 아니야.”

“어…….”

“사실 잘난 거로 치면 여기에도 너보다 잘난 애들 많아.”

마티어스가 진중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와, 정말 기쁘다…… 개새끼야.

“나는 그냥 네가 너라서 좋은 거야.”

“……응.”

“이 마음은 쉽게 안 바뀌어. 그러니 걱정하지 마.”

“그럼 너도 걱정할 필요 없어. 나도 너 잘나서 좋아하는 거 아니거든.”

“아…… 그래.”

“…….”

“……내가 혹시 기분 상하게 했어?”

마티어스가 뒤늦게 깨달은 듯 내 눈치를 봤다.

진짜 일찍 안다.

나는 목을 끌어당겨 마티어스를 가까이 오게 한 뒤 그의 뺨을 콱 깨물었다.

“아프잖아…….”

“아프라고 깨문 거야.”

나는 작게 잇자국이 남은 마티어스의 뺨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또 다른 거 물을 건 없고?”

“없어. 네가 어떤 대답을 하든 난 원래 널 따라갈 생각이었어.”

마티어스가 고민이 말끔히 해결된 표정으로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들어가자, 춥다.”

* * *

“황제 자리를 내놓으려고 한다.”

나는 아침으로 맛있게 먹던 흰 빵을 툭 떨어트렸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청천벽력이야.

나만 이 헛소리를 들은 건 아닌지 마티어스 역시 식사를 멈추고 루드비히를 망연히 보고 있었다.

“황제 자리를…… 내놓는다고?”

“그래. 오랜 시간 생각하고 결정했다.”

“아니, 아니, 아니. 잠깐만.”

나는 옆에 있던 사과주스를 단숨에 비우고 입가를 닦았다.

“못 돌아오는 거 아니야. 돌아올 수 있다니까? 출퇴근하듯 왔다 갔다 할 수도 있어.”

“지금 바로 양위하겠다는 건 아니야. 몇 년에 걸쳐 차근차근 진행할 예정이다.”

내 말을 잘못 알아들은 건가 싶어 부연 설명을 해 줬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데?”

루드비히의 목표는 황제가 되는 것이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우리는 그의 목표를 위해 함께 달렸다. 많은 피와 땀을 뿌렸고, 적지 않은 희생이 있었다. 목표를 달성했다 해서 쉽게 양위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내게는 자격이 없어.”

“…….”

확실히…… 그렇긴 하지. 황제 자리 내버리고 나 찾으러 돌아다녔으니까.

그의 폭군 노릇에 적지 않은 일조를 한 나는 얌전히 그의 말을 듣기로 했다.

“이렇게 해 왔는데도 제국이 이 정도로 유지가 됐던 이유는 제국민들이 맡은 자리에서 열심히 살았기 때문이겠지.”

“음, 그런 것도 있겠지.”

“나는 그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려고 한다.”

“뭐, 돌아가면서 황제라도 시키려고?”

“아니, 네가 말해 준 그 선거 제도가 난 꽤 좋아 보이더군. 아주 합리적이야. 한 명에게 권력을 계속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통령이라도 뽑을 생각인가. 이 제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바뀐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묘해졌다. 수십 년 뒤에는 황궁은 관광용으로만 남아 있고, 현대적인 청사 건물이 세워져 있을 수도 있겠네.

“물론 지금 바로 진행하기엔 어렵겠지. 전쟁도 종결해야 하고, 사후 처리도 몇 개월에서 몇 년은 걸릴 테니까. 그래서 차근차근 절차를 밟아 보려 한다.”

“절차라면 어떤 절차?”

“먼저 세나르도 제국을 그리체 제국에 복속시키려 한다. 체자레의 동의는 이미 받아 놓았으니, 그게 제일 쉬운 일이야. 이후 법도 개정하고, 행정이나 기술 개발 등 절대 왕권일 때 좀 더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을 처리해 놓아야겠지.”

“기간은 어느 정도로 잡고 있는데?”

“글쎄, 현재로서는 약 5년 정도일까.”

“5년? 너무 긴 거 아니야?”

루드비히의 성격에 한번 한다고 한 이상 목표한 바를 이루기 전에는 거기에만 몰두할 터였다. 그렇다면 바깥세상으로는 어쩌면 잘 나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응을 위한 초반을 제외하면 아주 오랫동안 이곳에 있을 수도 있겠다는 예감에 나는 어쩐지 조금 쓸쓸해졌다.

“노력한다면 조금 더 빨라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충분히 시간을 들여 괜찮은 제국을 물려주고 싶다.”

조금 더 괜찮은 제국을 만들겠다는 루드비히는 어쩐지 신에게 속죄하는 사람 같았다. 반란군의 등장과 헤일러의 죽음이 루드비히에게 영향을 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알았어. 응원할게. 나도 가끔 들어올 수도 있으니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내 말에 루드비히가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그래, 필요한 게 생기면 부탁하지.”

“그래도…… 너도 가끔 나오긴 할 거지?”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나는 하얗게 변한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공들의 외형 변화가 없게 해 달라고 심각에게 부탁했지만, 루드비히만은 달랐다. 나는 그의 눈동자가 두 개 다 아름다운 자색으로 빛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이제 마저 식사하도록 하지.”

루드비히가 전달할 말은 다 했다는 듯 상쾌한 표정으로 포크를 집었다. 마티어스는 루드비히의 충격 고백에 입맛이 떨어졌는지 굳은 표정으로 테이블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는 팔꿈치로 마티어스를 툭 치며 물었다.

“괜찮아?”

“응, 뭐……. 예상 못 해서 좀 당황하긴 했는데, 괜찮아.”

안 괜찮아 보이는데.

지금은 가만히 내버려두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많아져 자연스레 입맛이 떨어진 나는 좋아하던 감자양송이수프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아셀 만나러 가야지. 약속했거든. 같이 갈래?”

“아니, 오늘은 할 일이 있어. 잠깐 너 얼굴 보러 온 거야.”

마티어스가 내 머리 위에 큰 손을 툭 얹으며 말했다.

“아셀이 너 보면 좋아할 텐데. 아니, 지금은 아니려나. 일단 알았어.”

“나중에 갈 수 있으면 갈게. 근데 걔가 날 왜 좋아해?”

마티어스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아셀에게만 강렬하게 남아 있을 기억을 떠올리자 그녀가 좀 안타까워졌다. 지금쯤 시무룩해하고 있으려나.

“그런 게 있다……. 그럼 오늘도 수고해.”

“이따 점심 같이 먹자.”

“알았어. 시간 맞춰 내려갈게.”

나는 마티어스에게 손을 휘적이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눈이 오려나…….”

긴 복도를 빠져나오자마자 나를 맞이한 건 하얀 구름이었다.

“콜록…….”

겨울바람이 옷 속으로 들어오자 바로 기침이 났다. 아셀이 있는 곳은 좀 따뜻했으면 좋겠는데.

* * *

아셀이 머무는 궁에 들어선 뒤 나는 조금 난감해졌다.

“아셀이…… 어느 방에 있더라.”

복도도 그렇거니와 문의 모습이 다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헷갈렸다. 어제 온 길을 떠올려 봐도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시종이라도 지나가면 물어볼 텐데 오늘따라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꿀벌의 팔 자 춤처럼 복도를 한참이나 서성이고 있는데 어디선가 아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현……?”

“아셀!”

잠옷 차림의 아셀이 문 앞에 서서 졸린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거기서 뭐 해요?”

네가 어딨는지 몰라서 복도를 돌아다니고 있었어…….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기엔 좀 멋쩍어 나는 산책이라고 둘러댔다.

“그냥, 산책.”

“여기서요?”

아셀은 아직도 자기가 꿈을 꾸나 싶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개를 푸르르 흔든 아셀이 슬리퍼도 신지 않고 다가와 내 품에 고개를 푹 파묻었다.

“이거 꿈 아니죠.”

“응, 아니야.”

나는 아셀의 뺨을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셀의 이마가 따끈했다.

“어? 너 열이 좀 있는 것 같다?”

“가끔 그래요. 오후면 괜찮아져요.”

“아, 그래? 좀 쉬면 나아지려나…….”

“그래도 수업은 다 따라가요. 월반까지 했는걸요.”

아셀은 찔리는 사람처럼 퍼뜩 날 보며 말했다.

“그래, 열심히 하고 있는 거 알아. 무리하진 말고. 원래 가끔 땡땡이도 치고 그러는 거야, 어린이는.”

아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다가 이내 배시시 웃었다.

“이현은 이상해요……. 다들 나한테 큰 사람이 될 거라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그러는데.”

“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

국정도 내팽개치고 몇 년을 돌아다닌 어른들보다야 열심히 공부하는 어린이가 훨씬 낫지, 암.

“진심이야.”

애정 가득한 시선으로 나를 보던 아셀이 이내 재채기를 했다. 그러고 보니 얇은 잠옷 차림으로 있기엔 복도가 좀 서늘했다.

“들어가자. 뜨거운 코코아 좀 타 줄까?”

“저 이제 어린애 아니라서 괜찮아요.”

어제는 잘만 먹었으면서…….

“그럼 꿀 넣은 우유는 어때? 한 스푼만.”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요.”

새침하게 말하는 아셀을 보며 나는 속으로 쿡쿡거렸다. 아셀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나는 경악했다.

“이게 다 뭐야?”

침대 위에는 양피지와 펜, 잉크며 잡다한 종이들이 흩어져 있었다. 비단 침대 위뿐만 아니라 밑에까지 침범한 모양새가 일 년은 안 치우고 산 것 같았다. 놀라운 건 아셀이 이 방을 배정받은 건 바로 어제의 일이라는 거였다. 어제만 해도 깔끔했던 방이 왜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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