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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공들이 미쳤는데 로그아웃이 안 된다니요-141화 (141/149)

#141

“거기에 가면, 너흰 아무것도 아니야.”

너희들이 이 세계에서 노력해서 성취한 건, 내 세계에선 어떤 인정도 받지 못해.

“무수한 폭력과 차별을 받고도 반항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어. 크게 상처 입을 수도 있고.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나는 인간이 휴머노이드에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미디어를 통해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런 너희의 곁엔, 내가 있을게. 계속, 항상, 같이.”

하지만 그런 그들에게 기꺼이 손을 내미는 이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너희가 당하고 오면 내가 옆에서 같이 싸울게.”

나는 주먹을 꼭 쥔 채 말했다.

“아마 이기긴 힘들 거야. 나 밖에서 별거 아니거든. 그렇지만 싸움을 못 하는 개도 시끄럽게 짖을 줄은 알지.”

어깨를 으쓱이며 농담을 뱉자 체자레가 재밌다는 듯 입가에 진한 미소를 띠었다.

“누군가 너희들에게 돌을 던진다면, 나도 같이 맞을게.”

비가 오는 날에는 비를 함께 맞고, 바람이 부는 날에는 함께 바람을 맞자.

“내가 사람이라 좋은 점을 너희한테 쓸게.”

“이현…….”

압실론이 말을 잇지 못한 채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압실론의 눈동자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하지만 너는 별개지. 오늘의 선물이 아무리 기분 좋았다고 해도, 나는 압실론을 아마 오랫동안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평생. 압실론은 그날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들키지 말았어야 했거나,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겠지.

나는 싸늘한 시선으로 압실론을 바라보았다. 압실론이 그런 나를 내려다보다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 이건 짚고 넘어가야지.

“참고로 내가 이런 제안을 하는 건 너희를 용서해서가 아니야.”

나는 게임 속에 갇혀 있었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우리에겐 풀어야 할 감정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

그리고 그들이 내게 받았던 상처 역시 알고 있다.

“이건, 너희가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세계에서 날 위해 뭘 희생했는지 알아서야.”

나는 체자레의 창백한 뺨을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나는 너희가 소중하니까. 바깥세상 사람들 모두를 합친 것보다도 더.”

* * *

“나는, 이현 곁에 있을 거야.”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건 압실론이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금세 활력을 되찾은 그를 노려보았다. 너는 그렇겠지.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으니까. 내가 눈을 흘겨도 압실론은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공식을 발견한 과학자처럼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너에 대해선 신경 안 쓸 거야. 알아서 오든지 말든지 해.”

“응, 그럴게. 그렇게 할게.”

대놓고 면박을 주는데도 압실론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창백한 뺨에 홍조가 떠 있는 모습에서는 뭔가 잔뜩 흥분한 티가 났다.

“뭐가 그렇게 좋아?”

“그냥, 다 좋아.”

헤실거리는 압실론에게 나는 차갑게 말했다.

“난 너 싫어. 아무 일도 없었으니 망정이지. 아니, 없었어도 너 평생 용서 못 해.”

“괜찮아. 그것도 전부, 예상했어.”

“뭐?”

이게 낮술을 했나 싶어 미간을 찌푸리는데 압실론이 뺨을 붉히며 배시시 미소 지었다.

“오늘이 얼마나 기쁜 날인지, 이현은 모를 거야.”

그래,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나는 이미 대답을 했지만, 한 번 더 할게요. 나도 갈 거예요. 이현을 따라서.”

체자레가 예쁘게 웃으며 답했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다시 한번 들으니 안심이 됐다. 나는 정말로 체자레에게 고통 없는 일상을 선물하고 싶었다.

“어떤 일이 생길지 기대돼요.”

“좋은 일만 있진 않을 거야.”

“좋은 일도, 싫은 일도, 이현과 함께라면 괜찮을 거예요.”

체자레의 다정한 확신에 나는 어쩐지 정말로 그렇게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좋은 일도, 싫은 일도, 너와 함께라면 정말 괜찮을 것 같다고.

이제는 둘의 동의만 남아 있었다. 루드비히와 마티어스. 나는 루드비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주위를 둘러보던 루드비히가 이내 결심한 듯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줘.”

“다, 당연히 줘야지.”

나는 루드비히의 반응을 납득하면서도 순간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터전을 버리고 새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것도 루드비히는 황제인데, 고민하는 게 당연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오래 걸려도 괜찮아. 기다릴 테니까.”

진심이었다. 마지막은 마티어스였다. 따라와 줄 거라 생각은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나는 마티어스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의식한 듯 마티어스의 목울대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갈게. 당연히 갈 거야.”

“……응.”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뭔데? 얘기해.”

마티어스가 한참을 망설이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둘이 있을 때 물어볼게.”

“아, 알았어.”

뭐기에 그러지.

“그럼, 또 궁금한 거 있어? 다 말해 줄게.”

“한번 나가면 이곳으로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건가요?”

체자레가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야. 데이터 칩을 통해 자유롭게 이 세계와 저 세계의 이동이 가능하다고 알고 있어. 아, 그러니까 데이터 칩이란 기억을 모아 놓은 저장소 같은 건데…….”

나는 두서없이 바깥세상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넷은 참을성 있게 내가 하는 설명을 들어 주었다. 이어지는 질문은 다양했다. 나가서는 어떤 일을 하게 되는지, 그곳에도 왕이 있는지,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생활하는지 같은 기본적인 질문들부터 나조차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참신한 질문들도 있었다.

질문들이 마무리되고 한숨 돌리려던 차, 체자레가 손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을게요.”

“응, 뭔데?”

“이현은, 지금 바로 나갈 건가요?”

체자레의 질문에 모두가 숨을 죽인 채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나는 나가기로 결정한 사람들을 전부 보내고 마지막에 나갈 거야. 그래야 조금이라도 덜 불안할 테니까.”

맞지? 이 말을 듣고 싶었던 거.

내 말에 체자레가 안심이라는 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현. 고마워요.”

“별말씀을.”

나는 무심코 밖을 바라보았다. 새파란 달이 하늘 높이 떠 있었다. 슬슬 피로감이 몰려오고 있었다.

“밤이 깊었네요. 오늘은 이만할까요?”

“응, 그게 좋을 것 같아.”

애들한테 생각할 시간도 줘야 할 것 같고, 나도 이래저래 고민할 게 많았다. 우리는 응접실을 나와 복도에서 인사를 나누었다.

“잘 자.”

“좋은 꿈 꿔요.”

“잘 자, 이현.”

인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누군가가 나를 뒤따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마티어스가 뭐 마려운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마티어스? 이쪽 아니잖아?”

“너 데려다주려고.”

그것뿐만은 아닌 것 같은데……. 아까 나중에 물어보겠다던 질문이 하고 싶은 건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티어스를 바라보았다.

“정말 그것뿐이야?”

“……어?”

“뭐 할 말 있는 거 아니야?”

“……맞아. 있어, 할 말.”

“뭔데? 얘기해. 괜찮아.”

나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할까 싶어 조바심이 났다. 복도를 둘러보던 마티어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여기선 좀 그렇고…… 잠깐 밖에서 얘기할 수 있을까?”

“알았어. 그러자.”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러지. 나는 옆에서 나란히 걸으며 마티어스의 옆얼굴을 힐끔거렸지만, 도무지 무슨 얘기를 꺼낼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내 걸음에 맞추는 마티어스를 보며 아주 나쁜 이야기만은 아니겠지, 짐작할 뿐이었다.

“…….”

“…….”

대화 없이 걷다 보니 회랑까지는 금방이었다. 나는 회랑 끝에 위치한 작은 정원을 가리켰다.

“저기 가서 얘기할까?”

“그래, 그러자.”

회랑이라 그런지 사방이 뚫려 있어서 바람이 여기저기서 숭숭 들어왔다. 좀 춥다고 말하기도 전, 따뜻한 온기가 어깨 위에 얹어졌다. 마티어스가 겉옷을 벗어 나를 감싸 주고 있었다.

“너 춥지 않아?”

성장한 차림새였기에 오늘은 마티어스도 옷차림이 얇았다. 겉옷을 벗은 그가 셔츠에 베스트만 입고 있는 게 영 마음이 쓰였다.

“네 손보다 따뜻할걸.”

자, 만져 봐.

마티어스가 제 손을 내게 뻗었다. 나는 살그머니 마티어스의 손에 내 손을 대어 보았다. 자연스레 깍지를 끼는 마티어스의 손이 열기를 머금고 있었다.

“정말 따뜻하네…….”

“그렇다니까.”

마티어스는 이거로는 부족하다는 듯 겉옷을 걸친 나를 그대로 꽉 끌어안았다. 숨이 막혀 캑 소리를 내는 날 보며 마티어스가 쓰게 웃었다. 도대체 고민이 뭐길래 그러는 거지.

“할 말이 뭐야? 심각한 건가?”

“심각한 건 아니고……. 그냥 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뭔데?”

내 물음에도 마티어스는 좀처럼 답하지 못하고 뜸을 들였다. 재차 재촉하기 전, 마티어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밖에 나가서도 내가…… 너의 연인일까?”

질문을 듣자마자 나는 마티어스가 지금까지 망설였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구나. 나는 마티어스에게서 살짝 떨어져 나와 그의 뺨을 매만졌다. 마티어스의 낯이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당연하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마티어스가 긴 숨을 내뱉었다. 그의 입술을 타고 하얀 입김이 흘러나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그런 걸 걱정했구나?”

“……그래.”

“귀여워.”

나는 마티어스의 뒤통수를 매만졌다. 손에 가볍게 엉기는 서늘하고 차가운 머리카락의 촉감이 기분 좋았다. 나는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나도 비밀 하나 말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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