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어어? 어어어어?”
아셀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영웅이라며 극찬했던 사람을 대놓고 손가락질했다. 들어오자마자 손가락질당한 마티어스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아셀을 바라보았다.
“뭐야, 이 꼬마들은? 그리고 너흰 왜 이렇게 좁은 응접실에 옹기종기 모여 있어?”
“아늑하고 좋은데요, 뭐.”
체자레가 마티어스의 말을 느긋하게 받아치며 말했다. 마티어스가 다가와 내 어깨에 자연스레 손을 얹었다. 아셀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이 친구가 당신을 참 좋아하던데요.”
체자레가 마티어스를 바라보며 아셀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마티어스가 턱을 쓰다듬으며 아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끼어들기 직전 마티어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얘가 누군데? 처음 보는데.”
“…….”
그랬다. 마티어스는 기억할 필요가 없는 사람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난감한 시선으로 아셀을 돌아보았다. 당연히도 아셀은 엄청나게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체자레가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관전하고 있었다. 체자레도 마티어스의 성격을 알고 있으니, 일부러 저런 답을 유도한 게 분명했다. 아, 정말 악취미라니까.
“저, 저 갈래요.”
아셀이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충격도 충격이었겠지만, 자존심이 상했겠지. 시간도 많이 늦었겠다, 나는 아셀을 보내 주기로 했다.
“그래, 밤이 벌써 많이 늦었다. 내일도 아카데미 간다며, 일찍 자야지.”
금방이라도 응접실을 떠나 버릴 것 같았던 아셀이 돌아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는 한숨 섞인 미소를 지으며 아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잠깐 데려다주고 올게.”
“나도 같이…….”
오자마자 간다는 나를 보며 마티어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다시 돌아올 테니까 여기 있어. 내가 너희한테…… 할 말이 있거든.”
“……알았어.”
“금방 돌아올게.”
나는 아셀을 안아 들고 문을 향해 걸었다. 베일즈가 문을 열어 주었다. 아카데미에서 지정해 준 아셀과 베일즈의 보호자가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겨 있는 아셀을 보며 그녀의 보호자가 팔을 뻗었다.
“제가 안겠습니다.”
“……싫어요.”
아셀이 고개를 저으며 내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난감해하는 보호자를 향해 가볍게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제가 안을게요.”
“……나도 너 업어 줄 수 있어.”
옆에 있던 베일즈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고 한마디 꺼냈다.
“싫어. 이안이 더 좋아.”
아셀이 톡 쏘아붙인 뒤 다시 내게 기대었다. 감히 반격할 생각도 못 하고 베일즈가 고개를 푹 숙였다. 슬쩍 본 베일즈의 입술이 삐죽 나와 있었다. 아이고, 귀엽다 귀여워. 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나왔다.
밤이 늦어서 오늘은 아카데미 기숙사가 아니라 황궁에서 재우는 거로 합의를 보았다. 나는 아셀을 침실까지 데려다주었다.
잠옷으로 갈아입은 아셀이 졸음을 숨기지 못하고 비척비척 걸어와 내게 폭 안겼다. 그리고는 잠이 섞인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자고 일어나면 나 또 이안 볼 수 있는 거죠? 가 버리지 않을 거죠?”
아셀의 물음에 나는 잠시 침묵했다. 불안해진 아셀이 내 셔츠 자락을 붙잡았다.
“내가 말 너무 많이 해서 싫어졌어요? 이젠 안 그럴게요. 몇 시간이고 입 다물고 있을 수도 있어요…….”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아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내가 왜 널 싫어해.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내일도 볼 수 있는 거예요?”
“응. 내일도, 모레도 보자.”
먼 미래의 일은 모르지만, 적어도 내일 다시 보자는 약속은 지킬 수 있었다. 확답을 받은 아셀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나는 아셀의 시선을 맞춘 뒤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셀.”
“네, 이안.”
“내가 비밀 하나 알려 줄까?”
아셀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알려 주세요.”
“내 진짜 이름은 사실, 이현이야.”
왜인지 아셀에게는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아셀은 잠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이내 내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이안보다 그 이름이 훨씬 더 좋아요. 그리고 저는, 이현 지금 모습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아니, 좋아요.”
“그래? 기분 좋네. 고마워.”
내 말에 아셀이 배시시 미소 지었다.
“잘 자요, 이현.”
“아셀도.”
나는 아셀과 헤어진 뒤 걸음을 빨리했다. 회랑 기둥 사이에 비친 하얀 보름달이 어느새 제법 높아져 있었다. 그새 시간이 많이 지체된 모양이었다. 바빠 보였으니까 한두 명쯤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아…….”
입술 밖으로 하얀 숨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뛰듯이 걸음을 옮겼다. 이내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가 드러났다. 응접실 문 밖으로 주황색 조명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응접실에는 모든 주인공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얘 하나쯤은 없어도 진행시켜야겠다고 생각했던 압실론조차.
넷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멍하니 문가에 서서 그들을 하나씩 바라보았다. 입 안이 마르고, 손바닥에 차가운 땀이 고였다.
“다들, 기다렸네.”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이현이.”
체자레가 귀엽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하하, 그랬지…….”
나 왜 이렇게 잔뜩 긴장했냐. 나는 떨리는 몸을 가라앉히기 위해 크게 호흡했다.
“내가 왜 너희들보고 기다리라고 했냐면, 할 말이 있어서인데…….”
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그들을 하나씩 돌아보았다.
“할 말? 뭔데?”
넷은 완전히 몸을 틀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루드비히는 가만히 내게 집중하고 있었고, 마티어스는 애써 불안을 감추고 있었다. 체자레는 여전히 여유로워 보였고, 압실론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난, 너희가 싫어.”
“…….”
“…….”
“…….”
“…….”
응접실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기 시작했다. 루드비히가 미간을 찌푸리며 내가 말을 꺼낸 의도를 가늠하려 했다.
“할 말은…… 그게 끝인가?”
“아니, 오늘 할 말 엄청 많아. 그러니까 얌전히 들어.”
“그럴게요, 이현.”
내 명령에 체자레가 재밌다는 듯 미소 지으며 답했다.
“게임 캐릭터 주제에 나를 가두고, 억압하고, 목 조르고, 괴롭히고. 아주, 아주아주 마음에 안 들어.”
루드비히의 눈매가 차갑게 굳었다. 하지만 본론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런데 너희가…….”
어쩐지 분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던 나는 다시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가 이겼어.”
입 밖으로 내뱉자마자 마음이 탁 풀리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래, 너희가 이겼어.
“나는 너희를 평생 잊지 못할 거야.”
어떤 일이 있어도 변치 않을 부동의 진실. 나는 웃고 있으면서도 어쩐지 조금 울고 싶어졌다. 나는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너흰…… 내가 처음으로 싸운 상대고, 사귄 친구고, 평생…… 함께하고 싶은 이들이야.”
나를 곧게 응시하는 루드비히의 하얀 동공을 보자 가슴이 죄어들며 숨쉬기가 괴로웠다.
“너희를 보는 것도 가끔은 괴롭겠지만…… 보지 못한다면 더 괴롭겠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세계에서는 이제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고풍스러운 황궁. 따뜻한 0과 1의 공간. 이윽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게 여긴 아니야.”
나는 이번엔 루드비히의 옆에 앉은 마티어스에게 시선을 주었다. 마티어스가 잔뜩 긴장하고 있는 게 반대편 소파 뒤에 선 내게도 보였다.
“나는 여기선 못 살아.”
나는 신발 앞부분으로 카펫 끄트머리를 툭툭 쳤다. 얄팍한 카펫이 밀리며 주름져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이 세계는 나한테 흔들리는 배 같은 곳이야.”
그들과 함께 이곳에서 살아가는 상상을 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리로의 정체를 알게 된 뒤 그 생각은 점점 옅어졌다. 시스템과 진짜 감정을 계속 의심하며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왜 흔들리는지도 모르고 휩쓸리다 너희 품에 안기고 싶지 않아.”
나는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던 말을 하나씩 풀어 나갔다.
“이 세계엔 여전히 내게 향했던 폭력이 고여 있어. 여기에도, 저기에도.”
그들이 소중해지고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해도 그들이 내게 행한 폭력은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여기서 계속 있게 된다면 내 삶은 그저 고여 있을 뿐이야. 과거에 취하고, 과거에 괴로워하고. 그러니까…….”
너희가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면.
“너희가 와. 내 세계에.”
나는 숨을 들이쉰 뒤 다시금 말을 뱉어 냈다.
“보고, 느끼고, 결정해.”
처음부터 내가 이들에게 주고 싶은 건 기회였다.
“내 옆에 있을 건지, 지금의 삶을 택할 건지.”
긴말을 끝내기 무섭게 체자레가 입을 열었다.
“저는 이현 곁이면 어디든 상관없어요. 어디든 함께할래요.”
“지금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전에 미리 하나 말해 둘 게 있어.”
나는 힘든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처럼 작게 한숨을 쉰 뒤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