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지금? 방금 자리에 앉았잖아. 뭐라도 좀 먹고 가지.”
내 말에 마티어스가 내가 먹고 있던 밀빵을 제 입 안에 홀랑 집어넣은 뒤 내 손에 새 밀빵을 쥐여 주었다. 어이가 없어 마티어스를 올려다보자 그가 소년처럼 웃었다.
“요 며칠 농땡이를 피워서, 만회해야 돼. 금방 돌아올게.”
“아……. 알았어.”
농땡이라고 말했지만, 내 옆을 지키느라 그랬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원인을 제공한 나는 얌전히 수긍하며 마티어스에게 밀빵 하나를 건네주었다. 밀빵을 입으로 베어 문 마티어스가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루드비히의 뒤를 따랐다.
마티어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압실론이 슬그머니 내 옆자리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고는 꾸물꾸물 내 눈치를 보았다. 아니, 이걸 눈치를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냥 자기 좀 봐 달라고 조용히 떼쓰는 어린애나 다름없었다.
“이혀언…….”
식사를 마칠 때쯤, 압실론이 서글픈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모르는 척 디저트로 나온 케이크를 포크로 쿡 찍었다.
“나 준비한 거, 있는데…….”
압실론이 아양을 부리듯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압실론의 검은 머리카락이 내 팔꿈치를 간질였다. 나는 그가 뭘 준비했든 내 마음엔 들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그리고, 그 확신은 곧 깨졌다.
“데려와.”
“예.”
압실론의 말을 들은 시종장이 고개를 숙이더니 어딘가로 향했다. 그리고 시종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을 데려왔다. 못 본 척하려던 나는 이내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셀, 베일즈……?”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훌쩍 큰 모습의 두 녀석들이 쭈뼛거리며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그들의 앞에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어 그들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세상에……. 이렇게 컸다고?”
아셀도 아셀이지만 베일즈가 정말 많이 자라 있었다. 통통했던 젖살이 빠지고 호리호리해진 베일즈를 보자 감회가 새로웠다. 이제는 아이 티가 거의 나지 않았다. 소년과 청년의 중간선에 있는 베일즈를 보고 있자니 시간의 흐름이 새삼 실감되었다.
베일즈와 아셀은 뭐가 뭔지 몰라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의 모습과 지금의 내 모습은 다르니까. 베일즈는 내가 이안의 모습으로 살았을 때 가르쳤던 지주의 아들이었다. 뒤늦게 마법사로 발현해 아카데미에 들어간 건 알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둘은 이내 내가 ‘이안’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고도 여전히 어색해하는 베일즈와는 달리, 아셀은 파병 갔다 온 주인을 뒤늦게 알아본 강아지처럼 내게 와락 달려들었다.
“이안!”
프릴과 보석이 층층이 달린 드레스를 입고도 이렇게 높이 뛰어오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나는 얼떨결에 아셀을 안아 들었다. 드레스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걸 제외하고서라도 아셀은 꽤 묵직해져 있었다. 아이는 이렇게 빨리 자라는구나.
“이안, 이안, 이안……!”
아셀은 계속해서 내 이름을 부르며 내 뺨과 제 뺨을 비볐다. 아셀의 큰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괴어 있었다. 나는 아셀을 안은 뒤 등을 토닥였다.
“그래, 아셀. 오랜만이야.”
“으아앙, 이안…….”
내 말에 아셀은 아예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연회장에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하나둘씩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난감해하자 압실론이 내 귀에 속삭였다.
“응접실을 준비해 뒀어.”
“그럼 거기로 불렀으면 됐잖아.”
내가 압실론을 흘겨보며 쏘아붙이자 그의 눈망울이 축 처졌다.
“불러도 안 올 것 같아서…….”
정곡이었다. 나는 모르는 척 압실론의 말을 넘겼다. 압실론이 배시시 웃으며 내게 말했다.
“이쪽으로 와, 안내할게.”
나는 아셀을 안은 채 복도로 빠져나갔다.
걸음을 옮기는 도중 시선이 느껴져 옆을 돌아보았더니 베일즈가 신기하다는 듯 나를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베일즈는 수줍음을 잘 타는 소년이었지만 호기심도 많은 편이었다. 공부를 하다가도 가끔 나를 이런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다. 나는 베일즈의 호기심 어린 순한 눈망울을 꽤 좋아했다.
이런 건 전혀 달라지지 않았네.
나는 어느새 미소 짓고 있었다. 압실론은 치사하게도 정답을 맞혔다. 나는 이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응접실에 들어오고 나서도 아셀은 한동안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나는 시종에게 코코아를 부탁했다.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뜨거운 코코아 네 잔이 금방 테이블 위에 놓였다.
“이것 좀 마셔, 아셀. 진하게 탄 코코아야.”
내 권유에 아셀이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는 고개를 들었다. 아, 이래서 어린애들이란 번거롭다. 자꾸만 마음을 쓰게 만들어 버리니까.
나는 뺨에 붙은 아셀의 젖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었다.
“마, 마실 기분 아니에요.”
그러고는 놀란 듯 입을 틀어막은 뒤 내 눈치를 보았다.
“미안해요. 말 더듬어서…….”
아셀이 잔뜩 주눅이 들어 내 눈치를 보았다. 그 모습에 가슴이 저려 왔다. 넷을 연상하게 만드는 것조차 두렵고 무서웠던 시절, 압실론의 말 더듬는 버릇을 조금 가지고 있던 아셀에게 소리를 질렀던 적이 있었다. 그때의 일이 아셀에게 상처가 되었던 게 분명했다.
내가 상처 입었던 만큼, 나 역시 누군가에게 상처를 많이 줬을 수도 있겠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럼 마시지 말고 먹자. 여기 있는 마시멜로 하나만 먹어 봐.”
나는 티스푼으로 마시멜로 하나를 건져 아셀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나 아셀은 생각보다 완강하게 입을 열지 않고 버텼다. 강에서 잡아 올려 비린내 나는 물고기도 잘만 먹던 아셀이…… 화가 많이 났구나.
“이거 봐라, 슈우웅-.”
나는 스푼을 이리저리 허공에서 움직이다 다시 아셀의 입 앞에 착륙시켰다. 아셀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저 어린애 아니에요.”
“……그래. 미안.”
너무 정색해 당황하는 나를 보던 아셀이 못 이긴 척 코코아에 흠뻑 젖은 마시멜로를 먹어 주었다. 아셀의 눈이 번쩍 뜨이더니 이내 뺨에 화색이 돌았다. 마시멜로가 제법 맛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씩 웃으며 티스푼을 빙글빙글 돌렸다.
“마시멜로 하나 더 비행기 태워 줄까?”
“……혼자 마실 수 있어요.”
아셀은 새침하게 말하며 잔을 들어 올렸다. 마실 기분이 아니었던 거에서 많이 발전했구나. 뿌듯했다. 아셀이 잘 먹는 걸 보고 옆을 돌아보니 베일즈가 여전히 쭈뼛거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너도 마시멜로 비행기 태워 줄까?”
“아뇨, 괜찮아요. 제가 마실게요.”
베일즈는 코코아를 후후 분 뒤 호록 마셨다. 따뜻한 달콤함에 아이들을 둘러싸고 있던 낯선 긴장감이 한결 풀어진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비행기가 뭐예요?”
베일즈가 잔을 내려놓으며 선한 낯으로 내게 물었다. 그렇구나. 여긴 비행기가 없구나.
“글쎄, 잘 모르겠네. 예전부터 쓰던 관용어라 나도 모르게 나온 것 같아.”
볼을 긁적이자 베일즈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이내 원래의 크기로 돌아왔다.
“정말 이안이에요?”
그 말에 아셀조차 마시던 코코아 잔을 꼭 쥔 채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이안이야.”
“완전히 달라졌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나는 어떻게 하면 쉽고 빠르게 아이들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동화 전략을 택했다.
“사실은 저주에 걸려서 그 모습이 됐던 건데, 이젠 저주가 풀려서 이 모습으로 돌아온 거야.”
“그럼…….”
“응? 뭐라고 했어?”
아셀은 아주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혹시 키스로 저주가 풀린 거예요?”
“……풉!”
바로 치고 들어오는 아셀 덕분에 나는 머금었던 코코아를 그대로 뱉어 냈다. 코코아 몇 방울이 테이블 위에 스프레이처럼 흩뿌려졌다.
“누구랑요? 누구랑 키스한 거예요?”
“아니야. 키스로 풀리는 저주가 아니었어. 그냥 돌아온 거야.”
아셀이 왜인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네가 왜 다행이야?”
베일즈가 드물게 웃지 않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
“네가 왜 다행이냐고.”
“아니, 그냥……. 원하지 않는데 저주를 풀기 위해 키스해야 했으면 좀 슬플 테니까……. 그런데 왜 끼어들어? 나 이안이랑 얘기하고 있는데.”
“이안이랑은 내가 먼저 얘기하고 있었는데.”
“……이익.”
나는 내 앞에서 아웅다웅하고 있는 둘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나 좋아하는구나, 아셀. 그리고 베일즈도 아셀을 좀 좋아하는 것 같고. 내가 첫사랑인 건가. 귀여워라. 하지만 첫사랑은 원래 이루어지기 힘든 법이란다, 아셀아.
둘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너무 귀여워 언제까지라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두 시간 뒤 완전히 탈바꿈했다.
“그래서 제가 막 도망을 치고 있는데, 넘어졌거든요? 당연히 죽을 거라고 생각했었죠.”
“……아셀.”
“네!”
“너 지금 그 얘기 다섯 번째 하는 거 알고 있니?”
“네! 그런데 빼먹은 게 있어서 다시 한번 얘기해야 할 것 같아요. 이 뒤가 진짜거든요.”
“……그래.”
코코아를 두 잔이나 마시고 완전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아셀은 끊임없이 수다를 떨어 댔다.
위급한 상황에서 마티어스의 등장이 극적이었을 건 이해하지만, 사귀고 있는 사람에 대한 찬양을 계속 듣는 건 생각보다 괴로웠다. 게다가 중간에 체자레와 루드비히가 합류하는 바람에 했던 이야기를 세 번이나 더 들어야 했다. 베일즈에게 물어보니 자기는 매일 두 번씩 듣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생각보다 아셀에 대한 베일즈의 애정이 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는데, 거기에 붉은 머리를 한 신이 딱……!”
손을 펼치며 열연하고 있던 아셀이 그대로 굳었다. 나는 아셀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다소 지친 모습의 마티어스가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어디 갔나 해서 한참 찾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