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이제 부끄러워진 건 나였다. 나는 민망함에 시선을 돌린 채 그의 젖은 머리칼 끝만 만지작거렸다.
“……나도 알아.”
“네가 아는 거 나도 알아.”
그래도 말하고 싶어.
마티어스가 제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는 내 손을 잡아채 손끝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축축하고 말랑한 감촉이 전해져 몸이 찌릿했다. 손끝에서 피어오른 뭉근한 열기가 몸 전체로 서서히 번져 나갔다.
“하아…….”
손가락 끝을 아프지 않게 문 마티어스가 불이 붙은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 했던 약속 기억해?”
“무, 슨 약속?”
“다음엔 밝은 데서 하자는 약속.”
마티어스가 햇살이 들이치는 창을 바라보며 악동처럼 웃었다.
“지금, 꽤 밝은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잘 모르겠는데.”
“정말 모르겠어?”
내 가슴에 턱을 기댄 마티어스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조금만 고개를 들면 입술이 닿을 만한 거리였다. 나는 속절없이 두근거리는 마음을 들킬까 그를 흘겨보며 물었다.
“너…… 왜 이렇게 능글맞아졌어?”
내 작은 타박에 마티어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런 말, 하지 말까?”
아니, 한마디 했다고 또 그렇게 의기소침해할 것까지야…….
그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던 내가 당황해 할 말을 고르는 사이,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마티어스가 급히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싫으면 안 할게. 싫어할 줄 몰랐어.”
나는 마티어스의 셔츠를 쥔 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마티어스의 몸이 기우뚱 기울어지며 내게 넘어왔다. 기분 좋은 무게감에 아랫배에 묘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왜?”
“……조금, 밝은 것 같기도 하고.”
내 말에 마티어스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해보다 더 해 같은 미소였다. 그가 내 눈꺼풀과 뺨에 키스를 퍼부었다. 턱 끝을 스친 입술이 목으로 내려가는 것과 동시에 나는 눈을 감았다. 기나긴 열락의 시작이었다.
* * *
연회가 시작된 건 늦은 저녁이었다.
오후까지 사이좋게 붙어먹은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간절한 시종들의 노크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나는 정신이 들 새도 없이 목욕통 안에 집어넣어졌다. 목욕과 마사지를 마치고 시종이 커프스단추를 끼워 줄 때까지도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마티어스는 줄 끊어진 인형처럼 흐물거리는 나를 보며 의아해했다. 나는 잠들기 전보다 윤이 나고 반짝거리는 마티어스를 어이없는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봐?”
“네 체력이 좀 잘못 설정된 것 같아서…….”
피죽도 못 먹은 것처럼 비실거리는 나를 보며 마티어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도 그런 것 같아. 내가 다 했는데 왜 네가 더 힘들…….”
“우아악! 그만!”
나는 마티어스가 망발을 더 내뱉기 전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고개를 들자 눈치 빠른 시종들이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눈을 내리깔고 시선을 피해 주었다. 나는 달아오른 뺨을 손등으로 식히며 한숨을 내쉬었다.
“넌 준비가 왜 이렇게 늦어? 난 벌써 다 끝났는데.”
타박이 아니라 정말 궁금하다는 듯 마티어스가 물어 왔다.
“몰라. 시키는 대로 하고 있는데.”
마티어스가 내 칼라 사이에 달린 붉은 루비 브로치를 매만지며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이런 거 하나하나 달고 있으니까 그렇지. 안 무거워?”
“조금. 그래도 갑옷보단 안 무거워.”
“적당히 해. 안 그래도 피곤한 애한테 이런 거 저런 거 권하지 말고.”
“예.”
시종들이 마티어스에게 고개를 숙이며 손놀림을 빨리했다. 그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지 턱을 문지르던 마티어스가 옆에 놓여 있던 구두를 가져왔다.
“뭐 해?”
한쪽 무릎을 꿇은 마티어스를 보며 나는 당황해 몸을 뒤로 뺐다. 마티어스는 눈썹만 한 번 까딱일 뿐이었다.
“조금이라도 빨리하면 좋잖아. 애들 이미 기다리고 있는데. 발 이리 내.”
마티어스가 구두끈을 풀어 신기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내가 망설이다 조심스레 구두 안에 발을 집어넣자, 마티어스는 풀었던 끈을 다시 묶기 시작했다. 손길에 거침이 없었는데도 완벽한 리본 모양이 만들어졌다. 금세 양쪽 신발 끈을 묶은 마티어스가 셔츠 소매로 앞코를 닦아 윤이 나게 만들었다.
“너, 생각보다 시중이 능숙하…….”
말을 꺼내자마자 아차 싶었다. 마티어스에게 평민 시절이, 누군가를 모시던 시절이 있었던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극복한 듯해도 누구나 꺼리는 대화 주제는 있는 법이었는데. 내가 마티어스의 눈치를 보자 그가 일어나 씩 웃으며 내 머리를 넘겨 주었다.
“그때 배워 두길 잘했지. 넌 뭐든 잘하는 것처럼 보여도 좀 서투른 부분이 있으니까.”
나는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어리벙벙해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여러모로 마티어스에게 놀란 날이었다. 내가 말없이 그를 빤히 바라보자 마티어스가 민망한지 마른 입술을 핥았다.
“왜 그래?”
“아니야. 그냥…… 너도 많이 성장했구나 싶어서.”
“건방지긴.”
마티어스가 웃음을 터트리며 나를 안아 올렸다. 갑자기 시야가 높아져 발을 버둥거리는데 마티어스가 자세를 고쳐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뭐 해……! 내려 줘. 혼자 걸어갈 수 있어.”
“빨리 가려면 이 편이 나아. 연회장 앞에서 내려 줄게.”
그 말대로 마티어스는 나를 안고도 나보다 빨리 걸었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를 지나쳤다.
연회장 앞에 다다르자 마티어스는 나를 내려놓은 뒤 옷이 구겨진 곳은 없는지 세심하게 살폈다. 집요하게 훑는 시선에 뺨에 열기가 몰렸다.
“왜 그렇게 봐. 뭐 묻기라도 했어?”
내가 뺨을 문지르자 마티어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예뻐서.”
“너 왜 자꾸 그런 말 해…….”
“그런 말이라니, 무슨 말?”
“좀…… 낯간지러운 말들?”
“……이런 말 하면 싫어?”
“아니, 좀 낯설어서 그렇지. 너 원래 이런 말 잘 안 하잖아.”
내 말을 들은 마티어스가 멋쩍게 웃었다.
“계속 하고 싶었던 말들이야. 참았던 거지.”
“……전혀 몰랐어.”
“다행이네. 너는 몰랐으면 했거든.”
“……언제부터 하고 싶었는데?”
“글쎄…… 언제부터였더라. 지금은 기억 안 나. 나중에 생각나면 말해 줄게.”
“알았어.”
“얼른 들어가자. 늦었다.”
우리는 연회장으로 가는 걸음에 속도를 높였다.
“맛있는 냄새 난다.”
“그러게.”
연회장 안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풍기는 맛있는 냄새에 나는 코를 킁킁거렸다.
“와, 잘해 놨네.”
나는 연회장에 들어가자마자 감탄을 터트렸다. 준비 기간도 짧았을 텐데 연회장은 제법 그럴싸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천장에는 승리를 알리는 깃발 수십 장이 나부끼고 있었고, 50명은 앉을 수 있는 테이블 위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우리가 너무 늦었는지 연회는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시종들은 바삐 발을 놀리며 음식과 술을 날랐다. 묵직한 접시가 버거울 만도 한데 시종들은 연신 싱글벙글했다. 드래곤을 토벌한 게 기쁜 모양이었다.
“이리 와.”
마티어스가 나를 상석으로 안내했다. 루드비히와 압실론, 체자레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루드비히와 체자레 사이에 우리의 자리가 비워져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체자레가 묘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잠은 잘 잤어요?”
무슨 뜻으로 물어보는 걸까.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늦어서 미안.”
“보고 싶었어요. 깨어났다는 말 듣고 보러 가고 싶었는데, 참았어요.”
체자레가 ‘나 잘했죠?’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낯을 본 체자레가 웃음을 터트리며 음식을 담은 접시를 밀어 주었다.
“먹어 봐요. 이현이 좋아하는 음식들로 준비했어요.”
체자레의 말대로 접시 안에는 내 취향의 음식들이 채워져 있었다. 따끈따끈한 옥수수수프, 데운 야채와 버섯꼬치, 하얀 밀빵과 달콤한 디저트들. 나는 밀빵을 덥석 집어 든 뒤 그것을 결대로 쭉 찢었다. 새하얀 속살에서 뜨끈한 김이 피어올랐다.
“고마워.”
“별말씀을요.”
나는 빵을 우물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루드비히는 연회 도중에도 중간중간 사람들이 찾아오는 바람에 연회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 미뤄 놓은 업무를 처리하느라 고생이 많다고 듣기는 했지만, 연회장에 와서도 포크가 아니라 만년필을 들고 있는 루드비히의 모습을 본 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좀 이따 뭐라도 갖다줘야겠네.
루드비히 옆에는 압실론이 앉아 있었는데, 그는 내가 바라보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듯 눈길을 주자마자 압실론의 얼굴이 확 폈다.
“안녕, 이현.”
나는 그의 인사를 받아 주고 싶지 않아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마티어스에게 듣기로는 압실론은 말은 그렇게 해도 토벌 당시 내게 보호막을 둘러 주었다고 했다. 정신이 없어서 내가 보지 못했던 것뿐이었다고. 내가 “모두한테? 아니면 나한테만?”이라며 뾰족하게 묻자 마티어스는 “그건 잘 모르겠네…….”라며 말끝을 흐렸다.
아마 나만 보호했겠지. 그들이 소중한 만큼 압실론을 용서하기 어려웠다.
마티어스는 죽을 뻔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담담했다. 기대가 없으니 실망할 일도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체자레나 루드비히도 비슷한 심정이라나. 어지간히 막장으로 살긴 했구나, 압실론.
루드비히는 결국 서류를 결재하러 자리를 떴다. 안타깝게 바라보는데 옆에 있던 마티어스까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잠깐 다녀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