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GM: 네 명이라면, 혹시 제가 아는 그 넷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나: 맞아요. 그 넷이요. 참, 외형 변화는 없었으면 좋겠어요.]
[GM: 분양뿐 아니라 유지 보수에도 천문학적인 돈이 드는 거 아시죠? 정말 괜찮겠습니까? 후회하실지도 몰라요.]
[나: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나아요. 그러니까 해 주세요.]
[GM: 일단, 알겠습니다. 제작에는 시간이 걸리니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시면 언제든지 얘기해 주세요.]
[나: 알겠습니다.]
알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마음이 바뀔 일은 없을 거라 확신했다. 후회할 수도 있었다. 괜히 그때 그런 선택을 했다고 과거의 나를 원망하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때의 일이었다. 나는 지금이 소중했다. 지금의 그들이 소중했다. 그랬다.
눈꺼풀 안으로 빛이 차츰차츰 들어오기 시작했다. 꿈이 마지막을 보여 주고 있다는 신호였다. 나는 힘을 풀고 흐름에 몸을 맡겼다. 의식이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익숙한 천장. 황궁의 방 안이었다.
나는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티어스가 침대 옆에 스툴을 가져다 놓고 잠들어 있었다. 나는 마티어스의 빨간 뒤통수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몸이 상쾌한 걸 보니 누군가 씻겨 준 모양이었다.
“마티어스, 일어나. 옆에서 편하게 자.”
나는 마티어스를 가만히 흔들어 보았지만, 며칠 밤을 꼬박 새다 잠들었는지 영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낑낑거리며 마티어스를 안아 침대 위에 안착시켰다.
“어휴, 묵직하다, 묵직해.”
이불을 끌어당겨 마티어스에게 덮어 주자 그제야 안심이 됐다. 창밖으로 들어온 햇살이 이불을 덮은 마티어스의 뺨을 선명하게 간질이고 있었다. 놀랍도록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
잠시 정신을 놓고 있었던 나는 멀리서 들려오는 시계탑의 종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맞다, 확인해 봐야지.”
마티어스를 깨우고 싶지 않았던 나는 작게 상태 창, 이라고 읊조렸다. 이윽고 내 눈앞에 반투명한 내 상태 창이 떴다.
[이름: 이현 (Lv. 221)
나이: 27
직업: 무직
체력: 79%
마력: 87%
클래스: 10클래스 마스터
.
.
.
상태: 휴식 중입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드래곤 하트가 내게 스며들던 순간, 클래스가 올랐다는 시스템 창은 확인했지만 상태 창을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압실론에게는 6클래스라고 거짓말했지만, 사실 나는 1년간 피나는 노력 끝에 8클래스까지 올려놓았었다. 그래서 ‘끝없는 보호’라는 8클래스 스킬도 쓸 수 있었던 거고. 정말 죽을 만큼 노력해서 올린 클래스였는데, 단번에 2클래스가 올라 있는 걸 보자니 조금 허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내가 10클래스라는 건,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해졌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로그아웃 역시 가능하겠지.
나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조심스레 시스템 창을 켰다. 반투명한 시스템 창 안의 로그아웃 버튼이 살아 있었다.
[정말 로그아웃하시겠습니까?]
[예] [아니오]
나는 마티어스가 잠든 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예’ 버튼을 눌렀다. 귀에서 윙윙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게임을 저장합니다…….]
[종료까지 1분 남았습니다.]
시스템 창을 보는 순간 긴장의 끈이 훅 풀렸다. 침대 위로 몸이 흐물흐물 늘어져 내렸다.
“하아…….”
정말이구나. 나 이제 정말 로그아웃 할 수 있게 됐구나.
감은 눈매 끝에 눈물이 스멀스멀 맺혔다. 나는 뜨겁게 달아오른 눈매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심각이 말하기를 던전 안에 들어갔을 무렵에 내 신체와 데이터 칩이 무사히 연결되었다고 했다. 그러니 조금만 지나면 나는 정말로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망설임 없이 카운트다운 옆에 있는 ‘취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마티어스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
얼떨결에 내게 안긴 마티어스가 반쯤 잠든 상태로 나를 토닥였다. 나는 마티어스의 뺨에 키스하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일어나, 마티어스.”
“으음…….”
“언제까지 자려고, 이 잠꾸러기야.”
나는 마티어스의 뺨을 잡고 쭉 늘렸다. 마티어스가 잠결에 인상을 썼다. 그 모습이 귀여워 나는 그의 미간에 가볍게 입을 두어 번 맞추었다. 근사하게 올라온 콧대 위에 키스를 퍼부으며 내려가자 어느새 거뭇하게 자란 수염이 입술에 닿았다. 까슬까슬한 수염 밑에 자리 잡은 입술은 말랑하고 부드러웠다.
윗입술에 비해 통통한 아랫입술을 가볍게 빨자 마티어스가 잠결에도 어리둥절한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귀여워 웃으려고 입을 떼기 직전 마티어스가 내 뒤통수를 쥔 채 강하게 입을 맞춰 왔다. 마티어스의 코끝이 내 광대와 뺨을 짓눌렀다. 길게 찢어진 눈매가 가늘게 떠지며 몽롱했던 눈동자가 점차 선명해졌다. 날카로운 시선 끝에 내가 담겨 있다는 사실에 심장이 저려 왔다.
“언제 일어났어. 몸은 괜찮아? 장난치는 거 보니까 괜찮은 것 같긴 한데.”
마티어스가 누워 있는 내 손바닥을 덮고 깍지를 낀 채 물었다. 그의 뜨거운 체온이 차츰차츰 내게 옮아 오고 있었다.
“얼마 안 됐어. 10분쯤? 그런데 나 얼마나 잔 거야?”
“사흘을 꼬박 잤어. 오늘까지 안 일어나면 강제로 깨우려고 했는데.”
어떤 방법을 썼으려나, 고민하던 나는 자꾸만 야한 생각이 들어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어쩐지 상쾌하더라.”
나는 누운 채로 바르작거리며 마티어스에게 벗어나 하품을 하며 팔다리를 쭉 늘렸다. 잠들어 있던 근육이 깨어나는 듯한 감각이 좋았다. 입맛을 다시던 나는 불현듯 마티어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아픈 데 없지? 아까 깨워도 못 일어나던데.”
“없어. 난 건강해.”
역시 건강 하나는 타고난 녀석이라니까. 부럽다, 부러워.
“다른 애들은? 압실론은 얘기할 필요 없고, 루드비히랑 체자레만.”
“다른 애들도 괜찮아. 지금 불러 올까?”
“아니, 괜찮아. 지금 몇 시지?”
“아침. 새벽녘에 잠깐 잠들었으니까.”
“설마 사흘을 꼬박 샌 건 아니지?”
내 물음에 마티어스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안 돼?”
“아니, 뭐. 안 되는 건 아닌데…… 너 피곤하잖아.”
“내가 피곤할 게 뭐가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마티어스의 낯은 정말이지 말끔했다.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었다.
“누가 보면 넌 토벌을 안 한 줄 알겠다.”
그 긴 토벌을 거치고 돌아와서 한숨도 안 잤다니. 정말이지 대단한 체력이었다. 나는 마티어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새벽에 씻고 왔는지 살짝 젖은 머리칼이 손가락에 부드럽게 엉겼다.
“면도도 안 했으면서 목욕은 하고 왔어?”
“아, 미안. 면도도 하고 올게.”
다급히 몸을 일으키는 마티어스의 셔츠를 잡고 다시 내리눌렀다. 마티어스의 몸이 내 위로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가지 마. 이제 좀 붙어 있을 수 있게 됐는데.”
“……그, 럴까.”
마티어스가 드물게 말을 더듬으며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이런 귀여운 짓도 할 수 있었네.
“뭐 해?”
“뭐가. 아무것도 안 해.”
“고개 들어 봐.”
“……싫어.”
“들어 봐.”
나는 마티어스의 턱을 잡고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티어스의 얼굴이 오븐에 구운 사과처럼 흐물흐물하게 붉어져 있었다.
“너 얼굴 빨개졌어, 마티어스.”
“……나도 알아.”
“그리고 엄청 뜨거워.”
“……그것도 알아. 네 손이 시원하게 느껴지니까.”
“부끄러워?”
“아니, 그냥. 이 현실이 믿기지 않아서…….”
마티어스가 다시금 내 앙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마티어스의 손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뭐가 믿기지 않는다는 거야.”
“나는 네가, 그때 그대로 떠나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
“아…….”
“그런데 일어나니까 네가 내 옆에 있고, 내 입을 맞추고 있고…… 귀엽게 굴잖아. 그게 나를 좀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너 좋아하는 거 맞는데.”
“어, 알지. 아는데, 그냥 믿기지가 않아서 그래.”
나는 마티어스를 끌어안은 채 그를 토닥였다. 그가 내 가슴 위에 턱을 괸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시종일관 날카로웠던 그의 눈매가 오늘따라 축 늘어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의 위로 치켜 올라간 눈썹을 엄지로 문지르며 웃었다.
“좋아해, 마티어스.”
“…….”
“…….”
“…….”
“마티어스?”
나는 그의 눈앞에서 휘휘 손을 내저었다. 그는 이 방 안에서 혼자 시간이 멈춘 사람처럼 몸을 굳히고 있었다. 마티어스의 얼굴이 점차 사색이 되어 갔다. 왜 이러나 싶었는데, 숨을 안 쉬어서 그런 듯했다.
“마티어스, 숨 쉬어. 숨!”
나는 다급하게 마티어스를 잡고 흔들었다. 그제야 마티어스가 참아 왔던 숨을 내뱉었다. 나는 가만히 마티어스의 심장에 손을 얹어 보았다. 그의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고 있었다.
“그런 말 두 번 다시 하지 마.”
“왜?”
“심장 진짜 터질 것 같으니까.”
나는 킥킥 웃으며 그를 토닥였다.
“알았어. 드래곤 토벌하러 가서도 잘 살아 돌아왔는데 그럼 안 되지.”
내 긍정에 마티어스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알 것 같다는 시선으로 마티어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그래도 한 번 더 말해 줘.”
“심장 터지면 어떡해.”
“괜찮아. 그래도 해 줘.”
“싫은데.”
놀리듯 말하자 마티어스가 내 뺨을 감싸며 이마에 뜨거운 입술을 눌렀다. 입술의 온도에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그럼 내가 할게.”
“뭘?”
“널 좋아해.”
마티어스의 진지한 표정에 엉겁결에 함께 진지해진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널 사랑해, 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