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네, 맞아요. 이현도 알고 있어요?”
“으응, 그럼. 알지.”
그 사람은 높은 확률로 간자가 맞았다. 그것도 황제 측에서 심은 간자. 어떻게 알았냐면…… 공략 영상에서 봤다.
<소년들은 어른이 된다>는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인과가 바뀌고 결정되기 때문에 중간부터는 미래가 조금씩 달라진다. 이 사람이 플레이했을 때는 간자여도, 저 사람이 플레이할 때는 세상에 다시 없을 충신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초반이었고, 그 남자는 99.99%의 확률로 간자가 맞았다.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이 그 사람이 간자라는 걸 밝히고 루드비히의 신임과 호감도를 얻어 내는 루트를 탔지만, 나는 다른 방향을 택했다. 체자레가 간자라는 걸 밝혀 루드비히의 신임을 얻어 내는 게 추후 넷을 공략하기에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현은 어떻게 생각해요?”
“응? 뭐가?”
“그 사람이 간자라고 생각해요?”
응, 간자 맞아. 나는 미묘한 웃음을 띠며 속으로 생각했다.
“별일이네. 나한테 그런 걸 다 물어보고.”
이 말은 진심이었다. 체자레는 남의 의견을 듣고 조율하는 것에 능했지만, 남의 의견을 먼저 구하는 편은 아니었다. 내 말에 체자레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가 이내 미간을 좁혔다.
“……그렇네요. 확실히 이런 건 물어본 적이 없었죠.”
“그러게. 너 오늘 좀 이상하다.”
잠이 덜 깼나. 아닌데, 아까 들어갔을 때 열심히 운동하고 있던데.
“다들 아닐 거라고 하더군요. 일 처리도 깔끔하고, 루드비히의 목숨도 구해 준 적도 있죠. 하지만, 저는 어쩐지 계속…….”
“마음에 걸리는구나?”
“네, 맞아요.”
나는 체자레에게 힌트를 줄까, 아니면 확신을 줄까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나는 너를 믿어.”
“이현이…… 나를요?”
“응. 너를.”
“영광이네요.”
“그러니까 너도 내가 믿는 너를 한번 믿어 봐.”
“제가 그러다가 만약…… 틀리면요?”
“그럼 다음에는 안 틀리도록 더 열심히 해야지, 뭐.”
그러고 보니 이때의 체자레는 어른스러워 보였어도 고작 20대 초반이었다. 그때는 항상 느긋하게만 느껴졌는데, 꿈으로 다시 보니 아직 서투르고 어설픈 면이 있었다.
체자레가 말없이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현의 그런 여유로운 면이 재밌어요. 꼭 여분의 삶이 있는 것 같달까.”
실제로도 그러했기에 뜨끔해진 나는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취했다고 아무 말이나 뱉지 말고 말조심해야지.
“그래? 너도 그렇지 않나.”
“지금은…… 흉내 내는 거에 가깝죠. 언젠가 진짜가 될 수 있도록.”
“잘 됐으면 좋겠네.”
“그러게요. 그런데…… 이현.”
“응?”
체자레가 내 앞에 앉아 우아하게 다리를 꼬며 눈을 휘었다.
“이현은 어떤 사람이 취향이에요?”
“음, 글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럼 지금부터 생각해 봐요. 이현은 취하면 좀 솔직해지는 것 같더라고요. 궁금해서 듣고 싶어졌어요.”
뜬금없는 질문에 의아해하면서도 뜬금없는 질문을 받는 게 익숙했던 나는 내 취향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골똘히 생각하던 나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걸 이야기했다.
“나만 바라봐 주는 사람.”
“……아.”
“난 생각보다 질투가 많거든. 내 사람을 남과 공유하는 건 딱 질색이야. 친구도 얼마 없거나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재밌어서 나랑 노는 걸 제일 좋아하면 좋겠어.”
“그리고요?”
“그리고? 또 뭐가 있지. 음, 과거가 복잡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아직 아무도 사귄 적 없는데, 상대는 많이 만나 봐서 날 대할 때 시종일관 여유로우면 좀 열 받을 것 같거든. 나만 전전긍긍하면 짜증 나잖아.”
술을 마셔서인지 나는 꽤 솔직한 대답을 내놓았다. 체자레를 공략하려면 다르게 말하는 게 나았을 텐데, 그때의 나는 그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너는?”
“네?”
“너는. 네 취향은 뭔데. 아니, 알겠다.”
“이현이 내 취향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알지, 왜 몰라. 처음 보는 사람이잖아.”
진심이긴 했지만 웃으라고 한 얘기였는데 내 말을 들은 체자레는 쓴웃음을 지었다. 멋쩍어진 나는 뒷덜미를 긁적였다. 이게 아닌가.
“이젠, 아닐 것 같은데요.”
“이젠 아닐 것 같은 건 또 뭐야?”
오늘 함께 운동한 사람한테 반하기라도 한 건가.
“저는…… 재밌는 사람이요.”
“그래? 의외네. 또?”
“재미있고, 귀엽고, 궁금해지는 사람이요. 셋 다 가진 사람이라면, 저는 계속 그 사람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웬만하면 그게 나였으면 좋겠다. 그래서 방송 켰을 때 고백 한 번만 해 주라.
“이미 만났을지도 모르죠.”
체자레가 손에 깍지를 낀 채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그런 체자레를 보다가 입을 쩍 벌려 하품을 했다.
“으, 나 이제 가 봐야겠다. 너무 졸려. 오늘은 좀 일찍 자야겠어.”
“여기서 잘래요?”
“싫어. 내 방이 편해.”
“아아, 그럼 가 봐야죠. 물건 전해 줘서 고마워요, 이현.”
체자레가 병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나는 대답 대신 씩 웃어 보인 뒤 돌아섰다.
“이현.”
떠나려는 나를 체자레가 다시 불러세웠다.
“엉?”
“만약에…… 이현의 연애 경험이 많아진다면 그때는 좀 달라질 수도 있을까요?”
“뭐가?”
“이현의 연애 기준이요.”
“아, 글쎄……. 그럼 그때는 나도 같이 여유로울 테니까 괜찮지 않을까?”
나는 볼을 긁적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눈을 의심했다. 체자레는 어두운 천막 안이 순간 낮의 숲처럼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비볐다. 이 정도로 잘생기니 웃는 것만으로도 후광이 비치기도 하는구나.
“대답해 줘서 고마워요. 어서 가 봐요.”
“응, 잘 자.”
“이현도요.”
천막을 나오자마자 시계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시침이 초침처럼 빠르게 돌아가는 시간 속에 나는 어지러워 비틀거렸다.
“……혹시 아파요?”
나에게 물은 건가 싶어 나는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익숙하지만 이제는 다신 볼 일 없을 내가 보였다. 이안이던 시절의 내가 체자레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잠깐이에요. 곧 지나가요.”
체자레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약을 꺼낸 체자레가 물도 없이 약을 입 안에 털어넣고 나무에 기대었다.
“약이 써서 그래요. 잠시만…….”
체자레가 인상을 찌푸리며 크게 숨을 쉬었다 내뱉었다.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내 손이 허공을 휘돌았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어요?”
“손, 잡아 줄래요?”
나는 체자레가 내민 손을 받아 든 뒤 기도하듯 깍지를 꼈다.
“누구한테 기도해요? 우리 종교 탄압해서 아마 신은 우리 편이 아닐 텐데……. 아, 이현 세계의 신한테?”
“원래 세계에서도 나는 아무도 안 믿었어요. 그냥 바라는 거예요. 체자레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나도 바라야겠네요. 앞으로는 이현 앞에서만 아프게 해 달라고.”
쓴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이미 한번 들어 본 말인데도 또다시 아파하며 말하는 체자레를 마주하니 다시 한번 가슴속에 금이 가는 것 같았다.
“내가 전에 이현이 작은 신 같다고 했던 거 기억나요?”
“작은 신……?”
“여전히 그래요. 나는 계속 당신이 궁금하고, 당신은 여전히 귀엽고, 나의 작은 신 같아서……. 그런 당신이 바라고 기도하는 게 나의 건강하고 온전한 삶이라는 사실이, 누군가가 나를 아프지 않게 해 주는 것보다 흡족해요.”
“…….”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마음을 굳혔다. 이윽고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려 체자레와 눈을 맞추고 그에게 물었다.
“체자레,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네, 얼마든지요.”
“제국의 황제가 됐잖아요. 지금의 생활이…… 마음에 들어요?”
“황제가 된 것과는 별개로, 이현이 제 옆에 있어서 마음에 들어요.”
“내 옆이라면 어디든 좋아요?”
체자레가 대답하는 대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나는 조금 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러면…… 안 아플 수도 있고, 내 옆에서 새로운 세상을 볼 수도 있다면, 나랑 같이 밖으로…….”
“갈게요.”
“아, 아니……. 지금은 좋은 것만 얘기한 거고, 단점도 많아요.”
“괜찮아요. 나 이미 이현 없이 살아 봤잖아요. 재미없더라고요, 사는 게.”
체자레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함께하고 싶어요. 이현과.”
나는 망설임 끝에 그 손을 맞잡았다.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도록…… 내가 노력할게요.”
체자레와 헤어진 뒤 나는 심각에게 메신저로 말을 걸었다. 실시간인지 다행히 금방 연락이 왔다. 나는 안부를 묻는 심각의 말을 가볍게 넘긴 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 로그아웃한 뒤 제가 받게 될 보상금은 어느 정도인가요?]
[GM: 정확히 계산해 봐야 알겠지만, 너무 적어서 소송 걸고 싶은 액수는 아닐 겁니다.]
정말 많이 주려나 보네. 나는 몇 년 전 점검 오류로 72시간 동안 게임 속에 갇혀 있었던 사람이 받은 보상금을 떠올렸다. 나는 타자를 친 후에 오랫동안 망설이다 이내 엔터를 쳤다.
[나: 그러면 혹시 제가 받을 보상금을 미리 당겨 뭘 좀 구매할 수도 있을까요?]
[GM: 예, 가능합니다.]
[나: 휴머노이드를 주문하고 싶어요. 네 명 전부. 돈은 신경 쓰지 말고 정교하고 활동하기 편하게 만들어 주셨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