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나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린 건지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마티어스를 바라보았다.
“마티어스, 나 좀…….”
믿어 줘, 라고 말을 끝내기 전, 시야가 높아졌다. 마티어스가 나를 안아 올린 거였다. 따뜻한 품 안에 안기니 왜인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디로 가면 되는데.”
나는 그의 품에 기대어 입을 열었다.
“드래곤, 심장 쪽.”
마티어스가 나를 안아 든 채 걷기 시작했다. 살짝 빠른 듯하면서도 안정적인 걸음이었다.
“너를 믿어도 되는…… 아니, 아니야. 대답하지 마. 아무 말도 하지 마.”
“믿어도 돼.”
나는 마티어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티어스가 나를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러더니 이내 크고 투박한 손으로 내 뒷머리를 눌러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나는 네 덕분에…… 행복했어. 이 순간조차도 내겐 꿈같아.”
“……응.”
“나를 행복하게 해 준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마티어스의 발걸음이 멎었다. 우리는 드래곤의 가슴 부근에 도달해 있었다.
“여기 있어.”
제 망토를 깐 자리에 나를 앉혀 놓은 마티어스가 대검으로 식어 가는 화염 운석을 툭툭 쳐 떨어트렸다. 쓰러져 있는 드래곤은 얼핏 죽은 듯 보였지만 가슴 부근이 미약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나는 내 품속의 단검을 만지작거려 보았다. 마나는 이미 바닥난 지 오래였다. 그렇다면 검을 써야 하는데, 이 단검은 드래곤의 심장까지 닿지 않을 것 같았다.
“이거 써.”
고민하고 있는데 마티어스가 자신의 대검을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망설이다 대검을 받아들었다. 검은 들기 힘들 정도로 묵직했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천천히 옆을 돌아보자 마티어스를 비롯한 루드비히와 체자레, 압실론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드래곤의 가슴에 검을 찔러 넣었다.
비늘과 가죽이 벗겨져 있어 검이 들어가는 게 아주 버겁지는 않았다. 대검에 체중을 싣자 검날이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살을 비집고 들어가는 금속의 감각이 손끝에서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내 검 끝에 무언가 딱딱한 게 걸렸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온 힘을 다해 그것에 칼날을 찔러 넣었다. 드래곤이 잠시 움찔하나 싶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나는 검을 빼낸 뒤 그 안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뜨끈한 속살 안을 헤집어 이윽고 드래곤 하트를 찾아냈다. 나는 그것을 끄집어냈다. 피범벅이 된 손바닥 안에 선홍색으로 빛나는 묵직한 드래곤 하트가 놓였다. 이내 그것은 내 손바닥에서 스르르 녹아 사라졌다.
<블루 드래곤을 해치웠습니다.>
<위대한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매력이 70 올랐습니다.>
<카리스마가 200 올랐습니다.>
<체력이 50 올랐습니다.>
<마력이 80 올랐습니다.>
<‘용 학살자’ 타이틀이 추가됩니다.>
<블루 드래곤을 해치워 던전이 열립니다. 클로즈 게이트를 통해 5분 안에 던전을 빠져나가세요. 남은 시간 4:49…….>
<‘드래곤 하트’를 습득했습니다.>
<‘드래곤 하트’가 소모되었습니다.>
<클래스가 올랐습니다.>
<클래스가 올랐습니다.>
<위대한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
.
띠링, 띠링, 띠링! 시스템 창이 시끄럽게 울려 댔다. 나는 쉼 없이 올라가는 시스템 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 지금이 새벽인지 초저녁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정말 끝난 건가.
“정신 차려. 나가야지, 여기서.”
“어?”
나는 마티어스의 말에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마티어스가 클로즈 게이트를 가리키고 있었다.
“일어나기 힘들면 안아 줄까요?”
체자레가 손을 벌리며 말했다. 나는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나를 루드비히와 마티어스가 부축했다. 클로즈 게이트로 들어가면서도 현실성이 없었다.
발끝이 클로즈 게이트 안으로 들어서자 미지근한 물속에 들어가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기묘한 감각이 전신을 감쌉니다. 던전 밖으로 나갑니다.>
나는 완전히 게이트 안에 들어와 뒤를 돌아보았다. 던전 안의 세상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모든 것은 잠들어 이제 시스템 속 세상 안에만 존재하겠지. 흙도, 나무도, 공기도, 몬스터도, 드래곤도, 토벌 대원들도 전부 0과 1의 데이터로만 남게 될 거라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소름이 끼쳤다.
내가 있을 수도 있었던 공간. 우리 중 누군가가 남을 수도 있었던 공간.
나는 돌아가면 압실론을 꼭 한 대는 후려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거센 파도에 휩쓸리는 듯한 감각에 골이 흔들려 속이 울렁거렸다. 귓가에 시스템 알람이 작게 울렸다.
<던전 밖으로 나왔습니다.>
나는 서서히 눈을 떴다. 묵직했던 공기의 밀도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아.”
나는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우리는 정말로 던전 게이트 앞에 서 있었다.
“에취.”
들어갔을 때보다 날이 확연히 추워져 있었다. 뺨을 에는 바람에 나는 외투를 여미며 주위를 서서히 돌아보았다. 잎이 떨어진 나무들은 몸체가 두툼했음에도 어쩐지 앙상하고 초라해 보였다. 비강으로 들어오는 찬 공기에 겨울 냄새가 물씬 섞여 있었다. 나무 위에 앉아 있던 참새 떼가 우리의 등장에 놀라 입김을 내뿜으며 포르르 날아갔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동시에 다리에 완전히 힘이 풀렸다. 휘청이며 넘어지기 직전, 루드비히와 마티어스가 나를 받쳤다. 루드비히가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힘들면…….”
루드비히가 드물게 말을 끝까지 마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루드비히의 말에 마음 한쪽이 욱신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티어스가 내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나를 안아 들었다.
“힘들면 자. 자도 돼.”
마티어스의 목소리에 안심이 됐다. 마나가 완전히 고갈되는 바람에 이미 한계였다. 수고했어, 나직한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 * *
아주 오래전 일을 꿈으로 꾸었다. 이 일이 아직까지도 기억나는 게 신기했다.
“체자레, 거기 있…… 으악! 미안!”
천막을 걷고 들어간 나는 모자이크의 향연에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방송 꺼 놔서 다행이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미 체자레 때문에 한 차례 경고를 받은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잔 걸쳐서인지 조심성 없이 행동해 버렸다. 매번 빙글빙글 웃는 여유로운 모습 때문이다.
잠깐 화끈거리는 얼굴을 식히고 있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현, 이제 들어와도 돼요.”
“그, 럼 실례합니다…….”
천막 안으로 들어가자 옷을 입고 있는 남자와 여자 하나가 보였다. 체자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옷을 다소 급히 꿰입는 남자에 비해 여자는 단추를 채우는 손길이 여유로워 보였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체자레를 향해 걸어가다가 여자와 작게 부딪혔다.
“죄,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여자가 생긋 웃으며 체자레의 뺨에 키스했다.
“즐거웠어요.”
“나 역시.”
체자레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여자에게 마주 입을 맞췄다. 역시 15세 게임에 갇힐 만한 녀석은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체자레에게서 떨어진 여자가 옆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나에게 작게 윙크를 해 보였다. BJ 새싹으로서 질 수 없다는 생각에 나도 여자를 향해 윙크를 했다. 술에 취해 있어서 할 수 있는 과감한 행동이기도 했다. 여자가 웃음을 터트리며 내게 다가왔다. 체자레에게 했듯이 내 뺨에도 입을 맞추려는 듯했다.
“응?”
“어?”
“……어라.”
그러나 그 시도는 체자레의 손에 의해 가로막혔다. 여자가 입 맞추려고 했던 내 뺨을 그가 감싸 버려서, 여자는 엉겁결에 체자레의 손등 위에 입을 맞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다른 셋이면 몰라도 체자레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게 나는 조금 의아했다.
놀란 건 체자레도 마찬가지였다. 체자레는 무의식 중에 엄지로 내 뺨을 살짝 문지른 뒤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바닥을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여자가 이내 눈을 휘었다.
“아하……. 자기도 아직 몰랐구나?”
여자가 체자레의 뺨에 다시 한번 입을 맞추고 웃으며 천막을 걷고 사라졌다. 남자는 이미 진작 떠나 있었다. 폭풍이 지나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뭘 몰랐다는 거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체자레가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들었다.
“이현, 어쩐 일이에요?”
“어어, 압실론이 네가 부탁한 거 다 만들었대. 전해 달라고 하더라고.”
“아, 고마워요.”
체자레가 웃으며 내가 건넨 물건을 받아 들었다. 나는 그것이 뭔지 알았다. 사람의 정신을 약하게 만들어 진실을 뱉게 하는 약. 간단하게 말하면 일종의 자백제였다. 정신이 망가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자기 편이 하나라도 아쉬울 때에는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 게 맞았다.
지금은 루드비히의 황권 탈취를 위한 전쟁이 한창이었다. 실패와 성공을 번갈아 겪으며 누구를 믿어야 하고, 누구를 믿으면 안 되는지 판단하기 위해 우리는 몸살을 앓고 있었다. 체자레는 그걸 알아내는 데 능해 요즘 루드비히의 신임을 조금씩 얻고 있었다.
“그런데 이현, 취했어요?”
“어어. 압실론이 사과 주스 홀짝이고 있길래 뺏어 먹었는데 맛있더라고. 근데 다 마시고 나서 술이라는 걸 알려 주더라. 나쁜 놈이야, 아주.”
“저런.”
체자레가 옅게 웃으며 내 뺨을 쓸었다. 뺨이 달아올라서인지 체자레의 체온이 평소보다 낮게 느껴졌다. 나는 더운 숨을 내뱉었다. 서늘한 손이 기분이 좋았다.
“아, 시원해서 기분 좋아. 오늘 약 먹일 사람, 저번에 새로 들어온 사람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