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마법 진이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강한 빛이 눈꺼풀 안쪽을 때려 눈이 부셨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깥의 상황을 관망했다.
마법 진 밖의 마법사가 동굴 밖으로 폭죽을 터트렸다. 스킬 가동의 시작을 알리는 폭죽이었다. 폭죽 소리를 듣자마자 다른 조 사람들이 후드를 뒤집어쓰고 몸을 피했다. 10클래스의 광범위 화염 마법이었기에 이 좁은 동굴에서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긴 했다.
그래서 압실론은 작전을 시행하기 전, 모든 토벌 대원에게 증표를 하나씩 건네주었다. 마법 진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증표라고 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 말에 “정말 알고 싶어?”라고 의미심장하게 묻기에 골치 아파질 것 같아 그만두었다. 내 생각엔 시스템의 어떤 부분을 건드린 것 같았다. 증표 하나하나가 해킹 시스템인 게 아닐까 싶었다. 압실론이 우리 편이라 정말 다행이었다.
블루 드래곤의 머리 위로 붉은 불씨 하나가 내려앉았다. 하나에 불과했던 불씨는 두 개에서 네 개로, 네 개에서 여덟 개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민들레 홀씨에 불이 붙는다면 저런 느낌일까.
갑작스러운 변화에 블루 드래곤의 동공이 움찔거렸다. 드래곤은 몸부림치며 몸에 붙은 불씨를 떼어 내려고 했지만, 털어 내는 불씨보다 붙는 불씨가 더 많았다. 신기하게도 그 불꽃은 증표를 가진 토벌대원들의 몸에는 절대 붙지 않았다. 마치 그들의 위에 그들을 감싼 투명한 막이 있는 것 같았다.
자석에 순식간에 철 가루가 모여들듯, 블루 드래곤의 몸에 붙은 수천 개의 불씨가 가까운 불꽃들끼리 붙었다. 불꽃의 연쇄 반응이 일어나며 한순간에 대낮처럼 동굴이 환하게 빛났다.
끼에에에에엑!
처음으로 피어가 섞이지 않은 드래곤의 비명이 들려왔다. 우리는 성공을 직감했다.
염화는 10클래스 마법치고는 시작이 수수한 편이었다. 아름다운 불꽃의 비가 내리는 정도에 지나지 않으니까. 불꽃 하나를 만졌을 땐 따뜻한 정도지만, 불꽃들이 합쳐지는 순간 불꽃 고유의 온도가 올라가며 순식간에 2,000도가 넘어 버린다. 사람이었다면 순식간에 살과 뼈가 녹을 정도의 고온이었다.
그 불꽃은 상대를 전부 태울 때까지 자신의 온몸을 불사른다. 드래곤의 몸에는 그런 불꽃들이 여전히 계속 내려앉고 있었다. 지옥에서 온, 상대를 지옥으로 데려갈 불꽃이었다.
“성공인가?”
사람들의 시선에 희망의 빛이 차올랐다. 까마득히 거대한 존재가 인간들의 힘에 무너져 가는 과정은 저열한 희열을 가져다주었다.
뒤늦게 불꽃의 심각성을 알아챈 드래곤이 날개로 몸을 둥글게 말고 몸을 차갑게 얼리기 시작했다. 드래곤의 주변에서 퍼져 나온 냉기로 주위가 서늘해졌다.
“좋은 방향은, 아닌데.”
쯧, 압실론이 난감하다는 듯 중얼거리며 혀를 찼다. 블루 드래곤의 생존기인 냉각화였다. 자신을 얼음 수정 안에 가둠으로써 적으로부터 몸을 피하는 행위였다. 치이이익. 얼음 수정이 불꽃의 열기에 녹았다가 다시 얼어붙기를 반복하며 점차 모양을 만들어 갔다. 녹아 버린 날개의 피막 위로 삐죽삐죽한 얼음 수정이 돋아났다.
여전히 우리는 마법 진 안에서 마나를 공급하고 있었기에 섣불리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마법 진 밖에 있는 마법사가 드래곤에게 화염 마법을 시도했지만, 별로 유의미하지는 않았다.
결국 드래곤은 녹지 않은 얼음 수정 안에 몸을 완전히 들이는 데 성공했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숨을 헐떡이면서도 드래곤은 표독스러운 동공으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압실론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드래곤과 눈을 마주쳤다. 그사이 토벌대원들이 얼음 수정에 검을 꽂아 넣으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오히려 검이 깊이 박혀 무기를 잃은 토벌대원도 생겨났다.
“다음 마법을, 준비해야겠어.”
“할 수 있겠어? 마나 충분해?”
“고위 마법을 쓰기엔 좀, 부족해.”
“방법이 없을까?”
포션엔 쿨 타임이 있었다. 그 시간을 넘기지 않으면 마신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우리는 이미 한계까지 포션을 섭취한 상태였다. 시스템이라도 건드리려는 건가.
“방법이야, 있지. 이현이, 좋아하는 방식은 아니겠지만.”
어쩔 수 없지, 압실론이 혼잣말하며 마법사들 쪽으로 돌아섰다. 마법사들이 의아하게 압실론을 바라보다가 이내 하나둘씩 허리가 꺾인 허수아비처럼 픽, 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뭐야, 왜 이러는 거야?”
나는 당황해 주위를 둘러보며 외쳤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은 마법 진 안에 있어도 나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겁에 질린 시선으로 압실론을 올려다보았다. 압실론의 안색이 아까에 비해 훨씬 좋아져 있었다. 압실론이 입가를 닦으며 피를 마시고 피어난 꽃처럼 미소 지었다.
“죽은 건, 아니야. 마나와 체력을 거의 다 빼앗겨서, 잠깐 가사 상태에 빠진 거지.”
“같은 마법 진 안에 서 있는데 나는 왜…….”
‘멀쩡하지?’라고 묻기도 전 압실론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얘네랑 이현이, 같아? 이현이 서 있는 자리는, 항상 내가 있는 곳보다 안전해.”
“……아.”
어쩐지 자리를 정해 주더라니.
압실론이 마법 진 밖에 서 있는 마법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도 곧 마법 진 안에 있는 이들의 신세가 될 것을 직감했는지 마법사가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나 이내 마음먹은 듯 스스로 압실론을 향해 다가왔다.
“승리를…… 기원하겠습니다.”
“그래.”
마법사가 압실론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압실론이 게걸스럽게 그의 마나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끄으으으…….”
마법사가 신음하며 눈을 홉뜨다가 이윽고 옆으로 툭, 넘어갔다.
“하아…….”
마지막 마나까지 말끔히 빨아먹은 압실론이 나른한 호흡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무슨 마법 쓸 거야?”
“‘종말의 구’를 쓸까 했는데…… 이현이 마지막으로 처리해야 하니 ‘화염 운석’을 써 볼까 해.”
“그럼, 토벌대원들은……? 아, 그 증표가 있으면 되나?”
압실론은 대답 대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된다는 거야, 만다는 거야. 압실론에게 되묻기 전 압실론이 먼저 내게 선언하듯 말했다.
“캐스팅이 시작되면 드래곤은 나를 죽이기 위해, 사력을 다할 거야. 그때 나를 지키는 게…… 드래곤을 토벌하기에 가장 좋은 선택이야.”
“……나도 알고 있어.”
“그럼, 시작할게.”
“알았어.”
압실론의 주위로 마나가 다시금 스멀스멀 모이기 시작했다. 나는 압실론과 마법사들 주위로 보호막을 치기 시작했다. 얼음 수정 안에 있던 드래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압실론이 다음 마법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듯했다. 동공 속에 명백한 당황이 읽혔다. 그것이 얼음 수정 안에서 작게 으르렁거렸다.
“젠장.”
나는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수백 개의 얼음 화살이 정확히 우리가 있는 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보호막을 쳤다. 얼음 화살이 보호막에 의해 부서지고 튕겨 나갔다. 운 좋게 보호막을 꿰뚫은 얼음 화살들도 있었지만, 여러 겹의 보호막을 모두 꿰뚫지는 못했다.
평소라면 10클래스의 드래곤을 상대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나 드래곤은 지금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고, 얼음 수정 안에 들어가 있어 직접적인 공격은 하지 못했다.
결국 드래곤이 택한 건 넘쳐 나는 마나를 이용해 낮은 클래스의 빙결 마법을 마구잡이로 퍼붓는 거였는데, 초반에는 감당할 만했지만, 점차 힘에 부쳐 갔다. 그때였다. 마티어스가 얼음 수정 위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한 건.
단숨에 얼음 수정의 정상에 올라간 마티어스는 대검으로 드래곤의 머리 위를 내리찍기 시작했다. 한 번 내리찍는 것으로는 두껍고 단단한 얼음 수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확히 두 번, 세 번을 내리찍자 조금씩 반응이 왔다.
쩌적. 얼음 수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드래곤은 얼음 수정에 보호받고 있기도 했지만, 갇혀 있는 거기도 했다. 드래곤이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은 얼음 수정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밖에 없었다. 제 머리 위를 찍고 있는 마티어스에 대한 불안감에 그것이 눈동자를 대굴대굴 굴렸다.
쩌저적. 얼음 수정의 균열이 점차 커지자, 얼음 화살이 궤도를 바꿔 마티어스를 향하기 시작했다. 마티어스가 몸을 살짝 위로 날려 얼음 화살을 피해 내며 체중을 실어 정확한 위치에서 다시금 얼음 수정을 찍어 내렸다.
쩌저저적-.
봄 햇살에 호수의 얼음이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드래곤의 머리 윗부분의 얼음 수정이 완전히 깨졌다.
그러나 대검으로 드래곤을 상처입히기엔 대검의 길이가 부족했다. 드래곤이 그르렁대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얼음 수정에서 완전히 나올지 말지를 결정하지 못한 듯했다. 겁에 질린 게 분명했다.
“……!”
마티어스의 신발 위로 서리가 피어나나 싶더니, 이내 눈꽃 모양을 내며 얼어붙기 시작했다. 드래곤은 얼음 수정에서 나오는 걸 택하지 않았다. 마티어스를 함께 얼려 버리길 택했다.
마티어스가 다급히 한 발을 떼어 냈지만, 이미 한쪽 발이 수정에 단단히 붙어 있었다. 순식간에 신발 전체를 얼려 버린 냉기가 이제는 종아리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망설임은 짧았다. 마티어스가 결심한 듯 종아리에 대검을 댔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안 돼!”
내가 소리를 지르는 것과 동시에 루드비히가 마티어스의 발 주변에 화염구를 쏘아 냈다. 규모는 작았지만, 마티어스와 얼음 수정을 떼어 내기엔 충분했다. 고정되었던 발이 떨어지며 마티어스의 몸이 공중에 떴다. 콰광! 그와 동시에 마티어스가 간헐적으로 치던 낙뢰를 정통으로 맞았다. 갑작스러운 충격으로 중심을 잃은 마티어스의 몸이 머리부터 추락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