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기묘한 마법 진에 의해 상태 이상 ‘속박’에 걸렸습니다. 주문이 끝날 때까지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시스템 음이 나며 다리가 점차 굳어 갔다. 이미 공지된 일이라 당황하지는 않았다. 한 명이라도 자리를 빠져나가면 스킬은 취소된다. 그래서 압실론은 처음부터 마법 진을 설계할 때 그 자리에 선 사람들이 마법 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조치해 놓았다. 그러다 보니 마법 가동 중 드래곤이 브레스를 쓴다고 해도 얌전히 맞아야 하는 신세였다. 앞 조나 뒤 조나 목숨을 걸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동시에 복잡한 수식들이 마법 진을 둘러쌌다. 밤하늘의 별자리처럼 수식들이 마법 진 주위를 수놓았다.
“아무도, 손대지 마.”
압실론이 경고하며 복잡한 수식들을 풀기 시작했다. 위 클래스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의 도움도 필요했지만, 복잡한 수식들도 풀어내야 했다. 수식을 일정 횟수 이상 틀리면 마법 가동이 취소되었다. 압실론은 처음부터 그 수식을 홀로 풀어내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 많아 보이는데.”
마법 진 주위를 빽빽하게 둘러싼 수식의 양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압실론 역시 힘들었는지 그 수식을 노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역시 도와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도와줄…….”
그때 압실론이 수식 옆에 답을 입력했다.
“…….”
수식이 정답이라는 듯 두어 번 반짝이다 사라졌다. 암산하고 있었던 거구나. 허탈해지는 것과 동시에 조금 안심이 됐다. 마법에 한해선 믿음직한 녀석이었다.
나는 앞쪽을 바라보았다. 대체 몇 겹이나 보호막을 쳐 놓은 건지 통로 앞이 아지랑이가 핀 것처럼 어룽거렸다. 이래서야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나는 영상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행히 앞 토벌대가 여전히 잘 싸워 주고 있어 드래곤은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드래곤은 앞 발가락 두 개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에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상처 하나 없이 매끈했던 비늘은 군데군데 보기 흉하게 뜯겨 있었고, 꼬리 역시 일부가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분노와 고통에 차서 마구잡이로 공격을 해 대고 있었는데, 흥분해서 그런지 고위 마법이 아니라 드래곤 피어와 브레스가 대부분이었다. 우리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끼아아아아아아아!
<‘블루 드래곤’이 스킬 ‘드래곤 피어’를 사용했습니다. 시전자의 레벨과 30레벨 이상 차이 나는 모든 생명체가 그에게 기묘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40% 확률로 상태 이상 ‘공포’가 적용됩니다.>
<40% 확률로 상태 이상 ‘마비’가 적용됩니다.>
“으아아아악!”
드래곤 피어 스킬이 펼쳐지는 것과 동시에 내 옆에 서 있는 마법사에게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마 상태 이상 ‘공포’에 걸린 듯했다. 그는 입에서 거품을 뿜으며 도망치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압실론이 마법 진을 설계할 때부터 걸어 놓은 속박 마법에 걸려 도망치지 못했다.
“흐아악, 살려 주세요! 아아악! 살려 줘-!”
마법사가 쉬지 않고 비명을 질렀다. 복잡한 수식을 풀고 있던 압실론이 인상을 찌푸리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가락질했다.
“쟤 좀, 조용히 시켜.”
“마법 진에서는 다른 마법을 못 쓰는…….”
그의 옆에 있던 또 다른 마법사가 말을 끝내기 전, 나는 공포에 질린 마법사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마법사의 눈이 까무룩 뒤집어지며 울부짖음이 뚝 멈췄다.
“해결했어.”
“여, 역시 이현이야.”
압실론이 수식을 풀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나는 손바닥을 탁탁 털고 다시 자리를 잡았다. 그들과 헤어진 사이 힘법으로 전직한 듯한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앞을 돌아보았다. 아직도 영상구 안에는 루드비히와 마티어스, 체자레의 모습이 보였다. 작전을 짜고 있는지 셋이 모여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압실론이 마지막 수식을 풀어낸 건.
<수식 해금 완료. 캐스팅 시간이 30초 단축됩니다. 스킬 ‘염화’ 남은 캐스팅 시간 0:28…….>
28초. 마법사들이 작게 탄성을 질렀다.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마나가 마법 진 안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속박에 걸리지 않았다면 휘청거릴 정도로 세찬 바람이 마법 진 주위를 둘러쌌다.
토벌대의 공격을 받던 드래곤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불시에 어떤 냄새를 맡은 개처럼 주위를 둘러보며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고민은 짧았다. 자신의 등에 검을 박아 넣은 토벌대원을 꼬리로 후려치며 쿵, 쿵, 쿵, 그것이 우리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천장에서 돌과 부스러기가 후드득 떨어졌다.
“하아앗!”
우리로부터 시선을 돌리려 토벌대는 필사적으로 드래곤을 공격했다.
마티어스가 부러 기합을 내지르며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드래곤의 꼬리 쪽을 공격했다. 드래곤의 꼬리 크기에 비하면 마티어스의 대검은 과도 정도에 불과했지만, 검기가 실리니 이야기가 달라졌다. 콰앙! 꼬리의 1/3 정도를 베어 낸 대검이 흙바닥을 내리쳤다. 흙바닥이 움푹 파이다 못해 대검이 안쪽까지 깊이 박혀 들었다. 마티어스가 그 대검을 비틀어서 빼냈다.
드래곤의 두툼한 꼬리 일부가 과일의 단면처럼 떨어져 나가며 그곳에서 솟구친 핏물이 마티어스의 몸을 흠뻑 적셨다. 온통 붉은 것을 뒤집어쓴 채 숨을 헐떡이는 마티어스의 눈동자가 예기를 품은 칼처럼 서늘하게 빛났다.
끼아아아아아!
그것이 꼬리를 잃은 고통에 울부짖었다. 꼬리의 크기가 사람보다 크다 보니 쏟아져 나오는 피의 양도 엄청났다. 가까이 다가가면 피바다에 휩쓸릴 것만 같았다. 드래곤이 분노해 뒤돌아 마티어스를 찾았지만, 마티어스는 이미 다른 곳으로 몸을 숨긴 뒤였다. 결국 드래곤은 분노의 대상을 찾지 못하고 다시금 몸을 돌려야 했다.
<수식 해금 완료. 캐스팅 시간이 30초 단축됩니다. 스킬 ‘염화’ 남은 캐스팅 시간 0:16…….>
이제 남은 시간은 15초 남짓. 우리는 절박했다. 그러나 드래곤 역시 절박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마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인 드래곤은 지금 우리가 캐스팅하고 있는 것이 단순한 마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니 저 처참한 꼴을 하고 아득바득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거겠지.
기어코 드래곤이 우리가 있는 곳 앞에 섰다. 그것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이내 아래쪽으로 목을 기괴하게 꺾어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 정확히 우리가 있는 곳을 응시했다.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하자 등골이 일순 서늘해져 왔다.
“발견됐습니다. 어, 어떡하죠?”
“예상했어.”
압실론이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칼로 베어 내 손바닥 위에 작은 마법 진을 그려냈다.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마법 진 안에서, 그것도 주체로 있으면서 새로운 마법 진을 하나 더 가동한다고?
드래곤이 입을 쩍 벌리는 것과 동시에 우리를 향해 냉기 브레스를 쏘아 냈다. 목구멍 점막 안쪽에 비치는 새파란 빛에 눈이 시렸다. 우리를 지켜 주기 위해 마법 진 밖에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가 보호막을 거듭해 생성해 냈다.
쿠와와와와-!
그러나 강력한 냉기 브레스에 두꺼운 보호막은 형편없이 깨져 갔다.
“쿨럭…….”
보호막이 파훼되며 보호막 스킬을 시전한 마법사가 피를 왈칵 토해 냈다. 피의 양이 꽤 많아 위험해 보였지만, 우리도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으아아아악!”
마지막 보호막에 금이 가는 순간, 마법사 몇몇이 비명을 질렀다. 마법 진이 가동되는 때까지 우리는 독 안에 든 쥐 신세였다. 나는 긴장했지만, 압실론을 믿기로 했다. 기어코 마지막 보호막이 깨졌다. 그러자 손바닥 위의 마법 진이 밝게 빛나며 검은 마나로 만들어진 보호막이 우리를 감쌌다.
순간 정전이 일어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을 만큼 검은 보호막이었다. 그러나 그 보호막조차 완벽한 건 아니었다. 브레스가 검은 보호막을 쪼개며 점차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수식 해금 완료. 캐스팅 시간이 30초 단축됩니다. 스킬 ‘염화’ 남은 캐스팅 시간 0:10…….>
남은 시간은 단 10초. 나는 불안한 마음에 마나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마법 진이 이미 마나를 죽죽 빨아 가는 상황에서 추가적으로 마나를 끌어올리자 금세 한계가 왔다.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고, 바싹 마른 목구멍 안에서 단내가 났다.
<스킬 ‘염화’ 남은 캐스팅 시간 0:05…….>
보호막이 반 넘게 깨져 가고 있었다. 검은 알 속에 갇힌 듯 안락했던 보호막은 어느새 짙은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스킬 ‘염화’ 남은 캐스팅 시간 0:03…….>
보호막의 색이 속속들이 옅어졌다. 옅은 잿빛에서 반투명한 흰색으로 변해 가는 과정을 보고 있자니 등허리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스킬 ‘염화’ 남은 캐스팅 시간 0:01…….>
냉기 브레스가 끝났다. 보호막은 계란 속 껍질처럼 아주 얄팍한 한 겹의 막만을 남겨 두고 있을 뿐이었다. 압실론은 이것까지 예상했던 걸까. 그와 동시에, 카운트다운이 종료되었다.
<스킬 ‘염화’ 남은 캐스팅 시간 0:00…….>
<스킬 ‘염화’가 가동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