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잘못된 거면 어떡해!”
“믿어 봐. 지금은 그거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
젠장……. 나는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리며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여기 있는 게 아니었어. 저쪽 조에 들어가 보호막이라도 걸어 줬어야 했는데. 등신 새끼! 나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내가 기다림에 지쳐 미쳐 버리기 직전 압실론이 손가락으로 영상을 짚었다.
“빙결 마법이, 점점 사그라들고 있어.”
“똑같은데 무슨 소리야.”
“영상에 너무 바짝, 붙어 있어서 그래. 한 걸음 뒤로, 떨어져서 봐.”
나는 압실론의 말대로 한 걸음 뒤로 떨어져서 영상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대로 빙결 마법이 아까에 비해 조금 약해져 있었다. 수 초가 지나 이윽고 빙결 마법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상황은 예상보다 더 처참했다. 쉬지 않고 쏟아진 빙결 마법은 미처 피하지 못한 병사들을 완전히 얼려 버렸다.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 푸른 조각상이 된 것만 같았다. 나는 정신없이 영상 속의 마티어스와 루드비히, 체자레를 좇았다. 다행히 셋 다 무사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들이 각자 토벌대를 이끌고 몸을 피하고 있었다. 빙결 마법이 쏘아진 중앙에서 서서히 드래곤이 몸을 드러냈다.
“……저 크기가 말이 돼?”
나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드래곤은 예상보다 훨씬 더 거대했다. 파충류의 것을 닮은 길게 찢어진 동공 하나가 인간의 키를 훌쩍 넘었다. 영상으로만 봐도 최소한 운동장 하나 크기는 될 듯했다. 육중한 몸체는 지방이 아닌 근육으로만 짜여 있었고, 배와 날개 부위를 제외한 모든 부위에는 단단하고 푸른 비늘이 촘촘하게 뒤덮여 있었다.
압도적인 크기에서 오는 두려움이 우리를 덮쳤다. 우리는 숨도 쉬지 못하고 영상을 보고 있었다. 영상으로만 접하는 것도 두려운데, 실제로 마주하면 얼마나 두려울까.
틱, 틱, 틱, 틱. 날카로운 발톱으로 돌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와 동시에 둥지 안이 낮처럼 밝아졌다. 드래곤이 둥지를 밝히는 마법을 쓴 듯했다. 저 먼 곳까지 밝아지며 둥지 안의 풍경이 선명하게 보였다.
드래곤이 꼬리를 휘둘러 얼어붙은 기사들을 쳤다. 쩡! 파스스……. 그들은 조금 전 살아 있었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완전한 가루가 되어 날렸다. 뒤를 돌아 그 장면을 바라보는 드래곤의 노란 동공이 살짝 휘어져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저것은 지금, 즐거워하고 있었다. 설레어하고, 신나 하고 있었다.
드래곤은 우리가 오는 것을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을 즐겁게 해 줄 쇼를 위해 우리가 올 때까지 이렇다 할 공격도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거대한 생명체가 이 정도의 사고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아득하게 했다.
“가자.”
압실론이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나는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눈을 깜빡이며 압실론을 응시했다. 내겐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달리기 시작했다.
마법을 쓰지 않더라도 마법사들이 몰려 있으면 들킬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둥지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통로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전력으로 달리면 5분 정도일까.
우리가 달리는 사이에도 드래곤이 쿵, 쿵 거대한 뒷발과 꼬리를 쉼 없이 움직이며 병사들을 찍어 눌렀다. 지금까지 생존한 이들이라 그런지 피하는 실력이 나쁘진 않았지만, 드래곤의 크기에 비해 동굴이 작아 피하기가 여의치 않은 탓에 간간이 사상자가 나왔다. 고양이가 쥐들을 자신의 공간 안에 풀어 놓고 하나씩 사냥하는 격이었다.
‘아아악!’
운 나쁜 토벌대원이 드래곤의 뒷발에 다리를 밟혔다. 밟힌 다리가 형체도 없이 으스러졌다. 토벌대원이 다리를 잡고 비명을 질렀다. 비명을 들은 드래곤의 노란 동공에 이채가 스쳤다. 드래곤이 앞발을 뻗어 그 토벌대원을 주워 들었다. 토벌대원이 벗어나려고 바르작거렸지만, 오히려 억세고 날카로운 발톱에 갑옷만 찢겨 나갈 뿐이었다.
드래곤이 토벌대원을 가볍게 던졌다가 받아 들었다. 물론 그 가볍다는 것은 드래곤의 기준이었고, 토벌대원은 공중에서 5m가량 떴다가 다시 드래곤의 발톱 위에 안착하길 반복해야 했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나까지 괴로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영상에서 눈을 뗄 수 없어서 더 괴로웠다.
토벌대원은 그 와중에도 용기를 내어 검을 쥐었다. 그러고는 드래곤의 발톱에 검을 날렸다. 남청색 발톱과 부딪힌 검에서 불꽃이 튀었다. 희망을 가진 토벌대원이 마지막 힘을 짜내어 다시금 발톱에 검을 들이댔다. 챙강. 금속음과 함께 검신이 두 동강 났다. 토벌대원의 표정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절망에 빠져 있을 거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때였다. 마법을 쓴 루드비히가 드래곤의 앞발까지 뛰어오른 건.
루드비히의 검은 검은색 검기로 새카맣게 물들어 있었다. 무언가를 느꼈는지 드래곤이 앞발을 안으로 움츠렸다. 그러나 루드비히의 검은 이미 토벌대원을 쥐고 있는 두 개의 발가락을 베어 낸 뒤였다. 사람 하나 크기의 앞 발가락 두 개가 토벌대원과 함께 허공으로 추락했다. 토벌대원이 바닥에 부딪히기 전 마티어스가 아슬아슬하게 그를 잡아챘다.
끼아아아아아아아-!
드래곤이 앞발을 감싸려 몸을 굽히며 소름 끼치는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가 영상구뿐 아니라 우리가 달려가고 있는 통로 안쪽에서도 들렸다.
<‘블루 드래곤’이 스킬 ‘드래곤 피어’를 사용했습니다. 시전자의 레벨과 30레벨 이상 차이 나는 모든 생명체가 그에게 기묘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블루 드래곤’과 거리가 300m 이상 떨어져 있어 스킬 ‘드래곤 피어’의 영향력이 줄어듭니다.>
<5% 확률로 상태 이상 ‘공포’가 적용됩니다.>
<5% 확률로 상태 이상 ‘마비’가 적용됩니다.>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마법사가 대부분이라 정신계 마법 내성이 강해서 그런지 상태 이상에 걸린 사람은 없어 보였다. 나는 안심하며 달리는 속도를 높였다. 우리 조에서는 오직 압실론만이 내 속도를 따라잡고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입에서는 비릿한 쇠 맛이 났다. 그러나 발을 멈출 수는 없었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달리는 것뿐이었으니까.
드래곤은 처음 당한 공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분노하고 있었다. 꼬리와 뒷발을 휘두르고 마구잡이로 브레스를 난사했다. 하찮은 존재인 줄만 알았던 벌레에게 사실은 자신의 신체를 훼손할 만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패닉을 일으킨 듯했다. 사방에 분노와 고통을 흩뿌릴 뿐인 공격이었지만, 드래곤의 크기가 크고 레벨이 높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사상자가 늘어 갔다.
우리는 토벌대의 1/3이 쓰러질 무렵에야 둥지의 뒤쪽 통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멀리 드래곤의 뒷발과 꼬리, 바삐 움직이는 토벌대의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 얼추 공격 패턴을 파악한 토벌대가 마티어스와 루드비히의 지시를 받아 이따금 드래곤에게 반격을 가하는 상황이라 드래곤은 우리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블루 드래곤의 둥지’에 들어왔습니다.]
[‘위대한 한 발짝’ 컬렉션에 ‘블루 드래곤의 둥지’가 등록되었습니다. 45/80]
[명예가 100 올랐습니다.]
[매력이 30 올랐습니다.]
둥지에 들어오자마자 시스템 창이 시끄럽게 울려 댔다. 상황을 지켜본 압실론이 조용히 선언했다.
“캐스팅, 바로 시작하자.”
압실론이 발을 구르는 것과 동시에 발밑에 마법 진이 떴다. 복잡한 기호와 수식이 뒤섞인 마법 진이 동굴 바닥을 가득 메웠다. 이 마법 진은 토벌 전 압실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역작이었다. 마법사들이 이 와중에도 감탄을 담은 시선으로 압실론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앞서 훈련했던 대로 마법 진 안에 섰다. 마인드맵 형식을 띤 마법 진의 선두에는 압실론이 있었고, 그 뒤로는 고위 마법사, 고위 마법사의 뒤로는 중간급의 마법사들이 줄줄이 섰다.
지금부터 우리가 시전할 마법은 10클래스 마법인 ‘염화’였다. 드래곤이 10클래스였으니 우리 역시 10클래스 마법으로 상대해야 했다. 냉기 마법에 강하고 화염 마법에 약한 블루 드래곤에게 쓸 수 있는 최적의 마법이었다.
다만 제일 높은 클래스를 가지고 있는 압실론조차 9클래스였기에, 우리는 마법 진을 통해 10클래스 마법을 쓰는 것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모든 마법사가 마법 진 안에 있는 건 아니었고, 우리가 마법 진 안에 있는 동안 우리를 지켜 줄 고위급 마법사 하나, 마법이 시전된 후 앞 조에 보호막을 쳐 줄 마법사 둘은 진 밖에 있었다. 원래는 더 많은 마법사가 우리를 지켜 줘야 했으나, 반란으로 인해 마법사의 수가 줄어 어쩔 수 없이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우리를 지켜 줄 고위급 마법사가 계속해서 우리의 앞에 보호막을 쳤다. 그사이 마법 진 안에 선 모든 마법사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날붙이를 이용해 손가락을 베어 냈다. 핏방울을 떨어트리자 하얀 마법 진이 점차 붉은색으로 변해 갔다. 마나 제공에 동의하는 행위였다.
우우웅-.
마지막 핏방울까지 떨어지자 마법 진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바람이 휘몰아치며 마법사들의 로브가 펄럭였다.
<기묘한 마법 진에 의해 마나가 10% 소모되었습니다.>
<기묘한 마법 진에 의해 마나가 20% 소모되었습니다.>
<기묘한 마법 진에 의해 마나가 30% 소모되었습니다.>
고작 마법 하나 쓰는 데 마나가 30%나 소모되었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다소 어지러운 느낌과 함께 몸 안에서 마나가 빠져나가는 감각이 느껴졌다. 마나의 양이 적은 중위급 마법사들 몇몇이 휘청거렸다. 우리는 미리 배급된 마나 회복 포션을 허겁지겁 들이켰다.
<기묘한 마법 진의 충전이 완료되었습니다!>
<스킬 ‘염화’를 캐스팅합니다. 캐스팅 시간은 3분이 소요됩니다. 남은 시간 2:59…….>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