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티어스의 뒤를 따랐다. 아무도 없는 동굴에 들어와서야 마티어스는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밥은 좀 먹었어?”
“어포만 조금 먹었어.”
내 대답에 마티어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가볍게 타박했다.
“왜 조금만 먹어. 다 먹어야지.”
“그냥, 입맛이 없었어. 너는?”
“난 항상 잘 먹어.”
그치, 넌 항상 잘 먹지. 전쟁터 한복판에서도 잘 먹고 잘 잤지. 그런 점이 참 부러웠었는데.
“이거 먹어.”
마티어스가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손바닥만 한 주머니 속에 작고 둥근 것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게 뭐야?”
“허브 사탕. 병사 하나가 저번에 살려 줘서 고맙다고 주더라. 마지막까지 아껴 왔던 거래. 거절하려다 너 이런 거 좋아했던 것 같아서 가져왔어.”
주머니 속을 벌려 냄새를 맡자 시원한 민트 향이 코끝을 스쳤다.
[허브 사탕: 시원한 향이 난다.]
혹시나 해서 시스템 창을 봤는데도 별말이 없었다. 독은 없는 모양이었다.
“쪼개서 반 나눠 먹을까?”
“됐어. 난 그거 별로 안 좋아해.”
하긴, 민트 향 별로 안 좋아하지.
“잘 먹을게.”
나는 신이 나 허브 사탕을 입 안에 넣고 굴렸다. 조금 쌉쌀하면서도 시원한 향이 입 안에 가득 퍼졌다. 한쪽 볼에 불룩하게 넣고 굴리고 있는데 마티어스가 나를 보다 피식 웃었다.
“어린애 같긴.”
마티어스가 불룩해진 내 뺨을 툭 치며 말했다. 그의 이런 행동 하나하나에도 가슴이 설렜다.
“넌 그런 어린애랑…….”
“어린애랑?”
“……아무것도 아니야. 사탕 맛있네.”
말해 봤자 내가 손해일 것 같아 화제를 돌렸는데 눈치챘는지 마티어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웃어라 웃어. 이 상황에 웃을 일도 생기고 좋네.
시선을 돌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데 마티어스가 갑자기 내 뺨을 쥔 채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 위에 뜨겁고 부드러운 것이 내려앉았다. 마티어스의 혀가 벌어진 입 안을 헤집고 들어왔다. 마티어스의 혀끝이 내 입 안에 있는 사탕을 굴렸다. 사탕을 맛보는 건지, 키스를 하는 건지 헷갈릴 무렵 마티어스가 내 아랫입술을 빨며 아쉽다는 듯 입술을 떼어 냈다.
“뭐 하는 거야…….”
싫지는 않았지만 부끄러운 마음에 말끝을 흐리니 마티어스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사탕 맛있다길래.”
나는 기가 차 마티어스를 올려다보았다. 얘가 원래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녀석이었나. 하지만 서글서글하게 미소 짓고 있는 녀석을 보자니 타박하고 싶은 마음이 사르르 녹아들었다. 쑥스러운 마음에 시선을 피하며 나는 웅얼대듯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맛은 어땠는데.”
“이런 향은 질색이었는데, 네 입 안에 있는 건 또 괜찮네.”
“……든가.”
“뭐라고 했어?”
나는 까치발을 들고 마티어스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좀 더 맛보든가…….”
한동안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던 마티어스의 뺨이 갑자기 벌겋게 물들었다. 마티어스가 입술을 핥으며 제 목덜미를 문질렀다.
“너, 그런 말도 할 수 있었네.”
“너도 마찬가지거든…….”
손끝으로 내 뺨을 어루만지던 마티어스가 이내 내 눈꺼풀 위에 입을 맞췄다.
“다음에. 지금 하면 내가 못 참을 것 같아.”
“그래…….”
나만 아쉬운 건 아닌지 마티어스가 내 눈꺼풀과 콧잔등 위에 잘게 키스했다. 나는 마티어스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다. 마티어스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가 났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아마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겠지.
우리에게 ‘다음’이 있을까.
마티어스는 전쟁의 선봉에 설 것이다. 모든 전쟁과 토벌에서 그래 왔듯이. ‘쉬엄쉬엄, 약간은 비겁하게 싸우면 안 돼?’라는 말을 억지로 삼켰다. 내가 말한다고 들을 녀석도 아니었다.
“무슨 생각 해?”
마티어스가 나직이 물어 왔다. 네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조금만 살살 싸웠으면 좋겠다는 생각, 우리에게 다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나는 그 모든 생각을 삼키고 엉뚱한 답을 내놓았다.
“무슨 환상을 봤어?”
“환상? 무슨 환상.”
“환상 거미한테 잡혔을 때.”
“잡힌 거 아니야. 동태를 살피기 위해 일부러 잡혀 준 거지.”
마티어스가 발끈하듯 말했다. 나는 그런 마티어스를 속으로 귀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티어스가 나직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 갔다.
“……뻔하지 뭐. 네가 없는 꿈이었어. 너는 이 세계를 떠나는 데 성공하고, 나는 네가 없는 곳에서 계속해서 살아가는, 예전과 다름없는 일상. 이미 겪어 본 일이라 금방 벗어날 수 있더라.”
예전과 다름없는 일상이라는 말이 가슴을 아프게 찔러 왔다. 동시에 궁금해지는 것도 있었다.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얘기해.”
“내가 없던 때…… 죽으려고 했던 둘이 누구야?”
‘……우리 중 두 명은, 네가 사라진 후 죽으려고 한 적이 있어.’
예전에 스쳐 지나가듯 들었던 말. 그리고 나를 아주 오래 생각하게 한 말.
“그게 왜 궁금해?”
“그냥……. 말하기 좀 그러면 안 해도 괜찮아.”
고민하고 있는지 마티어스의 미간에 깊게 주름이 잡혔다. 마티어스가 짧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루드비히랑 체자레.”
“루드비히랑, 체자레……?”
답을 듣는 것과 동시에 묘하게 납득이 됐다. 그래, 그 둘이었구나.
“그래. 루드비히는 너 찾아다닌 지 몇 달 뒤였나……. 독주를 마셨어. 불안불안해서 사람을 붙여 놨던 게 다행이었지. 조치가 빨라 살았거든. 본인에게도 다행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
“체자레는 네가 사라지고 제일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어. 그래서 나뿐만 아니라 아무도 걔가 죽을 거라는 생각을 안 했어. 그때의 나는 루드비히 챙기기에도 바빴어서……. 그런데 어느 화창했던 날에, 성벽에서 뛰어내렸어. 한동안 혼수상태였는데 간신히 목숨을 건졌어. 나중에 왜 그랬냐고 물으니까, 사는 게 재미가 없어서라고 말하면서 웃더라. 미친 새끼…….”
마티어스가 그때를 회상하고 있는지 허공을 노려보다 돌연 픽 웃었다.
“미쳤다고는 했지만, 체자레가 이해가 갔어. 나도 그랬거든.”
“너도 그랬다고……?”
“그래. 엄밀히 말하면 나는…… 타이밍을 놓쳤지. 루드비히 대신 국정 수습하고, 애들 몫까지 대신 일하느라. 그 무렵엔 압실론도 마탑에 박혀서 안 나왔거든. 그런데 바쁜 게 훨씬 나았어. 한가해지면 네 생각이 났고, 눈을 감으면 네 꿈을 꿨어.”
“…….”
“괴로워서 네 꿈을 안 꾸게 해 달라고 매일매일 빌었어. 그러다 어느 날 정말로 네 꿈을 안 꾸게 되었는데, 너무 무섭더라. 네 꿈을 안 꾸게 된 게 무서운 게 아니라, 너는 이미 이런 매일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게.”
“…….”
“그리고 너는 5년이 지나 나타났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해맑은 얼굴로.”
“그건, 내가 좀……. 잘못했어.”
그때의 나는 우리의 재회를 얼마나 가볍게 생각했었는지.
나는 문득 생각했다. 드래곤 토벌이라는 과제가 남아 있다는 건, 어쩌면 불행이 아닌 행운일지도 모른다고. 우리에겐 아직 풀리지 않은 게 많았다. 감정은 해묵을 대로 해묵었고, 우리를 둘러싼 상황은 복잡했다. 그저 죽음을 목전에 두고 가장 깊고 강렬한 감정으로 서로를 대하게 된 것뿐.
“나는 뭐든 빨리 배워.”
“응?”
“그러니까, 다음은 더 잘할 거야.”
무슨 소리인가 싶어 의아한 시선으로 마티어스를 바라보는데, 그의 광대가 벌겋게 익어 있었다.
“그러니까…… 다음이 궁금하면 살아남으라고.”
“그…… 알았어. 기대할게.”
생존 의지를 상당히 애먼 방식으로 북돋는구나. 나도 뭔가 생존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말을, 해 줘야 하나. 그런데 어젯밤의 경험이 너무 강렬했는지, 그런 쪽으로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 다음엔…….”
나는 망설이다가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어 나갔다.
“밝은 데서, 하자.”
내 말에 마티어스가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 * *
만찬이 끝난 후, 우리는 둘로 갈라졌다. 앞의 조는 동굴을 나가 둥지 입구로 향했고, 우리는 마티어스가 발견한 통로에서 대기했다.
“도착했다.”
눈앞에 띄운 영상을 보며 압실론이 말했다. 앞 조에 딸려 보낸 영상 아티팩트가 드래곤의 둥지 입구를 비추고 있었다. 둥지 입구는 드래곤 아종이 한 번에 서너 마리는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 앞에 선 기사들이 장난감 병사처럼 작아 보였다.
아가리를 쩍 벌린 둥지 안으로 마티어스가 제일 먼저 걸어 들어갔다. 혹시나 문제가 생겼을 때를 대비해 마티어스는 제일 앞에, 루드비히는 제일 뒤에 서게 되었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며 밝았던 영상구가 점차 어두워졌다. 나는 초조함에 마른 입술을 핥았다.
한참을 들어간 뒤에도 둥지 안은 아무도 없는 듯 조용했다. 때때로 불어오는 바람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던 병사들의 놀라는 빈도가 적어졌을 무렵이었다.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던 마티어스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마티어스의 입이 벌어지는 것과 동시에 화면 중앙에 푸른 점이 생겨났다.
‘숙여-!’
영상구 속의 마티어스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휘오오오! 손가락 하나 크기였던 푸른 점은 순식간에 거대해져 영상구를 가득 메웠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드래곤이, 빙결 마법을 쓴 것 같아.”
압실론이 침착하게 상황을 중계했다. 영상 속의 빙결 마법은 수 초가 지나도록 꺼지지 않았다. 영상구가 둥지 속이 아니라 얼음 구덩이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전멸한 거 아니야……?”
영상을 지켜보던 토벌대가 크게 술렁였다. 개중에는 재수 없는 말을 내뱉는 종자도 있었다. 나는 못 들은 척하며 압실론을 간절히 바라보았다. 물어뜯은 입술에서 찝찔한 피 맛이 났다. 그러나 압실론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