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공들이 미쳤는데 로그아웃이 안 된다니요-129화 (129/149)

#129

나는 당당해질지, 모른 척할지, 압실론이 돌아오면 치유를 부탁해야 할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다 머릿속이 반짝, 전구가 켜진 것처럼 환하게 빛났다.

“아! 마티어스 너 포션 있지 않아?”

“있……지.”

“그거 좀 줘.”

포션이 이것까지 부상으로 쳐 줄지는 몰랐지만, 밑져야 본전이었다. 마티어스가 난처한 듯 혀로 입술을 핥았다.

“가방 속에…….”

“…….”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맞다, 얘 짐 다 두고 왔지……. 덕분에 탈영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 수 있긴 했지만…….

끙끙거리며 괴로워하고 있는데, 마티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기다리고 있어. 기사들한테 포션 있는지 물어보고 올게.”

깨어났나 보네. 다행이다. 나는 제발 그들에게 포션이 있길, 그 포션이 내게 효과가 있길 간절히 기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티어스가 포션 두 병을 달랑달랑 손에 쥐고 돌아왔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마개가 빠졌다. 마티어스가 내게 그것을 내밀었다.

“여기.”

나는 입술에 포션병을 붙인 뒤 그것을 단숨에 기울였다. 달착지근한 포션이 식도를 적시며 내려갔다.

효과가 있나.

바로 수치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현재 시스템 창을 꺼 놓은 채였다. 웬만하면 시스템 창은 켜 놓고 싶었는데, 마티어스도 주체할 수 없었는지 행위가 거칠어지자 자꾸 공격받고 있다는 경고문이 뜨는 바람에 민망함을 견딜 수 없어 꺼 버렸다. 어딘가에 그런…… 사적인 상황일 때는 그 경고를 안 뜨게 하는 설정도 있을 텐데, 애초에 청소년 모드로만 해 놓았었기에 그런 설정을 만질 수가 없었고 그럴 겨를도 없었다.

“좀, 어때?”

마티어스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시간이 좀 지난 후 허리를 통통 두들겨 보았다. 아까보다 몸이 훨씬 가볍고 허리의 통증도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고급 포션이었던 모양이었다.

“많이 괜찮아졌어.”

“다행이다…….”

마티어스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이제 토벌 끝날 때까지는 좀…….”

“알았어. 자제할게.”

“…….”

아니, 자제가 아니라 하지 말자고 하려고 했는데…….

마티어스가 사고 친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걸 보고 있자니, 그런 말을 하는 건 좀 가혹한 것도 같고…….

그래, 그럴 상황이 또 오겠어? 그리고 나도, 싫었던 건 아니었고……. 나는 하려던 말을 얌전히 속으로 삼켰다.

“그래.”

마티어스가 나를 끌어안고 이마에 입 맞췄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나도 마티어스의 뺨에 살짝 입을 맞췄다. 이내 뺨에, 코끝에, 턱에, 눈꺼풀 위에 마티어스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간지러워.”

입맞춤이 내려앉는 얼굴도, 마음 안쪽도 수천 마리의 나비가 날갯짓하는 것처럼 간질거렸다. 나는 그를 가볍게 타박하면서도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시선 끝에 마티어스의 허리춤에 있는 검이 와 닿았다. 어제 있었던 일이 전부 꿈같았다. 아니면 지금이 꿈이거나. 다행히 아직 허리에 통증이 약간 남아 있어, 뺨을 꼬집어 볼 필요는 없었다.

그때, 동굴 밖에서 작은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마티어스가 나를 끌어안은 채 검을 쥐었다.

“나야.”

압실론이 어둠 속에서 몸을 드러냈다. 나를 마주한 압실론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눈을 깜빡였다. 왜 그러나 싶어 의아하게 바라보는데 압실론이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돌아온 거 보니, 좋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원래 내 모습으로 돌아왔지.

압실론이 가까이 다가와 내 검은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정말, 좋아.”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압실론의 모습을 보자 마음속에 돌이 얹힌 기분이 들었다. 돌려줄 수 없는 마음에 대한 죄책감일까.

“애들은?”

“곧 올 거야.”

압실론의 말대로 동굴 안에 다수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수색을 나갔던 기사들이 휴식하고 있던 곳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루드비히와 체자레가 압실론이 그랬듯 살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 이내 웃었다.

“돌아왔네요, 이현.”

“……응.”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서일까, 자연스레 반말이 흘러나왔다.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었다.

“아마 무슨 일이…… 있었나 보죠?”

체자레가 살포시 웃으며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슨 일은……. 그런 거 없어. 그냥 돌아온 거야.”

말하면서도 속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진짜 체자레 얘는…… 못 속이겠다.

루드비히도 한마디 하려나 싶어 그쪽을 바라보는데,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 더…….”

조금 더?

“작아졌군.”

감회가 새로운 듯 루드비히가 중얼거렸다.

“원래 이렇게 작았었나…….”

루드비히가 가까이 와 내 키를 가늠해 보았다. 그렇게 작은 키도 아닌데. 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나자 루드비히가 옅게 미소 지었다.

“이리 와. 같이 회의해야지.”

* * *

나는 회의에서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모두 쏟아 냈다. 심각에게 들어 알고 있는 정보들이었다. 그들은 내 정보를 들은 뒤 새롭게 계획을 짰다.

이 드래곤은 자존감이 높고 자만심이 강한 편이었다. 처음부터 이렇게까지 자만하는 타입은 아니었는데, 던전 안에 자신보다 강한 존재가 그간 전혀 없었던 데다 보냈던 토벌대를 전부 전멸시킨 경험이 누적되며 점차 그렇게 바뀌었을 거라고 했다.

우리가 들어온 걸 알아챈 뒤에도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는 걸 보면 인간을 개미나 고블린 정도로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우리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우리가 던전에 들어와 이렇다 할 고위 마법을 쓰지 않았던 것도 드래곤을 방심하게 만드는 데 한몫했을 거라 했다.

그 상황에 갑자기 반란까지 일어나 반쯤 자멸해 버렸으니 인간이 얼마나 만만해 보였을까.

그런 상황들이 차곡차곡 쌓여 이야기는 우리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하지 못했다.

애초에 공 넷이 모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나를 빼돌리기 위해 설계된 존재였다. 쉽게 해치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우리는 둥지 주변을 샅샅이 탐색한 압실론의 말을 토대로 인원을 두 조로 나누었다.

둥지 앞쪽에서 들어가는 조와 뒤쪽으로 들어가는 조였다. 앞 조에는 루드비히와 마티어스, 체자레, 기사들이 속해 있었고, 뒤의 조에는 압실론, 마법사들과 내가 속해 있었다.

계획은 간단했다.

앞의 조가 드래곤을 정면으로 상대하는 동안 뒤에서 고위 마법을 쏟아부으면 됐다.

사실 뒤 조에 비해 앞 조의 위험 부담이 컸다. 마법사들로 구성된 뒤 조에 비해 앞 조에는 기사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드래곤을 상대하기엔 다소 모자람이 있었다. 앞 조만 떼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토벌에 실패하면 우리 또한 죽은 목숨이었다. 결국 우린 한배를 탄 셈이었다. 먼저 죽고 늦게 죽고의 차이일 뿐이었다.

헤어지기 전, 우리는 마지막 만찬을 즐겼다. 고블린 마을에서 약탈한 것들을 신분 고하에 상관없이 똑같이 나누어 먹었다. 만찬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만큼 음식의 양은 적었다. 내게는 사과 한 알과 어포 두어 조각, 생채소 약간이 주어졌다. 마지막 만찬이라기엔 참으로 소탈했다.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배가 고프지 않았다. 괜스레 뭘 먹었다간 체할 것 같았다. 나는 어포를 조금 깨작거리다 내려놓았다. 그런 내 앞에 사과 한 알을 깨끗이 해치운 압실론이 보였다.

“압실론.”

내 부름에 압실론이 뒤를 돌아보았다. 내 손을 떠난 사과가 포물선을 그리며 압실론의 손에 안착했다.

“너 먹어.”

“으응. 고마워, 이현.”

압실론이 배시시 웃으며 내게 받은 사과를 와삭 베어 물었다.

“맛있다.”

“그래.”

“이현이 줘서, 더 맛있는 것 같아.”

“그러냐.”

“이현.”

“응.”

“난 죽는다면, 이현 옆에서 죽을래.”

“그래…… 뭐?”

물을 마시려 수통을 기울이던 나는 그것을 쏟기 전 아슬아슬하게 바로 세웠다.

“그러니까, 이현이 먼저 죽는다면, 내가 그 옆으로 가겠지만…… 내가 먼저 죽으면, 내 옆으로 와 주면 안 돼?”

“…….”

이런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던지라 정신이 멍해졌다. 내가 대답하지 않는 게 거절의 의사라고 생각했는지 압실론이 슬며시 내 눈치를 보며 조그맣게 말했다.

“나, 가능하면 마티어스 옆에, 있을 테니까…….”

압실론의 말에 가슴께가 뻐근하게 저려 왔다. 아무것도 모르고 해맑던 어린아이가 사실 모든 진실을 알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는 기분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압실론이 이렇게까지 약한 소리를 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아니, 처음인가. 나는 무심코 그러겠다고 하려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싫어.”

내 거부에 압실론의 눈가가 축 처졌다.

“우리 토벌 성공할 거니까, 그런 약속은 안 할 거야.”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

“없어, 그런 거.”

나는 무조건 여기서 나갈 거고, 너희를 데려갈 거야.

“그러니까 너도…….”

“이현.”

그런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려고 하는데, 누군가 뒤에서 나를 호명했다. 낯선 듯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자연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어둑한 동굴 속에서도 붉은 머리칼이 선명하게 보였다.

“마티어스.”

“잠깐 시간 돼?”

대화를 끊은 게 멋쩍은 듯 마티어스가 목덜미를 긁적이며 말했다. 나는 압실론을 돌아보았다.

“다녀와, 이현.”

압실론이 순순히 나를 보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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