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일생일대의 고백이 끝난 뒤에도 마티어스는 한동안 반응이 없었다. 그 주변으로 시간이 정지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수 초가 지난 뒤 마티어스가 불쑥 손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과 뺨이 마찰하며 북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도 마티어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걸 볼 수 있었다.
“꿈이 아니야…….”
마티어스가 꿈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처럼 멍하니 중얼거렸다.
“말이 안 되는데.”
“뭐가 말이 안 되는데?”
“그럴 리가 없잖아……. 네가 나를…….”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럼 지금까지 우리가 했던 스킨십은 뭐라고 생각해?”
고민하던 마티어스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성욕?”
“…….”
나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으면, 진작 욕망에 충실하지 않았을까? 너랑만 키스하는 게 아니라 넷 다 불러 놓고 매일 밤 질펀하게 놀았겠지.”
“그건 그렇긴 한데…… 근데 나를 왜 좋아해?”
이대로 가다간 도돌이표일 뿐이었다. 나는 직구를 던지기로 했다.
“너는 날 왜 좋아하는데, 그럼.”
마티어스가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유 없지? 있어도 바로 대기 힘들지? 나도 그래. 그냥 좋아하는 거야.”
마티어스가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나는 마티어스의 뺨이 더 불쌍해지기 전에 그의 팔을 붙들었다.
“꿈 아니니까 그만 때려.”
마티어스가 제 팔을 쥔 내 손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나는, 네가…… 루드비히를 좋아하는 줄 알았어.”
그랬던 때도 있었다. 루드비히와의 감정은 복잡했다. 시간과 감정, 폭력과 억압이 한데 뒤섞여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까맣게 물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어긋났다는 말이 가장 적절하겠지. 나는 마티어스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래서, 너를 좋아하는 나는 싫어?”
마티어스가 입술을 깨물며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내 그가 불쑥 으스러지도록 나를 끌어안았다.
“……!”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괜찮아. 얘는 괜찮아. 나를 해치지 않아. 나는 심호흡을 하려 애썼다. 그 사실을 알아챘는지 마티어스가 힘을 살짝 풀었다. 숨쉬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내가 너를 어떻게 싫어하겠어.”
내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은 마티어스가 입술을 달싹이다 말했다.
“너는 자꾸 나를…… 등신처럼 만들어.”
나는 황당한 시선으로 마티어스를 올려다보았다. 아차 싶었는지 마티어스가 부연 설명을 이어 나갔다.
“믿고 싶게 만든다고. 진실일 확률보다 거짓말일 확률이 훨씬 더 높은데도.”
“거짓말 아니라니까…….”
나는 말끝을 늘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양치기 소년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억울했지만, 역사가 있으니 이해는 했다.
진심이 진심이라는 걸 알기엔 우린 너무 멀리 왔다. 하지만, 아직 사랑은 할 수 있었다.
“믿어 달라는 말은 못 하겠다, 솔직히. 그러니까 그냥 지켜봐. 이젠 실망시키는 일 없게 할 테니까.”
나는 마티어스를 마주 안으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마티어스가 이내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린애 같은 행동에 비해 머리가 묵직해 몸이 한 차례 휘청였다.
“……입 맞추고 싶어.”
마티어스가 사탕을 조르는 어린아이처럼 말했다.
“하면 되잖아?”
나는 작게 웃으며 마티어스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입술을 떼기도 전 마티어스가 내 뒤통수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갈급하게 내 안으로 파고들어 왔다. 나는 순순히 입을 벌려 주며 적극적으로 입맞춤에 응했다.
“응…….”
젖은 살덩이가 질척하게 섞여 들었다. 입맞춤이 점차 부드러워졌다. 금방이라도 혀가 녹아내릴 듯한 감각에 아랫배가 저릿했다. 맞붙은 허벅지에 뜨거운 것이 닿았다. 마티어스는 한참 뒤에야 입술을 떼어 냈다. 호흡이 달려 헐떡이는 나를 마티어스가 열이 오른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더한 것도 하고 싶어.”
“여기서?”
마티어스가 젖은 입술을 핥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티어스가 나를 이안으로 알고 있었을 때, 우리는 자주 입을 맞추면서도 그 이상은 하지 않았다. 사실은 그때부터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러니까 이현은 마티어스에게 대체될 수 없다는 걸.
증명받고 싶은 걸까. 나를 믿을 수 없어서. 증명을 위한 첫 경험이라니.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라면 못 할 것도 없었다. 막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마티어스가 내게 경고하듯 말했다.
“그러니까, 도망치려면 지금 해.”
“…….”
그는 욕망에 들끓는 시선을 하고도 내게 기회를 주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사랑하지 않는 법을 몰랐다.
나는 그에게서 뺨을 떼어 내고 반걸음 물러났다. 마티어스의 낯에 언뜻 실망의 빛이 스쳤다. 나는 두어 번 호흡한 뒤 그들의 앞에서는 꺼낼 거라는 생각도 하지 못한 말을 내뱉었다.
“나는, 이현이야.”
나는 이현이야. 나는 이현이야.
해금(解禁)을 알리는 세 번의 주문. 말을 끝내자 머리카락 끝에서부터 빛무리가 번지기 시작했다. 금제는 내게 걸려 있는 게 아니었으니, 나는 언제나 나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온몸이 환한 빛에 둘러싸였다. 뼈가 으깨어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얼굴형과 골격이 변화했다. 내 몸이 나에게 돌아오고 있었다.
“…….”
나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예전에 비해 시선이 조금 내려가 있었다.
“이제부터는 좀 더 올려다봐야겠네.”
나는 손을 뻗어 마티어스의 뺨을 쓰다듬었다. 까칠한 뺨이 그간 고생한 흔적을 알려주는 듯했다. 마티어스가 울 것 같은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입술이 닿기 직전, 나는 그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건 너야. 나는 이제, 돌아가는 길을 몰라.”
* * *
“으응…….”
설핏 잠에서 깨어난 나는 습관처럼 손끝으로 주변을 더듬었다. 등 뒤로 누군가의 배 근육과 골반이 선명하게 만져졌다. 어둠이 익은 눈앞에 마티어스의 팔이 보였다. 계속 팔베개해 준 건가.
“더 자. 괜찮으니까.”
그가 나를 끌어안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냐, 일어나야지. 압실론도 곧 올 거고…….”
나는 마티어스의 팔뚝을 손끝으로 간지럽히며 말했다. 그러나 그 장난은 마티어스가 이은 말에 바로 멈췄다.
“압실론, 이미 왔다 갔어.”
“……뭐라고?”
얘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는 믿기지 않아 다시 물으려 몸을 벌떡 일으켰다가 도로 엎어졌다.
“으윽…….”
“뭐야, 어디 아파?”
머리 위로 당황한 마티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 허리가……. 너무 아픈데…….”
이게 원래 이렇게 아픈 건가? 실제로는 아프다고 듣긴 했는데, 게임 속에선 그냥 좀 좋기만 해도 되는 거잖아. 나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고통에 괜스레 억울해졌다.
“허리? 허리가 왜 아프지?”
마티어스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허리만 아픈 거 아니니까 조용히 해. 그리고…… 압실론이 왔다 갔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그게 제발 마티어스의 꿈속에서만 일어난 일이길 바랐다.
“두 시간쯤 전에 와서 드래곤 둥지랑 이어져 있는 게 맞았다고 확인해 주고 갔어.”
마티어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하지만 나한텐 대수였다. 엄청 대수였다.
“그런데 압실론이 왔다 간 게 그렇게 큰일이야?”
“당연하지. 그럼 우리가 뭘 했는지도 알았을 거 아니야……!”
나는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질질 끌어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는 옷 뭉치로 손을 뻗었다. 마티어스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우리가 한 거…… 다른 애들은 알면 안 되는 일이었어?”
마티어스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이거 말 잘해야 한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나는 조심스레 말을 골라 답했다.
“알면 안 되는 일이라기보다는…… 부끄럽잖아.”
급히 바지 안에 다리를 넣고 허리춤을 조이고 있는데 마티어스가 슬며시 웃으며 나를 다시금 끌어안았다.
“그래, 부끄러워서…….”
“너, 너는 우리가 그러는 거 다른 사람한테 보여 줘도 괜찮아?”
내 말에 마티어스가 다시 웃음을 터트리며 큰 손바닥으로 내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당연히 안 괜찮지. 근데 하는 도중도 아니었고 망토도 잘 덮고 있었어. 네가 도중에 기절하지 않았으면 상황은 좀 달라졌겠지만.”
여유만만한 모습이 얄미워 나는 눈을 흘기며 여전히 망토 한 장만 덮고 있는 마티어스의 등을 밀었다.
“옷이나 입어.”
그리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여전히 허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웃고 있던 마티어스의 표정이 다시금 조금 어두워졌다.
“압실론 불러올까?”
“불러와서 뭐 하게.”
“치유 마법이라도…….”
“불러오면 가만 안 둔다.”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마. 그게 도와주는 거야.”
마티어스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키는 대로 얌전히 옷을 입는 마티어스를 보니 귀엽다가도 그걸 귀엽다 느끼는 내가 어이가 없었다.
“야, 너는 드래곤이 코앞에 있는데…… 무섭지도 않아? 아니, 넌 안 무섭겠다. 걔 앞에서 어기적거리다 죽는 건 나일 테니까.”
“……몰랐어. 이렇게까지 아플 줄은.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내가 목숨 걸고 지킬게. 절대 네가 먼저 죽게 두진 않을게.”
“…….”
그냥 좀 투덜대 본 건데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나오니 할 말이 없었다. 나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 그냥 투덜대 본 거야. 좀 쉬면 괜찮을 것 같아.”
“그럼 좀 더 쉬어 둬.”
“압실론 왔다며?”
“다시 갔어. 이 동굴로 들어가 습격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애들 데려오겠대.”
“…….”
이 상태면 우리가 한 거, 체자레는 바로 눈치챌 텐데.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나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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