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뭐?”
“찾지도 말고, 구하려 하지도 마.”
투정이 아니라 진심이라 어이가 없었다.
“네가 죽든 말든 상관하지 말라고?”
“그래.”
퍽이나 그렇게 할 수 있겠다!
아까부터 마티어스가 보이는 체념한 태도가 내 성질을 살살 긁었다.
“그건 너도 내가 눈앞에서 몸이 찢겨 죽든 사지가 하나 떨어져 나가든 상관 안 하겠다는 말이야?”
나는 결국 다정하고 침착하게 대화하는 선택지 대신 뾰족하게 쏘아붙이는 선택지를 택했다. 마티어스가 내 말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너랑 나는 달라.”
“뭐가 다른데.”
“너는 나 없이도 살 수 있지만…….”
마티어스가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넌 나 없이 못 사니까, 나 없이 구질구질하게 사느니 나 있을 때 깔끔하게 죽는 게 나을 것 같다, 뭐 그런 말이야?”
“……그래. 잘 아네.”
한껏 비꼰 말을 마티어스가 진심으로 긍정하자 더 열이 받았다.
“그래, 네 마음도 모르고 눈치 없이 구하러 와서 미안하게 됐다!”
나는 마티어스에게서 완전히 뒤돌아섰다. 등 뒤에서 마티어스가 짧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이런 대화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는데. 자신을 소중하지 않게 대하는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 하여간 이놈이나 저놈이나.
“그쪽 아니야.”
마티어스가 쿵쿵거리면서 걷고 있는 나를 불러 세웠다.
“나도 알아. 상관하지 마.”
“고집 부리지 말고 이쪽으로 와.”
“고집 아니야, 진짜 따라오지 마. 지금은 너 보기 싫으니까.”
나는 그 말을 남긴 채 반쯤 달리듯이 걷기 시작했다. 마티어스가 내 말을 무시한 채 내 뒤를 따랐다. 나는 거의 뛰고 있는데 마티어스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걷는 것에 그치는 것도 열 받았다.
“아, 오지 말라……!”
어두운 곳에서 걸음을 빨리하던 나는 결국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넘어지기 직전 마티어스가 뒤에서 내 팔을 붙잡았다. 마티어스와 밀착하며 그의 체향이 훅 짙어졌다.
“놔.”
나는 마티어스의 손을 뿌리치며 그를 노려보았다. 내 차가운 태도에 마티어스가 이해 못 하겠다는 듯 물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화가 난 건데?”
“너 같으면 화가 안 나겠냐? 기껏 구하러 왔더니 앞으로는 죽든 말든 구하지 말라는 말이나 듣고 있는데?”
“어차피 버리고 갈 거라면 좀 더 일찍 버리라는 말이야. 너한텐 그렇게 힘든 것도 아니잖아.”
“와, 너 오늘 진짜 말 많다.”
다 처맞을 말이라는 게 문제지.
“더 해 봐. 이제 구하러도 못 가서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 해야지.”
빈정거리려 꺼낸 말이었는데 뜻밖에 마티어스가 할 말이 있다는 듯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짧은 망설임 끝에 마티어스가 물었다.
“진짜 한다.”
“어, 해 봐. 다 해 봐. 다 대답해 줄 테니까.”
내 허락을 듣고도 마티어스는 한참이나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버리고 갈 거면서 꽃은 왜 보관했어?”
“꽃? 무슨 꽃 말하는…… 아, 나 비아나 앞에 두고 가 버리게 한 그 꽃?”
내 말에 마티어스가 상처받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상처받아야 할 게 누군데.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그때 얼마나 어이없었는지 알아?
“……얘기하기 싫으면 됐어.”
“누가 싫대? 별생각 없었어. 그냥 예뻐서 끼워 놓은 거야.”
“……아, 그래.”
마티어스가 묘하게 체념한 듯한 태도로 중얼거렸다. 진짜 성질 돋우네. 차라리 화를 내라. 마티어스가 이러고 있으니 도무지 적응이 되지가 않았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마티어스에게 물었다.
“나도 묻자. 너한테 그 꽃은 뭔데 그렇게 소중해?”
루드비히의 꽃반지처럼 내가 만들어 준 것도 아니고, 자기가 준 걸 그저 책 안에 보관해 놓은 것뿐인데.
내 질문에 말문이 막힌 듯 마티어스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렇게 어려운 질문이었나. 그가 한 글자 한 글자 짜내듯 입을 열었다.
“네가 떠나고 온 궁을 다 뒤졌는데…… 네가 이 세상에 남긴 애정의 흔적이 그거 하나더라.”
“…….”
“예전엔 어디서 이상한 돌도 주워 와서 주고, 야시장에서 딴 인형 같은 것도 내밀더니……. 이젠 선물은커녕 여기에 아무 미련이 없는 사람처럼 흔적조차…….”
그거야 전에는 호감도 올리려고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었으니까 이것저것 선물했던 거지. 그 후에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던 거고. 그걸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나는 정말 너를 모르겠어. 이렇게 구하러 온 걸 보면 나를 조금은 좋아하는 것도 같고, 죽을 듯이 미워하는 것도 같고. 계속 옆에 있을 것 같다가도 금방이라도 떠나 버릴 것 같고. 불안하고 두려워서 멈추고 싶은데 마음이 멈춰지지가 않아.”
나는 마티어스의 낯을 보고 싶었으나 그가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있어 보지 못했다.
“다른 애들도 그 꽃 탐냈어. 내가 줬으니 내 거라고 우겨서 가지게 된 거지. 압실론이 보존 마법 걸어 주겠다고 했던 것도 거절했어. 손 타게 하고 싶지 않았거든. 그렇게 해서 가졌으면서도 잘 펼쳐 보지도 못했어. 아까워서.”
마티어스가 깊게 들어간 뺨을 문지르며 긴 숨을 내쉬었다.
“네가 내게 남긴 유일한 흔적이라 소중한 것도 있지만, 나랑 신세가 좀 비슷한 것도 같아서.”
“신세가 비슷하다고?”
의아해진 내가 되물었다. 마티어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재미있게 읽었고, 추억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네가 다시 펼칠 일이 희박한 상황에서 너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마티어스가 쓰게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내가, 네가 다 읽은 책에 끼어 있는 꽃갈피 같아.”
내가 그 책 속에서 망가져 바스라진대도 너는 모를 거고, 알게 되더라도 잠깐 아쉬울 뿐 곧 잊어버리겠지. 여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이어진 마티어스의 말이 나를 무참히 찔러 왔다. 공격할 의사가 없는 말들이 이렇게 아플 수도 있다는 걸 나는 지금 알았다.
“그래서 그랬어. 그 꽃이 망가졌을 때, 네 흔적 하나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게 무서웠고, 나도 함께 망가진 것 같아 두려웠어. 꽃은 내게 그런 의미였어.”
“…….”
“답이 됐어?”
나는 마티어스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마티어스도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내가 위기에 빠졌을 때 구하지 말라는 말 말고, 사실은 다른 말을 하고 싶었어.”
마티어스가 제 검을 빼 내게 건네주었다. 얼떨결에 검을 쥐게 된 내가 의아한 시선으로 마티어스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또 떠날 거라면, 그 전에…… 나 좀 죽여 주라.”
마티어스가 검날을 제 목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얼어붙었다.
“네 식대로의 다정함이 나는 너무 고통스러워.”
나는 마티어스의 목에서 바로 검을 떼어 내려 했지만, 그가 검날을 쥐고 있는 탓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장난도 아니었고, 협박도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나는 검을 든 손을 떨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했다. 날카롭게 갈린 검날이 금방이라도 마티어스의 목을 베어 낼 것 같았다.
“내가 조금 더 잘하면, 꼭 너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아서. 언젠가는 나를 돌아봐 줄 것 같아서…….”
마티어스가 낮게 가라앉아 쉰 목소리로 말했다. 마티어스가 검에서 손을 떼어 낸 채 눈가를 세게 문질렀다. 그의 손바닥이 물기에 번들거렸다.
“나는 그만두고 싶어도 못 그만둬. 그러니까 차라리…….”
“……그만두지 마.”
나는 검을 내버린 채 마티어스를 거세게 끌어안았다. 검이 돌바닥에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내게 안긴 마티어스가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는 못 다정하겠어? 아니면, 이런 내 꼴을 보는 게 재미있어?”
“아니. 전부 아니야.”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뭔데.”
나는 마티어스의 물음에 망설임 없이 답했다.
“나, 이제는 내가 네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아.”
“……그게, 무슨 뜻이야.”
마티어스가 한 대 맞은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더듬더듬 물었다. 시종일관 체념한 것처럼 굴었던 마티어스의 눈동자에 빛 망울이 맺혔다.
나는 마티어스의 셔츠를 쥔 채 발뒤꿈치를 들어 올렸다. 우리 둘의 입술이 가볍게 맞닿았다. 놀란 듯 마티어스가 눈을 깜빡였다. 이내 별다른 저항 없이 입술이 열렸다. 입 안을 온통 물어뜯었는지 마티어스의 입 안에서는 비릿한 소금 냄새가 났다. 나는 그의 아랫입술을 빨며 입을 떼어 냈다.
“……이런 뜻이야.”
“……또 거짓말하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
“맞아. 그럴 필요 없어. 그럼 이건, 진심이겠지.”
마티어스는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는지 헷갈리는 듯했다. 나는 조금 더 힌트를 주기로 했다.
“네가 추리한 것 중에 틀린 게 하나 있어.”
“……틀린 거?”
“이 세계에서 죽으면, 밖에 있는 진짜 나도 죽어. 그때 내가 비아나한테 죽었으면, 진짜 나도 죽었을 거야.”
“그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마티어스가 죄책감 어린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사과 듣자고 꺼낸 말은 아니지만, 좀 괘씸했으니까 받긴 할게.”
“…….”
“비아나가 네 모습으로 변했다면 인정하는 한편, 의심을 거두지 못했을 거야.”
리로처럼, 이게 정말 시스템의 농간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마음 한편에 남아 있었겠지.
“그런데 비아나한테 죽는다고 생각하는 순간, 네가 떠오르더라.”
“…….”
나는 한차례 호흡한 뒤 말을 이어 갔다.
“루드비히도, 압실론도, 체자레도, 바깥 세상의 사람들도 아니고, 마티어스 크롬하트. 내 마지막 순간이 온통 너였어. 나 버리고 간 놈 뭐가 예쁘다고, 너만 생각났어.”
“나만 생각났다고……?”
마티어스의 낯에 의심과 설렘의 빛이 차올랐다.
“그래, 나는 네가 신경 쓰여. 내 세계의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
“내가 널 좋아한다는 뜻이야.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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