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마티어스.”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마티어스의 뺨이 순간 경직되었다. 손끝에 내 것보다 뜨거운 마티어스의 체온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일어나.”
마티어스는 내 부름에 대답하는 대신 거미줄을 더 넓혀 내가 나올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묘하게 어색하고 서늘한 태도를 보니 환상은 아닌 듯했다. 아니면 아주 고차원적인 환상이든가.
나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랫동안 몸이 조여져 있었던 탓에 뒤늦게 피가 돌며 온몸이 따끔거렸다. 탄산이 온몸을 돌아다니는 듯한 감각이 가실 때쯤, 주변을 살피던 마티어스가 내게 따라오라는 듯 손짓했다. 나는 어색한 걸음걸이로 그의 뒤를 따랐다. 마티어스의 붉은 뒷머리가 눈앞에 있는데도 아직 꿈인 것 같았다. 복잡하고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 도착한 곳에는 뜻밖의 손님이 있었다.
“압실론……?”
압실론과 병사 둘이 동굴 한편에 누워 있었다. 나를 본 압실론이 몸을 일으킨 뒤 내 쪽으로 쪼르르 달려와 안겼다.
“이혀언.”
환상과는 달리 압실론은 여전히 다정했다. 내심 긴장하고 있었는지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압실론의 등을 토닥였다.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야?”
“어떻게 된 거냐면…….”
정황은 이랬다. 절벽에서부터 호수와 동굴이 전부, 환상 거미의 집이었다.
마티어스는 나와 대화를 끝낸 뒤 이곳저곳을 방황했다. 절벽 근처에서 호수를 내려다보다가 일어나려던 찰나에 절벽이 무너졌다고 했다. 발견된 옷가지는 나뭇가지를 잡다가 찢어진 흔적이었다.
동굴에 들어가 잠시 몸을 말렸던 마티어스는 환상 거미에게 당할 뻔했지만, 스스로 빠져나왔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시간이 지체되었고, 돌아가려 출구를 찾다가 동굴 안쪽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했다.
“그게…… 이동 마법진이었다고?”
“……그래.”
마티어스의 말이 맞았다. 가고일, 고블린, 비아나 등은 전부 이 던전이 생겼을 때부터 수도에 출몰하기 시작한 몬스터들이었다. 이 동굴에 있는 마법진을 통해 밖으로 나왔던 거였구나.
“파훼 과정이 좀 복잡해서 시간이 좀 걸렸어. 돌아가려고 했는데 이번엔 나를 찾으러온 병사들이 환상에 당했더군.”
“…….”
“두 놈 구하고 나니 이번엔 너희가 온 거고.”
“난 환상에, 안 당했어.”
“그래, 넌 안 당했지.”
“…….”
압실론이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 내가 당했다! 그래도 나도 금방 빠져나왔는데…….
그러니까 마티어스는 처음부터 도움이 필요 없었던 셈이었다. 호들갑을 떨었던 게 괜스레 민망해졌다. 마티어스가 턱을 쓰다듬으며 미간을 미세하게 찌푸렸다.
“하나 더 발견한 게 있어.”
“뭔데?”
“이 동굴이 드래곤의 둥지와 연결이 되어 있는 것 같아.”
마티어스의 말에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그럼 위험한 거 아니야?”
“괜찮을 것 같아. 최근 이동 마법진을 쓴 흔적이 없었으니까.”
왜 그런 걸까, 생각하던 나는 곧 진실을 알아차렸다.
“우리가 이 던전에 들어와서구나.”
“그래.”
우리가 몬스터를 해치우는 바람에 밖으로 보낼 몬스터가 부족해진 거였다. 이런 인과가 있을 줄이야.
“드래곤의 둥지와 연결되어 있는 건 어떻게 안 거야?”
“……어쩌다 보니.”
마티어스가 고개를 돌리며 작게 헛기침을 했다. 아, 얘 길 잘 못 찾지. 출구 찾다가 길 잃어서 둥지 입구까지 갔다 온 거구나. 나는 애잔한 시선으로 마티어스를 올려다보았다.
“둥지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는, 데가 어딘데?”
“저쪽으로 십 분 정도 들어갔다가 갈림길에서 계속 왼쪽으로 가면 돼. 두 시간 정도 걸으면 나올 거야.”
“…….”
마티어스가 세 개의 갈림길 중 첫 번째 갈림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두 시간이나 걸었구나, 마티어스……. 압실론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뗐다.
“가서 조사해 보고, 올게.”
“나도 같이 가.”
“아니, 이현은 여기 있어.”
압실론이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엉거주춤하게 일어났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지만, 반나절 안에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여길 빠져나가. 얘가 돌아가는 길을 알려 줄 거야.”
압실론이 마법 전서응을 소환할 수 있는 반지를 마티어스를 향해 던졌다. 마티어스가 한 손으로 반지를 받아 들었다.
“다 모여서 가는 편이 낫지 않아?”
내가 조심스레 묻자 압실론이 고개를 저었다.
“혼자 가서 조사하는 편이, 더 나아. 둥지로 접근하기에 괜찮다 판단되면, 사람들을 이쪽으로 불러 모으려고.”
압실론의 생각은 확실히 합리적이었다.
“조심히 다녀와.”
내가 걱정스레 말하자 압실론이 나를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알았어, 이현.”
압실론이 떠나가자, 남은 인원은 넷이 되었다. 사실 기사 둘은 가사 상태와 비슷한 잠에 빠져 있었으므로, 마티어스와 나 둘뿐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나는 마티어스를 흘깃 바라보았다. 시선을 눈치챈 마티어스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
어색한 침묵이 한동안 이어졌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는데, 놀란 마음이 사라진 자리에 눈치 없이 졸음이 들어찼다. 나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다가 퍼뜩 고개를 들자 마티어스가 내게 훅 다가와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마티어스를 보며 눈을 끔뻑였다.
“눈 좀 붙여. 옆에 있을 테니까.”
오랜만에 들은 말이 의외로 다정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감았다. 어깨 너머로 느껴지는 마티어스의 체온이 따뜻해 안심이 됐다.
* * *
얼마나 잤을까. 깜빡 잠에서 깨어난 나는 옆에 마티어스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에 머리가 핑 돌았다. 아니, 이런 것까지 구현할 필요 있나요…….
얘는 또 어딜 간 거야. 어디 묶어 놓든가 해야지……. 아니, 이건 취소.
“하아…….”
내가 튀었을 때 너희도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이해하고 싶지 않은 걸 자꾸 이해하게 되는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나는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마티어스의 흔적을 좇았다. 발밑에 마티어스의 망토가 떨어져 있었다. 내게 덮어 주었는데 일어나며 떨어진 모양이었다. 나는 망토를 집어 들며 깊숙이 숨을 들이마셨다. 망토에서는 햇살을 가득 머금은 바다 냄새가 났다. 이상하게도 그 냄새를 맡자 갈증이 났다. 나는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주변을 관찰하던 나는 나와 세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몬스터의 체액을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 상태를 확인하니 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축축하고 끈적끈적했다. 체액은 마치 길을 알려 주듯 길게 늘어져 있었다. 내가 잠들었던 새 여기서 전투가 일어났던 모양이었다. 혼자 하려 들지 말고 좀 깨우지. 나는 검을 빼든 채 체액을 추적해 나갔다.
5분도 채 걷지 않아 나는 마티어스의 뒷모습과 마주했다.
“마티어스.”
내 부름에 검을 든 마티어스가 서서히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전투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낯이 흉흉했다. 마티어스의 날카로운 검 끝에 맺힌 환상 거미의 체액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왜 나왔어.”
마티어스가 검집에 검을 집어넣으며 작게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나는 황당함에 검을 쥔 손을 늘어트렸다.
“네가 없어서…….”
내 말에 마티어스가 어이없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의 표정이 아까보다 다소 유해져 있었다.
“잔당들이 습격해 와서 잠깐 나온 거야. 먼저 돌아가. 거긴 안전하니까.”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싫어, 같이 가.”
“가 있으라니까.”
“싫다고. 같이 있을 거라고.”
내 말에 마티어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 화가 난 것 같았지만, 별로 무섭지는 않았다. 진짜 무서운 게 뭔지 나는 이제 알았다. 내가 버티고 서 있자 마티어스가 한숨을 쉬며 뒤돌아섰다. 왔던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하는 마티어스를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기 돌아가는 길 아닌데.”
“씻으러 갈 거야. 그러니까 먼저 가 있어.”
절대 안 되지. 나는 냉큼 마티어스의 뒤에 따라붙어 그의 망토 끝자락을 쥐었다. 뒤돌아본 마티어스가 허,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뒤따르는 나를 막진 않았다.
3분 정도 걸었을까. 동굴 안에 마법처럼 작은 못이 나타났다.
“……와.”
나는 못을 바라보며 작게 탄성을 질렀다. 못 바로 위의 천장이 뚫려 있어 쏟아지는 달빛이 못을 비추고 있었는데, 부유물인지 플랑크톤인지 모를 것들이 빛을 받아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예쁘다…….”
넋을 놓고 꿈처럼 아름다운 장면을 감상하고 있는데, 못에 한차례 동심원이 생겨났다. 시선을 옆으로 돌리니 마티어스가 못 안에 들어가고 있었다.
“……으흠.”
나는 괜스레 부끄러워지는 마음에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모닥불 가까이 대고 있는 것처럼 뺨이 홧홧했다. 따라온 게 무색하게 나는 마티어스가 씻는 내내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촤악.
금세 몸을 씻은 마티어스가 못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젖은 머리카락 끝에 맺힌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어서 그런지 평소에 비해 좀 유순해 보였다.
“네가 수색에 자원했다며.”
“……어?”
“압실론한테 들었어. 나 찾으러 오는 거.”
“어어, 맞아. 자원했어.”
압실론 이 녀석, 별걸 다 얘기했네. 나는 쑥스러운 마음에 뺨을 긁적이며 답했다.
“왜 그랬어.”
말의 끝음을 내린 탓에 물어보는 건지 책망하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답했다.
“왜 그랬냐니, 말이 좀 이상하네.”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너도 내가 사라지면 날 구하러 왔을 거잖아. 난 너 구하러 오면 안 돼?”
마티어스가 셔츠 단추를 잠그던 손을 멈추고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는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시선을 돌렸다.
“다음엔 오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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