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나는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으로 압실론을 바라보았다. 압실론이 나한테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이 있었던가? 내가 알고 있는 압실론은 비록 정신은 좀 나갔을지언정 항상 이혀언, 하면서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녀석이었는데.
“너 나한테 왜 그래……? 너답지 않아.”
“뭐가 나답지 않다는 거야.”
“예전에는 좀 더…… 다정했었잖아.”
내 말에 압실론이 미간을 좁혔다.
“예전에 언제 말하는 거야? 설마 ‘<소년들>’ 때?”
“‘<소년들>’ 때라니?”
“맞나 보네. 거기서 빠져나온 지가 언젠데, 똑같길 바라?”
“빠져나왔다니?”
“네가 거기서 우릴 빼냈잖아. 이 세계로.”
그제야 압실론의 뒤에 있는 창문에 시선이 갔다. 나는 홀린 듯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내려다보았다. 익숙한 본가 아파트 밑의 풍경이 눈에 띄었다. 예쁘게 조경된 산책로, 산책로를 걷고 있는 사람들, 순찰을 도는 로봇 개, 그들 위로 내리쬐는 햇살. 너무나도 익숙하고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자, 잠깐만. 내가 지금 헷갈려서 그러는데, 내가 너희를 이 세계로 빼냈다고?”
“……오늘 너 진짜 이상하네. 맞아.”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동시에 묘하게 납득이 갔다. 결국 이렇게 됐구나.
“그러면, 다른 애들은 지금 어디 있어?”
“정말 기억 안 나?”
압실론이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런 그에게 상처받고 있음을 알아챘다. 나는 의기소침해진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기억 안 나.”
“한 번만 말해 줄 테니까, 잘 들어. 체자레가 제일 먼저 너를 떠났어.”
“떠났다고? 그럼 지금은 어디 있는데?”
“이 나라 저 나라 다니면서, 여행하고 있지.”
처음 듣는 이야기지만, 납득이 갔다. 체자레라면 그렇게 살 것 같다고 생각했었기에.
“그리고 마티어스는…… 죽었어.”
“……뭐라고?”
“이것도 기억 안 나는 거야? 너랑 있을 때 너한테 시비를 건 사람을 제압했다가, 그 사람이 앙심을 품고 마티어스를 차로 치었어. 그때 데이터가 완전히 망가져 버리고, 손쓸 수 없게 됐지.”
“말도 안 돼…….”
내가 하얗게 질려 중얼거리자 압실론이 비웃듯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왜 말이 안 돼? 대부분의 인간들은 우리를 동등하게 보지 않아. 한순간의 화에 못 이겨 우리를 죽인다 해도 살인죄가 아니라 재물 손괴죄로 처벌받지. 그런 세계로 우리를 끌어낸 건, 다름 아닌 너잖아.”
“…….”
내가 말이 없자 압실론은 다시금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루드비히는, 본래 세계로 돌아갔어.”
“……왜 돌아간 건데?”
“책임감 때문이지. 이젠 너를 그만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걔는 원래 이 세계로, 오는 거 싫어했잖아. 너 때문에 왔던 거지.”
“…….”
압실론의 건조한 사실 전달에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이젠 너를 그만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말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것 같았다. 그렇구나. 이제는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그럼 이제 내 옆에는 너만 남은 거야?”
내 말에 압실론은 나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응, 오늘이 마지막이지만.”
“……마지막이라니?”
“연구소에서 제의가 왔어. 논문을 쓰는데, 내 도움이 필요하대. 그쪽에서 숙식과 월급을 제공해 준다 하더라고.”
“위험해. 사기일 수도 있어.”
“나는 너만큼 멍청하진 않아.”
압실론이 한심하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늘도 짐 찾을 겸 일정 잠깐 빼서, 겨우 온 거야. 할 말 있으면 지금 해.”
할 말이라니. 이 상황에서 무슨 할 말을 찾을 수 있을까.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압실론이 돌아서려고 할 때 즈음에야 겨우 입을 떼었다.
“가지 마.”
“왜?”
“내가 잘할 테니까…….”
내 말에 압실론의 눈 안쪽에 이채가 서렸다.
“하지만 이제 너에게는 더 이상의 가치가 없는데?”
“……뭐?”
“그렇잖아. 그 세계에서야 네가 유일한 인간이었지만, 이제는 아니잖아.”
압실론이 내 가슴 위를 검지로 꾹 누르며 말했다.
“이 세상엔 사람들이 널렸지. 너는 아주 흔하디흔한 보통 사람이고. 그런데 우리가 널 어떻게 계속 사랑하겠어?”
“…….”
“더 말해 줄까? 이 세계의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 세계에서야 신일 수 있었겠지만, 여기서는 티끌보다도 못한 존재지.”
“……없네.”
“뭐?”
나는 내 가슴을 밀듯이 꾹꾹 찌르는 압실론의 손을 쥔 채 말했다. 압실론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뭐라고 한 거야.”
“이 씹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못 하는 말이 없네, 라고 했다.”
내 말에 압실론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어떻게…….”
“그런 말 들으면 내가 상처받을 줄 알았나 봐?”
나는 비웃듯 조소하며 말했다. 이게 환상이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어디까지 하나 보려고 이 연극에 동참했을 뿐. 아마도 이 환상은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걸 보여 주는 거겠지.
체자레는 나를 떠나 세상의 다른 유희거리를 찾고, 마티어스는 나를 지키다 망가지고, 루드비히는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압실론조차 나를 떠나 버리는.
“맞아, 상처받았어. 좀 더 현실적이었다면 완전히 상처받았겠지. 재기 불가능할 정도로.”
압실론은 이제 속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아는 압실론은, 나를 박제할지언정 버리고는 가지 않는 녀석이야.”
“그게 무슨…….”
나는 압실론의 뺨을 향해 있는 힘껏 주먹을 날리며 말했다.
“네가 캐해에 완전히 실패했다는 소리야, 이 개자식아.”
내 주먹을 맞은 압실론이 비틀거리며 다리를 휘청였다. 탁, 손바닥으로 주먹을 감싸며 나는 아까의 압실론이 그랬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어디서 공략 영상 1,000시간도 안 본 게 까불어.”
나는 압실론의 멱살을 잡고 쓰러트린 뒤 다시금 주먹을 날렸다. 압실론은 역력히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동정심을 유발하는 쪽으로 가기로 했는지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 같은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현, 아파아…….”
나는 개의치 않고 다시금 녀석의 얼굴을 날려 버렸다.
“미안한데, 이미 진짜 압실론도 때린 적 있거든?”
내가 계속 그를 때리자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그것이 급히 모습을 바꾸었다. 마티어스의 모습으로. 나는 코웃음을 치며 마저 그것을 패기 시작했다.
“너 진짜 나 모르는구나. 나 얘랑 걸핏하면 치고받고 싸웠어.”
퍽-! 마티어스의 얼굴이 제대로 돌아갔다. 일그러진 마티어스의 얼굴 중앙에 꼭짓점이 생겼다. 이내 그 꼭짓점을 축으로 세상이 소용돌이치며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환상 마법이 파훼되기 시작했다. 역시 마법에는 물리지. 발악하듯 그것이 얼굴에 금이 간 채로 모습을 바꾸었다. 체자레의 모습이었다.
“진짜 고맙다. 나 얘도 한 번쯤은 꼭 패 보고 싶었거든.”
나는 진심을 듬뿍 담아 녀석에게 잊을 수 없는 주먹질을 선사했다. 마지막에는 예상했던 낯이었으나, 예상하지 못한 낯이기도 했다. 나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주먹 쥔 손을 들어 올렸다.
“캐해만 못하는 줄 알았더니, 업데이트도 못하네.”
퍼억. 거센 파열음을 마지막으로 세상이 조각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균열이 진행되고 있는 낯에 박힌 아름다운 자색 눈동자 두 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나는 사랑받고 싶어서 걔네 데려가려는 거 아니야. 내가 사랑해서 데리고 나가려는 거지. 정말로 걔네가 날 떠난다고 해도 내 삶이 끝나는 것도 아냐. 그냥 지금 그 애들과 함께하고 싶을 뿐이지.”
나는 얼얼한 주먹을 매만지며 이지러지고 있는 세상의 풍경을 가만히 응시했다. 환상이 끝나 가고 있었다.
* * *
환상이 산산조각 나 걷힌 뒤에는 다시금 암흑이었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아주 좁은 방에 갇힌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뭐지?
나는 손끝으로 내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을 살살 긁어 보았다. 머리카락처럼 가늘면서도 탄력 있는 실들이 손끝에 걸렸다. 이것이 내 몸을 칭칭 감싸고 있는 모양이었다.
역시 환상 거미였구나.
나는 지금 환상 거미의 고치 속에 담겨 있었다. 환상 거미는 보통 두 종류로 나뉘는데, 하나는 행복의 환상 거미고, 나머지 하나는 불행의 환상 거미다.
전자는 희생양에게 행복한 환상을 보여 줘 그 환상에서 나가기 싫게 만드는 쪽이고, 하나는 불행한 환상을 계속적으로 보여 줘 정신을 붕괴시키는 쪽이었다. 전자는 그렇다 쳐도 후자는 정말 악취미였다. 그래도 다행히 예전에 전자를 겪어 본 적이 있어 환상 거미라는 걸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수색대가 이 거미들한테 당해 비명을 질렀던 거구나.
다행히 이 거미줄은 화염에 취약했다. 간단한 화염 마법 중 뭘 쓸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내 배 위에 묵직하게 닿았다.
“……!”
소스라치게 놀라 공격 마법을 시도하기 직전, 그것이 부드럽게 내 몸을 어루만졌다.
시동어를 외지 않았던 건, 순전히 그 손길이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일어났네. 조금만 기다려.”
누군가가 내 귓가에 속삭이며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주박에 걸린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이 단검을 빼 들고 고치를 잘라 내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고치가 잘릴 때마다 몸이 조금씩 자유로워졌다. 꽁꽁 묶여 피가 통하지 않았던 몸에 점차 혈액 순환이 되기 시작했다. 북, 단검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를 그가 손으로 잡고 넓게 벌렸다. 숨쉬기가 편해지며 어둠에 익은 눈에 상대의 모습이 보였다.
혹시 이것도 환상은 아닐까.
나는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내 시선 끝에는,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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