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내 말에 마티어스는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떠나갔던 건가. 날 보는 게 힘들어서? 정말로?
나는…… 이런 식으로 다투는 게 처음이었단 말이야. 무섭고 두려웠어. 자칫 실수해서 네가 나를 싫어하게 될까 봐. 둘 다 감정을 가라앉히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것뿐인데…….
기껏해야 다른 조에 들어가 최대한 나와의 만남을 피하는 쪽일 줄 알았지, 이런 식으로 던전에서 무리를 떠나 혼자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안일했다.
“찾을 수는 없는 거야?”
나는 압실론의 소매를 덥석 잡으며 간절하게 물었다. 압실론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가 드래곤 둥지랑 가까워서, 탐색 마법을 쓰기가 좀 그래. 오히려 역으로, 꼬리가 밟힐 수도 있어서.”
마티어스가 단신으로 드래곤과 마주치는 모습이 자연스레 상상되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꿈속 마티어스의 모습 역시 떠올랐다. 젠장, 하필이면 재수 없는 꿈을 꿔서는…….
나는 혹시나 싶어 다급히 맵을 켜 보았지만, 던전에서는 이미 다녀온 곳의 맵만 보일 뿐이었다. 가지 않은 길의 맵은 검은 안개에 잠긴 것처럼 깜깜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다녀온 길 또한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마티어스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욕설을 내뱉으며 맵을 껐다. 몸을 틀어 달려 나가려는데 이마에 누군가의 가슴이 닿았다. 고개를 들어 보자 루드비히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드비히.”
나는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맵을 보느라 잠시 사람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나를 발견하고 이쪽까지 온 모양이었다.
“준비는 다 됐나?”
나는 귀를 의심했다.
“루드비히, 마티어스가 사라졌어. 알아?”
“그렇더군.”
“그렇더군? 그게 다야?”
내 말에 루드비히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미 기사들 중 둘을 차출해 비밀리에 수색을 맡겼다. 짐을 전부 놓고 간 걸로 보아 탈주는 아닌 것 같더군.”
“……탈주가 아니야?”
“그래.”
탈주가 아니라는 말에 안심이 되는 한편, 또 다른 걱정이 차올랐다.
“드래곤이나 몬스터한테 당했을 수도 있다는 거야?”
“그건, 아니야. 아직 브레이슬릿이 반응하지 않았어.”
어느새 옆에 다가온 압실론이 말했다.
“브레이슬릿? 그게 무슨 소리야?”
“마티어스를 살해하거나 중상을 입히면, 브레이슬릿 안의 마법이 발동해서, 그 상대에게 위치 추적 마법이 새겨지게 되어 있거든. 그런데 아직 그런 반응은 없어.”
이 추적 마법에 대해서는 예전에 마티어스와 무인도에서 만났을 때 들었던 적이 있었다. 아직 그대로였구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아직은 어디까지나 아직이었다. 드래곤이 어디서 나올지 모르는 던전을 혈혈단신으로 돌아다니는 것만큼 목숨을 내놓고 다니는 짓은 없었다.
“나도 찾으러 갈래.”
“안 돼.”
“안 된다.”
압실론과 루드비히가 동시에 말했다.
“이미 수색대 둘을 붙였다. 여기서 수색 인원을 더 늘리는 건 무의미해.”
“마, 맞아. 그리고 위험해.”
“그 위험한 데에 마티어스는 지금 혼자 있는 거잖아.”
아까의 꿈이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되었다. 그게 혹시 예지몽이면 어떡하지. 불시에 누군가에게 손목을 붙잡힌 것처럼 숨이 가쁘고 몸이 덜덜 떨렸다.
“내가 찾으러 가야 해. 나 때문이란 말이야…….”
“마티어스가 사라진 게 왜 너 때문이지? 탈주가 아니라고 했을 텐데.”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나 때문이야.”
상황이 상황인지라 잠깐 의심하긴 했지만, 짐을 전부 놔두고 갔다는 걸 들은 후 확신했다. 마티어스는 이들을 버리고 갈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 화를 풀기 위해 이곳저곳 쏘다니다 길을 잃은 거겠지. 위험에 빠졌을 수도 있고.
“가야 해. 보내 줘.”
그렇다면 얼른 찾으러 가야 했다. 나는 루드비히의 옷소매를 쥔 채 그를 간절하게 올려다보았다. 사실 그냥 찾으러 갈 수도 있었지만, 셋이 나를 막아설 게 뻔하니 웬만하면 먼저 허락을 받는 편이 나았다. 절박한 표정의 나를 루드비히가 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수색대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다음 수색대로는 너를 보내 줄 테니까.”
“루드비히.”
압실론이 경고하듯 루드비히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루드비히가 압실론에게 대답하지 않고 돌아섰다.
“행군을 시작한다.”
나는 루드비히의 뒷모습을 보며 여기까지가 그가 양보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라는 걸 깨달았다. 더 이상은 조를 수 없었다. 나는 애꿎은 손톱만 씹어 대며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 * *
행군은 느릿하게 이루어졌다. 한 시간에 수 킬로미터를 가는 강행군이 아니라 드래곤의 눈에 띄지 않게 굽이굽이 조심스럽게 걷는 형태로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두 시간쯤 걸었을 때, 마법 전서응 하나가 나타나 공중을 돌았다. 루드비히가 팔을 올려 전서응이 내려앉을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흔적 발견, 흔적 발견.”
매는 앵무새처럼 두 번 반복해 대답한 뒤 깃털을 고르기 시작했다. 루드비히가 굳은 얼굴로 매의 다리에 묶인 것을 풀어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마티어스의 찢어진 겉옷이었다. 마티어스는 항상 같은 겉옷을 입고 다녔기에 내게도 익숙한 옷이었다.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휘청거리는 나를 체자레가 뒤에서 받아 주었다.
“아직 확실한 건 없다. 정신 똑바로 차려.”
루드비히가 내 어깨를 잡고 눈을 맞추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드비히가 잠시 좌중을 돌아보았다. 분위기를 파악한 병사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체자레와 압실론을 번갈아 바라보던 루드비히가 말했다.
“……압실론을 데려가.”
나는 그것이 루드비히가 얼마나 무겁게 내린 결정인지 깨달았다.
압실론은 어쩌면 드래곤을 단신으로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가 없는 상태로 드래곤을 마주했을 때 운이 나쁘면 루드비히를 비롯한 모두가 떼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루드비히는 나의 안전을 택했다.
나는 언제나 루드비히의 공평하지 않은 저울이었다. 그의 선택에 감사하면서도 가슴 한편이 저려 왔다.
“하루 주지. 그사이 마티어스를 찾지 못하면 수색을 철회하고 돌아와.”
“……그건 하루 만에 마티어스를 포기하라는 말이야?”
“그 하루가 내가 견딜 수 있는 마지노선이라는 얘기다.”
루드비히는 아예 압실론을 보며 힘주어 말했다. 이건 압실론에게 하는 경고나 마찬가지였다. 시간 안에 마티어스를 찾지 못할 시 강제적으로라도 나를 데려오라는.
“나 잠깐, 짐 몇 개만 챙길게. 숲에서 밤을 보내야 할 수도 있으니까.”
“알았어.”
압실론이 길을 떠나기 전 필요한 짐을 챙겨 오겠다며 떠났다. 체자레가 내게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오늘만큼 마법을 잘 쓰지 못하는 게 분한 적이 없었네요. 잘 다녀와요, 이현.”
“……그럴게요.”
“다녀와선 말 편하게 해 줘요. 나도 그게 더 편하니까.”
체자레가 내 머리를 정돈해 주며 다정하게 웃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안전하게 돌아와요.”
나도 그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체자레가 물러난 뒤 루드비히가 내게 다가왔다. 루드비히는 자신의 망토를 내게 둘러 주며 말했다.
“섣부르게 행동하지 말고.”
“응.”
“항상 압실론과 같이 다니고.”
“응.”
“주변도 살피고.”
“응.”
“……다치지 말고.”
“……응.”
내가 꼬박꼬박 대답하자 루드비히가 말을 멈추고 잠시 머뭇거렸다. 더 할 말이 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루드비히가 달싹이던 입술을 열었다.
“내가 사라져도…… 이렇게 찾아 줄 건가?”
루드비히의 말이 심장 깊숙한 곳을 쿡 찔러 왔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찾았을 거야.”
“……진심으로?”
루드비히가 조금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는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니까.”
세계가 재조립되던 날에 새롭게 깨달은 진실. 그들은 이미 내 삶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너무 깊이 박혀 더 이상 빼낼 수 없게 된 유리 조각처럼. 유리 조각 위에는 새살이 차츰차츰 돋아나고 있었다. 이제 나는 그들을 뺄 수도 없고, 빼낼 생각도 없었다.
뜻밖의 말을 들은 루드비히가 시선을 옆으로 돌리고 눈꺼풀을 깜빡였다. 그의 눈꼬리가 다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루드비히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내가 너를 유독 미워했던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봤어.”
“…….”
“그때의 내가, 너를 좀 좋아했어서……. 그래서 다른 애들보다 더 배신감을 크게 느꼈던 것 같아.”
“…….”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을게. 너도 잘못했으니까.”
“그래.”
“……무리한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 압실론도 고맙고.”
“이제는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루드비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루드비히가 쓰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한 번도 너를 이긴 적이 없어. 이번에도 결국 뭐든 들어주게 되지 않았나.”
내 뺨을 가볍게 쥔 루드비히가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루드비히가 하나로도 곧은 눈동자로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네게 압실론을 붙인 이유는, 위급한 상황일 때 마법을 써서라도 네가 안전해지길 바라서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 그리고…….”
루드비히가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어 갔다.
“때로는 비정해져. 우리의 목숨은 모두 네 발밑에 있으니, 세계의 어떤 이들도 너보다 소중하지 않다. 어떤 때든 그걸 기억해.”
나는 그의 말에 웃음을 터트리며 조금 울었다. 너는 정말 하나도 모르는구나. 그런 너의 말이 내가 너희를 더 생각하게 만든다는 걸.
압실론이 가방을 멘 채 나를 향해 다가왔다. 루드비히가 내게 두른 망토를 단단히 여며 주었다. 나는 선언하듯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녀올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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