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나도 바라야겠네요. 앞으로는 이현 앞에서만 아프게 해 달라고.”
덕분에 이런 서비스도 받잖아요.
체자레가 내게 잡힌 손을 들어 올리며 옅게 웃었다. 도저히 편한 마음으로 따라 웃을 수 없었던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과거엔 넷이 죽든 말든 로그아웃을 택한 적도 있었는데, 어째서 지금은 체자레가 평생 고통스러울 예정이라는 게 이렇게 신경 쓰이는 걸까. 이 세계에 너무 오래 있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내가 전에 이현이 작은 신 같다고 했던 거 기억나요?”
“작은 신……?”
어쩐지 익숙한데.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게 예전에 체자레에게 고백받기 전 들었던 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현은 꼭 작은 신 같아요.’
‘……신?’
‘약한 듯 보이지만 이 세계의 흐름을 이끌어 나가고 있죠.’
“여전히 그래요. 나는 계속 당신이 궁금하고, 당신은 여전히 귀엽고, 나의 작은 신 같아서……. 그런 당신이 바라고 기도하는 게 나의 건강하고 온전한 삶이라는 사실이, 누군가가 나를 아프지 않게 해 주는 것보다 흡족해요.”
“…….”
체자레가 따스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불시에 습격당한 사람처럼 갑자기 찾아든 애정의 무게에 허덕거렸다.
가끔은 들으면서도 마음에 박히는 말이 있다. 지금 체자레의 말이 그랬다.
아, 나는 이 말을 평생 가지고 살아가겠구나. 오랜 세월이 지나 모든 걸 또렷하게 기억할 수 없을 때에도 눈을 감으면 너에게 나는 옅은 땀 냄새와 내 손안의 네 체온이 선명하게 떠오르겠지.
나는 세 번 심호흡을 한 뒤 눈을 떴다.
“체자레, 묻고 싶은 게 있어요.”
* * *
오랜만에 꿈을 꿨다. 꿈속의 나는 무언가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도대체 뭘 찾는 걸까. 내가 잃어버린 건 뭘까. 나는 내가 뭘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숲속을 헤매었다.
꿈에서는 비아나가 나왔다. 꿈이라 그런지 그렇게 무섭지는 않았다. 속이 투명하게 비쳐 보이는 호수의 수면 위에 비아나가 서 있었다. 꼿꼿하게 선 채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비아나가 내게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나는 숨 한 번 쉬지 못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으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비아나의 몸이 점차 변해 갔다. 그때 누군가가 내 귀에 대고 외쳤다.
‘도망쳐!’
나는 마법에 풀린 것처럼 뒤돌아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비아나가 나를 따라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으레 꿈이 그렇듯 물속에서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잘 달려지지가 않았다. 내 몸이 묵직하고 행동이 느릿한 거에 비해 비아나는 너무나 빨랐다.
꿈인데도 숨이 턱까지 차 괴로웠다. 목덜미에 비아나의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아……!’
돌부리에 발이 걸린 나는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온몸이 풀 범벅이 된 뒤에야 평지에 도착해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늪에 빠진 것처럼 온몸이 끈적했다. 힘겹게 눈을 뜨자 온몸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풀밭은 사라지고 주변이 전부 피 웅덩이였다.
‘으앗.’
나는 엉덩이를 붙인 채로 뒷걸음질 쳤다. 그때 무언가가 내 손끝에 닿았다. 화들짝 놀라 손을 떼어 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마티어스?’
마티어스가 온통 피에 젖은 채 누워 있었다. 나는 창백한 마티어스의 뺨에 손을 대어 보았다. 산 사람의 체온이 아니었다. 나는 마티어스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이 오르내리지 않았다.
‘마티어스…….’
부름에 응답이 없었다.
이젠 나한테 화내지 않겠네. 짜증을 내지도 않고, 나한테 상처 주지도 않고.
그렇지만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지도, 얼굴을 붉히지도, 숨이 막힐 만큼 나를 끌어안지도 않겠지.
나는 굳은살이 여기저기 박인 마티어스의 투박하고 큰 손을 감싸 쥐었다. 서늘한 체온에 뺨을 대고 있는데 바로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비아나가 모습도 바꾸지 않은 채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비아나의 투명한 눈동자에 절망에 젖어 순식간에 무력해진 내 모습이 비쳤다. 비아나가 입을 쩍 벌렸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이빨이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목 줄기가 무참하게 물어뜯기는 감각을 마지막으로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꿈인 걸 알았으면서도 뜯기는 감각이 생생해 목을 물린 짐승처럼 한동안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못했다.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
귓가에 압실론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나를 보고 압실론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 깨웠을 땐 아무리 흔들어도 못 일어나길래 좀 더 재웠는데, 여전히 피곤한가 보네. 그러게 밤에는 대화를, 자제해야지.”
혼몽한 와중에도 궁금해졌다. 체자레랑 한 대화를 말하는 걸까, 아니면…….
몸을 일으킨 채 눈을 끔뻑이며 생각하고 있는데 압실론이 내 앞에 아침밥을 밀어 주었다.
“이거 먹어, 이안. 많이 넣었어.”
음식까지 가져다주고 이젠 뭐, 거리낌도 망설임도 없구나. 이안이라고 불러 주는 걸 감사히 생각해야 하나.
“고마워.”
밥을 씹을 때마다 정신이 차츰차츰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은 각각 아침을 먹거나 장비를 정비하거나 하며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루드비히와 체자레 역시 완벽하게 단장을 마친 차림으로 멀지 않은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만 꾀죄죄한 건가 싶어 다급히 얼굴을 정리하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압실론 역시 꼬질꼬질한 강아지 같은 모습으로 내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키도 덩치도 커졌으면서 이런 모습은 똑같네. 나는 피식 웃으며 압실론의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압실론이 배시시 웃으며 사이좋게 내 머리도 정리해 주었다.
밥을 먹은 뒤 우리는 조를 새로 짜고 대열을 다시 맞추었다. 반란 전에 비해 인원이 많이 적어졌기에 대대적인 대열 정리가 필요했다. 그렇게 정리된 대열은…… 너무나 편파적이었다.
“……너무 부담스러운데.”
나는 흐릿한 시선으로 내 대열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루드비히, 체자레, 압실론. 왜 이 셋이 전부 내 조에 있는 건데.
“다른 조 사람들은 못 살아남는 거 아니야?”
“피해가 없진 않겠지만, 그래도 마법사들도 많이 놓고, 기사들도 많이 놨어.”
압실론의 말대로 자세히 보니 다른 조에도 실력 있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이 조 누가 짠 거야?”
“루드비히가 짰어요.”
압실론에게 물었던 건데 어느새 내 쪽으로 다가온 체자레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원래라면 정예들은 다 이 조에 넣어 놨을 것 같은데, 다른 조원들도 나름대로 살리려고 애쓴 건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단 넷이 가장 큰 전력인데, 하나에서 둘 정도는 다른 조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옆에 있고 싶었어요. 다들 비슷한 마음이었겠죠.”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체자레가 내 머리를 정리해 주며 답했다. 체자레의 말에 우리의 현실이 새삼 체감되었다. 우리는 죽을 수도 있는 곳에 와 있는 거구나, 지금.
“나는 괜찮은 애들은 죄다 여기 두는 게, 좋다고 했는데, 무시당했어.”
압실론이 불만스러운 듯 입을 삐죽였다. 이 구성이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압실론도, 루드비히도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루드비히의 선택이 마음에 들었다. 그치만 중요한 싸움을 앞두고 갈등을 만들어서 좋을 건 없지. 나는 압실론의 팔꿈치를 툭 치며 말했다.
“사실은 너만 있으면 되잖아.”
내 말이 의외였는지 압실론이 나를 바라보며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압실론의 하얀 뺨 위로 옅은 홍조가 올라왔다.
“그건…… 그렇지. 이안은 내가 꼭 지켜 줄게.”
“그래, 고맙다.”
나는 다소 건성으로 답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리 있어도 눈에 띌 만한 붉은 머리카락이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누구 찾아? 마티어스?”
압실론이 예리하게 내가 찾는 사람을 짚어 냈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 안 보이는 것 같아서.”
다른 조에 있는 건가 싶었는데, 내가 들은 답변은 더 청천벽력이었다.
“마티어스, 사라졌어.”
“그게 무슨 소리야? 사라졌다니?”
“말 그대로야. 어젯밤 이후로 아무도 본 사람이 없어.”
압실론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는 듯한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
“그걸 왜 이제 말해!”
나는 나도 모르게 압실론에게 소리를 높였다. 압실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주변 사람들 몇몇이 내게 시선을 집중했다. 나는 창백하게 질려 비틀거리다 이마를 짚었다.
나 때문이야.
자연스레 마티어스와 나눈 마지막 대화가 떠올랐다.
‘나는 이제 너를 믿을 수가 없어……. 너를 보는 게 너무 힘들어.’
나는 그런 마티어스에게 뭐라고 했었지.
‘감정 좀 가라앉히고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하자.’
나는 낮게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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