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 *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부드러운 음성과 함께 뺨에 매끈하고 둥근 것이 닿았다. 옆을 돌아보니 체자레가 내 뺨에 막 씻어 차가운 사과를 댄 채 미소 짓고 있었다. 나는 사과를 받아 들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저녁도 거의 안 먹었다면서요? 오늘의 최대 공로자였으면서.”
고블린 거주지를 아무 피해 없이 탈탈 턴 우리는 야영지를 옮긴 뒤 사기를 증진할 겸 음식을 펼쳐 놓고 작은 연회를 열었다. 먹고 마시며 경직되었던 분위기가 유하게 풀어졌다. 실제로 시스템 창에 분위기가 좋아져 사기가 증진되었다는 안내 문구가 뜨기도 했다. 하지만 낮의 일로 영 입맛이 없었던 나는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건너뛰었다.
“하하, 입맛이 좀 없어서…….”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사과를 베어 물었다. 아삭, 경쾌한 소리와 함께 새콤한 과즙이 입 안에 가득 찼다. 다시 사과를 베어 문 나는 문득 체자레가 내게 존대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사과를 문 채 어정쩡하게 체자레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체자레가 눈을 휘며 웃었다.
“이제 눈치챘어요, 이현?”
툭, 데구루루……. 입을 벌리자마자 아슬아슬하게 물고 있던 사과가 툭 떨어졌다. 내가 만유인력의 법칙을 기묘하게 증명해 버린 채로 얼어붙어 있자 체자레가 내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뭘 그렇게 놀라요. 이미 내가 알고 있다는 거 눈치챘으면서.”
“아니, 그걸,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젠 우리 다 이현의 정체를 알게 된 것 같기도 했고…… 이렇게 놀라는 모습이 슬슬 보고 싶었거든요.”
내 뺨을 툭 건드리며 체자레가 장난스레 말했다.
“만족스러운 반응이네요.”
체자레가 남은 사과 하나를 내 손에 쥐여 주며 답했다. 혼란스러웠던 나는 사과를 먹지도 못하고 괜스레 엄지로 사과의 매끈한 표면을 문질렀다.
“아니, 언제부터, 어떻게……?”
“처음부터요. 무슨 생각으로 면접을 보러 왔는지 모르겠는데, 모르겠어서 더 재밌더라고요. 그래서 시종으로 삼고 옆에 뒀죠.”
골이 띵하게 아파 왔다. 처음부터였다고? 이래서야 모습을 바꾼 게 의미가 없지 않나. 망할 놈의 호감도 시스템. 진짜 돌아가기만 하면 내가 <소년들> 안티 카페 바로 가입한다. 돌아가기만 하면…….
돌아갈 생각을 하니 다시 마음이 갑갑해졌다. 나는 큰 숨을 쉬었다 내뱉었다.
“압실론한테 들었어요.”
시종으로 산 기간이 길어서인지 체자레가 내 정체를 알고 있다 해도 바로 반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체자레가 눈을 둥글게 뜨고 물었다.
“응? 무슨 얘길 들었는데요?”
“내가 중독됐던 독, 나눠 가졌다면서요. 그런데 평생 치유도 못 해서 계속 아플 거라고…….”
“아아, 그럴 거라고 하더라고요.”
양심이 쿡쿡 찔려 왔다.
“그래서 미안해서 사랑해 주기라도 하려고요?”
체자레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할 말을 잃은 나는 차마 웃지도 못하고 마른 입술을 핥았다.
“농담이에요. 이현이 그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거 알아요. 나도 그렇고. 사랑은 즐거워야죠.”
체자레가 내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그의 말투와 태도가 너무 다정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사랑이 즐거워야 한다는 사람이 독은 왜 나눠 가졌어요. 나을 거라 생각했어요?”
“아뇨. 오히려 죽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어요. 그래도 이만하면 다행이죠. 매일 아픈 것도 아니고.”
“그런데 왜 그랬어요.”
“음…… 이현이 없으면 삶이 즐겁지 않을 테니까요.”
체자레가 고개를 기울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려 미소 지었다.
“진심이에요. 심심하게 사느니 재밌을 때 죽는 게 낫죠.”
“하아, 진짜…….”
“죄책감 가지지 마요. 내가 원해서 한 거니까. 당신을 살리기로 한 것도, 사랑하기로 한 것도.”
“……내가 밉지 않아요?”
“내가 이현을 미워해요? 왜요?”
금시초문이라는 듯 체자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내가 전에…… 좀 험하게 말했잖아요. 그, 이 세계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뻔했던 때…….”
“아,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개새끼들아’?”
“……네. 그거요.”
“음, 별생각 없었는데. 아, 궁금한 게 생기긴 했어요.”
“뭐, 뭔데요?”
“BL 게임이 뭐예요?”
“…….”
체자레의 해맑은 물음에 나는 차마 설명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나 진짜 개새끼다…….
“게임 캐릭터라는 건 게임 속 등장인물이라고 이해했는데, BL 게임이 뭔지는 모르겠더라고요.”
“그게…….”
나는 진땀을 흘리며 천천히 BL 게임에 대해 설명했다. 한 글자 한 글자 설명할 때마다 죄의 대가를 치르는 기분이었다. 설명을 끝내자 체자레가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현, 원래 세계에서도 남자 좋아해요?”
“……몰라요.”
“그런데 그 게임은 왜 했어요? 아, 돈 벌려고?”
“네……. 죄송합니다.”
내 쭈글쭈글한 태도에 체자레가 낭랑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왜 야한 짓은 안 했어요? 돈은 그게 더 되지 않나? 그 세계에선 좀 다른가?”
……너 진짜 여러모로 놀라운 AI다, 체자레야.
“그게, 하는 사람이 없진 않은데, 방송에 수위 제한도 있고 저는 그것까진 차마…….”
“생각보다 욕심이 적네요, 이현.”
체자레가 장난스레 나를 타박했다. 하지만 죄인인 나는 발끈하지도 못하고 얌전히 체자레가 하는 말을 들어야 했다.
“화, 안 내요?”
“굳이? 내 줬으면 좋겠어요?”
“아니, 가지고 놀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나라면, 화날 것 같아서…….”
“음,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네.”
“재밌다고 생각했어요.”
“죄송…… 네?”
당연히 화를 낼 거라고 생각해 미리 사과를 하려던 나는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니까 궁금증이 많이 생기더라고요.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게임이라면, 이 게임을 하는 사람은 누군지, 이 세상엔 얼마나 많은 내가 있을지, 방송을 보는 사람들은 누굴지. 아, 몇 가지 궁금증도 풀리더라고요.”
“무슨 궁금증……이요?”
“그래서 이현이 그렇게 필사적으로 우리를 좋아하는 척하면서 마음을 얻으려고 했구나.”
“……머리 박을까요?”
“아뇨, 이현이 박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걸요.”
어째 말이 좀 이상했지만 일단 내가 잘못한 상황이라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궁금한 게 그렇게 많으면서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봤어요?”
“아까 말했다시피 이 상황이 재밌었거든요. 그래서 그냥 얌전히 두고 봤던 거죠.”
“…….”
“이젠 궁금한 거 하나씩 물어볼 테니까 말해 줘야 해요.”
“……제가 말할 수 있는 거면 대답해 줄게요.”
체자레는 내 말에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 후로도 체자레는 이따금 외국을 궁금해하는 아이처럼 바깥세상의 문화나 생활 수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어떤 질문은 대답하기 쉬웠고, 가끔은 말문이 막혔다.
“그러면 그 나라 사람들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던 체자레의 말이 일순 멈추었다. 왜 그러지 싶어 고개를 들자 체자레가 연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혹시 아파요?”
“잠깐이에요. 곧 지나가요.”
체자레가 걱정 말라는 듯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풀과 화학 약품 냄새가 나는 게 딱 봐도 독한 약이었다. 그걸 물도 없이 한 번에 삼킨 체자레가 나무에 기대어 길게 호흡했다.
“약이 써서 그래요. 잠시만…….”
체자레의 흉곽이 크게 부풀었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체자레의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어요?”
내 말에 체자레가 잠시 실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땀에 젖은 얼굴로 슬며시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손, 잡아 줄래요?”
체자레가 밭은 숨을 내뱉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체자레의 손을 양손으로 그러쥔 채 기도하듯 깍지 꼈다. 내가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고 있자 체자레가 장난스레 물었다.
“누구한테 기도해요? 우리 종교 탄압해서 아마 신은 우리 편이 아닐 텐데……. 아, 이현 세계의 신한테?”
“원래 세계에서도 나는 아무도 안 믿었어요.”
부모님이 일찍 들어오게 해 주세요. 이 외로움이 사라지게 해 주세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게 해 주세요.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 변치 않는 믿음이 있게 해 주세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세요. 행복해지고 싶어요. 밤에 혼자이고 싶지 않아요. 이 밤이 너무 길고 외로워요.
어린 시절의 내가 간절히 빌고 바랐던 소원들. 그 소원들은 대부분 이루어지지 않았다.
부모님은 이젠 그 집으로 돌아올 일이 없었고, 나는 어디에 있든 외로움을 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지는 불분명했고, 믿음은 없었다. 지금의 나는 가끔 웃었지만 행복한 건 아니었고, 밤은 여전히 길었다.
“그냥 바라는 거예요. 체자레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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