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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공들이 미쳤는데 로그아웃이 안 된다니요-120화 (120/149)

#120

“으음, 같이 갈까?”

“아냐. 넌 다른 데 털어. 여기도 빨리 정리해야지.”

압실론은 아쉬워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얌전히 수긍했다. 우리는 자루를 이고 약탈 의지를 다지며 각각 다른 움막으로 들어갔다.

한자리하는 고블린이 사는 곳인지 다른 움막에 비해 넓고 깨끗했다. 이 정도면 움막이 아니라 집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오, 진짜 한 따까리 하는 고블린 집인가 보네.”

나는 옷장을 여는 것과 동시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다른 고블린들이 입은 거친 천으로 만든 옷이 아니라 마법사의 로브처럼 부드럽고 차르르 떨어지는 재질의 옷이 몇 벌 걸려 있었다.

“흠, 흠흠-.”

기분이 좋아진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자루 안에 옷을 왕창 쓸어 담았다. 이렇게 되면 식량 쪽도 좀 기대되는데.

“역시.”

선반 위 바구니에는 신선한 과일이며 빵, 감자 같은 것이 가득 담겨 있었다. 사과 있네. 압실론이 좋아하겠군. 나는 사과를 자루 안에 담고 자두를 베어 물었다.

“으앗.”

자두는 살이 거의 없고 즙만 많았다. 피처럼 붉은 자두즙이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때 벌컥,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집을 뒤지러 온 병사인가 싶어 뒤를 돌아보았던 나는 그대로 굳고 말았다. 마티어스가 문간에 선 채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게 달려오며 검을 빼 든 마티어스가 내 손목을 아프게 쥐었다. 주위를 매섭게 둘러본 마티어스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즉시 호흡이 가빠져 오기 시작했다.

“놔, 놔줘…….”

심하게 떨리는 내 목소리를 듣자 마티어스가 당황해 손을 놓았다. 마티어스의 손바닥에 찐득한 과즙이 묻어났다. 마티어스가 인상을 쓰며 손바닥에 묻어난 시큼한 과즙 냄새를 맡았다.

“……뭐야, 이거.”

“자두, 과즙이야.”

“…….”

며칠만의 첫 대화치고는 너무나 형편없었다. 우리는 잠시간 서로를 바라보며 침묵했다. 마티어스가 인상을 쓰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나는 나가려 뒤돈 마티어스의 셔츠를 쥐었다.

“……잠깐만.”

“……놔.”

칼끝처럼 날카로운 말투였다. 하지만 한 번쯤은 대화를 해야 했다. 여기서 피해 버려서는 안 됐다.

“우리 얘기 좀 해.”

“난 할 말 없어.”

“내가 있어. 그러니까 얘기 좀 해.”

“내가 왜?”

“어?”

“왜 들어 줘야 하는데.”

“…….”

“납득할 수 있게 얘기해.”

마티어스가 이렇게 강경하게 나올 줄은 몰라 말문이 막혔다. 나는 잠시 침묵하다 답을 내놓았다.

“우리가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뭐?”

“죽기 전에 전하지 못한 마음 같은 걸 떠올리고 싶지 않아.”

“…….”

둘의 희생으로 살아나고 나서야 느꼈다. 너무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얘기해야 했다.

“죽는 건 나뿐인 거 아니야?”

하지만, 이미 이 정도로 늦었을 줄은 몰랐다.

“넌 죽을 일 없잖아, 여기서는. 죽어도 나나 죽겠지.”

마티어스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조소했다.

“안 그래? 이현.”

“…….”

심장이 기분 나쁘게 쿵쿵 뛰었다.

“……반박도 안 하네.”

“…….”

나를 꿰뚫을 듯 바라보는 눈동자가 분노로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차마 마티어스를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게 오히려 마티어스를 자극한 듯했다. 그가 거리를 순식간에 좁히며 내게 다가왔다.

“나 먼저 뭐 하나 묻자.”

“……어?”

“도대체 언제까지 속일 작정이었어? 끝까지 숨기고 가지고 놀다가 떠나려고 했어?”

나는 새파랗게 질려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너한테 어떻게…….”

겨우 짜내듯 내뱉은 말이 끝나기도 전 마티어스가 내 셔츠를 잡고 벽으로 밀쳤다.

“윽…….”

“그런 게 아니면 뭔데.”

“수, 숨 막…….”

압박감이 밀려오자 숨통이 틀어막히는 느낌이 들고 눈앞이 아득해졌다. 마티어스는 더 몰아붙이려다 창백해진 나를 보며 바로 손을 풀어냈다. 흐릿한 시야에 언뜻 보인 마티어스의 얼굴이 엉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콜록…….”

나는 거세게 기침한 뒤 심호흡했다. 어쩔 수 없이 찾아드는 두려움 때문에 셔츠를 정리하기 위해 잡은 손이 계속해서 떨렸다.

“젠장…….”

마티어스가 그런 나를 보다 이마를 쓸어 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 사이에 남겨진 상흔이 너무나 많았다.

“아니라고 했잖아.”

“…….”

“믿어 달라고, 했잖아.”

나는 좁아진 거리에서 고개 숙인 마티어스를 올려다보았다. 감정을 누르려는 듯 마티어스는 길게 호흡하려 했지만, 간헐적으로 떨리는 숨이 섞여 나왔다. 채 닫히지 못한 문에서 쏟아진 햇살이 마티어스를 비추었다. 역광 속에서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나를 천하에 둘도 없는 등신으로 만들어. 그런 게 재밌어?”

“…….”

밑에서 올려다본 마티어스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이마를 짚은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그런 마티어스를 보고 있자니 말문이 막혀 왔다. 나는 눈을 내리깔고 우울한 어조로 말했다.

“……재미, 없었어. 재미로 한 일 아니야.”

“……그럼, 떠나 있으면서 내 생각은 했어?”

힘없는 어조였다. 마티어스에게 나온 말이라고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마티어스가 간절함을 토하듯 말을 쏟아 냈다.

“난…… 계속 네 꿈을 꿨어. 네가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면서도, 찾기를 멈출 수가 없어서. 멈추는 순간 죽을 것 같아서, 계속 생각하고 계속 찾아다녔어.”

“…….”

날것의 감정이 내게 쏟아져 들어왔다.

“나도 내 자신이 한심했어. 너는 진심도 아니었고…… 남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그런 척한 것뿐인데. 그런 너를 놓지도 못하고…… 네 흔적의 조각이라도 찾으려 밤새 말을 달렸어.”

“…….”

“그래서 이안을…… 널 만났을 땐 기적이라고 생각했어. 내 머리랑 몸이 걔는 이현이라고 하는데도,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 그게 네가 아니라면, 드디어 이 등신 같은 짓을 끝낼 수도 있겠구나. 나는 어쩌면…… 너를 잊을 수도 있겠구나.”

마티어스의 마지막 말이 나를 아프게 찔러 왔다.

“그래서 나를, 이 세계를 떠나고 싶지 않은 사람과 살아갈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고. 그게 전부 네 손바닥 위였다는 것도 모르고.”

마티어스가 자신을 비웃듯 짧게 조소했다. 예상은 했지만 마티어스는 그때 내가 했던 말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개새끼들아. 한 번만 말해 줄 테니까 귀 똑바로 열고 들어. 너희 정체가 뭔지 알아? 게임 캐릭터야. 그것도 BL 게임!’

‘마티어스, 너 내가 가끔 다른 데 바라보면서 ‘후원 감사합니다.’ 했던 거 왜 그러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그거 내가 너네랑 있던 시간들 남들한테 보여 줘서 그걸로 돈 번 거야!’

‘나, 너희 사랑한 적 한 번도 없어. 다 돈 벌려고 한 거지. 미친 새끼들아. 이제 안녕, 영원히 안녕이다!’

“……전부 진심은 아니었어. 나는 너희한테 화가 많이 나 있는 상황이었고…….”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더듬더듬 변명했다.

“이었고?”

마티어스가 비꼬듯 뒷말을 따라 했다.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그때 그렇게…… 상처 줘서. 정말 미안해. 진심이야.”

마티어스가 낮게 헛웃음을 지었다.

“전부 진심이 아니었다고 해도, 바뀌지 않을 진실도 있겠지.”

“……어?”

“네가 우리를 떠날 거라는 거. 못 떠난다 해도, 언제나 떠나고 싶어 한다는 거.”

“…….”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얼어붙었다.

“네가 이안이라는 것도, 모험가가 꿈이라는 것도 다 거짓말이었지. 그래서 생각을 좀 해 봤어. 네가 다시 갇힐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이 던전에 들어온 이유.”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정체를 들킨 그 잠깐 사이에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친 건가.

“탈출할 수 있는 열쇠가 있는 거지? 이 던전 안에.”

“…….”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혹시나 네가 위험해질까 봐……. 젠장.”

나는 차마 진실을 밝힐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 거짓을 말하고 싶지도 않아 오랫동안 침묵했다. 침묵을 견디지 못한 마티어스가 또다시 먼저 입을 열었다.

“왜 나로는…… 우리로는 안 돼?”

“……마티어스.”

“……우리가 가짜라서 그래?”

마티어스가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심장이 발밑으로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이들을 가짜라고 말하는 것과, 그들이 내게 자신을 가짜라고 말하는 것에는 깊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그게 우리 잘못은 아니잖아…….”

그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마티어스에게 정체를 들켰을 때의 상황을 많이 상상해 왔다. 내 상상 속의 마티어스는 보통 화를 냈다. 그는 다혈질이니까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그래서 이런 상황은 정말이지…… 예상외였다. 나는 쏟아져 나오는 진심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차피 떠날 거면서, 왜 그렇게 사랑하는 것처럼 굴었어.”

“…….”

“왜 사랑하게 만들어서…… 너를 못 놓게 만들어.”

“마티어스.”

나는 가만히 손을 뻗어 마티어스의 뺨에 가져다 대었다. 마티어스의 고개가 내 손에 의해 무력하게 들렸다. 마티어스의 뺨이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가 투명하고 맑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조용히 눈물을 떨어트리는 모습에 내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손끝이 점차 젖어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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