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돌아간 우리는 즉시 회의에 착수했다. 물론 회의에 참석한 건 내가 아니고 압실론이었다. 눈 가리고 아웅이긴 해도 나는 아직까지는 체자레의 시종이자 일반 병사였으니까.
천막도 없어 회의는 망토를 대충 두른 사각지대 안에서 진행되었다. 나는 때때로 바람을 맞아 흔들리는 망토를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약식으로 진행되어서 회의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도록 하지.”
루드비히의 말을 마지막으로 회의가 끝났다. 제일 먼저 망토를 걷고 나온 건 압실론이었다. 압실론이 건조한 시선으로 주위를 훑다 나를 발견했다. 꽃같이 웃으며 달려오는 압실론의 모습에 회의가 잘 끝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안.”
압실론이 나를 부르며 달려왔다. 그에게 이현이 아니라 이안이라 부를 머리가 있어 다행이었다. 나는 주변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안으려는 압실론을 피해 옆으로 한 걸음 옮겼다. 시무룩해하는 압실론을 보며 피식 웃고 있는데 내 앞으로 그림자가 졌다.
“…….”
회의장에서 막 나온 마티어스가 내 앞에 서서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었다. 마티어스 역시 회의에 참여했고, 나는 회의장 주변에서 서성거리고 있었기에 당연히 마주칠 거라 생각했다. 나름대로 대비책도 생각해 놨었는데, 싸늘한 시선을 마주하자 포식자 앞에 선 것처럼 온몸이 얼어붙었다.
마티어스는 아무 말도 없이 그대로 나를 지나쳐 갔다. 나는 마티어스가 떠난 자리에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들었구나.
내가 이현이라는 거, 들었어.
죽이네 살리네 화를 낼 줄 알았기에 이런 반응은 예상치 못했다. 나는 당황해 눈을 깜빡거리다 자리에 푹 주저앉았다.
“이안, 괜찮아? 얼굴이 창백해…….”
압실론이 옆에 쪼그려 앉아 내 어깨를 토닥였다. 누군가가 심장 깊숙한 곳에 핀을 찔러 넣은 것처럼 아팠다. 바다 깊숙한 곳에 들어온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압실론이 보기 드물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괜찮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애써 웃어 보였다. 여전히 체한 것처럼 명치께가 쓰렸다.
“힘들면 좀 쉬어. 괜찮으니까.”
“……아냐. 오늘 할 일도 많을 텐데. 내가 꺼낸 일인데 놀면 안 되지. 뭐부터 하면 돼?”
“일단 나무를 좀 베기로 했어. 사람 모형을 만들어 두려고. 그리고…….”
압실론이 내 옆을 따라 걸으며 조잘댔다. 나는 심장 부근을 문지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왜 이렇게 아픈 거지. 뭔가 잘못된 걸까. 처음 겪어 보는 생소한 통증에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살갗에 닿는 바람이 유난히 차게 느껴졌다.
* * *
회의가 끝난 뒤 우리는 두 개의 조로 나뉘었다.
첫 번째 조는 나무와 풀, 허름한 옷감을 이용해 허수아비를 만들고 야영지 주변에 구덩이를 파는 게 주된 임무였다. 허수아비는 완성품이라고 하기엔 상당히 조악한 모습을 하고 있어 사람이었다면 속이기 어려웠겠지만, 고블린 정도면 훌륭하게 속여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들은 허수아비들과 함께 몸을 숨기고 있다가 함정 위로 올라오는 고블린을 처치하기로 했다.
두 번째 조는 고블린 주거지 근처에서 잠복하고 있다가 고블린들이 우리 야영지로 가면 그때 고블린 마을을 털기로 했다. 이게 내가 생각한 ‘빈집 털이’였다.
루드비히와 체자레는 첫 번째 조였고, 마티어스와 압실론, 나는 두 번째 조에 속해 있었다. 하필이면……. 나는 마티어스가 나와 같은 조라는 걸 알고 조를 바꿔 달라고 하지 않을까 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나무에 앉아 고블린 주거지를 내려다보며 애꿎은 입술만 물어뜯었다.
“아.”
입술에서 따끔한 감각이 느껴진다 싶더니 이내 찝찔한 피 맛이 느껴졌다. 손등으로 입술을 문지르자 손등에 옅은 핏물이 묻어났다. 마티어스와 입 맞추었던 게 아주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괜스레 입술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옆 나무에 있던 기사가 수신호를 보냈다. 밑을 내려다보니 준비를 끝낸 고블린들이 하나둘씩 거주지를 떠나가고 있었다.
“키익, 사냥한다, 인간!”
자신들의 미래도 모른 채 고블린들은 인간 사냥의 꿈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압실론이 마법 전서응을 날렸다. 하늘을 향해 쏘아진 빛이 매 형태로 바뀌더니,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르자마자 투명해져 하늘에 녹아들었다.
고블린이 완전히 사라진 뒤 기사가 밑을 가리키는 수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에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나무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주거지 주변을 원형으로 둘러싸고 서서히 전진하며 포위망을 좁혀 갔다. 고블린들은 자신들이 뒤를 밟혔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최소한의 보초조차 없이 전투 인원이 전부 빠져나간 주거지에는 늙거나 어린 고블린 몇 마리만이 남아있었다.
“키이익, 키익!”
아직 말조차 배우지 못한 어린 고블린이 내 쪽으로 내달렸다. 나는 가볍게 고블린을 붙잡았다.
“키이익!”
내 손아귀에 잡힌 고블린이 공중에 떠 버둥거렸다. 고블린은 중형견 정도의 크기였는데, 팔다리가 얇아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내려가기 위해 발악하는 고블린을 착잡하게 바라보았다. 처리하려 검을 들자 고블린이 자신의 미래를 직감했는지 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방울방울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니, 이 눈 크기에 눈물은 반칙이지.
나는 눈썹을 찌푸리며 침음을 삼켰다. 어차피 던전이 클리어되면 그 안의 몬스터들은 전부 소멸된다. 그러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래, 예전이라면……. 망설이는 나를 보며 내 옆에 있던 압실론이 물었다.
“내가, 처리할까?”
“……아니야. 내가 할게.”
그러나 나는 말과는 다르게 시간이 지나도 고블린을 처리하지 못했다. 병사들이 힐끔힐끔 나를 바라보았다.
대체 왜 못 해치우는 거지? 내가 생각해도 내가 한심했다.
“으앗!”
내게 잡혀 있던 고블린이 내 손을 콱 물었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손에서 힘이 빠지자, 그 틈을 노려 아귀에서 빠져나간 고블린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한 마리라도 도망치는 순간 평화로운 빈집 털이는 끝장이었다. 괜히 주거지를 원형으로 둘러싸고 좁혀 갔던 게 아니었다.
신중하게 한 마리 한 마리 처리해야 했는데.
순간의 망설임으로 큰 피해를 야기하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나의 우둔함을 탓하며 검을 뽑은 채 도망치는 고블린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러나 압실론이 조금 더 빨랐다.
“키에에엑!”
압실론이 고블린을 향해 아티팩트를 던졌다. 펑! 아티팩트가 깨지는 것과 동시에 촘촘한 그물망이 고블린을 둘러쌌다. 당황한 고블린이 빠져나오려 몸을 뒤틀었지만 그럴수록 그물은 더 죄어들었다.
“고마워.”
“어디 가? 저 그물 끊어질 일 없어.”
“……처리해야지.”
압실론이 어린 고블린 쪽으로 향하는 나를 붙잡았다. 나는 당황해 압실론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하지 마. 그러고 싶지 않잖아.”
압실론은 정말 의외의 말을 꺼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는 녀석이었나.
“키에엑! 키엑!”
“그래도…… 해야지. 시끄럽잖아.”
어린 고블린의 목소리는 변성기가 오지 않은 소년처럼 높고 카랑카랑했다. 숲이 떠나가라 울어 대는 고블린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압실론이 어린 고블린 쪽으로 손을 내리그었다. 고블린 주위로 유백색의 둥근 막이 쳐지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이러면, 됐지?”
“……왜 이렇게까지 해?”
처리라는 간단한 방법을 두고 압실론은 두 번이나 번거로운 일을 행했다. 아티팩트와 차단 마법. 특히나 아티팩트는 공격력이 낮은 어린 고블린에게 쓰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고가였다. 물론 그 사실이 압실론에겐 별로 중요하지 않겠지만.
“뭔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뭐가? 저 고블린이?”
압실론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아니, 이 상황이.”
“……?”
“이안이 지키고 싶은 걸, 나도 지켜 주고 싶었을 뿐이야.”
압실론이 영문 모를 소리를 하며 씩 웃었다. 무슨 소린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압실론이 갑자기 내 손을 쥐고 들어 올렸다.
“피 나네.”
“아, 그렇네.”
새끼여도 몬스터는 몬스터인지 물린 곳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압실론이 내 손등을 쥔 채 새끼 고블린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너무나도 살벌해 나를 향한 것이 아님에도 오금이 저렸다. 새끼 고블린 역시 그 시선을 눈치챘는지 반항을 멈추고 몸을 떨기 시작했다.
“저기, 지켜 주기로 한 거 맞지.”
“다음에 지키면, 안 될까?”
너무나도 결정을 번복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나는 난감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 시간 많이 지체됐어. 계획했던 일 하러 가야지.”
“……알았어.”
압실론이 시무룩해하며 내 손 위를 쓰다듬었다. 푸르스름한 마나가 스미나 싶더니 순식간에 피가 멎고 상처가 아물었다.
그사이 고블린들은 거의 다 처리가 되어 있었다. 거주지에 남아 있던 고블린이 겨우 열 마리 남짓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는 거주지 곳곳을 신나게 털었다. 식량과 천, 가죽, 무기, 갑옷 등 보이는 대로 쓸다 보니 배급받은 자루가 묵직해졌다. 거주지 중앙에 물건을 쏟아 놓고 있는데 압실론이 내게 말했다.
“계획, 성공적으로 끝났대.”
“정말? 다행이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압실론도 기쁜 듯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응. 정리하고 이쪽으로 온다고 했어.”
“우리도 빨리 정리해야겠네. 저 집 털었어?”
나는 가까운 움막을 가리키며 말했다. 압실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저긴 털었어.”
“그럼 저긴?”
나는 외진 곳에 위치한 움막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긴 아직일걸.”
“그럼 내가 저기 털고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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