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공들이 미쳤는데 로그아웃이 안 된다니요-118화 (118/149)

#118

“무슨 경험이었는데?”

“이안이, 여기 있었어.”

“이현?”

“아니, 이현 말고 이안. 나랑 똑같이 생겼던 애 말이야.”

“안 똑같아. 하나도.”

“하여간, 걔 누군지 알지?”

“응, 알아.”

“걔가 왜 여기 있었을까? 넌 알아?”

“글쎄……. 토벌 참여자는 다 기억하고 있는데, 변신 종족은 없었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

“이현이 넘었던 검색대, 있잖아. 마법을 포함해서, 변신 종족의 변신도 풀리게 해 놨거든. 물론 이현은, 제외하고.”

소름이 쭉 끼쳤다. 만약 압실론을 만나지 않은 채로 토벌대에 지원했다면…… 바로 들켰겠네.

“아, 그런데…… 환상이었을 수도 있긴 해. 걔가 나한테 달려왔었는데 달려온 자리에 풀 밟은 자국이나 그런 게 전혀 없었거든.”

내 말에 압실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왜 그래?”

“……어?”

“왜 그러냐니까?”

“으음……. 귀, 신일까 봐.”

“너 그런 거 안 무서워하잖아?”

“지은 죄가, 많아지니까, 좀 무서워졌어.”

아하. 폭군이 괜히 불면증에 시달리는 게 아니라니까.

“그래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하는 거란다, 압실론아.”

“그래도 원하는 게 있으면, 어쩔 수 없잖아?”

더없이 순하고 착한 미소를 지으며 압실론이 말했다.

“…….”

그게 너와 나의 차이겠지. 압실론을 보면 순수 악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벌레의 팔다리를 떼는 어린아이 같달까.

정말 환상이었나 생각하고 있는데, 뒤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나와 압실론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

마티어스가 내 바로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우리를 응시했다. 서늘하고 건조한 시선이었다. 심장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들었나.

들켰나.

“마티어스, 무슨 일이야.”

압실론이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나는, 나로서는…… 대수였다. 언제 온 거지. 어디서부터 들은 거지. 들킨 건가? 그러나 마티어스는 마치 몽유병에 걸린 환자처럼 우리의 곁을 지나쳤다. 환자라기엔 몸짓에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있긴 했지만.

“…….”

나는 마티어스가 저 멀리 숲으로 사라진 후에야 숨을 쉴 수 있겠다.

“드, 들었을까?”

“들었을 수도, 있지.”

압실론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지 일 아니라 이거지.

“아…….”

“걱정하지 마. 내가 지켜 줄게, 이현. 내 옆에만 붙어 있어.”

내가 이마를 문지르며 난감해하자 압실론이 냉큼 나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거 참 안심이 되긴 한다만……. 죽을 일도 없겠긴 하다만…….

“아으.”

나는 답답한 마음에 압실론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압실론이 그런 내 행동을 얌전히 받아들였다. 묘하게 순종적인 태도가 사람을 열받게 했다.

“이현, 이제 돌아가자. 밤이 늦었어.”

“……알았어.”

압실론의 이어진 재촉에 나는 겨우 걸음을 옮겼다. 나는 돌아가는 길에도 계속 초조함에 손톱을 짓씹었다. 조금 전 마티어스의 표정이 어땠더라. 정말 눈치챘을까. 아니면 모를지도 몰라. 감은 좋아도 그런 데에는 좀 둔한 녀석이니…….

“으앗!”

“조심해야지.”

마티어스에게 계속 정신이 팔려 있느라 바닥이 푹 꺼진 걸 보지 못했다. 넘어지기 직전 압실론이 나를 안듯이 잡아 주었다.

“고, 고마워.”

압실론이 보기 드물게 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내 허리와 엉덩이를 받쳐 들었다.

“뭐 해? 내려 줘도 돼, 이제.”

“생각할 거 많잖아. 그냥 편하게, 생각해. 내가 안고 갈게.”

“돼, 됐어……. 이제 생각 그만하고 걸어갈게.”

“생각은 원래 어느 정도 결론 날 때까지 해야, 멈출 수 있잖아. 괜찮아. 여기 길 어둡고 험해서, 안고 가는 게 나아.”

압실론이 드물게 공감한다는 듯 말했다. 하긴, 얘도 한번 상념에 빠지면 주위가 안 보여서 여기저기 부딪치고 넘어지고 다니지.

압실론에게 안겨 있는 게 생각보다 편하긴 해서, 나는 미약한 반항을 거두고 얌전히 그의 품에 편안하게 자리 잡았다. 예전엔 이것보다 좀 불편했던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키도 품도 커졌을까. 압실론에게서 나는 희미한 약품 냄새가 신기하게도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약간 주위 상황을 잊을 수 있게 해 준달까.

나는 압실론의 긴 머리칼을 빙글빙글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압실론 얘는 질투도 안 하나. 얘 품에 안겨서 다른 남자 생각하는 건데. 문득 궁금해진 나는 압실론에게 말을 걸었다.

“압실론.”

“응?”

“너 나 좋아해?”

“응.”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즉답이었다.

“얼마나 좋아하는데?”

“…….”

쑥스러움을 참고 물었는데, 압실론에게서는 한동안 답이 없었다.

“왜 답이 없어.”

“고민하고 있어.”

“뭘?”

“얼마나 좋아하는지 말하면…… 나 더 싫어할 것 같아서.”

“그렇게 생각한다면 말을 안 하는 게 맞다고 본다.”

내 말에 압실론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 뺨에 짧게 키스했다. 화들짝 놀라 몸을 떼어 내며 뺨을 만지는데 압실론이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러니까 이유 말 안 하고, 그냥 좋아한다고만 말할래. 좋아해, 이현.”

나는 멍하니 압실론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웃을 줄도 아는 녀석이었나. 내게 뺨을 비비는 압실론을 보며 깨달았다. 나는 마티어스가 나를 죽일 것 같아서 정체를 들키는 게 무서운 게 아니었다.

나는…… 그가 나를 미워할까 봐 두려웠다.

미워하고 미워해서, 싫어하게 될까 봐. 나를 보지 않으려 할까 봐.

“하…….”

“왜 그래, 이현?”

“아무것도 아니야.”

아이러니하게도 그 순간 루드비히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네가 나를 다시, 미워하는 시선으로 바라볼까 봐…….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너만 곁에 둘 수 있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나를 혐오하는 게, 사실은 조금…… 힘들더군.’

그렇게 말했었지.

너는 무슨 심정으로 내게 그 말을 꺼낸 걸까.

처음엔 의아했다. 내가 아주 잔인하고 나쁜 짓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기만 싫어한 것도 아니었는데.

‘네가 나를 위해 만들어 준 유일한 것이었다. 겨우 그런 게 아니었어. 네가 내 곁에 살아 숨 쉬었다는 증거였다.’

꽃반지 좀 부수고…….

‘죽여, 봐, 개새끼야. 그리고 평생 궁, 금해해…….’

혀 좀 씹고…….

‘네가 싫어.’

‘……예상했어.’

‘너희를 혐오해. 전부 죽여 버리고 싶어.’

‘할 수 있다면 해.’

좀 죽이고 싶다고 말하고…….

‘꺼져. 역겨우니까.’

‘……쉬어. 또 오지.’

“…….”

그러고 보니 루드비히한테만 좀 박하게 군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근데 걔가 먼저…… 아, 복잡하네.

나는 착잡한 마음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감정이 좀처럼 정리되지 않았다.

너를 증오하는 사람들이 수백 수천일 때도 눈 하나 깜짝 안 했으면서. 내가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사람은 겪어 보지 못한 일에 대해 공감하기 어렵다고 하던가. 하필 감정이 맞물리는 바람에 루드비히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져 죄책감이 들었다.

“……?”

그때, 압실론이 별안간 손바닥으로 내 입을 막았다. 그가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뭐가, 있어.”

설마 드래곤인가. 나는 잔뜩 긴장해 압실론의 팔을 꽉 쥐었다.

“……키익, 인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모습을 드러낸 건 드래곤이 아니라 고블린이었다. 어린아이만 한 키에 초록색 피부, 마른 팔다리에 비해 불룩 나온 배. 고블린들이 도끼며 이 빠진 단검을 들고 수풀 뒤에 숨어서 우리의 야영지를 보고 있었다. 고블린 세 마리. 압실론은 물론 나도 해치울 수 있는 수였다.

“키익, 해치운다.”

“기다려, 키익.”

개중에서 가장 키가 큰 고블린이 금방이라도 무기를 들고 달려 나가려는 둘을 제지했다.

“인간, 많다. 우리는, 적다. 친구, 더 데려온다.”

“키익, 알았다.”

제법 납득 가는 말이었는지 고블린들이 순순히 그 말을 따랐다. 고블린들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는 걸 보니 특별히 지능이 높은 개체들은 아닌 모양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어떻게, 할까?”

압실론이 검 손잡이를 쥔 채 말했다. 그들이 사라지기 전에 처리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추적하자.”

내 말에 압실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조용히 고블린들을 뒤따르기 시작했다.

* * *

우리는 얼마 가지 않아 고블린 거주지에 도착했다. 압실론과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변의 키 큰 나무 위로 올라갔다.

고블린들은 얼기설기 지어 놓은 움막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그 규모가 대략 300마리 정도로 추정되었다. 조금 전 우리의 야영지를 발견한 고블린들이 다른 고블린들에게 열심히 무언가를 알리고 있었다. 멀어서 잘 들리진 않았지만 우리 얘기를 하고 있는 건 확실했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300마리면 해치우지 못할 숫자는 아니었으나, 우리 쪽의 희생도 불가피했다. 마법 사용을 지양해야 하는 데다 그 산사태에서 빠져나오려고 무기며 방어구를 많이 두고 나왔기 때문에 더 그랬다.

잠깐, 무기?

나는 눈매를 가늘게 뜨고 고블린들이 입은 갑옷과 검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거, 될 수도 있겠는데. 나는 보라는 고블린은 안 보고 내 옆자리에 앉아 나만 보고 있는 압실론을 툭 건드렸다.

“압실론.”

“으응?”

“빈집 털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내 말 한마디에 모든 걸 이해한 압실론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이현이랑 함께라면, 뭐든 좋아.”

낯간지러운 소리를 잘도 하네. 나는 씩 웃으며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웃었다.

“돌아가자. 오늘은 바쁘겠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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