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공들이 미쳤는데 로그아웃이 안 된다니요-116화 (116/149)

#116

둘 다 이미 부상을 입었기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전이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둘 다 어느 정도 독에 내성이 있어 다행이었다. 독에 내성이 강해 상대적으로 금방 일어난 체자레와는 달리, 눈동자 안에 있었던 독성이 루드비히의 상태를 악화시켰다. 그리고 그 독은 여전히 루드비히의 몸 안을 떠돌고 있을 터였다.

가슴에 시커멓고 뜨거운 것이 뭉쳐 아렸다. 나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루드비히가 손을 뻗어 나를 끌어안았다. 품속에서는 먼지와 불 냄새가 났다.

“나는 괜찮다.”

“…….”

“그러니 울지 마.”

항상 서늘했던 루드비히의 품이 더웠다. 나를 구하기 위해 뛰어왔기 때문인 듯했다. 자기 몸이 더 만신창이면서. 죄책감이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눈물이 저항 없이 흘러내렸다.

“왜 그랬어…….”

이미 생긴 흉터는 어떤 고위 마법으로도 되돌릴 수 없었다. 잃은 시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눈동자가 초점을 찾을 날도, 보라색으로 돌아올 날도 이젠 없었다.

“그래야 마땅하니까.”

나를 안고 토닥이는 손길이 여전히 뜨거워 더 서러웠다. 마땅하긴 뭐가 마땅해. 나는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그만인데. 여기서 입은 상처 같은 건 하나도 안 가지고 돌아갈 수 있는데. 너는 여기서 평생 살아가야 하잖아. 죽을 때까지 안고 살아가야 하잖아.

“그만 울어. 눈이 짓무른다.”

“……언제부터 알았어.”

모를 수가 없었다. 루드비히는 분명 내가 이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안과 루드비히 사이에는 서사가 없었다. 희생할 이유도 없었다. 결정적으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어 있었다. 그립고 사랑스러운, 예전의 나를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나 역시, 모를 수가 없었다.

눈물에 젖은 내 머리칼을 쓸어내리던 루드비히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얼마 안 됐어.”

“어, 어떻게…….”

등신같이 목소리가 자꾸 먹혔다. 나는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심호흡을 했지만, 잘 안 됐다.

“이렇게 사사건건 거슬리면서도 속을 시끄럽게 하는 상대가 둘 있을 리 없으니까.”

“그런데 왜 모르는 척했어…….”

내 말에 루드비히가 눈을 슬쩍 찌푸리며 입꼬리를 당겼다. 루드비히가 내 뺨을 손끝으로 쓸며 입술을 달싹였다.

“네가 나를 다시, 미워하는 시선으로 바라볼까 봐…….”

씁쓸하고 외로운 미소를 지으며 루드비히가 말을 이어 나갔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너만 곁에 둘 수 있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

“네가 나를 혐오하는 게, 사실은 조금…… 힘들더군.”

참아 왔던 게 무색하게 나는 다시 눈물을 터트렸다. 루드비히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눈물을 훔쳐 냈다.

나는 이제 너를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도 없게 되었는데.

가짜 목숨과 육신을 걸고 그들을 구하던 과거가 있었다. 그들이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나를 구했던 때도 있었다. 그때는 그 소중함을 몰랐다.

눈물을 쏟아 낸 시야가 흐릿했다. 그 시야 속 내가 동경했던 루드비히의 근사한 모습은 사라지고, 내게 모든 걸 걸고 초라해진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때때로 흐릿해야 선명해지는 것도 있다는 걸, 나는 지금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빛을 내 왔던 진심이 이제야 내게 닿았다. 내 앞의 사람을 토대로 세상이 다시 재조립되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나를 감쌌다. 말라붙은 뺨 위로 뜨겁고 건조한 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나는 그것이 어쩐지 바깥세상의 바람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띠링. 비몽사몽간에 들린 효과음에 눈을 뜨자마자 별이 쏟아질 듯한 하늘이 보였다.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나는 눈을 끔뻑이다 이내 천막을 분실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화를 끝낸 뒤 나는 루드비히를 부축해 압실론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압실론은 루드비히의 독을 해독해 주었지만, 역시나 눈은 고치지 못했다. 울 것 같은 내 표정을 보며 루드비히는 예상했다고,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별로 괜찮지가 않았다.

우리가 동굴에 있었던 새 압실론과 마티어스는 반란을 완전히 수습해 놓았다. 그러나 반란은 깊은 상흔을 남겼다. 반란을 시도한 이들이 동귀어진을 시도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좁은 곳에서 반란자들과 함께 가고일 떼의 공격을 받은 데다가, 반란자들이 고의적으로 산사태를 일으켰기에 남은 인원은 1/5도 되지 않았다. 병사들 대부분이 이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을 거라 생각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전체적인 분위기가 몹시 침체되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압실론과 남은 마법사들이 종일 부상병들을 치료한 덕분에 다음 날이면 다시 행군을 시작할 수 있다는 거였다.

병사들의 휴식과 마법사들의 고갈된 마나를 채우기 위해 우리는 적당한 장소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비교적 멀쩡했던 나는 이리저리 불려 다녔다. 머리가 복잡해 바쁜 게 오히려 반가웠다. 그러나 피곤한 건 피곤한 거라 나는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가물가물한 시야에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왼쪽 상단에 무언가가 반짝이고 있었다. 저게 뭐지. 뻗은 손이 허공을 갈랐다. 나는 그 빛의 정체가 대화 창 알림 표시라는 걸 알았다. 나는 망설임 없이 몸을 일으켰다.

한밤중이라 불침번을 제외하고 대부분 잠들어 있었다. 나는 불침번에게 눈짓을 하고 숲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화장실에 가는 거라 생각했는지 불침번은 내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숲에 들어온 나는 나무 위로 올라와 대화 창을 켰다.

[나: 계세요?]

[GM: 네. 무슨 일이세요?]

나는 가상 키보드를 띄운 뒤 나무에 몸을 기대고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나: 저 던전 잘 들어왔고, 드래곤 토벌도 곧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GM: 그거 잘됐네요. 혹시 필요하신 거라도 있나요?]

뜻밖의 호의적인 말에 나는 필요한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필요한 거야 많지. 캐시랑, 던전 지도랑, 주변에 어떤 몬스터가 있는지에 대한 정보들.

나는 GM과 길게 대화를 나누었다. 생각보다 쓸모 있는 정보들이 많았다. 우리가 있는 곳과 드래곤의 둥지가 생각보다 가깝다는 것, 드래곤은 블루 드래곤이며 빙결 마법을 쓴다는 것, 드래곤의 레벨과 주요 스킬, 약점들. 공략법을 인터넷에서 한 차례 찾아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물론 정보를 듣는 것과 실전을 치르는 건 큰 차이가 있겠지만, 모르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GM: 또 궁금한 건 없으신가요?]

없다고 입력했던 나는 화면을 가만히 노려보다 이내 그것을 지웠다. 그리고 새로운 문장을 치기 시작했다.

[나: 심각 님.]

[GM: 네?]

[나: 압실론이랑 무슨 거래 했어요?]

[GM: ……그건 말 못 해요.]

[나: 말 못 한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비밀이라는 걸까, 말을 못 한다는 뜻인 걸까. 후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GM: 그냥, 말 그대로 말을 못 한다는 뜻이죠.]

역시나. 나는 오랫동안 생각해 왔던 추리를 심각에게 꺼냈다.

[나: 혹시 압실론이 밖으로 나오게 되나요?]

[GM: 노 코멘트 하겠습니다.]

심각이 오랫동안 말이 없다가 답했다. 그 나름대로 정답을 알려 준 셈이었다. 이 답변으로 하여금 나는 두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압실론은 이 대화 창을 볼 수 있다.

내가 로그아웃한 뒤 압실론은 밖으로 나올 확률이 높다.

두 번째 가설은 이 세계에 나를 가둬 놓으려 안간힘을 쓰던 녀석이 갑자기 내 편이라고 맹세했을 때부터 생각했던 거였다.

게임 속 AI를 현실 세계로 빼내는 건 드물긴 하지만 종종 있는 일이었다. 드문 이유는 일단 커스텀 휴머노이드의 가격과 관리비가 일반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높기도 하고, AI에 비해 휴머노이드는 여러모로 제약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세계로 옮겨지는 거다 보니 공격성이 다소 거세된다거나, 사고에도 어느 정도 제한이 있게 설계되었다. 쉽게 설명하자면 19세 이용가 게임에 걸맞은 성격을 가졌던 AI도 휴머노이드가 되면 17세 이용가 정도로 조정된다고 보면 됐다. 이외에도 법률에 따라 미묘한 조정이 이루어졌다.

AI에게 애정을 가지고 바깥에서도 함께하기 위해 휴머노이드를 주문한 사람들은 이러한 조정에 큰 반발심을 느꼈다. 함께 신혼여행을 갔다가 내가 사랑하던 상대가 아니라며 휴머노이드를 버리고 혼자 돌아와 버린 남자가 뉴스에 나온 적도 있었다. 나는 때때로 그 휴머노이드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소년들은 어른이 된다>를 낸 회사의 모회사인 WZ소프트는 게임도 하지만 휴머노이드 관련 사업도 크게 하고 있었다. 게임에서 사용자의 보이스와 행동을 수집해 휴머노이드 개발에 사용한 것 때문에 대국민 사과를 했던 때도 있었을 만큼 휴머노이드 사업에 진심이었다. 준법과 불법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하며 WZ소프트의 휴머노이드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WZ소프트의 게임 행사에서는 게임 메인 캐릭터들 휴머노이드가 게임 복장을 입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나는 내 로그아웃을 돕는 대가로 심각이 압실론에게 휴머노이드의 신체를 제공하기로 한 게 아닐까 생각해 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그것은 점차 확신으로 바뀌었다. 묘하게 초연한 태도. 셋과 거리를 두는 듯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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